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발랑탱 알캉

1. 개요
2. 생애
3. 음악
4. 평가

1. 개요

샤를 발랑탱 알캉, Charles Valentin Alkan (1813-1888)

프랑스낭만주의 음악가.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에튀드 Op 39 No 10, 한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3악장. 연주자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

2. 생애

1813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했다. 유태인으로 본명은 샤를 발랑탱 모랑주인데, 알캉이라는 이름은 그의 아버지가 음악가로 쓰던 이름이었다. 아버지 외에 알캉의 형제들도 모두 음악가로서 알캉이라는 이름을 썼지만 오늘날까지 알캉하면 샤를 발랑탱이 언급되는 경우가 대다수다. 아버지는 자택에 파리 음악원 입학을 노리는 아이들을 위한 예비학교를 운영했다.

어린시절부터 음악가로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해 불과 6살 나이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해 당대 저명한 음악교사였던 피에르 치메르만 밑에서 음악을 배웠다.[1] 후세의 올리비에 메시앙과 마찬가지로 천재적인 학생으로 명성이 자자해 파리 음악원을 졸업할때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톱클래스의 성적을 거두어서 프리미에 프리(1등상)를 수상했다.

20대에 이미 당시 유명한 비르투오소로 명성을 날렸다. 프레데리크 쇼팽과는 라이벌이면서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알캉과 실내악 앙상블을 같이하던 첼리스트 오귀스트 프랑콤의 소개로 만났을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쇼팽은 자신의 연주회에 알캉을 게스트로 초대했을 정도고, 자신이 제자를 가르칠 수 없게 되자 알캉에게 맡겼을 정도로 그를 인정했던것으로 보인다. 쇼팽이 유언으로 자신의 미완성 작품을 알캉에게 완성시키라 부탁했을 정도이다.

리스트와는 그가 자신의 곡에서 훔친 부분이 있다는 이유로 절교를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알캉은 말년이 불우했다. 쇼팽이 요절하고 자신도 스승 치메르만이 은퇴한 후에 그의 클래스를 이어받는 문제를 놓고 동기인 앙투안 마르몬텔과 경합을 벌였지만 패배해[2] 알캉은 모든 외부활동을 접어버리고 은둔하여 성서와 탈무드에서 정신적 위안을 얻었다.

알캉이 대중 활동을 재개하는데에는 거의 30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 1877년이 되어서야 알캉은 바로크 음악과 자신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대중들을 위한 연주회를 하면서 대중활동을 재개했다.

알캉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의 사인이 불분명하다는 문제가 있다. 일각에서는 늙은 알캉이 책장 높이 꽂아둔 탈무드를 꺼내려고 하다가 책장이 무너져서 책에 압사당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과연 이것이 사실인지는 확실치 않다. 이 이야기는 1909년에 알렉산드르 베르타의 기사에서 발단했으며 피아니스트겸 작곡가인 이시도르 필립이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과장되었다는 지적이 많다.

3. 음악

알캉은 당대에 쇼팽, 리스트와 더불어 천재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떨쳤고 리스트가 알캉이 기교적인 면에서 자신과 겨룬 사람들 중 가장 뛰어났다는 말이 있을정도로 뛰어났다.

작품 대다수는 피아노곡이고 한곡의 교향곡과 일부의 실내악곡등이 있긴 하나 중요작품은 모두 피아노곡이다. 전기에는 고도의 기교와 장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대형 피아노 작품들을 주로 만들었지만, 후기에 들어서는 기교와 스케일 보다는 소품 위주로 피아노의 깊은 표현력을 탐구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이런 변화에는 은둔시절 성서와 탈무드를 읽으면서 깊은 내적 성찰을 하게 된것에 원인이 있는것으로 보인다. [3]

후기 음악에서는 유대교 회당의 음악을 연상시키는 선법과 후대 현대음악을 연상시키는 반음계에 의한 무조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후대의 소랍지가 즐겨 쓰던 기교인 톤클러스터도 엿보인다. 톤 클러스터 같은 경우는 메이저 에튀드 7번과 Op.55 Une fusee (로켓) 등에서 적절히 사용되었다.

구노나 리스트처럼 당대에 발명된 페달 피아노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페달 피아노는 피아노에 파이프 오르간의 다리건반같은 것을 단 피아노인데 알캉은 생전에 대중들앞에서 페달 피아노를 시연해보이기도 했다. 유언으로 자신의 유산에서 800프랑씩을 기부해 페달 피아노를 위한 콩쿨 개최를 부탁하기도 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페달 피아노는 잊혀진 악기가 되어버렸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12개의 단조 에튀드(Op.39 No.1~12)와 대소나타 4개의 생애(Op.33 No.1~4) [4] 등이 있다.

참고- 샤를 발랑탱 알캉/에튀드

4. 평가

알캉은 당대에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평가받았지만 그가 죽고 나서는 서서히 잊혀졌다. 그 이유는 알캉이 쇼팽 사후에 은둔해버린것에도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알캉이 은둔하던 시점에 리스트는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구가해 나갔고 그러면서 알캉은 서서히 잊혀졌던것.

알캉은 살아있을 적에도 평가가 상당히 엇갈렸다. 마이어베어는 알캉을 '가장 놀라운 예술가' 라고 칭하며 피아니스트로써 초대하기도 했지만, 로베르트 슈만은 그의 3개의 소품에 대해서 "내용없고 외적으로도 형편없는 작품"으로 평했다.

후대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다르지 않았다.

세사르 프랑크의 경우, 알캉에 대해 역사상 가장 시적인 음악가라고 극찬했고 페루치오 부조니는 역대 최고의 음악가들의 반열에 들어갈만하다고 높게 평가했다.[5] 이는 그의 작품 중에 '바닷가 미친 여자의 노래'나 '이웃동네의 화재'와 같이 독특하면서도 내용적으로 충실하게 표현되어 있는 곡들이 많고, 당시까지 자주 쓰이지 않았던 '톤 클러스터(Tone Cluster)'[6]와 같은 연주법을 적절하게 이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쇼팽의 표준 전기 작가로 명성이 높은 프레데릭 닉스는 쇼팽보다 못한 음악가, 인위적이고 예술성을 찾아볼수 없는 음악가로 평했다. 이런 이유는 알캉이 의도한 악상을 표현하기 위한 테크닉에 있다. 특히 연습곡('기사'나 '철도'가 대표적)에서 그러한데 미친듯한 스피드와 연타, 도약 그리고 웅장한 스케일의 표현을 위한 화성의 연속이, 완벽히 치기 난해한 곡[7]이라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테크닉에 대한 평가를 고려하면 아마도 그 자신은 실제로 연주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들어서는 사람들의 피아노 테크닉 수준이 발전하면서 20대, 가끔은 10대(!!!)천재들이 알캉의 작품을 연주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1970년대 이후로 알캉의 음악은 재평가의 흐름을 맞고 있다. 여러 피아니스트들이 알캉의 작품들을 녹음했고 2012년 4월에는 아테네에서 Zimmerman-Alkan 국제음악협회 주체로 알캉 음악을 연주회는 콩쿨이 개최되기도 했다. 2013년에는 알캉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빈첸초 말템포가 12개의 단조 연습곡 전곡(!!)을 리사이틀에서 연주하기도 한만큼 그의 음악이 더 많이 조명될것으로 보인다하지만 2013년에는 베르디바그너라는 거인들이.

요즘은 그나마 연주자가 많아졌으나, 아믈랭이나 잭 기본스 이전의 레코딩이나 실황연주 기록은 많지 않다. Egon Petri, John Ogdon, Raymond Lewenthal, Ronald Smith 정도가 알캉의 음반을 낸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아믈랭 이전의 알캉 연주자이다.

일반인들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이나 리듬스타를 해본 사람이라면 악랄한 난이도로 이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1. [1] 치메르만은 구노, 비제의 스승으로 더 유명하다.(근데 고트샬크(가초크)의 경우엔 입학시험조차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유가 가관이다. 미국같은 야만적인 나라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면 음악가는 절대 되지 못할 거라며 고국에 돌아가 기계공이나 되라고 했단다(...)
  2. [2] 아이러니 하게도 본의아니게 알캉의 앞길을 막아버렸던 마르몬텔이었지만 그의 저서인 "명피아니스트들"에서 알캉의 언행을 자세히 소개해서 후대에 알캉이 다시 재조명받는데 기여를 했다. 병주고 약주고인가
  3. [3] Op.63 에스키스들이 대표적 작품이다.
  4. [4] 알캉의 작품 뿐 아니라 낭만파시기를 통틀어도 음악적으로 풍부하다고 평가받는다.
  5. [5] 베토벤 이후 피아노 작곡가 다섯명을 꼽는데 쇼팽, 리스트, 슈만, 브람스 그리고 알캉이 들어갔다.
  6. [6] 곡의 표현을 위해 서로 반음/온음 차이가 나는 음들을 한꺼번에 연주하는 것이며, 이 때문에 피아노에서 적용되는 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알캉은 상술했듯 '이웃동네의 화재(Op. 35, No. 7)'나 '로켓(Op. 55)' 등의 작품에서 사용했으며, 후대에는 레오 오른스타인(Leo Ornstein), 헨리 코웰(Henry Cowell, 새로운 톤 클러스터 기보법 창시)과 같은 현대음악가들이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검은악보의 클리셰인 마지막 부분 올프레스도 어찌 보면 톤 클러스터의 일종이다.
  7. [7] 그런데 유투브에 보면 인템포 또는 그 이상으로 연주하는 괴물들이 간혹 있다. 아믈랭이라던가 아믈랭이라던가 기타 등등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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