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불교)

舍利

1. 개요
1.1. 사리의 정체?
1.2. 과학적 분석
1.3. 진신사리

1. 개요

원래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시신(Śarīra; शरीर)을 가리키던 말일 뿐이었다. 하지만 중국 문화권에서 불교를 받아들일 때 고승이나 여래의 시신을 가리키는 말로 쓰기 위해 번역할 때 일부러 음역하였다. 이미 신라시대 문서에서부터 나오는 이야기로 산스크리트어의 본디 의미와 달라졌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또 다른 의미로도 쓰인다. 고승이나 여래의 시신이 아니라 스님(정확히는 고승)들을 화장하면 나온다는 돌을 가리키는 말이 된 것이다. 한자 문화권의 고서에서는 사리를 두고 유형(遺形)이란 표현도 사용했는데, 부처나 고승이 지상에 남긴(遺) 육신의 형체(形)라는 뜻이다. 개수를 셀 때는 과(顆)라는 단위를 쓴다.[1]

일반적으로 화장장에서 화장해서는 나오지 않고, 다비식을 진행을 해야 나온다고 한다. 현재 백양사에서 진행하는 다비법이자 한국 불교에서 사용하던 전통적인 다비(불교식 화장법)를 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땅 속에 거대한 물 항아리를 묻는다. 그리고 밀봉을 하고 흙을 덮고 장작을 쌓고 고승의 유체를 얹고 화장을 한다. 그리고 화장이 끝난 뒤 뼈는 알아서 모시고 밑에 묻은 항아리를 파내면 그 독 안에 조그마한 보석 같은 것들이 나오는데, 그걸 사리라고 부른다.[2]

한편, 화장장에서 화장을 하면 온도가 너무 높아 사리가 녹아버리기 때문에 사리가 안 나온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인의 시신을 화장했는데 사리가 나온 사례들도 있다.(아래 과학적 분석 링크 참조) 도력이 높아야 나온다지만, 말 그대로 누구나 고승으로 인정하는 도통한 승려라도 화장해서 사리가 안 나오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미묘하다.[3] 불교계에서는 현대식 화장이 도입된 초기에 잘 모르고 높으신 스님이니 최신식 기술을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다비가 아니라 화장을 해서 사리가 녹아버렸다고 설명한다. 반대로 승려가 아니라 일반인에게서도 나오기도 하므로 정말 미묘하다. 또한 꼭 화장을 해야 나오는 것은 아니고 살아있는 상태에서 나오기도 하는데, 이런 것은 생사리라고 부른다.

사리가 워낙 불교에서 중요한 상징물이다 보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지만, 사리가 많이 나오면 덕이 많고, 사리가 적게 나오면 덕이 적었다고 단정하지 말자. 불도로 따지면 색에 집착하는 행위다. 이를 잘 알던 만공스님도 자신을 다비할때 사리를 수습하지 말라고 못을 박아두었기에[4] 현재 덕숭산 수덕사의 다비식 때는 사리를 수습하지 않는 것이 관례가 되었으며, 법정스님도 "다비하고 나면 나의 사리는 찾지 말라." 하고 유언을 하셨을 정도이다.

화장한 시신 및 애완견을 사리로 만들어주는 업체도 있다.

힘든 고행을 해야 사리가 나온다는 인식 때문인지 아주 고생길이 험한 상황을 두고 사리가 생긴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가객 김광석이 1996년에 사망한 후 화장했을 때 사리가 9과나 나왔다고 한다. X JAPAN히데가 사망한 후에 화장을 했는데 사리가 많이 나왔다는 얘기도 있다.

천주교에도 비슷한 물건이 있으니 성유물이 이에 해당한다.

1.1. 사리의 정체?

아직도 이것의 정체에 대해선 여러 논쟁이 있고, 아직 '이것이다!'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명쾌한 연구는 없지만, 뼈와 화장에 쓰이는 장작의 성분이 특정 온도에 반응하여 얻어지는 결정이 사리라는 것이 현재 일반적인 추측이다. 실제로 본차이나는 의 뼈와 장석, 카오리나이트를 고온에 구워 만들어진다. 이 추측은 고행을 한 사람들에게서 사리가 많이 나온다는 이론을 뒷받침하는데,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은 건강 상태가 좋지 못해 뼈의 성분이 정상적인 성분 외 중금속이나 기타 이물질이 많아 사리 생성에 유리한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항간에는 수십 년간 동정으로 살아서 모인 기운이 내단화되어서[5] 나온 것이라는 소리를 진지하게 믿는 사람이 있는데 석가모니는 동정이 아니었다. 결혼해서 아들도 있었으니. 게다가 정액은 굳을 수도 없다. 금욕한다 해도 몽정을 통해 배출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비슷한 헛소리로 "스님들은 워낙 오랫동안 참선을 하니 하도 오래 앉아 있어서 단순히 몸의 칼슘이 굳어져 생긴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성분 분석 결과만 봐도 말이 안 되는 소리고, 단순히 오래 앉아 있기만 해서 사리가 생긴다면 우리나라의 학생들이나 택시 기사들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사리가 많아야 한다.

1.2. 과학적 분석

입적을 앞둔 한 스님이 사리가 나오면 유용한 일에 써달라고 유언을 남겼는데, 이 스님이 남긴 사리 1과를 인하대 임형빈 박사가 제공받은 덕에 1995년 최초로 성분분석을 할 수 있었다.#

‘지름 0.5센티미터 정도의 팥알 크기 사리에서 방사성 원소프로트악티늄(Pa), 리튬(Li)을 비롯하여 티타늄, 나트륨, 크롬, 마그네슘, 칼슘, 인산, 산화알루미늄, 불소, 산화규소 등 12종이 검출되었다. 사리의 성분이 일반적으로 뼈 성분과 비슷했으나 프로트악티늄, 리튬, 티타늄 등이 들어있는 것이 큰 특징으로 사리의 굳기 즉 경도는 1만 5천 파운드 압력에서 부서져 1만 2천 파운드에서 부서지는 강철보다도 단단했다. 특히 결석의 주성분은 칼슘, 망간, , 등으로 되어 있는데다가 고열에 불타 없어지며 경도도 사리처럼 높지 않아 사리는 결석이 아니다.’#

1.3. 진신사리

사리들 중에서도 석가모니에게서 나온 사리를 진신사리(眞身舍利)라고 부른다. 석가모니는 사리가 8섬 4말이나 나왔다고 전하는데, 다비를 하고 나온 재까지 모두 합친 분량이다.[6] 원래 당시 사리라는 용어는 구슬 같은 결정체가 아니라, 산스크리트어의 본래 의미대로 시신에서 나온 뼈를 의미한다. 스리랑카의 진신사리가 치아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불경의 기록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자 나무를 모아 전륜성왕의 예법에 맞추어 화장을 하다가 향수를 부어 불을 끈 뒤, 불에 타고 남은 뼈와 재 등을 인근 8개 나라/부족의 대표들에게 분배하였다. 대표들이 저마다 사리를 분배받아 고국으로 돌아가 탑을 하나씩 세우니, 최초로 세운 불탑이라 하여 '근본8탑'이라고 부른다. 석가모니가 열반하고 2-3백 년 남짓 지나 아쇼카 왕이 인도를 통일한 뒤 불교에 귀의하자, 근본8탑 중 한 기만 제외하고 나머지 탑들을 해체하여 사리를 꺼내 인도 각지에 진신사리를 담은 불탑 8만 4천 기를 세웠다고 한다.[7]

이러한 기록이 있으므로 '석가모니 진신사리'라고 주장하는 사리 대부분은 아쇼카 왕이 인도 전역에 세운 불탑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니면 석가모니 생전에 받은 머리카락 등이라고 하거나...

진신사리는 매우 귀하므로[8] 우리나라를 포함해 대부분 나라의 탑에는 석가모니의 진신(眞身 진짜 몸) 대신 불경을 법신(法身 법의 몸)으로 삼아 사리로 간주하여 법신사리라는 명칭으로 넣음이 일반적이다. 진신사리를 모신 절에는 불상을 안치하지 않음이 관례이다. 불상은 부처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는데, 적멸보궁은 그 부처에게서 나온 사리를 모셨기 때문이다. 진짜가 있는데 굳이 대체물을 놔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진신사리를 보유했다고 주장하는 장소가 많지만, 가장 오래된 것은 경남 양산 통도사 적멸보궁 금강계단에 있다.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조계종에서는 통도사 금강계단을 합동 수계식장으로도 사용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시대 자장율사(590-658)가 선덕여왕 5년(636)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오대산에 머물 때,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받았다고 한다. 선덕여왕 12년(643)에 여왕이 귀국을 요청하자, 자장율사는 신라로 돌아가 선덕여왕 15년(646)에 통도사와 금강계단을 세우고, 거기에 문수보살로부터 받은 진신사리 일부를 봉안했다고 한다.[9]

삼국유사나 전설에 따르면 자장율사는 통도사를 세운 뒤에도 오대산 월정사(또는 상원사) 사자암 적멸보궁[10]영월 법흥사 적멸보궁ㆍ정선 정암사 적멸보궁ㆍ설악산 봉정암 5층석탑을 세워 진신사리를 모셨다 하는데, 이를 통칭하여 흔히 '5대 적멸보궁'이라 한다. 5대 적멸보궁은 14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부침을 겪었지만 지금까지도 한국 불교계의 성지로서 역할을 한다.

이중 희한한 곳은 오대산 사자암에 있는 적멸보궁이다. 다른 적멸보궁들은 어디에 진신사리를 모셨다고 하는지 그 위치가 명확한데, 사자암 진신사리는 사자암 건물 뒤편 땅 어딘가라는 '전설'만 전할 뿐 위치가 불명확하다. 전설에 따르면 그 자리가 풍수지리적으로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용의 형상이라 무거운 석물을 사용해서는 아니되었기에, 부득이하게 눈에 띄는 석물이 없이 진신사리를 땅에 묻었다고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도적이 진신사리를 훔쳐가지 못하도록 묻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누군가가 진신사리를 묻었다고 전해지는 땅을 한번 파보았더니 마치 석관(石棺) 같은 것이 나왔다고 하지만, 진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사자암 뒤편 땅 어딘가에 진신사리가 있다고 전하고 믿으므로, 사자암 측은 그 근처에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금지한다.

자장율사로부터 기원한 전통적인 적멸보궁 이외에도 대구 비슬산 용연사[11], 구미 태조산 도리사, 고성군 금강산 건봉사를 더해 8대 적멸보궁이라고도 한다. 현대에 들어와 동남아와 교류가 많아지자, 우리나라 승려들이 스리랑카나 미얀마에서 '진신사리'를 이운하여 봉안, 적멸보궁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예를 들어 대구 비슬산 대견사에도 스리랑카 정부에서 정식으로 기증한 진신사리 1과가 모셔진 적멸보궁이 있고, 제주도 표선면 육각사에도 미얀마로부터 기증받은 진신사리가 있다.#영상 그 외에도 조계사 앞에 있는 10층 석탑 안에 모신 사리 역시 진신사리이다.

현대 한국에서 자칭 '적멸보궁' 또는 '진신사리를 모신 곳' 중 위에서 이야기한 8대 적멸보궁을 제외하면, 모두 현대에 상좌부 불교권에서 승려들이 어찌어찌 넘겨받아 이운하여 봉안한 것이다.

조계사 10층 석탑의 사리는 이운 과정이 좀 재미있다. 스리랑카의 반승반속 행자로 이름 높았던 다르마팔라(Dharmapāla, 1864-1933)가 1913년 8월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식민지 조선에 들러 강연을 하였다. 과거 다르마팔라는 태국 왕실로부터 진신사리 한 과를 시주받아 펜던트 안에 넣어 소중히 간직했는데, 조선과 일본도 불교국가라는 설명을 듣고 감탄하며 자기가 지니고 다녔던 사리를 조선 승려에게 기증했다. 이후 1930년에 일본풍 석탑을 세워 사리장엄구와 함께 다르마팔라가 기증한 사리를 봉안했다. 2009년 조계사는 일제시대에 조성한 석탑을 해체하여 이전하고, 안에서 나온 사리는 새로 조성한 10층 석탑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진신사리의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도 많지만 실질적으로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검증하자고 덤비는 것은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베드로 묘역이나 이슬람 메카 카바 신전을 발굴해보자는 것과 동등한 모독이어야 할 터인데, 현대에는 진신사리에 감정서가 따라다닌다. 지금은 이런 감정서가 필요한 세상이 되었다. 후술할 가짜 사리 때문이다.

불자들 중에 종종 인도에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얻어왔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낚인 거다. 인도에는 이렇게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라고 한국이나 일본의 불자들을 현혹하여 가짜 사리를 만들어 파는 범죄자들이 상당히 많다. 참고로 가짜 사리의 재료는 보통 뼈[12]이며 주로 사형수의 뼈가 많이 이용된다.

우리나라에도 그렇고 불교권을 중심으로 진신사리를 모셨다고 주장하는 곳들은 많지만, 정말로 진신사리라고 확신할 만한 사리들은 많지 않다. 까놓고 말하자면 출처불명의 무언가를 두고 '진신사리'라고 뻥을 쳤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7세기에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받았다는 진신사리 역시 엄격하게 따지면 사실 여부가 불확실하다.

석가모니 열반 때 석가족들도 찾아와 사리 일부를 받아서 카필라성에 불탑을 세웠는데 현대에는 피프라와(Piprahwa) 불탑으로 알려졌다. 피프라와 불탑 역시 당연히 근본8탑이다. 1898년, 당시 영국령 인도의 공무원 윌리엄 페페(William Claxton Peppe)는 흙에 온통 파묻혀 마치 언덕처럼 보이는 피프라와 불탑을 발굴하고 안에 있는 사리와 사리기, 사리장엄구 일체를 꺼냈다.[13] 사실 페페는 정식 고고학자도 아니었고 다분히 월권행위였기 때문에 페페의 행동은 문제가 되었다.

영국인 관리들은 페페가 발굴한 석가모니 사리를 처리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다가 사리를 태국 왕실에 보내었다. 친영국적이고 독실한 불교국가인 태국에 넘기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당시 태국의 국왕 쭐랄롱꼰은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피프라와 진신사리를 받아 일부를 동남아 등지에 분배하고 남은 것을 태국 왓 사켓 사원에 봉안했다.

피프라와 불탑에서 발견된 사리 중 대중이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인도 델리 박물관에 있는 진신사리이다. 다른 진신사리들은 전부 불교신앙이 강한 국가에서 받아 탑에 넣어 봉안했기 때문에 '친견'이 불가능하다. 근본8탑인 피프라와 불탑에서 발굴된 사리는 '진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약 이 사리마저 진짜가 아니라면, 전세계에서 진짜라고 확신할 수 있는 석가모니 진신사리는 전무하다.

이 외에 '틀림없는 진짜'라고 확신할 만한 유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 법문사의 불지사리 역시 첫 출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확언하기가 어렵다.[14] 그 외에 미얀마 종교성에서 관리하는 진신사리나 스리랑카 불치사의 불치사리[15] 역시 진짜일 가능성이 없진 않으나 확신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이렇게 진짜일 가능성이 있는 사리들의 특징은 한국에서 흔히 사리라고 하면 떠올리는 '보석같이 생긴 구슬'이 아니라 진짜 사람 뼈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리들은 나눠받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있는 '진신사리들' 중 진짜가 얼마나 될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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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반드시는 아니다. 577년 백제는 부여에 왕흥사를 창건하며 사리를 봉안하였는데, 2007년에 사리기를 발굴해보니 명문에서 사리를 매(枚)라는 단위로 세었다.
  2. [2]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다비방법은 지금은 백양사 등에서만 한다. 이 방법이 매우 번거롭기 때문에 광복 이후로 각 사찰에서도 다비하는 방법을 바꾸었다. 그래서 사찰마다 저마다 다비하는 방법이 다르다. 수덕사는 심플함 자체로 내화벽돌로 발전된 것이라고 한다.
  3. [3] 본래 공개적으로 다비식을 했지만, 다비식 중 유명한 고승에게서 사리가 나오지 않자 광분한 사람들 때문에 현재는 비공개로 진행한다고 한다.
  4. [4] 실제로 만공 스님은 유언으로 "부처님 사리로 모든것은 넉넉하다. 그리고 거기에 다 뜻이 포함되어 있으니 사리를 수습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5. [5] 내지는 정액이 굳어서(...)
  6. [6] 8섬 4말이라는 기록도 정말 역사적 사실이라고 여기긴 어렵고, 그냥 '많이 나왔다.'는 뜻으로 쓰는 과장이다.
  7. [7] '8만 4천'이란 불교에서 '엄청 많은 수'를 가리키는 상투적인 표현이다. 부처님의 법문이 모두 '8만 4천'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아쇼카 왕이 정말로 불탑 8만 4천 기를 세웠다고 생각하면 안되고 '무지 많이 세웠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적절하다.
  8. [8] 당연한 얘기지만 진신사리라는 게 화장을 하고 남은 석가모니 육신의 일부니 많으려야 많을 수가 없다. 물론 위 전승처럼 8섬 4말씩이나 나왔다고 전하므로 세계의 유서 깊은 사찰들에는 진신사리라고 불리는 것이 나름 있긴 하다.
  9. [9] 아쇼카 왕의 불탑에서 나왔다는 것도 아니고, 문수보살이 건네준 사리라고 설명하기 때문에 역사학적으로는 자장율사가 봉안했다는 잔신사리가 '진짜 진신사리'인지는 신뢰하기가 어렵다.
  10. [10]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이라고도 불린다.
  11. [11] 통도사에 있던 진신사리 1과를 사명대사의 제자 청진이 옮겨온 것이다.
  12. [12] 전용 기계로 뼈를 고열 압착해 사리처럼 보이게 만든다고 한다.
  13. [13] 아쇼카 왕이 근본8탑의 사리를 꺼내어 다른 불탑에 분배했다고 하는데, 피프라와 불탑에서 여전히 사리가 있었다. 아마도 아쇼카 왕은 근본8탑의 사리를 몽땅 꺼내지 않고 적당히 덜어갔던 모양이다.
  14. [14] 중국 법문사의 불지사리, 즉 석가모니의 손가락뼈는 인도 아쇼카 왕이 인도 곳곳으로 분배한 사리의 일부라고 전한다. 동한 말기에 법문사 탑을 세워 봉안하고, 중국 역대 왕조가 탑을 확장했다. 절이 쇠락하면서 오랜 세월 사리가 잊혔지만 1980년대에 탑이 무너진 뒤에 발견되었고, 문화대혁명의 광기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역사가 웨난이 쓴 <법문사의 비밀>에 따르면 홍위병들이 법문사에 들이닥쳤을 때 절과 탑을 지키기 위해 주지승이 자기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고 한다. 홍위병들은 그 장면을 보고 놀라 도망쳤고 절과 탑이 지켜질 수 있었다고 한다. 80년대 무너져서 지하 저장고의 진신사리가 발견될 때까지.
  15. [15] 석가모니의 치아라 하여 불치(佛齒)사리라 부른다. 스리랑카의 불치사리는 포르투갈의 식민지배때 아폰소 데 알부케르케에게 파괴될 뻔했으나, 지역 주민들이 모형을 만들어 알부케르케를 속인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불치사리는 석가모니 열반 이후로도 자라고 있다나...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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