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청

白樂晴

1938년 1월 10일 ~ (만 80살)

1. 개요
2. 생애
3. 가족관계

1. 개요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 사회운동가.

출판사 창작과비평사의 발간인으로 유명하다. 1962년부터 2003년까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영어영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한국 문학계에서 본격적으로 순수문학을 비판하고, 진보문학, 참여문학을 주창하며, 이에 대한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고, 나아가 이를 세력화하여 대한민국 문학계의 주류로 만든 장본인이다. 그가 제시한 민족 문학론, 분단 문학론은 대한민국 문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반독재, 반미 운동 등 사회운동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직접 작품을 쓰는 문학가가 아닌 문학평론가에 불과하지만 현 대한민국 문학계의 주류인 진보 문학계에서 '원로', '정신적 지주' 대우를 받으며 '문학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2. 생애

친가는 평안북도 정주군에 있었지만, 1938년 외가가 있는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태어나서 대구에서 자랐다. 그의 집안은 상당히 부유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백붕제(白鵬濟)[1]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 후 친일 관료가 되었다.[2] 백붕제는 일제의 군수품 공출, 일본국방헌금 모집, 일본군 후원, 일본군 유가족 방문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조선총독부는 그의 이런 친일반민족행위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조선총독부의 '지나사변공적조서'에 그의 이름을 올렸고, 쇼와 천황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하사받아 식민지 출신으로 대일본제국 귀족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었다. 참고로 경술국치의 주역 송병준이 나라를 팔아먹은 댓가로 받은 작위가 자작이다. 현재 백붕제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해방 후 그는 변호사로 일하다가 미군정 시기에 경기도 재무부장을 지냈다. 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6.25 전쟁납북되었고 한다.[3]

백낙청은 1955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브라운 대학교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어학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어 고등학교 때 이미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한다. 경기고 재학 중 '뉴욕 헤럴드 트리뷴'이 주최하는 세계고교생토론대회에 한국 대표로 선발되어 참가한 바 있다. 브라운 대학교 졸업 당시 전체 졸업생을 대표하여 졸업연설을 하였고,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다. 석사를 마친 후 일시 귀국하여 군 복무를 마쳤는데, 친일 명문가 자손, 미국 아이비리그 출신이라는 남다른 배경 외에도 자진 입대한 것 때문에 지식인 사회에서 주목을 받았다. 유학이 합법적 군 기피수단이었던 시절에 입대를 위해 귀국한 그의 사연은 1960년 한 일간지에 기사화되기도 했다.

군복무를 마친 후 다시 유학을 떠나 박사과정을 마쳤으며, 1972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2년 24세의 나이로 서울대학교 영문과에 강사로 부임했다.

1966년 1월 당시 27세로 서울대 전임강사이던 때에 공평동 태을다방 옆 문우출판사 한 켠을 빌어 창작과비평 1호를 펴냈다. 130여쪽에 불과한 얇은 잡지에서 그는 순수문학을 “지배계급의 오락과 실리에 이바지”하는 도구라고 폄훼, 비판하면서, 분단 현실을 극복하고 서민의 고통을 대변하며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는 것이 문학과 지식인의 소명임을 선언했다. 그는 문인을 시대를 이끄는 지식인으로, 문학을 민중의 현실을 보듬는 손길이라고 주창했다.

그 후 '창작과비평' 편집인으로서 진보적 평론활동으로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창비는 당시의 시대적, 정치적 정황과 맞물려 민주화를 열망하던 지식인 사회의 통로 역할을 하였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아르놀트 하우저가 쓴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완역하였다. 이 책은 우리나라 진보 문학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1974년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해직되었다가 1980년 복직되었다.

1974년 11월 고은과 함께 진보 문인 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을 주도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우리나라 진보, 참여 문학계를 대표하는 단체로 자리잡았다.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 개편되었고 2007년 '한국작가회의'로 또다시 명칭을 바꾸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백낙청은 이사장 등의 요직을 역임하며 민족문학작가회의를 지휘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대한민국 문단의 주류는 진보, 민중, 민족문학의 색채를 강하게 띠게 되었다.

백낙청은 당시 변변히 내세울 만한 문인이 없었던 참여문학, 민중문학계의 대표주자로 고은을 선택하여 그를 띄워주기 시작한다. 백낙청은 당시 성추문으로 얼룩져 있던 고은의 과오를 철저히 묻어둔 채 고은을 '우리 문학사의 우뚝한 존재, 미당 서정주를 쉽게 넘어선다'고 까지 찬양하며 그를 한국 문학계를 대표하는 문학가로 만들었다. 이문열 같은 작가는 그로 인해 문인들 사이에서 왕따가 되었다는 소문이…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창비가 고수해온 민중ㆍ민족문학 기조는 거의 무너졌다고 보는 게 대체적 시각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선거 때마다 진보지식인 사회를 대표하여 민주개혁진영 후보단일화를 주문한 것에 대해서도, 민주개혁진영이 보수 성향의 국민들로부터 오히려 외면을 받게 만든 것이라는 비난을 들었다. 일부 정치인들은 "선출되지도 않은 권력인 이른바 '진보원로'가 왜 민주적 정당성도 없이 뒤에서 정치인들을 배후조종하느냐"란 이의제기를 하기도 하였다. 특히나 부친과 백부가 납북된 처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 보수로부터 받는 비판보다 진보로부터 받는 비판이 더 크다. 후보단일화로 진보진영을 민주당계의 '민주개혁'세력의 종속물로 만들고, 계급적 좌파 정치세력보다 우파 정치세력에게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2003년 교수직을 정년퇴임하였고 현재는 명예교수이다.

정년퇴임 이후에도 정치, 통일, 반미, 친북 운동 등의 일선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통일 문제와 관련하여 그는 '연방제 통일론'을 적극적으로 설파하여 '연방제 전도사'로 불리고 있다.

2005년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06년에는 북핵문제에 관해서 미국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안전 보장을 해주면 핵을 포기하겠다"는 북한의 주장을 미국이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때 범여권후보 단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2010년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 진보 진영의 후보 단일화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곽노현 후보로 단일화를 이끌었다.

2010년 천안함이 폭침하자 적극적으로 나서서 음모론을 제기했다. 그는 지금까지 나온 정부 발표는 모두 엉터리라고 주장했다. 또 정부가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은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천안함의 침몰은 북한의 어뢰 공격 때문이 아니라 남북대결상태를 원하는 어떤 세력들이 침몰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정일이 지시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는 김정일 위원장이 그러한 정치적 결정을 내렸을 리가 없다며 일축했다. 천안함 사건 민군합동조사 결과 북한의 소행으로 결론이 나고 이명박 대통령의 담화가 발표되자 “이번 대통령 담화는 거의 초법적인 조치였다. (중략)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이 내놓은 7·7선언 이래 남북관계 22년의 성과를 단번에 없애버리는 것이다. 동시에 남북관계의 발전과 맞물려 진행되어온 한국 민주주의를 다 뒤엎을 수 있는 엄청난 행위다. (중략) 박정희는 말하자면 일시불로 정변을 일으켰고, 전두환은 12.12와 5.17의 2회 할부로 헌정질서를 뒤집었다. 이번 정권은 군사쿠데타를 안하는 대신 5년 장기 할부제로 야금야금 대한민국의 헌정질서를 변질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라면서 일종의 쿠데타에 비유하며 극렬히 반발했다. 백낙청은 이후 각종 강연과 인터뷰에서 지속적으로 천안함 폭침의 진실 규명을 촉구했다.

특히 2015년에는 신경숙표절 사건과 관련하여 많은 문인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표절인 것에 대해 "의도적 표절로 볼 수 없다"며 무리하게 실드를 쳐주다가 역풍을 맞은 것.[4]

2015년 11월 25일 창비 편집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아직도 창비 지분 31.1%를 보유한 최대주주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데다 새 발행인, 주간, 부주간을 맡게 될 차세대 인사의 상당수가 그와 사제관계 등으로 엮여 있기 때문에, 아직도 창비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3. 가족관계

백부가 백병원으로 유명한 의사양반 백인제이다. 형은 인제대학교를 설립한 백낙환[5]이다. 먼 친척은 시인 백석이다.[6]

원불교 여성회 초대회장 및 사단법인 한울안운동의 대표를 맡은 故 한지현 전 광운대 교수가 부인이다. [7]

백영경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교수는 그의 딸인데, 창비 편집위원직도 맡고 있다.


  1. [1] 1910년 출생.
  2. [2] 교토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 및 행정 양과를 패스하였다. 경상북도 내무부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군수를 거쳐 이사관까지 올랐다.
  3. [3] 가족들에 증언에 따르면 형 백인제 박사가 북한군서울에 들어올 때 피신했다가 잡혀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가겠다"고 하여 7월 19일에 집에 잠시 들렀는데, 그때 북한군이 집에 숨어 있던 백붕제를 발견하고 형제를 같이 끌고 간 것이라고 한다.
  4. [4] 이때 백낙청과 창비에 대한 비판의 선봉에 선 사람으로서 숙명여자대학교 국문과 권성우 교수를 들 수 있다. #
  5. [5] 194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 이과 을류(의예과에 해당)에 입학하여 1951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6. [6] 항렬로는 백석이 백낙청의 할아버지 뻘이다.
  7. [7] 백낙청 교수는 원불교 영어교전 번역을 주도하는 등 부인과 함께 원불교 내에서 많은 역할을 하였다. 공식적으로는 무교지만 원불교의 가르침에 매우 호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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