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이 있습니다.

이 문서에는 실제로 발생한 사건·사고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합니다. 불법적이거나 따라하면 위험한 내용도 포함할 수 있으며, 일부 이용자들이 불쾌감을 느낄 수 있으니 열람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실제 사건·사고를 설명하므로 충분히 검토 후 사실에 맞게 수정하셔야 합니다.

또한, 이 틀을 적용하시려면 적용한 문서의 최하단에 해당 사건·사고에 맞는 분류도 함께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분류 목록은 분류:사건사고 문서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2]

표적은 박정희 대통령이었지만 엉뚱하게 육영수 여사와 또 한명의 무고한 학생이 피격당해 사망한 사건

1. 사건의 재구성
2. 어이가 없을 정도의 대응
3. 범인 문세광과 그 배경
4. 범인은 문세광이 아니다?
5. 사건 이후
6. 기타

1. 사건의 재구성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부터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8.15 광복절 기념식이 열리고 있었다. 오전 10시 6분, 경축식의 클라이맥스라 할 박정희의 경축사가 낭독되기 시작하였다. 이날 경축사의 내용은 "평화통일 3단계 기본원칙"을 밝히는 역사적 내용이었다. 그러던 중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늘 이 뜻깊은 자리를 빌려 조국 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이때 아래층 맨 뒷줄 중앙 부근에서 총소리가 울렸으나, 박정희는 듣지 못했는지 경축사를 계속 낭독하였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우리가 그동안 시종…

그때 두번째 총소리가 울렸고, 한 사내가 아래층 중앙 뒷줄에서 단상을 향해 뛰쳐나와 M36 치프 스페셜 권총을 쏘아댔다. 이에 독립유공자 자리에 앉아 있던 서대문세무서 재산세계장 이대산이 범인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연단 위에서 경호원들이 박정희의 연설대를 둘러쌌으며, 다른 경호원들이 범인을 덮쳐 제압했다. 이때 시간은 오전 10시 23분. 총을 쏜 범인은 재일교포 문세광이었다. 범인의 총에 영부인 육영수가 머리를 맞고 쓰러졌으며, 누군가의 오발에 합창단원 장봉화 양이 숨졌다. 육영수 여사가 호송되고 박정희는 연설대에 다시 나타나 '여러분들, 하던 얘기를 계속 하겠습니다'라는 말로써 남은 경축사를 마저 이어나갔다.

육영수 여사는 사건 발생 9분만에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오전 11시경부터 신경외과 과장 심보성 교수의 집도로 오후 4시 20분까지 뇌수술을 받았다. 근처 병원과 적십자혈액원의 모든 AB형 혈액을 쏟아붓는 큰 수술이었는데, 400㎖ 혈액 148병이 수혈되었다고 한다. 이 정도면 몸속의 모든 혈액을 거의 10번은 갈아치울 수 있을 만큼 많은 양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생할 가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총알이 우뇌의 가장 큰 정맥을 손상시킨 것이 결정적이었다. 집도의는 사건 다음날 "꼭 살렸어야 했는데… 5㎜만 비켜 갔어도…"라며 침통해했다고 한다. 수술이 끝난 뒤, 박정희가 찾아와 회복실에서 약 20~30분 가량 육영수와 이별의 시간을 가졌다. 육영수는 이날 오후 7시경에 숨졌다.

2. 어이가 없을 정도의 대응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연설을 하고 있었을 때 '텅'하는 금속성 소리가 울리고 오케스트라석에 앉아있었던 연주부들이 일제히 고개를 뒤로 돌렸지만 객석에서도, 단상 위의 경호원들과 박정희 대통령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이 때 문세광은 당황한 나머지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 쪽을 달리면서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객석에 배치된 경찰들과 경호원들은 문세광이 권총을 들고 유유히 통로를 뛰어다니는 걸 보았는데도 아무도 문세광을 제지하지 않았다.[3] 문세광이 발사한 총탄이 연단에 맞아서 그렇지 조금만 더 위로 총알이 날아가 박정희 대통령을 맞췄었더라면 이들의 병크가 매우 컸을것이다.

이 때 가장 빠르게 상황판단을 한 사람이 당시 단상 위에 앉아있었던 박종규 경호실장인데 역광 때문에 객석이 잘 보이지 않았었지만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 쪽으로 뛰어오는 걸 보자마자 앞으로 뛰쳐나가 문세광을 쏘려고 했다.

당시 대응사격중인 박종규 경호실장어떻게 찍은거지

당시 송출된 방송화면 캡쳐장면.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 박종규 경호실장이고 왼쪽 하단에 검은형체가 문세광이다.

하지만 박종규 경호실장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권총을 뽑는 과정에서 오발을 일으켜 총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고 문세광을 쏘지도 못하였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놓치는 부분인데 당시 박종규 경호실장은 분명히 권총을 떨어뜨렸다. 당시 영상도 자세히 보면 박종규 경호실장 다리 사이로 뭔가 검은색 형체가 떨어지는 게 눈에 보이는데 그게 권총이다. 그런데 얼핏 보면 박종규 경호실장이 범인과 대적자세를 취한 게 잘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다. 경호실장의 임무는 범인을 응사하는 게 아니라 피경호인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연대로 나와 머리를 숙이게 해야 하는 것인데 박종규 경호실장은 이 임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오히려 범인을 쏘려고 단상 앞으로 뛰쳐나왔지만 정작 그 자신은 범인을 쏘지도 못했다. 그러나 경호원들의 대응상황은 박종규 경호실장보다 더 최악이었는데 박종규 경호실장은 그나마 범인과 대적 자세라도 취했지만 다른 경호원들은 총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오지 않고 있다가 문세광이 제압된 후에야 대통령을 호위하는 충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때 김덕년 경호원은 첫 번째 총탄이 들리자 바로 커튼을 재끼고 단상으로 달려오는 범인을 향해 조준사격을 했다고 했는데 이 때 이 총알은 문세광의 다리를 스쳤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인지는 불명.

문세광이 밖으로 체포된 후의 경호원들의 막장행위는 계속됐는데 바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연설을 그대로 놔두게 하는 병크를 저지른 것. 물론 사람들은 '담대한 박정희'라고 칭찬했지만 경호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명백한 병크다. 암살자가 제압되도 행사장 안에 제 2, 3의 저격범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경호원들은 사건이 일어나면 반드시 대통령을 피신시켜야 했었다.

3. 범인 문세광과 그 배경

범인 문세광은 1974년 5월에 북한의 대일 공작선이며 재일교포 북송선이기도 한 '만경봉호(萬景峰號)'에서 올해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박정희를 저격하라는 지령을 받았음이 밝혀졌다. 사실 반공 드라마에서 흔히 묘사되듯이 김일성이나 한덕수 조총련 의장이 문세광을 치하… 한 것은 아니고 그냥 저냥 찌질이가 한건 하겠다는 걸 북의 요원이 권총 훈련을 시킨 것이다. 문세광 자체가 애초부터 일본에서 활동하는 조선노동당 대외연락부 요원들에게 협조하는 인물이었다. 문세광 본인은 대단히 과대망상적인 인물로 소설 '자칼의 날'의 애독자였다고 한다. 그가 쓴 권총은 일본 경찰의 것으로, 오사카 미나미구의 한 파출소에서 훔쳤다.

오히려 문세광은 일본내 극좌 단체들과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문세광은 당시 "폭력 혁명 고교생 전선"이라는 일본 내 극좌 고교생 단체 출신이었고, 이름이 후덜덜 전공투의 재수생 버전인 "전국재수생공투회의"의 멤버이기도 했다. 전공투랑 이름은 비슷한데, 그렇게 큰 조직은 아니었고 학생운동의 외인부대 정도 취급을 받는 집단이었다. 동정적인 차원에서 학생운동에 참여한 비리비리한 놈들이라고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폭력혁명 고교생 전선은 '프롤레타리아 군단 전국 학생위원회'의 산하 조직이었다. 이 조직은 기존의 일본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제4인터내셔널 일본지부)라 불리는 트로츠키주의자 국제그룹 일본지부에서 이탈한 "제4인터내셔널 일본지부(볼셰비키-레닌주의파)"라고 불리는 신좌익 세력의 학생 조직이다. 모택동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바 있다., 사건 당시에는 전국재수생공투회의(全国浪人共闘会議. 약칭 "낭공투(浪共闘)". ろうきょうとう)의 오사카 지부원이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그룹 "늑대"가 이 사건에 호응하기 위해 미쓰비시 중공업 폭파사건을 일으켰다고 한다.

로공투는 분트계의 중앙파, 해방파 계열의 SL파, 아나키스트계의 SL좌파(SL은 러시아 혁명사회혁명당에서 따온것)의 주요 3파가 있었고, 그 외에 모택동주의파, 트로츠키를 위시한 국제주의의 제4인터내셔널 파가 있었다고 한다. 북한하고 딱히 큰 관련은 없었던 듯하다. 당시에는 북한이나 중국에 관한 정보가 부족한 형편이었고, 그래서 계파에 따라 북한과 중국에 대한 해석이 상당히 달랐다. 민족주의적 "반미애국" 좌파계열에서는 북한을 '민족 자주에 따른 프롤레타리아 자주국가'로 해석하는가 하면,주사파? 신좌파 국제주의자 쪽에서는 "좌파의 탈을 쓴 관료제 민족주의국가"로 해석하기도 한듯하다. 요도호 사건때도 그렇고, 북한하고 딱히 적대적이지 않는 한 좌파 단체 쪽에서는 "그래도 가장 가까운 반미 좌파 국가니까" 호의적으로 대하거나, 그래도 쟤들은 우리를 이해해 주겠지 정도의 시각으로 바라본 것이다. 우리가 남이가

문세광 입장에서, 일본과 한국은 세계혁명을 가로막는 제국주의의 보루이며, 이를 파괴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아예 박정희 저격 미수사건을 문세광 사건이라고 보며, 20세기 후반 일본 극좌 테러운동의 한 사건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일본 위키의 자료들. 전국 재수 공투회의 프롤레타리아 군단 문세광사건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

정리해 보자면 북한의 수뇌부의 직접적인 지령을 받은것 까지는 아니고, 그냥 조선노동당 대외연락부 공작 지도원이 공작금을 좀 주고 손 안대고 코풀려 하다가 실패한 사건(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 사건으로 박종규 경호실장이 경질되고 후임 경호실장차지철이 임명되었다.

4. 범인은 문세광이 아니다?

당시 사건 수사본부 요원으로 현장검증을 담당했던 이건우는 1989년 8월에 육영수를 죽인 게 문세광이 아니라는 내용의 양심선언과 함께 몇가지 의문을 제기하였다.

범인은 재일교포 출신의 문세광으로 일본식 이름은 난조 세이코(南條世光)였고,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라는 이름의 여권으로 입국하였다. 문제는 이미 문세광은 김대중 납치사건 때 반한 운동을 벌인 전적이 있어서 중앙정보부의 요시찰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이 문세광이 가짜 여권으로 한국에 건너오는데 오사카 총영사관은 문세광에게 비자를 내주었고, 이는 모두 중정에 보고가 올라갔다.

당시 문세광은 사건 당일 조선호텔에서 '서울 2바 1091' 번호판의 포드 20M[4]을 타고 나타났는데, 특별한 귀빈도 아닌 문세광에게 이런 고급 외제차를 제공한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이 일었다. 이 자동차는 승차입장카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립극장 정문을 통과했다.

또한 식장에 출입하면서 초청을 받은 사람에게 경호관이 가슴에 달아주는 비표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문세광은 남쪽 정문을 통과해서 입장하였는데 남쪽 정문을 경비하던 인력은 대통령경호실 1인, 경찰관 4인, 행사안내요원 3인의 총 8명이었다. 그리고 금속탐지기가 설치되었음에도 문세광이 어떻게 권총을 소지한 채 안으로 들어갔냐는 의문도 있다.

이날 식장에는 치안국(현 경찰청)을 비롯해 서울시내 중부, 성북, 성동, 용산경찰서에서 차출된 경찰 250명을 비롯해 국립극장 내외에 총 548명의 경찰관이 배치되었고 경호원, 중앙정보부 요원까지 더하면 600여명이 경비하고 있었지만, 경호실에서 나온 경호관들 외에는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다 한다.

8.15 기념행사장의 입장은 오전 9시 50분에 완료되었는데, 문세광은 행사 직전에 이미 착석했었으나 드디어 문세광이 비표를 달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 경호실 직원이 문세광에게 로비로 내보낸다. 하지만, 문세광은 이보다 23분 늦은 10시 13분에 다시 입장했다. 이때 경호관이 검문하자 문세광은 자신을 일본대사관 직원이라 했고 그대로 통과, 중부서 정보과장 최정환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때문에 아무리 일본대사관 직원이라 해도 박정희가 참석한 식장에 그렇게 쉽게, 그것도 입장이 다 끝난 상황에서 참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일었다.

문세광을 내보냈던 경호실 직원은 문세광이 여전히 비표도 없이 다시 입장해서 착석한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세광의 뒤에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것은 문세광이 앉은 자리가 공석으로 남아있던 맨 뒷자리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자리에 앉아있는 경호원을 제외한 모든 경호원은 빠져나오라는 무전이 계속 왔다고 한다.

케네디 암살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이 때도 총이 몇발 발사되었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재판부 사형언도 판결문 내용에 따르면 문세광은 총 5발을 쐈으며 1발은 오발로 자신의 대퇴부, 2발은 연설대 좌측, 3발은 불발, 4발은 육영수 여사의 우측 두부에 명중, 5발은 국기에 맞췄다고 나와있다.

하지만 이건우는 문세광은 총 5발 중 4발을 쐈고 1발은 오발, 2발은 연단, 3발은 태극기, 4발은 천장에 맞췄다고 양심선언에서 주장하였다. 5번쨰는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이 다섯번째 총탄이 문세광이 말한 3번째 불발탄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 시기 많은 이들은 총성이 총 7번 울렸다는 증언이 있다.

- 첫탄은 총을 꺼내다가 오발하여 문세광의 대퇴부에 명중, - 2탄은 연단, - 3탄은 불발. 오발이 아니라 불발이므로 이 3탄은 총성이 나지 않는다.- 4탄은 육영수의 오른쪽 머리, - 5탄은 태극기

여기까지는 문세광의 주장과 일치한다.

- 6탄은 장봉화라는 참석객이 맞았다. 이 총탄은 박종규 경호실장이 발사한 오발로 추정된다.- 7탄은 천장. - 그리고 의문의 8번째 총성.

경호실은 이후 현장을 모조리 뒤졌지만, 불발탄을 포함해서 6개의 탄자밖에 찾아내지 못해서 2개의 탄자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문세광이 총을 가지게 된 경우도 문제가 많다. 문세광의 총은 주일미군 부대에서 도난 당한 두 자루의 미제 콜트 M1911A1 권총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파출소 도난 현장에서 발견된 족적이나 지문이 문세광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그렇다고 해도, 소지 하지 않은 2번째 총의 경우도 문제가 많았다. 문세광은 기껏 훔친 총을 오사카 호수에 버렸다고 진술했는데, 이 총은 호수를 박박 긁었는데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조작극이라는 이야기가 많은 듯 하다.

SBS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소리분석이나 각도분석 등으로 고의적이 아니고 우발적으로 경호원이 쏜 총알에 육영수 가 사망했다는 주장을 내세워서 파문이 일기도 했다. 그것이 알고싶다 홈페이지에서 해당편을 무료로 다시 볼 수 있다. 326회(2005-02-12), 332회(2005-03-26) 당시 진행자는 배우 정진영. 이에 대하여 월간조선에서 유언비어와 음모론의 확산을 막기 위한 사건 관련 기사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북한의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는 아예 박정희가 정치적인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자작극을 벌였다고 주장한다. 제 손으로 와이프를 죽여서 전 국민을 북한이 일으킨 테러리즘의 공포에 놓이게 했다는 것. 실제 해당 영화에서는 육영수가 총에 맞아 절명하자 박정희는 안전하게 식장을 걸어 나가다가(...) 뒤를 슬쩍 돌아보고(...)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5. 사건 이후

문세광은 즉시 체포되어 중앙정보부 조사실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쏟아지는 구타에도 불구하고 완강히 입을 열지 않아 전혀 수사가 진행되지 못했는데, 당시 김기춘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의 법무비서관이던 검사로 있었다. [5] 조사에 투입된 당시 김기춘 검사는 문세광에게 담배를 권한 후, 그가 즐겨 읽었다는 소설 '자칼의 날'을 언급하면서 분위기를 어느 정도 풀었다. 그리고 "자, 사나이 대 사나이다. 당신이 무슨 얘기를 하더라도 난 100% 다 믿을테니 모두 말해보게."라고 말했고, 문세광 역시 "좋습니다. 선생께서는 저를 이해해주시리라 믿으니 전부 말하겠습니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드디어 진술을 시작했다.

특히 총에 대해 질문하자 문세광은 일본에서 훔친 두 자루중에 버린 한 자루의 위치를 그림까지 그려가며[6] 상세히 설명하고 이게 사실로 드러나는 등, 비로소 사건의 전말이 풀렸다. 또한 문세광은 중간중간에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그 중 하나가 '재일 조총련 정치부장 김호룡의 사주로 박정희를 암살하려고 했다'라는 것이었다. 지금도 많은 글들에서는 김호룡을 통해서 공작금을 받고 북한과 연계되었다고 이야기가 나오지만, 당시 일본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김호룡이 줬다는 공작금은 문세광의 모친이 준 돈으로 밝혀졌다. 무엇보다도 김호룡은 이 사건으로 한국 수사당국을 통한 어떤 조사조차 받은 적이 없다. 김호룡 연루설은 아무도 안 믿었다는 이야기다.

그 결과 문세광에게는 내란목적 살인,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출입국관리법 위반, 총포화약류 단속법 위반 등의 혐의가 적용되었고 사건 발생 4개월 뒤이자 대법원 확정판결 3일만에 1974년 12월 20일 오전 7시 30분 서울구치소의 사형집행장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사건의 여파로 직접적인 책임을 물어 박종규 경호실장과 양택식 서울특별시장이 경질되었다. 후임으로는 각각 차지철, 구자춘이 임명되었다. 양택식 서울특별시장은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에 열성을 기울여서 이 날이 개통식이었음에도 국립극장 행사 관리 책임이 서울특별시에 있기 때문에 경질되었다. 결국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식은 침울한 분위기에서 열렸으며 이로 인해 서울 지하철의 건설 계획 대부분이 뒤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저놈의 저격범 하나 때문에 2호선 신설동역 지하 3층 승강장이 죽게 된거다.[7]

그리고 그 해 9월 홍성철 내무부장관, 이봉성 법무부장관 등의 각료들이 경질되고 대신 김재규 건설부장관 등이 새로 임명되었다.

당시 새로 임명된 황산덕 법무부장관은 독실한 불교 신자라서 재직중에 절대로 사형 집행영장에 서명하지 않았다. 사형집행 서명은 법무부 장관 전결이다. 문세광의 경우는 결국 장관이 휴가내고 나가서 차관이 대신 결재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구치소장이 그에게 최후에 하고 싶은 말을 묻자 그는 창백한 얼굴로 울부짖으며 10분간 최후진술을 했다.

나는 정말 바보였어요… 외국에서 태어난 것이 한스러워요. 일본에서 속아만 살아… 속아 살았어요. 속아 살아… 결국 이렇게 되어버리다니… 박정희에게 정말 몹쓸 짓을 했어요. 육영수와 죽은 분(장봉화)에게는 정말 죽을 죄를 졌어요. 저도 그분들 곁으로 같이 보내주세요… 제 처에게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직 나이도 젊으니 재혼해서 제2의 인생을 살도록 전해주세요…….(실제 진술은 일본어로 했다.)

당시 사형집행 검사로 현장을 지켜봤던 조태형이나 수사본부장으로 사건을 총지휘한 김일두는 문세광의 최후진술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진범이 틀림없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재일교포 출신 암살범이라는 것 때문에 이 시기 한일관계도 상당히 악화되었다. 일본은 조사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고 사과 사절을 보내는 데에도 난색을 표했다. 사죄 이유에 대해서는 하단 각주 참고. 결국은 일본 수상이 직접 조문을 오면서 사죄가 이뤄졌다. 물론 김대중 납치사건같은 희대의 범죄를 벌인 터라 그런 점도 있었다. 실지로 이 사건에 대한 남한의 발표에 대해 일본 언론들은 히틀러의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연상케하는 독재자의 자작극에 불과하다는 논평을 했다. (참고로 독일 국회 방화사건은 나치의 자작극이 아니라는게 정설. 그냥 기가 막힌 타이밍에 터졌고 나치들은 그걸 최대한 이용해 먹었다). 박정희는 이때 일본과의 국교 단절도 생각하고 있었을 정도로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고, 미국도 더 이상 사태가 악화되지 않게 두 나라 사이를 중재해야 했다. 미국은 한국 정부가 지나치게 강경하게 나온다고 보고 더 이상 사태를 악화시키지 말라는 입장을 한국 정부에 전달했다. 당시 조폭들이 서울로 상경하여 손가락을 끊는 단지 시위를 벌이며 "또 다시 국모를 죽인 일본에게 원수를 갚자!"라는 시위를 벌였다. 조폭으로 보는 대한민국 100년의 역사 다큐멘터리에서 나오는 내용이다. 또 청와대에선 공공연하게 동경 폭격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다고 나중에 신문에 회고록이 실리기도 했다.

반면 박정희는 단기적으로는 나름대로 정치적 이득을 보았다. 그때까지 대외적으로 인권문제와 특히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일본에 숙이고 들어가야 했던 상황이었다. 김대중은 일본 정치인들의 초청으로 일본에 머물고 있었고, 한국 정보기관원들이 일본내로 들어와서 무단으로 망명객을 납치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측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런데 문세광이 일본 여권으로 입국하였으며, 암살에 사용된 총이 어쨌거나 일본 경찰이 도난당한 총이었기 때문에 일본이 책임을 피할 수 없었으모 기존이 불리한 상황이 극적으로 역전되었다. 미국 역시 인권문제에 대한 수위를 낮추었으며, 학생운동까지 약화되었다. 이후 박정희는 이 사건 1주일 이후 긴급조치 1호와 4호를 해제하는 것으로 이런 상황을 안정화 시켰지만 얼마 뒤 조총련계 재일교포 고향방문단 입국을 허락하는 대인배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대일본관계도 관리에 들어갔다… 물론 그렇게 유학온 사람중에 간첩혐의로 코렁탕 드신 분이 꽤 된다 이런 점이 자작설과 음모론이 탄생할 수 있게 만드는 배경이다. 피해자인 박정희가 가장 큰 정치적 수혜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육영수의 암살 이후 박정희가 더욱 비뚤어졌다고 하는 설도 있다.

결과적으로 볼때 이 사건은 결국 박정희의 죽음이라는 목적 달성에 성공했다는 의견도 많다. 육영수가 이날 사망하지 않았다면 박정희도 그렇게 비명에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인데, 우선 박정희에게 민심을 전달하고 지나친 강경책을 쓰지 않도록 조절자 역할을 했던 육영수가 사망함으로써 박정희를 조절해 줄 사람이 없어진 데다가, 아내를 잃은 박정희가 더욱 주색에 빠져듬으로써 판단력이 흐려지고, 비록 비리도 많았지만 경호실장 역할에 충실하려 노력했던 박종규가 경질되고 권력욕의 화신 차지철이 경호실장 자리에 올라 전횡을 일삼음으로써 결국 10.26 사건이라는 결과가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정치 사회 문제가 권력자 개인의 성격과 판단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므로 그저 "한 가지 요인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일 뿐이다.

6. 기타

우리나라 경호계에서는 이사건은 대단히 큰 사건중 하나로 반드시 배우고 가는 부분이다. 당시 문세광은 일종의 출입증이라고 할 수 있는 비표를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고급외제차를 타고 일본어를 쓰면서 한국어를 못 알아듣는 척 하자 몸수색없이 출입을 허가해버린 것이 당시 경호원들의 최대의 잘못으로 설명되어 어떠한 경우에서도 예외없이 출입증을 검사하고 몸수색을 하도록 교육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사망한 장봉화 씨의 경우, 2005년 유족과의 인터뷰에 의하면 성금을 일부 받았을 뿐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배상받지 못했다고 한다.#

KBS 반공 미니시리즈 멀고 먼 사람들에서는 대사없는 썬글라스의 역전의 명사수인 백찬기가 열연했다. 극중에서 수십병의 맥주병을 일발필중으로 맞춘다! 한덕수 조총련 의장이 직접 지령내리고 저격 성공후에 조총련 본부에서 만세 부르는 장면이 일품. 그러다 박정희가 안 죽었다는 걸 알자 데꿀멍한다.

MBC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는 김상중이 문세광 역을 맡았다. 위에 소개한 월간조선 기사에 충실한 고증을 했지만 역시 오발설을 암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그 김상중은 재미있게도 2008년부터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진행을 맡고 있다.

육영수의 딸인 박근혜는 당연히 매년 8월 15일 육영수 추도식에 참석했으나, 18대 대통령에 취임한 후에는 추도식에 불참했다. 광복절 기념 행사가 더 중요도가 큰데다 대통령 신분으로서 추도식에 참석할 경우 자칫 정치적 논란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1. [1] 매우 많은 사람들이 맨 위 사진에서 총을 정조준하고 객석 쪽을 겨냥하는 사람을 박종규 경호실장으로 착각하는데 사실은 박종규 경호실장이 아니라 박상범 당시 경호원이다. 박종규 경호실장은 이 때 총을 바닥에 떨어뜨린 상태였고 두 번째 사진에서 박상범 경호원 바로 옆에 행사기록부를 들고 있는 사람이 바로 박종규 경호실장이다. 그리고 두번째 사진 우측 하단을 자세히 보면 박종규 경호실장이 떨어뜨린 권총도 보인다.
  2. [2] 이 사진의 대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 이 때 유일하게 사건을 생생하게 촬영한 사람이 바로 당시 조선일보편집국 사진부였던 임희순 단 한 명이었다. 당시 사진기자들은 엄숙한 경축행사장에서 경호원들의 눈치도 있고 해서 일단 행사가 시작되면 전경을 찍고 연설하는 대통령 사진 몇 장 찍은 뒤 철수하는 게 일상적이었지만 유일하게 임희순 사진기자는 '어떤 현장이든 항상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라고 해서 끝까지 현장에 남아 끝내 엄청난 특종사진을 얻었다. 당시 위의 사진을 비롯한 총격 후 찍힌 사진들은 거의 다 임희순 기자가 촬영한 것이다.
  3. [3] 후에 경찰들은 당시 문세광을 경호원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4. [4] 북미 포드가 아닌 유럽 포드의 차량으로 유럽에서는 Taunus P7.2라는 모델로 당시 팔렸다. 당시 이 차는 현대자동차가 조립한 전력이 있던 차로 1968년부터 1973년까지 조립생산한 바 있다. 후계기종은 그라나다. 이후 그랜저로 옮겨진다.
  5. [5] 이 사람은 이후 법무부 장관,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지낸 바 있으며 유신 헌법 제정을 진두지휘 하였고, 법무장관 재직중이던 1992년 대선 당시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희대의 병크 초원복집 사건을 터트렸으며, 2004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을 적극 주도하였다. 2013년 8월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대통령비서실장이 되었다가 2015년 2월에 물러났다.
  6. [6] 이 때 문세광이 그림을 그릴테니 수갑을 풀어달라 하자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강한 반대가 있었지만, 김기춘 검사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풀어주라고 지시했다.
  7. [7] 취소선 드립을 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사실이다. 자세한건 신설동역 참조.

최종 확인 버전:

cc by-nc-sa 2.0 kr

Contents from Namu Wiki

Contact - 미러 (Namu)는 나무 위키의 표가 깨지는게 안타까워 만들어진 사이트입니다. (228.25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