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기독교의 종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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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float:right;max-width:420px;"

성공회
Anglican Church | Episcopal Church

<colbgcolor=#f5f5f5,#111><colcolor=#000,#fff>주요 인물

헨리 8세
엘리자베스 1세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형성 시기

1534년[1], 2세기[2]

교세

약 8500만 명[3]

계통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종교

기독교

분류

개신교

캔터베리 대주교

제105대 저스틴 웰비

언어별
명칭

<colbgcolor=#CD1039,#222>한국어

성공회(聖公會)

영어

Episcopal church미국[4]
Anglican church미국 이외

Anglican Rose라고도 불리는 세계 성공회(Anglican communion)의 상징. 그리스어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5]라고 적혀 있다. 세계성공회공동체 홈페이지||}}}

1. 개요
2. 역사(잉글랜드 교회의 역사)
2.1. 성공회의 기원
2.2. 종교개혁 이전
2.2.1. 대륙 교회와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입장
2.2.2. 독자성을 강조하는 입장
2.3. 헨리 8세 이전, 로마 교황청과의 갈등
2.4. 헨리 8세의 종교개혁
2.5. 헨리 8세 이후
3. 특징
3.1. 성공회의 세 흐름
3.2. 다른 개신교 교파와의 비교
3.3. 가톨릭과의 비교
4. 조직
5. 세계 성공회
5.1. 캔터베리 대주교
5.2. 영국 및 아일랜드의 성공회
5.2.1. 잉글랜드 국교회
5.2.2. 웨일스 성공회
5.2.3. 스코틀랜드 성공회
5.2.4. 아일랜드 성공회
5.3. 미국 성공회
5.4. 호주의 성공회
5.5. 홍콩마카오의 성공회
5.6. 일본 성공회
6. 기타
7. 창작물에서의 성공회
8. 성공회 성직자 및 평신도
8.1. 가상 인물
8.2. 실존 인물
8.2.1. 성직자
8.2.2. 일반 신자

1. 개요

영국 런던의 대표적인 성공회 성당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대 제대(The Great Altar).

영국에서 기원한 전통적인 개신교 교회[6]로, 165개국에 걸쳐 약 8500만 명의 교인이 있다.[7] 성공회는 천주교, 정교회에 이어 그리스도교에서 교세로는 셋째 가는 교단이다. 잉글랜드의 국교라서, 잉글랜드 성공회는 잉글랜드교회(The Church of England)라고도 부른다. 헨리 8세 이래로 모든 영국의 임금은 '신앙의 수호자'라는 호칭을 지니는데, 이 호칭은 '잉글랜드교회의 보호자'라는 의미다.

영어로는 'Anglican Church'가 가장 일반적인 명칭이며, 미국이나 스코틀랜드와 같이 역사적으로 잉글랜드에 대해 반감이 있던 지역에서는 Episcopal Church라는 이름을 쓴다(사실 미국에서 "I am an Anglican." 하면 "나는 영국 성공회 신자입니다." 라는 뜻으로, "I am an Episcopalian." 하면 "나는 미국 성공회 신자입니다." 라는 뜻으로 통한다.). 한자문화권인 대한민국/일본/중국에서는 '聖公會'라는 한자어를 각자의 한자 읽는 방식대로 읽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성공회', 일본에서는 '세이코카이(せいこうかい[聖公会\])', 중국에서는 '성궁후이(Shènggōnghuì[圣公会\])'.] 성공회(聖公會)는 '거룩하고(聖) 보편적인(公) 교회(會)'라는 뜻으로,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나오는 '거룩하고(聖)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공교회(公會)' 및 사도신경에 나오는 '거룩하고(聖) 보편된(公) 교회(會)'[8] / '거룩한(聖) 공교회(公會)'[9]를 한자어로 조합해서 만든 명칭이다.[10]

영국에서 시작된 종교답게 과거 대영제국의 일원이었던 영연방 국가들에 널리 퍼져 있다. 잉글랜드의 국교, 영국 전체에서도 주류 종교이고, 나이지리아[11][12]에서도 가장 큰 그리스도교 교단이다. 홍콩에서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그리스도교 교단이다.[13] 호주[14] 뉴질랜드에서는[15] 천주교 다음으로 큰 그리스도교 교단이고, 남아프리카 공화국[16]에서는 여섯 번째[17]로 큰 기독교 교단이다. 미국에서는 그리스도교 교단 중 제일 많은 12명의 대통령을 배출했고[18][19] 워싱턴 D.C.국립 성공회 대성당이 있는 등[20] 현재 교세에 비해 인지도가 높은 편이다. 한 때 미국 주류 개신교 교단이었기 때문에 메인라인(Main-line)[21]교회라고 불리기도 한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캐나다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소속되어 있다. 구 하와이 왕국[22]메리나 왕국[23]의 국교였기도 했다.

아래 명칭 항목에도 나오겠지만, 세계 각국의 성공회는 잉글랜드 성공회의 해외 지부[24]가 아니라 '해당 국가 성공회'로 불리며, 서로 완전히 독립적이다[25]의 . 예를 들어 호주에 있는 성공회 교회는 영국 성공회의 호주 지부가 아닌, '호주 성공회'로 불리는 식. 우리나라의 성공회 또한 한국이라는 지역 단위로 단일 관구를 이루며 대한성공회라 한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이 발간한 책자에 따르면, 성공회를 다른 교단과 연관지어 말한다면 '개혁된 천주교'(reformed catholic), '교황 없는 천주교', '교리에 너그러운 정교회', '천주교 전통을 유지하는 개신교' 등으로 간단히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국외에서는 천주교와 개신교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는 의미로 브릿지 교회(Bridge Church)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국내에서는 외형상 성공회와 비슷한 루터교회만 하더라도 종교개혁적 장자 교파[26]라는 인식이 있지만, 성공회는 뚜렷한 포지션을 갖고 있지 못한 점이 아쉬운 점이다.[27] 국내의 일반인들에게는 성공회가 개신교라는 인식, 천주교와 개신교가 혼합된 독립된 종파라는 인식, 천주교의 진보적인 한 갈래('이혼이 허용된 천주교' 또는 '신부의 혼인이 허락된 천주교')라는 인식 등이 뒤섞여 있는 듯하다.

2. 역사(잉글랜드 교회의 역사)

2.1. 성공회의 기원

기독교의 한 분파인 성공회는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8세아라곤 출신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을 위해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분리시킨 것에서 기원했다. 물론 단순히 국왕의 결단 하나로 잉글랜드의 교회가 유럽 대륙과 분리되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시각일 것이다. 잉글랜드 성공회는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프랑스 등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던 16세기 유럽 종교개혁의 일부이다. 다른 기독교 종파와 마찬가지로 성공회의 현재 모습은 역사적 산물로, 헨리 8세 시절의 잉글랜드 국교회와는 큰 차이가 있다.

역사적 사실을 단편적으로 서술하자면, 16세기 잉글랜드종교개혁으로 잉글랜드 내의 모든 교회는 로마 교회와의 단절을 선언했고, 국왕을 구심점으로 한[28] 잉글랜드 국교회가 출범하게 되었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대륙의 루터나 칼뱅이 신앙과 교리의 문제를 핵심적으로 다루면서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것과 매우 다른 양상으로 생겨났는데, 이는 한두 문장으로 서술할 수 있는 단편적인 사건이 아니며, 여러가지 잉글랜드의 국내 상황이 복합적으로 일어난 사건의 결과물이다. 단순히 한 절대군주의 이혼 사건에서 불거진 곁다리 문제라고만 보기는 어렵다는 것.

실제로 성공회의 기원과 역사들을 연구하는 학자들조차도 세세히 분석함에 어려움을 느낀다. 일반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영국 교회(성공회)의 출발을 결혼 같은 우발적 사건, 우연성, 일탈로만으로는 보기에는 현재 성공회의 정체성이 설명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단 잉글랜드 국교회가 천주교에서 완전히 분리된 계기는 헨리 8세의 이혼 문제다. 헨리 8세는 죽은 형 아서 튜더의 아내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했고, 교황 율리오 2세에게 면책을 받았다. 혼인무효이니 이혼이니 하는 용어는 별로 중요치 않다. 혼인 무효는 이혼급으로 자주 이용이 되었기 때문. 애를 못 낳는다든가 동맹이 풀린다든가의 이유로 새 장가 가고 싶거나 하면 유럽 군주들은 교회법학자들을 동원하여 무효 사유를 열심히 잘 찾아냈고, 교황 역시 거의 대부분 이를 승인했다. 대부분의 사유는 근친혼인데 앞서 헨리 8세의 경우처럼 근친혼으로 결혼하며 면책받았다가[29] 이혼하고 싶으면 근친혼이라며 무효를 주장했다.

물론 로마교회와의 단절이 일어나기 직전의 사건만을 요인으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잉글랜드는 유럽대륙에 속한 가장 큰 섬나라답게 대륙 교회와의 세세한 차이점이 오래전부터 존재했으며, 16세기 중반 국왕의 혼인문제 때문에 생긴 개인적이고 우발적인 사건 하나로 대륙 교회와 분리된 것이 아니다. 그러한 단편적인 시각으로는 잉글랜드 교회가 거의 천년의 역사 동안 로마의 수위권을 인정하다가 갑자기 전통을 부정했음에도 튜더 왕조의 통치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을 대해 설명하기 어렵다. 만약 잉글랜드 교회가 로마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대륙 교회와의 이질성을 간직하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종교적이었던 당시 잉글랜드 사회에서, '왕께서 이혼하고 새 장가를 가고 싶어하신다'는 이유만으로 전 국가적인 종교개혁을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다만 실제로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의 국교회 정책은 천주교 교도들의 잦은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다. 로날드 허튼은 메리 1세는 그 치세 중 종교를 정면에 내건 민중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던 유일한 튜더 군주였음을 지적한다. 메리와 엘리자베스 중 누구의 박해가 심했는지에 대해서도, 마샬이 지적하듯 엘리자베스는 도덕적 우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단죄보다는 반역죄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했기에 구체적 수치를 계산하기 어렵다. '피의 메리'라는 말로 대표되는 메리의 천주교 박해와 엘리자베스의 성군 이미지 역시 이 문제에 대한 냉정한 고찰에는 방해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헨리 8세가 아니여도 그 시점에서 잉글랜드 교회는 대륙과 완전히 분리될 필연성이 있었다'[30], '성공회는 헨리 8세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다'[31]라는 양 극단의 주장 모두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전세계 성공회의 역사는 영국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영국 교회의 역사를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2.2. 종교개혁 이전

2.2.1. 대륙 교회와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입장

주류 역사학계와 가톨릭의 입장에 가깝다. 브리튼 지방에 전통적인 켈트 교회가 있었던 것은 맞지만, 이 켈트 교회는 대륙 교회들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었다는 입장이다. 우선 부활절 날짜의 차이 등은 켈트 교회의 독특한 전례에 대한 설명은 될 수 있어도, 켈트 교회가 대륙 교회와 완전히 분리돼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이다.[32]

그러므로 영국의 종교개혁화의 원인으로는, 단지 종교개혁 당시의 정치적/종교적 지형이 개신교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는 설명[33]이 훨씬 객관성있고 합리적인 주장으로 인정받는다.

영국 교회의 고유성을 강조하려고 길게 써놓은 군주와 교황의 갈등 사례만 하더라도 유럽 다른 나라에서도 중세 내내 있어온 문제다. 이러한 갈등은 천주교 신심이 각별했던 에스파냐나 프랑스에서도 있었다. 이를 영국인의 종교개혁 기질로 연결시키는 것은 결과론적 오류이다. 14세기에 종교개혁적 원류로 평가받는 위클리프를 배출하기 전까지는 잉글랜드 교회가 유럽 대륙의 다른 나라들의 교회들과 의미 있는 차이점을 보이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 위클리프의 주장마저도 당시 잉글랜드 교회에서 주류가 아니었으며, 위클리프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소수였다.

또한 헨리와 엘리자베스의 종교 정책에 민중의 반발도 상당했다. 무엇보다도 헨리 8세의 경우는 대규모 봉기인 '은총의 순례'에 직면했고 엘리자베스 1세 역시도 1569년에 천주교도들의 대규모 봉기를 맞이했다.

결국, 성공회는 종교개혁 당시 잉글랜드 내의 천주교 교회가 로마 교황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국교화하는 정치적인 상황 가운데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으로 봐야 한다.

2.2.2. 독자성을 강조하는 입장

성공회의 공식 입장에 가깝다.[34]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이전인 2세기부터 잉글랜드에는 이미 기독교가 전파되어 켈트 교회(Celtic Church)로 정착되어 있었고, 나중에 기독교가 공인되어 기존 켈트 교회가 로마 천주교 휘하로 들어가게 된 후에도 독자성을 유지하다가, 먼 훗날 헨리 8세의 혼인 무효 문제로 인해서 이 켈트 교회가 다시 분리된 것이 현대의 성공회라는 입장이다. 즉, 성공회는 스스로 초대 교회 시기부터 잉글랜드 지역에 있었던 켈트 교회를 잇는다고 본다.

기독교는 1세기에 탄생하여 로마 정부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빠르게 로마 제국에서 전파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2세기 경에는 로마의 서쪽 끝 브리튼 섬까지 전파돠어 그곳에 살던 켈트인들 사이에서도 기독교 신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35] 4세기에 들어서 상당한 발전을 보여, 314년의 아를 시노드(Synod of Arles)와 359년의 아리미눔 교회회의(Council of Ariminum)에 대표자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특히 켈트교회의 주교들이 314년 아를 시노드에 참가한 것은 천주교의 공식 문헌에 남아있는 기록으로서, 잉글랜드 교회(Church of England)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기도 하다.

잉글랜드의 켈트인 기독교 신자들은 부활절 날짜를 독자적으로 계산하는 등,.[36] 기존 유대인 기독교 신자들이나 로마인 기독교 신자들과 구분되는 특징을 보이기도 했다.

성공회 신자들이 대륙 교회와의 분리성을 강조하기 위해 창작했으리라고 여겨지는 것에는 아리마태아의 요셉의 성배 전승이 있다. 예수 사후에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꿈에 나타난 예수의 명령을 따라 성배를 가지고 당시 로마 제국의 서쪽 끝이었던 브리타니아에 와서 성배를 숨겨두었다는 것.[37] 아서왕 이야기를 비롯한 켈트족의 전설들은 이 전승을 기반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전승에서 한발 더 들어가, 천주교이 사도 베드로로부터 이어내려오는 교회이고, 정교회가 사도 안드레아로부터 내려오는 교회이듯이, 성공회도 아리마태아의 요셉으로부터 내려오는 교회라고 말하기도 한다.

2.3. 헨리 8세 이전, 로마 교황청과의 갈등

로마제국이 쇠함에 따라 자연스레 브리타니아에 대한 로마의 보호가 약해지자, 게르만(앵글로 색슨)인들의 영국 침략이 거세지기 시작했고, 기독교를 믿는 켈트인들은 점차 산악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특히 로마가 410년 모든 군대를 철수시킨 후의 브리타니아는 로마에 의한 평화(Pax Romana)가 완전히 깨지게 되고 권력의 진공상태가 생기게 된다.[38] 현재 덴마크와 네덜란드 지역에 살았던 게르만족의 일파인 앵글로색슨족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대적인 브리튼섬 공략을 감행했다.[39][40] 그 결과, 앵글로색슨족이 브리튼섬의 (현재 스코틀랜드와 웨일즈 지역을 제외한) 중부와 남부에 자리잡게 되었고[41], 켈트족은 브리타니아 섬의 변방 산악지대로 밀려나게 되면서, 영국 역사의 주역은 켈트족에서 앵글로색슨족으로 바뀌게 된다.

597년 대교황으로 불리는 그레고리오 1세의 시기[42] 로마 태생인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주교로 서품되어 잉글랜드로 건너가 당시 켄트 왕국의 왕 에텔버트(Ethelbert)[43]에게 잉글랜드 군주 중에 최초로 세례를 주었다.[44] 에텔버트의 왕비 베르타는 프랑크 왕국 계열의 네우스트리아 왕국[45]의 공주로 하리베르트 1세의 딸이며, 앞서 프랑크 왕국은 이미 대륙에서 5세기 클로비스 1세 시절 천주교로 개종했었고, 열렬한 기독교도로 알려진 브륀힐트 여왕의 조카였기 때문에[46] 대륙에서 시집 오기 전에 이미 기독교인이었고 로마에서 파견한 선교사들이 켄트 지방에 안전하게 상륙하고, 포교할 수 있었다. 이를 보아 잉글랜드의 지배계층에 이미 기독교인이 상당수 세를 얻고 있었으며, 다른 지배층 또한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목적으로 개종에 거리감이 없었다는걸 보여준다. 앵글로색슨 침입(Anglo-Saxon invasion)과 에텔버트왕의 세례 사이 시기와 잉글랜드가 공식적으로 로마교회를 떠나있었을 시기에도 기독교적인 문화가 사회 전반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

천주교가 서유럽에 퍼지는 과정은 이러한데,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각지에서 기독교화된 로마인들이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는 곳에 성당을 세우고 그곳 유력자들을 주교로 삼아 이민족 침략자에게 맞서 재산을 기부하여 보호하였고, 각지의 교구에서 서유럽 교회의 중심지인 로마에 정당성을 인정받으려 수위권을 인정한 것이 대략적인 서유럽 교회의 성립사이다. 한편 로마제국은 망했어도 로마 도시는 여전히 부유했기 때문에 각지에 자금을 지원해 주면서 영향력을 키워갔고, 서로마 권역을 벗어난 동방 시리아까지 로마 교회의 자금 지원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12세기 헨리 2세는 교회 재산과 성직자 신분에 대한 이견으로 로마 교회와 대립하였다. 성직자의 범죄를 로마 교회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교회 법원뿐만 아니라 세속 법원에서도 재판할 수 있게 하는 클라렌던 헌장을 제정하려 했던 것. 그러던 중에 왕의 기사들이 헨리 2세의 환심을 살 속셈으로 켄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켓을 살해했고, 이로 인하여 헨리 2세는 교회와 세간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듣게 된다. 이후 일련의 사건에 대해 회개하고 교황에게 용서받는 과정 중에, 교회 재산 관리권과 같은 이권이 어느정도 국왕에게 오는 등 실질적인 권한을 차지하게 되었다.

헨리 3세는 교황청으로부터 십자군 전쟁에 쓸 군자금이 필요하니 잉글랜드에서 세금을 더 걷으라는 요청을 받는다. 교황청은 이런 무리한 과세 요청에 한 술 더 떠서, 잉글랜드에서 세금을 거두었음에도 만족할만한 모금에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헨리 3세에게 예비 파문을 내린다.[47] 이를 고깝게 본 잉글랜드의 천주교 성직자들은 오히려 국왕의 편을 들었다.[48]

14-15세기 백년전쟁 시절에는 천주교 교황청이 로마와 아비뇽으로 갈라져 있었다. 이 시절 잉글랜드 왕국은 로마 교황 쪽으로 줄을 서서[49], 아비뇽 교황을 대놓고 무시하였으며, 대포로 위협하여 도리어 교황에게 돈을 뜯어내기도 했다.

잉글랜드 교회는 종교개혁적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를 이미 14세기에 배출하기도 했다. 위클리프는 그를 따르는 무리인 롤라드(Lollady)파와 함께 천주교 교회의 전통주의, 중세의 스콜라 철학, 그리고 성인 , 성유물, 성해에 대한 공경을 성경에서 서술을 찾아볼 수 없고 성서상 기독교 교리와도 충돌하는 미신으로 보아 비판하며 성경 중심의 신앙을 주장했고 이를 강조하려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고[50] 성체성사의 화체설[51], 교황의 수위권 등 교회제도 등에 대해 강한 비판을 했었다. 이는 후대 얀 후스종교개혁 시기 마르틴 루터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로마 교회에서는 1378년 당시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에게 위클리프를 체포하여 정죄할 것을 요구했으나, 리처드 2세는 이 요구를 무시했다. 이에 로마에선 다시 옥스포드 대학 부총장에게 위클리프 처벌을 지시했지만, 리처드 2세는 이에 앞서 옥스퍼드 부총장을 처벌했다. 30여년 후[52]

그러나 위클리프의 주장은 당시 잉글랜드 교회에서도 비주류였고, 위클리프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극소수였다. 옥스퍼드에서 1381년경 그의 이론을 이단으로 선고했고 런던에서 열린 지역공의회에서도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 위클리프는 궁정에서 나올수 밖에 없었고,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는 왕실에서 하사한 전택이나 그가 소유하고 있던 교구를 팔아 치워야 했다.[53] 위클리프와 위클리프주의자들은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보헤미아의 얀 후스와 패키지로 이단자로 선언되고, 위클리프의 유해는 부관참시 당했다.[54]

그러므로 영국의 종교개혁화의 원인으로는, 단지 종교개혁 당시의 정치적/종교적 지형이 개신교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는 설명이 훨씬 객관성있고 합리적인 주장으로 인정받는다. 영국 교회의 고유성을 강조하려고 길게 써놓은 군주와 교황의 갈등 사례만 하더라도 유럽 다른 나라에서도 중세 내내 있어온 문제다.[55] 이러한 갈등은 천주교 신심이 각별했던 에스파냐나 프랑스에서도 있었다. 이를 영국인의 종교개혁 기질로 연결시키는 것은 결과론적 오류이다. 14세기에 종교개혁적 원류로 평가받는 위클리프를 배출하기 전까지는 잉글랜드 교회가 유럽 대륙의 다른 나라들의 교회들과 의미 있는 차이점을 보이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 위클리프의 주장마저도 당시 잉글랜드 교회에서 주류가 아니었으며, 위클리프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소수였다.

또한 헨리와 엘리자베스의 종교 정책에 민중의 반발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헨리 8세의 경우는 대규모 봉기인 '은총의 순례'에 직면했고 엘리자베스 1세 역시도 1569년에 천주교도들의 대규모 봉기를 맞이했다.

결국, 성공회는 종교개혁 당시 잉글랜드 내의 천주교 교회가 로마의 치리를 벗어나 국교화하는 정치적인 상황 가운데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으로 봐야 한다.

2.4. 헨리 8세의 종교개혁

  • 헨리 8세의 아들낳기 염원과 이혼 문제는 헨리 8세와 연관 항목을 참조하면 될 것이고, 이하 종교개혁과 관련된 내용을 설명한다.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은 교리나 신앙을 체계적으로 바꾼다기보다는, (잉글랜드 내에서) 교회 조직의 수장을 국왕으로 바꾼다고 선언한 것에 가까웠다.[56] 교황이 명목상으론 서방 교회 전체를 주관하는 권한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 이탈리아신성로마제국을 제외하면[57] 세속 군주에게 교회 조직의 운영을 위임했었다. 잉글랜드, 프랑스[58]와 같은 국가들은 독자적으로 주교를 임명하고 추기경이고 대주교고 간에 멀리 있는 교황보다 왕의 신하라는 인식이 강했다.

물론 성직자들은 평신도인 왕이 재판할 수 없는 신분으로 이론상으로는 중세 시기 왕이 마음대로 재판할 권한이 없었고, 교회에 조직에 관한, 그리고 교회에서 주관하는 관혼상제는 성직자들이 왕에게 이견이 있을 경우 교황에게 항소할 수 있었는데, 거의 사문화 되었던 로마 교회의 이 성직자 신분에 대한 재판 관할권, 잉글랜드 교회에 관한 처분을 잉글랜드 외 다른 조직에 대한 상소권을 반역으로 선언한 것... 이것이 곧 수장령 (Acts of Supremacy, 首長令)이다.

헨리 8세는 수장령과 이의 후속 법령인 반역법(Treasons Act)를 근거로 토마스 모어와 존 피셔를 처형시켰다.[59]

잉글랜드에서도 종교 개혁이 본격화 되자, 도처에서 성직자를 중심으로 반정부 봉기가 일어났다. 성직자들의 반발에는 신앙보다는 경제적 문제가 크게 작용했다. 성직자들이 봉기를 일으켰던 주요 이유는 정부의 개혁 정책으로 여러 교구들을 소유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에 대해 대중들의 최초 반응은 냉담한 편이었다. Peter Cunich 교수가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수도원 폐쇄 및 옛 전례의 변화[60]는 대중들에게 상당한 상실감을 남겼다. 이 영적 공허감을 새로운 프로테스탄트 교리가 대체하기까지는 수십년의 긴 세월이 걸렸다. 1000년 가까이 믿어온 종교를 국왕의 이혼을 위해 하루아침에 바꾸라고 했으니 당연히 반발이 극심할 수 밖에 없었다.

성공회를 만든 헨리 8세의 원래 의도는 어디까지나 캐서린과의 이혼을 위해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간섭 받지 않는 교회 조직을 만드는 것이지, 잉글랜드 교회 체제 전체를 전복시키려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 개혁을 움직인 성직자들도 급진적인 개혁보다는 잉글랜드 교회만의 독자적인 신학을 정립하려는 의도였기에 초기 성공회는 천주교적인 외적 요소들에 루터회장로회의 교리를 조금 첨가해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5. 헨리 8세 이후

헨리 8세 사망 이후 잉글랜드 교회는 한동안 혼란을 겪게 된다. 유일한 아들 에드워드 6세 시절 에드워드의 외가를 비롯한 대륙의 복음주의 성향 신하들이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다시 헨리 8세 시절 천주교로 거의 회귀한 잉글랜드 교회를 대륙에 영향을 받은 개혁주의 신학의 영향을 깊게 받게 된다. 에드워드가 요절하고 이혼의 원인이 된 아라곤의 캐서린의 딸인 메리 1세 시대가 열렸다.

메리 1세는 개신교에 대한 박해 때문에 전통적으로 '블러디 메리'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 잘 알려져있다. 메리가 국교를 가톨릭으로 되돌린 것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스른 것이었으며, 또한 펠리페 2세와의 부부동군연합은 스페인의 광신적 신앙에 잉글랜드를 무방비로 노출시켰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해석은 전통적으로 영국 사학계를 지배한 휘그 사관(Whig history)에 기반해있다. 휘그 사관은 입헌군주제, 의회민주주의, 개인의 자유를 위한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영국 역사를 바라보며 이의 원동력을 영국의 프로테스탄트화로 해석한다.

그러나 오늘날 사학계에서 메리 1세에 대한 휘그 사관적 해석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러한 해석의 기반이 된 휘그 사관은 1950년대부터 시작된 일련의 비판으로 사실상 학계에서 퇴출되었으며, 현재 학계에서 결정론적 사관을 조롱하는 의미로까지 쓰이는 실정이다. 메리가 엘리자베스보다 더 광신적이였다고 볼 근거는 없으며, 메리를 역사 앞의 반동으로 보는 시각은 근래의 사학계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메리의 숙청을 '케케묵은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자행된 한풀이'라고 보는 견해는 16-17세기 유럽 정치역학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17세기까지도 종교적 이데올로기는 반란 세력과 국가 양쪽 모두에게 이용된 막강한 것이었고, 종교적 탄압은 정치에 뗄 수 없는 것이었다.

메리 1세의 여왕 즉위 당시 아일랜드가톨릭, 잉글랜드런던성공회로 칼같이 나뉘지 않았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메리 1세 즉위시 잉글랜드 인구는 여전히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였으며, 프로테스탄트 인구는 가장 강성한 런던에서도 대략 3분의 1로 추정되며.[61] 켄트 지역에서도 개신교의 위치는 잘해야 상당한 규모의 소수파(significant minority)였다. 아직 성공회는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고 헨리 8세가 매각한 수도원 토지를 구입한 귀족들은 성공회를 지지했지만, 인클로저 운동의 진행으로 땅을 잃고 수도원으로부터 구빈 등의 혜택을 받던 민중들 입장에서는 전혀 아니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메리 1세 즉위 당시의 잉글랜드는 가톨릭 국가였다는게 현 학계의 중론이라는 점이다. 헨리 8세 말년에 벌어진 '은총의 순례' 같은 대규모 반란은 당시 전반적인 민심이 헨리 8세의 개혁에 그닥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증거다. 최근의 연구들은 중세 말 잉글랜드의 가톨릭 교회가 필연적인 종교개혁으로 이어질 만큼 부패한 것은 아니었다고 보고 있다[62]

그리고 블러디 메리론을 미는 쪽에서는 종교를 이유로 처형당한 숫자가 엘리자베스가 훨씬 적다면서 옹호하는데, 당대 잉글랜드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평가이다. 잉글랜드, 아일랜드, 네덜란드에서 개신교도들은 가톨릭 신자들, 특히 사제들을 사형에 처했다. 다만 신앙 때문에 고통받는 신교도들의 도덕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이단'보다는 '반역죄'를 공식적인 처형 이유로 들곤 했다.

즉 공식적으로 이단 혐의로 처형 받은 숫자를 가지고 메리가 엘리자베스보다 더 광신적이라고 보는 것은 넌센스에 불과하다. 이 논리를 똑같이 적용시킨다면, Ronald Hutton 선생이 지적하듯, 메리 1세는 그 치세 중 종교를 정면에 내건 민중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던 유일한 튜더 군주였다.[63] 즉 '공식적인' 이단혐의로 몇명이 처형받았는지, '공식적인' 종교 슬로건으로 몇 건의 반란이 일어났는지를 거론하며, 군주의 광신성을 논하기는 어렵다. 실질적으로 군주들의 신앙에 몇 명이 이단 혐의로 처형되었는지는 여러 논란이 있으나, 메리가 엘리자베스보다 더 광신적이라는 평가를 들을 근거는 없다. 오히러 Hutton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처형당한 가톨릭 신자의 대다수는 단지 가톨릭 신앙을 지속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음을 지적한다.[64]

엘리자베스 1세가 가톨릭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즉위 초창기'에 국한되었던 일이다. 재위 10년쯤이 넘었을때, 가톨릭 세가 강했던 잉글랜드 북부 지역에서 가톨릭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엘리자베스는 대대적인 학살로 답한다. 문제는 반란을 주도한 귀족들과 그 지지자들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던 그 지역 민중들에게까지 가혹한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인데, 최소한 700명 이상이 처형당했고, 당시 북부 잉글랜드에서는 교수형당한 시체가 걸리지 않은 마을이 없었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엘리자베스가 메리보다 종교적 이유로 사형을 덜 시켰다'는 주장은 이런 학살의 희생자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주장이다(K. Kesserling, Northern Rebellion, 2007).

또한 엘리자베스는 라틴어 미사를 드렸다는 이유만으로 교수척장분지형을 허가하고, 가톨릭 사제를 숨겨줬다는 이유로 요크의 가톨릭 신자 여성의 허리뼈를 부러뜨려 죽이는 등(이 여성의 집은 현재 '순교자의 집'으로 지정되어 있어, 요크에 갈 경우 방문이 가능하다) 처형의 잔인성 면에서는 메리 시대의 화형보다 하등 나을게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시기 추진된 종교개혁으로 인해 잉글랜드 교회가 가톨릭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입증하는 근거다. Peter Cunich는 [65] 대중들이 느낀 상실감과 옛 전례에 대한 향수, 영적 공허감이 프로테스탄트의 이신칭의 교리와 예정설 등으로 채워지기까지는 수십 년의 세월이 걸렸음을 지적한다. 잉글랜드의 개신교화는 대단히 점진적으로 진행되었으며, 메리는 단명하고 엘리자베스는 장수한 것이 잉글랜드가 성공회 국가가 된 주요 요인이었던 것이다.

메리 1세의 뒤를 이은 엘리자베스 1세는 즉위 초기에는 가톨릭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냈다. 그녀 역시 잉글랜드 성공회 교도들의 소망과는 달리 가톨릭 교회의 전례를 그대로 유지하고, 스페인을 비롯한 가톨릭 국가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1558년 2차 수장령을 내려서 잉글랜드 국교회의 수장직을 자발적으로 포기했다. 이로 인해 엘리자베스1세는 1570년까지 12년 넘게 가톨릭 교회에서 파문을 받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 시기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개신교 탄압 성향과 이단에 대한 무관용 원칙을 주장하던 교황 바오로 4세 시기였다. 이것은 정치적 고려도 작용했지만, 교황청에서 엘리자베스 1세의 종교 정책을 보고 잉글랜드 국교회가 언제든지 가톨릭으로 복귀가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가톨릭 탄압은 형부였던 펠리페 2세의 잉글랜드 침략 시대로 유발되었다. 열성적인 성공회 교도들은 가톨릭 사제들의 축출을 시도했고, '가톨릭교도는 매국노이며 외세의 앞잡이다'라는 식의 중상모략으로 가톨릭교도들을 공격했다.

1570년 교황은 엘리자베스 1세와 잉글랜드 왕국이 가톨릭으로 복귀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고 그녀를 파문한다. 스페인의 침공이 임박하자, 엘리자베스 1세는 이에 대응하여 헨리 8세 시절처럼 1584년 종교적인 일로 로마 교황청에 상소(上訴)하는 법을 폐지하고, 가톨릭 교회의 사제를 반역자로 정죄하고 벌한다는 법을 제정하며 가톨릭 탄압 국면으로 전환했다.

올리버 크롬웰 시대에는 청교도가 권력을 잡게 되어[66] 보수적인 장로회 문화로 주교제가 폐지되고 칼뱅주의에 영향받게 된다.

왕정 복고 이후로는 독립파 청교도[67]들이 숙청되고 찰스 2세~제임스 2세 시기 천주교 용인 정책으로 다시 기존 국교회 성향과와 개혁파 복음주의 성향 신도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1688년 명예혁명으로 제임스 2세가 쫓겨나자 윌리엄 3세의 관용 조치로 영국 국교회 39개 신조에 위배되지 않는 이상 국교회를 제외한 다른 개신교 교파에 대해서 불이익을 폐지하게 된다.[68] 사실상 청교도들에 대한 조치였으나 이미 청교도들은 왕정 복고 시기 네덜란드나 신대륙으로 많이 이민을 가서 크게 의미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천주교교도 차별 정책은 19세기까지 지속된다.

3. 특징

한마디로 'Via Media'(중용의 길)로 표현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위에 기술한 역사적 배경처럼 잉글랜드 교회가 종교개혁을 바탕으로 국가교회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성공회의 탄생은 갑작스러운 사건이었고, 이로 인해 독자적이고 극단적인 교리보다는 기존 종파에서 좋은 것을 취해서 받아들인다는 식으로 교리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던 탓에 성공회는 개신교 종파 중에서는 비교적 온건한 종교로 자리잡았다고 평가받는다.

성공회는 신앙의 세 가지 기준으로 '성서', '전통', '이성'을 제시한다. 성공회 역시 종교 개혁의 후폭풍으로 탄생한 만큼 '성서'의 권위를 가장 중요시한다. 또한 교회 공동체가 함께 공유하고 판단하는 '이성'이 전통보다 앞선다고 본다. 성서에 대한 이성적 작업으로 축적된 신앙의 결과물이 '전통'이라고 본다.

성공회는 신앙의 세 가지 기준인 성서와 이성과 전통의 상호 보완과 긴장 관계를 통해 극단적인 주장과 오류를 경계하는 '중용'의 정신을 구현하는데 중점을 둔다.[69]

3.1. 성공회의 세 흐름

성공회 내에는 크게 고교회파(앵글로천주교), 저교회파(복음주의), 광교회파(자유주의)라는 세 가지의 흐름(분파)가 있다. 본 문서에 나온 구분은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편의상 나눈 것이며,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18세기, 경직되었던 영국 성공회에 존 웨슬리 등을 필두로 한 복음주의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 당시 천주교적인 형식과 보편교회로서의 전통을 고수하던 부류에서 '우리가 고교회(high church)고 복음주의에 영향을 받은 너희들은 저교회(low church)다.'라며 만든 용어가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당시 존 웨슬리의 신학이나 조지 휫필드 등의 청교도 복음주의의 영향을 받은 성공회 신자들 중에 성공회에 남은 부류가 저교회파가 되었고, 성공회를 나간 부류가 감리회를 세우게 된다. 또한 20세기 들어 성공회 내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사회 참여를 강조하는 부류가 생겼는데, 이들을 광교회파(broad church)라 한다.

물론 다른 개신교 교파와 마찬가지로, 교회 마다 고교회파/저교회파/광교회파로 엄격하게 나누어져 있는 경우는 드물다.

3.2. 다른 개신교 교파와의 비교

성공회 역시 가톨릭 교회로부터 갈라져 나온 개신교 교회 종파에 속한다.

대부분의 개신교와 달리, 신자들이 세례명을 가진다.

천주교나 정교회와는 달리, 성공회는 7성사중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를 제외한 5성사를 신앙생활의 필수요소로 보지 않는다. 대부분의 개신교 종파는 이 5성사를 비성경적이라고 보아 거부하고, 성공회는 교회의 전통으로서 이를 존중하되, 신앙 생활의 핵심으로 보지는 않는다.

구원론에서는 칼뱅주의의 영향으로 온건한 예정설을 받아들인다. 이 부분에서는 장로회와 교리를 공유하는 셈.

루터교회와 함께, 공식적으로 [성모마리아] 공경을 인정하는 개신교 종파에 속한다. 성공회는 옥스포드 운동 이후 가톨릭식 관습을 대거 복구시켰고 성모 마리아를 위대한 신앙의 모본으로 보며 신앙을 본받지만, 성모 자체를 기도의 대상으로 보지는 않는다. 무염시태와 몽소승천도 다른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 통공기도 중보자 역할을 부정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70]

앞서 이야기한 성공회 특유의 정신인 'Via Media'에서 알 수 있듯이 '중용'의 자세를 중시해 가톨릭칼뱅주의 개신교를 포함한 여타 개신교나 정교회 간 균형점을 추구하고, 모든 기독교 종파에 대한 관용을 추구한다. 교리 해석에 있어서도 다른 개신교 종파에 비해 온건한 경향을 보인다.

대한민국의 경우, 한국의 개신교가 근본주의 색깔이 강한 것과 대조적으로 성공회는 성향이 비교적 온건하다고 평가받는다.

무교회주의에 대해서는, 천주교, 정교회와 마찬가지로 무교회주의를 배격하는 입장에 있다. 성공회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속하는 것을 신자의 의무로 보기에 다른 개신교 종파에 비해 이에 대해서 더 강경한 입장을 보인다.

3.3. 가톨릭과의 비교

다른 개신교 교파들보다 가톨릭과 공유하는 전통이 많다.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신자들이 세례명을 가지는 것이 대표적.

그러나 성공회 역시 엄연한 개신교 종파인 만큼, 가톨릭 교회처럼 하나의 구심점 아래 계서적으로 이루어진 조직이 아니라는 점에서 가톨릭과 분명히 구분된다.

교리 측면에서 볼 때, 장로회가 기존의 천주교적인 요소들 가운데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것들을 모두 폐지한 데 반해, 성공회는 성경과 충돌되지 않는 것들은 유지를 시켰다.

기독교 내에서 성공회의 포지션은 약간 미묘한 면이 있어서 사람들마다 인식이 제각각 조금씩 다르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교리상으로 성공회를 개신교로 간주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다른 개신교 교파의 신자들 사이에서도 성공회 교인들을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 받아들이는 데에 큰 무리가 없다. 그런데 성공회는 전례상 옛 가톨릭식 요소를 유지하고 있어서, 반(反) 천주교 성향이 짙은 일부 개신교인은 성공회를 천주교에 물든 '천주교 2중대' 비슷하게 보는 시선이 있다. 그들은 천주교를 이단으로 보기 때문에 성공회를 보는 눈도 고울 리가 없다.

가톨릭 신자들 중에는 형식적인 면이 닮아있기 때문에 다른 개신교보다 성공회에 친근함을 느껴서 교황이 없는 가톨릭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가톨릭 신자들은 성공회 = 영국 천주교(영국의 천주교)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반면에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은 성공회를 그저 '천주교와 그나마 비슷한 개신교'라고 생각한다. 교파 간 교류에 무관심한 기독교인들 중에는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 있는 독립된 종파'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천주교개신교의 전통을 고루 받아들이는 역사적 배경을 고려해 "성공회는 성공회다."라고 생각하는 부류 또한 마찬가지. 그리고 성공회 신자들 중에서도 이유가 뭐든 자신들의 교회를 그렇게 정의하는(혹은 그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성상을 용인하는 것도 가톨릭과 비슷해 보이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39개조 신조에서부터 성상이나 묵주와 성인 공경 등에 대해 부정하는 조항이 있지만, 앞의 주석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이 39개 신조는 옥스퍼드 운동을 거치면서 사실상 사문화된 조항이 되었기에 성공회 성당에 가면 성상을 쉽게 볼 수 있다. 물론 저 신조를 철저하게 지켜서 십자가에 촛대만 올려놓는 등의 간단한 인테리어를 가진 교회도 볼 수 있긴 하나[71] 전체적으로 고교회파, 광교회파 성향이 강해진 현대에는 흔하지 않다.

영미권의 일부 고교회파에서 치루는 성모상 행렬

성공회는 보편교회임을 주장하지만, 가톨릭 측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72] 교황 레오 13세는 성공회 사도계승의 단절을 공식적으로 선포했고, 이는 현재까지도 철회되지 않은 상태다.

천주교과 대비되는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정교회처럼 신부성직자들이 혼인 가능하다. 그러나 정교회 주교는 미혼자만 가능하지만[73] 성공회는 혼인한 성직자도 주교가 될 수 있다. 예컨대 2015년 현재 세계성공회의 선임자이며, 영국 성공회의 대표자인 캔터배리 대주교 저스틴 웰비는 결혼했고 아이도 6명이나 있다. # 참조. 그러나 성공회 역시 수도자의 혼인은 인정하지 않는다. 수도자신부인 경우에도 마찬가지.

교회에 따라서, 여성 신부를 인정하는 곳이 있는 것도 가톨릭과의 차이점이다. 비슷한 경우로 일부 국가에는 커밍아웃동성애자 신부를 인정하기도 한다. [74]

성공회는 가톨릭처럼 성직자 직제를 인정하면서도 만인신부주의를 부정하지 않으므로 평신도-신부, 하급 신부-상급 신부 간 '순명권'의 개념이 가톨릭에 비해 약한 편이다. 또한 성공회 교회법은 천주교 교회법[75]에 비해 짧고, 덜 치밀한 편이다.[76]

개신교 목사가 천주교로 옮기면 천주교의 신부가 될 수 없고 그저 평신도만 되지만[77], 성공회 신부주교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신부서품을 다시 받으면 천주교의 신부가 될 수 있다. 성공회의 성직자 중 남성 기혼자, 남성 미혼자가 가톨릭으로 개종해도 신부직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특례를 받고 있다.[78] 당연하겠지만 여기에는 성공회 여성 성직자 출신 개종자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 이러한 특례는 교황의 사목적 배려와 그동안의 천주교-성공회 간 교류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천주교로 옮긴 성공회인 중 가장 유명한 존 헨리 뉴먼(성공회 주교 출신)은 이후 추기경직에 올랐고,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은 존 뉴먼 추기경에 대한 시성을 승인했다.[79]

반대로, 가톨릭이나 정교회 등 사도전승을 계승받았다고 주장하고, 역사적 주교제도를 유지해온 교단 출신 성직자들이 성공회로 옮길 때 성공회에서는 그 성직을 인정한다.

사회 문제 참여, 정치 참여 문제에서 가톨릭과 사뭇 다른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 가톨릭 교회는 성직자가 세속 권력을 얻는 것(의회 진출 등)을 제한하지만(교황의 승인을 요함), 성공회는 다른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제한을 두지 않는다. 애초에 캔터베리 대주교 등 영국 성공회 내 특정 고위성직자들은 영국 상원의원을 겸직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이재정 신부가 성직자의 세속 정치 참여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물론 정치계에 진출한 성공회 성직자의 성직은 휴직 처리된다.

위와 같이 성공회는 겉으로는 천주교와 닮은 점이 꽤 보이면서도 디테일한 부분으로 들어가면 다른 점들이 존재한다. 개신교에서는 보수적인 입장[80]의 신자일수록 성공회를 (부정적인 의미로) 천주교에 가깝게 본다.

정리하자면, 성공회는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 종파 중에서 가톨릭과 가장 비슷한 교회라고 볼 수 있다.

4. 조직

가운데에 있는 안경 낀 백인은 로완 윌리엄스 전 캔터베리 대주교이고, 맨 오른쪽의 동양인은 박경조 프란시스 전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장 주교이다.

천주교와 비슷한 하드웨어 때문에 '잉글랜드 국교회(Church of England)'[81]가 성공회의 수위권을 지닌 것처럼 오해하기 쉽지만, 다른 개신교 종파와 마찬가지로 성공회 교회들은 모두 상호병렬적 수평 관계이다. 공동체 내에서 역사적 대표성을 지닌 점을 빼놓고는, 어디까지나 '잉글랜드 국교' 역시 '세계 성공회 공동체(Anglican Communion)'의 일부이다

간혹 천주교 신자들이 세속적 정치체제로는 자국에 충성하나 신앙적으로 바티칸 아래 있는 것처럼 성공회도 잉글랜드 국교회 수장인 영국 왕실의 통제를 받는 것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16세기 헨리 8세 시절 수장령 선포 후 잉글랜드 교회를 국가교회화시켜 영국 내에서의 교황의 지위를 왕에게 귀속시킨 사건 이후 이후 역사에 대해 잘 알려지지 못했기 때문에 성공회를 믿으면 영국 여왕을 섬기냐[82]라는 농담을 듣기도 한다고.

성공회는 영국만의 국가교회라는 영국 국교회라는 명칭도 1846년부터 보편교회를 추구하는 성공회로 바뀌었다. 그리고 앞서 서술하다시피 잉글랜드 성공회는 여타 다른 성공회와 수평 관계이며 수위권 같은 것은 없다.

영국 국왕은 성공회의 수장이 아니며, 잉글랜드 성공회의 수장조차도 아니다. 영국 군주가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직을 포기한 것은 비교적 최근도 아니고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 시절부터이다. 교황 수위권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천주교 교리[83]를 지지한 헨리 8세 시절 수장령(Acts of Supremacy)을 내려서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首長, Supreme Head)임을 선언했는데 이는 캐서린과의 이혼을 위한 정치적인 행위에 불과했다.[84]

성공회는 역사적으로 이어오는 주교에 의해서 치리(治理) 되는 지역/국가별로 독립적인 성공회 관구들이 공통의 신앙을 가지고 연대한 조직으로 이를 통해 성공회는 스스로를 보편교회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공회의 출발점이자 지금도 영국 성공회의 정신적 수장인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전체 세계 성공회 공동체의 정신적인 지주로 의장 주교의 역할을 수행하며 전체 성공회 입장을 조정한다. 이런 점 때문에 운영방식은 10개의 독립교회를 중심으로 각 교회의 최고 주교가 각 지역에서만 자치권을 행사하며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하는 동방정교회의 운영과 매우 흡사하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특별히 세계 성공회 공동체의 일치를 위한 노력의 의무를 지녀 10년마다 전체 성공회 주교들의 회합인 '램베스 회의'를 주관한다. 어디까지나 의장 주교이며 정신적인 수장을 맡는다는 점에서 수많은 지역 성공회들에 권고와 자문 정도만 할 뿐이지 그 역시 캔터베리 관구를 제외한 다른 성공회들의 신학, 조직, 재정 등의 문제를 치리할 권한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 관구가 하나의 독립 교회로 역할하기 때문에, 비록 10개로 나누어져 있다곤 해도 어느 정도 계층적인 시스템을 구축한 동방정교회에 비해 지역 교회에 독립성이 더 크며 이론적으로 같은 나라에 있어도 관구가 다르면, 다른 지역 교회와 별도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며 나아가 다른 성공회 공동체와 교제를 단절할 수도 있다. 애초에 램베스 회의의 결정사항도 권고사항이지만, 의무사항은 아니다.

실제로 미국 성공회가 동성애자 신부 진 로빈슨(Gine Robinson)을 주교로 서품하자 이에 반발하는 보수적인 교구들이 전부 미국 성공회 관구를 탈퇴하는 일이 벌어지고 새 관구를 독자적으로 만들었다. 또한, 이후 있었던 램베스 회의에서 보수적인 교구들이 전부 불참을 선언하는 일이 빚어졌다. 교구-관구-교황청 순으로 계층적 제도를 이루는 천주교에서 일개 교구가 공동체를 탈퇴한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이러한 분권화 경향에 캔터베리 대주교도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세계 성공회 공동체 계약서'를 전 관구에 배부하여 이를 승인하여 공통적인 신앙과 교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만, 이 성공회 계약서는 성향에 관계 없이 많은 관구들의 비판을 받은 바 있다. 개신교 종파로서 갖는 필연적인 분열성 사이에서 단일 종파로서의 성공회를 지켜나가기 위해, 성공회는 교리 해석에 더욱 온건한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대응하고 있다.

5. 세계 성공회

5.1. 캔터베리 대주교

캔터베리 대주교는 잉글랜드 교회의 최고 성직자요, 전 세계 성공회의 일치의 상징으로서, 세계성공회공동체(Anglican Communion)를 대표한다. 잉글랜드 교회를 치리하고, 세계 성공회 주교 회의인 램버스 회의를 주최하며, 잉글랜드 밖 성공회에 사목적 권고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캔터베리 대주교는 천주교교황처럼 교회의 수장(supremacy) 노릇을 하지는 않는다. [85]

  •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노: 일반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라 알려진 교부시대 히포의 아우구스티노와 다른 인물이다. 로마 출신으로 서기 597년 교황에 의해 잉글랜드에 파송된 초대 캔터베리 대주교. 천주교성공회에서 성인으로 본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605년에 선종하였다.
  • 아엘프라이: 앵글로색슨 족 지배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 1012년 바이킹의 침략 때 포로로 잡혔으나, 자신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이 세금을 내게 할 수 없다면서 몸값을 내는 것을 거부, 결국 바이킹들에게 소뼈로 돌팔매질을 당한 뒤 도끼자루로 맞아 죽었다. 바이킹들은 거룩한 이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이 불길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천주교성공회에서 성인으로 본다.
  • 토머스 베케트: 헨리 2세 시절 국왕에게 살해당한 순교자로, 천주교와 성공회에서 성인으로 본다. 헨리 8세 시절 반역죄로 법정에 소환된 일이 있었는데, 그때 베케트는 이미 선종한 지 너무 오래되어서 출석할 수 없는 상태였다. 뼈밖에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헨리 8세는 베케트의 무덤을 파헤쳐 유해를 흩뿌리도록 명령하였다. T.S. 엘리어트의 "대성당의 살인"에도 등장한다.
  • 토마스 브래드워딘: 아우구스티노학파 신학자로 대주교에 재임한건 겨우 38일에 불과하다(흑사병으로 별세). 사실 천주교 시대에 재임하기는 하였으나, 존 위클리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마르틴 루터 신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반펠라기우스주의[86]에 경도되어 있던 당시 신학계에 맞서 구원은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주어지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1290년 태어나서 1349년 선종하였다.
  • 토마스 크랜머: 전례 개혁자, 종교개혁 순교자. 성공회 기도서 편찬에 크게 기여하였다. 성공회의 성인이라서 순교일인 3월 21일을 잉글랜드 성공회에서는 축일로, 대한성공회에서는 기념일로 지낸다. 물론 토마스 크랜머를 세례명으로 쓸 수도 있다. 1489년 태어나서 1556년 선종하였다.
  • 레지널드 폴 추기경[87]
  • 매슈 파커: 개혁 신학에 따른 성공회 39개 신조를 작성하였다. 1504년 출생하여 1575년 선종하였다.
  • 윌리엄 로드: 고교회파(Anglo-Catholic)로서 성공회(당시 잉글랜드교회)에 가톨릭적 전례와 제의를 다시 도입하였다. 또 개신교도들을 탄압하였다. 1573년에 태어나서 1645년에 선종하였는데 훗날 찰스 디킨스는 "영국사 산책"에서 로드를 포악한 인물이라고 혹평한 바 있다.
  • 윌리엄 템플: 노동운동과 교회 일치 운동에 헌신하였다. 당시 비단 성공회 신도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1881년에 출생하여 1944년 선종하였는데 최초로 화장된 캔터베리 대주교이기도 하다.
  • 지오프리 피셔: 방한하여 대학로교회(당시 성베다교회) 성당을 축성하였다. 세계 교회 협의회 총장을 맡기도 했다. 때문에 세계 교회 협의회를 반대하는 일부 개신교인들이, 피셔 대주교가 프리메이슨 회원이라는 낭설을 유포하고 있으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88]
  • 마이클 램지: 1973년 방한한 이력이 있다. 방한하여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예방하고 동국대학교에 가서 불교계 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 도널드 코건: 1909년에 출생하여 2000년에 선종하였다. NEB 성경(The New English Bible) 번역에 참여하였다.
  • 로버트 런치: 1921년 태어나 2000년 선종하였다. 자유주의적 고교회파(Liberal Anglo-Catholic)로서 교회 일치 운동에 헌신하였다.
  • 조지 캐리: 1935년생이다. 캐리 대주교 때에 잉글랜드 교회에서 처음으로 여성 사제를 서품하였다.
  • 로완 윌리엄스: 웨일스 사람이다. 장로교 출신으로, 자유주의적 고교회파(Liberal Anglo-Catholic)다.[89] 104대 캔터베리 대주교.
  • 저스틴 웰비: 런던 사람이다. 이튼 칼리지[90] , 케임브리지 대학교 졸업. 성직 입문 전에는 정유회사 임원으로 일했다. 현임 캔터베리 대주교(105대).

5.2. 영국 및 아일랜드의 성공회

5.2.1. 잉글랜드 국교회[91]

Church of England.

홈페이지

잉글랜드 국교회 주교회의 인준 성경 목록

105대 캔터베리 대주교인 저스틴 웰비 주교 서품 및 교구장 승좌식 주요 장면 (2013년 영국 BBC 생중계)

성공회의 모체로 간주되는 교회.

이름대로 잉글랜드를 담당하는데 잉글랜드 이외에도 웨일스 일부 지역[92], 영국 왕실령맨 섬채널 제도, 유럽 대륙[93]모로코를 직접 관할한다. 아무래도 유럽 본토에는 성공회 신자가 적다 보니 이렇게 관할 범위가 넓어진 것.[94] 대한성공회도 1993년 정식으로 한국 관구(province)가 성립되어 독립하기 전에는 잉글랜드 성공회의 캔터베리 관구 소속이었다.

관구(province)는 캔터베리와 요크 둘이 있다. 캔터베리 관구는 잉글랜드 남부, 웨일스 일부, 채널 제도, 유럽 대륙·모로코(지브롤터 교구 관할)를 커버하며 30개의 교구(diocese)가 있다. 대한성공회의 경우 한국 관구가 독자적으로 설치되기 전까지는 캔터베리 관구 직할 구역이었다. 요크 관구는 잉글랜드 북부와 맨 섬을 담당하며 12개의 교구가 있다. 캔터베리 대주교가 잉글랜드 국교회의 지도자이면서 세계성공회공동체에서 명목상 지도자로 간주된다. 잉글랜드 내 성공회 교구들은 원래는 천주교 산하 교구였지만[95], 잉글랜드 국교회가 형성되면서 천주교에서 떨어져나갔고 영국 천주교는 교구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 고역을 겪기도 했다. 천주교 교구의 복설은 천주교 금지가 풀린 19세기에 이루어졌다. 예를 들자면, 종교개혁기에 런던 교구가 성공회로 넘어가면서 천주교 측에서는 런던 지역을 관할하는 웨스트민스터 교구를 새로 만들어야 했다는 것.

영국 법률적으로도 아예 잉글랜드 국교회가 잉글랜드의 국교(established church)로 지정돼 있다. 그래서 국회 귀족원(상원)에 아예 캔터베리 대주교 등 고위 성직자들이 의원으로 임명된다. 이런 성직자들을 성직귀족(Lord(s) Spiritual)이라고 부르며 2015년 현재 총 26명이 있다. 당연히 성직자가 정치인처럼 의석을 갖는 데에 대한 비판 여론은 존재한다. 하지만 귀족원의 의석이 800석이 넘을 정도로 워낙 많아[96] 이들의 의석 비중이 적다. 그리고 현대 영국에서는 귀족원이 평민원(하원)의 보조 기관으로 전락한 지 오래이며[97] 성직귀족들이 정치 현안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피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구조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이 있다는 정도지 여론의 거센 반발이 일어나는 건 아니다. 여론의 격렬한 반발이 있었으면 예전에 이들의 의석이 폐지되었을 것이다. 다만 상원 개혁론이나 폐지론이 계속 있기 때문에 이 의석이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미지수이다. 만약 상원의 모든 의석을 선거로 뽑는 식으로 바꾸거나 아예 폐지한다면 성직귀족 의석 또한 사라질 것이다. 물론 상원 개혁을 하더라도 선거로 뽑지 않는 소수의 의석을 남겨놓는다면 이들의 의석이 남을 수는 있겠다.[98]

여담으로 잉글랜드 국교회에서는 KJV, RSV, NRSV, NIV, REB, NJB, ESV 성경을 전례용으로 인정하고 있다.출처(잉글랜드 국교회 주교회의 2002년도글) 일반적인 전례용으로는 NRSV 영국버전이 많이 쓰이고, 국가적인 의전 행사에는 KJV가 쓰인다.

전체 잉글랜드에서만 2011년 기준 전체 기독교인 인구는 59.4%이다. 세례교인수로만 보면 성공회 교도는 약 2500만 천주교 신도는 960만 정도라곤 하는데 잉글랜드-웨일즈[99] 에서 성공회 교도수가 50%정도여야 하나, 둘다 세례만 받고 실제로는 무종교이거나 냉담자 인구가 많아서 실제 신자는 더 적다.천주교에선 성공회와 인구가 비슷하다고 주장하나 실제론 영국 전체로나 잉글랜드로만 보나 8% 정도이다. 실제 조사로만 보면 영국 전체의 성공회 교도수는 860만 천주교는 400만 정도이다. 전체 영국 전체 센서스 통계를 보면 영국 전체 인구에서 성공회 신자는 2015년 기준으로 17% 정도이다.

참고로 2009년 기록과 비교해 볼 때 영국 전체에서 성공회(19.9→17%)와 천주교 인구(8.6%→8%)는 계속 줄어드는 추세이다. 그런데 개신교 타교파(14%→17%)와 이슬람은 늘었는데 특히 이슬람 인구는 두 배 이상 늘어나는 추세고(2.4%→5%) 무종교 인구는 의외로(?) 정체내지 약간 감소 추세.(50.7%→49%)

또한, 영국 성공회에서도 세속화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서 영국 내의 새로운 선교적 교회 운동을 '교회의 새로운 표현들'이라고 명하여 젊은층을 교회로 끌어들기 위한 각종 시도를 하고 있다. 교회의 새로운 표현들은 과거 교회를 다녀본 적이 없는 비신자들의 편의와 변화하는 문화, 지역사회 선교를 고려한 새로운 교회 형태다. 여기에는 카페 교회, 청소년회관 교회, 길거리 교회, 숲 교회, 술집 교회 등이 있다.

5.2.2. 웨일스 성공회

영어: Church in Wales

웨일스어: Yr Eglwys yng Nghymru

홈페이지

웨일스 대부분을 담당하는 성공회 조직. 웨일스 성공회에서 관할하지 않는 일부 지역은 잉글랜드 국교회의 캔터베리 관구에 속해 있다. 웨일스 성공회 산하의 교구는 6개가 있다.

웨일스가 잉글랜드의 지배를 오래 받았던 탓에 웨일스만의 성공회 조직이 원래는 없었다. 그러다가 1920년에 별도의 교회로 분리되었다. 이때부터 웨일스는 국교로 지정된 종교가 없다.

5.2.3. 스코틀랜드 성공회

영어: Scottish Episcopal Church

스코틀랜드 게일어: Eaglais Easbaigeach na h-Alba

홈페이지

스코틀랜드를 담당하는 성공회 조직.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동군연합 단계를 넘어서 완전히 한 나라로 합병한 시기의 군주였던 앤 여왕이 공식 설립자로 되어 있다.[100] 산하 교구는 7개가 있다.

참고로 Church of Scotland는 여기가 아니라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신도가 많은 장로회이니 주의.

최근 다양성이 너무 지나쳐서 물의를 빚었다. 스코틀랜드 성공회 교회의 주일 감사성찬례에서 꾸란 낭독을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부인하는 내용이라서 영국 내 보수적인 성공회 인사들이 비판했다. 일단 보도에 의하면 성당 신부의 허락으로 했는지는 확인해주지 않았고 영국 성공회 측은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꾸란을 낭독한 사실을 옹호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선포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스코틀랜드나 잉글랜드 성공회는 물론이고 유럽에서도 난민들이나 이슬람 교인에게 평일에 교회를 빌려주는 경우는 있지만 아무리 상대 종교를 이해하려는 좋은 의도임에도 예배 중에 기독교의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게 내버려 두진 않는다. 만일 저런 사건이 일어난 곳이 천주교나 정교회였다면 주임 신부는 중징계를 면치 못했을 것이고 파문당할 가능성도 충분했을 것이다.

람베스궁 대변인은 스코틀랜드 성 마리아 교회를 고소하겠다고 밝혔으나, 해당 교회는 “우리는 잉글랜드 성공회의 관할권 밖에 있기 때문에 캔터베리 대주교가 사법적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 말대로 잉글랜드 성공회와 스코틀랜드 성공회는 분리되어 있어 실질적인 조치는 할 수 없다.

5.2.4. 아일랜드 성공회

영어: Chuch of Ireland

아일랜드어: Eaglais na hÉireann

홈페이지

아일랜드 섬 전체, 즉 현재는 독립국인 아일랜드 공화국과, 영국에 남아 있는 북아일랜드 모두를 담당하는 성공회 조직이다.[101] 성공회를 세운 헨리 8세에 의해 설립됐다. 다만 본래 잉글랜드 국교회 산하에 있었다가 1869년에야 완전히 분리되었다.

2016년 아일랜드 종교 통계(Religions in the Republic of Ireland, 2016)[102]에 따르면 아일랜드 공화국에서 천주교에 이어 2번째로 신자가 많은 교단이다.[103] 북아일랜드에서는 천주교, 아일랜드 장로회[104]에 이어 3번째로 신자가 많은 교단이다.[105]

성공회가 오랫동안 영국에 의해 강제로아일랜드의 국교였던 탓에 아일랜드 내에서 천주교가 우세함에도 불구하고 몇몇 오래된 주요 성당들은 아일랜드 성공회 소속으로 돼 있다. 예를 들어 더블린 시내에 있는 크라이스트 대성당과 성 패트릭 대성당[106]은 아일랜드 성공회 소속이다. 물론 성공회 형성 이전에는 천주교 소속이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웃기게도 천주교 더블린 대주교는 주교좌성당(대성당)이 존재하지 않고 임시 대성당만 존재한다.[107]

5.3. 미국 성공회

미국 국립 워싱턴 성당의 부활주일 장엄 예배

Protestant Episcopal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PECUSA 또는 ECUSA)[108]

홈페이지

미국 성공회 공식 인준 성경 목록

미국 성공회[109]의 경우 신자의 수도 많고 메이저 교단에 속했었다. 미국 독립 혁명 당시엔 미국 개신교 최다 교파였기에 WASP로 불리는 백인 주류가 믿는 종교라는 인식이 있었고 상대적으로 기타 교파들보다 지리적으로 남부에 강세를 보였으며 현대와 비교하면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다.[110] 그러나 1960년대 민권운동 시기를 전후해서 진보적이고 광교회 성향으로 급격하게 선회했고 이에 대한 반감으로 백인 신자 수가 많이 감소해서 200만명 미만으로 감소했으며 동성애자 및 트랜스젠더 주교 임명 문제로 보수 성향 성공회 교회와 신자들이 적잖이 탈퇴했다. 현재 미국 성공회는 온건파 리버럴 교단의 하나로 인식된다.

남부에서 강세를 보이고 보수적이었다는 이야기가 현대 기준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을 텐데, 그 시대의 흔적으로 버지니아 주에 성공회 성당이 많이 남아있다. 건축적으로도 알렉산드리아 시에 위치한 그리스도 성당의 사례처럼 달리 장식적인 요소가 없거나 적고 제단에도 단순한 십자가 틀만 세워놓았다는 것이 특징.

한때 미국 내 최다 기독교 교단의 위상을 차지했던 역사는, 워싱턴D.C.에 국립[111] 성공회 성당이 있는 것이나 역대 미국 대통령을 기독교 교파 중 제일 많은 12명이나 배출한 사실 등에서 옅볼 수 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들의 경우 성공회 신자이거나 신자였던 사람[112]들이 대부분이다. 근대 미국 사회의 엘리트들도 성공회 신자였던 경우가 많다.참조 부시 가문도 아버지 부시(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까지는 대대로 성공회였다. 아들 부시도 정치적 평가의 부정적 인식과 달리 종교면에서만 보자면 이슬람을 비롯한 미국 소수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지 않았고[113] 성공회였다가 전 영부인을 따라 연합감리회[114]로 개종한 사례이다.참고1, 참고2

미국 대통령 배출로만 보면 케네디 한명을 빼면 대부분 메인라인(Mainline) 개신교 교단 소속이다. 그렇지만 바이블벨트에서는 남침례회 등 보수 복음주의 성향 개신교 교단이 가장 교세가 강하고 이탈리아아일랜드 공화국 출신 이민자가 많은 북동부에서는 천주교 교세가 강하며 플로리다멕시코 접경지역 역시 히스패닉 인구 증가로 천주교가 강세이다.

미국에서 현재 숫적으로 가장 많고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이 가장 큰 교단은 천주교과 함께 보수적 침례교와 보수적 오순절교회다.[115] 20세기 들어 남침례회 등 보수 복음주의 성향 교단이나 오순절교회나 기존 교단에서 분리된 흑인 교단[116] 등의 교세가 성장한 대신 성공회를 포함한 '메인라인’[117] 교단들은 교세가 많이 감소해서[118] 숫자상 'Main'이라고 지칭할 수 없다.[119] 대체로 메인라인(Mainline) 교단들의 교세가 집중된 미국 동북부와 중서부의 경우 남부와 정반대로 미국에서 교회 출석률이 가장 낮다. 현재 연합감리교(United Methodist Church)를 제외하면 나머지 메인라인(Mainline) 교단의 경우 교인 수가 급속한 감소 추세에 있고 미국성공회(The Episcopal Church)는 이미 타 교단보다 교세가 많이 줄어든데다가 특히 동성 결혼, 동성애자 주교 허용, 낙태 용인 등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또 다시 교단 내에서 이탈자가 많아졌기 때문에 200년전 최대 기독교 교단 지위와 대비되게 교세가 많이 줄어들었다. 20여년전 360만의 신도수를 기록했으나 현재는 180만 정도이다. 인구대비로 보면 한국과 다를 게 없다.

물론 좀 나이드신 분들은 성공회 하면 드레스 셔츠넥타이 매고 네이비색 블레이저와 카키색 드레스 팬츠를 입은 WASP 이미지를 강하게 떠올리는 편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 미국의 젊은 세대는 성공회가 한때 미국에서 거의 국교와도 같은 위상을 가졌다는 것은커녕 성공회가 뭔지도 모르는 경우도 많다. 미국의 경우 75%가 기독교인이라 대답하지만 젊은 세대는 결혼식 또는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때나 가는 경우가 많은 문화적 전통적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고. 1960년대 이후 미국도 세속화가 이뤄져서 특히 도시지역에선 교회에 안다니더라도 사회적으로 불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아직도 농촌지역에선 교회의 지역 사회 영향력이 큰데, 이런 곳에서는 사회문화적 성향이 보수적이라 주류교단들의 사회적 위치와 안 맞아 근본주의, 복음주의 성향 교회로 떨어져 나간 경우가 많다. 이래 저래 전통적인 신앙 인구인 중도, 진보적 성향 해안 도시 백인들은 근대화를 겪으며 아예 세속화, 비종교화가 되 버렸고, 남아 있는 내륙, 농촌에선 더 근본주의적 성향 교회들의 자극적인 대중성을 따라 갈 수 없는 여러모로 안습한 구도이다.

전례/신학의 경우는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미국 북동부와 서부의 경우 도시에 성공회 소속 성당 5개가 있다면 그중 4개는 앵글로-천주교고 1개는 광교회파[120]라 보면 된다. 이들의 전례는 미국 천주교 신자 주류[121]에서 부러워할 정도로 전통적인 편이다.[122] 신학 또한 천주교에 가까운 경향을 보이는데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성공회신학교인 General Theological Seminary의 경우 미국 독립 직후에 설립되었음에도 하드코어 앵글로-천주교이다.[123]

하지만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인[124] 교단들이 특별히 강세를 보이는 지역인 남부나 중부 등에서는 복음주의파가 다수거나 못해도 광교회파가 많은 편이다. 이쪽 지역에도 전통적인 모습을 보이며 예배의식을 Holy Communion, 즉 감사성찬례(Eucharist)가 아니라 미사라 부르는 교구들도 남아있긴 하다. 그러나 남부에 있는 신학교는 거의 광교회파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보면 미국 성공회의 전례/신학 문제가 복잡해 보이지만 세세한 교리의 경우 신자에게 상당한 믿음의 자유를 주는 편이기 때문에 신자들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화체설 관련 믿음 등. 즉 앵글로-천주교/복음주의/광교회 문제의 경우 자기 취향에 맞는 교구를 다니면 되기 때문에 큰 상관이 없다. 더 나아가 앵글로-천주교 교회 내에서도 예배드릴 때 전통적으로 성호를 그어야 하는 부분에서 천주교처럼 성호를 긋는 사람들[125]과 신경도 안 쓰는 사람들로 나뉠 정도.

이는 80년대 이후 미국 성공회의 문화 자체가 아주 기본적인 교리[126]만 믿고 성공회 기도서만 잘 따라 하면 무엇을 믿든, 무엇을 하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아주 개방적인 문화로 바뀌었다.[127] 얼마나 개방적인가 하면 무신론자와 결혼한 신부님도 있을 정도. 신자 구성 자체도 단순한 WASP 상류층 위주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이들과 소수 인종 및 성소수자들 유입으로 조금씩 바뀌어 가는 편이다.

북미 지역에는 미국 성공회와 캐나다 성공회에서 갈라져 나온 또 다른 분파인 북미성공회(Anglican Church of North America)가 있다. ACNA의 관구장 주교는 2016년 1월 11~15일에 있었던 관구장 회의에는 참석하였으나, 세계 성공회 공동체의 가입여부는 2016년 4월 8~20일에 열리는 세계 성공회 협의회(ACC)에서 결정을 내리기로 하였다.

미국성공회가 동성결혼에 진보적인 성향을 보인 것이 문제되어 세계성공회공동체에 분열을 야기한점을 문제삼아 2016 관구장회의에서 미국성공회(EC)의 의결권을 3년간 정지하기로 결정하였다.BBC 기사 동성애 문제를 둘러싼 보수 성향의 아프리카 지역 성공회 관구들의 강력 반발로 인한 성공회 분열 위기를 의식한 결정으로 보인다.[128] 사실 로완 웰리엄스 전임 캔터베리 대주교가 진보파라면, 저스틴 웰비 현임 캔터베리 대주교는 중도보수파[129]다. 이 결정에 또다시 동성결혼 지지파인 스코틀랜드 성공회, 잉글랜드 성공회 산하 요크 대교구 등이 반발하면서 언론은 성공회가 심한 내부 긴장관계에 접어들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관구장회의는 세계성공회공동체의 다른 기구나 회의에 비해 아프리카 성공회 관구들의 발언권이 강한 편이며 구미지역 성공회 관구들의 진보적 변화를 견제하는 구실을 해왔다.

뉴스앤조이가 미국성공회와 미국 연합감리교와 완전한 상통에 이뤘다는 보도를 했는데 명백한 오보다. 완전한 상통을 하는 합의문 작성을 잘못 해석했다. 미국성공회(The Episcopal Church)와 달리 미국 연합감리교(United Methodist Church)는 내부 진보파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2019년 2월 총회에서 동성결혼과 동성애자 목사 안수에 대하여 한층 더 보수적이고 강경한 입장을 가결한 바 있는 등 미국성공회와 달리 보수파 영향력이 훨씬 더 강하다.

대한성공회는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성공회의 전례·신학 변화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진보적 사회참여와 전례[130] 쇄신에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대한성공회 내 광교회 및 저교회 성향 확대도 미국성공회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

5.4. 호주의 성공회

영국과의 전통적인 영향으로 호주에서도 세가 크다. 현재 호주 성공회의 대표자는 필립 프레이어 멜버른 대주교[131]이고, 23개 교구가 있다.

호주 인구 중 약 53%가 기독교인인데, 그 중 천주교가 22.6%, 성공회가 13.3%이다. 20세기 초반까진 성공회 신자가 천주교보다 2배 더 많았고, 70~80년대까진 비슷했으나 이후 교세가 폭삭 줄어들었다. 더군다나 교인들도 노령화가 상당하다. 다만 이는 성공회만의 문제는 아니며 천주교 교회의 처지도 비슷하다. 두 교회는 나란히 매년 교세가 대폭 줄고 있지만[132] 두 교단에 속하지 않는 개신교나 다른 종교인 이슬람교, 인도계 종교(힌두교, 불교, 시크교)는 유지내지 늘어나는 추세이다.[133] 이는 신학적 진보와 연관되기도 한다. 호주 성공회는 동성혼을 완전히 인정하는데, 기존 신자들은 정작 장년, 노년층이 대다수다. 더군다나 교회 안팎의 다른 중요한 문제는 제쳐놓고 오로지 세속적 인권가치, 그것도 동성애 문제 하나만 신경 쓰냐는 비판과 함께 보수적 신자들이 천주교(주로 고교회파 출신)이나 다른 개신교 교파(주로 저교회파 출신)로의 이탈도 상당히 큰 문제다. 인구 구성으로만 본다면 호주 성공회의 미래는 존립 기반이 흔들릴 정도로 상당히 암울하다고 볼 수 있다. 근래 30여년 간 신자 비율은 반토막 났으며 전술한 바와 같이 신도들의 노령화는 심각한 수준이다.

그러나 역사적 전통적 영향으로 교회의 영향력이 큰 편이긴 한데 시드니와 멜버른의 유서 깊은 교회 건축물들 대다수는 성공회이거나 천주교 교회 건물이다. 사회복지나 구호단체도 성공회 소속이 많다. 이들 활동은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받는 경우가 많아서 거의 공무원급이라 보면 된다. 그리고 사립 초등학교~고등학교는 천주교와 더불어 성공회 계열 학교들이 많다. 호주 학부모들은 공립학교에 대해 불신이 많은 편인데, 천주교나 성공회 계열 사립학교는 엄격한 교칙 때문에 인기가 많다.

5.5. 홍콩마카오의 성공회

홍콩영국이 식민지배했던 중국 남부의 섬인 홍콩 섬과 본토 쪽에 붙어있는 육지 부분인 구룡반도, 신계 그리고 200개가 넘는 유/무인 도서로 이루어진 도서지방으로 현재는 1국가 2체제에 의해 홍콩 특별행정구 정부가 들어선 상태다. 그래서 중국 공산당이 직접 통치하는 중국 대륙과 달리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당연히 성공회 교구도 정상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누린다.

홍콩 성공회의 역사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홍콩 섬 센트럴에 영국군 장교들이 세운 성 요한 성당이 바로 그때 만든 교회로 현재도 신자 수가 많으며 홍콩인 신자들의 신심도 매우 깊은 편.

홍콩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성공회 강세인 곳으로 본토 중국의 기독교인들이 대부분 보수 복음주의 교회 혹은 오순절 교회 성향을 가진 것과 달리[134] 홍콩에선 성공회가 주요 교단 중 하나이다. 2016년 연감[135]에 따르면 홍콩 개신교인 50만 명 중 2만 9000여 명이 홍콩 성공회 교인이다. 나머지는 장로회, 감리회, 침례회 등으로 모두 영국인 선교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영국이 건설한 선교기지 중 하나가 홍콩으로 현재 홍콩 성공회가 전 동아시아를 혼자 담당하는데 다른 동아시아 국가는 성공회 신자가 없다시피 해서 그렇다. 개신교인이 15% 이상[136]인 한국조차 성공회는 1%도 안 되는 극소수 교파다. 그리고 북한, 일본은 성공회는커녕 그리스도교인 자체가 없다시피 하거나 극소수이다.

게다가 영국 등에서 유학하거나 성공회/천주교계 사립학교[137]를 다닌 젊은 층이 서구화되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경우도 많으며 이때 대개 천주교감리회, 그리고 성공회를 고른다. 홍콩은 영어로만 수업하는 사립 중고등학교 선호도가 매우 높은 곳이라서 부모 세대는 불교를 믿지만 본인은 성공회나 천주교나 다른 개신교를 믿는 사람이 많다.

참고로 1944년 성공회 최초의 여성신부가 서품된 곳이기도 하다.

마카오포르투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반대로 기독교는 천주교를 뜻하고 성공회는 원래 소수였다. 그러나 현재 젊은 층을 중심으로 성공회 교세가 증가하고 있다.

5.6. 일본 성공회

성공회가 일본에 들어온 것은 우리나라보다 30년 가량 앞선 막부시대 말기인 1859년였다. 대한성공회가 영국 성공회의 고교회파 교회로부터 단일 계통으로 전래를 받은 것과는 다르게, 도쿄나 요코하마 등 관동 지역은 미국 성공회로부터, 나고야 등 중부 지역은 캐나다 성공회로부터, 오사카 등 관서 지역은 영국 성공회로부터 전래받았다. 현재는 북으로 홋카이도 교구부터 남으로 오키나와 교구까지 11개의 교구가 모두 일본 성공회로 한 관구를 이루고 있으며, 신자 수는 약 6만 명 정도이다.[138] 현재 일본 성공회 관구장 주교는 마카토 우에마쓰(나다니엘) 홋카이도 교구장 주교다.

성직자에 대한 호칭은 일반적으로 '신부'보다는 '목사'라 호칭하는 경향이 있다.

성공회 신자 수가 많다고 하긴 어려운 규모이지만, 일본은 기독교인이 다 해야 100만 정도밖에 안되기 때문에[139] 일본 기독교계에서 성공회의 입지는 꽤 큰 듯하다. 나라 안에서 기독교세가 작은 가운데 기독교 내 교파의 입지가 큰 일본성공회와, 나라 안에서는 기독교세가 크지만 기독교 내에서 너무 작은 교파인 대한성공회의 상황[140]이 대비가 된다.

일본 성공회와 대한성공회는 매우 긴밀히 교류하고 있으며, 양국 간의 우호 증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141][142]

성공회는 사회 선교를 중요시하게 생각하는데, 일본 성공회에서는 그 일환으로 교회에 보육원을 만들어서 사회복지에 기여하고 있어, 성당에 보육원이 딸려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도쿄 소재 명문 대학 중 하나인 릿쿄대학이 일본 성공회 재단이다. 윤동주 시인이 일본 유학 시절 다녔던 대학으로, 릿쿄대학 유학 당시 교목(校牧)이었던 다카마츠 다카하루 교수에게 특별히 많은 가르침과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5.7. 한국 성공회

대한성공회 항목 참조.

6. 기타

성향은 크게 3개로 나누어진다. 구교에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성공회 전례를 잘 따르는 앵글로-천주교(Anglo-Catholic), 사회구원과 진보신학 성향을 보이며 가장 자유적인 신학을 추구하는 광교회파(Broad Church), 주교제도를 거의 신경 쓰지 않고 개신교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복음주의(Evangelical)가 존재한다. 이를 앞에 성공회의 신앙에 대한 관점(성서, 전통, 이성)을 통해서 앵글로-천주교는 전통의 눈으로 성서와 이성을 보고, 복음주의는 성서의 눈으로 전통과 이성을 보고, 광교회파는 이성의 눈으로 성서와 전통을 본다고 흔히들 표현한다.[143]

그러나 형태와 무관하게 성공회는 일반적으로 개신교로 분류된다. 루터교회 역시 형식은 구교와 비슷해 주교가 있는 교단도 있으며[144][145] 감리회의 감독도 원래는 주교직이다.[146] 목사는 감독의 수하로 교회를 아무데나 못 짓는다는 데서 칼뱅주의파인 침례회장로회와는 다르다.

대한성공회는 선교 자체가 잉글랜드성공회의 고교회파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고교회파 색채가 강했고 현재도 서울교구를 중심으로 그 영향이 남아있다. 그러나 1960년대 말 천주교의 변화에 영향을 받은 미국성공회의 전례·신학 상 변화의 바람이 1970년대 말부터 대한성공회에도 불어닥치면서 전례 상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여기에 타 개신교단에서 전입한 평신도와 성직자가 늘어나면서 신학 상으로도 광교회파와 저교회파 영향이 강해졌다. 현재 대한성공회는 전례 상 고교회파 영향이 남아있으면서도 현행 천주교 바오로 6세 전례와 유사하며, 신학 상으로는 광교회파적 진보 성향이 강해졌다는 평을 받는다. 게다가 보수적인 사제나 진보적인 사제나 고교회파 혹은 저교회파 성향을 띄면서, 여기에 보수적 사제는 복음주의 성향을 가지고 진보적 사제는 진보 성향을 가지는 경우가 없지 않기 때문에, 현재 대한성공회를 고교회파·저교회파·광교회파로 분류하는 것은 현실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현재 대한성공회는 복음주의와 진보 성향으로 나눠서 분류하는 것이 실정에 맞을 것이다.

아무래도 다른 개신교 교파[147]와는 달리 루터회처럼[148] 천주교와 크게 다른 점이 없기에, 옛날부터 천주교와 다시 하나로 합치자는 얘기가 일부 신자들 사이에 있었고, 몇 차례 긍정적 합의를 보기도 했으나, 앞에서 말한 대로 정교회와 일치하지 못하게 된 이유와 비슷하게 여성 신부 인정 등 여러 가지 문제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다시 이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천주교 측에서 일단 '결혼한 성공회 남성 신부를 조건부 인정한다'는 전제를 파격적으로 내세운지라[149] 다시 적극적인 논의가 되고 있지만, 대한성공회는 이러한 의사를 부인하고 있고 거의 나라별로 분권화가 이루어져 있으며[150] 영국 감리회 주류 교단은 현재 성공회와 일치를 이루었다.[151] 앞서 말했듯 천주교 신부[152]가 성공회로 가거나 반대로 성공회의 보수주의자 신부들이 천주교로 가는 사례는 외국에 매우 많았고 국내에서도 없지 않다. 현재 의화 부분에서 루터교, 천주교, 성공회, 감리회가 합의를 보았다.[153]

이렇기에 천주교와 합치자거나 유사성을 강조하는 입장은 국내 성공회 신자(성직자 및 평신도)들에게는 크게 공감대를 얻지 못하는 편이다. 천주교에서 결혼한 남성 신부는 인정한다해도 여성신부를 인정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 데다가, 국내 성공회 신자 중에는 진보적 관점의 신학을 지지하거나, 적어도 사회 참여를 강조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많은데, 이것도 역시 천주교 주류와 잘 맞지 않는다.

대한성공회 내에서 우스개로라도 천주교와의 통합 이야기가 나오면, 감리회[154]기독교장로회[155]로 가면 갔지, 천주교로 왜 가느냐는 반응이 주로 나온다. 특히 자신이 천주교의 경직성과 보수성에 동의하지 않아서 천주교에서 성공회로 옮긴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국내 성공회의 분위기로는 현실화될 가능성은 없지만 천주교와 통합이 된다면, 성공회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온전히 천주교로 흡수되기 보다는 감리회/기장/루터교회/예장통합 같은 NCCK 소속 교단들로 흩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형식적인 면에서 천주교의 전례와 유사하기는 하지만 형식은 형식일 뿐. 그러나 어찌됐든 에큐메니컬을 지향하기 때문에 에큐메니컬 성향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가입되어 있다.

여담으로 나이지리아 성공회는 영국 성공회 다음으로 가장 큰 교회다. 사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투투 주교도 여기에 속하고, 자메이카에서도 위상이 큰 듯이 대영제국에 속했던 식민지 중 힌두교이슬람이 이미 토착 종교로 깊이 뿌리 박혀 선교가 잘 안 된 곳들, 즉 인도이집트 같은 곳을 제외하면 옛날 영국이 있었던 곳에는 성공회 또한 상당한 발자취가 있는 편이다.

그런 대표적인 예가 동아시아에서 최대 규모인 홍콩동남아시아 유일의 성공회 최대관구인 싱가포르가 있다. 싱가포르는 불과 20여 년 전까지 '개신교는 곧 성공회'라는 인식이 있을 정도로 성공회의 교세와 개신교 내 비중이 컸던 나라이다. 지금은 오순절교회와 보수 복음주의 성향 독립교회 성장으로 개신교 내 비중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개신교 내 최대 교파 위치를 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홍콩 성공회도 한때 싱가포르 성공회와 위상이 비슷했고 지금도 여전히 주류 교단의 하나이지만, 1950년대부터 다른 개신교 교파들의 지속적인 성장으로 싱가포르만큼 개신교 내 비중이 높지는 않다. 참고로, 홍콩에서 가장 교세가 많은 개신교 교파는 감리교, 성공회, 장로회가 있으며 최근에는 침례교, 오순절교회, 독립교회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홍콩 성공회는 정치·사회적으로는 중도우파에서 중도좌파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반면, 침례교·오순절교회·독립교회 같이 최근에 비교적 빠르게 성장하는 교파들은 신학적·사회적으로 보수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156]

반대로 다른 동아시아, 특히 중국 대륙일본, 대만은 성공회 신자가 거의 없다.[157] 기독교인이 신/구교 공히 많다는 한국조차 성공회나 루터회는 극소수. 물론 성공회나 루터회를 이단시하지는 않는다. 이 교회들을 천주교 등과 엮어서 공격하는 건 이제는 식은 떡밥이다.

대한성공회는 한국기독교장로회,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와 함께 1957년 이래 연세대학교 이사회의 일부를 구성하는 파송 교단 가운데 하나였다.[158] 그러던 것이 2011년 방우영 (조선일보 일가로 알려진 그 방우영이다. 아래 사건을 계기로 사실 상 주인 없는 연세대 이사회를 사유화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사장에 의해 대한성공회기장과 함께 파송 교단에서 제외되었고 법인 정관에선 아예 4개 교단명과 파송이사라는 표현이 빠졌다. 언더우드 가문의 후손들과 성공회 교단 차원에서 항의할 정도로 당사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으나, 여론의 주목은 받지 못하였다. 국내의 보수 교단측에서는 연세대 내에서 진보 교단의 세력이 줄어드는 모양새를 내심 반기는 면도 있어 크게 문제삼지 않고 있으나, 이사장 개인에 의해 기독교대학으로서의 정체성이 허물어져가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만약 방우영 이사장이 연세대 사유화를 마음 먹었다면, 만만한 기독교 교단들 먼저 정리하는 수순을 밟고 있는 것일 수 있다. 현재 연세대 이사회에서 참여하는 기독교 교단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와 기독교대한감리회, 이렇게 둘 뿐이다. 그러나 2019년 현재 예장통합 소속 이사의 경우는 예장통합총회의 추천과 상관없이 선임되었다.

영어권 성공회에서는 일부 보수적 고교회파에서는 KJV, 광교회파와 일부 고교회파에서는 NRSV, 저교회파에서는 ESV, NIV 등이 쓰인다. 다만 국가적인 의전 행사인 경우에는 거의 KJV가 쓰이는 편이다.

대한민국의 기독교 교파/교단 중 재세례 문제에 대해 실질적으로 가장 민감한 교단이기도 하다.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물로써 세례를 받았다는 최소한의 조건이 충족(도유 여부 등은 따지지도 않는다)되었으면 재세례는 절대 없다는 입장. 천주교도 재세례는 원칙적으로는 부정하는 입장이지만, 한국 천주교의 경우 종교개혁적 세례를 받은 뒤에 천주교로 옮긴 이들이 천주교에서 세례를 다시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2019년 2월 21일, 영국 성공회가 총회를 열어 일요일 예배 의무를 규정한 1603년 교회법 조항을 '모든 교회'에서 '성직자 담당 구역에서 최소 1개 교회만'으로 완화하는 내용으로 수정했다.기사 성직자와 신도 숫자가 줄어들어 소수의 성직자가 다수의 교구와 교회를 담당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반영한 것.

7. 창작물에서의 성공회

  • 한국에서는 대중적인 기독교 종파가 아니라서, 대부분의 사람은 이 종파의 존재를 유럽사 서적에서나 처음 접한다. 그러다 보니 존재감이 미약하여 창작물에서 다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특정 나라에서는 국교의 레벨이라는 점, 그 나라가 꽤 잘나가는 서구 국가 중 하나인 영국이라는 점 등으로 인하여 "앗! 저 사람은 영국 직속의 A 신부!!" 같은 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 간혹 창작물에 등장하기도 한다. 이쪽 방면의 작품으로는 헬싱,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159]이 있다.

  • 영국 문학, 특히 추리소설에서는 무지하게 자주 나온다. 특히 존 딕슨 카의 작품에서는 반드시 나온다.
  • 파이널 판타지 11에 등장하는 산도리아 국교회가 성공회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기존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던 여신 신앙을 일개 국가 내에서 특별한 형태로만 인정하고, 다른 종류의 여신 신앙을 배척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 늑대와 양피지에서는 성공회라는 명칭은 등장하지 않지만, 영국처럼 섬나라인 윈필왕국과,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정교의 교황과의 다툼으로 새로운 교회를 만들기로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160] 늑대와 양피지/고증 항목 참조.

>『그대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쪽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귀족으로써의 긍지 때문인 걸까, 아니면 하이랜드의 성격 때문인 걸까.>『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다.』>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은 잠깐이었다. 윈필 왕국은 지난 3년간 성무가 중지되었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는가. >(중략)>『음. 우리의 손으로 새로운 교회를 만들 수 있다. 속어로 번역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경전을 들고 있는 성직자가 다스리는 교회말이다. 비리나 악폐습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그동안 알면서도 모른 체 해온 것,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를 한 번에 쓸어버릴 수 있다는 말이지. 내가 그 온천장에서, 무의미한 삶을 보내는 고위 성직자가 아닌, 그대에게 말을 건 것은 바로 그 이유인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 것이다. 기만도, 거짓도 없는 세계를.』>>늑대와 양피지 1권 中

8. 성공회 성직자 및 평신도

8.1. 가상 인물

8.2. 실존 인물

8.2.1. 성직자[162]

  • 데스몬드 투투 - 남아프리카공화국의 反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이자 성공회 대주교. 1984년 노벨평화상 수상.
  • 알리스터 맥그래스: 옥스퍼드대학 교수, 성공회 신부이며 신학자. 기독교 복음주의 계통의 저명한 저술가로 국내에도 많은 서적이 번역되었다.
  • 크리스토퍼 존 보델-리 - '영국남자' 채널의 유튜버인 조슈아 대럴 캐럿의 친구이자 런던의 세인트 세이비어 성공회 교회(St. Saviour's Church)의 신부님.[163] 아마 유튜브 보는 사람들에게는 제일 유명한 성공회 신부님이 아닐까 싶다.
  • 이재정 - 대한민국정치인이자 성공회 신부이며 성공회대학교 총장, 참여정부 하에서 2006년부터 2008년까지 통일부 장관을 지냈고 2014년 6월 4일 경기도 교육감으로 선출되었다.
  • 존 스토트 - 복음주의의 지평을 연 신학자.
  • 존 웨슬리 - 성공회 신부이자 감리회의 창시자.
  • 토마스 맬서스 - 인구론으로 유명한 경제학자이기도 하다.
  • 탁지웅 - 기독교 이단 연구가 탁명환 소장의 3남. 현재 일본성공회 도쿄교구 신부. 작은형(탁명환 소장의 2남)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일하고있는 국제종교문제연구소 탁지원 소장이고, 큰형(탁명환 소장의 1남)은 부산 장로회신학대학 탁지일 교수다.

8.2.2. 일반 신자


  1. [1] 잉글랜드 교회가 천주교로부터 독립한 때
  2. [2] 성공회 일부에서는 성공회를 고대 켈트 교회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고 그 연원을 2세기라고 주장한다. 로만 브리튼 시대 형성된 교회가 중간에 지금의 잉글랜드 지역에서 단절된 역사가 있고 캔터베리 대주교좌 자체가 로마 교황청 및 대륙 가톨릭교회의 선교에 의해 설립되었음을 고려한다면......
  3. [3] 세계 그리스도교 통계 및 이에 대한 설명(영문)##
    세계성공회공동체(Anglican Communion), 전통세계성공회공동체(Traditional Anglican Communion) 그리고 성공회 교리와 직제를 공유하는 교단(Anglican Church in North America, Reformed Evangelical Anglican Church of South Africa 등) 신자 수의 합이 8400-8500만 명이다. 한때 1억 명에 달하기도 했지만, 최근 제1세계 사회의 탈종교화와 세속화가 빨라지면서 감소했다. 비단 성공회뿐 아니라 천주교 등 그리스도교의 다른 교단, 불교·이슬람교 같은 타 종교도 봉착한 문제다.
  4. [4] 미국 독립 후 Anglican이라는 말이 영국 왕당파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Anglican 대신 Episcopal로 바꿔 쓴다.미국 독립 전쟁 당시 대부분의 성공회 성직자는 중립을 지켰지만, 일부 왕당파 성공회 성직자는 박해를 당했다.
  5. [5] Η ΑΛΗΘΕΙΑ ΕΛΕΥΘΕΡΩΣΕΙ ΥΜΑΣ(ἡ ἀλήθεια ἐλευθερώσει ὑμᾶς, hē alētheia eleutherōsei hymas). 요한의 복음서 8장 32절 중.
  6. [6] 성공회가 개신교라는 말은 장로제로 운영된다거나 각 교회가 따로 논다는 것이 아니고, 교리가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다.
  7. [7] 어떤 통계에서는 1억 명이라고도 하는데, 사실 최근 세계적으로 사회의 세속화가 빨라지면서 교세가 조금 줄었다. 비단 성공회만의 문제가 아니고, 천주교, 정교회등 다른 그리스도교 교단이나, 불교, 이슬람교 등 타 종교도 봉착한 문제다. 사실 성서에도 “내가 다시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
  8. [8] 천주교 번역판
  9. [9] 성공회 번역판, 개신교 번역판
  10. [10] 성공회라는 한자 낱말을 영어로 직역하면 Holy Catholic Church가 된다.
  11. [11] 신자 수가 대략 1800만명으로, 세계 성공회에서 잉글랜드 성공회 다음으로 크다.
  12. [12] 통계에 따라서는 나이지리아가 잉글랜드보다 더 많은 수로 집계되는 경우도 있다
  13. [13] 교세는 2만 9000여 명으로 홍콩 기독교 내에서 가장 큰 교단은 아니다. 홍콩에 있는 천주교(신자 약 35만 명)에 비해서도 교세가 적은 것은 물론이고 홍콩 개신교 내에서도 가장 교세가 큰 교단은 아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Hong_Kong_Sheng_Kung_Hui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27984
  14. [14] 20여 년 전만 해도 뉴질랜드에서 가장 교인이 많은 그리스도교 교단이었지만 최근 들어 천주교에 추월당했다.
  15. [15] #
  16. [16] 이쪽은 주로 영국계와 영국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원주민과 유색인들이 믿고 있다. 그리고 아파르트헤이트 저항 운동에 남아프리카 성공회가 나름 활발히 참여했기 때문에 명망이 높다. 아파르트헤이트 저항 운동의 업적을 인정받아, 남아프리카 성공회 데즈먼드 투투 주교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7. [17] https://en.wikipedia.org/wiki/Religion_in_South_Africa 성공회는 남아프리카에서 교파별로 따져보아도 그리고 교단별로 따져보아도 여섯 번째로 교인 수가 많다.
  18. [18]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을 비롯한 건국의 아버지들 중에 성공회 교인이 많았다. 우리에게도 인지도가 꽤 높은 루즈벨트아버지 부시도 성공회 교인이었다. 참고로, 미국 역대 대통령을 교파 별로 본다면, 성공회 12명 다음으로 장로회가 래이건/해리슨/잭슨/트럼프 등 8명, 침례회가 클린턴/카터 등 4명, 감리회아들 부시/맥킨리 등 4명, 천주교가 존 F 케네디 1명 등이다.
  19. [19] 미국 대통령의 1/4이 성공회 신자였을 뿐 아니라, 역대 연방 대법원 대법관과 의회 상원의원의 1/4 가량이 성공회 신자였다. 아무튼 성공회는 장로회감리회와 더불어 미국을 이끌던 WASP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미국 내 성공회의 교세가 줄어들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그 비율이 계속 작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미국 성공회가 현재 선거 등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은 크지 않다.
  20. [20] 미국 정부에서 성공회에 성당을 지어준 것은 아니고, 국가적인 의식이나 행사를 거행하기 위한 성당을 지었는데, 그 성당의 교파를 성공회로 하기로 의회에서 인준을 했던 것이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성당/교회의 본 목적 외에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가치에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국가의 공공적인 의식과 전례를 치르는 장소로도 운용이 되고있는 것이다.
  21. [21] 메인라인(Main-line)이라고 불리는 그리스도교 교단들은 미국 그리스도교 내의 어떤 교단들로서 오랫동안 미국에서 주류 교단의 위치를 차지했었던 교단이다. 하지만 현재 메인라인(Main-line)이라고 불리는 그리스도교 교단들을 미국 그리스도교 내 주류 교단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22. [22] 미합중국에 편입되기 전, 하와이 제도의 여러 섬들을 다스리던 왕국
  23. [23] 현재 마다가스카르 공화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의 식민통치에서 독립한 국가이다. 마다가스카르가 프랑스의 통치를 받기 직전의 왕국이 메리나 왕국이다.
  24. [24] 사실 천주교의 경우 세계의 모든 교구바티칸 교황의 치리를 받기 때문에, 사실상 로마 천주교의 해외 지부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25. [25] 즉 잉글랜드 성공회 밖에 있는 교구가 캔터베리 대주교의 치리를 받을 일은 없다. 물론 필요할 때 캔터베리 대주교가 잉글랜드 밖 성공회에 사목적 권고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는 정교회도 마찬가지라서, 세계 총대주교가 자기 관할권 밖에 있는 교구를 치리하는 일은 없다.
  26. [26] 엄밀히 말하면 종교개혁 자체를 루터가 시작했다고 보기 어렵다. 루터보다 150여년 전에 영국의 위클리프가 종교개혁을 주장했고, 체코의 후스가 그 뒤를 이었다. 흔히 루터 전의 종교개혁가들의 업적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들이 없었더라면 루터가 종교개혁을 부르짖었을 때 북유럽 및 동유럽의 루터교회와 영국의 성공회가 그렇게 빠르게 정착되어 세력화될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루터 전에도 그 지역들에서는 종교개혁의 분위기가 수면 아래서 조성되고 있었던 것. 위클리프와 후스 이후에도 그들의 주장을 계승하는 발도파나 후스파가 있긴 했으나, 일반 대중들에게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했다는 이미지가 널리 퍼져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개신교 측에서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 시점을 종교개혁 기념일로 삼고 있기도 하고.
  27. [27] 그러나 루터회와 성공회가 외형상 유사점이 많은 건 사실이나 세부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꽤나 다르기 때문에 이런 인식이 생긴 것이기도 하다. 우선 유래부터가 신학적, 신앙적으로 천주교에 반발해 분리되었고, 종교개혁의 시발점인 루터회와 신학적 노선 차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천주교와 분리된 측면이 강한 성공회는 차이점이 있으며, 루터회의 경우 모든 개신교 교파가 동의하는 개신교 기본 원칙인 '다섯 솔라'를 특히 강조하고 개역한글이나 개역개정 등을 주로 사용하며, 사목자의 명칭도 '목사'인 점 등 종교개혁적 정체성이 상당히 강한 반면, 보편교회론을 인정하고 국내의 경우 앵글로-천주교의 영향력이 매우 강해 천주교적 양식이 두드러지는 성공회의 차이는 무시 못 할 정도로 크다.
  28. [28] 1534년에 있었던 헨리 8세의 수장령이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잉글랜드 국교회에서 국왕이 수장 자리에서 내려온 것은 헨리 8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 때의 일로, 1558년 2차 수장령이었다.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게, 잉글랜드 국교회에서 국왕이 수장이었던 기간은 고작 24년 간이었고, 그 이후로 현재까지 캔터베리 대주교가 잉글랜드 국교회의 수장이어왔다.
  29. [29] 유럽 왕족들은 신분에 맞춰 근친혼이 성행했기에 교회에선 기독교 군주의 결합을 대의로 인정하여 허용하는 추세였다.
  30. [30] 일부 열성 성공회 신자들은 '왕의 이혼을 위해 생긴 종교'라는 세간의 인식을 거북하게 여겨, 헨리 8세의 이혼 문제가 성공회의 탄생에 미친 영향을 지나치게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다. 성공회가 다른 기독교 분파에 비해 '우리는 (헨리 8세가 만들었을 당시의)과거와 완전히 다른 종교가 되었다'라고 말하는 신자들이 유독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31. [31] 성공회의 탄생 또한 16세기의 종교 개혁의 일부라는 것을 망각한 주장이다.
  32. [32] 실제로 일본 내에서 오랫동안 고립되어 원조 가톨릭과 너무 큰 차이가 생겨버린 카쿠레키리시탄의 경우,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원죄'가 구전 과정에서 실전되어버렸을 정도로 크게 변질되었고, 로마 교황청 역시 일본에서 '발견된' 기독교의 교리가 가톨릭에서 너무 많이 벗어났음을 실감하며 이를 교정하려고 했다. 이에 적지 않은 카쿠레키리시탄들이 가톨릭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믿음을 이어나가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교회에서 일본과 같은 큰 변형이 일어났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때문에 잉글랜드 교회는 자연스럽게 로마교황청을 중심으로한 대륙 교회에 녹아들 수 있었다.
  33. [33] 예를 들어, 메리 여왕은 단명한 반면 엘리자베스 여왕은 장수했다거나, 예수회의 엘리자베스 여왕 암살 기도나 천주교 극우파였던 가이 포크스의 제임스 1세 시해 시도가 여론을 악화시키는 등
  34. [34] 타 개신교 종파와 마찬가지로, 성공회는 분권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교회이다. 따라서 교리와 전통에 대한 견해 또한 통일되어 있지 않다.
  35. [35] 켈트 교회의 시작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2세기 경 로마 또는 골(Gaul)에서 파견된 선교사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36. [36] 섬에 들어간 종교가 원류와 다르게 변형되는 것은 일본의 불교와 카쿠레키리스탄, 인도네시아의 다양한 무슬림 계파에서도 볼 수 있듯이, 꽤 흔하게 관찰되는 문화 인류학적 현상이다.
  37. [37] 스톤헨지가 위치한 솔즈베리 지역 인근에 묻었다는 떡밥이 자주 등장한다.
  38. [38] 문학계에 널리 알려진 '아서왕 전설'은 이 때를 배경으로 한다.
  39. [39] 브리튼섬을 침공하기 전 앵글로색슨족의 북유럽에서의 상황은 사료의 부족으로 인해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
  40. [40] 알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이 지은 앵글로색슨 연대기(Anglo-Saxon chronicle)에 의하면 앵글로색슨족의 본격적인 침입은 449년에 시작되었다. 영국의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앵글로색슨 침입(Alglo-Saxon invasion)이라 부른다. 특히 언어학적으로는, 게르만족의 일부가 브리튼섬으로 넘어오면서 게르만어족 중 한 지류인 '영어'가 시작된 계기가 되는 사건이기도 했다.
  41. [41] 이때 형성된 잉글랜드 왕국은 현재까지도 브리튼 섬의 패권을 쥐고 있다.
  42. [42] 이전의 로마 교황과 8세기까지 후임 교황들은 세속적으론 동로마제국의 봉신이며, 황제에게 수위권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 전승에서 내려오듯 온전한 수위권 같은 것은 누리지 못했다. 이탈리아 반도에선 침략자들의 방어하고 협상하는데 급급했기 때문에 잉글랜드에 신경 쓸 겨를이 더 없었다. 그레고리오 1세 시절엔 동로마제국에서 파견한 라벤나 총독에게도 무시당할 정도.
  43. [43] 560-616년
  44. [44] 이는 잉글랜드(당시 단어로는 앙글로란드)의 기독교화라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게르만족들이 브리튼섬으로 넘어와 켈트족을 몰아낼 때 그들의 종교는 기독교가 아닌 북구 신화였기 때문. 영국 역사학자들은 597년 에텔버트왕의 세례가 앵글로색슨족 기독교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449년의 앵글로색슨 침입(Anglo-Saxon invasion) 이후 약 150년간 로마교회의 영향력 밖에 있던 잉글랜드가 다시 로마교회로 돌아감을 의미하기도 했다. 고대 영문학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45. [45]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왕조 시절은 왕이 죽을 때마다 분할상속으로 나뉘어졌다가 서로 싸우고 죽고 병림픽으로 합쳐졌다의 반복이었다. 네우스트리아는 파리와 프랑스 북부 지역이었다.
  46. [46] 서고트족 출신임에도 프랑크 계통 왕국에 시집 와서 아리우스파에서 천주교로 자발적으로 개종함.
  47. [47] 세금을 확실히 잘 걷으라는 협박의 의미가 컸었다.
  48. [48] 앞서 언급했듯이 전근대 서유럽에서는 의외로 세속 군주가 교황에게 엿을 먹이고 해당 국가 성직자들이 군주 편을 드는 사례가 많다. 당장 아비뇽 유수도 그런 사례라 할 수 있다. 중세는 교황이 세속 정치에 영향을 끼치던 시대이기도 하지만, 통신과 교통 수단의 미발달로 인해 의외로 천주교 교회가 각국 주교들의 느슨한 연합체 같은 느낌으로 결합되어 있기도 했다. 그래서 통일된 미사 경본이 나온건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에서나 가능했다 기존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왕국의 세속 군주는 교황을 자기 아래나 보조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교회 권력을 이용했다면, 헨리 8세는 잉글랜드 교회 자체를 로마에서 분리시켰다는 점에 있다.
  49. [49] 아비뇽 교황을 프랑스 왕의 꼭두각시로 여겼다.
  50. [50] 마르틴 루터보다 200년 앞서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한 것이지만, 번역의 수준은 라틴어를 영어로 단순히 직역한 정도였다. 이로부터 2세기 후에 번역된 킹 제임스 성경(KJV)이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에 견줄 정도로 영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것과는 대비되는 점이다.
  51. [51] 성공회를 비롯한 개신교에선 천주교 교회에서 교리로 주장하는 실체 변화(화체설)를 공식적으로 부인한다.
  52. [52] 1380년부터 천주교가 분열되어 2~3명의 대립교황이 난립했기 때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1415년에야 해결된다.
  53. [53] 당시 교구 매매는 종종 이루어지던 일로, 자신의 교구를 팔았다는 것만으로 그가 종교 개혁가가 아니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날 종교 개혁의 원류로서 그의 위상을 깎아먹는데 자신의 교구를 팔아치운 일이 적지 않게 공헌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54. [54] 잉글랜드 교회에서도 위클리프를 이단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는 증거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유해를 화형시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55. [55]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의 지배자들은 교황의 말을 안 듣는 것을 넘어서서, 병력을 보내 로마를 쑥대밭으로 만드는가 하면, 교황을 마음대로 갈아치우고, 아예 대립 교황을 세우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변방의 보잘 것 없는 왕국이었던 잉글랜드 국왕이 했던 반항은 유럽 대륙의 강자들이 했던 '행패'에 비하면 귀여운 앙탈에 지나지 않는다. 잉글랜드가 교황청에 제대로 된 빅엿을 날리기 위해서는 헨리 8세의 출현을 기다려야 했다.
  56. [56] 헨리 8세가 성공회를 만들고 가장 먼저 한 일은 국왕이 영국 교회의 최고 수장이라는 수장령을 발표하고, 신임 캔터베리 대주교로 하여금 캐서린과의 결혼이 무효임을 선언하게 한 것이었다. 이에 로마 교황청은 헨리 8세를 파문하는 것으로 화답한다.
  57. [57] 사실 제국 내에서 독자적인 권한보다는 세속 군주와 협조적인 관계였고, 강력한 황제가 출현할 때마다 실제적인 힘이 없는 교황은 세속 권력 공백 시기가 아니면 거의 항상 '신앙심이 약한 군주들'에게 무너졌다.
  58. [58] 프랑스의 경우 프랑수아 1세 시절 볼로냐 조약으로 9개 대주교 직위를 비롯한 주교,수도원, 수녀원장 직위 600여개 임명권은 프랑스 왕이 교황 대신 직접 행사하고, 수입도 프랑스 왕이 차지하기로 교황과 합의했다. 대신 교회 분열기 공의회에서 프랑스 측이 인정하지 않던 교리를 사후 추인하는 소소한 양보 정도로 답례
  59. [59] 헨리 8세는 자신의 결혼무효를 승인하지 않는 교황을 두고 '로마의 주교일 뿐'이라며 국내 간섭을 거부한 것이지, 기존 기독교의 체계를 갈아엎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60. [60] 가톨릭 전례를 상당부분 유지했다고 해도 대중 신심 행위의 상당부분이 폐지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헨리 8세 이후 에드워드 6세 치하의 짧지만 급진적인 개신교화 정책의 영향도 컸다.
  61. [61] 즉 식자층이든 도시인이든 프로테스탄트는 분명히 소수였다.
  62. [62] (J.J. Scarisbrick, Henry VIII (1997)).
  63. [63] 와이어트 반란은 프로테스탄트가 중심이 되었으나, 종교를 직접적인 명분으로 내걸지는 않았다.
  64. [64] Ronald Hutton, A Brief History of Britain 1485-1660 (London, 2010).
  65. [65] Peter Cunich, "The Dissolutions and their Aftermath", in A Companion to Tudor Britain.
  66. [66] 이 시기에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한국과 미국 장로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신조 중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신조’가 생겨났다. 이 당시 청교도는 영국 국교회 안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성공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다.
  67. [67] 청교도 중에서도 국교회에서 내부 개혁에 회의적 입장으로 다수인 장로파와 대립. 신학적으로 회중교회를 선호하기 때문에 회중파로도 불린다.
  68. [68] 당연히 39개 신조에 위배되는 천주교와 유니테리언은 제외였다.
  69. [69] 이러한 이유로, 성공회는 타 개신교에 비해 성모 마리아에 대해 더 유화적인 시각을 보이는 등, 가톨릭 전통을 더 많인 물려받은 경향을 보인다.
  70. [70] 한국은 '가톨릭은 마리아를 믿는 잘못된 종교'라는 중상모략을 일삼는 일부 개신교 목사들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자들의 성모마리아에 대한 인식이 유달리 좋지 않은 국가다. 한국 루터회 역시 성모 공경은 인정하나, 성모송은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에 한국 성공회는 기존 가톨릭 신자들을 포용하기 위해 성모 신심에 더욱 유화적인 관점을 보인다.
  71. [71] 과거 미국 성공회가 지금보다 보수적이었을 때는 이런 인테리어가 흔했다.
  72. [72] 한국에서 가톨릭의 이미지가 무척 좋은 편이여서 흔히들 간과하는 사실이지만, 가톨릭은 매우 보수적인 종교다. 가톨릭에서 갈라져 나간 개신교를 대하는 시각은 더욱 그러하다. 엄연히 개신교에 속하는 성공회를 보편 교회로 인정할 날은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이다. 가톨릭은 정교회와 함께 기독교 사상 최고(最古)의 종파이고, 이 두 종파는 서로를 기독교 초대교회의 둘 뿐인 직계 후손으로 공인한다. 이들 입장에서는 매우 당연하게도 모든 개신교는 이단교리를 함유한 이단이자 교회를 분열시키는데 일조하는 열교 세력에 불과하다. 같은 그리스도교이지만 결코 온전한 ‘교회’로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73. [73] 기혼자도 정교회에서 주교가 될 수 있지만, 이는 미혼 신부가 없는 경우에 한하고, 주교가 되면 별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74. [74] 다른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성공회는 하나의 구심점 아래 위치한 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에 따라서 입장이 다르다. 관구에 따라서 여성 신부를 인정하지 않거나, 여성 신부는 인정하나 여성 주교는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동생애자 신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75. [75] 사실 이쪽이 교회법의 끝판왕이긴 하다.
  76. [76] 천주교 교회법과 비교할때는 그렇다 치지지만, 대한성공회 교회법과 장로회 교회법(예: 예장통합 교회법 - 장로회에서는 '헌법'이라 부름)을 비교해보면 성공회 쪽이 대략 안습. 참고로 장로회 교회법에는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이 통째로 들어가있다.
  77. [77] 천주교 개종 1~2년만에 천주교 신부로 서품받을 수 있는 성공회 신부 출신과 달리 개신교 목사 출신은 천주교 신부가 되려면 처음부터 수년 간의 신부 양성 과정을 거쳐야 한다.
  78. [78] 다만 기혼 주교는 주교품을 받을 수 없다.
  79. [79] 옥스포드 운동의 주도자 중 하나로서, 성공회의 천주교화에 기여했기에 시복되었다. 최근 존 헨리 뉴먼 추기경에게 전구하여 받은 기적이 승인 됨에 따라 곧 시성 될 예정이다.
  80. [80] 즉 개신교를 강경하게 대변하는 입장, 예장고신 등
  81. [81] 엄밀히 말해서 영국UK이 아닌 잉글랜드 국교이다.
  82. [82] 성공회 역시 기독교 교회다. 성공회 신자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삼가도록 하자
  83. [83] 7성사, 신부 독신, 실체 변화, 루터 신학에 영향받은 윌리엄 틴틀이 번역한 영어 성경 소지 금지 등
  84. [84] 이때 헨리 왕의 수위권을 부인한 토머스 모어는 반역죄로 목이 잘렸다.
  85. [85] 애시당초 성공회 역시 다른 개신교 종파와 마찬가지로, 교황과 같은 특정인이 교회의 수장을 맞는 시스템을 부정하며 탄생한 종교다.
  86. [86] Semi-Pelagianism, 구원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맞지만, 그 은총에 인간선행으로 응답하여야만 완성된다는 주장이다. 신인협동설이라고도 한다. 정통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87. [87] 메리 1세 시절 영국이 천주교로 복귀했던 때. 성공회에는 '추기경'이라고 하는 직위는 없다.
  88. [88] 어떤 사람들은 프리메이슨이 음지에서 암약하며 세계를 입맛대로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프리메이슨은 실제로는 이신론 신봉자의 사교 단체에 불과하며 어떠한 정치적 실권도 가지고 있지 않다. 차라리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이 더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89. [89] 의외로 개신교에서 성공회로 옮아 온 사람들이 전례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
  90. [90] 이튼 칼리지는 이튼 스쿨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의 국제중학교와 비슷하게 주로 부유층 자제들이 진학하는 학교다. 웰비 대주교는 이튼 칼리지 졸업 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진학하여,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91. [91] 한국에서는 '영국 국교회'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으나 영국은 보통 연합왕국(United Kingdom)을 가리키므로 혼란의 여지가 있는 표현이다. 물론 영국(英國)이라는 용어 자체가 원래는 잉글랜드를 가리키다가 연합왕국을 가리키는 말로 와전된 것이 굳어진 것이라 애초에 문제가 있는 표현이지만... 그리고 사실 잉글랜드 '국교회'도 아니고 그냥 '잉글랜드 교회'가 직역명으로 더 정확하다. 다만 국교회라고 부르는 건 잉글랜드에서 형식적으로 국교(established church) 지위가 있다는 것을 명시하기 위해 의역한 것이다.
  92. [92] 전통적으로 잉글랜드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일부 접경 지역에 한정. 웨일스 대부분은 잉글랜드 국교회 산하에 있다가 분리된 웨일스 성공회(Church in Wales)가 관할한다.
  93. [93] 터키 및 구 소련 국가들도 포함한다.
  94. [94] 미국 성공회도 유럽 일부 지역을 관할한다.
  95. [95] 캔터베리 대주교(직책)도 성공회 형성 이전에는 천주교 소속이었다. 애초에 종교개혁 이전 시기의 잉글랜드 국교회의 역사는 잉글랜드 천주교의 역사이기도 하다.
  96. [96] 세계에서 유일하게 하원보다 의석이 많은 상원이다. 2015년 11월 현재 하원인 평민원은 650석인 데 반해 귀족원은 자그마치 822석이다. 참고로 귀족원은 의원의 정수를 따로 정해 놓지 않는다.
  97. [97] 귀족원은 국민들의 선거로 뽑히는 조직이 아니다 보니 민주주의가 성숙하면서 자연스레 권한이 크게 축소되었다. 그리고 현대의 다른 민주 국가들을 보아도 상원과 하원의 실권이 대등한 경우는 있어도(예: 미국) 상원이 하원을 압도하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하원이 상원을 압도하고 상원은 단지 하원을 보조하거나 가끔씩 견제하는 정도인 경우가 더 많다.
  98. [98] 실제로 보수당·자민당 연립 정권(2010년 5월~2015년 5월)하에서 자민당 주도로 추진했던 상원 개혁안에서도 이들의 의석은 남겨놓게 되어 있었다. 자민당의 개혁안은 귀족원 의석의 정수를 지금의 절반으로 축소하고, 대부분의 의석을 선거로 뽑게 하였다. 그리고 선거로 뽑히지 않는 의석은 의원 정수의 20%를 넘지 못하도록 했다. 여기서 선거로 뽑히지 않는 20% 중에 성직귀족 의석을 포함시켜서 존속시키게 했다. 사실 자민당의 자유주의 취향대로라면 성직귀족의 의석도 없애는 게 맞다. 하지만 보수당과의 연립정부를 꾸린 상황이므로 타협을 위해 성직 귀족의 의석을 남기기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수당 내에는 상원 개혁 자체에 반발하는 의원들이 많아 개혁안 자체가 폐기돼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99. [99] 영국 센서스에서 북아일랜드, 스코틀랜드는 따로 집계하나 웨일즈는 잉글랜드와 통합. 그런데 웨일즈 인구가 적어서 별 차이 안난다.
  100. [100] 설립 당시 스코틀랜드 일각에서 한 나라로 합병되는 것에 반발하는 분위기가 있는 상황이었는데,(물론 지지한 사람들도 있었음) 만약 스코틀랜드에서 Anglican Church라는 용어를 쓰면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에 종교적으로까지 침투하려 한다는 적대적인 반응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이런 사태를 우려한 탓인지 스코틀랜드 성공회 이름에는 Episcopal을 집어 넣었다. 다만 현재 홈페이지 주소는 scotland.anglican.org 식이라 도메인에 anglican이 들어가 있다.
  101. [101] 아일랜드 섬에서 활동하는 많은 조직들이 섬 전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오히려 아일랜드 공화국과 북아일랜드를 따로 관할하는 조직을 찾는 게 더 힘들 정도.
  102. [102] https://www.cso.ie/en/media/csoie/census/census2016/2016censusforms/65995_English_Household_2016_New_Version_Do_Not_Complete.pdf#page=4
  103. [103] 천주교 78.3%, 성공회 2.6%, 정교회 1.3%.
  104. [104] 북아일랜드 신교도 중 적지 않은 수가 스코틀랜드 이주민의 후손이다. 따라서 이들의 후손들 중에 장로회 신자가 많다.
  105. [105] 그렇지만 북아일랜드에서 개신교를 다 합치면 천주교 신자보다 수가 많다. 성공회와 장로회 신자가 북아일랜드 신교도 대부분을 반분하고 거기에 소수의 감리회 신자가 존재하는 식이다.
  106. [106] 참고로 두 성공회 성당은 마주보고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서로 거리가 가깝다. 도보로 3-4분 거리.
  107. [107] 1932년부터 1948년까지 에이먼 데 발레라 총리 재임 시절 아일랜드 정부와 가톨릭교회는 특별히 강하게 유착하고 있었고, 이 당시 천주교 우익 및 보수 민족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성 패트릭 대성당 몰수 및 반환 주장이 일었다. 이 주장은 여론의 상당한 지지를 받았지만 현실화되지는 않았다.
  108. [108] 보통 The Episcopal Church(TEC/EC)로만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109. [109] 미국 성공회 관구의 관할 지역은 미국을 비롯해서 유럽, 나아가 대만까지 포함된다. 여기서는 주로 미국 내의 성공회에 대해서 다룬다.
  110. [110] 정치적으로도 Paul Kleppener(1979)에 따르면 19세기 말 성공회 교도들이 민주당을 지지하던 비율은 전체 인구의 45%였으며 공화당을 지지하던 비율은 55%였다.(이 당시에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포지션이 정반대였다.)
  111. [111] 정확히 얘기하자면 워싱턴 국립 성공회 성당 건립을 미 연방 의회가 의결한 것.
  112. [112] 이들 중 상당수가 이신론자이긴 했다. 이 시기 지식인들은 기독교식 세계관에는 동의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종교 성향은 아니었다. 당시 이신론자들은 독실한 기독교인은 아니었으나 칼뱅주의 윤리관과 정치론에 공감했다. 그래서 이신론 성향임에도 성공회 신자를 자처했으며 성공회 신자로서 큰 무리 없는 신앙생활을 했던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이신론자로 알려진 조지 워싱턴의 경우도 대통령 취임식 마치고 바로 성공회 성당에서 열린 추수감사절 감사성찬례에 참여했을 정도였다. 이들이 정말 기독교인이냐 아니냐에 대한 말들이 많긴 하지만 그들에 의해 정립된 천부인권 등의 건국이념이 기독교에 근거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113. [113] 트럼프 이후에 재평가 받았다.
  114. [114] 연합감리교(UMC)는 주류교단(Mainline Protestant 계열이라고 인정받아 왔으나 다른 주류교단과는 달리 최근에 보수파의 입김이 꽤 강해졌다.
  115. [115] 1950년대부터 오순절교회와 신학적으로 비슷한 보수적 독립교회들도 미국에서 크게 성장했다. 이들의 대사회적 입장 또한 다른 보수 개신교 교단과 비슷하다.
  116. [116] 흑인 교단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교단이 있고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교단이 있다.
  117. [117] 보통 Mainline 대신 Old Line 으로도 불리는데 역사적으론 18~19세기 당시 백인 주류 WASP 다수가 믿었던 개신교 교단들이다.
  118. [118]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
  119. [119] 일각에서는 메인라인(Mainline) 교단이 장로교, 루터교, 침례교, 감리교, 성공회 등 몇몇 교파의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인 것처럼 이해하지만 이는 틀린 이해다. 한 가지 분명히 할 점은 장로교 교단이나 루터교 교단이라고 해서 다 '메인라인(Mainline)' 교단으로 분류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장로교 교단 중에서도 미국장로교(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나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 등 교단 색채가 대채로 보수적인 경우 '메인라인(Mainline)' 교단으로 분류되지 않고 '보수'나 '복음주의' 성향 교단으로 분류된다. 이는 루터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어서 '루터교 미주리시노드' 교단이나 '루터교 위스콘신시노드' 교단의 경우에도 '복음주의 루터교' 교단과 달리 '메인라인(Mainline)' 교단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심지어 미국성공회(The Episcopal Church)를 탈퇴한 북미성공회(Anglican Church in North America)도 '메인라인(Mainline)' 교단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메인라인(Mainline)' 교단이라 함은 장로교, 루터교, 감리교, 침례교, 성공회 등의 전체를 의미하는 개념이 아니라 그 교파 중 특정 교단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Mainline_Protestant
  120. [120] 쉽게 말해 앵글로-천주교와 복음주의 사이의 중도파. 광교회파를 자유주의를 따른다고 보기도 한다.
  121. [121]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례개혁을 충실히 받아들인 천주교인 대다수
  122. [122] 예를 들어 천주교 성당은 오르간 대신 풍금을 배치한 경우도 상당하지만 성공회 성당은 되도록 반드시 오르간을 배치한다. 하지만 미국은 프랑스와 함께 전통 천주교 운동의 발원지인데다가 그 운동이 가장 활발한 나라 중 하나이다. 미 전역에 전통 천주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성당이 있으며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 등의 대도시에는 그런 성당이 몇 곳이나 있다. 때문에 미국 천주교의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신자들은 굳이 성공회 전례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 성공회가 천주교를 흉내냈을 뿐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123. [123] 한국의 성공회는 미국의 성공회보다 천주교와 더 비슷했었다. 하지만 70년대 이후 한국의 성공회는 전례/신학 양 측면에서 광교회파와 저교회파 성향이 상대적으로 강해지면서 현재는 미국과 한국의 성공회 어느쪽이 더 천주교에 가깝느냐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124. [124] 남침례회는 교인 수가 1400만이 넘는 미국 내 최대 개신교 교단이다. 이에 비하면 미국성공회는 미국 개신교 내 비중이 2%도 되지 않는다.
  125. [125] 실은 이렇게 성호를 그리는 경우 천주교의 현대 미사형식인 바오로 미사보다 전통적인 미사 형식인 트리엔트 미사와 비슷한 경우가 많다. 즉, 현대 천주교보다 더 많이 긋는다.
  126. [126] 삼위일체성체성사세례성사 관련 믿음 등. 쉽게 말하자면, 주류 기독교 종파들의 공통분모들.
  127. [127] 이는 미국 성공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성공회의 문화 자체가 그렇다.
  128. [128] 의외로 남동부 아프리카의 성공회 교회들이 규모가 큰 편이다. 미국 성공회 신자수를 다 합해도 케냐 성공회 신자수에 못 미친다.
  129. [129] 성공회 내 복음주의파. 동성결혼과 동성커플에 관한 혼인성사에는 반대하지만 호모포비아적 태도를 배격하고 여성 신부 문제에는 호의적인 입장. 그러나 2016년 후반기 이후에는 동성결혼에 대해 사실상 찬성입장으로 돌아선 듯하다.
  130. [130] 현 천주교 바오로 6세 전례와 비슷한 전례로
  131. [131] 이는 천주교도 마찬가지로 멜버른 대주교가 호주 교회를 대표한다. 현직 천주교 멜버른 대주교는 데니스 하트이다.
  132. [132] 천주교 신자도 2011년 조사(25.3%)에서 5년만 22.6%로 거의 3%나 폭락했다. 사실 이전의 천주교 교회의 선방(?)도 천주교 교회세가 강한 아일랜드나 남미 이민자의 효과 덕이었다.
  133. [133] 이슬람은 레바논을 비롯한 중동 이민자, 인도계 종교도 인도계 이민자의 영향이며 동남아 화교 출신 이민자나 한국계 이민자는 개신교가 많은 편이다.
  134. [134] 공식 통계로는 천주교가 0.3%, 개신교가 2.0% 정도이나 둘 다 최소 두 배에서 네 배 정도로 추산된다. 왜냐하면 중국공산당 통제 하의 어용교회만이 공인교회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신학자 차원에서는 다양한 신학 성향이 있지만 이신칭의파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일선 비공인교회는 특히 보수 신학의 영향력이 강하다.
  135. [135] https://www.yearbook.gov.hk/2016/en/pdf/E21.pdf
  136. [136] 강원도, 경상도, 제주도는 이보다 더 낮고 서울, 경기도, 전라도는 이보다 더 높다. 특히 경상남도는 제주도 못지않게 개신교 신자가 적은 동네이다.
  137. [137] 홍콩 사립학교의 70%는 기독교 재단이다. 특히 성공회가 제일 비중이 크다. 그 이유는 성공회가 사회참여를 중요시해서이다.
  138. [138] 신도 수가 비슷한 대한성공회가 (서울교구/대전교구/부산교구) 3개의 교구로 한 관구를 이루는 것에 비하면 매우 많이 나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잘게 나눠진 데에는 여러 섬으로 나눠져 있는 지리적 상황과 여러 계통으로부터 전래를 받은 역사적 상황이 관여했다.
  139. [139] 천주교가 약 50만 명, 정교회는 약 1만 명, 개신교가 약 50만 명으로 집계된다.
  140. [140] 우리나라 그리스도교인은 약 1500만명인데, 이 가운데 성공회 신자는 5만 명밖에 안 되고, 그마저도 냉담자나 교단을 옮긴 사람이 많아 주일 미사에 꾸준히 출석하는 사람은 1만 명이 채 안 된다.
  141. [141] 한일 성공회, 한일합방 사죄 성명서 발표키로
  142. [142] 참회로 日 성공회 거듭나…화해는 이벤트 아닌 영원한 과정
  143. [143] 단, 여기서 자유주의(liberal)와 광교회파를 다르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자유주의가 이성의 눈으로 성서와 전통을 보는 것이고, 광교회파의 경우 성서와 전통과 이성의 균형을 중시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물론 일반적으로는 광교회파와 자유주의를 동일하게 본다.
  144. [144] 수정 전에는 모든 루터회 교단이 주교제를 실시하는 것처럼 기술되어 있었으나, 오히려 장로회와 유사한 구조의 교단도 있고, 심지어 몆몆 교단은 회중제를 실시하는 곳도 있어서 성공회와 구조가 크게 다른 교단도 존재한다. 또한, 중앙집권적인 성격이 강한 교단이라도 전부 다 주교제를 실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역교회(Landeskirche)라는 개념을 중시하기 때문에 교회 구조가 크게 중시되는 분위기는 아니다. 당장 한국 루터교회만 해도 주교제가 아니다. 장로회침례회보단 중앙집권적 성격이 많이 강하긴 해도.
  145. [145] 그리고 심지어 주교제가 실시되는 경우에도 개교회의 자치와 개성을 존중하는 경향이 상당히 강하며, 이건 주교제를 실시하고 있는 북유럽 루터교회 교단들 역시 마찬가지라 교회별로 예배 양식이나 인테리어 등이 꽤나 차이가 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더불어 주교제를 실시하더라도 회중교회적 요소도 같이 받아들이는 교단들도 있어서, 개교회의 권한이 성공회보다 더 강한 경우가 일반적이다.
  146. [146]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감리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주교제를 그닥 좋게 보지 않았다. 이는 존 웨슬리가 부흥 운동을 하면서 영국 국교회 주교들에게 많이 시달린 탓이다. 웨슬리는 감독제의 폐해를 알고, 미국 감리회를 형성하면서 절대 감독 호칭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물론 나중에 은근슬쩍 감독 호칭을 쓰게 되긴 했지만. 그리고 감리회 역시 성공회보다 개교회의 권한이 강하다.
  147. [147] 특히 칼뱅주의파. 개신교라고 해도 루터파와 칼뱅파는 완전히 다르다. 근본주의는 아예 루터교회를 이단시하는 사람도 있다.
  148. [148] 그러나 일반적으로 루터교회는 종교개혁적 원조라는 정체성 때문인지 프로테스탄트다운 정체성이 성공회보다 더 강하며,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천주교나 성공회랑 차이가 큰 부분도 있다. 일단 보편교회론을 부정한다는 점부터가 차이가 있다
  149. [149] 천주교은 성공회 출신으로서 천주교로 개종한 신부와 평신도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기 위한 사목적 지침까지 마련한 상태이며, 별도의 관구까지 마련한 경우도 있다. 또한 그 해당 특별 관구 내에서는 성공회의 전례를 유지할 수 있는 특례도 적용되고 있다고 한다. 다만 이는 천주교와 성공회의 일치가 아니라, 천주교의 성공회 흡수이기에 반발하는 성공회 인사들도 꽤 많다.
  150. [150] 천주교의 바티칸과 달리 캔터베리로 대표되는 영국 성공회가 전 세계 성공회를 통제하지 못하고 대개 국가별로 설정되는 관구의 자율성이 보장된다는 특성이 가장 근본적 장애가 될 확률도 높다. 그래서 10년마다 전세계의 주교들이 모이는 람베스 회의에 불참한다는 식의 행동이 가능하다.
  151. [151] 감리회는 성공회에서 갈라져 나왔다.
  152. [152] 주로 진보주의자
  153. [153] 그러나 루터회, 감리회는 이 합의를 인정하지 않는 교단도 적지 않다.
  154. [154] 감리회와 성공회 저교회파는 탄생부터 쌍둥이 같은 관계였다. 함께 태어나 다른 환경에서 자라게 된 것. 감리회 문서 참조. 한국의 감리회는 장로회의 영향을 많이 받아 약간 다르긴 하지만, 세계적으로는 현재도 둘 사이에 교리나 분위기가 대동소이한 편이다.
  155. [155] 진보적인 신학을 중요시하는 신자들의 경우에는 감리회보다 기장에 더 동질감을 느낀다.
  156. [156] 그래서 이들은 동성결혼 등 성소수자 문제에 꽤나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157. [157] 일본 대학 랭킹 5위권인 릿쿄대학을 일본 성공회에서 설립운영하고 있고, 신부도 이 대학에서 배출된다. 그러나 신자는 이 학교 학생 중에서도 극소수다.
  158. [158] 연세대학교 이사회를 구성하는 12명의 이사 가운데 4명이 이렇게 기독교 교단들에게서 각각 파송을 받아 임명되었었다.
  159. [159] 금서목록에서는 '영국 청교'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어서 나온다. 이름은 실제 역사상의 청교를 연상시키지만, 작중 묘사는 영락없이 성공회이다.
  160. [160] 단,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토트 콜의 모델이 마르틴 루터라는 점에서 루터교회가 연상될 수도 있다.
  161. [161] 팬들이 천주교나 성공회 신자로 추정하고 있다.
  162. [162] 성공회는 흔히 개신교로 분류되지만, '주교, 신부, 부제'라는 3성직을 인정하는 교파다.
  163. [163] https://saintsaviours.net/message-from-our-vicar
  164. [164] 김종철, 김종희, 김종식 등 일가가 신앙을 공유하며 특히 어머니와 아내가 독실한 신자로 유명하다. 김승연 본인도 소년 시절에 성공회 성당에서 복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참고기사 성공회대 대학본부 건물 '승연관'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165. [165] 연합감리교 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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