문희갑

문희갑의 역임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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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 총동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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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5대

제6대

이옥영
경제 1회

진원
경제 1회

김진옥
정치 1회

이호상
정치 2회

조기윤
경제 1회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제11대

박영재
경제 2회

신의섭
정치 1회

박영재
경제 2회

황인원
정치 1회

민유동
경제 1회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박창서
법률 1회

조한백
정치 2회

신관섭
경제 1회

이옥영
경제 1회

이명섭
경제 2회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24대

제25대

허성준
법률 3회

손승록
법률 4회

안갑준
경제 6회

유기정
경제 4회

강용순
법률 4회

제26대

제27-28대

제29-31대

제32-33대

제34대

심상은
경제 11회

이기태
정치 13회

문희갑
법률 14회

장영달
행정 39회

고재일
경제 16회

제35-37대

제38대

윤종웅
경제 24회

박해진
토목 3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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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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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border:0px solid; margin:-12px; margin-top:-2px; margin-bottom:0px"

1대
정채진

2대
이상희

3대
이상연

4대
박배근

5대
박성달

6대
이해봉

7대
한명환

8대
이의익

9대
조해녕

10대
이종주

11-12대
문희갑

13대
조해녕

14-15대
김범일

16-17대
권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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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의원 (대구 서구 갑)

제13대
정호용[1]

제13대
문희갑

제14대
정호용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노태우 정부

초대
박승

2대
문희상

3대
김종인

대한민국 경제기획원 차관

전두환 정부

노태우 정부

15대
김흥기

16대
문희갑

17대
이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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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대 대구광역시장
문희갑

이름

문희갑(文熹甲)

출생일

1937년 6월 9일 (82세)

출생지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

본관

남평 문씨

학력

경북고등학교 (졸업)
국민대학교 (법학 / 학사)
서울대학교 (행정학 / 석사)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12, 13

현직

푸른대구가꾸기시민모임 이사장

경력

제5회 행정고시 합격
경제기획원 방위예산담당관
국방부 예산편성국장
국보위 입법회의 전문위원
경제기획원 경제개발예산심의관
경제기획원 예산실장
민주정의당 국책연구원 정책연구실장
제12대 국회의원(전국구)
경제기획원 차관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제13대 국회의원(대구 서구 갑)
제11-12대 대구광역시장
국민대학교 총동문회장

1. 개요
2. 생애
2.1. 대구시장 재임
2.2. 정계 은퇴 이후
3. 선거이력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관료, 정치인.

대구시의 폭염을 낮추는 전환점을 마련한 인물.

2. 생애

1937년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에서 태어났다.[2]

경북고등학교, 국민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이후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경제관료로 근무하였다. 1980년 신군부가 창설한 국가보위입법회의에 참여하였다. 이후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예산실장을 역임하였다.

경제기획원 예산실장 시절인 1984년에는 방위비를 그동안 유지되어온 "GNP 대비 6%"보다[3] 낮게 책정했는데, 이에 합참의 육군장성 2명이 권총을 들고 난입해 항의하는 곤욕을 겪기도 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같은 해 7월 경제기획원 차관에 임명되어 전국구 국회의원직을 사임하였다. 1986년 남북 경제회담 수석대표에 임명되었다.

1988년 노태우 정권이 출범하자 같은 해 12월부터 1990년 초까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을 역임하였다. 결과적으로 실패는 했지만 토지공개념도 도입하려다, 땅투기에 열올리던 재벌 총수들에게 빨갱이 소리도 들었다.1989년 토지 공개념 3개법안 입법을 주도하여 통과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택지소유상한제, 개발이익환수제, 토지초과이득세 강력한 투기억제책이었는데, 진보진영의 지지를 받았지만 오히려 민정당, 보수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 법안은 10년 뒤에 모두 위헌판결을 받았다. 「택지소유상한제」와 「토지초과이득세」는 지나친 규제라는 이유로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고 1998년 폐지됐다. 「개발이익환수제」는 2002년 1월부터 부과를 중지했다. 수도권에 대한 부담금 부과는 2004년부터 중지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학자들로부터 토지공개념 정책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분당, 일산 등 5개 수도권 신도시 건설을 주도하여 부동산 폭등 억제정책을 주도하였으며 무주택 서민들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 도시에 영구임대주택 20만 호 건설도 추진하였다.

영종도에 동북아 허브공항을 건설하는 계획을 수립하여 이것이 오늘의 인천국제공항의 기원이다. 경부고속철도 건설을 주도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KTX의 기원이다.

1990년 초, 5.18 민주화운동 관련 여론과 청와대의 압력으로 민주정의당 정호용 국회의원이 사퇴하자 치러진 대구직할시 서구 갑 선거구의 재보궐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꼬마민주당 백승홍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하지만 이때 과반에 못미치는 득표율로 당선되었기 때문에 3당 합당의 시너지 효과조차 거두지 못한 찜찜한 의정복귀라는 평을 들어야 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무소속으로 출마한 정호용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재입당한 정호용에게 지구당위원장 자리도 내 주게 되자 이에 대한 반발로 1995년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였다.

2.1. 대구시장 재임

민주자유당을 탈당했던 1995년에 치러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대구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였는데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로 TK지역에서 김영삼 정부에 대한 반감이 거세진 상황인지라 민주자유당 조해녕 후보 등을 꺾고 당선되었다.

다만 우파후보였기 때문에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회창을 지지하여 한나라당에 입당하였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대체적으로 무난하게 시장 직무를 수행했으나, 2002년 비자금 파동 등이 불거지며 2002년 3월 곧 있을 지방선거에 출마하지 않을 것을 선언했다.

결국 시장 임기 말엽인 2002년 5월, 지역 건설사인 태왕그룹으로부터 9천여만원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5월 말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10월 23일 대구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2심에서 집행유예로 감형되며 출소는 했으나 형 확정일로부터 피선거권이 10년간 제한됨에 따라 이로써 정치적 생명은 완전히 끝났다.

2.2. 정계 은퇴 이후

정계 은퇴 후에도 대구에서 살고 있다.

2015년 40대 이상 대구시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가운데 역대 대구 민선시장 중 일을 잘한 시장 1위에 꼽혔다. 37.6%의 지지도를 받아서 2위인 김범일 시장(19.6%)보다 2배가량 지지도가 나왔다. 링크

그래서인지, 정계 은퇴 후, 정당과 지역구를 가리지 않고 러브콜을 받고 있다.문희갑 전 시장 모시기 러브콜 쇄도-2015년12월29일 대구일보 기사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2016년 1월 15일,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선거사무실을 찾아 덕담을 건네기도 하였다. 김부겸 선거사무실 찾은 문희갑 前 대구시장

대구의 폭염을 조금이라도 낮추고자 대대적인 녹화사업을 실시한 주인공으로, 재임기간 동안 600만 그루가 넘는 나무를 대구에 심었다. 또한 후임 대구 시장들도 나무심기 사업을 전개한 덕분에, 2000년대 중반부터는 전국 최서지역에서 벗어났으며[4], 정계에서 은퇴한 지금도 푸른대구[5]가꾸기시민모임 이사장을 맡고 있다.

3. 선거이력

  •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53번)

민주정의당

-

당선

초선

1990

1990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대구 서 갑)[6]

민주자유당

41,970 (49.6%)

당선 (1위)

재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서 갑)

민주자유당

26,763 (27.30%)

낙선 (2위)

1995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대구광역시장)

무소속

383,272 (36.79%)

당선 (1위)

초선[7]

1998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대구광역시장)

한나라당

570,167 (71.98%)

당선 (1위)

재선


  1. [1] 5.18 청문회로 인한 여론악화로 자진 사퇴
  2. [2] 본리리에 있는 남평 문씨 본리 세거지 출신이다.
  3. [3] 일본 <세카이(世界)>誌 야스에 료스케 편집국장이 자신의 칼럼에 "GNP 6% 이상을 책정하면 국가 살림이 거덜나는 건 시간문제"라는 표현을 넣기도 했을 만큼, GNP 기준 시절 국방예산 책정의 상한선으로 간주되었다.
  4. [4] 광주가 대구보다 여름에 더운 것으로 집계되기도 한다. 때문에 박광태 광주 시장이 대구처럼 나무심기 사업에 나서기도 하였다.
  5. [5] '푸른 대구 밝은 미래, 세계 속의 패션 대구'가 문 시장 시정의 서브슬로건이기도 했다.
  6. [6] 전임자 정호용 의원직 사퇴
  7. [7] 1997.12.3 한나라당 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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