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영

司馬穎

(279 ~ 306)

1. 개요
2. 행적
3. 평가
4. 기타

1. 개요

서진의 황족으로 사마염의 6남. 작위는 성도왕.

의기와 인정이 있는 인물이었지만, 어느 순간 후계자가 될 욕심에 흑화하여 휘둘리다가 자기 일생과 서진 왕조를 망쳐버리게 된 인물.... 이 인물이 초심을 지켰다면 팔왕의 난도 어느 정도 수준에서 멈췄을 것이라는 걸 생각해 본다면 더더욱 안타까운 인물이다. 또한 이 인물이 군대를 이끌고 오겠다는 말에 혹해서 보내 준 흉노의 인물이 바로....... 이러다 보니 팔왕의 난에 이어 영가의 난까지 이어지는 서진 멸망의 나비효과에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1]

2. 행적

행실이 올바르고 현명해 일찍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았으며 주변인들에게 덕을 널리 베풀어 인망이 두터웠다. 299년 어느날, 산기상시 가밀이 태자 사마휼을 교육하던 중 태자에게 노골적으로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이걸 본 사마영은 그를 호되게 질책했다.

황태자의 상시가 어찌 이리도 무례한가!

가밀은 이에 화가 나서 가남풍에게 달려가 이를 알렸고, 가남풍은 사마영을 평북장군으로 삼아 업으로 쫓아냈다. 300년 3월 가남풍이 태자 사마휼을 살해하자, 조왕 사마륜이 제왕 사마경과 함께 군대를 일으켜 궁궐을 장악하고 가남풍을 비롯한 가씨 일족과 장화, 배외 등 조정 대신들을 모조리 주살했다. 그 후 사마륜이 권력을 독점하다가 끝내 혜제 사마충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자, 사마경은 그를 토벌하기로 하고 사마영에게 사자를 보내 자신과 함께할 것을 권했다. 이에 사마영이 업현의 현령 노지를 불러 묻자, 노지가 대답했다.

조왕은 황제의 자리를 찬탈한 역적이어서 사람과 신이 모두 분노하고 있으니, 전하께서 영명하고 준수한 사람을 모으시고 사람들의 바람을 좇으셔서 커다란 순리에 의지하여 이들을 토벌하시면, 백성들은 반드시 부르지않더라도 스스로 와서 어깨를 밀치며 함께 나아갈 것이므로 이기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사마영은 이 의견을 따르기로 하고 노지를 자의참군으로 삼고 좌장사를 겸임하게 했다. 또한 연주 자사 왕언, 기주 자사 이의, 독호, 조양, 석초 등을 선봉으로 삼으며 총 20만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했다. 여기에 상산왕 사마예와 태원 내사 유돈이 각각 무리를 이끌고 사마영에게 가담했다. 이후 사마영의 선봉부대가 황교에 도착했다가 손회, 사의, 허초의 군대에게 패배해 10,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병사들이 동요하자, 사마영은 물러나서 조가에 주둔하려 했다. 이때 노지, 왕언이 간언했다.

지금 우리 군사들이 불패하고 적들은 새로이 자기들의 뜻을 얻어서 우리를 가볍게 생각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물러나서 움츠려든다면 사기가 떨어져서 다시는 쓸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싸움에서 어디 이기고 지는 경우가 없겠습니까? 다시금 정예 병사를 선발하여 밤중에 배나 빨리 가서 적이 생각하지 못한 곳으로 나타나는 것만 못하며, 이것이 용병하는 기이한 계책입니다.

사마영은 이 계책을 따르기로 하고 야음을 틈타 공세를 개시했다. 당시 손회, 사의, 허초는 조왕 사마륜으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지절을 수여받은 뒤 서로 협력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지휘해 군사 정책이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게다가 그들은 승리에 우쭐해져 사마영을 우습게 여기며 대비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사마영이 격수를 건너 공격을 퍼붓자, 손회 등은 대패하여 군대를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했다. 사마영은 승세를 타고 멀리 진군해 황하를 건너 낙양 근교까지 이르렀다. 이에 낙양 내에서 정변이 일어나 손수 등 사마륜의 측근들이 주살되었고, 사마륜은 혜제를 복위시키며 자신은 금용성으로 옮겨졌다가 곧 자식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후 사마영은 장형, 여화, 손모 등 사마륜을 따랐던 무리를 모조리 주살했다. 이리하여 군사를 일으킨 지 60여 일 만에 사마륜을 토벌하니, 그 동안 죽은 이는 10만 명에 가까웠다. 6월 21일에 조정에 들어온 사마영은 대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안팎의 모든 군사에 관한 일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고, 아울러 가황월(신하를 주살할 수 있는 황제의 부월)을 사용하는 권한을 부여받으며 녹상서사를 담당하고 구석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조회에 들어갈 때도 종종걸음으로 가지 않고 칼을 차고 신발을 신은 채로 전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제왕 사마경은 사마영이 사마륜 토벌에 큰 공을 세운 데다 세력이 강대한 걸 두려워해 그를 2인자로 삼아 조정의 권력을 양분하려 했다. 하지만 사마영은 "두 영웅은 함께 존재할 수 없으니 태비(사마영의 어머니)께서 조금 편치 않으신 것을 이유로 삼아 번국으로 돌아가서 보살펴드리기를 청하시고, 사해의 인심을 거두십시오."라고 권한 노지의 말을 따라 조정을 떠났다. 사마경이 깜짝 놀라 그를 말리려달려오자, 사마영은 사마경의 손을 잡고 눈물을 비오듯 흘리며 태비의 병을 걱정할 뿐 당시의 정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사마영이 권력욕이 없다며 칭찬했다.

사마영은 업성에 도착한 뒤 조정에 사람을 보내 대장군의 직책만 받을 것이며 구석을 사양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그동안의 난리로 백성들이 고단하고 피폐해져 있으니 황하 이북의 저각에 있는 쌀 15만 곡을 운반하여 양적에 있는 백성들을 진휼하게 하자고 건의했다. 또한 관 8천여 개를 만들어 황교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거두어 제사지내게 하고 유족들에게 보상하자고 건의했으며, 이들을 보통의 전사자보다 2등급을 덧붙여주자고 했다. 그리고 온현에 명령을 내려 사마륜을 따르다 전사한 병사 14,000여 명을 매장하게 했다. 백성들은 당연히 이러한 사마영의 행보에 환호했고 사해의 민심은 사마영에게 쏠렸다.

한편, 조정의 권력을 장악한 사마경은 지나친 사치를 부리고 혜제 사마충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정국을 농단했다. 또한 사마경은 하간왕 사마옹이 사마륜과 한 편이었던 걸 한스럽게 생각해 언젠가 그를 도모하려 했다. 이에 사마옹은 사마영에게 사람을 보내 사마경을 도모하자고 권했다. 이리하여 서기 302년 12월, 사마옹과 사마영의 대군이 낙양을 향해 진군하다가 하간에서 멈췄다.

사마영과 사마옹은 낙양을 공격하기 전에 장사왕 사마예에게 격문을 보내 사마경을 토벌하게 했다. 그들은 세력이 약한 사마예가 사마경에게 주살될 게 뻔하다고 여겼고, 사마예가 주살된 뒤에 그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사마경을 토벌하기로 했다. 사마옹의 측근인 이함은 그렇게 사마경을 토벌한 뒤에 혜제 사마충을 폐위시키고 사마영을 새 황제로 옹립하며, 사마옹을 태부로 삼고 자신은 그 밑에서 정사를 독점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뜻밖에도 사마예가 1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궁궐을 장악한 뒤 사흘 간 격전을 벌인 끝에 사마경을 주살해버리면서 이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장사왕 사마예는 사마경을 주살하고 권력을 장악한 뒤 항상 업으로 찾아가 사마영과 더불어 정사를 의논하고 그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등 사마영을 깍듯이 대했다. 그러나 이 무렵에 황태제가 되려는 야욕에 사로잡혀 있던 사마영은 사마예를 장애물로 여겼고, 언제까지나 2인자로 취급받을 수는 없다는 조급증에 사로잡혔다. 여기에 이함 등을 시켜 사마예를 암살하려 했다가 실패한 사마옹이 꼬드기자, 사마영은 마침내 사마옹과 힘을 합쳐 사마예를 토벌하기로 작정했다. 이에 노지가 만류했다.

공께서는 전에 큰 공로를 세우셨지만 권력을 버리시고 총애 받는 자리도 사양하셨기에 당시의 명망이 아름다웠습니다. 지금 만약에 관문 밖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문관의 복장을 입고 조정에 들어간다면, 이는 패권의 주인이 할 일입니다.

참군 소속도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사람에게 형제가 있는 것은 마치 좌우의 손과 같습니다. 명공께서 천하의 적이 되는 사람을 감당하려고 하시면서 먼저 한 손을 끊는 게 옳겠습니까?

그러나 사마영은 끝내 그 말을 듣지 않고 303년 8월 사마옹과 함께 표문을 올렸다.

사마예는 공로를 처리하는 일이 불공평하였으며, 우복야 양현지, 좌장군 황보상과 더불어 조정의 정치를 오로지 농단하면서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을 살해하였으니 청컨대 양현지, 황보상의 목을 베시고 사마예를 보내어 봉국으로 돌아가게 하십시오.

이후 사마영은 20만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해 낙양으로 진군했으나 예상외로 사마예가 끈질기게 버티면서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1년 가까이 진행되는 동안, 사마영은 사마예를 상대로 연전연패해 6~7만에 달하는 병력을 상실했다. 게다가 그는 측근 맹구의 모함에 넘어가 명성이 자자했던 육기를 처형하고, 육기를 위해 간언했던 손중의 삼족을 멸하는 추태까지 보였다. 사마예는 이 와중에도 사마영과 화해하고자 하여 사마영에게 편지를 보내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을 진술하고 화해를 신청했지만, 사마영은 사마예가 자신의 측근 황보상 등의 목을 베지 않는다면 화해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러다가 304년 정월, 낙양에 있던 동해왕 사마월이 사마예를 습격해 관청에 감금한 후 낙양을 개방하면서, 사마영은 가까스로 승리했다. 이후 사마영은 승상으로 임명된 뒤 2월 17일에 표문을 올려 황후 양씨를 폐위시켜서 금용성에 유폐하고, 황태자 사마담을 폐위시켜 청하왕으로 삼게 했다. 또한 하간왕 사마옹의 추대를 받아 황태제에 임명되었으며 도독중외제중사 겸 승상을 겸직했다.

사마영은 권력을 장악한 뒤 사치를 매우 심하게 부리고, 총애하는 사람들을 요직에 앉혀 정국을 농단했다. 백성들은 당초 사마영에게 기대를 많이 하고 있었는데, 사마영이 이렇듯 추한 행태를 보이자 매우 실망했다. 게다가 사마영은 자만한 나머지 수도 낙양에 있지 않고 업에서 정사를 주관했다. 이에 동해왕 사마월은 낙양에서 사마예의 옛 휘하 장수였던 상관사 등과 함께 사마영을 토벌할 음모를 꾸몄다.

304년 7월, 사마월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황후 양씨와 태자 사마담을 복위시켰다. 이후 사마월이 격문을 보내 사방의 군사를 소집하니, 안양에 이를 즈음엔 무리가 10만여 명에 달했다. 사마영이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계책을 물었다. 동안왕 사마요가 먼저 제안했다.

천자가 친히 정벌을 나섰으니 의당 갑옷을 벗으며 상복을 입고 나가서 맞이하며 죄를 청해야 합니다.

사마영은 좆지 않고 석초를 파견해 무리 50,000명을 거느리고 막아 싸우게 했다. 절충장군 교지명이 뒤이어 사마영에게 승여를 받들어 영접하라고 권했다. 그러자 사마영이 화를 내며 말했다.

경은 사태를 잘 파악하는 것으로 이름이 나 있고 몸을 던져 나를 섬기고 있는데, 지금 주상이 여러 소인들에게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어찌하여 나더러 손을 잡아매고 형벌을 받으러 가라고 하시오?

이후 사마영의 부하 석초는 병사 50,000명을 이끌고 탕음에서 습격하니, 사마월의 10만 대군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혜제 사마충은 이 와중에 화살 세 대를 맞았고, 백관들과 황제를 시중드는 사람들이 모두 흩어졌다. 오직 혜소만이 조복을 입고 말에서 내려 몸으로 황제를 감쌌다. 이에 병사들이 혜소를 수레에서 끌어내 죽이려 하자, 혜제가 말렸다.

그는 충신이다. 죽이지 마라!

병사들이 대답했다.

태제(사마영)의 명령을 받들 뿐, 오직 폐하 한 사람에게만 범접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혜소는 병사들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피가 헤제의 옷을 더럽혔다. 후에 주위 사람들이 혜제의 옷을 빨려 하자, 혜제가 거부했다.

혜 시중의 피다. 빨지 말도록 하라!

사마월은 자신의 봉국인 동해로 돌아간 뒤 예장왕 사마치와 힘을 합쳐 재차 거병하고자 했다. 여기에 유주제군사도독 왕준이 사마월의 동생인 동영공 사마등과 함께 거병하면서 선비족의 단무물진(왕준의 사위), 오환족의 길주를 불러들였다. 한편 사마영은 동안왕 사마요가 자신을 원망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를 죽여버렸는데, 사마요의 조카 사마예(훗날 동진의 초대 황제인 진원제)가 화를 미칠까 두려워하다가 폭풍이 몰아치는 날 밤에 탈출하여 강남으로 도주했다.

사마영은 사마월의 무리가 선비족과 오환족을 동원하자 자신 역시 흉노족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흉노의 좌현왕 유연을 관군장군으로 삼아 업에서 군사 일을 맡게 했다. 이때 유연의 종조인 우현왕 유선이 동족들에게 말했다.

한나라가 망한 이후로 우리의 선우는 다만 헛된 이름만 가지고 있을 뿐 한 자의 땅도 가진 것이 없으며 나머지 왕후들은 떨어져 편호와 같게 되었다. 지금 우리의 무리들이 비록 쇠퇴하였지만 오히려 2만 명까지 줄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머리를 숙이고 노역을 하면서 백년을 지내겠는가! 좌현왕은 영명하고 이 시대에 뛰어난 분이니, 하늘이 진실로 흉노를 부흥시키지 않으려 했다면 반드시 헛되이 이러한 사람을 내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사마씨는 골육 간에 서로 해치고 있으며 사해는 물 끓는 솥과 같으니, 호한야 선우가 세웠던 대업을 부흥시키려면 지금이 그때이다.

이후 흉노족들은 유연을 대선우로 삼고 이 사실을 유연에게 알렸다. 이에 유연은 사마영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헀다.

오늘날 두 개의 진이 발호하고 있는데, 무리가 10만여 명이니 아마도 숙위병과 가까운 군에 있는 군사들이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청컨대 전하를 위해 다시 한 번 흉노 5부의 군사를 가지고 나라의 어려움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사마영이 말했다.

5부의 무리들을 과연 발동하겠소? 바로 그들을 발동할 수 있다 하여도 선비족, 오환족이 쉽게 감당하지 못할 것이오. 내가 승여를 받들고 낙양으로 돌아가서 그 예봉을 피하면서 천천히 천하에 격문을 전하여 거꾸로 순리대로 그들을 제압하려고 하는데, 그대의 뜻은 어떠하오?

유연이 말했다.

전하께서는 무제(사마염)의 아드님이시며, 왕실에 큰 공훈을 세우셔서 위엄과 은혜를 베푸신 것이 멀리까지 드러났으니, 사해의 안쪽에서 누가 전하를 위해 죽을 힘을 다하는 것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어찌하여 징발하는 데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왕준은 쥐새끼 같은 녀석이고 동영공(사마등)은 먼 친척인데 어찌 전하와 더불어 힘겨루기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전하께서 한 번 업궁을 출발하신다면 타인에게 약하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니 낙양까지 갈 수 없을 것이고, 비록 낙양에 도착한다고 해도 권력과 위엄은 다시 전하에게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병사의 무리들을 위로하고 권고하여 편안히 하는 방법으로 그들을 진정시키면, 저 유연이 청컨대 전하를 위해 두 부의 병력으로 동영공의 무리를 꺾어버리고, 세 부를 가지고 왕준을 효수하겠습니다. 그리한다면 두 녀석들의 머리는 날짜를 손가락으로 꼽으며 매달아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마영은 이에 기뻐하며 유연에게 북흉노의 선우, 참승상군사 직책을 수여했다. 유연은 곧 동족과 합류한 뒤 대선우에 올랐고, 20일 동안 50,000명의 무리를 확보해 이석을 도읍지로 삼으며 유총을 녹려왕으로 삼았다. 그 사이, 왕준과 사마등의 군대가 사마영을 공격해 잇달아 격파했다. 이에 사마영은 유연의 구원이 오기 전에 낙양으로 도주하기로 결심하고 새벽에 출발하려 했다. 그러나 사마영의 모친인 태비 정씨가 업성을 사모해 떠나지 않으려 하자, 사마영은 감히 결정하지 못하고 시간을 지체했다. 그러다가 사마영은 수십 기병만 거느리고 노지와 함께 황제를 모시고 낙양을 향해 달아났고, 사마영에게 버림 받은 수만 명은 업성에 남겨졌다가 적에게 무참히 학살당했다. 유연은 사마영이 낙양으로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했다.

내 말을 채용하지 않다가 거꾸로 스스로 도망하고 무너졌으니 정말로 못난이로다!

이후 유연은 수도를 좌국성으로 옮긴 뒤 마침내 한을 건국하고 한왕이 되었다.

한편 사마옹이 사마영을 구하기 위해 파견한 장방의 2만 군대는 업으로 진군하던 중 낙양이 비어있는 걸 확인하고 이 기회를 틈타 낙양을 점거하여 태자 사마담과 황후 양씨를 또다시 폐위시켰다. 그 후 사마영이 불과 수십 명의 기병대와 측근 몇명, 혜제 사마충과 함께 낙양에 이르자, 장방은 사마영을 체포해 감금했다가 모든 직책을 박탈했다. 이후 사마영은 장안으로 천도하는 대열에 끼였다가 사저로 돌아갔다.

사마영은 비록 폐출되었지만 워낙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하북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가련하게 생각했다. 그는 장안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황제가 낙양으로 향할 때 따라갔으나 사마월의 부하 송주가 낙양으로 쳐들어오자 서쪽으로 달아나 장안으로 가던 중 화음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사마옹이 이미 사마월과 화친했다는 보고를 받자 감히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며칠간 그곳에 머무르다가 신야로 도망쳤다.

마침 신야를 다스리던 신성원공 유홍이 죽자, 그의 사마인 곽매가 난을 일으켜 사마영을 주군으로 삼으려 했지만, 곽서가 유홍의 아들 유번을 받들고 곽매의 목을 베었다. 사마영은 곽서가 자신을 잡으려 들자 황하를 건너 북쪽인 조가로 달아나 그곳에서 장사 수백 명을 모은 뒤 공사번에게 가려 했다. 그러나 돈구 태수 풍숭이 도중에 그를 체포해 업성으로 압송했지만 범양왕 사마효는 차마 그를 죽이지 못하고 유폐시켰다. 이 소식을 접한 공사번이 사마영을 구하기 위해 백마진에서 황하를 건너려 하자, 연주 자사 구희가 이를 토벌하고 공사번의 목을 베었다.

306년 10월, 범양왕 사마효가 사망했다. 장사 유여는 사마영이 평소 업성 사람들에게 동정을 받고 있는 걸 알고 있기에 극비리에 사마영과 그의 두 아들을 살해한 뒤 중앙에서 사람을 보내 그들을 처형하게 했다는 거짓말을 지어냈다. 사마영의 관속들은 주군이 죽자 모두 달아났지만, 오직 노지 만이 사마영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냈다.

3. 평가

사마영이 팔왕 중 인망이 있는 인물임은 여러 면에서 드러난다. 팔왕의 난 당시 왕부에 모였던 인재들이 손수나 장방같은 한미한 가문에서 출세를 노리는 인물들이 많았다면 사마영의 경우는 노지와 같은 이름있는 가문 출신의 인물부터 항장이나 이민족 출신이기는 해도 육기나 유연과 같이 명문 출신에다 젊을 때부터도 자신의 능력으로 사해에 엄청난 명성을 날린 유명인사들이 휘하에 있었다. 동진 원제가 처음 강동에 들어갔을 때 그 동네 유력자들의 민심을 얻으려고 얼마나 피똥싸는 노력을 했는지 본다면 사마영은 애시당초 저런 명망이 어느정도 갖춰져 있는 사람이었던 것... 당시 명망있는 가문 출신이란 작자들이 번왕'따위'에게 먼저 머리숙이는 시대가 아니었던 걸 감안한다면 사마영 본인이 가지고 있는 명망이 그만큼 대단했던 것이다. 참고로 하자면 급상과 석륵 역시도 그의 휘하에서 활약했었다. 그리고 저 인재들 중 모함으로 죽은 육기 형제들을 제외하고는 실제로 그를 배신한 사람도 없다. 유연의 경우가 흉노의 군대를 끌고 오겠다며 그를 속여서 도망간 것 처럼 되어있지만 유원해재기를 보면 이것도 사마영이 유연이 합류할 길을 막아버린 전략의 미스가 더 큰 것 뿐, 유연이 먼저 그를 배신했던 것은 아니다. 석륵과 같이 군대를 일으켰던 급상은 그가 죽은 후 그의 관을 지고 싸웠다는 이야기가 정사에 나와있고 석륵이 유연을 따르게 된 계기 중 하나는 사마영의 원수를 갚고 싶다는 것이었다.[2] 업성 사람들에게 민심도 얻고 있었던 것을 보면 나름대로 인망있는 통치를 하기도 했던 모양이었다.

그의 문제는 결국 1인자를 위협하는 2인자의 위치에서 힘과 명분을 모두 갖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그 욕심 때문에 소인배같은 인물들의 유혹에 빠져서 결국은 나라와 자신, 그리고 자신을 따랐던 사람들 모두를 파멸로 이끌어 버렸다는 데 있다. 육기의 죽음도, 사마예의 죽음도 모두 그런 식이었거니와, 이 와중에서 서진은 완전히 각자의 지방세력과 이민족들의 이합집산 난립으로 개판이 되어 버렸다. 이러니 결국 영가의 난의 원흉으로 평가받아도 할 말이 없는 인물....[3] 그가 초심을 지켜가며 주변에 붙어 있는 좋은 인재들의 말을 받아들여가며 행동했다면 서진에게도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좋을 때가 분명히 올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큰 안타까움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4. 기타


  1. [1] 거기다가 사마영 밑에서 용병으로 있던 자들 중에서도 사마영이 죽은 후 그의 원수를 갚겠다며 싸우다 일부는 전사했고, 일부는 유연에게 귀부하여 진과 싸웠는데, 그 대장격 인물이 석륵이었다. 이래저래 영가의 난과 연결점이 무척 많은 인물이다.
  2. [2] 물론 이건 열전이나 재기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사실관계가 어떤 건지는 잘 모른다. 진서가 좀 그런 역사서이긴 하다.
  3. [3] 하나 더하자면 서진 조정에서 유연을 어느정도 컨트롤 할 수 있는 인물이 사마영이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사마영이 최종 승리자가 되었다면 유연이 그렇게 날뛸 이유도 의지도 없을 거라는 걸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는 모습들은 제법 많이 찾아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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