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완

영광의 현역시절.

2013년 10월 23일 SK 와이번스 2군 감독으로서 첫 훈련을 지켜보는 모습.

이제는 SK의 배터리 코치!

SK 와이번스 No.80 [1]

박경완(朴勍完 / Kyung-oan Park)#

생년월일

1972년 7월 11일 (45세)

출신지

전라북도 전주시

학력

전주중앙초 - 전주동중 - 전주고

포지션

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1년 신고선수 입단 (쌍방울)

소속팀

쌍방울 레이더스 (1991~1997)
현대 유니콘스 (1998~2002)
SK 와이번스 (2003~2013)

지도자

SK 와이번스 2군 감독 (2014)
SK 와이번스 1군 배터리코치 (2016~현재)

프런트

SK 와이번스 육성총괄 (2015)[2]
SK 와이번스 전력분석원 (2015)

등장곡

자전거 탄 풍경 - 너에게 난 나에게 넌

응원가

소명 - 유쾌상쾌통쾌[3]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8

2000

2007

2008

2010

수상 기록

1996, 1998, 2000, 2007년 한국프로야구 골든글러브 포수 부문

2000년 한국프로야구 MVP

2000, 2004년 한국프로야구 홈런왕

보유 기록

4연타석 홈런[4]

2000년 5월 19일 대전 한화전

통산 최다 피삼진

1605삼진

SK 와이번스 영구결번

No.26

SK 와이번스 등번호 26번

양용모(2000~2002)

박경완(2003~2013)

영구결번

SK 와이번스 역대 주장

김원형
(2007~2008)[5]

박경완
(2009)

김재현
(2010)

1. 소개
2. 선수 경력
2.3.1. 2003 시즌~2008 시즌
2.3.2. 2009 시즌
2.3.3. 2010 시즌
2.3.4. 2011 시즌
2.3.5. 2012 시즌
2.3.6. 2013 시즌
3. 지도자 경력
3.1.1. 은퇴식
3.2. SK 와이번스 육성총괄
3.3. SK 와이번스 배터리 코치
4. 김원형과의 관계
5. 기록
6. 연도별 주요 성적
7. 이야깃거리

1. 소개

70퍼센트의 몸 컨디션으로도 100퍼센트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게 프로다. - 은퇴식이 있던날 인터뷰 중에서.##

장종훈을 잇는 또 다른 연습생 신화

이만수, 김동수와 더불어 한국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포수 중 한 명

인천 야구 최초의 영구결번[6]

포도대장

쌍방울 레이더스,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 소속의 야구 선수. 現 SK 와이번스의 1군 배터리 코치. 포수라는 포지션상 화려하진 않지만 끊임없는 노력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포수가 되었다.

다만 대한민국 최고의 포수라는 칭호에 관해서는 이만수와의 우열이 지금까지도 팬들 사이에서 훌륭한 키배 소재가 될 정도로 뜨거운 감자. 최고의 포수로서 이만수를 고르는 쪽은 주로 압도적인 타격 스텟을 근거로 내세우고, 박경완을 고르는 쪽은 포수 리드와 수비적인 면을 내세우는데, 포수 리드는 세이버매트릭스에서는 거의 사장된 개념이며, 수비지표에서도 둘은 차이가 거의 없다. 반면 타격지표로 넘어가면 wrc+에서 이만수가 159, 박경완이 122로 그 차이가 매우 커진다. 하지만 이들이 활약한 시기가 10년씩이나 차이가 나니, 프로야구 초창기 최고의 포수였던 이만수, 90년대 초중반에 최고였던 김동수, 90년대 후반부터 00년대 초반까지 최고였던 박경완, 그리고 00년대 후반부터 포수 1인자로 올라선 강민호를 엮어 KBO 4대포수라고 칭하기도 한다.

1991년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신고선수[7] 데뷔하였다. 장종훈과 마찬가지로 연습생으로 시작해서 프로 정상급의 선수가 된 케이스. 이후 1997년 9억 원이라는 당시 최고의 거금에 현대 유니콘스로 현금 트레이드되었고, FA를 선언하여 2003년에 SK로 이적한 후 SK 와이번스에서 선수 생활을 마쳤다. 현역 최장 시즌(23번째 시즌) 1군 경기 출장 선수이다. 해당 기록은 2016년 현재까지도 경신되지 않았다. 2017년이 되면 이승엽, 임창용 등이 타이 기록을 이룰 수도 있다 [8]

포수로서의 기본기인 블로킹, 포구 능력, 도루 저지를 위한 강견은 물론 장타력까지 모두 정상의 기량을 뽐내던 KBO의 레전드급 포수이다. 현대의 1998, 2000 시즌, 그리고 SK의 2007, 2008, 2010 시즌 우승 주역. 포지션상 도루는 많이 안 노리지만 한시즌 20-20도 달성한 바 있다. 체력소모가 큰 포수에게는 20-20은 엄청나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의 어마어마한 대기록이다. 140년 역사의 MLB에서도 포수 20-20은 오직 단 한 번밖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 사실. 99년 이반 로드리게스가 전대미문의 이 기록을 앞세워 페드로 마르티네즈를 누르고 MVP를 수상하였다. 박경완의 01년 20-20은 이반 로드리게스에 이은 전세계 통툴어 2번째 포수 20-20이며, 당연히 KBO역사에서는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타석에서는 정교함보다는 힘으로 쳐내는 타격을 주로 했던 편으로, 통산 타율은 2할 5푼에 1리가 모자라고, 단 한 번도 3할을 친 시즌이 없으나, 2000년, 2004년 두 번이나 홈런왕을 차지한 적이 있다. 공갈포는 당연히 아니고 타율은 낮지만 출루율과 장타율은 훌륭했던 대표적인 OPS 히터. 통산 .249의 타율로 OPS가 .800이 넘는다. 특히 2000년에는 40개의 홈런을 쏘아올려 포수로는 이만수 이후 처음으로 홈런왕과 시즌 MVP를 따내기도 했다.[9] 그런 만큼 삼진수도 엄청나게 많다. 통산 삼진이 1,605삼진으로 역대 타자 최다 삼진을 기록하고 있다.[10] 하지만 클러치 능력이 꽤나 빼어나서 타점도 적지 않고 적시타도 상당히 많다. 무엇보다 자신의 전성기이던 쌍방울과 현대시절 모두 자신보다 더 뛰어난타자들이 많아서 박경완이 타점을 내고 싶어도 주자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이대호를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첫 타석 볼넷이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박경완의 포수로서의 능력을 보여주는 좋은 예.

2014년 3월 10일 그의 현역 시절 등번호인 26번이 SK 와이번스 구단 역사상 첫 번째 영구결번으로 지정[11] 영구 결번으로 지정된 된다는 발표가 있었으며, 4월 5일 공식 은퇴식과 함께 영구결번식이 진행되었다.

2. 선수 경력

2.1.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12]

포도대장

돌격대의 안방마님

1991년, 전주고를 졸업하고 쌍방울에서 프로로 입단할 당시 포수 능력이나 타격의 정확성이 떨어지는 등 선수로서의 기량이 부족하여 프로에서 통할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다고 한다. 애초에 원광대학교에 입학하려고 했을 정도. 그런데 초등학교 6학년부터 항상 같이 붙어다녔던 영혼의 배터리 김원형이 1991년 쌍방울에 고졸연고지명을 받고 입단할 당시 난 경완이 아니면 공 안뿌릴거임이라고 땡깡(이라기 보단, 최고의 절친에 대한 배려)을 부려 프로에 입단하게 된 에피소드가 있다.[13] 그러나 개요 항목에 서술되어 있듯이 즉시전력감이 아닐 뿐, 아주 못하던 실력은 아니었다. 대학 입학이 예정되어 있었던걸 본인이 김원형과 함께 입단하고 싶은 마음으로 갑자기 바꾸는 바람에 입단테스트를 받고 입단하여 그렇게 된 것이지 어느 프로팀에도 다 지명 안 될 수준의 선수까지는 아니었던 걸로 보인다. 김원형 역시 그의 의도를 알고 그를 입단시켜 달라고 구단측에 호소하였던 것이다.

물론 고졸에 연습생으로 입단하여 연봉은 고작 600만원에 불과했고, 이 탓에 무시를 당한 적도 꽤 있다고 한다. 다른 선수들이 박경완의 사인에 따르지 않기도 하였다고 한다.[14] 그러나 박경완의 은퇴 직후 인터뷰를 보면 쌍방울 내에서의 그 일화는 신고선수 신분이나 연봉 탓 보다는 그 대학입학을 갑자기 거부하고 입단했다는 게 그로 인해 대학을 못 가고 함께 신고선수로 입단한 동기들에 의해 선수단 내에서 나쁜 쪽으로[15] 소문이 나서 왕따를 당한 게 더 컸다고 한다.[16] 그러자 박경완은 실력의 부족함도 있는데 이런 분위기까지 있어서 상황이 좋아질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방위로 군입대를 결심하고, 구단이 만류함에도 그냥 우겨서어릴 때부터 깡 쩐다 이른 나이에 방위로 입대를 강행하는데, 그때부터 방위근무 후 퇴근을 할 때마다 당시 쌍방울 레이더스의 배터리코치였던 조범현에게 지옥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이 훈련은 혹독하였으나 효과적이었어서[17] 실력이 날로 일취월장하게 되고 방위 복무 기간[18]이 끝나기 전에 1군 경기도 조범현의 추천으로 조금이지만 나갈 수 있게 되고 거기서 점점 좋은 모습을 보여 소집해제 후에는 쌍방울의 주전포수가 된다. 앞서 서술한 선수들이 박경완의 리드를 거부했을 때, 조범현 배터리코치가 작정하고 포수 리드를 따르지 않고 멋대로 던지느냐고 일갈하며 하이킥을 날린 일화도 있다. 어찌됐건 좋은 장타력과, 안정된 수비력, 강견을 갖추고 1998년 현대로 트레이드되기 전까지 쌍방울의 주전 안방마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1996년에는 쌍방울의 깜짝 가을 야구 진출과 함께[19] 생애 최초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기도 했다. 쌍방울 시절 김원형과의 에피소드(?)# 밑의 5시 방향 조그만 기사도 둘의 기사다.

2.2. 현대 유니콘스 시절

1999년 7월 21일 개인 통산 100호 홈런을 기록하고 나서.

2000년 정규시즌 MVP 시상식에서. 이 때 수상소감으로 내년 시즌에는 20-20을 달성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2001년 9월 20일, 20-20 클럽을 가입했다.[20]

1998년, 쌍방울의 자금난과 포수를 필요로 하던 현대의 사정이 맞물리면서 이근엽+김형남[21]+9억↔박경완의 트레이드가 이루어지면서 현대 유니콘스로 이적, 타율은 좀 낮았지만(0.250) 생애 첫 세 자리 수 안타와 두 자릿 수 홈런도 치고(19개) 중요할 때마다 타점도 올리며 정민태 등 수준급 투수들과 호흡을 맞추는 등 전천후로 활약을 했다. 그 결과 현대의 창단 첫 우승인 1998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면서 첫 우승 반지도 따내고 개인 통산 두 번째 골든글러브를 받는다.

2000년 5월 19일, 대전 한밭야구장[22]에서 열린 영혼까지 털린 한화 이글스전에서 한국프로야구에서 전무후무한 한 경기 4연타석 홈런을 달성하였다.[23][24] 그 날 현대 유니콘스홈런 10개를 날려 20-2로 승리.(...) 기가 유니콘스포

박경완은 4연타석 홈런을 쳤을 때, 자신이 4연타석 홈런을 쳤다는 것도 모른 채 덕아웃으로 돌아오는데 덕아웃에 있던 모든 선수들이 거의 발광상태고 관중들 함성이 너무 커서 그제야 4연타석 홈런을 친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5연타석 홈런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바로 교체한 김재박 감독에 대해 말이 많았는데, 당시 상황을 기억하던 투수 조웅천의 말로는 상대 팀이 거칠어져서 빈볼이 나올 수도 있기에 선수 보호 차원에서 교체를 했던 거라고 한다.[25] 박경완도 "당시 기록에 대한 욕심은 없었고, 감독의 의견에 따랐다. 그다지 크게 아쉬움은 없었다."라고 말했지만...[26]

결국 2000년 40홈런 95타점으로 홈런왕과 MVP를 수상했다.[27] MVP 수상소감에서 "내년에는 20-20을 해보고 싶다"고 말하자 시상식장에 있던 선수들이 웃었다고 한다. 그냥 한 소리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2001년에는 24홈런-21도루를 기록하여 KBO의 유일무이한 20-20 클럽 포수 가입자가 된다.[28] 2001년을 제외하곤 그 외의 시즌에서 두 자릿수 이상의 도루를 기록한 시즌이 없는 만큼 흠좀무한 기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압도적인 성적에도 불구하고 포수 골든글러브는 그 해 우승한 두산 베어스의 주전포수였던 홍성흔에게 돌아갔다. 2001 시즌 홍성흔과 박경완의 성적 차이가 어마어마했기에 그 당시에도 골든글러브를 뺏겼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 그리고 박경완은 그해 골든글러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골든글러브는 별 의미가 없어요..." 2002년에는 멘도사 라인으로 .203의 타율을 기록한다.[29] 그래도 홈런만은 19개를 찍었다. 그리고 FA로 풀리는데...

2.3. SK 와이번스 시절

2.3.1. 2003 시즌~2008 시즌

2002년 시즌이 끝나고 FA를 선언하여 3년 19억에 SK 와이번스로 이적한다. 선수생활을 시작한 친정팀격인 SK[30]에서 뛰고싶었던 것이 이유중 하나였다.[31] 이때 당시 박경완은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 은사 조범현 감독의 뜻에 따라 이적한 것이었다. 만약, 조범현 감독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그대로 현대에 머물렀을 것."이라고 밝혔다.[32] 근데 2000년대 초반부터 자금난에 시달리던 현대가 과연 박경완을 잡을 수 있었을까

그의 영입은 SK 와이번스가 강팀으로 성장하는 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박경완 영입 전, SK의 포수진은 그리 좋지 못했다. 당시 포수진에는 쌍방울에서 흡수된 양용모, 장재중, 롯데에 있던 강성우, 현대에서 온 장광호, 2001년 1차 지명으로 뽑은 동산고의 정상호, 1년만 잠시 SK에 몸담았던 김동수 등이 있었다.[33] 허나 양용모는 발은 빠르나 포수 수비가 조금 모자라서 외야수로 출장한 기록도 있을 정도로 수비가 불안했고, 정상호는 파릇파릇한 신인인데다 포텐셜 불발. 장재중, 장광호, 김동수는 좋은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이적되거나 방출[34].[35] 그나마 강성우가 수비는 잘했으나, 타격이 정말 안 되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2003년 박경완이 오기까지는 그리 좋은 포수진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2004년에는 SK의 핵심 거포로 활약하며 커리어 2번째 홈런왕을 차지했다. 하지만 2004년 포수 골든글러브는 또 다시 홍성흔이 가져갔다.[36][37] 비인기 팀의 설움

이후로도 꾸준히 활약해 주다가 쌍방울 시절 감독으로 모셨던 김성근 감독이 2007년 SK로 부임한 이후 더더욱 두터운 신뢰를 받게 되었다. 김성근 감독이 웬만한 볼배합은 박경완에게 다 맡긴다고 할 정도로 믿음을 보내기도. 그리고 팀을 2007년 한국시리즈, 2008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해냈다. 골든글러브도 받았다.

2.3.2. 2009 시즌

2009년 시즌 시작 전, 몸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제 2회 WBC에 주전포수로 나가 고생하였다. 왼 손목 부상 상태로 타격에서는 전혀 기대가 되지 않을 정도의 상황. 김인식 감독은 이런 사정을 알고도 뽑았을 정도로 투수진의 안정에 기여하였다. 타격은 신경 안 쓸테니, 수비만이라도 어떻게 좀 해달라고 뽑았다고... 대회에서 유독 큰 스윙으로 일관했었는데, 그게 손목 부상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는 게 그나마 손목 통증이 적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역시 수비력 하나 만큼은 최고였다.

이 때 윤석민과의 호흡이 최강이었는데, 준결승 베네수엘라전에서는 미국 해설자들도 감탄한 볼배합으로 한두달 훈련한 윤석민과의 완벽한 호흡을 보여줬다.[38] 박경완이 기자들 앞에서도 "윤석민이 SK로 오면 내가 20승 만들어준다"라는 발언도 했을 정도다.

2009년 6월 24일 광주 KIA경기에서 주루 중에 왼 아킬레스건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상황을 보자면 9회 초 3:3으로 맞서는 팽팽한 상황에 선두타자로 올라온 박경완이 유격수 쪽 땅볼을 쳤다. 충분히 아웃될 수 있는 상황이라 주루 플레이를 1루 직선 방향으로 전력질주 했지만[39] 유격수 이현곤이 실책을 하는 것을 보고 급격하게 2루 쪽으로 방향을 바꾸다 아킬레스건이 파열한 것이다. 그라운드에 나동그라져 왼쪽 다리를 못쓰는 상황이었으나 남은 오른쪽 다리로 황급히 1루로 되돌아가 베이스에 손을 올려놓은 채 쓰러진 장면은 많은 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당시 기사 결국 시즌 아웃. 한국시리즈에도 못 나왔다. 부상 전까지 포수 통산 최다홈런 기록인 299홈런을 기록하고 있었으나 부상으로 300홈런 달성은 2010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2.3.3. 2010 시즌

2010시즌 초에도 복귀 여부는 불확실하였으나, 빠른 회복을 보이며 개막전 선발 포수로 나왔다. 한 달이 넘는 아홉수 끝에 결국 4월 30일 LG 트윈스와의 문학 야구장 경기 5회말에 박명환의 5구를 통타, 포수 300홈런이란 대기록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시즌 내내 왼 아킬레스건의 부상으로 인한 오른 아킬레스건의 부담 가중으로 정상적인 주루플레이를 할 수 없었다. 펜스 직격 1루타가 자주 나올 정도였고, 평범한 타자에게 안타가 주어질 상황에도, 뛸 수 없기에 아웃이 되곤 하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홈런을 쳐버리는 붕가옹 이는 보조 포수인 정상호 또한 부상으로 신음하고 있는 상황에 기인했다. 안 그래도 몸이 불편한데 이 시즌에 몸에 맞는 공만 27개로 단독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9월 3일 잠실 두산전에서 역대 5번째 2,0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팀이 시리즈 전적 1승으로 앞선 10월 16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8회말 권혁을 상대로 1:4로 달아나는 솔로 홈런을 때려냈다. 참고로 이 홈런이 박경완 본인의 한국시리즈 첫 홈런이었고 팀은 스코어 1:4로 승리했다.

팀이 시리즈 전적 3승으로 앞선 10월 19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2010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는 6회초 차우찬 상대로 4:0으로 달아나는 1타점 적시 2루타를 쳐냈고, 7회말 1사 1,2루 상황에서 배영섭 파울 플라이를 호수비로 잡아내는 등 공수주에서 맹활약하며 팀의 스코어 4:2 승리에 기여하였다.

박경완은 2010년 한국시리즈 전 경기에 포수로 선발 출장하여 단 한 번도 교체되지 않고 13타수 3안타 1홈런 2볼넷 1몸에 맞는 공 3타점 1득점, 타율 .231, 장타율 .538, 출루율 .375를 기록했고 팀의 시리즈 전적 4승으로 우승했다. 시리즈 MVP 투표에서 박정권에 이어 2위를 할 정도로 그 공이 컸고, 양쪽 발목이 좋지 않아 시즌이 끝나고 바로 수술할 예정이었으나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국가대표로 발탁되었다. 은사였던 국가대표팀 조범현 감독을 위해 수술을 미루고 출전하여 공수에서 맹활약, 금메달 획득에 기여하였다. 오오 박경완 오오

KBO 골든글러브 포수 부문에서는 조인성에게 138:136, 단 2표 차로 수상에 실패하였다. 이는 역대 1-2위간 최소 표차 기록으로 남았는데,[40][41] 3할+포수 최초 100타점을 기록한 조인성이 2할 6푼대 타율을 기록한 박경완을 상대로 1표만 덜 받았어도 동률이 나올 뻔한 상황이 나온 데 대하여 2009년에 이어 이름값과 우승팀 프리미엄만 보고 표를 던진 기자들의 몰개념에 대하여 많은 비판이 나왔다. 게다가 2001년과 2004년 거의 똑같은 상황에서 골든글러브를 뺏긴 뼈저린 경험이 있던 박경완으로서는 골든글러브 시상식 한참 전부터 포수 골든글러브는 조인성이 받는 게 이치에 맞다며 본인이 직접 조인성을 밀어주기까지 했다.

2010년 시즌 후에 FA가 아님에도 불구, 타격은 예전같지 않지만 역대 최고급의 수비와 투수 리드를 인정받아, 마흔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2년간 총 14억의 금액에 대박을 터트렸다. 절친인 김원형이 팔꿈치 부상으로 2010 시즌 8월에 복귀하여 단 3경기밖에 못 나옴으로써 연봉이 2억 5천에서 1억으로 깎인 것을 보면 둘이 데뷔 초하고 지금하고의 명암이 갈린 상황(...)[42] 경완옹이 마흔왕자에게 밥 한턱 쏘시겠지 뭐...

하지만 이 2년 계약으로 2011년 시즌 후 FA 파문이 일어나게 된다. 왜 이 때 문제가 되지 않고 1년이 지나서야 터지게 된 건지 자세한 사항은 아래 2011 시즌 항목 참고.

2.3.4. 2011 시즌

2011시즌에도 부상 여파로 제대로 출장하지 못하였다. 안 그래도 2010시즌에 부상이 있었는데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을 위해 수술도 미루고 뛰면서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것.

5월 22일 넥센전에 선발출장하여 1타점 적시타를 기록했다.그러나 다시 고질적인 발목 통증이 재발, 얼마 안 가 2군으로 내려가 재활 치료를 계속했지만, 결국 다시 발목 수술을 하기로 결정되어 회복하는 데 4~5개월 정도 걸릴 것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사실상 시즌 아웃 확정. 설령 회복된다 하더라도 재발 부위에 또 칼을 들인데다 노쇠화까지 고려한다면 선수로 뛸 날이 얼마 안 남은 셈이다. 결국 2011년 SK 포수진은 정상호가 주축이 되었다. 정상호까지 결코 좋지 않은 몸상태임을 감안하면 SK의 포수난이 좀 심각했던 상태. 그나마 허웅이 포수진에서 새로이 발굴되면서 포수 구멍을 어찌어찌 잠시라도 막아내긴 했다.

2011년 시즌이 종료된 11월 초, KBO에서 박경완의 이름이 들어간 FA 명단을 발표하면서 갑자기 파문이 일어났다. 이유인 즉슨 2010년 시즌 종료 후 SK는 FA 자격을 취득하지 않은 박경완과 2년간 14억원으로 재계약을 하면서 KBO에는 1년 계약을 한 것으로 서류를 제출했는데, KBO 규약에 따르면 FA가 아닌 선수들은 다년 계약을 할 수 없으며 반드시 1년 계약만 할 수 있다.

따라서 야구규약 46조 '위반처분' 조항[43]에 의거하여 2010년의 2년짜리 계약은 무효이고, 다음해에는 SK에서 뛸 수 없으며 반드시 다른 구단에서 뛰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2010년에 SK 프런트에서 재계약 사실을 발표하면서 공개적으로 보도자료까지 돌렸건만 KBO는 여태까지 모르고 있다가 이제서야 알았다는 것. 두 쪽 다 가지가지 한다

일단 박경완 측에서는 FA 자격을 취득할 수 있을 거란 계산을 하지 못했으며, 재활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구단 측이 2년 계약을 제시하여 그저 감사한 마음에 계약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정상 참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요구를 수용하면 KBO가 사실상 이면 계약을 인정하게 되는, 협회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게 되는 상황. 네티즌들은 '레전드에 대한 예우로서로라도 박경완 특별법 만들어라'라는 의견과 'KBO 호구 인증하지 말고어쩔 수 없지만 원칙은 준수해야 한다'라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

시즌 후 SK가 조인성을 영입함에 따라 LG에 보호선수 20인 외의 보상선수를 지급할 의무를 갖게 되어, FA 파문을 맞은데다 조인성의 존재로 인해 이전에 비해 입지가 더욱 줄어든 박경완이 보상선수의 형태로 LG로 가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실제로 포수난이 심각한 LG의 현실로 보건대 SK가 박경완을 보상선수에서 제외한다면 그 즉시 데려갈 가능성이 컸고, FA 파문이 일어난 상황에서 그게 모양새도 나았다.

그러나 SK는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11월 23일 박경완이 보호선수 명단에 포함되어 있음을 공식 발표하여 보상선수설을 단숨에 일축했다. 또한 조인성이 포수가 아닌 지명타자로 활용될 것이라고 밝혀 이변이 없는 한 2012년에도 박경완-정상호 체제는 유지될 거라는 전망이 나왔다. 그리고 LG에서는 보상 선수로 투수 임정우를 지명하였다.

2.3.5. 2012 시즌

그러나 막상 시즌이 시작되자 박경완은 회복이 더디고 정상호는 예의 그 부상이 또 재발하면서 조인성이 주전 포수를 보게 되었다. 정상호가 복귀한 뒤로는 조인성과 정상호가 번갈아가면서 포수를 봤다. 조인성 영입 당시의 예측과는 상황이 다르게 되었다. 부상에서 회복되었으나 2군에서 1할도 되지 않는 타율을 기록하며 타격면에서 극도의 부진을 보였다.

2012년 6월 15일 1군에 올라왔다...가 극심한 타격 부진으로 7월 1일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2군에서도 타율 0.136의 기록을 남기면서 확실히 몸상태가 예전같지 않음을 보였다. 이만수 감독이 고의로 박경완을 죽였다는 근거로 2군에서 불과 66타수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들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이만수의 박경완에 대한 처우를 비판하는 것을 김성근 광신도라고 무조건 매도하는 건 곤란하다. 이때는 물론 이후 스토브리그 기간과 전지훈련 등에서도 의도적으로 박경완을 배척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2012 시즌이 지나가면서 SK의 주전포수는 조인성정상호로 굳어져갔고, 여기에 일발장타력이 있는 대타요원 이재원까지 군 복무를 마치고 1군에 합세해서인지 가을야구는 고사하고 2군에서 시즌을 마치게 되었다. 플레이오프, 한국시리즈 선수 명단에서도 제외되었다.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백전노장이자 팀 전력의 절반이라고 평가받았던 주전포수가 점점 팀에서의 입지가 좁아지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나이와 부상때문이 크다

점차 팀내에서 입지를 잃어가는 가운데 타팀에서라도 뛰기 위해 조건없는 방출을 요구할 것으로 알려졌다. FA 대상자이기는 하지만, 고액연봉으로 인한 보상금과 유망주 유출, 많은 나이등을 고려하면 FA로 팀을 이적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기 때문이었다. FA는 신청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

결국 보류선수 명단에 포함되며 2013년에도 SK 선수로 뛰게 되었다. #

2.3.6. 2013 시즌

3월 19일 목동 넥센전에서 복귀전을 치뤘다. 그러나 박경완이 리드했던 투수 여건욱의 성적이 썩 좋지 못해 포수 리드에 대한 감이 떨어졌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이날 전까지 8이닝 무실점에 볼넷은 단 1개를 기록하고 있었지만 이날은 4.2이닝만에 볼넷 2개를 내주고 홈런까지 허용하며 3실점했다. 결국 경기 중반에 백업포수 김정훈과 교체되었다. 타격에서는 2타수 무안타 1삼진.

3월 20일 목동 넥센전에서는 경기 중반에 대수비로 투입되었다. 이날 타격 성적은 2타수 무안타(상대 실책으로 1번 출루)를 기록하였다.

3월 23일 문학 NC전에서도 경기 중반에 윤길현과 배터리로 대수비로 투입되었다. 윤길현은 똥볼을 집어던졌으나 야수들의 호수비에 힘입어 실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허준혁과의 배터리 상황에선 허준혁이 안타와 홈런을 허용하며 1이닝 2실점으로 무너졌다. 타격에서는 1타수 무안타 1삼진. 시범경기에서 계속 무안타 기록을 이어가며 타격에서 영 감을 잡지 못했다.

3월 24일 문학 NC 시범경기 최종전에서도 경기 중반에 대수비로 투입되었고 정말 오랜만에 안타를 기록하였다. 타격성적 1타수 1안타.

그러나 햄스트링 부상으로 인해 개막전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팬들은 시범경기때 고작 몇 이닝 소화하지도 않았는데 퍼졌다며 박경완의 내구성에 대한 회의와 의구심의 눈초리를 보냈다.[44]

개막전 엔트리에서 제외된 이후 3군[45]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2군으로 올라왔는데, 2군 합류 시점부터 2013년 5월까지 2군에서 썩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었는데도 불구하고 1군행 소식은 없었다. 일부 팬들은 2군에서 훌륭한 타격감을 보여주는 박윤[46]과 더불어 왜 1군으로 올리지 않느냐며 불만을 표출했다.

5월 28일 정상호와 교대로 1군에 등록됐고, 30일 6회 조인성과 교체출장하며 333일만에 1군 출장을 기록했다.

6월 5일 NC 다이노스와의 경기에서 시즌 첫 선발 출장했다. 투수는 김광현. 불안불안한 김광현의 피칭을 2실점으로 막았지만, 로또가 터진 그 분에게 만루홈런을 허용하며 불펜의 대량실점을 막지 못했다. 이재영을 비롯한 불펜진의 피칭이 워낙 막장이긴 했지만...

6월 7일 선발 포수로 출장, 2회말에는 선두타자로 나와 김혁민을 상대로 솔로 홈런을 치며 1군 복귀 후 첫 안타를 홈런으로 장식하는데 성공했다. 통산 314호 홈런.

하지만 이후 부진의 늪에 빠지고 2013년 6월 16일 광주 KIA전이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6월 19일 문학 삼성전을 앞두고 팔꿈치 통증까지 겹쳐 2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시즌 막바지까지 소식이 없었다.

2013년 10월 22일 스포츠동아와의 인터뷰를 통해 결국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적지 않은 나이와 팀 내에서 줄어든 입지 때문인 듯. 단독보도 헤드라인부터 "이젠 지쳤다"였으니 얼마나 그에 대한 압박을 받아왔는지에 대한 설명은 더 필요없을 것이다. 현역 생활의 의지가 강했음에도 프런트와 코치진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유니폼을 벗은 경험이 있는 이만수 감독이 정작 박경완에게 똑같은 짓을 수년 동안 강요한 끝에 은퇴시켜 버렸다는 점에서 여러가지로 뒷말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은퇴 과정이었다. 5타점만 더 올렸으면 1000타점이며, 10경기만 더 포수로 출장했으면 KBO 최초 2000경기 포수 출장[47]이라는 대기록을 쓸 수 있었던 상황이라 더욱 아쉽다.

하지만 그 당시 박경완의 기량은 전성기 때, 아니 2010년과 비교해도 크게 떨어져있었고, 실제로 2010년 이후 3년간 10타점도 올리지 못했다. 현역생활을 더 연장했더라도 과연 그것이 팀에 도움이 됐을지는 미스터리. 어찌보면 40을 코앞에 둔 상황에 그 분 아래에서 아킬레스건 부상을 안고도 거의 풀타임을 뛴 2010년의 혹사가 선수 생명엔 치명적이었던 것 같다.

다만 포수 마스크를 벗는 대신 SK 와이번스 2군 감독으로 선임, 지도자로 제2의 야구인생을 출발했다.#

최의민이 박경완의 레전드 카툰을 그렸다.

3. 지도자 경력

3.1. SK 와이번스 2군 감독

아무리 2군이라 하더라도 코치 연수도 거치지 않은 선수가 바로 감독으로 부임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문 일이기 때문에 박경완의 감독 부임에 대해 많은 해석이 나왔는데,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1군 감독 이만수를 압박하기 위한 카드라는 것이었다. 2013시즌 4강 진출에 실패한 이만수 감독은 시즌 이후 시행된 코칭스태프 개편에도 드러났듯이[48] 팀내 입지가 상당히 좁아진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선수단 내 신뢰도, 팬들의 지지도 면에서 이만수와는 상대가 되지 않는 박경완을 이만수의 압박 카드로 사용했다는 것이다.[49]

일단은 2013년 11월 5일 한화 이글스 퓨처스 팀과의 연습경기를 통해 비공식 감독 데뷔전을 치뤘고, 스코어 3:0으로 패했다. 부임 후 김성근 감독 시절 못지 않은 강훈련으로 선수들을 지도하겠다는 포부를 밝혀 팬들에게 많은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3월 10일에 프론트는 박경완이 SK시절 달고 있던 26번에 대한 영구결번화를 결정하였다. 이로써 SK 와이번스 역사상 첫 영구결번이 되었으며, 프로야구 영구결번 수는 총 12개가 되었다. 박경완 선수의 영구결번 소감

2014년 시즌이 끝난뒤 육성총괄로 임명되었기 떄문에 자연스레 감독직에서 물러나게되었다.

2군 감독을 한 기간이 고작 1년이기 때문에 박경완의 감독으로서의 역량, 장단점, 스타일에 대해서 평가하기는 아직 이르지만, 선수시절 자신이 겪었던것처럼 체계적이고 많은 훈련을 통해 선수단의 능력을 끌어올리려 하는 것만은 확실한것 같다.

3.1.1. 은퇴식

박경완의 SK 구단 사상 최초의 영구결번식 겸 은퇴식은 여러모로 선수 본인의 기록달성과 인연이 깊었던 한화와의 경기[50] 후 실시되었다. 포수였던 선수 시절 포지션답게 박경완은 시구가 아닌 시포자로 등장했고, 시구자는 그의 평생 절친이자 영혼의 배터리를 이루었던 김원형 투수코치가 맡았다. 김원형이 공을 던지고 박경완이 받아서 2루로 도루저지하듯 던지는 형식으로 시구-시포 행사가 이루어졌고, 이로써 두 번 다신 나오지 못할 21년차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장수 배터리가 서로에게 마지막이 된 한 개의 공을 던지고 받으며 둘의 프로생활 20여 년의 대장정을 성대하게 마무리지었다. 그 뒤에 이 영혼의 배터리의 마운드에서의 간단한 마지막 대화가 뭇 야구팬들의 눈시울을 적혔다. 김원형 항목 참고. 경기는 2-6으로 레전드의 영구결번에 맞춰서 SK가 재역전승을 거두었고, 경기 종료 후 SK의 최창원 구단주, 이만수 감독, 2014년 주장 박진만 등이 함께 기념 촬영을 했고, 선수단이 마운드에서 헹가래도 해 주고 그라운드를 차례대로 돈 후 홈베이스에 놓인 포수장구와 마스크에 입을 맞추었다. 이후에는 자동차를 탄 채 그라운드를 돈 후 선수단과 악수와 포옹까지 한 다음, 1루 응원단상에 직접 올라가 간단한 소감과 사랑합니다를 외치고 불꽃놀이로 은퇴식의 끝을 장식했다. 다행스럽게도(?), 이 분 은퇴와는 다르게, 장내 아나운서가 말조심을 정말 제대로 했다. 아나운서가 그러거나 말거나 감동님이 사진 찍으러 등장했을 때 야유는 나왔지만 [51] 박경완의 영구결번 26번은 그린존 우측 벽면에 야구공 모양 패널로 부착되었다.[52]

공식 은퇴식 후 진행된 인터뷰에서 정우영 아나운서가 존경하는 감독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각각 조범현, 김성근, 김재박이라고 답변했다. 팬들은 사제관계가 깊은 2명은 그렇다 쳐도 현대에서 5년 정도만 함께 지낸 김재박을 꼽은 걸 의외로 생각했다.[53][54]

참고로 그 날 은퇴식 직전 끝난 한화와 SK의 경기는 2 : 6의 스코어로 SK의 승리로 끝났다. 박경완의 영구결번 등번호 26번과 공교롭게도 일치하는 스코어.

3.2. SK 와이번스 육성총괄

김용희 육성총괄이 1군 감독으로 취임하자 공석이 된 육성총괄로 선임되어 SK 와이번스 프런트로 들어갔다.사람들은 박경완이 계속 2군 감독으로 현장감각을 키울것으로 예상했으나, 다소 의외라는 반응.

이후 나온 기사에 따르면 현장업무 뿐 아니라 프런트로써 해야하는 업무까지 담당하고 있는 중이며 SK 와이번스 구단이 차세대 지도자로 박경완을 키우고 있는듯 하다. 많은 이들이 예상한대로 김용희가 무사히 연착륙을 한다면 후임자로 박경완이 1군 감독이 될 듯.

2014년 11월 김강민과의 FA협상에서는 본인이 직접 김강민을 10시간 동안이나 가둬둔 끝에(..) 소속팀 잔류를 이끌어냈다. 네이버 스포츠의 인터넷 라디오 라디오볼에 따르면 김강민에게 김성근 前 감독이 아버지같은 존재라면 박 총괄은 어머니라고 말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기 때문에 주도적으로 협상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SK 와이번스 갤러리에서는 붕마마(붕가옹+마마)라는 새 별명까지 획득.

육성총괄이라는 보직이 눈에 띄는 자리는 아니다보니 근황을 궁금해 하는 팬들이 많았는데 미국에서 한달간 대체 외국인 선수를 알아보러 다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2016년 부터는 1군 배터리 코치로 부임하며 다시 현장에 복귀하게 되었다.

3.3. SK 와이번스 배터리 코치

어찌 나이가 들수록 점점 젊어지시는것 같다 오오 보조개 오오

그 옛날 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어마어마한 훈련량으로 젊은 포수들을 조련하는 중이다. 사진 속의 선수는 김민식.

정말로 김민식을 굴리고 있다

SK로 온 이홍구또한 시즌중이지만 많은 훈련으로 조련시키고 있다고 한다.

KIA로 이적한 김민식이 수비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고, KIA에 있던 시절 수비로 비판 받은 이홍구가 SK에서 준수한 활약을 하자 팬들 사이에서는 평가가 좋다.탈모로 뭉친 배터리, 포수

4. 김원형과의 관계

절친 김원형과 함께 마지막을 장식하는 박경완[55]

여담으로 김원형이 은퇴할 때 가장 아쉬워했던 것은 본인 김원형보다 오히려 박경완이였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였다. 박경완이 김원형의 은퇴를 함께한 이후 김원형 또한 박경완의 은퇴식에 나와서 마지막 까지 함께 하였다.[56]

5. 기록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포수로 꼽히는 만큼 수비도 뛰어나지만, A급 타자이기도 하다. 통산 성적도 홈런, 출장 경기, 타점 등 많은 부문에서 순위권에 들어 있다.

통산 타율은 불과 .249로 많이 낮은 편이지만, 클러치 능력과 뛰어난 장타력으로 이를 극복했던 스타일. 삼진개수 역대 1위(1605개)인 탓에 공갈포로 취급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 박경완이 현역으로 뛰던 시절에는 많이 주목받은 능력은 아니지만 볼넷을 상당히 많이 얻어내는 타입이라 타율에 비해 출루율이 거의 0.1 이상 높은 편이었고, 실제로 통산 성적도 타율은 .249에 그치지만 통산 출루율은 .367로 6시즌 째 지명타자를 병행해가며 타격 스탯에서 이득을 보고 있는 홍성흔보다도 높다. 데뷔 초 2할 초반의 타율에 머물때도 출루율은 항상 3할을 넘겼다.

그가 기록했던 통산 성적 중 눈여겨볼 만한 것들을 살펴보자면,

  • 2043경기 출장으로 역대 4위를 기록. 이 부문 1위인 양준혁(2135경기)과는 92경기 차이가 난다.
  • 통산 314홈런으로 역대 6위를 기록. 박경완보다 홈런을 많이 친 타자는 351개의 양준혁, 340개의 장종훈, 330개의 이호준, 328개의 심정수 단 세 사람뿐이다. 1위는 당연히 그분.
  • 통산 995타점으로 역대 16위를 기록. 그보다 더 많은 타점을 올린 우타자는 1069타점의 홍성흔, 1145타점의 장종훈, 1097타점의 김동주, 1081타점의 박재홍, 1030타점의 송지만, 1029타점의 심정수, 1003타점의 마해영, 1265타점의 이호준, 1233타점의 김태균, 1053타점의 이범호 뿐이며, 좌타자는 1389타점의 어느 타격의 신, 소속팀에서 영구결번이 된 1498타점의 라이언킹, 1027타점의 저격수, 1031타점의 최형우, 1059타점의 박용택 단 다섯 사람뿐이다. 심정수와 마해영의 기록은 뛰어넘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2009년 아킬레스건 파열이라는 큰 부상 이후 재활 후에도 고질적 발목 문제가 생겨 다음해 1년간 활약했음에도[57], 2011년부터 주기적인 발목 통증 재발로 인해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고, 결국 1000타점도 채우지 못했다. 2009년의 부상이 두고두고 아쉬운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경완의 통산 타점 기록이 대단하다고 인정받는 것은 앞선 경쟁자들이 모두 소속팀의 중심타자 역할을 할 때, 박경완은 수비 부담 문제로 하위타선에 자주 배치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 의외로 안타는 불과(?) 1480개. 정확성보다 장타를 중시한 스타일대로의 결과. 단 흠이라면 23시즌이나 뛰어서 한 해 평균 안타 개수는 64.3개다. 첫 3년과 마지막 3년이 평균을 깎아먹었다.
  • 통산 974볼넷으로 역대 5위를 기록. 아쉽게도 1위는 바로 그 분께서 1278개를 기록한 탓에 기록 경신이 쉽지 않았다.
  • 몸에 맞는 공 166개로 역대 단독 3위. 역대 1위는 같은 팀 후배 마그넷정으로, 5년 연속으로 20사구를 맞는 페이스로 풀타임 10년만에 무려 156개를 맞(...)고 2위를 찍는 기염을 토한 뒤, 2016년 4월 23일, 타이를 이루고, 4월 28일, 결국 단독 1위로 등극한다. 2위는 169개의 박석민이고 그 아래로 4위 161개의 박종호, 5위 148개의 김한수, 6위 147개의 김동주 그 아래로 7위 145개의 송지만은 은퇴했고, 8위 144개의 이대호뚱뚱해서 잘 맞기 때문에 좀 유리하긴 한데 해외 진출로 기록이 잠시 멈춘 상태. 국내 복귀했으니 다시 맞을거얌
  • 약간 특이한 기록으로는 안타 중 장타의 비율이 40.6%로 역대 6위. 안타 10개 중 4개가 2루타 이상이었다는 뜻.
그런데 사실 박경완보다 상위에 있는 선수들은 10시즌 동안 41.3%의 조경환[58], 그리고 펠릭스 호세, 카림 가르시아, 타이론 우즈같은 단기간 활약한 외국인 선수. 즉, 역대 모든 타자 중 일단 치면 장타였던 선수는 실질적으로 박경완이라는 뜻. 그런데 이 부문 1위는 49.3%, 즉 안타의 절반이 장타ㅎㄷㄷ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강의 홈런타자인 그 분. 물론 이 괴수는 불과 9시즌동안 기록한 성적이긴 하다.
  • 크보에서 유일무이한 20-20클럽 포수 가입자이다. 심지어 이 시즌을 전후로는 한 번도 10개 이상의 도루를 기록한 적도 없다. 2년 전 저쪽 리그 어느 땅딸보 포수가 포수 최초로 20-20을 기록한 이후 얼마 안 돼서 나온 기록이라서 흠좀무...[59] 하지만 골글 도둑 맞았다.

  • 불명예 기록으로는 통산 삼진 1위가 있는데, 무려 1605개.(…) 타자가 무슨 안타보다 삼진이 더 많냐 2위인 송지만과는 154개 차이. 그 밑으로는 장종훈이 1354개로 3위, 박재홍이 1147개로 4위, 심정수가 1073개로 5위, 이승엽이 1022개로 6위다. 이들 말고는 아직 네 자릿수 기록이 없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 불명예 기록은 정말 깨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60]

6.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1

쌍방울

10

6

.000

0

0

0

0

0

0

0

2

.000

.250

1992

31

49

.224

11

1

0

3

6

5

0

3

.429

.269

1993

26

48

.208

10

2

0

0

2

1

0

5

.250

.283

1994

102

240

.238

57

8

2

14

31

31

0

30

.463

.322

1995

121

361

.227

82

13

2

19

46

48

5

64

.432

.344

1996

126

367

.218

80

19

2

15

74

58

2

79

.403

.349

1997

82

239

.280

67

15

1

16

48

46

2

66

.552

.430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8

현대

123

404

.250

101

25

1

19

66

54

3

45

.458

.324

1999

124

367

.221

81

16

1

23

67

67

2

80

.458

.359

2000

130

408

.282

115

16

0

40
(1위)

95

83

7

99

.615
(2위)

.419
(3위)

2001

130

421

.257

108

13

1

24

81

66

21

98

.463

.395

2002

119

330

.203

67

10

1

19

42

42

6

53

.412

.311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3

SK

122

336

.250

84

16

2

15

60

49

6

68

.443

.373

2004

132

410

.295

121

19

1

34
(1위)

79

94
(4위)

2

108

.595
(2위)

.440
(2위)

2005

114

347

.245

85

17

0

11

44

43

1

64

.389

.357

2006

111

324

.253

82

13

0

13

51

38

2

46

.414

.342

2007

119

352

.247

87

21

1

15

60

60

6

65

.440

.357

2008

101

304

.273

83

17

0

7

36

44

6

54

.398

.377

2009

65

198

.268

53

10

0

12

38

32

3

35

.500

.375

2010

129

381

.262

100

20

0

14

67

51

1

73

.425

.379

2011

10

15

.133

2

0

0

0

1

0

0

2

.133

.235

2012

8

20

.100

2

0

0

0

0

0

0

2

.100

.182

2013

8

19

.105

2

0

0

1

1

1

0

1

.263

.150

통산 23시즌

2043
(4위)

5946

.249

1480

271

15

314
(5위)

995

913

75

1140
(3위)

.458

.367

7. 이야깃거리

  • 스트레스성 원형탈모 증세가 있다고 한다...[61][62] 이 사람은 무슨 전생에 원형에 대한 원수가 졌나 원형이하고 친구고 원형이 덕분에 프로에 입단을 하고 원형이하고 배터리 호흡을 맞추고 원형탈모까지 게다가 포수라는 포지션에서 비롯된 중압감이 심해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현대 시절 생긴 불면증이 십수년째 계속되었고, 운동선수에게 수면부족은 치명적이기에 치료란 치료를 다 받아봤지만 소용없었다고 한다. 수면제를 복용해야 간신히 새벽 5시경에 잠들었는데, 그조차 숙면이 아닌 선잠이었다고. 김성근 감독은 이러한 불면증에 시달리는 박경완의 오전훈련 및 특타를 열외시켜주며 낮잠을 잘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특히 연타석 홈런을 친 그날 불면증으로 잠을 설치고 비몽사몽간에 경기를 나섰는데도 대기록을 세웠다. 최악의 불면증에도 불구하고 오랜시간 클래스를 보여줬다는 것이 흠좀무.현대 시절부터 탈모의 징후가 보인다.
  • 조인성이 '잉'이란 접미사가 붙는다면 이쪽은 초성으로 나타내면 ㅂㄱㅇ이라 붕가라는 접미사가 붙는다... 여기에서 파생된 단어가 붕가포 등등.
  • 2002년 시즌이 끝나고 FA 자격을 얻었을 시절, 현대 유니콘스에 남는 조건으로 당시로써는 엄청나게 큰 금액이었던 7년 총 42억을 요청한 바 있다. 당연히 자금난에 시달리던 현대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고, 시장에 나온 후 SK 와이번스와 3년 총 19억에 계약, 본인이 원했던 계약액, 계약기간보다 훨씬 적은 금액에 계약했던 바 있다. 본래부터 현대를 떠나려고 했던건지 일부러 크게 부르고 계약하면 좋고 아니면 타팀으로 갈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 포수용 헬멧과 일반 마스크를 분리해서 착용하는 다른 포수들과 달리 현대 유니콘스로 이적한 이후부터 줄곧 아이스하키 골리(골키퍼)들이 쓰는 마스크와 유사한 헬멧 일체형 마스크를 썼다. 자세한 사연은 야구 헬멧 항목 참조.

1. 로또 383회 당첨자 꿈 택시기사로 위장하고 지폐 위조범 잡으러 다니는 포도대장

작은 시골마을 은행출장소 같은데, 출근을 할려고 택시를 타고 가서 요금을 낼려고 지갑을 보니

만원권 복사본 한 장만 있다. 기사를 보니 SK 와이번스 박경완과 부인이 택시를 하는 모양이다.

계좌번호를 적어주면 직장에 가서 입금시켜 주겠다고 하니 박경완이 전과조회를 한 후 입금해야 한다는 등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는 사이 우리 집에서 삶아온 닭고기를 먹는데, 꼭 소고기 맛이다.

2. 네이버 지식인 태몽 사례 산부인과 의사 붕가완

수박 태몽 해석 부탁드려요...내공 드려요~

와이프가 직접 꾼 꿈이라는데...

프로야구 SK 포수 박경완 선수가 초음파를 봐 줬는데,

아기가 딸이고, 아기 배 모양이 수박 모양이라 했답니다.

박경완 선수가 "배가 수박 모양이면 아기가 아주 튼튼한 거다"라고 했다네요.

해몽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게 태몽일 수도 있나요?

저희 부부도, 그리고 주변에도 어느 한사람 태몽 꾼 사람이 없어서요.

아! 와이프는 임신 4개월이고 저희는 결혼한 지 2년 안됐고 첫 아이입니다.

참! 아직 아들인지 딸인지 모릅니다.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 없이 다 좋고요...

혹시 아들인지 딸인지도 알 수 있나요?

놀랍게도 회춘하고 계시다. 상호야 보고있니?. 왠지 1박 2일의 김대주 작가 같다.
  • 자신이 겪은 제구 안되는 투수로 셋을 꼽았는데 그 중 한 명이 고효준이었다. 프로경력만 20년 이상 되는 포수 입장에서도 고효준의 답이 없는 제구력은 그 중에서도 독보적이었는듯...
  • 김성근 개인팬들은 김성근이 박경완을 포수로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훈련과 꾸준한 경기 출장을 통해 키웠다며 왜곡을 하는 글이 여러차례 보이지만 실은 김성근이 쌍방울 감독으로 부임하기 이전부터 조범현 당시 배터리코치의 혹독한 훈련으로 1994년~1995년부터 주전 포수로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당연히 씨알도 안 먹힌다.


  1. [1] 현역시절의 등번호는 26번이었고, 은퇴식 후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이에 앞서 2군 감독 부임 후 등번호를 72번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배터리 코치로 현장에 복귀하면서 쌍방울 신고선수 시절에 달았던 80번으로 변경.
  2. [2] 의외로 현장직을 계속하지않고 프런트로 들어갔다.대신 원래 육성총괄이던 김용희가 1군 감독으로 갔다.
  3. [3] (헛둘셋넷) 유~쾌하게 안타! 상~쾌하게 홈런! 통쾌하게~날려라~ 최고의~ 타자~ 박바악~경완~(무조건 안타! 무조건 홈런!) 최고의~ 타자~ 박↗~경완~(박!경!완!)
  4. [4] 한경기 4홈런은 박경완, 박병호, 최정, 4연타석 홈런은 야마이코 나바로가 기록했지만 이틀에 걸친 기록. 한경기 4연타석 홈런은 박경완과 로사리오가 달성했다. 로사리오는 이후 한 타석을 더 나왔지만 아웃되었다.
  5. [5] 원래 2008년 주장에는 이호준이 선임되었으나 시즌 초반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사실상 김원형이 주장직을 연임하게 되었다.
  6. [6] 박경완이 인천 출신은 아니지만, 인천 출신이나 인천 연고 팀 선수 중에서는 최초로 영구 결번을 받았다. 커리어도 쌍방울 - 현대 - SK로 이어지고 은퇴 후에도 SK에서 지도자로 커리어를 잇고 있기 때문에 인천 야구의 레전드로 인정 받을 만 하다. 박재홍 은퇴에도 영구 결번이 고려되었으나 무산. 박진만도 삼성 커리어를 제외하면 인천 출신에 인천에서 커리어를 시작하여 인천에서 끝냈으나 영구 결번은 받지 못했다. 아무래도 7번에 다른 SK 레전드도 있어서 힘들었을 듯. 최정이나 김광현이 은퇴 후에 원 클럽 플레이어로서 노려볼만한 타이틀이다.
  7. [7] 고교시절 전국구급으로 실력이 뛰어났던 건 아니지만 사실 꼭 프로구단에서 신고선수를 해야 할 정도로 못했다고 하긴 애매하다. 실제로는 학교 야구부와의 거래로 원광대로 대학 진학이 다 약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 소문에 프로구단들이 지명 안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졸업을 앞두고 갑자기 박경완 본인이 프로에 가고 싶다고 우겨서 스스로 쌍방울에 갑자기 입단테스트 받고 가는 바람에 신고선수가 되었다고 한다. 거기엔 당시 고교 최강 투수 중 하나였고 계속 배터리를 이루었던 전주고 동기 김원형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그 대학에서 박경완이 입학하기로 한 대가로 같이 입학시켜 주기로 약속된 몇몇 동창 선수들(일종의 끼워팔기 딜)이 박경완이 입학을 거부함에 따라 갈 곳이 없어져 같이 신고선수로 쌍방울에 들어가면서 박경완을 많이 원망하기도 해서 어차피 1군에서 즉시전력감으로 쓰여서 자주 볼 일 없던 김원형만을 제외한 그들 동창 사이에서 잠시 왕따이기도 했다고 하는데, 어쨌든 실력이 부족한 동창 선수들을 대학입학 대가로 보너스로 꽂아줄 정도의 실력이라면 최고급 신인 같은 건 아니었더라도, 원래 어느 정도 잘하는 선수였으면 잘하는 선수였지 허접한 선수는 아니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8. [8] 최향남이 데뷔 24년차에 1군 출전을 했지만 군 복무 등으로 연속 시즌 출장은 하지 못했다.
  9. [9] 그런데 100타점을 넘지 못했다(95타점). 당시 클린업에 있던 박재홍(최다타점) 등이 타점을 다 쓸어가서...
  10. [10] 전체 2위 송지만과는 150여개 차이.
  11. [11] 인천 연고 팀사상 최초 영구 결번이기도 하다. 삼미-청보-태평양-현대는 영구 결번 지정자가 없었으며, 설령 있었어도 팀이 해체되었기 때문에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12. [12] 이 사진은 컴투스프로야구2018과 이사만루2018에 쓰이는 사진이다.
  13. [13] 그 뒤로도, 박경완이 모기업의 자금난으로 트레이드되어 현대에서 있었던 5년을 제외하고는 근 22년동안 항상 함께 있었다! 참고로 김원형과는 초-중-고가 모두 같다. 당신은 나의 동반자 내생애 최고의 선물
  14. [14] 현대 유니콘스 시절에도 한 대졸 출신 투수가 박경완이 고졸이라고 무시하면서 박경완의 사인대로 공을 안 던진 적도 있다고 한다.
  15. [15] 친구들을 배신한 이기적인 선수라고 알려졌다고 한다.
  16. [16] 당시에는 고교 운동선수들은 실력이 부족하여 운동선수로 성공하지 못할 거 같으면 일단 특기자로 대학을 들어가서 운동을 그만두고 학업을 충실히 하는 쪽으로 전환하여 대졸 학벌로 취업을 하거나 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고교 때까지 운동만하다가 그 자체를 그만두고 갑자기 대학입시공부를 하는 건 불가능 수준으로 어려우니 일단 입학은 체육특기자로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같은 학교의 동창 중 잘하는 선수를 따라 입학하는 걸 노리는 경우가 많았다. 근데 그것이 좌절되었으니 박경완을 원망하는 분위기는 자연스러웠다. 참고로 대학의 케이스는 아니지만 축구 선수 안정환의 경우도 같은 중학교 축구부 동창들을 끼워팔기처럼 같이 받아주는 조건으로 축구 명문고가 아닌 유명하지 않은 고등학교 축구부에 들어가기도 했었다고 한다.
  17. [17] 박경완의 재능을 꿰뚫어본 조범현은 아예 박경완 옆집으로 이사를 와서 그가 퇴근하면 근처 체육관에 데려가서 훈련을 시켰다. 너무 힘들어 조범현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욕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18. [18] 당시는 방위 복무 중에도 퇴근 후에는 경기 출전이 허가 되었었다.
  19. [19] 쌍방울 레이더스 창단 첫 포스트시즌 진출이다.
  20. [20] 하지만 이 해 포수 20-20이라는 역대급 기록을 세우고도 KBO 골든글러브기자들이랑 친목질하기의 달인인 홍성흔에게 내주어야만 했다. 역대 골든글러브 시상식 중에서 논란이 많은 수상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리고 3년뒤 똑같은 상황이 재발했다 3년 뒤에도 하필 또 홍성흔한테 빼았겼다
  21. [21] 이근엽은 유격수였다. 태평양시절 염경엽밑에서 백업으로 뛰다가, 박진만 입단후 염경엽에게 대주자, 대수비자리마저 내줘야했다. 김형남은 신인포수로 정명원의 노히트노런당시 8회까지 포수를 봤다.
  22. [22] 그 당시에는 한밭야구장이였다.
  23. [23] 2014년 야마이코 나바로가 두 경기에 걸쳐 4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면서 연타석 홈런 기록은 공동 타이가 되었다. 이후 박병호최정이 한 경기 4홈런을 치면서 한 경기 최다 홈런 기록도 공동 타이가 되었다. 그러나 한 경기 4연타석 홈런 기록은 2017년 6월 15일 기준으로 박경완이 유일했지만 2017년 6월 16일 윌린 로사리오가 기록하면서 이 기록은 유이한 기록이 되었다.
  24. [24] 5연타석 홈런이 나오지 않는 이상 깨지기 힘들 기록. 5연타석 홈런은 대한민국에서는 강기웅이 실업 시절에 한 번 기록했을 뿐이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연타석 홈런 기록도 4연타석이다. 외에도 2000년도에 박경완은 3연타석 홈런만 세 개를 기록하기도 했다.
  25. [25] SK 코치가 된 후 KBS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이야기했는데 4연타석 홈런때는 사실 빈볼을 피하려고 뒤로 떨어진 상황에서 타석에 섰다가 얼떨결에 이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고. 여담으로 그 날은 밤새 뒤척이다가 아침에 간신히 잠들어서 비몽사몽 상태에서 연습용 배트를 들고 경기를 나섰다고 밝혔다.
  26. [26] 사실 2000년 4월 5일 개막전에도 한화는 현대에게 홈런 10개를 헌납하며 13:17로 진 적이 있다. 홈런 10개를 2번이나 헌납한 팀이 상대타자에게 좋게 대응할 리가 없다. 이 해 현대는 대전 10게임에서 42홈런을 기록했다. 2003년 삼성이 최다 팀홈런 213개를 기록할때 롯데를 상대로 홈+원정에서 44홈런을 기록한 것을 보면 그저 흠좀무.
  27. [27] 의외로 타점이 적은데, 이는 박경완이 이 해 주로 6번 타순에 나오고 앞의 타자들인 박재홍심재학이 타점을 죄다 쓸어갔기 때문이다. 이 해 타점왕은 팀 동료 박재홍.
  28. [28] 포수는 발이 느린 똥차선수가 많은 편이라 20도루는 커녕 한 시즌에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한 포수도 거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상 위험 때문에 도루를 시도하지 않는 이유도 있다, 또한 포수가 발이 빠르면 뭐하냐는 풍조와 현실도 한몫한다. 실제 유명한 대도중 하나인 크레이그 비지오역시 시작은 포수로 시작했지만, 빠른 발을 포수에서만 썩히는건 아깝다는 이유로 외야로 전향한 케이스, 윌리엄 서호프도 있고, 제이슨 켄달은 말년에 외야전향을 시도했다.
  29. [29] 한국프로야구에서 규정 타석을 채운 선수들 중에서도 1할을 친 선수는 의외로 많지 않다. 1997년의 박진만김호가 기록한 적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주전 유격수였기 때문에 타율이 바닥이었음에도 꾸준히 출장해서 이런 기록을 남겼다.
  30. [30] 박경완의 친정팀이었던 쌍방울이 해체후 SK로 재창단됐다.
  31. [31] http://m.knnews.co.kr/mView.php?idxno=353293&gubun=
  32. [32] 하지만, 이것도 와전된 이야기라는 말이 있는데 FA 자격을 얻기 직전인 2002년 경기 중 태업성 플레이를 선보이기도 하는 등, 현대를 떠날거라는 모습을 암시하기도 했고 시즌이 끝나자마자 FA 계약 조건으로 7년 42억이라는 거액을 요구하는 등 대놓고 현대가 싫은 티를 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과거 현대 팬이었던 사람들 중에는 박경완을 그닥 좋게 보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33. [33] LG의 프랜차이나 다름없던 김동수는 삼성을 거쳐 2002년 한 해동안 SK에서 뛰며 문학구장 개장 첫 홈런을 치기도 하는 등 포수진이 부족했던 SK에서 어느 정도 출장 기회를 부여받았으나 2002년 말 조범현이 SK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방출당했다. 이는 조범현이 삼성 배터리코치 시절부터 김동수와 사이가 안 좋아서 그랬다는 설이 유력하다.
  34. [34] 사실 장재중은 그리 못하는 선수는 아니었으나, 스승인 김성근감독이 LG 감독으로 있던지라, 스승의 부름을 받고 갔다고 보는게 맞을듯.... 그리고 장광호는 주전경쟁에서 밀려서 10억원에 팔려왔으나, 1년만에 5000만원받고 친정팀으로 돌아간다.
  35. [35] 희한하게도 김동수는 방출 후 박경완이 있었던 현대 유니콘스로 가서 주전 자리를 차지하고 골든글러브도 수상한다.탈슼효과
  36. [36] 홍성흔의 성적은 타출장OPS 0.329/0.384/0.475/0.859의 성적을 찍었고, 최다안타와 전경기 출장의 기록을 남겼지만 박경완은 더 넘사벽의 성적을 찍었다. 0.295/0.440/0.595/1.03634홈런(홈런왕)을 기록했다. 무엇보다도 박경완은 거의 모든 경기를 포수로 출장했지만, 홍성흔은 이 해 지명타자 출장 빈도도 어느 정도 높았던 편이었다. 이 해 골든글러브 수상에 말이 상당히 많았다. 기자들과 친한 것 때문에 받은 거 아니냐는 비아냥도 상당히 들었던 상황. 기자들의 3할에 대한 집착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37. [37] 홈런왕을 차지하고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지 못한 경우는 2004년 박경완을 비롯하여 김치맨 버프에 밀린1998년의 타이론 우즈, 40-40을 기록한 괴수에 밀린2015년의 박병호가 있다.
  38. [38] 심지어 베네수엘라전에선 안타까지 쳐서 나갔다. 참고로 이 경기 전까지 박경완은 안타가 없었다! 그야말로 윤석민과 함께 둘이서 베네수엘라를 쳐바른 경기였다.
  39. [39] 2루타 이상 장타가 나올 것을 예상할 땐 1루측 파울라인 안으로 둥글게 들어가 방향을 바꾸기 수월하게 베이스러닝을 한다.
  40. [40] 유일한 기록은 아니다. 2008년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에서 1위인 박기혁과 2위인 박진만의 표차도 2표.
  41. [41] 참고로 눈을 약간 돌려 다른 방향을 보게 되면, 전체 최소 표차는 2004 외야수 부문의 3위와 4위의 경우이다. 이병규와 박한이의 표수가 같았고, 때문에 2004년 외야수 부문의 골든글러브 수상자는 4명이었다.
  42. [42] 위를 보면 알겠지만, 데뷔 초 김원형은 1차지명을 받은 스타이자 초특급 유망주였고, 박경완은 그저 이름없는 신고선수에 불과했다!
  43. [43] 본 규약에 위반해 체결한 선수계약은 무효이다. 위반구단은 총재에 의해 500만원의 제재금이 과해지며 그 선수와 향후 선수계약을 다시 체결하지 못한다.
  44. [44] 박경완은 39살의 나이에도 130경기를 출전했던 전적이 있는 포수라 팬들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 부상이 일상인 정상호라면 몰라
  45. [45] 루키군이라고도 하며 영혼의 배터리인 김원형이 코치로 있다.
  46. [46] 박종훈 LG 전 감독의 아들로 주목받았던 그 선수다. 항목 참고.
  47. [47] MLB에도 5명밖에 없는 기록이다.
  48. [48] 이만수의 부임과 함께 코치직에 임명된 최경환, 맥스 베너블 등의 코치는 2013시즌 종료 후 모두 해임되었으며 실질적으로 이만수의 사람이라고 부를만한 코치는 성준 수석코치 한 명만 남았다. 성준조차 이만수와 투수운용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는 점에선 억울한 감이 있지만…
  49. [49] 대체적으로는 태평양 시절부터 인천야구를 봐 온 올드 팬덤은 김경기 1군 타격코치를, 이보다 연령대가 낮거나 김성근 전 감독 시절 구성된 팬층은 박경완을 지지하는 편.
  50. [50] 박경완은 개인통산 100홈런과 4연타석 홈런, 개인통산 600타점, 900볼넷, 마지막으로 때려낸 314호 홈런을 모두 한화전에서 달성했다.
  51. [51] 전년도 빵형 은퇴식 당시에 그 장내 아나운서가 영원한 감독 이 만 수라고 했다가 오히려 야유소리를 더 크게 만드는 역효과를 불러왔다.
  52. [52] 2015 시즌에는 백스크린 오른쪽(스코어 전광판 아래)으로 자리를 옮겼다. 야간 경기 때는 패널에 불도 들어온다.
  53. [53] 현대시절에 두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봐서인지 그런 듯.
  54. [54] 이와는 반대로 박재홍은 은퇴발표 기자회견 때 가장 기억나는 감독으로 김재박을 먼저 뽑았다. 박재홍은 현대 창단시절에 신인 데뷔를 했고 그때가 전성기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55. [55] 해당 사진은 원래 김원형 항목에 있던 것이다.문구도 이름 순서만 바꿨다. 실제로 이 둘의 관계는 야구에 대해서 잘 모르던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알 정도로 꽤 유명한 친구 사이다.
  56. [56] 둘을 일컫는 말중 하나인 영혼의 배터리라는 표현이 있는데 야구 팬들 뿐 아니라 언론에서도 이 둘의 관계를 부르면서 자주 사용하던 표현이다.
  57. [57] 이때도 주루에는 지장이 있었다.
  58. [58] 1998년에 롯데 자이언츠에서 데뷔한 외야수로, 사상 최초 1군 첫 타석 홈런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1999년부터 똑딱이 일색의 롯데 타선에서 마해영과 함께 장타를 쳐주던 몇 없던 장타자. 2000년 그 똑딱 기술마저 잃어버린 몰락한 롯데 타선에서 버텨주던 마해영도 2000년을 끝으로 떠나가 2001년 100타점을 올리며 펠릭스 호세와 함께 역시 팀 내에서 둘뿐인 장타자 역할을 해줬으나, 당시 감독인 백인천의 삽질로(자세한 항목은 백인천 항목 참조) 2002년 시즌 중 SK로 트레이드시켜버린다. SK에서 박경완과 잠시 한솥밥을 먹었으며 이후 KIA에서 은퇴했다. 크보 역대 최고의 공갈포 중 한 사람.근데 박경완과 다르게 한 시즌 100타점은 해봤다 굳이 비교하자면, 저쪽 리그아담 던같은 스타일.
  59. [59] 여담으로 20-20클럽 포수 가입자는 저 둘 뿐이다.
  60. [60] 정작 본인은 불명예로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최훈이 공동필진에 포함된 스카우팅 리포트 시리즈에 따르면 박경완 자체가 본인의 위치가 포수며 또한 당시 기준으로 하위타선라는 점을 감안할때 삼진을 당하더라도 큰 스윙으로 장타를 만들어내는게 더 의미가 있다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2010년의 2할5푼치는 양의지가 2011년 3할치던 양의지보다 더 위협적인 것과 같은 이치다.
  61. [61] 워낙 상대 타자들을 연구하는 탓에 생겼다고 한다. 09년 우승하면 팀원들이 갹출해서 심어준다고 했으나 팀은 준우승... 심어줬다고 하지만 아직도 휑하다. 다행인 건 KBO 최고령 노총각이신데다 최근 탈모까지 오신 류택현 옹과는 다르게 결혼은 애즈녘에 하셨다는 것(...) 오히려 곱상한 동안 미남으로 유명했던 절친 김원형보다 일찍 하셨다.
  62. [62] 모를 리는 없겠지만 원형탈모는 쉽게 생각해서 땜빵이 머리에 난다고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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