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티움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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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동서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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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1]
Imperium Romanum

국기

국장[2]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기의 최대 강역

기원전 753년(286년[3]/330년[4]/395년[5]) ~ 1204년
1261년 ~ 1453년

표어

Βασιλεύς Βασιλέων,
Βασιλεύων Βασιλευόντων
(임금들의 임금, 통치자들의 통치자)

위치

남동유럽,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수도

니코메디아 (286 ~ 330)[6]
콘스탄티노폴리스 (330 ~ 1204, 1261 ~ 1453)
니케아 (1204 ~ 1261)[7]

정치체제

전제군주제[8]

국가원수

황제(임페라토르, 바실레우스)

언어

라틴어,[9] 중세 그리스어, 기타 지방 언어

종교

초기 기독교 보편교회정교회

주요사건

286년 최초의 동서 로마 분할통치
293년 사두정치의 시작
313년 밀라노 칙령
324년 콘스탄티누스 1세의 제국 재통일
330년 노바 로마 천도[10]
380년 기독교 국교화
395년 최종 동서 로마 분열
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
532년 니카의 반란
552년 이탈리아 재정복
626년 사산 왕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
627년 니네베 전투
636년 야르무크 전투
674년 우마이야 왕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
698년 카르타고 상실
717년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726년 성상 파괴령
751년 라벤나 총독부 상실
843년 성상파괴령 철회
969년 안티오키아 수복
1018년 불가리아 정복
1054년 동서 교회의 상호 파문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1081년 알렉시오스 1세 즉위
1096년 1차 십자군 원정
1122년 베로이아 전투
1180년 마누일 1세 붕어
1185년 안드로니코스 1세 폐위
1204년 4차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1261년 니케아 제국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1341년 제2차 시민전쟁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멸망)

통화

솔리두스, 히피르피론

성립 이전

최종 동서부 분열 이전의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오스만 제국

1. 개요
2.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용어
3. 고대 로마와의 연속성
4. 관련 도서
6. 제국의 이모저모
6.1. 통치자들
6.2. 전성기
6.3. 장대한 존속 기간
7. 경제
7.1. 제국의 인구
8. 군사
9. 문화
10. 상징물
11. 민족
12. 외교
12.1. 서유럽
12.2. 중동권
12.3. 유목민
12.4. 슬라브
13. 관직
14. 평가
14.1. 근대의 평가
14.2. 현대의 평가
15. 역사적 의의
16. 국호 표기법
17. 매체
17.1. 등장하는 작품들
17.2. 언급되는 작품들
17.3. 모델로 한 것들
18. 끝나지 않은 이야기
18.1. 현대 그리스
18.2. 러시아 제국
19. 역사보기 틀

1. 개요

중세의 로마 제국

330년 5월 11일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노바 로마', 즉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하면서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대'가 시작되었고, 1123년이 흐른 후인 1453년 5월 29일에 오스만 제국에게 수도가 함락되면서 멸망한다.

흔히 "동로마 제국" 또는 "비잔티움 제국"이라 알려져 있는데, 이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용어는 편의상 로마 제국의 중세 시기를 고대와 구분하기 위해 쓰이는 것이다.

(후대 임의의) 로마 건국년도인 기원전 753을 기준으로 하면 무려 2천 년 제국. 기원전 753부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476년까지는 1229년인데, AD 330년부터인 비잔티움 시대는 1123년이다. 이 때문에 비잔티움 제국 말기에 들어서면 "비잔티움 제국 =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년왕국" 취급을 받고 예수가 재림할 때 멸망한다는 믿음까지 생겨났다. 제국으로서의 시기만 따지면 이탈리아의 로마가 수도이던 로마 제국은 503년밖에 지탱되지 못했다. 부연하면 410년 로마 대약탈 전후부터 서로마 제국의 말기 수도는 라벤나였지 로마도 아니었다! 그 이전부터 밀라노(286 ~ 402)도 수도 기능을 했다.

비잔티움 제국이라고도 불리는 '동로마 제국'은 고대의 로마 제국과 같은 국가이며, 당대에는 로마/비잔티움이라는 구분을 하지 않았다.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용어는 근세의 역사가들이 중세의 로마 제국을 고대의 로마 제국과 구분하기 위해 임의로 붙인 이름이다. 따라서 정확히 어떤 시기에 '비잔티움 제국'이 성립되었는지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체적으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재위 306~337년)가 313년 밀라노 공인을 통해 기독교를 인정하고 330년 5월 11일에 비잔티움을 '노바 로마'로 개명하고 수도로 삼은 이후부터의 제국을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구분해 부른다.

서유럽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는 자주 간과되지만, 비잔티움 제국은 중세 중기까지 유럽 기독교 문명의 최강대국 중 하나였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고대 로마의 기술과 학문, 문명을 계승, 발전시켰다. 다만 흔한 오해와 달리 로마의 문화가 서유럽에서 실전된 것은 결코 아니다. 제국 동방과 단절됨으로서 고전 그리스어 문화가 라틴어로 번역된 것만 남고 피해를 입었을 뿐, 고대 로마의 유산은 서유럽에서도 변함없이 이어졌다. 또한 이슬람 제국의 풍파로부터 유럽 기독교 문명을 지켜내었다. 제국의 문화적 유산은 오늘날 정교회권에 속하는 각국과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의 후예 터키에 뿌리 깊게 남아있다.

2.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용어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용어는 마치 한국사에서 신라통일신라를 676년 기준으로 구분하듯이, 연속성 있는 한 나라를 후대 역사가들이 편하게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며 당대에는 그런 개념이 없었다. 이 제국의 공식 명칭은 언제나 로마 제국이었다. 제국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100년도 더 지난 1557년 신성 로마 제국의 역사가 히에로니무스 볼프(Hieronymus Wolf)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고대 이름에 착안한 "비잔티움 역사집(CORPUS HISTORIAE BYZANTINAE)"라는 사료 모음집을 출판한 것이 최초의 용례이다. 그 뒤 몽테스키외를 위시한 서구 계몽사상가들의 영향력에 힘입어 중세의 로마 제국을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르는 풍조가 정착되었다. 제국이 멀쩡히 살아 있던 당시에는 정통 로마에 도전하려는 서구권을 중심으로 '그리스인들의 제국' 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제국'이라는 단어가 운운되곤 했어도, 최소한 '비잔티움 제국'이란 말 자체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 그 전 시대의 수도의 이름을 따서 부르는 발상을 똑같이 적용하면, 대한민국은 한양(한성)민국(공화국), 프랑스는 루테티아 공화국(or 왕국), 영국은 론디니움 왕국이 되는 식.

세간에 널리 알려진 인식대로 4세기부터 비잔티움 제국으로 구분하는 사고방식은, 그럼 '고대 로마 제국'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문제를 남긴다. 330년 비잔티움 제국이 시작됨에 따라 고대 로마 제국은 멸망했다고 보면 서로마 제국의 설명이 불가능해진다는 문제가 생기고, 그렇다고 330년을 기점으로 비잔티움 제국과 고대 로마 제국이 한동안 공존했다고 하기에는 당시 제국은 분열되어 있지 않았으며 통치자 역시 콘스탄티누스 한 명뿐이었던 사실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소위 '로마 동서 분열'이 일어났다고 여겨지는 해인 395년은? 그러나 실제로 이 해에도 로마가 별개의 두 국가로 공식적으로 쪼개진 건 아니었으며, 동로마와 서로마는 서로의 내정에 깊숙이 간섭하고, 이민족들의 침입에 상호 협력해 가며 열심히 대항했다. 게다가 소위 그 '분열'마저 오도아케르가 서로마의 제위를 동로마 황제에게 바침으로써 형식적으로 다시 합쳐진다. 그렇다면 헤라클리우스를 기준으로 잡는다면? 당시 제국을 줄기차게 공격하던 이슬람 세력의 입장에서 봤을 때 자기네들의 상대는 헤라클리우스 이전이나 이후나 로마였을 뿐이지, 어느 날 갑자기 로마가 멸망하고 비잔티움이 새로 들어섰다는 인식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로마와 비잔티움을 생판 별개로 취급하면 그 기준을 어느 시기로 잡든 모순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옥스퍼드 대학의 비잔티움 연구자 에이브릴 캐머런(Averil Cameron) 교수가 지적하였듯이 비잔티움은 결코 중세 시대에 새로이 형성된 국가가 아니었다.(It was not a new state formed only in the medieval period) 디오클레티아누스 때에 분할된 동쪽 제국은 동로마 제국이라고는 불리지만 비잔티움 제국이라 하진 않는다. 참고로 비잔티움이란 이름의 유래는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비잔티움을 세웠다고 여겨지는 그리스 신화의 전설적인 왕인 비자스(Byzas)의 이름이 라틴어화하여 비잔티움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Byzas라는 이름은 트라키아일리리아 지방에서 인명으로 사용되었다.

비잔티움 제국 치하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로마인(Ρομαίοι, 로메이)[11]으로, 자신들의 나라를 로마 제국이라고 불렀다. 심지어 그들이 쓰던 그리스어도 로마어(Romaic)라고 불렀다. 고대 로마 제국 시대의 정부와 국가 체제가 단절 없이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에 당대 비잔티움 사람들의 인식은 그대로 로마 제국이었다. "그리스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비잔티움은 그리스 속주[12]가 아니라 트라키아 속주에 속하는 소도시였고, 의도적으로 재편된 바 없으며, 그리스 문화나 그리스인이 어느 날 갑자기 제국에 들어온 게 아니라 이미 공화정 말기 때 군사적으로 정복당해 편입되면서 로마 제국에 하나로 융해된 것이다. 대중적 인식과는 달리 로마 제국은 라틴어만을 쓰는 라틴 민족들만의 국가가 아니었으며, 그리스어는 이미 그리스가 제국에 편입된 시절부터 제국 동방의 공용어로 널리 쓰여 왔다. 신약성경이 그리스어로 저술되었다는 점, 그리스어로 '물고기'를 뜻하는 단어인 '이크티스(ἰχθύς)'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암호로 사용했다는 점,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크리스토스(Χριστος)'의 첫 번째 글자 Χ와 두 번째 글자 ρ를 조합한 '카이-로(Chi-Rho)'를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모노그램으로 썼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 로마 시대의 초기 기독교를 구성하던 중심 언어 역시 라틴어가 아닌 그리스어였다. 밀라노 칙령 역시 제국의 서방과 동방 모두에 대한 적용의 일환으로 라틴어와 그리스어 두 언어로 공포되었다.

그리스어로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를 의미하는 'ΙΗΣΟΥΣ ΧΡΙΣΤΟΣ ΘΕΟΥ ΥΙΟΣ ΣΩΤΗΡ'의 각 단어의 첫 번째 알파벳을 조합하면 'ΙΧΘΥΣ'가 되는데, 이는 그리스어로 '물고기'를 뜻한다. '이크티스(ἰχθύς)'를 중세 ~ 현대 발음으로 읽으면, x 즉 로마자로 옮긴 ch는 ㅋ과 ㅎ가 섞인 음가에서 ㅎ이 강해서 ㅎ로 표기하고 θ는 ㅅ가 되어 '이흐시스'지만, 기독교 관련 용어는 기독교 형성기에 용어들이 정립될 때 쓰인 코이네 발음으로 읽는다. 코이네 발음으로 읽을 때의 x(ch)는 ㅋ과 ㅎ중 ㅋ 음가가 더 강하다. 크리스마스를 X-mas로도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비잔티움 제국이 스스로를 로마 제국으로 일컬었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잔티움 제국과 로마 제국을 같은 국가라고 보는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들은 아무도 그리 생각하지 않는데 비잔티움 혼자서만 "우리가 로마다"라고 주장했다면 '비잔티움 = 로마'라는 역사관은 국제적인 공인 없이 국내에서만 통용된 설정 놀음에 불과했을 것이며, 그만큼 '비잔티움은 로마와는 별개의 국가'라는 주장이 더욱 힘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비잔티움 = 로마'가 오히려 당대 국제 세계의 일반적인 인식이었으며, 비잔티움이 아닌 자기네 신성 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의 후예라고 주장한 서방 가톨릭 세력의 관점이 되레 비주류였다. 비잔티움이 스스로를 '로마'라고 불렀던 것처럼, 불가리아 제국과 세르비아 제국을 비롯한 슬라브 세력과 사산조 페르시아, 이슬람 제국, 셀주크 제국, 오스만 제국을 비롯한 동방 세력 등 비잔티움의 주변국들도 그들의 적인 비잔티움을 로마라고 불렀다. 심지어 까마득한 곳에 위치한 중국마저도 로마 제국을 부르는 명칭으로서 후한 때 처음 등장한 '대진(大秦, Daqin)'을 훗날 동로마 제국을 일컬을 때도 여전히 사용했으며, 이는 동로마에서 온 네스토리우스파(경교) 기독교도들의 사원을 '대진사(大秦寺)'라고 불렀다는 점, 경교가 어떻게 중국으로 전래되었는지를 설명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에서 '대진국(大秦國)'이란 단어가 다수 언급되었다는 점으로 입증할 수 있다. 이후 '불림(拂菻, Fulin)'[13]이란 명칭이 당나라 때 새로이 등장하여 보편화되었을 때도 불림은 대진과 같음을 통전(通典)과 구당서(舊唐書) 등에 명시해 놓았으며[14], '(1081년) 대진에서 사자가 왔다. 송사 및 속자치통감장편에는 이때 사자를 보낸 왕의 이름을 '멸력사령개살(滅力沙靈改撒, mie li sha ling kai sa)'이라고 표기해 놓았다. 여기서 '멸력사령(滅力沙靈, mie li sha ling)'은 사자를 보낸 로마 황제의 이름이고, '개살(改撒, kai sa)'은 로마 황제를 일컫는 단어인 '카이사르'를 중국어로 옮긴 것이다. 이 '멸력사령개살'이 가리키는 동로마 황제가 누구인지와 관련하여 '미카엘(Michael) 카이사르', 즉 미하일 7세를 가리키는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그다음 황제인 '멜리세누스(Melissenus) 카이사르', 즉 니키포로스 3세를 가리키는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참고로 미하일 7세의 재위 기간은 1071년부터 1078년까지, 니키포로스 3세의 재위 기간은 1078년부터 1081년까지인지라 둘 중 어느 황제가 송나라에 사신을 보낸 인물인지는 명쾌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사자가 중국에 도착한 시기는 니키포로스 3세의 치세 때였으나, 이 사자가 이 나라 들르고 저 나라 들르는 등 오랜 시간이 걸린 끝에 마침내 중국에 당도한 거일 수도 있음을 감안하면 미하일 7세가 보낸 거일 수도 있기에... 참고로 영어 위키백과 사이트에는 '멸력사령개살'을 미하일 7세를 가리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 일찍이 900여 년 전[15]에 조공했지만 ···'이라고 적혀 있는 남송 시대의 역사서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篇)의 글을 통해 당대의 중국인들은 '900여 년 전에 사신을 보낸 대진국(고대 로마) = 이번에 사신을 보낸 대진국(동로마)'이란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잔티움 = 로마'라는 인식에 기반하여 만지케르트 전투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1077년 아나톨리아에 새 나라를 세운 셀주크 일족은 과거 이곳이 룸(Rum, 로마)의 땅이었음을 이유로 자신들의 나라를 룸 술탄국으로 명명했으며,[16] 발칸 반도에서 동로마군을 잇따라 격파한 스테판 우로슈 4세 두샨은 동로마의 서부 영토 일부를 점령한 여세를 몰아 1346년 스스로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황제'[17] 자리에 등극해 로마 황제를 자칭함으로써 세르비아 제국의 문을 열었다. 13세기 초 4차 십자군으로 인한 함락 및 일시 멸망과 연이은 라틴 제국의 성립 등 혼란상을 틈타, 수도권 격 되는 트라키아에서 동로마인들을 학살하고 다닌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 칼로얀의 경우 과거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2세가 '불가록토노스(Boulgaroktonos, 불가르인의 학살자)'라는 별명을 얻은 데 따른 보복으로 스스로를 '로마녹토노스(Romanoktonos, 로마인의 학살자)'라고 일컫기도 했다. 그리고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는 자신이 Kaysar-i Rum, 즉 로마의 황제라고 주장하였으며, 이를 시작으로 이후의 오스만 술탄들은 '카이세리 룸'을 자신의 타이틀에 포함시켰다. 이븐 바투타도 자신이 방문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룸'의 수도라고 했고 그곳 사람들을 '로마인'이라고 기록했다. 발칸 반도 지역은 로마인의 땅이란 뜻인 '루멜리아'라고 불렀다. 오스만 제국 말기 그리스가 독립해 나간 뒤에는 독립국가의 그리스인들은 '유난(Yunan)', 제국 치하에 남은 그리스인들은 '룸(Rum)'이라고 불러 구분하기도 했다. 이런 용법은 현재의 터키 공화국에서도 통용된다. 1923년 인구교환 이후에도 이스탄불(콘스탄티노폴리스)과 인근 섬에 잔류한 그리스인들이 있기 떄문. 결론적으로 당시 동로마의 정통성에 지속적으로 태클을 걸었던 세력은 서방뿐이었으며, 이것도 동로마가 정말로 로마가 아니어서 그랬던 건 아니고 단지 동로마의 우월한 정통성에 대한 서방인들의 열등감 표출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길 원했던 로마 교황의 정치적인 의도가 결합된 행위에 불과했다. 더욱이 서방인들 사이에서도 정치적 상황의 변동에 따라 굴곡이 있기는 했어도 동로마는 충분히 로마로 인식되고 있었다. 당장 라틴 제국의 정식 명칭이 뭐였는지,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가 자칭한 칭호가 뭐였는지부터 생각해 보자. 오늘날 이탈리아 반도의 북동부에 위치한 로마냐(Romagna) 지역도 그 명칭이 이 일대의 도시들 중 하나인 라벤나에 동로마의 총독부가 소재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서 '로마인들의 땅(로마니아(Romania))'을 뜻한다. 서로마의 실질적인 마지막 수도이자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오도아케르에게 폐위당한 도시인 라벤나는, 540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보낸 벨리사리우스의 군대에게 점령당한 이래 200년간 동로마가 이탈리아 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핵심 거점으로 기능했던 곳이다. 이탈리아 반도 전체가 로마 제국의 고토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라벤나 일대만 '로마냐'로 불린 건, 서로마 멸망 이후 이민족들의 놀이터가 되어 버린 이탈리아 반도에서 이곳만큼은 여전히 (동)로마인이 강한 지배력을 유지했다는 데서 비롯된 것. 이와는 반대되는 대표적인 지역이 과거 랑고바르드족의 왕국이 자리해 있었던 롬바르디아인데, 명칭의 극명한 대비를 반영하듯 실제로도 롬바르디아 지역의 랑고바르드 왕국과 로마냐 지역의 동로마 라벤나 총독부는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세력 유지 · 확장을 위해 서로 오랫동안 티격태격했다. 그러다가 751년 랑고바르드 왕국이 라벤나를 함락시킴으로써 동로마는 로마냐 지역의 지배권을 상실하고 말았으나, 이후에도 남이탈리아에 장기간 발을 걸쳐 놓음으로써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영향력만큼은 라벤나 총독부의 몰락을 계기로 상당히 약해졌을지언정 제법 오래 유지하였다.

다만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용어를 쓴다고 해서 이 제국이 고대 로마로부터 직접적인 연속성을 갖고 있는 국가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정착된 용어라는 점도 있고 2,200년의 길디 긴 로마사를 지칭할 때 편리한 용어이기 때문에 사용되는 점도 있다. 물론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이란 용어를 '고대 로마 제국과는 단절된 별개의 국가'임을 나타내려는 목적으로 쓰기도 한다. 일례로 역사 마니아들이 모여서 토론을 벌이는 어느 외국 사이트에서 '동로마 제국'이란 용어를 써야 하는지 '비잔티움 제국'이란 용어를 써야 하는지를 가지고 투표를 벌인 적이 있는데(해당 글), '비잔티움 제국' 쪽에 표를 던진 사람들 중에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헤라클리우스와 같은 특정 황제의 통치기 또는 이슬람 세력의 카르타고 함락과 같은 특정 사건을 기준으로 그 전은 '동로마', 그 후는 '비잔티움'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단지 구분상의 편의를 위해서였다면 그냥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쭉 '동로마'라고 써도 될 것을 굳이 특정 기준을 전후하여 '동로마'와 '비잔티움'의 사용을 가른다는 건, '동로마 제국'과는 달리 '비잔티움 제국' 안에는 로마성(?)이 들어 있지 않다는 의식이 기저에 깔려 있다는 얘기. 참고로 결과는 27표 대 26표로 '동로마 제국'이 매우 근소하게 우위를 차지했다.

일본의 서양사학자들 중에는 이 나라를 중세 로마 제국(中世ローマ帝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이 용어는 일본에서만 쓰이고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일본에서는 이 용어가 일반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다고 한다. 역사학자 와타나베 긴이치(渡辺金一)라는 학자가 1980년에 쓴 《중세 로마 제국: 세계사를 다시 본다(中世ローマ帝国―世界史を見直す—)》라는 책이 일본 내 보급력이 좋은 이와나미 신서(岩波新書)에서 출간됐는데, 이 책이 일반인들에게 꽤 읽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와타나베가 '중세 로마 제국'이라는 용어를 처음 고안한 사람은 아니다. 다만 아직까지는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로마 제국(東ローマ帝国)이나 비잔츠(비잔틴의 독일어명에서 유래) 제국(ビザンツ帝国)이 더 많이 쓰이는 듯하다. 참고로 영어로 'Medieval Roman Empire'라고 하면 신성 로마 제국을 가리키는 경우가 있어 혼동이 있을 수 있다.

영어로는 'Byzantine Empire' 라고 쓰며 발음은 /baɪˈzæntaɪn/, /bɪˈzæntaɪn/, /baɪˈzæntiːn/, /bɪˈzæntiːn/, /ˈbɪzəntiːn/ (출처: 옥스퍼드 영어 사전)으로, 영어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한글로는 순서대로 바이잰타인, 비잰타인, 바이잰틴, 비잰틴, 비전틴으로 한다. 이 영어 표기를 그대로 들여와 한국에서는 보통 '비잔틴 제국' 이라고 표기하나 엄밀히 말하면 'Byzantine'은 명사가 아닌 형용사이므로 잘못된 표기이다. 'Roman Empire'를 '로마 제국'이라고 하지, '로만 제국'이라고 하지 않듯이. 다만 학계에서는 '비잔틴 문명', '비잔틴 미술' 등의 표현도 여전히 사용된다. 이는 고딕(고트의 형용사)처럼 관습적으로 오랫동안 사용된 단어이기 때문이다.

3. 고대 로마와의 연속성

동로마 제국은 문화와 제도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하나의 로마 제국 시절로부터 내려오는 학문과 기술을 잘 보존했다. 15세기에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튀르크에게 멸망하자 제국의 인력이 이탈리아 등으로 건너가 르네상스에 영향을 주고, 성 소피아 성당과 같이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당한 지역의 문물은 도리어 이슬람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이노우에 고이치(井上浩一) 등 몇몇 일본 역사학자들은 동로마 제국을 '기독교화된 그리스인의 로마 제국(キリスト教化されたギリシア人のローマ帝国)'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단, 이것도 앞서 각주와 마찬가지로 연구와 편의를 위한 것이니 주의. 기독교화는 이미 2세기부터 진행되던 변화고, 그리스인이란 정체성도 무려 12세기 중후반부터나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지 그전엔 그런 관념 자체가 보편제국 속에 용해되어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일반인 대부분은 로마 제국하면 그것을 원수정 로마 제국 시대 이미지로만 생각들을 하니 이런 오해도 생기지만, 그건 그냥 널리 퍼진 이미지에 불과하다.

제국의 문화나 제도 그리고 인적 구성은 후기 고대 로마에서 그대로 이어지기에, 단순히 특정하게 생각하는 시대의 이미지(특히 원수정 로마)에만 국한되어 그 시대와 다르다고 독자적인 국가로 생각하는 견해는 실태 파악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잔티움인 자신들이나 당시 유럽인들은 물론, 아랍페르시아도 모두 비잔티움을 로마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비잔티움을 멸망시킨 튀르크까지도 비잔티움 제국을 룸(로마)이라고 부르는 등 주변국가 모두 비잔티움이 곧 로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그리고 이건 법통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반박의 여지가 없다.), 로마와 비잔티움을 별개로 생각하는 것은 서유럽 중심의 역사관에 불과하다.

참고로 십자군 원정 초기의 무슬림들은 십자군을 '로마인(al-Rum)'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이는 동로마와 십자군 모두 기독교 세력인 데서 비롯된 혼동의 결과물이었다. (물론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대차게 맞붙긴 했지만) 이슬람 세력의 중심부와 가까운 곳에서 오랫동안 치열하게 싸워 온 주요 기독교 세력은 동로마였기에, 가슴팍에 십자가가 그려진 옷 입고 갑툭튀한 서유럽인들을 보고는 '저 놈들도 기독교도인 걸 보면 로마인이군'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동로마와 십자군은 서로 별개의 세력임을 알아차린 이슬람 세력은 십자군을 일컫는 별도의 명칭으로서 '프랑크인(al-Ifranj)'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Angeliki E. Laiou, 『The Crusades from the Perspective of Byzantium and the Muslim World』 p.56.

사산조 페르시아가 부른 동로마인들의 페르시아어 명칭은 'Hrōmāy-īg'이다. 물론 직역하면 그냥 '로마인'...

당대 유럽 세계에서 '비잔티움은 로마가 아니다'라는 역사관은 자기네들이 내세운 황제가 진정한 로마 황제라고 주장해야 했던 서방 가톨릭 세력 일개의 정치적인 의견일 뿐이었으며(심지어 이마저도 정치적 상황의 변동에 따라 들쭉날쭉했다), 로마의 정통성 논쟁과 관련하여 한 발짝 떨어져 있었던 여타 세력들은 모두 비잔티움의 손을 들어주었다. '비잔티움은 로마와 별개'라는 역사관이 오늘날 일반인들 사이에서 주류로 자리 잡은 건 과거 이 같은 역사관을 견지하고 있었던 서방 세력이 훗날 유럽을 넘어 세계 전체를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두었던 시대의 여러 여파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반대로 8세기 이슬람 제국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서유럽을 손에 넣었다거나 16세기 오스만 제국이 빈을 함락시키는 등으로 인해 이슬람 세력이 세계의 넘버 원 자리에 올랐다면, 지금과는 전혀 딴판의 역사관이 오늘날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므로 시오노 나나미가 주장하듯이 고대 로마와 비잔티움이 전혀 관계가 없다는 식으로 기술하는 것은 심각한 역사 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로마와 비잔티움은 별개라는 인식하에 저술된 서적들에서도 이상하리만치 유스티니아누스의 정복 사업만큼은 단순한 영토 확장(conquest, invasion, expansion)이 아닌 '수복' 또는 '고토 회복'(reconquest)이라고 모순되게 설명해 놓은 경우가 대다수다. 이러한 표현은 '고대 로마 = 비잔티움'이라는 역사관하에서만 통용 가능함을 고려하면 앞뒤가 심히 안 맞는 설명이다.

당장 로마가 제정으로 바뀐 뒤에도 녹색당과 청색당과 같은 시민 조직들이 황제의 폐위와 즉위에 크게 관여했다는 게 로마가 공화정적인 전통을 끝까지 버리지 않은 증거이다. 다른 전제국들과 로마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기도 한 것이 이것이다. 둘 다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쉽게 왕조 교체가 일어나지 않은 다른 나라와 달리 로마는 시민들의 지지가 곧 황제의 정통성이었다. 이것이 로마에 남은 마지막 공화정적 전통이자 로마의 후계구도가 마지막까지 불안정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고, 신격화나 신의 대리자로 권위를 다지려 시도는 했지만 결국 실패했던 것도 마찬가지 이치다. 수많은 황제들이 기독교 공인 이전부터 시작해 수세기동안 황제 권위의 신격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끝끝내 정교분리 원칙이 성립되고 말았던 것이다. 동로마 시기에도 흔히 알려진 바와 달리 교회와 황제는 종속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는 왕조는 몰락해도 새로운 황제를 받아들여 국가는 지속시킬 수 있었음으로 동로마 제국 독자적으로도 천년넘는 세월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일장일단이 있었던 것이다.

동방을 벤치마킹하고 본격적으로 전제군주화됐다고 말해지는 동로마 제국도 황제에게 더 많은 권한이 주어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행정, 예산, 법률의 삼권분립을 진행하는 등 생각보다 훨씬 공화적인 모습들을 많이 보여준다. 또한 당대 역사가들도 혈통으로 제위를 계승받은 황제보다 쿠데타를 일으켜 즉위한 황제를 더욱 높이 평가하는 등 여러모로 전제군주정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오죽했으면 동로마의 군주정이 일반적인 전제군주정보다는 공화정 전통이 남아있는 로마 특유의 전제군주정이라 평가하는 최근의 관련 저서인 Anthony Kaldellis의 The Byzantine Republic을 보다 보면 동로마 황제의 제위는 세습이 가능한 초강력 종신 대통령직으로 여겨질 정도다.

애시당초 그 아우구스투스마저 온갖 편법을 활용해 황제라는 직위를 만들어야 했을 만큼 시민들의 영향력이 강했던 로마다. 그렇다 보니 계승 원칙조차 두루뭉실했던 것이 수천 년 역사 동안 그 수많은 내란의 원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게다가 아우구스투스가 있던 시기는 기술의 한계로 인해 더 이상 공화정 유지가 불가능해진 과도기였다.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제정의 설립이 필요했기에 시민들이 용납했다고 보는 게 로마제국의 역사동안 이어진 생각이다. 10세기 증흥기 이후 들어 로마의 고대 공화정에 대한 고찰이 로마 제국 학자들 사이에서 다시 일어난 것도 이런 연유로 볼 수가 있다.

이러한 동로마 제국과 고전 시대 로마 제국의 연속성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과 그 전신인 아랍-튀르크계 이슬람 동방 세력의 시선이다. 이는 의미가 매우 큰 것이, 로마의 정통성 논쟁과 관련하여 이슬람 세력은 비당사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로마라고 주장한 동로마'나 '그리스 운운하며 동로마의 정통성 흠집 내기에 바빴던 서유럽' 모두 로마의 정통성 논쟁과 관련한 직접 당사자였기에 저마다의 주장에 객관성이 흠결될 여지가 있는 상황에서, 비당사자였던 이슬람 세력의 판단은 이러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 최고의 심판이라 할 수 있는 셈... 만약 이슬람 세력마저 동로마를 '고대 로마 멸망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새로 들어선 별개의 국가'라고 인식해 버렸다면, 동로마의 로마 정통성 주장은 누구 하나 인정하는 이 없이 자기 혼자서만 그리 우기는 '자뻑'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망한 지 300년도 넘은 서로마를 느닷없이(이견이 없는 건 아니나 카롤루스 대제는 800년 12월 25일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자기가 이날 교황에 의해 로마 황제로 추대되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카롤루스 대제 문서의 해당 항목 참조) 그것도 무자격으로(서로마를 무너뜨린 오도아케르가 과거 서로마 황제가 가졌던 명목상의 권한을 본인이 이어받지 않고 고스란히 동로마 황제에게 넘겼기 때문) 부활시켜 자기네 황제가 진짜 로마 황제라고 우기고 다닌 서방을 제외한 아랍, 페르시아, 튀르크, 아르메니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러시아 등등의 '비당사자'들은 무슨 민족이든 무슨 종교를 믿든 가릴 것 없이 동로마를 고대 때부터 이어져 온 정통 로마로 인식했지만... 그리고 이러한 인식에 기반하여 훗날 오스만 제국쉴레이만 대제신성로마제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카를 5세에게 단단히 굴욕을 안겨주었다. 오스만 제국 문서의 해당 항목, 1차 빈 포위 문서의 해당 항목 참조.

제정 말기 게르만족을 필두로 마자르 · 바이킹 · 무어 인들의 집중적인 침략으로 인해 점차적이기는 하나 확실하게 고전 문명의 방대한 이데올로기적 일치감과 이를 현실에서 물리적으로 뒷받침할 관료제 · 상수도와 도로로 대표되는 경제적 체계가 재건 불가능하게 파괴당한 도나우 강 서쪽(서유럽/남유럽)과 달리, 발칸 반도그리스 · 아나톨리아 · 레반트 지역의 로마 세력은 훈족의 침략 및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대립을 비교적 순조롭게 극복하여 고전 문명의 찬란함을 서방만큼의 단절성 없이 유지해 왔다.

일례로 수도(水道)와 관련해서 서로마 멸망 이후 서유럽에서는 '먼 곳으로부터 물을 대량으로 끌어와서 도시에 공급한다'라는 발상 자체가 사라져 버려, 고대 로마인들이 건설한 수도교를 보고는 "다리 폭이 뭐 이리 좁다냐? 이건 필히 악마가 만든 것이다"라는 인식이 오랫동안 존재했다. 고대 로마 문서의 해당 항목 참조. 물론 동로마는 그런 것 없이 수도교의 개념과 용도를 확실히 이해한 채 이를 꾸준히 활용하고(콘스탄티노폴리스발렌스 수도교) 또한 소규모로 신축하기도 했으며(에페소스의 수도교), 훗날 이 땅을 접수한 이슬람 세력도 과거 동로마의 수도교 운용 기술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이를 오랫동안 잘 써먹었다. 368년에 건설된 발렌스 수도교의 경우 동로마 멸망 이후에도 오랫동안 제 기능을 유지했으며, 오스만은 지진 등으로 수도교 일부가 손상될 때마다 즉시 이를 보수하며 애지중지하게 관리한 것을 넘어 아예 여기에다가 새 라인을 덧붙이기도 했다.

애초에 소위 고대 로마 제국 시절인 고전 시대부터 이 지방의 문화적 · 정치적 공용어는 그리스어였으니 로마 제국의 헬레니즘화 같은 번지수 잘못 찾은 소리는 운운할 가치도 없다. 따라서 이슬람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확고한 정치체제와 이데올로기가 생기기 이전부터) 로마의 광휘를 지켜보다가 이 동방의 로마 제국 세력을 상대로 수세기에 걸쳐 공세를 주고받은 끝에 결국 정복하게 된 아랍 · 튀르크계 이슬람 세력의 입장에서도 그 수도가 이탈리아 반도에 있든 보스포루스 해협에 있든 로마는 곧 숙적이면서도 경외의 대상이었던 로마였을 뿐이지, 한 번 멸망한 뒤 비잔티움 제국이란 요상한 국가가 새로 들어오고 이딴 인식이 전혀 없었다.

이러한 인식에 기반하여 이슬람 세력은 동로마의 강역을 '빌라드 알 룸(Bilād al-Rūm, بلاد الروم)' 즉 '로마인들의 땅'으로, 지중해(특히 동지중해)를 '바흐르 알 룸(Baḥr al-Rūm)' 즉 '로마의 바다'로 불렀으며, 1453년 이슬람 세계의 새 맹주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것을 계기로 메흐메트 2세를 필두로 한 오스만 제국의 술탄 파디샤들은 동로마 황제가 가지고 있던 로마의 황제(Kayser-i Rum)란 칭호를 이어받아 대내외적으로 이를 주장하였다. 이슬람 세계가 동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나오지 않았을 퍼포먼스였던 것. 이러한 이슬람 세계의 로마에 대한 관점은 아예 꾸란 자체의 30번째 수라, "수라 알 룸", 즉 '로마장' 2~4절에서 613년 안티오케이아 전투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동로마가 크게 패배한 것을 두고 '로마는 가까운 곳에서 패배하였다. 수라꾸란의 각 장, 즉 챕터(chapter, 章)이다. 그러나 이 패배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10년 이내에 다시 승리할 것이다. 하느님은 과거와 미래를 모두 통치하실 것이고, 신자들은 이날 크게 기뻐하리라(The Romans are vanquished, In a nearby land, and they, after being vanquished, shall overcome, Within a few years. Allah's is the command before and after; and on that day the believers shall rejoice)'라고 자신들의 성서에 '(서방에서 소위 말하는 고전 시대의) 로마 제국 = 동로마 제국'이란 역사관을 명시해 놓았다.

그런데 문제는 원문에는 '로마'라고 명백히 기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애당초 이 수라의 제목부터가 '로마장'이다), 적지 않은 수의 영문판들이 이를 밑도 끝도 없이 '비잔티움(Byzantines)'이라고 멋대로 번역했다는 점이다. (당장 구글에 검색해 봐도 관련 사례가 좌르륵 뜬다) 일반 독자들의 혼동을 방지하겠다는 차원이라면 원문의 표기를 최대한 존중하면서 번역하되 각주 등의 부연 설명으로 충분히 대처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원문에도 무슬림들이 '비잔티움'이라고 적어 놓은 것처럼 번역했다는 게 큰 문제... 고대 로마와 동로마 간의 연속성을 보여 주는 결정적인 증거들 중 하나가 로마 정통성 논쟁에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었던 당대 무슬림들의 인식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는 원작자의 역사관을 후세의 번역자가 왜곡해도 단단히 왜곡한 셈이다. 세계사에 별다른 지식이 없는 일반인들이 이를 보면 오해할 공산이 크다. 역사학적인 내용은 아니지만 사회적 차원에서도 어쨌든 문명, 종교간 대화가 시급한 21세기 초반 현대 시점에서도 이렇게 문명들이 서로 공유했던 역사를 단절하는 서술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이와 같은 사례는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로마 황제 헤라클리우스(이라클리오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발견된다. 628년 메카의 쿠라이시 부족과 휴전조약(후다이비야(Hudaybiyyah) 조약)을 체결한 무함마드는 곧이어 이슬람교로의 개종을 권유하는 편지를 주변의 통치자들에게 보냈는데, 물론 여기에는 헤라클리우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편지에서 무함마드는 당대의 상식대로 헤라클리우스를 '로마'의 군주라고 지칭했으나, 이 역시 현대인들에 의해 '비잔티움'으로 적잖이 번역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뿐인가. 동로마가 메흐메트 2세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 빌미를 제공해 버린 상황에 답답해한 오스만 재상 할릴 파샤의 절규와도 같은 성토를 현대 학자가 어떻게 소개해 놓았는지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문서의 해당 항목 참조. 결론적으로 동로마 제국과 관련한 당대의 사료를 번역한 글에서 '비잔티움'이란 단어가 보이면, 혹시 번역자의 주관이 예고 없이 들어간 건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한다는 것... 이는 동방은 물론 서방의 사료에도 적용되는데, 당대의 서방인들도 동로마를 부를 때 '그리스'를 운운했지 '비잔티움'이라고는 안 했기 때문이다. 당대인들 사이에서 '비잔티움'이란 단어는 마치 우리가 '과거 한양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더라'라는 식의 옛날 도시를 일컫는 용도 외에는 여간해서는 쓰이지 않았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제국 그 자체를 일컫는 용도로는 더더욱...

참고로 이 예언은 622년 이수스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이 사산조 페르시아를 크게 역관광시킴으로써 현실이 되었다. 상술했듯이 이 당시만 하더라도 페르시아는 이교인 조로아스터교를 믿고 있었으며, 아브라함계 종교들과 같은 뿌리를 공유하는 기독교에 대해 초기 이슬람이 깊은 동질감을 느꼈는지 훗날 자신들의 숙적이 된 동로마 제국의 승리를 기원하는 게 인상적이다. 14세기에 활동한 이슬람 율법학자 이븐 카시르(Ibn Kathir)가 쓴 쿠란의 주석본(타프시르)에도 동로마를 '로마'로, 동로마인들을 '로마인'으로 지칭하였으며,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원한다면 이 사이트를 참조할 것. 여러 타프시르들 중 이슬람교에서 가장 권위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이븐 카시르의 타프시르는 로마인들이 어떻게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제법 상세히 기술해 놓았다. 메시아(예수)의 출현 이후 300년간 로마인들은 그리스 지역의 종교를 믿었다는 점, 콘스탄티누스 1세가 어머니 헬레나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를 공인했다는 점,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세움과 더불어 전국 각지에 성당들을 건립했다는 점 등. 뒤이어서는 로마의 '카이사르'인 헤라클리우스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사산조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를 물리치게 되었는지도 자세히 서술해 놓았는데, 여기서 이븐 카시르는 헤라클리우스를 '가장 지혜롭고 단호하고 기민한 인물'이라며 훌륭한 리더십으로 로마인들을 다스렸다고 크게 호평하였다. 첨언으로 정치적, 영토상으로는 시작부터 1453년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침식하며 적대, 경쟁한 무슬림 튀르크계 지배자들 입장에서도 정치적 대립과는 별개로 당시 이슬람, 기독교권을 초월한 보편적인 지중해권의 정치 사상사적 관점에서 동로마의 로마성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무슬림 정복제국, 특히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도 본인들은 로마의 정복자라는 타이틀이 훨씬 더 위엄쩔지 당대에는 지리적, 문화언어학적 명칭에 불과했던 그리스의 정복자 따윈 영 폼이 안 살았기 때문. 이러한 동로마의 로마성을 계승하는 관점에서 오스만 제국은 16세기 까지도 각종 외교 문서에서 서방, 특히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 황제들을 비엔나에 위치한 독일의 왕 따위로 부르며 절대 황제위를 인정하지 않다가 국력 상으로 오스만 제국이 더이상 일방적인 군사적 우위에 있지 않다는게 확인 된 1606년, 15년간의 대오스트리아 장기 전쟁을 끝낸 쥐트바토록 조약에서야 독일의 황제 (Padishah)라 부르게 된 것이다.

흔히 상당수의 학자들이 이의없이 "비잔티움 제국"이라 부르기 시작하는 7세기 때부터의 양상을 우리가 흔히 아는 로마 제국 전성기와 비교해 보면서 이런 식의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는 편의적 그리고 연구를 위한 비교일 뿐이지 정말로 중간에 어떤 큰 계기나 단절이 있어서가 아니다. 이런 식의 생각은 2~7세기에 이루어졌던 점진적인 변화들을 깡그리 무시하게 되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다만 오늘날의 그리스에서는 스스로 그리스/엘라스라는 옛 명칭을 회복했기 때문에 이 나라를 로마 제국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로마 제국이나 동로마 제국이라고 하면 그 기간 동안 그리스의 역사가 없었던 것처럼 오해받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는 이 나라를 Βυζαντινή Αυτοκρατορία, 즉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이슬람의 침입과 성상파괴론의 등장 등으로 제국이 격심한 혼란에 빠져든 소위 "7세기의 위기" 기간 동안 로마 제국이 겪은 변화가 크긴 하였으나, 다른 시기보다 그렇게 큰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6세기 말~7세기 초의 로마 제국과 7세기 말~8세기 초의 로마 제국은 어느 정도 달라지긴 했지만, 도시 국가 로마 시기와 이탈리아의 맹주이던 라틴 연합 시기, 포에니 전쟁 승리 이후 지중해의 패권자가 된 시기, 2세기의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와 3~4세기 점차 외부의 위협으로 인한 혼란에 빠져든 시기의 로마이 겪은 그 모든 변화보다 그렇게 낙차가 크진 않았다. 물론 연속성만 강조하는 건 균형을 잃은 서술이지만, 국가란 불변의 완전체가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고, 현실에 따라 변화하는 실체임을 잊어서는 안 되며, 또한 현재까진 비잔티움이 로마가 아니라는 괴랄하고 창의적(?)인 역사 해석이 여전히 일반의 주류인 건 사실이기에 연속성이 강조될 수 밖에 없다. 사실 그렇게 따져도, 당연히 4세기, 6세기, 8세기의 로마를 비교해 보면 8세기의 로마는 6세기의 로마와 공통점이 더 많다.

4. 관련 도서

전술한대로 유럽에서도 역사적으로는 비잔티움 제국에 대해서 폄하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재평가하고 있는 분위기이며 관련 교양 입문서들도 많이 발간되었다. 《비잔티움 연대기》 이전에 이미 문고판으로 《비잔틴 제국 - 동방의 새로운 로마》[18]이 시공디스커버리에서 발간되었고, 진원숙의 《비잔틴 제국 - 천년의 명암》(살림지식총서285)이 있는데, 이 책은 알려진 비잔틴 제국 관련 저작으로는 유일하게 한국인이 지은 것이다. 게오르크 오스토르고르스키의 《비잔티움 제국사》뿐 아니라 시오노 나나미의 책도 인용하고 있는 것이 흠이라면 흠.

국내에 출판된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영국의 존 줄리어스 노리치의 《비잔티움 연대기》가 있다. 한국어 번역물 중에선 가장 인기가 많지만 작가의 성향에 따른 왜곡과 과장, 축약이 심하다. 예를 들어 수세권(收稅權)을 부여하는 대신 직업 군인을 고용하는 프로니아(Πρόνοια) 제도를 단순 민병대로 묘사한다든가, 나라를 말아먹은 내전의 주범을 의분으로 인해 봉기한 것으로 미화한다든가.[19] 노리치는 역사학 전공자가 아니며 역사가는 더더욱 아니고, 비잔티움 연대기는 로마인 이야기가 그러하듯이 대중을 대상으로 한 역사 에세이에 가깝다. 그것만 조심하면 입문자들이 읽기엔 편하다. 3부 서문(한국판 5권)에서는 스스로 '결코 학술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사전이 없으면 간단한 그리스어 문장조차 제대로 읽지 못한다'고 시인하고 있다. 한국어 번역은 괜찮으나, 번역자가 단 주석과 번역 후기는 안 읽는 것을 추천한다.

이 책을 읽고 관심이 생기거든 국내에 출판된 워렌 트레드골드의 《비잔틴 제국의 역사》를 읽어보자. 번역의 질이 조금 많이 낮지만 한국어로 번역된 책 중에서는(어디까지나 번역된 책 중에서) 가장 최근 연구 결과를 반영한다. 이 책은 동 저자가 《비잔티움 국가와 사회의 역사》를 축약하고 몇 가지 부분을 추가해서 교양 서적으로 만든 판본이고, 원본은 아직 미출간 상태다. 이외에도 주디스 헤린의 《비잔티움 : 어떤 중세 제국의 경이로운 이야기》가 있다. 추가로 게오르크 오스토르고르스키의 《비잔티움 제국사》도 읽어보자. 문체가 약간 딱딱하고 번역투의 느낌이 나지만 이쪽이 정통. 다만 1965년대의 저작이라 최신 연구 결과에 심하게 뒤쳐져 있다.(역사학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연구 성과의 업데이트가 활발한 분야이며, 일반적으로 10년만 넘어가도 상당히 오래된 연구로 취급한다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비잔티움 제국이 6~7세기의 위기를 극복하고 그 과정에서 얻은 성과를 기반으로 8~10세기의 문화적, 경제적, 군사적 성장을 이룬 부분이 빠져 있는데 이 점에 주의가 필요하다. 제국의 종교 생활을 중심으로 다룬 메리 커닝엄의 《비잔틴 제국의 신앙》도 있다.

내공이 더 쌓이고 흥미가 생기면 안나 콤니니의 《알렉시아스》, 미하일 프실로스의 《연대기》와 같은 당시 작품들을 접해보는 것도 좋다. 다만 한국어로는 번역이 되어 있지 않으니 주의할 것.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측근으로 활약했던 카이사레아의 프로코피우스의 저서는 당대를 알 수 있는 1급 사료로 꼽히지만 대표작으로 꼽히는 《전쟁사(Ὑπὲρ τῶν πολέμων λόγοι, 戰爭史)》와 《비사(Ἀπόκρυφη Ἱστορία, 秘史)》의 경우 문체가 서로 다른 사람이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판이하며, 이 가운데 《비사(秘史)》만이 2015년에 《비잔틴 제국 비사》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을 뿐이고, 그나마도 영문 중역이다.

다만 언급된 책들 대부분이 품절되어 구입하기 힘든 책들이 많다. 따라서 도서관을 애용하고 정 구하고 싶거들랑 중고서점에 들어가보자.

5. 역사

비잔티움 제국/역사

6. 제국의 이모저모

6.1. 통치자들

비잔티움 황제가 가진 '로마 황제'라는 직함이 단지 이름만 따온 것이 아닌 고대 시절부터 이어져 온 유구한 역사와 막강한 권위를 가진 '로마 황제'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었음은 가톨릭, 정교회, 이슬람을 막론한 유럽 세계 전체가 입맛 다시며 호시탐탐 이를 노렸다는 사실로 증명 가능하다. 서방 가톨릭 국가들을 제외한 여타 세력에게는 어느 놈이 되든 관심이 없었던 신성로마제국의 '로마 황제' 직함과는 그 대접이 하늘과 땅 차이다.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시메온 1세와[20] 세르비아 제국스테판 우로슈 4세가 자기네 직함에다가 '로마 황제'라는 타이틀을 붙였던 것도 동로마 영토에 대한 군사적 정복을 단행한 데서 기인했으며,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의 '로마 황제' 자칭 또한 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대업을 이룬 데서 비롯된 것이다. 가톨릭 세력이라고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 라틴 제국의 황제들이 자기네 인장(seal)에다가 '로마 황제(IMP(e)R'(ator) ROM(anorum))'라고 떡하니 박아놓은 것도[21] 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차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앞서 열거한 세력들이 '로마 황제'를 자칭하며 스스로를 '제국'으로 선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다른 나라도 아닌 바로 '(동)로마 제국'의 영토에 대한 군사적 정복이었던 것이다. 당대 유럽 세계에서 '제국'이나 '황제'란 개념은 어떤 형태로든('자칭'이거나(세르비아, 러시아) '동로마 제국의 인정'을 받았거나(신성로마, 불가리아)) 동로마 제국과 연결 고리가 있었던 것들이며, 이와 관련해서는 '황제' 문서의 해당 항목을 참조할 것.

애당초 카롤루스 대제의 서로마 황제 즉위도 여성의 제위 승계를 인정하지 않는 살리카법상 당시 동로마를 다스렸던 이리니를 황제로 취급하지 않은 채 로마 황제가 공석 상태임을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다.[22] 이 말인즉슨 적어도 이리니의 선황, 즉 콘스탄티노스 6세까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가 정통 로마 황제'임을 서유럽인들 역시 인정했다는 얘기. 그러나 살리카법이라는 게 프랑크 왕국의 국내법에 불과했기에, 카롤루스 대제는 이리니와의 혼인을 통해 당대 유럽 세계에서 진정한 로마 황제로 경외되어 온 동로마 황제 자리마저 노림으로써 자기가 가진 로마 황제 직함의 '국제적인' 정통성에 쐐기를 박고자 했다. 카롤루스 대제 문서에 자세히 언급됐다시피 사실 카롤루스의 로마 황제 즉위의 진정한 수혜자는 카롤루스 본인이 아닌 로마 교황이었는데, 카롤루스에게 '로마 황제'의 권위를 부여한 주체가 교황이었으니 이를 거두는 것 역시 교황이 결정할 일이었으며 그 결과 교황은 황제의 정통성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막강한 정치적인 힘을 갖추게 되었다. 자기에게 주어진 '로마 황제'라는 직함이 오히려 교황이 채워 놓은 족쇄로 작용할 수 있음을 안 카롤루스로서는 굳이 교황에게 설설 기지 않아도 큰소리를 칠 수 있을 만큼의 독보적인 정통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으며, '정통 로마 황제'인 동로마 황제로의 즉위는 이러한 자신의 의도를 충족시키기에 너무나도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이리니와의 혼담 논의는 동로마 황제 등극이라는 최종 목표의 중간 과정이었던 것... 훗날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동로마 황족과의 혼인을 이유로 로마 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한 사례로 미루어 봤을 때 카롤루스의 구상이 아주 허황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니키포로스 1세 문서 참조) 어쨌든 정리하자면 서방의 로마 황제조차도 그 탄생은 동로마 남성 황제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며, 입으로는 자기가 진짜 로마 황제라고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정통성 강화의 수단으로 동로마 황제 자리를 노렸다는 데에서 되레 '동로마 황제가 진퉁 로마 황제'임을 서방 세력 스스로가 몸소 보여 줬다는 것이다.[23]

소위 '동서 로마 분열'부터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총 88명(라틴 제국 출신의 황제 제외)의 황제들이 제위에 올랐으며, 동로마 제국은 멸망할 때까지 오랜 기간 동안 권력 다툼이 극심했다. 일반적으로 신체적으로 정상이 아닌 자는 황제의 자격이 없었지만, 유스티니아노스 2세(재위 1차 685~695, 2차 705~711)는 코를 잘린 후에도 자신을 쫓아낸 자들에게 복수하고 제위에 등극하였다. 제위에서 밀려난 패배자들은 대개 이 뽑히거나, 가 잘리고 수도원연금되었다. 코를 자른 이유는 신체에 손상이 있는 사람은 제위에 부적합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인데, 각각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 대신 눈을 뽑아 연금 하는 것과 그 자식들이 다시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코가 잘리고 폐위를 당했지만 멀쩡히 복위에 성공, 금으로 만든 가짜 코를 붙이고 다녔다. 그리고 다시 필리피코스에게 폐위되자 처형당했다.

그래서인지 후기에 들어서는 이러한 관행은 많이 보이지 않는다. 신체 절단형을 끔찍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비잔티움인들의 입장에서는 죽이는 것보다 세련되고 문명적인 정적 제거법이었다. 단 콘스탄티노스 6세는 폐위될 때 눈이 뽑히고 죽었는데, 죽은 시기가 차이가 있어서 어머니 이리니 아씨나이가 특별히 죽을 수 있는 방법으로 눈을 뽑았다는 주장도 있다. 동로마 제국 시기에는 서양 나라 치고는 희한하게도 환관이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고위직에 올라가기까지 한다. 이것도 신체절단형과 관련이 있는데 애초에 거세당한 사람들이 황족이나 높은 귀족이다보니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도 있는 것이다. 현대인 입장에서는 매우 기괴하게 느껴지지만 당시 로마에서는 고귀한 신분의 인물을 잡아죽이는 것보다는 불구로 만들어서 황위나 권력투쟁에 결격사유를 주는 게 낫다고 판단한 듯하다.

'불가리아인의 도살자'라는 별명이 붙은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리아 포로 2만 명을 100명 중 1명은 애꾸로 만들고 99명은 장님으로 만들어 애꾸눈인 1명이 나머지 99명을 인도하게 하여 돌려보냈다. 불가리아 왕 사무일은 이걸 보고 졸도하여 사망했다고 한다. 물론 이는 야사이며, 실제로는 없었던 일로 여겨진다. 아니면 패잔병들이 불가리아 테마병으로 편입될 수 있을 리가 없다.

6.2. 전성기[24]

제국의 전성기는 세 번으로 꼽을 수 있는데, 첫 번째 전성기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당시의 제국은 외적으로는 과거 로마 제국에 버금가는 모습을 보이는데, 프랑스영국, 에스파냐의 일부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로마 제국의 과거 영토의 대부분을 되찾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 흑사병이 대유행한다. 더군다나 제국은 도시화도도 사산조 페르시아 등 다른 지역보다 높은지라 피해는 더욱 컸다. 게다가 몇 번의 침략으로 이 전성기는 끝난다.

두 번째 전성기는 바실리오스 1세(재위 867~886년)가 창건한 마케도니아 왕조 시기를 꼽을 수 있다. 약 200년간에 걸쳐 전개된 이 시기에는 바실리오스 1세, 현제 레온 6세(재위 886~912년), 로마노스 1세 레카피노스(재위 920~944년), 콘스탄티노스 7세(재위 913~959년),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재위 963~969년), 요안니스 1세 치미스키스(재위 969~976), 바실리오스 2세 불가록토노스(불가리아인들의 학살자) 등의 위대한 황제들이 배출되었으며, 영토만으로는 이전 로마 제국에 훨씬 못 미치지만 문화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이 시기의 제국은 유럽뿐만 아니라 지중해 문화권 전체에서 최강의 면모를 보였다. 또한 395년 분리 당시의 동로마 제국과 비교하면 구체적인 데이터가 존재한다.

이 시기의 영토는 395년의 소위 말하는 동서 로마 분리 당시의 동로마 제국의 거의 약 90% 수준에 달하며 - 물론 그 이후로 시대가 흘러 인구가 늘고 기술이 발전한 것을 감안해야겠지만 - 인구와 세입금은 거의 75%, 군사력은 110% 수준으로까지 도달했다.[25] 이 수치는 워랜 트레드골드가 추정한 수치인데, 여기에 대한 다른 학자들의 비판은 오히려 워랜이 인구와 세입금을 너무 보수적으로 잡았다는 내용이 주여서, 이를 감안하면 대강 거의 동서 로마 분리 당시의 동로마 제국 국력을 먼길 돌아서 회복했다고 보면 되겠다.

그러나 이 전성기는 11세기의 연이은 전쟁과 혼란으로 위기에 처하게 된다. 동쪽으로는 튀르크족이 밀려들어왔으며 북쪽에서는 쿠만족, 페체네그족 등의 침략이 이어졌으며 서쪽에서는 노르만의 공세가 줄을 이었다. 결국 만지케르트 전투가 결정타가 되어 기존 체제는 와해되었고 콤니노스 왕조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수습되었으며 전성기는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11세기 말 ~ 12세기 말[26]알렉시오스 1세요안니스 2세, 그리고 마누일 1세로 이어지는 시기 제국은 경제적으로 황금기를 맞았다.

12세기모자이크 미술

영토가 아닌 경제 지표를 기준으로 했을 때는 12세기 무렵 콤니노스 왕조 치하의 시기에 역사상 가장 융성하였다. 당대 기록에서 이미 고대를 넘었다고 자부할 정도였다. 이 시기 제국의 군사력은 중앙 야전군을 4만 혹은 5만 명 선까지 팽창시켜 주전력으로 삼았다. 경제부문에서는 농상공업이 모두 골고루 발전하여 역대 최고의 영화를 누렸다. 12세기 중반에는 이미 조세액만으로 11세기 초에 맞먹게 되었고 그 세기 후반에 들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루 관세만 금화 2만 개에 달했다는 보고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당시의 경제적 발전상이 정부기관과는 구분되는 민간에서 주로 이루어진 점을 감안한다면 앞에서 말한 발전상조차도 이 시기의 번영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할 수 있다. 그만큼 제국은 당대 최고의 경제대국의 지위를 가졌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인구는 당대 최고수준이었고 그런 제국의 부와 아름다움은 십자군 기사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그리고 그 선망은 1204년의 참변을 만들었다.)

6.3. 장대한 존속 기간

고대와 중세 그 자체

로마라는 연속적인 정체성은 기원전 8세기의 신화시대에 태어나서 중세의 끝자락까지 유지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역사로 따지면 중국의 역사서에 간신히 고조선이나 부여의 존재가 기록되던 시절부터 조선시대 계유정난까지의 기간이다.

기원전 8세기니 15세기니가 다 옛날 이야기라서 얼마나 오래 존속한 건지 실감이 안 난다면, 로물루스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까지의 년도에 모조리 1000을 더해 보자. 그럼 건국은 서기 248년이 되고 포에니 전쟁은 760~850년대에 이루어진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은 950년경에 제정 시작은 서기 974년이 된다. 동로마 분열은 조선이 갓 건국 된 1395년이고, 서로마 멸망은 1476년이며 유스티니아누스의 치세는 명나라 F4의 시대와 일치하게 된다. 또한 이슬람이 제국의 절반 이상을 휩쓴 시기는 바로크 시대와, 성상파괴의 참화가 발생한 시대는 로코코 시대와 겹친다. 그리고 마케도니아 왕조의 시작시점은 서구 열강제국주의를 만개한 시점,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 시기로 밀려날 것이다. 2017년 현재는 1976년부터 2025년까지가 될 바실리우스 2세가 통치하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니까 이 나라의 시작을 천 년 뒤로 미루어서 서기 3세기라고 할 경우, 2017년 현재 콤네노스 왕조에도 이르지 못한 셈. 만지케르트 전투2071년에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이상을 더 기다려야 한다. 게다가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패악질을 한 것은 23세기2204년에,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한 것은 2261년에, 마지막으로 동로마의 완전한 멸망은 무려 25세기2453년과 대응된다. 즉 2천 년은 글래디에이터에서 스타크래프트에 이르는 아주 긴 기간이다.

7. 경제

동로마 제국에서는 서유럽과는 달리 고대 이래 화폐 경제 제도가 발달하였다. 제국 정부에서 발행한 금화 노미스마는 13세기 후반까지 높은 순도를 유지하여 1282년에 등장하여 빠르게 보급된 베네치아 두캇 금화에 의해 대체되기 전까지 높은 신용도를 가지고 있었다. 노미스마화는 후세에 ‘중세의 달러’라고 불릴 정도로 국제적 화폐로 유통되었다.

특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업종마다 길드를 통한 국가에 의한 보호와 통제가 두루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귀금속 공예품·유리 공예품·도자기 제품 그리고 국영 공장에서 독점적으로 제조 된 견직물들과 다른 나라와의 무역이 제국에 많은 부를 가져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세계의 부의 3분의 2가 모이는 곳’이라고 불릴 만큼 크게 번영하였다. 그러나 국가에 의한 경제 통제는 11세기 초까지로 한정되며 8~9세기 이래로 경제 전반은 점점 민간의 역량이 강화됨에 따라 자유무역 쪽으로 변화되었다. 특히 12세기에 접어들어 투델라의 벤자민(Benjamin of Tudela)이 연대기에서 기술하듯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만 하루 금 2만 개를 거둔다는 진술이 나올 정도로 무역경제의 규모가 역대 최대 규모로 성장했다. 그러나 12세기 말 제국은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으며 그 가운데 베네치아 상인들에 대한 비잔티움 지식인들의 적개심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1204년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제국 경제의 몰락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주요 산업 가운데 하나인 농업은 고대부터 중세까지는 서유럽에 비해 고도의(라기보다는 서유럽의 기술이 로마 시대보다 쇠퇴한 것이지만) 농업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유럽의 농업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9~13세기 사이에 서유럽이나 중동에서 농업도구의 기술과 생산성이 개량되면서, 제국의 농업 기술이 상대적인 우위를 잃었다. 기술의 발전은 이중괭이와 가벼운 쟁기에서 멈추었지만 그것은 Angeliki 교수의 주장을 따르면 굳이 깊게 땅을 팔 이유가 없는 동지중해의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며 Oikonomides 교수 역시 같은 점을 지적하면서 자연환경에 농민들이 적응한 결과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오히려 동로마의 노동생산성은 14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했는데 이는 단순한 기술적 발전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토지소유 형태와 경작 방식에 있어서 조선 후기와 비슷한 양식의 집약경작방식의 도입 등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으로 거대하게 관개를 진행한 아랍과 달리 동로마 제국에서는 농민들과 지역 유지들이 자체적으로 터널을 파 관개수로를 설치하고 물레방아를 설치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 동안에 서유럽의 생산성은 배로 늘어났고 아랍-이슬람 세계도 관개공사를 하여 수확을 두 배로 늘리고 동양의 작물을 도입하였다. 따라서 동로마의 농업 기술은 초기에는 앞서 있었으나 점차 규모의 측면에서 압도적인 서유럽에 뒤쳐지는 모습을 보였다. 때문에 시리아와 북아프리카, 소아시아 같은 곡창지대를 잃은 후에는 인구부양능력이 점점 떨어져 말기에는 제국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으로 인구가 떨어진다.

8세기에 아바스 왕조와의 탈라스 전투에서 패한 당나라 포로가 동로마에 대해 기록한 게 있다. 두환이라는 당나라인이 비록 포로의 몸이지만 당시 지중해 국가들의 풍습 등을 기록한 것인다. 그의 글에서는 아랍제국의 상업은 굉장히 활발하게 표현한 반면 동로마인들은 금전거래나 장사는 하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이는 아마도 아랍제국의 공습을 받아 쇠퇴기에 든 동로마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아닌 자급자족하는 변경의 테마들을 본 것일 가능성이 있다.

7.1. 제국의 인구

인구수는 당연히 일정하게 고정된 게 아니라 전성기와 쇠퇴기에 따라 다르다.

워렌 트레드골드에 따르면

540년 2,600 만 명 (첫번째 전성기 시절 인구)

565년 1,950 만 명 (흑사병의 창궐)

600년 1,700만 명

641년 1,050 만 명 (이슬람의 예루살람 정복. 동시대 당나라 인구는 5천만)

775년 700 만 명 (이슬람의 소아시아 정복)

842년 800만 명

959년 900만 명

1025년 1,200만 명 (두번째 전성기 시절 인구. 동시대 북송 인구는 1억을 넘은 것으로 추정)

1143년 1,000만 명

1204년 900만 명

1282년 500만 명

1320년 200만 명 (동시대 프랑스 인구는 1천만 돌파)

워렌 외에도 학자들마다 비잔티움 제국의 인구에 대해 각자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8. 군사

비잔티움 제국 자체가 긴 로마 제국을 편의적으로 구분하기 위해 만든 용어인 만큼, 비잔티움 군대가 곧 로마군이다. 하지만 역시 편의적인 이해를 위해 굳이 말하자면, 비잔티움 군대는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군제 개혁을 통해 새로이 변모한 로마군에서 시작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 군대는 스콜라이 팔라티니와 팔라티니 코미타텐세스를 비롯한 근위대[27], 야전군인 코미타텐세스, 국경방위대인 리미타네이와 용병이라고도 볼 수 있고 제국 내 자치령의 소집병으로도 볼 수 있는 포이데라티, 그리고 주로 기병으로 구성된 귀족들의 사병 부대 부셀라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로마 후기 군대가 막장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지만, 경제력이 그럭저럭 유지되던 동로마 방면 군대는 여전히 상당히 건실했으며 외국 용병인 포데라티도 로마 국내의 군사력으로 충분히 억제 가능한 수준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당시 비잔티움 제국군은 최대 300,000~350,000명에 이르렀다. 코미타텐세스와 리미타네이로 혼성 편제된 각 야전군은 15,000~25,000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티시아 디그니타툼 불신론이 널리 퍼져 있으나, 적어도 동로마 방면에 주둔하고 있던 야전군들의 편제는 거진 그대로 이라클리오스 시대까지 유지되었다. 벨리사리우스의 원정대에 용병이 편제되는 등 용병의 활용도가 높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용병 활용은 로마의 아욱실리아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벨리사리우스의 원정은 주적이 사산조 페르시아를 상대하는 상황에서 용병 비중이 높았던 것으로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벨리사리우스의 원정대에서 주력이 된 보병 10,000명에 기병 3,000기는 기존의 야전군인 코미타텐세스와 용병대 포이데라티가 혼성 편제된 군대였다.[28]

하지만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 끝에 부유한 이집트와 시리아를 상실하자 다수의 상비병과 용병으로 군대를 유지하기는 어려워진다. 이라클리오스 황제는 이를 해결하고자 둔전 제도의 일종인 테마 제도를 도입한다. 사실 이때 테마 제도는 비상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해결책이었지만 이슬람의 흥기 이후 이집트와 시리아, 카르타고를 상실하고 거대한 이슬람 세계의 공세에 노출되자 다수의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 상설화된다.

테마 제도는 둔전병들에게 토지와 면세 효과를 부여하고(사실 뒤로 가면서 유명무실해지긴 한다) 대신 그 지역에 정착하여 외부의 군대가 습격해올 때 이를 방어하는 역할을 한다. 이슬람 세계에 대해 명백한 군사력 열세에 처했던 8세기의 비잔티움 제국의 방어 전술은 테마의 둔전병이 고지대나 요새에서 적을 방어하는 한편 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게릴라 전술을 펼치고, 이 사이 인근 테마의 지원군이나 중앙군이 집결하여 적을 격퇴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에 지역 기반적인 군사 제도 덕분에, 일시적으로 그 지역이 적의 약탈에 유린되어도 주민들이 그곳을 떠나지 않고 금세 군사력을 복구할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다만 지역분산적인 군사제도는 언제든지 이들이 중앙의 황권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테마 제도가 시행되는 초기와 성상 파괴로 인한 대립이 있었을 때는 이러한 일이 잦았지만, 이후 제국은 테마를 소형화해서 여러 갈래로 갈라놓으면서 이들이 연대하여 중앙에 반발하는 일을 어렵게 해 놓았다.

중앙군인 타그마(το τάγμα)[29]는 상설화, 혹은 거의 상설화 된 군대로 점차 확대되어가다 후대에 총 4개의 기병 연대로 확립되었다. 이들의 수는 24,000명으로[30] 테마의 군대보다 훨씬 중무장했고 기병 비율이 높은 부대 구성으로 야전군의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테마 제도는 기본적으로 둔전병이 그 지역을 지킨다는 상당히 수세적이고 지역 기반적인 전략이었기 때문에 제국이 이슬람 세계에 공세로 돌아서는 10세기에는 테마 제도의 구성원은 상당히 줄어들고, 대신 타그마나 용병의 비중이 늘어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호족 가문의 세력 확대로 둔전병이 토지를 잃는 상황이 이어지며 붕괴를 가속했다. 이 영향으로 제국의 수세적 역량은 약화 되어가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군사력의 중핵이었던 아나톨리아 지방과 바실리오스 2세 치하에 확장 되었던 '새로운 테마'의 영역을 상실하면서 결정타를 맞고 붕괴한다.

이렇게 중기 제국 군사 제도가 붕괴하고 콤니노스 왕조 치하에서는 군사력의 봉건화가 진행된다. 농민 위주로 편성되었던 테마 제도와는 달리 중소 귀족에게 토지를 하사하고 병력을 제공받거나 수세권을 부여하는 대신 직업 군인을 고용하는 프로니아(Πρόνοια) 제도가 나타났다. 프로니아 제도는 원칙적으로는 토지의 상속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는 서구의 봉건제와는 어느 정도 차이를 보였으나 실제로는 대부분 세습되었다. 황제들은 프로니아의 반란이나 이탈을 막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콤니노스 가문이 지배하던 시기와 앙겔로스 가문까지는 봉건화가 절정으로 치달은 시기로 평가된다. 이는 서유럽이 봉건제에서 중앙집권화 된 근세로 발전해가고 있던 것과 비교하면 완전히 반대의 행보를 걸은 셈이다. 4차 십자군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이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한 이후에는 당시 니케아 제국의 역량으로 제국 전 영역을 커버할 군사력을 확보하기가 어려워지자 용병의 중요성이 더욱 늘어났다. 그 이후에는 과도한 군사력 지출과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군사 제도가 붕괴되기 시작했고 결국 멸망을 맞게 된다.

다만 위 학설은 현재는 비판받는 입장이다. 직업 군인은 자신의 토지가 복잡하게 여러 군데 떨어져 있었기에 국가 행정 조직의 도움을 받아야 자신의 토지를 파악할 수 있었으며, 특별히 공을 세우거나 아들이 아비의 직업을 물려받는 조건으로 토지를 세습하는 것이지 일반적인 경우 세습은 쉽지 않았다. 옛날 연구에서는 프로니아 제도가 제국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는 입장이었지만 현재 연구에 의하면 프로니아 제도는 제국의 몰락을 최대한 막았으며, 프로니아 제도로조차 버티기 힘들 정도의 위기가 제국을 몰락시켰다. 오스만이 제국 대부분을 잠식하여 제국 영토가 고립되고 흩어진 상태에서 황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오스만과 협상하려하는데 황자A는 테살로니키에서 오스만군을 막고 있고 황자B는 모레아에서 4차 십자군의 잔당들과 마찰을 빚는 상황이 와버린 것이다.

주요한 병종으로는 유명한 클리바노로포스카타프락토이가 있다. 헷갈리게도 페르시아에서는 마갑이 있으면 카타프락토스고 반만 있으면 클리바노포로스지만 여기서는 반대다. 근데 니키포로스 2세의 pracepta milataria를 봐도 마갑 입힌 기병을 그냥 카타프락티라고 표기한다. 그러니까 원어민들도 그다지 구별하면서 쓴게 아니다. 등자는 언제부터 운용했는진 정확하지 않으나, 적어도 11세기 쯤엔 운용했으며 물론 카우치드 랜스도 운용했다. 다만 당당하게 보병대를 정면에서 돌격해서 깔아뭉개는 걸 즐겼던 한 세기 후의 십자군[31]과는 달리, 여전히 전통적인 양익 배치 편제대로 운영되었다.

제국은 이런 클리바노로포스와 카타프락티 중기병대 외에도, 바랑인들로 구성된 바랑기안 가드부대와 스쿠타토스(복수형은 스쿠타티, 방패를 든 아저씨들)라 불린 중보병 부대, 궁병, 경기병도 운용하였다. 바랑인 부대는 처음에는 러시아에서 온 바랑인들로, 나중에는 잉글랜드에서 온 잉글랜드인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디라히온 전투에서 침공해 온 노르만인들을 상대로 무모한 전투를 벌이다 전멸하고 말았다.

후에 이 부대는 다시 재건되고,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해 왔을 때(1202년), 제대로 저항을 하던 거의 유일한 부대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 이후의 제국은 병력의 주 제공지였던 소아시아를 거의 상실하게 되어 용병에 많이 의존하게 되는 상태가 된다.

제국의 중보병은 과거 로마 제국처럼 더이상 주력부대가 아니었지만, 이들은 방어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했다. 아니, 오히려 공격에 더 필요했다. 10세기 초반까지 제국의 방어전술은 테마를 위주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기병 부대로 불릴 정도로 기병 비중이 높았고, 보병은 대개 궁수나 경보병으로 보조 역할만 맡았다.

하지만 10세기 중반들어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 이후 보병 부대의 강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보병-기병의 비율도 2:1까지 늘어났고, 충격부대 역할과 기병 작전의 베이스 역할을 하는 보병 전술이 완성되었다.

벨리사리우스가 13살에 입대했다는 걸로 봐서는 입대 연령이 17세였던 고대 로마 시절보다 좀 더 낮아진 듯하다.

9. 문화

고대 로마 시절과 비교하자면 굉장히 기독교적으로 변했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사이의 교류는 비잔티움 제국으로 일부 학자가 일컫기 시작하는 시기는 아주 이전부터 시작되었으며, 제국이 갈수록 기독교화 되어가다 보니 문화적 면에서 기독교가 우세해지는 건 필연적이었고 이는 미술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이 시기의 예술에 대해서는 비잔틴 미술 참고.

이런 기독교화로 고대 그리스 철학의 본산인 아카데미가 이교사상 취급을 받고 해체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고전 문학은 지식인에게 필수였고, 법학 또한 상당히 중시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시기의 로마법 대전이 있다.

비잔티움 건축은 발칸 반도 전역에 뿌리내렸으며 이탈리아 라벤나에도 산 비탈레 성당이 남아있다. 비잔티움의 건축 양식은 후대 러시아로 전해져 네오비잔틴 양식으로 계승되었다. 물론 오스만 제국이 이 양식을 받아들여 오늘날 터키를 대표하는 건축양식이 되었다.

10. 상징물

비잔티움 제국을 대표하는 상징물은 쌍두독수리이다. 공교롭게도 신성 로마 제국에서도 쌍두독수리 문양을 썼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동유럽 서유럽 할 것 없이 쌍두독수리 문양을 쓰는 세력이 많이 있다. 중세 초기에는 고대에 썼던 그냥 독수리 아퀼라를 계속 썼는데, 정작 쌍두독수리 자체는 중동 문화권의 유서깊은 상징이었고, 특히나 셀주크 제국이 이 쌍두독수리로 유명했다. 비잔티움이 쌍두독수리를 쓰게 되는 것은 마지막 왕조인 팔레올로고스 시절은 가야 한다. 흔히 웹상에 쌍두독수리가 비잔티움의 상징이란 말이 흔히 보이는데, 대표적인 고증 오류다.

참고로 로마군을 대표하던 상징물도 아퀼라(독수리)에서 비잔티움 제국 때는 드라코(용)으로 바뀌게 된다.

이것은 굳이 따지자면 비잔티움 제국의 국기라고 할 수 있는 물건이다. 제국의 마지막 왕조인 팔레올로고스 왕조 시대에 쓰였던 것이다. 그 이전의 로마/비잔티움 제국에는 오늘날의 국기와 같은 개념은 없었다.

11. 민족

영토 크기를 들어 로마 제국이 갖고 있던 보편 제국으로서의 특징을 잃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이슬람의 대두 시기 이전도 그렇고 그 이후에도 제국은 여전히 '다민족 국가'로서 그 영토 안에는 그리스인이탈리아인 외에 아르메니아인, 아랍인, 슬라브인, 불가르인, 튀르크인, 페르시아인, 유대인들도 각자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32][33] 소아시아와 발칸 반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그리스인만 살았으며 그들이 늘 주축이었다고 생각하는 견해는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제국이 특유의 보편성을 잃어버리기 시작한 시기는 아무리 올려잡아도 콤니노스 왕조 후기부터지만 그 시기에도 그런 경향성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강렬한 그리스 민족 의식과 반서구 의식이 본격적으로 대두한 것은 니케아 제국 등의 지방 세력들을 중심으로 제국이 재건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의 일이다.[34]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인해 중앙정부가 붕괴되고 정체가 단절된 뒤로는 제국주의하 식민지에서 나타나는 특유의 '저항적 민족주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워렌 트레드골드 같은 학자는 아예 '로마 정부는 1204년에 파괴되었다'고까지 언급하였다. 제국 말기로 치닫게 되면 대내외적으로 '그리스인의 황제'로 칭해지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이 말이 '동로마 제국은 로마가 아니다'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고대 로마의 황제 역시 그리스인을 신민으로 삼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동로마 황제는 멸망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로마 황제'라는 직함을 스스로 포기한 적이 전혀 없으며,[35] 같은 시기의 서유럽인들 역시 동로마 황제를 '로마인들의 황제'로 지칭하기도 했다(문서 하단의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 메달' 참고).

제국 내의 그리스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제국으로 편입된 것이 아닌, 고대 시절부터 이미 '제국의 신민'으로서 1,600년 넘는 기간을 살아 왔다. 대부분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이 시대의 로마인들은 그리스어를 주된 언어로 쓰고 그리스의 문화적 유산을 계승했지만, '그리스인(ελληνές, 엘리네스)'이란 단어는 근세까지도 '고대 이교의 신을 믿는 사람들'이란 뜻의 부정적인 어휘로 쓰였다.[36] 12세기까지만 해도 오늘날과 같은 그리스인이라는 개념은 매우 희박했다. 심지어는 근대에 남동유럽의 각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도 그리스인이라는 개념은 오늘날처럼 혈통적으로 확실한 개념은 아니었다.

보편 제국으로 발돋움할 때부터 로마는 이미 다민족 국가로 변모되어 갔으며, 라틴어를 쓰는 라틴인만의 국가가 결코 아니었다. '미국인'이 WASP만이 아닌 아메리카 원주민, 이누이트, 히스패닉, 아프리카계 흑인, 아시아인 등 다양한 공동체를 포괄하는 말인 것처럼, 당대 '로마인'이라는 개념 역시 '민족'이 아닌 '국가적인' 관점에서 나온 말이었다. 제국의 영토에 거주하고 제국 황제의 통치를 받는 것에 순응하면서 스스로 '제국의 신민'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 출신이 라틴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슬라브인이든 아랍인이든 튀르크인이든 상관없었다는 것.[37] 실제로도 동로마의 사회는 귀족, 사제, 관료, 군사령관, 서민 등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리스, 라틴,[38] 슬라브, 조지아(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랍, 튀르크 등 다양한 출신의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장 동로마의 명장으로 유명한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만 해도 각각 고트계 집안과 아르메니아계 집안 출신이었으며, 요안니스 2세의 총신이자 명장으로서 12세기 초 제국을 중흥시키는 데 크게 일조한 요안니스 악수스 역시 정교회를 믿는 튀르크인이었다. 또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13세기 말 라틴 제국의 부활을 목적으로 거세게 공격해 온 베네치아와 시칠리아에 맞서 동로마의 해군을 이끌었던 명장 리카리오(Licario)도[39] 그 이름에서 바로 알 수 있듯이 이탈리아 사람이었다. 심지어 제국의 최정점에 위치한 황제마저 그 선조가 아랍인이었다고 전해지거나(니키포로스 1세)[40] 아르메니아 혈통의 가문들이(헤라클리우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조)[41] 차지하기도 했으며, 동로마의 가장 유명한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 또한 일리리쿰 속주의 농부 집안에서 태어난 일리리아인이었다(또는 트라키아인이라는 얘기도 있음). 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그리스인만이 늘 제국의 주축이었다는 견해는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셈... 사실 황제를 포함한 제국 사회 전체의 이러한 다민족적 특징은 고대 로마 때부터 이어져 온 것이기에,[44] 이것을 '고대 로마와는 구별되는 비잔티움만의 특징'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45] 결국 이러한 고대 · 중세 로마의 다민족성을 철저히 무시한 채 근대의 민족국가 개념을 중세의 비잔티움 제국에 어거지로 투영하는 것은 적절한 시각이 아니며, 이와 같은 시각에 입각하여 '라틴인의 나라인 로마와 그리스인의 나라인 비잔티움은 서로 별개의 나라'라고 말하는 것 또한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

12. 외교

12.1. 서유럽

서유럽과의 관계는 그다지 양호하지 않았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서유럽에서는 여러 나라에서 로마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유럽 국가나 왕실의 국장(國章)에 유독 고대 로마의 상징인 독수리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당연히 자신이 로마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이상 기존의 제국을 멸시했기 때문에, '진퉁 로마'인 동로마 제국의 정통성에 대해 의도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수많은 흠집이 가해졌다. 이러한 경향은 카롤루스 대제의 서로마 황제 대관식이 열린 800년 이후 점차 심해졌으며,[46][47] 당연히 '로마 제국의 정통'을 표방하던 동로마인들로서는 카롤루스 대제 및 그 계승자들인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을 아니꼽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관련 사례로 오토 1세가 로마(신성로마제국) 황제에 등극(962년)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인 968년 오토 1세의 아들(후의 오토 2세)과 전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 2세의 딸 안나와의 혼담을 논의하기 위해 서방의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했는데, 그때 겸사겸사 전해 준 교황 요한 13세의 편지에 '로마인들의 황제'가 아닌 '그리스인들의 황제(Emperor of the Greeks)'가 언급된 것을 보고 뚜껑 열린 황제 니키포로스 2세가 사신들을 모조리 감방으로 보내 버린 뒤 추방시킨 일도 있었다.[48][49]

거기다가 서쪽과는 종교적으로도 자주 충돌했다. 이미 중세 초기부터 아카키우스 분열, 포티우스 분열 등의 갖가지 사건을 겪으며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충돌해 왔다. 초기에는 로마 황제의 권력을 등에 업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공세적이었으나, 서기 800년 카롤루스 대제가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균형을 이루게 된다.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계속 대립하였는데 나중에는 필리오쿠에 논쟁 등으로 인해 교리적인 불일치도 커져 갔다. 이 대립은 서기 1054년의 맞파문 사건으로 절정을 찍었다. 교황이 파견한 사절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파문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로마 사절단을 맞파문했으며, 후대에는 이 사건이 동서 대분열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후 십자군 전쟁(특히 2차와 4차)을 거치면서 제국과 서유럽인들은 서로를 더더욱 불신하게 되었다.

제국인들은 오랜 세월 남부 이탈리아를 점유하고 있었다. 프랑크인들은 계속 이 지역을 노렸지만 프랑크인들은 결국 이곳을 점령할 수 없었다. 후에 노르만인들은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제국을 몰아내고 시칠리아 왕국을 창건한다. 노르만인들은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에, 제국의 도시 두라초[50]를 공격하기도 했다. 노르만인들 또한 제국의 주요한 적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제국의 용병으로 노르만인이 고용되기도 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제국의 봉신국으로 출발했지만, 제4차 십자군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관계가 좋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때 병사를 보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의리는 있었던 듯 싶다. 베네치아인들은 구원을 위해 결사대로 포위를 뚫고 나가기도 했다. 구원병이 없다고 알았음에도 '살아도 죽어도 그 도시에서'라고 하면서 다시 돌아온 것을 볼 때 최소한 제국의 멸망을 바라진 않았던 것 같다. 사실 당연한 게 베네치아로서는 제국이 살아남아 있는게 무역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여러 모로 이득이 컸고, 일부 베네치아인들은 예전부터 조계지에서 정착했던 도시에 애착을 가졌으니. 교황청과 헝가리 왕국 등에게 '서둘러 힘을 모으지 않으면 우리는 동방의 그리스도 국가의 수도(콘스탄티노폴리스)를 영원히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것도 베네치아였고, 동로마의 구원 사절단을 맨 처음 받아 교황과 여타 유럽 강대국들에게 빠르게 전달한 것도 베네치아였다. 물론 그렇게 한 원인 중에는 도시가 함락당하면 베네치아의 상업적인 이득 역시 해를 입게 될 것을 걱정한 점도 있을 것이고, 실제로 이후 베네치아는 오스만을 직접 상대해야 했다.

중세 서유럽인들은 정통 '로마인들의 황제(Imperator Romanorum)'는 카롤루스 대제와 그의 계승자들이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는 단지 '그리스인들의 황제(Imperator Graecorum)'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공식적인 외교 관계에서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은 대단한 결례로 여겨졌다. 반면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서유럽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 세운 라틴 제국의 경우 그 정식 명칭이 '로마니아 제국(Imperium Romaniae)'이었으며, 서유럽 출신인 라틴 황제들은 스스로를 '로마니아의 황제(Imperator Romaniae)'라고 불렀다.[51] 그리고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을 진두지휘한 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자기 자신 및 후대 도제들에게 '로마 제국 3/8의 통치자(DOMINUS QUARTAE PARTIS ET DIMIDIAE TOTIUS IMPERII ROMANIAE, Signor della quarta parte e mezza di tutto l’Imperio di Romània)'[52]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여기서 '로마니아'는 로마인들의 땅(Land of the Romans, 로마 땅)이라는 뜻으로, 편의상 '대한민국'을 '한국'으로 부르듯 '로마니아' 역시 이미 오래 전부터 동로마인들이 자기네 나라를 부르던 속칭으로 널리 사용해 온 국명이었다.[53] 라틴 제국의 정식 명칭인 '로마인들의 땅의 제국'에서의 '로마인'이 '비잔티움인'이 아닌 당시 십자군을 주도했던 베네치아인과 프랑스인을 비롯한 '서방인'을 일컫는 거라고도 생각할 수 있으나, 당대의 베네치아인과 프랑스인 모두 자신들을 각각 '베네치아인(라틴어: Veneticis)'과 '프랑스인(라틴어: Francorum)'이라고 칭했지 '로마인'이라고는 안 불렀기에 여기서의 '로마인'은 명백히 '비잔티움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즉 '로마니아 제국'이라는 국명은 라틴 제국이 아주 새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과거 동로마인들이 스스로를 즐겨 일컬었던 국명을 서방인들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며, 이는 라틴 제국이 스스로를 (동)로마 제국을 이어받은 나라임을 대놓고 드러내는 퍼포먼스적인 성격이 짙었다. 마치 '라틴 제국'이라는 아주 새로운 나라가 건국된 게 아닌 단지 '동로마 제국의 라틴 왕조'가 들어선 것뿐이라는 생각도 가능할 정도로, 최소한 '국명'만 놓고 봤을 때에는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 이전이나 이후나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이처럼 '로마니아 제국'이 오늘날 비잔티움 제국으로 불리고 있는 '로마 제국'을 가리킨다는 사실은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 라틴 제국의 탄생 및 동로마 강역의 땅따먹기를 정한 조약의 이름이 '로마 제국 영토의 분할(Partitio terrarum imperii Romaniae, partition of the lands of the empire of Romania)'이라는 데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기존에 견지하고 있던 '비잔티움은 그리스일 뿐'이라는 멸시적인 태도를 강하게 관철시켰으면 이곳의 이름을 아예 '그라이키아(Graecia, Land of the Greeks, 그리스인들의 땅)'로 충분히 뒤집어 엎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다는 건,[54] 당대의 서방인들 사이에도 '비잔티움은 로마'라는 인식이 꽤 널리 퍼져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출처

그리고 제국의 영토가 코딱지 수준으로 쪼그라든 시기에도 동로마의 황제는 로마 황제로서 서유럽인들에 의해 경외되어졌다. 갈수록 커져가는 오스만의 위협에 대응하는 원조를 얻고자 서유럽을 돌아다닌 황제 요안니스 8세의 사례가 좋은 예.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형이기도 한 요안니스 8세의 1438년 이탈리아 방문은 현지 예술가들에게 상당한 영감을 불어넣어 그를 소재로 한 다양한 작품들이 제작되었는데,[55] 그중 대표적인 게 바로 위 사진의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 메달(Medal of John Ⅷ Palaeologus)'이다. 1438년 요안니스 8세의 피렌체-페라라 공의회 참석을 기념하고자 페라라(Ferrara) 후작 레오넬로 데스테(Leonello d'Este)가 현지 예술가 피사넬로(Pisanello, 피사노)에게 의뢰하여 제작한 이 메달의[56] 표면에는 그리스어로 된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그 문구라는 게 'Ἰωάννης Βασιλεύς καί Αὑτοκρἀτωρ Ῥωμαἰων ό Παλαιολόγός', 즉 '요안니스, 로마인들의 왕이자 황제, 팔레올로고스(John, King and Emperor of the Romans, the Palaeologus)' 되시겠다.[57] 아까도 언급했듯이 이거, 동로마인이 아닌 이탈리아인이 만들어서 유럽 대륙 곳곳에 뿌린 거다.[58] 자기네들 나름의 로마(=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떡 하니 옹립해 두고 있었던 서유럽조차 동로마 황제를 '로마 황제'라고 지칭했다는 점에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지? 국력이 사실상 도시 국가 수준으로 전락해 버린 시기에도 로마 황제의 권위만큼은 서방과 동방, 가톨릭교회와 정교회를 막론하고 여전히 높았던 셈이다.

결론적으로 이 문서에서 그동안 언급되어 온 '서방은 동로마를 로마가 아닌 그리스로 취급하였다'는 식의 설명도 시기와 정치적 상황을 막론한 채 절대적으로 들어맞는다고는 볼 수 없으며, 그 서유럽 사람들조차 800년 카롤루스 대제의 서로마 황제 즉위 이전은 물론[59] 그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으로 인식하기도 했음을 보여주는 사료들이 버젓이 존재한다.

12.2. 중동권

그외에도 제국의 주변에는 많은 적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동방의 주적은 사산조 페르시아로, 호스로 2세 때 페르시아에게 밀려서 626년 최초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적에게 포위되는 사태[60]를 맞이하게 되나 결국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페르시아를 몰아내고 역관광을 보내며 크테시폰을 점령하는 성과를 올린다.[61] 하지만 이보다 더 강대한 적들이 곧 등장하게 되었으니, 바로 아랍무슬림들이다. 이들은 순식간에 피폐해져 있던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비잔티움 제국에게서 시리아이집트, 북아프리카 지역을 점령했다. 잠시 숨을 돌린 아랍인들은 곧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공격해 왔다. 콘스탄티노스 4세 때에는 그리스의 불로 해전에서 아랍인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레온 3세 때 다시 한번 아랍인들을 격파했다. 두 차례의 아랍인들과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에서 비잔티움인들은 아랍인들을 저지할 수 있었고, 서쪽에서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의 승리로 유럽과 기독교 문명은 이슬람 문명이라는 라이벌로부터 생존할 수 있었다.

가장 강력한 동방의 적은 유목민이었던 이슬람화된 오우즈 튀르크인이었는데11세기 이후에는 셀주크 투르크소아시아에서 계속 전투를 벌였고 이들을 막기 위해 십자군 기사들을 불러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4차 십자군에 의해 본진인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털린 후에는 예전과 같은 힘을 상실한 제국이 계속 밀려나는 신세가 되어버려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들에 의해서 멸망당하게 되니 근 700여 년간의 투쟁사라고 할수 있다. 이는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중세 비잔티움 제국의 '문화적'(종교+언어)[62] 계승자인 현 그리스와 튀르크의 계승자인 터키의 대립으로도 계속되고 있다.

12.3. 유목민

오우즈 튀르크 이전에도 비잔티움 제국은 초원의 유목민과 종종 충돌하였데 훈족아틸라는 447년에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한 바 있었고 그 이후 아바르족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다. 아바르족은 복속된 슬라브 부족과 함께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했으며 슬라브족이 발칸반도에 정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불가르족이 비잔티움 제국을 침입했는데 다뉴브 유역에 정착한 불가르족은 볼가강에 정착한 불가르와 달리 현지 슬라브족에 동화되어 불가리아 제국을 성립시키고 언어도 튀르크계 언어에서 슬라브 언어로 바뀌었다. 이들은 8~9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을 크게 압도할 뻔했다. 이후에는 페체네그와 충돌하였는데 페체네그는 약체화 된 뒤 레부니온 전투, 베로이아 전투로 소멸하였으나 키예프 공국의 원정으로 하자르가 약화되어 세력이 강성해진 쿠만과 가끔 충돌하였으나 쿠만은 키예프 공국과 자주 충돌하여서 인지 비잔티움 제국과는 많이 싸우지는 않았다. 그 뒤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 상당부분을 정복하고 동로마와 접촉했다. 당시 재건된 동로마는 미하일 8세~안드로니코스 2세 시대까지 몽골(및 일 칸국)과 우호적인 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12.4. 슬라브

제국의 또 다른 적들로는, 발칸 반도 지역에 남하해온 슬라브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처음에는 비잔티움인들의 적이었으나, 성 키릴로스와 성 메토디오스 형제의 포교와 제국의 압도적인 문화 덕분에 비잔티움 문명에 동화되었다. 물론 문화적으로는 동화되었지만, 후에 세르비아 제국은 동로마 제국을 노리기도 했다. 스스로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황제' 자리에 올라 로마 황제를 자칭한 스테판 우로슈 4세 두샨이 좋은 예.[63]

초기에 슬라브족들은 발칸 반도 지역에서 약탈을 일삼았으나, 얼마 안 가 제국의 영토에 정착했다. 슬라브족들 외에도, 북쪽에서는 계속해서 스텝지대의 유목민들이 남하해 왔는데, 초기에는 아바르족,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불가르족, 나중에는 페체네그족들이 남하해왔다. 아바르족은 이라클리오스가 페르시아 원정을 가 있을 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지만, 실패하고 세력은 붕괴되었다. 불가르족은 오랜 기간 제국을 괴롭혔다. 튀르크계 불가르족은 토착 슬라브인과 연합, 불가리아 왕국을 세워 제국과 대립했다. 제국은 한 때 불가리아 국왕에게 제위를 선물해서 그들의 비위를 달랜 적도 있었다(제1차 불가리아 제국). 바실리오스 2세(재위 976~1025년) 때는 불가르 세력을 완전히 복속시키기도 했지만(1018년), 이내 제국이 약화되면서 불가리아는 다시 역사에 나타난다(제2차 불가리아 제국). 페체네그족은 비잔티움이 가장 약화되었을 때 발칸 반도로 남하해 왔으며, 알렉시오스 1세는 이이제이의 전략으로 다른 유목민족을 끌어들여 페체네그족을 궤멸시켜 버렸다. 그 후에도 이들은 존속하긴 했다. 다만 제국의 병사와 정주민으로서. 그들로 이루어진 부대들은 십자군 전쟁 때 십자군을 보호했다.

또한 동슬라브인의 키예프 공국과 자주 교류 및 충돌도 했다. 바이킹 노르드인이 동화된 이들은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도 했고 동로마의 사주로 불가리아를 공격했다가 동로마마저 공격하려다 격퇴당했다. 그 이후 키예프 공국이 동로마로부터 기독교(정교회)를 받아들인 이후에는 전쟁도 몇번 있었으나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때 까지 러시아는 우호관계가 되었다.

13. 관직

동로마제국의 관직

14. 평가

14.1. 근대의 평가

비잔티움에 대한 폄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근대의 일인데 중세의 모든 것을 나쁘게 보았으니 중세 제국인 비잔티움 제국 역시 그랬을 것이다. 18세기 영국인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자신의 명저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로마 제국의 후계인 제국을 악의적으로 왜곡·곡해하고 매우 평가절하했으며, 이는 작품 내에서도 노골적으로 암시 되듯이 반기독교적 성향인 기번에게 있어 "기독교로 개종한 로마"는 그저 로마의 이름만 빌린 짝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계몽시대에 전반적인 제국 평가에 영향을 주어 비잔티움이란 그저 "궁정의 음모와 환관이 판치던 저질국가"라는 인식이 강했다. 모 근대 저자는 "저열제국(The Lower Empire)"라고도 서술했다. 차라리 기번은 양반이다.

이는 시오노 나나미에게도 계승되어서 그녀가 서술한 로마인 이야기 마지막권에서는 제국의 전성기는 로마가 막장일 때보다 조금 나을 정도의 안습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 서구 역사학계가 계몽사관 - 근대사관의 그늘을 벗어나게 되고, 비서유럽 문명사를 보다 객관적으로 보게 되면서 비잔티움 제국의 평가도 180도 달라졌다. 한마디로 말해서 기번이나 시오노 나나미의 비잔티움관은 이미 논파되어 유효기간이 지난 것이다.[64]

동로마 제국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어휘 차원에서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Byzantine'이라는 영어 단어에는 '권모술수를 쓴; 복잡한, 미로처럼 뒤얽힌, 헝클어진'이라는 형용사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속이 복잡하게 배배 꼬여 있는, 음험한 능구렁이 같은 놈들로 본 것. 아무튼 오랫동안 가해진 비잔티움 폄훼로 인해 유럽인들은 물론이고 비유럽 세계 주민들조차 1,123년이나 유지된 비잔티움을 흑역사 취급하고 있었으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재평가 되는 분위기이다.

14.2. 현대의 평가

현재 역사학계 주류는 동로마 제국을 고대 로마 전통과 새로 도입한 기독교를 잘 조화했고,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세에 가장 선진적으로 발달한 국가 중 하나로 기술하고 있다.

특히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서유럽의 강고한 방파제 노릇을 수행한 것은 동로마 제국이 역사에 남긴 큰 의의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슬람 세력에 넘어간 중동의 여러 지역들[65]에서 기독교가 모조리 사그라들고 대부분 이슬람화된 것을 볼 때, 동로마 제국은 유럽 기독교 문명의 수호자 노릇을 한 것이다. 또한 문화적 수준도 당시 유럽의 다른 그 어떤 나라보다 월등히 높아서, 동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인해 서유럽으로 망명한 고전 학자들에 의해 서유럽의 르네상스가 시작될 수 있었다. 이랬기 때문에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동로마 제국은 서유럽에 있어서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의 냉장고" 역할을 했다는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다만 이 냉장고 역할이란 평가도 비잔티움 문화에 대한 홀대로 볼 수 있는 평가이다. 한마디로, 니넨 뭐 새로운 건 안 만들고 고전 문화만 보존해서 갖고 있다가 서유럽한테 전해준 거잖아라는 의식이 기저에 깔려 있다. 고전 문화와 기독교 문화의 융화 및 그것이 서유럽에 끼친 영향 및 동유럽 문화의 기틀이 된 동로마 제국의 문화를 단순히 '문명의 냉장고'로만 평가하기엔 부족한 면이 너무 크다.

동로마가 서유럽에게 전달해 준 것은 많다. 대표적으로 수도원[66], 미술 양식이 그 예다. 서유럽 역시 각 지역의 수도원과 교회가 문명의 등불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고전 문화 보전에 힘썼다. 물론 서로마 제국 멸망 직후로는 피해가 커서 동로마 제국만큼의 보존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카롤링 르네상스를 거쳐서, 12세기에 이르면 서유럽도 상당히 찬란한 중세 전성기 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다만, 동로마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이성주의적인 철학과 과학은 동로마의 종교적 과열, 즉 황제수장주의와 어긋나는 것이기에 이 둘을 철저히 탄압받았다.[67] 오히려 페르시아가 고대 그리스/로마의 이성주의적 철학과 과학을 환영하였다.

시오노 나나미가 그렇게 좋아하는 베네치아부터가 동로마 제국의 중소도시에서 시작하여 독립한 것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베네치아의 초기 건축물은 비잔티움 양식에서 가져온 것이 확연히 보일 정도. 대표적인 건물이 산 마르코 대성당인데, 이쪽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하기아 소피아 다음가는 교회인 성 사도 성당을 모방해서 건축하고 비잔티움 양식의 황금빛 모자이크로 도배했으며 몇몇 유물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약탈해와 장식하기까지 했다.

15. 역사적 의의

위의 서술들을 총괄하며 동로마 제국의 자체적인 문화적, 제도적 빼어남과 문명으로서의 총합적 위대함에 제대로 된 경의를 표하는 역사적 사실을 지적하자면 동로마 제국은 천년에 가까운 존속 기간 동안 동방에서는 아랍, 튀르크, 페르시아, 북쪽으로는 불가리아, 세르비아, 루스와 항시 대치하는 도중 때때로 동맹 아닌 동맹의 얼굴로 옆구리를 찔러 온 베네치아, 제노아, 십자군 같은 프랑크-라틴계 세력 같은 수 많은 적들을 상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적대한 모든 세력들에게 뿌리 깊은 영향력과 유산을 남겼다.

당장 동로마 제국의 북방 국경을 수백 년에 걸쳐 유린하고 간혹 콘스탄티노폴리스 대문을 두들기기도 했던 루스족과 불가리아 제국, 세르비아 같은 슬라브계 공국들과 현대 루마니아의 중세적 모태인 블라흐족, 카프카스 산맥 오지에서도 헬레니즘의 영향을 깊게 받은 조지아는 동로마를 괴롭히면서도 그 문화력과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뿌리까지 깊게 감화되어 정교회를 받아들이고, 차츰 교회 자치권을 인정받은 불가리아 정교회, 세르비아 정교회, 루마니아 정교회, 조지아 정교회는 그 민족들이 400년이 넘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으면서도 독자적 정체성을 유지하게 된 원동력이자 민족적 자의식의 근간이 되었다. 또한 이 나라들은 동로마 제국에서 파견한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성인들이 고안한 키릴 문자를 문자로 삼았으며, 동로마 제국이 쇠락해 가고 결국 멸망하자 그 직접적인 후계자를 자처하며 끝끝내 제정 러시아 시절까지 가서는 러시아 제국의 차르는 정교회 기독교의 세속적 수호자라는 동로마 제국의 이데올로기까지 그대로 답습하여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망하는 날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을 국가적 사명으로 천명했다.[68]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 또한 제국을 공격할 때는 공격 하더라도 이들의 문화적 광휘, 황제적 권위, 제도의 세련됨에 깊게 감화 받아 로마 황제의 계승을 천명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와 아토스 산의 수도회 조직 또한 유지하며 건축, 통치 기관, 국가적 이데올로기 등 많은 면에서 동로마 제국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수용, 발전시켰고, 셀리미예 모스크,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 등이 상징하는 오스만 제국 특유의 건축 양식은 이에 대한 문화적 증언이다.

동로마 제국의 쇄망에 치명적인 기여를 한 베네치아 공화국 또한 그 기원은 상술했다시피 동로마 제국의 속주였으며, 통수를 칠 때는 치더라도 공화국 내부적으로도 산 마르코 성당의 모습이 보여주듯 동로마 제국의 문화적, 예술적 찬란함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모두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모두에게 강력한 유산을 남긴, 뭔가 아이러니한 모습이긴 하지만 이런 의미에서 동로마 제국의 문명은 아낌 없이 두들겨 맞으면서주변 후발 주자들에게 퍼준 문명이라 평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대한 동유럽, 이슬람 세계의 관점에서 이들이 더 오래 보았고, 깊은 관계를 맺었으며, 문명사적 관점에서 받아 먹은 빚이 많은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서로마보다 천 년을 더 오래 간 이 동로마의 모습이다. 특히 정교회에 있어서 동로마의 유산은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역사적 구심점이자 문명과 종교의 어머니요, 이후로도 수백 년에 걸쳐 정교회권 지도자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을 천명하게 만든 스스로 재생산 하는 신화적인 카리스마를 가지는 거대한 역사적 지향점이다. 이들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편협한 서구 중심적 관점에서 동로마 제국의 로마성을 부정하거나 문명의 냉장고 따위 단어로 폄하하는 건 가당치도 않은 무례이다.

16. 국호 표기법

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로마 제국)이라는 호칭을 고전 그리스어로 발음하면 '바실레이아 톤 로마이온' 정도 되지만, 비잔티움 시절의 그리스어는 이미 상당한 복모음 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현대 그리스어와 거의 같게 발음된다. 사실 고전 그리스어가 쓰이던 시절과 비잔티움 제국은 이미 1000년 가까이 갭이 난다! 라틴어만 해도 원수정 당시 라틴어와 동서로마 분열기의 라틴어가 상당히 많이 달라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특히 'Β'가 'v'자음으로 바뀌게 된것도 기원 후의 일이다. 중세 그리스어식 발음은 바실리아 톤 로메온.[69]

현재 한국에서 통용되는 비잔티움 시대 인물들의 호칭에는 이와 같은 그리스어의 변화 양상이 제대로 반영되어 있지 않고, 라틴어식 표기와 혼재되기 때문에 (특히 한국외대 그리스-발칸어학과 교수들을 중심으로) 수정이 필요하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70] 당시의 발음을 살리려면 코이네 그리스어 '헤라클리우스'는 중세 그리스어 '이라클리오스'가 된다. 그리고 비잔티움의 마지막 황제는 라틴어식인 '콘스탄티누스 11세 (드라가세스)' 보다는 '콘스탄티노스 11세 (드라가시스) 팔레올로고스'가 될 것이다. 물론 당시 동로마 제국인들 역시 (이라클리오스 황제 이후에도) 서방 국가들을 상대로는 황제의 명칭을 여전히 라틴어로 기록했으니 어느 쪽 독법을 따르는가는 독자 마음. 다만 코이네만 괴이하게 고집했던 한때의 풍토는 반드시 되짚어야 한다. 예전의 서구에도 이런 풍조가 있어서 워랜 트레드골드 교수가 일부러 한 단원을 할애해서 집중적으로 까댔을 정도. 현실적으로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꼽자면, 아무래도 서구인이 그리스어 문헌을 접하는 주된 수단이 고전기와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 학자들의 작품과 성경이고, 따라서 그리스어에 대한 흥미 역시도 압도적으로 고전어와[71] 코이네에[72] 몰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익숙하고 편한 표기와 발음으로 읽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학자들 역시도 그리스어를 전문적으로 배우는 게 아니라 '읽을 줄은 안다'는 선에서만 학습할 경우, 고전어 혹은 코이네부터 배울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다.

17. 매체

17.1. 등장하는 작품들

  • 영화
    • 칸의 영광 사회주의 시절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영화에 적국으로 나온다. 1차 불가리아 제국의 태조인 칸 아스파루흐의 활약을 그린다. 당연히 '적국'이기에 아주 처참하게 발린다. 참고로 동로마 군대가 제대로 나온 거진 유일한 영화이다. 수만에 달하는 동로마 군세의 물량을 사회주의의 파워로 잘 보여준다. 물론 발린다. 그리고 발리는 것이 사실 역사적 고증으로도 맞다.

17.2. 언급되는 작품들

17.3. 모델로 한 것들

18. 끝나지 않은 이야기

18.1. 현대 그리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되고 로마 제국은 멸망하였으나 로마의 백성들인 로마인, 즉 그리스인들은 여전히 그곳에 살았다. 메흐메트 2세는 전쟁으로 피난 간 그리스인의 복귀를 장려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20세기 초까지도 그리스인 인구가 도시 전체의 절반에 달하는 명실상부한 국제도시로 자리잡았다.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전해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함락 당시 성 소피아 성당에는 점령군이 물러나길 바라는 여성들과 성직자들이 성찬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튀르크 군대가 성당 안에 들어갔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성직자들과 미사를 참례하던 신자들이 모두 벽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전사'했다고는 하지만 정작 시체는 확실히 발견되지 않은 콘스탄티노스 11세처럼 그들도 죽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다시 그리스도인의 도시가 되면 이들이 모두 돌아와서 성찬예배를 마저 끝내리라는 전설이 남아있다.[75] 그리스인, 즉 동로마인들이 정통 로마 치하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회복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잘 드러내 주는 전설. 그리스인들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집착은 생각 이상으로 강해서 콘스탄티노폴리스아나톨리아 지방에 거주하던 그리스계 주민들은 대부분의 신생 독립국인 그리스를 인정하지 않았다. 무슬림의 지배를 받더라도 어쨌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그리스인들이 터키를 침공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19세기 오스만 튀르크에서 독립한 그리스 왕국은 스스로를 비잔티움 제국의 정통 후계자라고 생각했고, "발칸 반도 남쪽 끝부분의 영토로 만족하지 말고 '그리스인'이 살고 있는 지방 모두를 우리 영토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 이를 '대그리스주의'. 또는 당시 그리스인이 붙인 이름을 따라 '위대한 이상(메갈리 이데아, Μεγάλη Ιδέα)'이라고 한다. 문제는 '그리스인' 이냐 아니냐의 기준을 '역사적, 인종적으로 그리스와 관련된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들'로 잡았다는 것. 이에 따르자면 오늘날 그리스는 물론이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고대 그리스 폴리스들이 존재하는 소아시아 해안은 물론이며 그리스인이 숨어살던 카파도키아 고원과 그리스계 폰투스인이 사는 폰투스까지 모조리 정복해야 한다. 즉 발칸 반도 남단 전역과 아나톨리아 반도 전역을 정복해야 하는 셈. 바로 아래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터키 대국민회의와 전쟁을 벌여 아나톨리아를 탈취하려 했던 것도, 욕심이라면 욕심이었지만 그 이전에 이러한 민족주의적 사상이 나왔기 때문. 이것은 터키 민족으로서는 지극히 곤란한 것이었는데, 대그리스주의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물론 멀리는 트레비존드안티오키아까지 점령해야 하는 것으로 이는 튀르크인의 거주지역과 완전히 겹치는 것이었다.

메갈리 이데아를 국시로 삼고 그리스 왕국은 1832년 독립 이후 이오니아 제도, 테살리아, 남부 마케도니아, 크레타, 동부 에게해 제도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조금씩 빼앗았다.다만 그리스 왕국이 홀로 차지한 게 아니라 이오니아 제도는 오스만으로부터 뺏어온 것이 아닌 1861년 왕실끼리 사돈 관계였던 영국이 선물한 영토이다. 그리고 차지한 땅들도 그리스 홀로 이긴 게 아니라 강대국들과 연합하여 빼앗아 온걸 차지한 거였다. 사실 그리스/역사에서도 나오듯이 그리스 독립도 거저해준게 아니라 그리스에 영국과 여러 강대국이 주둔하고 여러 항만시설 이용권을 거저로 내주고 온갖 무역 특혜에서 여러 모로 내정간섭을 받았던 터였다. 그리스 홀로 오스만에게 덤비다가 하필이면 크림전쟁으로 인하여 오스만과 동맹을 맺던 영국과 프랑스가 분노해 실컷 처맞고 오히려 이들에게 가진 땅을 내놓으며 온갖 배상금을 뜯긴 적도 있었다. 반대로 그리스 홀로 쳐들어가다가 오스만에게 두들겨 맞았던 적도 많았다. 이때문에 지금도 터키 네티즌들이 그리스 독립 이후 혼자 까불다가 처맞은 주제에라고 비웃음도 당할 지경. 1차 발칸 전쟁 때는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등등과 손잡고 오스만을 뭉개면서 비로소 크레타와 남부 마케도니아 등등을 차지할 수 있었다. 거꾸로 2차 발칸 전쟁때는 오스만과 그리스가 손잡고 같이 불가리아를 처뭉개면서 불가리아가 1차 발칸 전쟁에서 차지했던 땅을 서로 빼앗아갔다....

하지만 2년도 안가 그리스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동맹국에 가담한 오스만 제국에 맞서 연합군에 가담했고 아드리아노플을 위시로 한 유럽 터키 전역과 이즈미르를 비롯한 일부 아나톨리아의 서부 지역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리스 홀로 소아시아 해안을 넘어가다 못해 아나톨리아 내륙까지 점령하려다가, 신생 터키 공화국의 지도자 케말 아타튀르크가 오스만군의 잔해를 급히 긁어 모아 구성한 병력에 격파당하고 말았다(그리스-터키 전쟁). 그리하여 그리스의 야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둘러싼 동부 트라키아는 그리스가 점령했지만, 정작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연합군(주로 영국군)이 주둔해서 그리스군이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여 회복하지도 못한 상황이었기에, 그리스의 꿈이라는 건 목표치도 채우지 못한 거였다.

제1차 세계대전과 그리스-터키 전쟁 이후 1923년에, 터키 땅에 살고 있는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땅으로, 그리스 땅에 살고 있는 터키인들은 터키 땅으로 이주한다는 협약(그리스-터키 인구 교환)이 이루어졌기에 오늘날에는 사태가 완전히 해결된 상태다. 인구 교환 이후에도 이스탄불 근교에 위치한 섬들에는 여전히 터키 국적을 가진 그리스인들이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면서 살고 있으며,[76]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애틋한 감정은 타소스 불메티스 감독의 <터치 오브 스파이스> - 그리스어 타이틀은 'Πολιτίκη κουζίνα'(도시의 요리) - 에도 잘 나타나있다.[77] 그들에게 있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교도들에게 점령되었더라도 여전히 로마였으며 '회복해야 할' 땅이었다.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는 새해를 맞아 캐롤을 부르는 사람들의 노래 가사가 나오는데 내용이 인상적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성 바실리오의 도움으로 아홉 아들과 아홉 딸을 낳으시길. 딸들은 저마다 실을 잣고 천을 짜는 살림꾼이 되게 하시고, 아들들은 저마다 훌륭한 병사가 되어 왕들의 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게 하소서."

현대 그리스에서는 'Βυζαντινή Αυτοκρατορία(뷔잔디니 아프토크라토리아; 비잔티움 제국)'나 'Ανατολική Ρωμαϊκή Αυτοκρατορία(아나톨리키 로메키 아프토크라토리아; 동로마 제국)'[78] 같은 표현이 쓰인다.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건 아무래도 후술하지만 로마와 연관이 되는 동로마 제국조차도 잘 안 쓰이고, 그냥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해놓은 걸 볼 수 있다. 위의 '바실리아 톤 로메온'이란 말은 그냥 '로마 제국' 정도의 뜻이라서 현대 그리스 입장에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비잔티움 제국을 그냥 '로마 제국'으로 칭해 버리면 그리스인들은 디아도코이 시대가 끝난 이후, 오스만 제국에서 벗어나기 이전까지 무려 2천여 년 동안이나 자기 나라를 가져본 적이 없는 민족이 된다. 현대 그리스의 공식 입장은 대체로 비잔티움 제국의 그리스 계승성을 강조한다. 이는 동로마 제국을 그리스화된 나라라기보다는 다민족 제국으로 보아야 한다는 최근 학계 연구 성과와는 반대되는 주장.

18.2. 러시아 제국

훗날 제국이 멸망한 뒤 모스크바 대공국이 어떻게든 콘스탄티노폴리스와의 관계를 찾아내며 '모스크바제3의 로마임'[79]이라고 주장했으나 당시에는 러시아 국내용이었고, 다른 나라들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가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딸인 조이와 결혼한 것에서 근거를 두었지만, 오스만 치하의 정교도들에게는 전혀 달가운 말이 아니었다.

하여튼 제3의 로마라고 주장했지만 당시에는 자기들 말고는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던 러시아는 시간이 흘러 국력이 강성해져 이반 4세 때 차르를 칭했고 표트르 1세 때 임페라토르 칭호를 받으면서 완전한 황제국으로 대접받게 되었고 황제국이 된 러시아는 부동항을 확보하고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돌파하여 지중해로 진출하며 동시에 이교도 튀르크인의 지배 하에 신음하는 정교회 신자들을 구원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해방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수십 차례의 전쟁을 벌였다. 러시아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해방하여 진정한 로마가 되고자 한 생각은 예카테리나 2세의 일명 '그리스 계획'에서 잘 나타나는데 새로이 정복한 옛 크림 칸국 영토에 도시를 건설하며 그 도시들에 그리스식 이름을 붙인 것이 대표적이다. 오데사, 케르손, 세바스토폴, 심페로폴, 스타브로폴 등이 바로 그 예시.

러시아 제국이 1차 대전에 참전 했을 때, 서방연합국 (프랑스, 영국)과 함께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콘스탄티노폴리스(이스탄불)을 러시아가 갖는다"는 밀약을 맺었다. 이는 동방 정교회의 맹주를 자처하던 러시아 제국에게 비잔티움 제국을 승계한다는 명분을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참패를 거듭하다가 국내에 혁명이 두번이나 벌어져 볼셰비키가 집권하면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추축국과 단독강화를 맺고 전쟁에서 빠졌고, 그 다음은 국내에서 적백내전이 벌어져 이스탄불에 신경쓸 여력이 없어졌다. 오히려 1920-30년대 신생 터키 공화국소련은 사이가 매우 좋았다. [80]

19. 역사보기 틀

그리스의 역사
Ελληνική ιστορία

선사

고대

미노아 문명

미케네 문명

암흑시대

고졸기

아테나이

헬레니즘 제국
(안티노고스·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로마 제국

스파르타

마케도니아

중세

근대

비잔티움 제국
(니케아·라틴제국·
에피로스·트레비존드)

오스만 제국

제1공화국

그리스 왕국

제2공화국

그리스 왕국

그리스국

현대

그리스 왕국

군사정권

그리스 공화국

바티칸 시국의 역사
Historia Civitate Vaticana

고대

중세 ~ 근세

근대

현대

고대 로마

로마 공국

교황령

바티칸 포로

바티칸 시국

이집트의 역사
تاريخ مصر

이집트 문명

그리스-로마

중세 이슬람

고왕국

1중간기

중왕국

2 중간기

신왕국

3 중간기

마케도니아 왕국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고대 로마

중세 로마

정통 칼리파 시대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

파티마 왕조

아이유브 왕조

맘루크 왕조

근대

현대

오스만 제국

무함마드 알리 왕조

대영제국

이집트 왕국

이집트 공화국

아랍 연합 공화국

이집트 아랍 공화국

이스라엘의 역사
היסטוריה של ארץ ישראל

히브리 시대

고대

이스라엘
통일 왕국

북이스라엘

아시리아

페르시아 제국

하스모니안 왕조

로마 제국
/유다이아 속주

동로마 제국

남유다

신바빌로니아

중세

근대

현대

이슬람 제국
우마미야 왕조 아바스 왕조 파티마 왕조 셀주크 제국

예루살렘 왕국

이슬람 제국
아이유브 왕조 맘루크 왕조 오스만 제국

위임통치령

이스라엘


  1. [1] 단 현대 그리스에서는 'Βυζαντινή Αυτοκρατορία'(비잔티움 제국)라는 표현이 쓰인다. 이에 대해서는 '국호 표기법' 문단 참고.
  2. [2] 이 기와 문장, 그리고 아래 나오는 표어는 모두 로마 제국 국가의 상징물이 아니라 제국의 마지막 황실인 팔레올로고스 가문의 상징물들이다. 그 이전 시대의 로마 제국에 국기나 국장 같은 개념이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독수리, 십자가, 라바룸(키로 문양), 기독교 성인들의 초상들을 군기(軍旗)에 쓰긴 했지만 이것이 국기나 국장은 아니다. 한편 오스만 제국 치하의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팔레올로고스 가문의 쌍두독수리 문양을 깃발 도안으로 채택하여 오늘날까지 쓰고 있다. 오늘날 그리스 정교회에서 쓰는 쌍두독수리 깃발들은 노란색 바탕에 검은색 독수리가 그려져 있다.
  3. [3] 사두정치 시절 로마의 동서 분할통치 기준
  4. [4]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 기준
  5. [5] 로마의 최종적인 동서 분할통치 기준
  6. [6] 디오클레티아누스 시절에 동방의 수도로 지정되어 근처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세워질 때까지도 수도 역할을 했으며 콘스탄티누스 대제도 여기서 생을 마감하였다.
  7. [7] 1204년 4차 십자군 원정으로 인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지방정권들의 분립기 시대이다.
  8. [8] 다만 일반적인 전제군주정보다는 공화정 전통이 남아있는 로마 특유의 전제군주정이라 보면 되겠다. 최근의 관련 저서인 Anthony Kaldellis의 The Byzantine Republic을 보다 보면 제위가 세속 가능한 초강력 종신 대통령직으로 여겨질 정도다.
  9. [9]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제국의 언어를 그리스어로 바꾸었다는 인식이 대중들에게 널리 퍼져 있지만, 고대 로마 시대부터 제국 동방에서는 라틴어가 아닌 그리스어가 공용어였다. 어쨌든 7세기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학술 분야에 쓰이던 라틴어는 교양 계층 간에서도 급속히 쓰이지 않았고 로마 문화에서 의례 부분으로 때때로 나타나는 정도였다.
  10. [10] 당시에는 행정수도 건설. 359년이 되서야 로마 시에만 두었던 수도시장 내지는 특별시장(Praefectus Urbi)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도 두었으며, 원로원 또한 로마의 그것과 동급으로 격상시켰다.
  11. [11] 고전이나 코이네 식으로는 발음이 '로마이오이'지만, 중세 그리스어 때는 ai를 아이가 아니라 에로 읽고, oi를 오이가 아니라 이로 읽는 발음변화가 정착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12. [12] 좁게는 헬라스(=아카이아), 넓게는 헬라스+마케도니아(+에피루스(노바와 베투스))
  13. [13] 어원과 관련하여 여러 학설이 있는데, 다수의 학자들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속칭이었던 '도시(-polis, 폴리스, 폴리)'를 중국어로 옮긴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당대 동로마인들 사이에 있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도시 그 자체'로 인식되었고...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이스탄불' 문서의 해당 항목 참조.
  14. [14] 구당서 권198 열전 제148 '서융(西戎, 서쪽 오랑캐)'에 실린 해당 부분의 원문은 '拂菻國一名大秦(불림국, 일명 대진)'이다.
  15. [15] 166년 대진국 왕 안돈(安敦)이 한나라로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16. [16] 이러한 명명법은 서유럽인들이 세운 라틴 제국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라틴 제국의 정식 명칭이 로마니아 제국(Imperium Romaniae), 즉 '로마 땅의 제국'이었으니...
  17. [17] 세르비아어로는 'Цар Срба и Ромеја', 그리스어로는 'βασιλεὺς καὶ αὐτοκράτωρ Σερβίας καὶ Ῥωμανίας'로 표기되었다. 단 세르비아어 명칭으로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황제(Цар Срба и Грка, Emperor of the Serbs and Greeks)'라고 불리기도 했다(참고로 'Emperor of the Serbs' 문서의 세르비아어 위키백과 타이틀은 'Цар Срба и Ромеј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서방 세력을 상대로 한 라틴어 명칭으로는 'I(m)p(erator) Roma(niae)(Emperor of Romania)' 또는 'I(m)p(erator) Ro(ma)io(ru)m(Emperor of the Romans)'을 사용함으로써 서유럽 국가들을 상대로도 자신이 '로마 황제'에 올랐음을 적극적으로 드러내 보였다.
  18. [18] 원저자는 미셸 카플란.
  19. [19] 다만 이 두 문제의 경우 현대 연구자들 중 다수는 아니지만 적지 않은 수도 노리치와 의견을 같이하는 경우가 있으며, 점점 부상하는 추세다. 근거 없이 한 얘기는 아니란 소리.
  20. [20] 동로마 황제 자리를 노골적으로 탐했던 시메온 1세의 경우 92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입성 후 그곳 총대주교인 니콜라스에 의해 황제로 인정받기까지 하였으나, 동로마가 인정한 그의 제위는 어디까지나 '불가리아인의 황제'일 뿐이었다. 카롤루스 대제에 이어 두 번째로 로마 제국에 의해 '황제'로 인정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우 '불가리아인의 황제' 자리에 결코 만족할 수 없었던 시메온 1세는 이후 스스로를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라고 부르며 마음껏 그 위세를 떨쳤다.
  21. [21] 출처: Filip Van Tricht, 『The Latin Renovatio of Byzantium』 p.66.
  22. [22] 이 외에도 교황이 서로마 황제를 임명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의 근거로 제시된 게 '콘스탄티누스 기증서(기진장)'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교황 실베스테르 1세 및 그 후계자들에게 서방 황제 임명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의 이 기증서는, 훗날 레오 3세가 샤를마뉴를 로마 황제로 즉위시키는 주요 근거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권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를 뒷받침하는 수단으로도 오랫동안 즐겨 활용되었는데... 그러나 실제로 이 문서는 위조된 것이었으며, 서방 황제를 임명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는 동방 황제가 여전히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서로마를 무너뜨린 오도아케르마저 옛 서방 황제의 권한을 모조리 동방 황제에게 넙죽 바친 마당에 교황에게는 샤를마뉴를 로마 황제로 임명시킬 아무런 권한도 없었던 셈... 막말로 그저 종교적 권위와 주작 문서에 기대 자기 멋대로 로마 황제 왕관을 뚝딱 만들어 샤를마뉴 머리에 씌워준 거나 다름없었다.
  23. [23] 신성로마제국이 로마제국이라 주장할 여지는 있는데 이탈리아에 분산되어 살고 있던 교황을 중심으로한 서로마 유민의 어느정도 동의는 얻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 사에서 신라출신인 견훤이 백제유민의 지지를 받아 후백제를 세운것과 유사하다.
  24. [24] 단 고대 로마 제국에 비해서는 어쨌거나 영토가 많이 줄었으므로, 그것까지 합쳐 생각하면 최고 전성기는 오현제 시기고, 동로마 시대의 전성기들에 대해서는 최고 전성기는 아닌, 중흥기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중흥 문서 참조.
  25. [25] 세입에 비해 군비가 너무 많은 것 아닌가 싶겠지만, 많은 거 맞는다. 둔전병의 특성을 가지는 테마 제도를 고려해도 당시의 군비는 위험할 정도로 재정을 잡아먹었다.
  26. [26] 1081 ~ 1180으로 딱 100년이다.
  27. [27] 다만 팔라티니 코미타텐세스 조직은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사실상 붕괴되었고, 재건되지 못한 채 사라졌다고 보는 게 통설이다.
  28. [28] 여기에 자신의 사병 부셀라리 기병대 1,500기를 추가로 데려갔다.
  29. [29] 현대 그리스어에서는 '연대'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복수형은 타그마타(τατάγματα)
  30. [30] John Haldon이 6,000명이라고 주장하지만, 그의 주장에는 평소 명성을 고려해봐도 놀라울 정도로 별다른 문헌 근거가 없는 게 사실이다. 반면 24,000이란 주장은 동시대에 비잔티움에서 포로 생활도 해본 바 있는 이슬람 학자의 저술이나, 다른 제국 문헌에서 뒷받침된다. 다른 로마 시대를 봐도 인구 비례에서 상비군을 겨우 0.2% 뽑는 게 무리란 주장은 영 설득력이 떨어진다.
  31. [31] 비잔티움인은 물론 이런 전술에 가장 혹독히 당한 이슬람측도 이들의 기병 돌격에 대해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32. [32] 게다가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된 사민정책과 주변국들과의 교류로 인해 인종 간의 혼합이 적극적으로 진행되어, 인종적으로 '순수한 그리스인', '순수한 슬라브인' 이런 거 따지는 게 무의미할 지경이었다. 동로마 황제의 초상화와 관련해서도 후대로 갈수록 황제의 얼굴색이 마치 중동인이 연상될 정도로 점점 까무잡잡해진다.
  33. [33]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 하나. 합동으로 코르푸를 공략하고 있던 동로마군과 베네치아군은 그러나 사이가 서로 화목하지 못해 자주 신경전을 벌였는데, 마침 그때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가 전선을 시찰하러 오자 베네치아군은 황제복을 입힌 흑인 노예를 배 위에다가 세워두는 식으로 황제를 조롱해 버렸다. 이는 마누일 1세의 아버지 요안니스 2세를 겨냥한 행동이었는데, 어두운 색의 피부에 곱슬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던 콤니노스 왕조의 황제들 중에서도 특히 요안니스 2세는 당대인들 사이에서 '흑인 황제'라는 놀림까지 받았을 정도로 그 특징이 유독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34. [34] 그 전에도 반서방의식은 위에서 베네치아와 동로마의 반목에서 짐작했다시피 상당히 있었고, 그것을 야심가 안드로니코스가 이용해서 1182년 Massacre of the Latins(라틴 즉 서방인 대학살)이 일어나기도 했다.
  35. [35] 일례로 1451년 이탈리아의 페라라(Ferrara) 후작 레오넬로 데스테(Leonello d'Este)에게 라틴어로 보낸 편지에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본인을 'Constantinus in christo deo fidelis imperator ac moderator Romeorum semper augustus', 즉 로마의 '임페라토르'이자 '아우구스투스'라고 지칭했다.
  36. [36]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1908년 림노스(렘노스) 섬 출생의 미국 비잔티움 학자 피터 차라니스(Peter Charanis)의 증언에 따르면,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 때 섬을 점령한 그리스 해군 병사들을 보러 나온 아이들은 그 병사들을 마치 자신들과는 별개의 족속을 부르는 것처럼 '그리스인(Hellenes)'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흡사 외국인을 대하는 듯한 그들의 태도에 내심 황당해한 그리스 병사들은 아이들에게 "네들은 그리스인이 아니니?"라고 물었고, 이에 대한 아이들의 대답이 걸작이다. "네, 우린 로마인(Romans)이에요" 앤서니 칼델리스(Anthony Kaldellis), 『비잔티움의 헬레니즘(Hellenism in Byzantium)』 p.42.
  37. [37] 심지어 이탈리아 본토와 속주를 막론하고 제국의 모든 자유민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한(Constitution Antoniniana(Antonine Constitution, 안토니누스 칙령)) 카라칼라 황제 때부터는 노예나 투항자만 아니면 민족이 어떻든 법적으로도 다들 '로마인'이 되었다. 이는 '안토니누스(= 카라칼라의 본명) 황제의 법령에 의해 로마의 세계에 사는 모든 이들은 로마 시민이 됐다(By an enactment of the Emperor Antoninus, all those living in the Roman world were made Roman citizens)'라고 쓴 당대의 법률가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Domitius Ulpianus)의 기록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울피아누스의 이 문장은 로마법 대전의 학설휘찬(學說彙纂, Digesta seu Pandectae)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학설휘찬의 내용 태반이 그의 저서에서 따왔을 정도로 울피아누스는 당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법률가로서의 명성이 높은 인물이다.
  38. [38] 그전에도 제국에 라틴인, 프랑크인을 비롯한 서방 출신 민족들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12세기에 이르러서는 마누일 1세의 친서방 정책에 힘입어 베네치아, 제노바, 아말피, 피사 등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에서 라틴인들이 대거 제국으로 이주해 와 로마 시민권도 따고 각자의 커뮤니티도 형성함으로써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보편 제국의 수도로서의 위엄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1180년에는 무려 6만 명의 라틴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살기도 했으며, 출신 도시별로 구분된 이들의 커뮤니티는 상업적인 우위를 차지하고자 서로 치열한 기싸움을 이어 갔다. 단체로 상대방의 구역에 쳐들어가 패싸움을 벌이기도... 단지 상인뿐 아니라 동로마의 관료 집단에도 서방인들이 꽤 깊숙이 침투해 있었으며, 마누일 1세의 후계자 자격으로 동로마 황제에 즉위한 알렉시오스 2세는 그 어머니가 안티오키아 공국의 마리아로서 프랑크인 핏줄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알렉시오스 2세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황태후를 위시한 섭정단이 황제를 보필했는데, 이 섭정단 역시 서방인 및 제국의 친서방파가 주류를 이루었고... 제국의 서방인 커뮤니티는 1182년 안드로니코스 1세의 쿠데타 때 자행된 라틴인 대학살로 크게 위축되었으나, 이후에도 제국의 베네치아인과 제노바인은 본국과 연계해 가며 동로마의 권력투쟁에 제법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동로마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서방인 사례는 군대에서도 발견되는데, 일례로 폭군 안드로니코스 1세의 시신을 훼손하는 과정에서 과거 대학살을 잊지 않은 제국의 라틴인 병사들이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39. [39] 라틴 제국의 수립 이후 베네치아는 제해권을 공고히 할 목적으로 에게해의 수많은 섬들에 알박기를 시전했는데, 이를 모조리 탈환하여 에게해를 다시금 제국의 바다로 만든 인물이 바로 리카리오였다. 물론 베네치아도 두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니나, 리카리오는 서방의 함대가 자신을 막으러 올 때마다 친절히 이들을 용궁으로 안내해 주었다.
  40. [40] 최초의 아랍인 로마 황제는 필리푸스 아라부스다. 이름부터가 '아랍인 필리푸스'라는 뜻...
  41. [41] 아르메니아인은 적지 않은 수가 제국의 고관대작에 오르는 등 동로마 사회에서 꽤나 끗발 날린 민족이었으며, 아르메니아 혈통이었던 마케도니아 왕조 황제들의 치세 동안 동로마는 아르메니아 본토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무슬림의 침공을 막을 목적으로 킬리키아 지방에 아르메니아인 커뮤니티를 형성 · 유지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쏟았으며, 이는 훗날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42. [42] 이미 카라칼라의 시민권 칙령에서 백 년 가까이 지나서, '트라키아계 로마인'이나 '다키아계 로마인'도 매우 자연스러운 개념이었다.
  43. [43] 410년 로마 시 함락과 약탈 때의 알라리크도 비슷한 말을 했다고 한다. 포위한 다음에,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굶주렸다면서, (당시 세계를 몇 백 년간 지배해왔기에 배고픔 따위는 장식이었던) 로마인도 이런 굶주림을 겪어봐야 한다고 했다고.
  44. [44] 극단적인 예로 상당히 충격과 공포인 이야기가 있는데, 기독교도 저술가 락탄티우스(Lactantius)에 따르면 4두정치 때의 황제 갈레리우스는 본인을 '로마인'[42]이 아닌 '다키아인'으로 여겼으며, 스스로가 로마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히 드러내어 로마 원로원과 시민, 즉 SPQR이 경악했다고 한다. 200년 전 트라야누스다키아 전쟁을 통해 다키아를 속주로 삼은 일을 너희들도 느껴보라는 양[43] 로마 시민들을 가혹하게 취급한 것도 모자라, 제국의 이름마저 '로마 제국'에서 '다키아 제국'으로 바꾸는 게 어떠냐는 제안까지 했을 정도였다고 영어 위키백과에도 나온다. Galerius#Anti-Roman accusations
  45. [45] 최초의 속주 출신 로마 황제는 히스파니아 출신의 트라야누스였으나, 그의 가문은 이탈리아 본토에서 건너온 귀족 가문이었기에 평범한 속주민이 황제로 출세한 건 아니었다. 자세한 내용은 트라야누스 문서 참조. 최초의 '속주민' 로마 황제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오늘날의 북아프리카 리비아 출신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주로 언급된다. 이후 아랍인, 일리리아인, 다키아인, 트라키아인, 이사우리아인, 아르메니아인, 게르만인, 시리아인 등 정말 매우 다양한 민족들이 로마 황제를 배출함으로써 '로마 황제'라는 자리가 절대로 라틴인 또는 그리스인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여실히 드러냈다.
  46. [46] 9세기 초 프랑크의 역사가이자 샤를마뉴의 측근이었던 아인하르트는 저서 '카를 대제전(Vita Karoli Magni)'의 제19장에서 콘스탄티노스 6세를 '그리스인들의 황제(Grecorum imperatore)'라고 일컬었으나, 반대로 뒤의 제28장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를 '로마 황제(Romanis imperatoribus)'라고 일컫는 등 그 호칭 표기와 관련하여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동로마에 대한 서방인들의 폄하 어린 시선은 노골적으로 변해 갔으며, 심지어 871년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트비히 2세가 당시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1세에게 '이단인 데다가 로마 시(市), 로마인, 로마의 언어도 몽땅 버렸으니 당신네 그리스인들은 더 이상 로마인들의 황제가 아닌 줄 아쇼'라고 적힌 지극히 무례한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까지 했다(앤서니 칼델리스(Anthony Kaldellis), 『비잔티움의 헬레니즘(Hellenism in Byzantium)』 p.337). 물론 바실리오스 1세 역시 지지 않고 그를 '프랑크인들의 황제(Basileus Phrangias)'라고 불렀다.
  47. [47] 비잔티움에 대한 재평가가 많이 이루어진 현대 학계의 관점에서 루트비히 2세의 이 말을 일일이 반박해 보자면 첫째, 정교회는 가톨릭과 함께 초대 교회의 유이한 정통성 있는 직계후손이라는 점에서 이를 '이단'이라고 칭한 건 지극히 가톨릭 중심적인 태도에서 나온 엄청난 모독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로마가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그리고 보편제국으로 나아간 이상 '로마 시'의 존재는 제국에게 있어 더 이상 필수불가결한 게 아니었으며 동로마 역시 '새 로마'를 번듯이 수도로 삼고 있었다. 셋째, 카라칼라 황제의 안토니누스 칙령 이전에도 이미 '로마 시민권'은 동맹시 전쟁을 계기로 비라틴족에게도 폭넓게 개방되어 있었으며, 로마가 도시국가에서 보편제국으로 발돋움함으로써 '로마인'은 더 이상 로마 시 또는 이탈리아 반도의 라틴족만 향유하는 개념이 아니게 되었다. 이처럼 '로마인'이 국가적인 개념으로 확장됨에 따라 최대한 늦게 잡아 안토니누스 칙령 이후부터 따져도 이미 650년 넘게 로마인으로 살아 온 그리스인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그리스계 민족들에게까지 그 범위를 확장시키면 '로마인으로서의 그리스인'의 역사는 더욱 길어진다) 프랑크족 황제의 이러한 지적은 대단히 우스운 것이었다. 게다가 갈리아 지방의 서로마 최후 잔존 세력이었던 시아그리우스의 수아송 왕국을 멸망시킨 게 프랑크인들이었음을 생각하면, '로마를 없애 버린 세력이 이제 와서는 스스로를 로마라고 주장하는' 촌극이 연출되어 버린다. 넷째, 앞서 줄기차게 언급했듯이 이미 고대 로마 시절부터 그리스어는 라틴어와 더불어 제국의 양대 공용어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 다섯째, 고대 로마가 라틴인만의 국가가 아니듯 중세 로마 역시 그리스인만의 국가가 아니었기에, 동로마인을 죄다 '그리스인'이라고 칭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당장 이 편지를 받은 바실리오스 1세부터가 마케도니아 테마로 이주해 온 아르메니아인 농부의 아들이었다.
  48. [48] 당시 고생한 사절단의 수장이었던 리우트프란드(Liutprand of Cremona)는 젊은 시절에는 자비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유학하기도 하는 등 동로마의 사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대 서방의 대표적인 동로마통 인물로 활약하였다. 968년 이전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여 사절 업무를 수행하는 등 대(對) 동로마 외교관으로 활약했으며 그 전까지는 딱히 동로마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968년 콩밥 먹은 이후로는 단단히 토라져 버려 동로마 궁정을 욕하는 온갖 악담과 사실 왜곡을 늘어놓는 기록을 남겼다. 문제는 이후 그와 같은 동로마통 인물이 서방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평도 있을 정도로 동로마의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리우트프란드이기에, 동로마와 관련하여 그가 남긴 여러 악평들이 후세에까지 제법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49. [49] 오토 1세의 로마 황제 등극을 내심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니키포로스 2세는 교황의 편지를 읽기 전부터 의도적으로 리우트프란드 사절단을 푸대접했고, 당연히 니키포로스 2세에게 좋은 감정이 생길 리 없었던 리우트프란드는 그의 외모를 극단적으로 비하하는 인신공격성 기록을 남겼다. 작은 키, 큰 머리, 두더지같이 작은 눈, 혐오스런 턱수염, 체구에 비해 긴 엉덩이, 낡고 악취 나는 옷차림 등... 그리고 오토 1세의 로마 황제 등극에 대해 태클을 거는 니키포로스 2세에게 "우리 주인님이 로마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동안, 정작 이 세상의 유일한 로마 황제라고 거들먹거리는 너님은 뭐했나요?"라고 대놓고 쏘아붙이기까지 했다. 물론 니키포로스 2세 역시 지지 않고 "네놈들은 로마인이 아닌 롱고바르드인이잖아!(Vos non Romani, sed Longobardi estis!)"라고 맞받아치고... 968년 콘스탄티노폴리스 방문 당시 겪었던 일들을 다룬 리우트프란드의 기록(영어 번역문)
  50. [50] 오늘날 알바니아의 듀러스(Durrës).
  51. [51] '로마인들의 황제(Imperator Romanorum)'라는 칭호는 이미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라틴 제국의 황제가 이를 그대로 가져다 쓰기에는 신성로마제국 및 이에 정통성을 부여한 교황과의 정치적인 분쟁에 휩쓸릴 위험이 컸고, 그렇다고 아무런 칭호도 안 붙이기에는 '로마 제국 수도의 새 주인'이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았기에 나름대로 자기네들의 권위도 살리고 교황과의 충돌도 최대한 피하는 심산으로 택한 것이 '로마인들의 땅의 황제(Imperator Romaniae, 로마 땅의 황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틴 제국 황제의 타이틀이 적힌 각종 문서나 인장을 보면 '로마인들의 땅의 황제'도 아닌 무려 '로마인들의 황제'라는 칭호를 대놓고 쓴 사례도 적잖이 발견된다. 'Balduinus Dei gratia fidelissimus in Christo imperator a Deo coronatus Romanorum moderator et semper augustus'라든지... 'Henricus Dei gratia imperator et moderator Romanorum'이라든지... 그리고 '로마인들의 땅의 황제'도 어쨌든 '로마'라는 단어가 들어간 칭호이다 보니 분쟁의 소지가 아예 없었던 게 아닌지라, 대용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Imperatore Constantinopolitane, Imperator Constantinopolitanus)'라는 칭호도 사용되곤 했다. 결론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서방 제국의 존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로마'라는 단어에 끈질기게 집착한 라틴 제국 황제들의 이러한 행위는, 당대의 서방인들이 동로마의 정체성에 대해 상당히 애매모호한 태도를(어떤 때는 그리스로 봤다가, 또 어떤 때는 로마로 봤다가) 가졌음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고 하겠다. Filip Van Tricht, 『The Latin Renovatio of Byzantium』 p.66,69.
  52. [52] 원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로마니아 제국의 1/4 및 그 절반(a quarter and a half quarter)'인데, 여기서 '로마니아 제국'은 라틴 제국이 아닌 동로마 제국을 가리킨다. '로마 제국 영토의 분할' 조약에 따라 동로마 영토의 3/8은 베네치아가, 2/8는 라틴 제국이, 3/8은 기타 십자군 지도자들이 가지기로 했기 때문... 만약 여기서의 '로마니아 제국'을 라틴 제국으로 해석해 버린다면, 라틴 제국은 '라틴 제국의 황제'와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가 각각 2/8와 3/8씩 공동 통치하는 국가가 되어 버린다. 참고로 이 조약에 의거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역시 3/8이 베네치아에 할양되었는데, 이때 베네치아가 먹은 구역에 하기아 소피아가 포함되어 있었다.
  53. [53] 국명으로서 '□□의 땅'을 쓴 사례는 예나 지금이나 흔히 발견된다는 점에서 동로마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로마니아'로도 불렀다는 사실은 그다지 특별한 게 못 된다. '루스족의 땅'을 뜻하는 러시아도 있고, '노르만족의 땅'을 뜻하는 노르망디도 있으니... 어차피 제국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부른 명칭으로 쓰인 '로마 제국', '로마인들의 제국', '로마인들의 땅의 제국' 모두 자신들이 로마고 로마인이라는 인식을 드러내는 국명이라는 사실만큼은 그 궤를 같이한다.
  54. [54] 버지니아에베레스트 산과 같이 해당 지역과는 역사적 · 문화적으로 전혀 관계없는 이름을 지명으로 때려박은 사례도 흔한 마당에, 이미 오래전 고대 로마 시대에 탄생한 단어로서 동로마 땅과 연관성이 강한 '그라이키아'로 이곳의 지명을 바꾸는 건 서방인들에게 있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오히려 그동안 서방인들이 동로마의 정통성을 깎을 목적으로 '그리스'란 말을 즐겨 썼음을 감안하면 이곳의 이름을 '로마니아'에서 '그라이키아'로 갈아버리는 게 그네들 입장에서는 더욱 자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이때의 베네치아인들은 그러지 않았다.
  55. [55] 이 외에도 피렌체와 페라라에서는 요안니스 8세의 방문을 계기로 고대 그리스어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져 수많은 이탈리아의 젊은 학자들이 동로마 사절단에게서 그리스어 교육을 받았으며, 플라톤과 스트라보 등이 저술한 고대 그리스어로 된 문헌의 수집 및 이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 또한 이 시기에 많이 이루어졌다. 덩달아 신약성경의 그리스어 원문에 대한 관심 역시 높아졌으며,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서(기진장)가 위조된 것이었음을 밝히는 데 큰 역할을 한 15세기의 인문학자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의 경우 이 시기에 축적된 그리스어 텍스트 자료를 바탕으로 그리스어 성경과 예로니모의 라틴어 번역 성경을 비교 연구함으로써 성경에 대한 문헌학적 접근을 꾀하기도 했다(관련 글(영어)).
  56. [56] 요즘은 좀 뜸하지만 과거 외빈 방문 시 이를 기념하는 우표주화를 다량 만들어 유포시킨 우리나라처럼 요안니스 8세 메달 또한 많은 수가 제작되어 유럽 곳곳에 퍼졌는데, 그 수가 어찌나 많았던지 오늘날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그리스, 미국 등 구미의 여러 박물관들이 이를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 메달을 시작으로 르네상스 시기의 서유럽에서는 당대에 생존한 인물의 얼굴을 때려박은 메달 제작이 크게 유행하게 된다.
  57. [57] 반대면에는 말을 타고 있는 요안니스 8세의 모습과 함께 '화가 피사노의 작품'이라는 글귀가 그리스어(Ἕργον του Πισἀνου Ζωγρἀφου)와 라틴어(OPVS • PISANI • PICTORIS)로 새겨져 있다.
  58. [58] 여담으로 이때 피사넬로는 동로마 황제 및 그 수행원들의 차림새에 대단히 감명을 받아서 관련 내용을 상세히 묘사한 기록과 스케치를 다수 남겼으며, 이는 이후 제작된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물론 다른 이탈리아 예술가들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했는데, 특히 베노초 고촐리(Benozzo Gozzoli)의 경우 동방박사의 경배를 소재로 한 그림에서 발타사르(Balthasar)의 얼굴을 아예 요안니스 8세의 그것으로 묘사해 놓기까지 했다. 심지어 성 베드로 대성당의 5개 출입문 중 하나이자 가운데 문인 필라레테 문에도 요안니스 8세가 이탈리아로 오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 등 당시 동로마 황제의 방문은 서구 예술가 및 인문학자들 사이에 있어서 엄청난 화젯거리로 주목받은 사건이었다.
  59. [59] 일례로 세비야의 대주교 이시도르(Isidore of Seville)는 헤라클리우스 통치기에 발칸 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든 슬라브인들의 침공을 'Sclavi Graeciam Romanis tulerunt', 즉 '슬라브인들이 로마에게서 그리스를 빼앗았다'고 기록했다. 당연히 800년 이전, 즉 교황이 동로마 황제 밑에서 찌그러져 있던 시기에는 서방인들 사이에도 '동로마 = 로마'라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800년 교황의 서로마 황제 '무단' 옹립 이후 변하게 되었지만... 정리하자면 시대와 정치적 상황을 막론하고 서방인들이 처음부터 우직하게 '동로마는 로마가 아니다'라고 생각하진 않았다는 얘기.
  60. [60] 이때 비잔티움 제국은 발칸 반도의 아바르와 동방의 페르시아를 동시에 상대하는 악조건하에 있었다.
  61. [61] 자세한 내용은 이 문서를 보면 좋다.
  62. [62] 로마제국은 보편제국인 반면, 그리스는 민족국가이기에, 대놓고 100% 명실상부한 계승자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점이 있다. 더군다나 국호를 다시 로마라고 한 것도 아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도 영유하고 있지 못하니... 그래도 무려 언어와 종교를 계승하고 있으니 가장 가까운 것은 분명하다.
  63. [63] 심지어 두샨은 새로 제정한 법전에다가 자신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후계자임을 명시하기도 했다.
  64. [64] 기번은 계몽주의 사조와 청교도 정신(당시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가톨릭과 정교회 등 이른바 '구교' 때문에 유럽 문화가 퇴보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았다.)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잣대를 들이댔던 것이지만 시오노는 즉 기번을 입으로는 존경한다면서 실제로는 오히려 모독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시오노 나나미가 섭렵한 문헌자료들은 대체로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반의 근대사관 계몽사조들의 반기독교 반비잔티움 연구에 머물고 있는 데다가 기번의 사상을 왜곡, 과장해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렇게 비잔티움에 대해 적대적이다.
  65. [65] 초기 기독교 5대 총대주교좌 중에서 로마를 제외한 4곳(콘스탄티노폴리스,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이 이슬람권으로 넘어갔고, 넘어간 총대주교좌는 모조리 이슬람교가 우세한 지역이 되었다. 지금 로마 교황이 권위가 기독교 세계에서 압도적인 것 중의 하나가 다른 총대주교좌가 이렇게 이슬람교의 교세에 밀려 사그라들었기 때문이다.
  66. [66] 수도원은 동로마에서 최초로 나타났다
  67. [67] 동로마에선 황제와 예수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혹은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 여기거나. 그래서 황제의 어머니를 성모 마리아와 동일시하기도 했다. 그 예로 10세기 동방 교회 성화 도상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의 모후 헬레나의 모습이 예수와 마리아를 묘사하는 모습과 동일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68. [68] 물론 러시아에게는 이런 명분, 이데올로기적 이유뿐만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에서도 짜리그라드 '수복'을 추구할 이유가 충분했다. 이러한 이유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의 수도까지 진격하여 결국 황제의 도시 자체마저 낼름하는 건 결코 그럴듯한 이데올로기적 선전이 아니라 1차 대전 발발 직전까지 작계까지 있었던 실질적인 대오스만 전쟁과 남진 정책의 최종적인 목표였으며, 현실적인 구상이었다.
  69. [69] '레이', '마이' 내의 이중모음이 '리' '메' 내의 단모음으로 변화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발음 변화는 이미 코이네에서도 나타나는데, '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는 코이네로 읽으면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바실리아 톤 로마이온' 또는 '바실리아 톤 로메온'이다.
  70. [70] 언제부터 라틴어식이 아니라 그리스어식으로 표기를 해야 할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유스티니아누스 정도면 라틴어로 표기해도 크게 이견은 없을 것이다.
  71. [71]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투키디데스 등을 해석하기 위해.
  72. [72] 성경, 아르키메데스, 스토아 학파 등을 해석하기 위해.
  73. [73] 사실상 본 게임의 주인공 포지션. 로마 제국을 재건하는 디시전을 오직 비잔티움 제국으로 플레이했을 때만 가능하게 함으로써 '비잔티움이 정통 로마 제국'임을 드러내 보였다. 자세한 내용은 '크루세이더 킹즈 2/디시전' 문서의 해당 항목 참조.
  74. [74] 다만 볼란티스는 제국이 아니라 공화국이다.
  75. [75] 물론 전설이지, 오스만 측 기록으로는 울며불며 기도하던 이들은 성당으로 들어온 오스만군에게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팔고자 끌려나갔다고 서술되어 있다. 도시를 완전 점령하자마자 성당으로 들어온 메흐메트 2세가 학살을 그만두라고 명할 때까지 죽임을 당하거나 끌려가지 않지 않은 사람은 몇몇에 지나지 않았다.이게 웃기는 게 1204년 십자군의 침공으로 콘스탄티노플이 불바다와 피바다가 되어버렸을땐 이런 전설 같은 거 없었다...
  76. [76] 앞서 언급하였듯, 터키인들은 이들을 독립국가 그리스인(Yunan)과 구별하여 '로마인(Rum)'으로 부른다.
  77. [77] 잘 보면 자막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부르고 있다. 현재의 공식 지명인 이스탄불과는 달리 그리스의 입장이 반영된 부분. 이스탄불 항목 참조
  78. [78] 이전 주석에서는 Ανατολική Ρωμαϊκή Αυτοκρατορία를 아나톨리아의 로마 제국이라는 기묘한(?) 해석을 해놨는데, 그리스어 형용사 ανατολικός는 '동쪽의'이라는 의미이다. 애초에 아나톨리아라는 지명부터가 동쪽에 있기 때문에 붙은 것으로 영어로 직역해놓으면 Eastland, Easteria 정도로 치환할 수 있다. 참고로 '서쪽의'는 δυτικός로 서로마 제국은 Δυτική Ρωμαϊκή Αυτοκρατορία.
  79. [79] 이에 대한 일화로 이후 러시아 제국러시아 혁명으로 무너지고 적백내전이 진행되면서 모스크바가 볼셰비키에 장악당하고 백군 황제파는 극동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까지 쫓겼는데, 이들에 의해 몇 개월 간 블라디보스토크가 제4의 로마로 추대되기도 했다. 제1 로마→제2 콘스탄티노폴리스→제3 모스크바로 이어지는 러시아인들만의 정통성 계보에 따른 것이다.
  80. [80] 이는 소련군이 중앙아시아를 병탄하면서 아타튀르크의 정적이 될 수 있는 오스만 군벌들을 토벌해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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