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공화국

이탈리아의 역사 Storia d'It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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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고귀한 베네치아 공화국[1]
Serenissima Repubblica di Venezia
Serenìsima Repùblica Vèneta

국기

국장


본국과 식민지가 표시된 지도[2]

697년 ~ 1797년

표어

Viva San Marco!(성 마르코 만세!)

국가

Inno Nasionale Veneto

위치

이탈리아와 지중해 연안 일부

수도

베네치아

인구

1557년 2,150,000명

정치체제

귀족공화제

국가원수

도제

주요 도제

엔리코 단돌로
야코포 티에폴로
프란체스코 포스카리
프란체스코 모로시니

언어

이탈리아어, 베네토어, 라틴어

종교

가톨릭

종족

베네치아인

통화

두카트

성립 이전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

현재 국가

이탈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그리스, 키프로스[3]

1. 개요
2. 역사
2.1. 건국
2.3. 제노바 공화국과의 전쟁
2.4. 오스만과의 대립
2.5. 이탈리아 북부 진출
2.6. 쇠퇴
2.7. 멸망
3. 베네치아인
4. 정치 체제
6. 여담
7. 연표
8. 관련 문서

언어별 명칭

이탈리아어

Serenissima Repubblica di Venezia

베네토어

Serenìsima Repùblica Vèneta / Venèsia

라틴어

Respublica Veneta

기타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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وندیك (Vened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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اَلْبُنْدُقِيَّة (al-bunduqiyya)

페르시아어

ونیز‎ (Ven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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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동북부 해안에 존재했었던 공화국으로, 수도베네치아였다. 중세제노바 공화국과 함께 서유럽중동을 잇는 양대 무역국가로 군림했던 국가다.

2. 역사

2.1. 건국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는 5세기경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이민족들[4]에게서 도망치려 했던 사람들이 이탈리아 동북부 아퀼레이아의 석호에 모여서 시작되었다. 7세기 경에 규모가 발전해 자신들의 지도자를 선출하고 동로마 제국황제에게 자치를 인정받게 되었으며, 전하는 바에 따르면 697년에 최초의 도제[5]가 선출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주로 서로마 멸망 이후 각종 게르만 이주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카롤루스 대제의 정복을 걸쳐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이었다가 중세 성기(High Middle Ages, 11세기-13세기) 이후 하나 둘씩 정치적으로 독립하기 시작했던 다른 북이탈리아 도시 국가들과 달리 베네치아는 애초에 기원이 로마 제국 자체의 인프라와 정통성을 비교적 잘 보존한 동로마 제국의 봉신인 자치 공화국으로 시작했다. 이런 독자적인 역사적 기원은 먼 훗날 중세전성기를 거쳐 근세의 시련과 위기에도 베네치아 공화국이 열강들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할 이데올로기적 원천이 되었다.

2.2. 동로마 제국의 몰락

원래 베네치아 공화국은 동로마 제국의 위성국으로 출발하였으며 어느 정도 세를 불려나간 11세기 경에도 계속 동로마 제국의 속국으로 지냈었다. 그 이유는 아드리아 해 일대의 지리적인 특징에 있는데 아드리아 해의 양안, 즉 발칸반도와 남이탈리아가 모두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은 베네치아가 약간이라도 반항할 낌새를 보이기만 하면 바로 해상봉쇄를 시행하여 베네치아의 목줄을 죌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71년 만치케르트 전투로 동방 방어선이 붕괴되어 동로마 제국의 발등에 급한 불이 떨어지고 동시에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 기사들이 남이탈리아 최후의 동로마 거점인 바리를 점령함으로서 베네치아 공화국은 더이상 동로마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된다.

십자군 전쟁 기간에는 여러 십자군들을 해로로 운송해주고 더 나아가서 우트르메르의 십자군 국가들에게 보급품이나 해군력을 제공해 줌에 따라 상당한 정치적, 금전적 영향력을 얻게 되었으며, 제4차 십자군 전쟁때는 황위에 오르게 도와준다면 거금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4세를 징벌하기 위해서 도제인 엔리코 단돌로가 직접 앞장서서 콘스탄티노플 공격에 나선다. 이미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 안에 주둔해 있었던 덕분에 어렵지않게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는데에는 성공했으나 그 당시 이슬람의 유럽 침략을 막는 유럽의 방파제로 기능하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탓에 정교회 국가들로부터 어그로가 끌리고 심지어 교황에게 파문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그로 인해 당시 무역이 많이 오가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무역 지대에 라틴 제국을 세워 서유럽 경제의 중심지이자 동지중해 무역의 독점 국가로 등극하면서 동지중해의 여왕이라고 불릴정도로 엄청난 부를 과시했었다.

2.3. 제노바 공화국과의 전쟁

13세기~14세기에는 제노바 공화국과 4차에 걸친 전쟁을 수행했다. 1261년 라틴 제국이 니케아 제국에게 멸망하고 미카일 8세가 동로마 제국을 부흥시키자 베네치아의 소아시아흑해 무역은 큰 타격을 입었고, 베네치아의 빈 자리를 동로마 제국과 손을잡은 제노바 공화국이 차지하여 양국은 동지중해에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베네치아만큼의 해군 역량을 보유했던 제노바였기에 때로는 결정적인 패배를 겪기도 하였고, 특히 4차 전쟁에서는 제노바, 헝가리, 파도바에 의해 도시 전체가 봉쇄되어 멸망의 위기에 처했지만 반격을 가해 실지회복에 성공한다.

제노바와의 전쟁으로 베네치아는 섬을 둘러싼 육상 영토를 확보할 계획을 세웠다. 베네치아 인근 육상 국가인 파도바가 제노바 편에 들면서 순식간에 도시가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4차 전쟁이 끝난 뒤 베네치아는 평화적인 합병 또는 중상모략을 통해 롬바르디아 내륙으로 본토 속령들을 넓혀 나갔으며, 1402년에는 밀라노까지 영향권 하에 넣게 된다.

한편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기치 아래에서 부활한 동로마 제국은 잦은 전쟁과 막장외교, 내전등으로 말미암아 다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6] 그 틈을 타서 오스만 1세가 오스만 제국을 세우고 동로마 제국과 트레비존드 제국의 잔여 아나톨리아 영토를 잠식해 나가기 시작한다. (1299)

2.4. 오스만과의 대립

오스만 제국동로마 제국을 공격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때, 베네치아는 대규모 함대를 편성해 지원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교황청과의 협상 등이 발목을 잡은데다[7] 베네치아 본국에서도 우선 콘스탄티노플로 급히 가라는 명령을 취소하고 에게 해의 섬 곳곳에 있는 함대를 모두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라고 명령하는 바람에, 그리스 근해까지 진출했지만 콘스탄티노플 구원에는 실패했다.

베네치아 구원 함대가 제때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면 오스만 함대의 포위를 풀 수 있었을 가능성이 많고[8], 그렇게 되면 공방전 전체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었다.[9] 한편 콘스탄티노플의 베네치아 거류구는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베네치아 공화국의 깃발을 내걸고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최후까지 싸웠다.

그렇지만 메흐메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은 베네치아 단독으로 육상전을 벌이기에는 너무 강대했다. 육군이 허약한 베네치아가 다른 서유럽 국가들의 도움 없이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에 끼어들었다고 해서 로마의 멸망을 막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끼어들었다면 훨씬 빠르게 동지중해의 세력권을 상실했을 수도 있었다. 이 때의 동로마 제국은 이미 군사적 방파제로서의 역할을 완전히 상실하고, 그저 콘스탄티노플과 펠로폰네소스 반도 일부[10]만으로 오스만 제국에 외교적으로 빌붙으며 간신히 생명만 유지하고 있던 불안한 상태였다. 서유럽 전체가 연합해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했다면 모를까, 베네치아 공화국 혼자서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15세기 이후로는 오스만 제국과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두고 충돌했다. 베네치아는 적은 영토를 가지고도 발칸 반도소아시아, 서아시아 일대를 세력권에 넣었던 오스만 제국과 수백년을 싸웠다. 오스만 제국을 창건한 투르크인이 본래 유목민족이어서 바다에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11] 그러나 이마저도 오스만 제국에 케말 레이스라는 걸출한 해군 지휘관이 등장하고 셀림 1세의 치세(1512~1520)에 직속 함대의 수를 늘리며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해적들을 해군으로 끌어들이는 등 해군을 크게 강화하면서 유명무실해진다. 다만 베네치아는 말이 도시 국가지, 당시 기준으로 결코 작은 국가가 아니었다. 영토도 일반적인 도시 국가에 비하면 컸고, 인구도 1557년에는 2,150,000명에 달해 역시 무척이나 많았다.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답게 도시화율도 엄청나게 높았다.

오스만 제국과 동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1499년부터 1503년까지 전쟁을 하였으나 패배한 후, 4차 십자군 후부터 유지되고 있던 동지중해에 대한 독점 지배권을 상실한다. 물론 '독점적인' 지배권을 상실했다는 것이지 동지중해에서의 베네치아의 영향력은 1669년 크레타 공방전이 끝난 후 크레타의 상실 이전까지 유지된다.

2.5. 이탈리아 북부 진출

식민지의 상실을 만회하기 위해 진출 방향을 이탈리아 반도 내부로 돌려 이탈리아 북부로 진출했으나 체사레 보르자와 교황 율리오 2세에게 저지당했다. 특히 율리오 2세가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프랑스를 끌어들여 결성한 캉브레 동맹과 벌인 1509년 5월 아냐델로 전투에서 베네치아는 처참히 패배하고 그동안 얻은 영토를 다 토해내게 된다.

그후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 세력에 의해 북이탈리아 영토를 잃은 데 불만을 품고 있던 프랑스와 다시 동맹을 맺고 1515년에 이르러 아냐델로의 패배로 인한 피해를 만회하고 영토를 회복하지만, 북이탈리아에서 더이상 영토를 크게 확장하지는 못했다.

2.6. 쇠퇴

동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 무역 경로를 독점하게 된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동지중해 패권을 잃게 되고, 16세기초 1520년대에는 스페인포르투갈 등이 대서양을 이용하는 무역 루트를 개척하면서 전통적인 베네치아 무역의 영향력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1521년에는 포르투갈을 통해 베네치아가 독점하던 향료가 더 싼 가격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자 전량을 구매하겠다고 절박하게 부탁했으나 거부당하기도 하였다.[12] 그러나 여전히 바다에서는 매우 강했고, 갤리가 사용되던 1600년대 전까지는 유럽 최강의 해군국 중 하나였다. 1571년 베네치아는 스페인, 교황령과 함께 신성 동맹 함대를 구성하여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을 신나게 두들겨 팼다. 그러나 키프로스를 상실했고[13] 전염병으로 도시 인구의 30%가 죽어나가기까지 했다.

그리고 레판토 해전 전후로 나폴리 왕국과 관계가 나빠져 곡물을 수입할 수 없게 되자[14] 어쩔 수 없이 오스만 제국과 무역 협정을 체결하였는데, 당연할 수도 있지만 기독교 국가들, 특히 스페인은 엄청나게 반발했다. 이후로 지브롤터 해협을 못 건너게 되어 주요 수출 대상이었던 영국에 가지 못하게 되었고, 외교 관계가 나빠져 조선소에 필요한 나무를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레판토에서 패한 오스만 제국이 서지중해로의 진출을 포기하는 대신 해적들에게 더 큰 힘을 실어 주어 진출을 방해하기로 결정해 베네치아의 청년들이 선원이 되는 전통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점점 고립주의적으로 변하게 된 베네치아는 교황과의 다툼 끝에 파문까지 당하고 말았다. 이후 베네치아는 예전의 부와 힘을 잃게 되었다.

그래도 1600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도였던 베네치아의 인구는 140,000명에 달할 정도였고 이후에도 한동안 무역 대국으로 행세했으나 오스만 제국에 의해 무역 거점들을 하나둘씩 빼앗겨나가는 사태까지 해결하지는 못했다. 17세기에는 베네치아 최후의 무역 거점인 크레타를 두고 무려 20년 넘게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 이 전쟁에서 오스만은 수많은 병사와 무기로 크레타를 맹공했지만, 베네치아는 당대의 부국답게 엄청난 보급으로 대항했다. 그러나 결국 이 전쟁은 양국의 재정을 파탄 상태로 만들었고, 더 이상의 전쟁은 조국에 해가 된다고 판단한 베네치아 수비대 측 사령관 프란치스코 모로시니(1619~1694)가 1669년에 항복함으로써 크레타는 오스만 제국에 넘어가게 된다.

이 전쟁에서 양국은 엄청난 돈을 썼는데, 항복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이 크레타 1년 방어에 사용한 돈은 이미 베네치아의 1년 세입을 초과했다. 이후 모로시니는 2차 빈 공방전에서 오스만이 패배하자 결성된 신성 동맹에 베네치아가 참가하자 복귀, 베네치아군을 이끌고 그리스에서 오스만군과 싸웠으며 1688년에 도제로 선출되었고 1694년에 사망했다. 1699년에 신성 동맹이 승리하면서 체결된 카를로비츠 조약에서 베네치아는 크레타를 수복하지 못했지만 보상으로 모레아(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부)와 일부 영토를 오스만에게 할양받았다. 그 후 베네치아는 모레아를 다시 오스만에게 잃었지만 본토 속령[15]에서의 농업, 무라노 섬의 유리공예와 가공기술, 그리고 관광업으로 국가를 유지했다. 베네치아는 자신들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아드리아 해에 다른 세력을 들이지 않는 데 주력했고, 1716년 코르푸 섬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며[16]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17]

2.7. 멸망

1797년 당시 북이탈리아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을 저지하기 위해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북이탈리아를 침공하여 이탈리아 전쟁이 벌어졌다. 이때 베네치아 공화국은 합스부르크 제국 편에서 싸웠다. 그 결과 나폴레옹에 의해 점령당했고 베네치아 공화국은 멸망했다. 이 당시 베네치아의 해군력은 전성기의 모습을 완전히 상실해서, 전투함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함선이라곤 갤리선 7척을 포함한 11척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군이 압류한 함선이라곤 조선소에서 건조 중이던 프리깃 2척이 전부였다. 이 프리깃 2척은 나중에 이집트 원정에서 나폴레옹이 프랑스 본국으로 탈출할 때 사용한 선박이기도 하다.

나폴레옹은, 베네치아를 관통하는 거대한 Z자(혹은 S자) 형태의 대운하를 보고 경탄하여 극찬했다고 한다. 이탈리아 전쟁 결과 맺어진 캄포포르미오 조약(1797년)으로 프랑스는 합스부르크로부터 밀라노 공국, 만토바 공국 등을 획득하여 북이탈리아에 프랑스의 괴뢰국인 치살피나 공화국을 세웠다. 대신 보상 차원에서 베네치아를 합스부르크에 할양했다. 그리하여 베네치아는 합스부르크의 통치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멸망할 당시였던 1800년 베네치아의 인구는 140,000명으로 과거보다 늘어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상당한 인구였다.

3. 베네치아인

베네치아인들은 자신의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강하였다고 한다.[18] 그런 이유로 달마티아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식민지의 주민들을 가혹하게 대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오스만 제국에게 키프로스이 몰래 오스만제국으로 가서 쉴레이만 1세에게 키프로스를 정복해 달라 했고, 키프로스가 함락당할 때 기독교도들이었던 키프로스인들이 공화국의 혹독한 지배 때문에 오스만 제국군을 환영할 정도였다 한다.[19]

이 차별은 식민지 주민들 뿐만 아니라 섬 위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과 이탈리아 본토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도 존재하였고, 때문에 후기에 베네치아 출신이 아닌 본토 출신의 귀족이 도제가 되자 망조라며 불안해하기도 한다. 베네치아인들의 우월주의는 이와 같이 식민지 주민들의 반발을 사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애국심 덕분에 키오자 전투 같은 상황에서 평범한 시민들이 나라에 돈을 기부하고 군에 입대해 결국 승리한 경우도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나폴레옹에게 멸망 당하고 끝내 재건하지 못했던 원인 중 하나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과 오랜 세월동안 대립관계였지만 오스만 황제의 후궁들 가운데 베네치아 출신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셀림 2세의 애첩인 누르바누 술탄[20]과 무라트 3세의 애첩인 사피예 술탄이 이들이라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누르바누의 경우 유대계라는 주장도 있는데다 사피예는 알바니아 출신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누르바누는 기록에 따라 베네치아를 싫어했다고도 하지만 오스만 제국 내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도 하며, 사피예의 경우 확실히 친베네치아적이어서 콘스탄티노플 주재 베네치아 대사가 본국에 '이 여자 잘 구슬리면 우리 공화국에 유리할 듯요' 하는 식의 보고서를 써 보내기도 했다.

참고로 공화국의 재기를 주장하는 정당의 조사에 따르면 독립을 원하는 주민의 수가 무려 89%라고 한다. 위 투표는 온라인 투표라서 실제 여론과는 어느정도 차이가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그럼에도 베네토 지역이 다른 북부 지역에 비해서도 독립을 원하는 목소리가 강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탈리아 정부가 허락해줄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경제난이 심화되어 주민들의 반발이 현재보다 과격해진다면 몇 세기만에 부활하는 공화국을 볼 지도 모를 일이다.

4. 정치 체제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치체제는 유력 인사들 간의 집단지도체제인 과두 공화정이었으며 그리스의 아테네 못지 않은 폐쇄적인 체제였다. 사실상 야당이 없는 일당 독재[21]였다.

그러나 명색이 '공화국' 이라는 간판이 걸린 이상,[22] 베네치아는 이념적으로는 도시를 시민들의 공공재산으로 여겼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베네치아 공화국은 소수의 가문이 통치하는 과두정적 요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 공화국이 궁극적으로는 많은 시민들의(최소한 당시의 기준으로는 '많은') 정부와 주권에 대한 참여를 지향하는 체제였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대 공의회(Mazor Consegio)의 회원들이 투표를 통해 지도자인 도제를 선출했으며, 일단 선출된 도제의 임기는 종신이었다. 하지만 실제 국가 최고 권력은 도제와 그 보좌관 6인, 그리고 임기 1년의 위원 10명으로 구성되는 10인 위원회(Consejo de i Diexe)에 있었으며 도제도 10인 위원회 내에서는 다른 위원들과 동등하게 단 1표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10인 위원회에게 체포되어 사형당한 도제도 있었다. 이러한 정치형태로 인해 메디치 가문이 권력을 장악한 피렌체 공화국같이 특정 가문이 장악한 공화국이 출현했을때도 베네치아 공화국은 공화정을 유지하였다.

시뇨리아(Serenissima Signoria) 역시 국가 권력의 중추를 담당했다. 오죽했으면 도제의 장례식날에서조차 공화국 시민들이 상복도 입지 않고 도제는 죽었지만 시뇨리아는 살아있다며 노래할 정도였다. 이 시뇨리아는 10인 위원회와는 별개로, 도제와 그 보좌관 6인, 그리고 40인 위원회의 지도자 3인으로 구성되어 대평의회에서 10인 위원회의 위원 10명과 함께 총 스무 개의 권좌에 도제를 중심으로 앉아 대평의회를 주도했다.

베네치아 도제는 동로마 제국의 봉신으로서 달마티아 공작을 겸하고 있었다. 실제로 8세기~9세기까지 베네치아는 명실상부한 동로마의 위성국가였으나, 9세기 이후 아랍과 노르만의 침입으로 남이탈리아의 동로마 거점들이 무너지자 베네치아는 명목상의 봉신으로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 지위는 베네치아가 서유럽 세력[23]으로부터 정치적, 종교적 독립을 지키는 적당한 명분은 될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강력한 상업을 통해 이룬 재력과 군사력과 서유럽 최고의 외교력으로 이것을 충분히 활용했다.

5. 무역

  자세한 내용은 베네치아/무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여담

로마인 이야기의 작가이자 로마 제국 빠순이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 다음으로 빠심을 드러내는(즉, 편애하는) 국가다. 그녀의 저작으로는 <바다의 도시 이야기>가 있으며, 다른 중세 지중해 관련 책에서도 베네치아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나오며 비중은 상당히 높다. 그러니까 적당히 필터링해서 읽자.

진지하게 베네치아사를 읽고 싶다면 존스홉킨스 대학의 F. C. Lane 교수가 쓴 <Venice: A Maritime Republic>을 읽어 보는 것도 좋다. 시오노 나나미도 이 책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하며, 내용도 한 권에 베네치아사의 많은 것을 담고 있다. 흠이라면 한국어로는 번역이 안 되어 있다는 것과, 페이퍼백판은 인쇄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다는 것이다.

문명 5의 확장판 멋진 신세계에서 최초의 플레이어블 도시국가로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코에이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도 7대 국가(선택 6+망명 1) 중 하나지만... 문제는 그 위치가 구석인데다 아드리아 해의 영원한 역풍 때문에 유저 수가 극히 적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호 성인은 복음사가 마르코이지만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고 아마세아의 성 테오도로를 수호성인으로 모셨다. 당시 성 마르코의 유해는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는데 알렉산드리아가 이슬람의 손으로 넘어간 이후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유해를 돼지고기 사이에 숨겨서 밀수해 왔고 그 이후 성 마르코에 봉헌된 산 마르코 대성당이 지어졌다. 그 과정에서 베네치아의 상징 역시 성 마르코의 상징인 사자로 정해졌다.

1104년 경에 아르세날레 디 베네치아[24]라는 지금으로 치면 군수 조선 복합산업단지라고 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고 운영했다. 이곳을 통해 베네치아는 함선과 무기의 규격화, 표준화 등을 이룩하였다. 문명6에 베네치아군수창고라는 이름의 불가사의로 등장한다.

7. 연표

425년 베네치아 건설
697년 건국 (도제 선출)
742년 말라모코 천도[25]
810년 프랑크 욍국 vs 동로마 제국
828년 성 마르코 유해 밀반입
887년 나렌테[26]에 패배, 아드리아 해 통행료 납부
996년 연공 납부 중단
1000년 나렌테 격파, 아드리아해 장악
1082년 알렉시오스 1세금인칙서[27], 무역특권
1099년 산 마르코 대성당 축성
1104년 무기고 건설
1110년 십자군 전쟁 참전
1117년 헝가리 왕국에게 달마티아 상실[28]
1171년 마누일 1세의 베네치아 상인 추방, 전쟁
1182년 콘스탄티노플의 라틴인 학살
1202년 4차 십자군, 자라 함락
1204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1211년 크레타 획득
1256년 ~ 1270년 1차 제노바 전쟁 (승리)
1271년 마르코 폴로의 여행 (~ 1295년)
1284년 두카트 금화 주조 시작, 2차 제노바 전쟁 (~ 1299년, 무승부)
1298년 쿠르촐라 해전
1310년 10인 위원회 발족
1348년 흑사병
1350년 ~ 1355년 3차 제노바 전쟁
1377년 ~ 1381년 4차 제노바 전쟁
1380년 키오자 해전
1386년 코르푸 획득
1405년 베로나, 비첸차, 파두아 획득
1409년 달마티아 획득
1420년 아퀼레이아, 두라초 획득
1426년 브레시아 획득
1453년 동로마 제국 멸망
1454년 로디 평화조약
1463년 ~ 1479년 1차 튀르크 전쟁
1470년 네그로폰테 상실
1489년 키프로스 획득
1495년 브린디시, 오트란토 등 아풀리아 해안 획득[29]
1499년 크레모나 획득, 2차 튀르크 전쟁 (~ 1503년)
1509년 아그나델로 전투
1514년 리알토 대화재
1534년 프레베자 해전
1537년 ~ 1540년 3차 튀르크 전쟁
1569년 5개 은행 파산, 무기고 화재
1570년 ~ 1573년 4차 튀르크 전쟁
1571년 키프로스 상실, 레판토 해전
1575년 ~ 1577년 역병
1591년 리알토 다리 완공
1605년 성무중지령[30]
1615년 ~ 1617년 우즈코키 해적과의 전쟁
1630년 ~ 1631년 역병
1645년 ~ 1669년 5차 튀르크 전쟁
1669년 크레타 상실
1684년 ~ 1699년 6차 튀르크 전쟁
1687년 모레아

재정복, 아테네 일시 점령
1714년 ~ 1718년 7차 튀르크 전쟁
1715년 모레아 상실
1785년 ~ 1786년 바르바리 해적 소탕전
1796년 비첸차 등 육지 영토 상실
1797년 나폴레옹의 진군, 멸망 (10/18)

8. 관련 문서


  1. [1] '가장 고귀한' 이라는 명칭은 국가의 주권을 의미하며 유럽 여러 국가의 호칭이었다. 대표적으로 제노바 공화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이 '가장 고귀한 공화국' 이었으며 현재는 산마리노가 유일하게 '가장 고귀한 공화국' 을 쓴다. 해당 공화국의 군주는 '가장 고귀한 자'(Most Serene Highness) 라고 호칭한다. Serene의 뜻이 고귀와 함께 고요가 있다 보니 이를 가장 고요한 공화국으로 오역하기도 한다.
  2. [2] 전성기의 베네치아 공화국은 말 그대로 동지중해의 여왕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드리아 해의 여왕' 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3. [3] 미승인국까지 포함하면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도 해당한다.
  4. [4] 일설에는 아틸라의 침공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도 한다.
  5. [5] doge, 지도자의 명칭으로 한국어로는 '총독', '통령', '원수'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었으나 총독은 다른 나라의 식민지의 통치자라는 뜻이므로 틀린 말이다. 최근에는 그냥 도제라고 음역하기도 하며, 수공업자 길드의 도제(徒弟, apprentice)와는 다르다.
  6. [6] 무엇보다도 알짜배기 영토인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에게 해 연안의 섬들이 몽땅 다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파먹힌 것이 컸다. 소아시아 해안지대는 투르크가 갉아먹었고.....
  7. [7] 당시 교황은 자기네들도 구원 함대를 모으고 있다면서 함께 보내자고 제안했지만, 교황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신의 말을 들을 것으로 예상했던 이탈리아의 중소 도시 국가들이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하여 끝내 함대를 결성하지 못했다.
  8. [8] 당시 오스만은 육군 강국이었지만 해군은 연안해군 수준이었다.
  9. [9] 오스만 제국이 에게 해와 마르마라 해 사이에 위치한 다르다넬스 해협의 양쪽 해안에 요새를 세웠기 때문에 베네치아 구원 함대가 접근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공방전 초기이기는 했지만 제노바의 함선 3척과 크레타에서 군량을 구입하고 돌아가던 동로마 함선 1척 등 4척이 오스만 함대의 포위를 뚫고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기도 했다. 물론 오스만 요새의 대포에 맞아 적잖은 타격을 입었겠지만, 접근 자체가 불가능인 상태는 아니었다.
  10. [10] 그나마도 직접 지배가 아니라 황족이 다스리는 신하국 영토였다.
  11. [11]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때를 예로 들면, 30척의 함선으로 제노바와 동로마 함선 4척을 상대로 쩔쩔맨 끝에 패한 일도 있다.
  12. [12] 사실 베네치아 입장에서는 절박했겠지만, 포르투갈이 들여온 향신료를 싸게 사서 되팔겠다는 것은 독점을 지속하겠다는 의미였다. 포르투갈의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그냥 팔면 되는 걸 굳이 베네치아를 통해 팔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곧 오스만 제국이 인도양 함대를 창설하여 포르투갈을 견제하기 시작한데다 인도인들의 저항도 있어, 알렉산드리아-베네치아를 통한 향신료 교역은 다시 증가했다. 포르투갈 측 첩보 문서에 그냥 인도 제국을 포기하고 베네치아에서 향신료를 사는 게 이익이라고 쓰여 있기까지 했던 시기도 있었다. 이런 상황은 네덜란드라는 효율적인 상인 국가가 등장하면서 막을 내린다. 그리고 범선 시대에 아프리카를 왕복해야 하는 비용은 절대 적지 않은만큼, 동지중해 무역은 여전히 수익성이 있었다. 다만 베네치아가 오스만이랑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중이라...
  13. [13] 당시 콘스탄티노플 주재 베네치아 대사에게, 오스만 제국의 재상이었던 소콜루 메메드 파샤가 한 말에서 인용. 다만 그는 본래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던데다 레판토에서 패한 책임을 자신에게 묻는 관료들이 있었기에, 본심보다 조금 강경한 발언을 한 것 같기도 하다.
  14. [14] 당시 나폴리는 스페인에서 파견한 부왕(副王), 즉 총독이 다스리고 있어서, 사실상 스페인 영토였다. 그리고 신성동맹을 결성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스페인과 베네치아의 이해관계가 어긋나고 있었기 때문에, 나폴리와의 사이도 틀어지는 게 당연지사.
  15. [15] 본토를 제외한 이탈리아 지역을 말한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본토는 어디까지나 섬이었다.
  16. [16] 결정타는 당시 불었던 태풍으로 오스만 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퇴각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3년 후, 극강의 방어력을 보여준 코르푸 섬의 요새는 낙뢰가 화약고 위로 떨어져 대파되고 만다
  17. [17] 18세기의 베네치아의 바이올리니스트안토니오 비발디의 전기를 보면 비발디가 활약하던 당시의 베네치아는 쇠퇴 국면에 처해 있었다는 표현이 굉장히 많다. 17세기 이후로 전쟁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전쟁 고아가 급증했고, 천주교 사제 시절 비발디의 주 업무가 이런 고아들을 돌보면서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18. [18] 이 때문에 라이벌이였던 제노바 공화국밀라노 공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부침을 겪으며 코르시카 섬을 프랑스에 넘길 때, "우리 공화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 이라며 그들을 비웃기도 했다.
  19. [19] 사실상 노예 제도에 가까웠으며, 키프로스만 그런 것이 아니라 크레타나 모레아도 마찬가지였다. 베네치아는 식민지를 효율적으로 활용은 했지만 민심은 전혀 얻지 못했던 것이다.
  20. [20] 레판토 해전에서 베네치아 함대를 지휘한 사령관이자 베네치아의 국가원수로 선출된 세바스티아노 베니에르의 혈육이라고 한다. 다만 오스만 제국이 부리는 해적들이 납치한 것이라, 누르바누가 황후가 되는 과정에서 세바스티아노가 관여한 바는 없다.
  21. [21] 물론 베네치아 역시 정치적 파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22. [22] 공화국이라는 말에서 군주의 부재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23. [23] 교황청, 신성 로마 제국 등.
  24. [24] 영어식으로는 아스날 오브 베네치아, 즉 베네치아의 병기창이라는 뜻이다.
  25. [25] 원래 중심지는 헤라클레아
  26. [26] 크로아티아계 슬라브 해양 세력
  27. [27] 콘스탄티노플의 무역 특권 장악
  28. [28] 1171년에 회복
  29. [29] ~ 1530년
  30. [30] ~ 16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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