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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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선사 시대(3백만 년 전~기원전 3000년경)
2.1. 인류의 출현, 진화, 확산
2.2. 도구의 발달
2.3. 신석기 혁명
3. 고대 시대(기원전 3000년경~서기 500년경)
3.1. 고도화된 사회와 문화
3.2. 주요 고대 문명
3.3. 철학과 종교의 발달
3.4. 제국들의 출현과 흥망성쇠
4. 고전후 시대(500년경~1500년경)
4.1.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4.2. 유럽
4.3. 동아시아
4.4. 동남아시아
4.5. 남아시아
4.6.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4.7. 아메리카
4.8. 오세아니아
5. 근대 시대(1500년경~1945년)
5.1. 근세 서양 세계의 변화와 확장
5.2. '신세계'와 '구세계'
5.3. 화약제국
5.4. 15~19세기의 지역세계
5.5. 혁명의 시대
5.6. 후기 근대의 변화
5.7. 제국주의와 저항
5.8. 두번의 세계대전
6. 현대 시대(1945년~현재)
6.1. 냉전
6.2. 탈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
6.3. 인권 의식의 변화와 민주화
6.4. 기후변화
6.5. 21세기, 바로 지금
7. 관련 문서

1. 개요

[1][2]

세계사(世界史)는 단어 그대로 세계역사를 다루는 학문으로, 전 인류의 역사에 관한 정보를 사학, 인류학, 고고학, 언어학, 사회학, 민속학 등의 관점을 통해 수집, 종합, 분석, 추리, 연구, 정리한 것이며, 역사를 전세계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동향을 일컫는다.

과거의 일을 기억하고 후대에 알리고자 하는 습성은 인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어떤 형태로든 존재했다. 역사가들은 과거의 일을 계속해서 후대에 전해 내려왔는데, 그 형태는 글이 있는 문화권이라면 문자 기록으로서의 역사로 남았고, 없는 곳이라면 신화, 전설, 구전 문학, 동화 등의 구전 역사의 모습으로 남았다. 그러나 지리적, 정보적 한계로 인해 그러한 움직임은 지역 역사에 국한될 수 밖에 없었다. 인류 전체의 동향을 한 흐름으로 보아 정리한 인류사라는 분야는 전근대 사회에서도 14세기 이슬람 역사가인 이븐 칼둔 등이 시도한 바가 있으나 역시나 당시 시대상의 한계에 부딪혔다. 이후 교통, 통신 수단의 발달로 문화권 사이의 접근과 국제적인 교류가 쉬워지며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민족이나 국가적 단위를 뛰어넘는 역사적 사고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볼테르, 헤겔, 카를 마르크스, 아놀드 토인비 등의 근현대 인물들이 세계사적 사고의 기틀을 제안하였다. 20세기와 21세기에 들어 세계화정보화가 급격히 가속화됨에 따라 학문으로서의 세계사는 폭발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현재까지도 연구가 지속되고 있다.

세계라는 것은 그 규모가 커 세계사를 연구하는 사학자들은 연표적인 개념의 시간의 흐름을 무작정 정리하는 것보다는 큰 주제를 통해 인류의 동향을 연구하는 편이다. 전쟁, 외교, 경제, 문화, 무역, 종교, 질병, 젠더, 예술, 음식, 사상 등의 테마들이 그러한 주제의 일부이다. 공통적으로는 인류의 생활 양식에 따라 시대를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흔히 유럽사의 시대 구분법인 '고대-중세-근세-근대'가 세계사에 대입되어 사용되고는 하지만, 이러한 시대구분법은 공통점을 찾아내서 분류하는 것에 주관이 개입할 여지가 많고 실제로도 역사가마다 그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사학계에서는 아주 논쟁적인 주제이다.

인류의 직계 조상이 약 3백만 년 전 동아프리카에서 발현했을 때부터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남극을 제외한 모든 대륙에 정착할 때까지 인류는 석기를 사용해 수렵과 채집을 통해 오랜 시간 생활했다. 환경에 따라 이러한 수렵채집사회를 그대로 유지한 경우도 있었으나, 기원전 8000~5000년경 큰 강 유역을 중심으로 농업과 동물들의 가축화가 폭발적으로 시작되어(신석기 혁명) 문명이 탄생하였고, 문자회계가 발명되었다. 곧 큰 규모의 섬세한 문명이 지구 곳곳에서 번성하였으며, 인류는 다양한 왕국제국의 흥망성쇠를 목격하게 된다. 다양한 문명들은 무역이나 문화를 통해 서로 교류하였으며 이로 인해 지역세계들은 독창적으로 발달할 수 있었고, 동시에 영토, 종교, 민족 등의 이유로 수많은 전쟁 또한 거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교류는 문명의 초창기부터 현대 시대까지 이루어지고 있으며, 여러 기술적, 문화적 번성을 이끌어내기도 했으나, 페스트, 천연두, 스페인 독감, 에이즈와 같은 전염병이 인류 사이에 쉽게 도는 이유 중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호모 사피엔스가 약 3만년 전 아메리카베링 해협을 통해 건너간 이후 빙하기가 끝나 아프로유라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은 물리적으로 단절되었으나, 15세기를 기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면서 서로의 문물이 교환됨과 동시에 학살전염병으로 인하여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90% 가량이 몰살당하여 아메리카의 문명들이 붕괴하였다. 이후 제국주의산업화를 거치며 인류 사이의 분쟁, 탄압, 착취는 절정에 달했고 기술력의 발달이 폭발적인 속도로 이루어졌다. 두번의 세계 대전냉전을 거치며 인류의 생활 양식은 송두리채 뒤바뀌었고, 냉전 중 일어난 우주 경쟁으로 인해 인류는 최초로 우주 공간에 자발적으로 진출한 지구 생물[3]이자 에 도착한 지구 생물이 되었다. 이후 교통·통신 수단의 발전과 정보 혁명을 거치며 현대 사회의 모습이 완성되었으며, 현재 인류는 기후변화·환경오염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 등의 문제점으로 인해 하나의 지구 공동체로서 이를 해소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아래부터는 인류의 발흥부터 현재 2020-05-23 12:43:48까지의 세계사를 시대별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중세'의 개념이 유럽중심적이며 다른 문화권에 대치하기 힘든 경우가 많음을 감안, 해당 문서에서는 영어 위키백과와 유사한 선사, 고대, 고전후, 근대, 현대의 분류를 따랐다. 이러한 구분법은 큰 흐름의 변화를 구별하기 위한 편의상의 구분이고, 실제 세계사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역사를 같은 기준으로 칼로 자르듯 엄밀하게 구분하기는 힘들다는 점을 일러둔다. 지역별, 민족별, 언어별, 종교별 등의 구분은 세계사/분류 문서를 참고 바람.

각 문단 내용 현재 작성중.

2. 선사 시대(3백만 년 전~기원전 3000년경)

선사 시대는 대개 '문자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의 시대를 일컬으며, 본 문서에서는 인류의 직계 조상이 처음 출현했을 때부터 인류가 문자를 처음으로 발명한 기원전 3000년경 까지를 선사 시대로 놓는다. 선사 시대는 현재까지의 인류의 역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시대는 인류의 출현, 인류의 진화 및 확산, 석기의 사용, 의 발견, 음악미술 등 인류 문화의 발전, 종교의 태동, 주 사용 도구의 변화, 농업의 발전, 문명의 시작 등의 키워드로 요약될 수 있다.

2.1. 인류의 출현, 진화, 확산

인류의 이동 경로

첫 인류이자 처음으로 직립 보행을 시작한 현 인류의 직계조상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가 약 400~600만년 전 동아프리카에서 발현했으며,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약 180만 년 전인 호모 에렉투스 때부터 완전히 직립보행을 시작 했으며 불을 사용하는 법을 익히고 음성 언어를 사용했으며, 약 40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이 등장하였다. 현생 인류라 볼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가 약 20만 년 전쯤 아프리카에서 등장했으며, 10만 년 이후 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으로 진출을 시작했다. 아프리카를 빠져나온 시점에서 당시에 생존해있던 네안데르탈인과 접촉해 혼혈이 발생하였고, 이 때문에 아프리카 외부의 현생 인류[4]인 호모 사피엔스 유전자에는 네안데르탈인으로부터 발원된 유전자가 1~4%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출발해 곧 유라시아로 퍼져나갔고, 약 3만년 전에 빙하기로 인해 연결되어 있던 베링 해협을 통해 미대륙까지 진출했다.

2.2. 도구의 발달

현 인류의 직계조상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시절부터 인류는 석기를 사용했으며, 석기 시대 시작된 약 3백만 년 전부터 선사 시대의 시작으로 본다. 석기 시대는 대체로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중에서도 인류의 출현부터 약 1만년 전까지 지속되었던 구석기 시대는 세계사의 아주 긴 부분을 차지한다. 어느 정도냐면, 인간이 살았던 시기를 100으로 본다면 구석기 시대는 98.8 정도를 차지한다. 다시 말해 인류의 역사가 24시간이라면 15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주먹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는 소리다! 이 시대의 인류는 주먹도끼, 찌르개 등의 뗀석기를 사용했으며, 동굴이나 막집을 이동하며 사는 이동 생활을 했다. 수렵과 채집을 통해 자원을 획득하였으며, 동굴 벽화 등의 미술 활동을 남겼다.

일부 학자들은 구석기 시대신석기 시대의 짧은 전환점 사이를 중석기 시대로 정의하기도 하는데 이 시대에는 빙하기가 끝나고 작고 날랜 동물들이 많이 나오면서 이에 맞춰 활이 개발되었다. 또한 작은 동물 및 물고기를 잡거나(화살, 작살, 작은 투창 등) 해체하기 위하여 조각이 작은 잔석기가 많이 쓰였다. 다만 이는 유럽 및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대륙에 따른 구분법으로, 지역에 따라 중석기 시대의 구분이 굉장히 모호한 지역도 있기에 학자들의 통일된 견해는 아니다.

2.3. 신석기 혁명

약 1만 2천 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따뜻해지며 인류는 약 1만 년 전부터 신석기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이때의 인류는 돌도끼, 돌낫, 갈돌과 갈판 등 간석기, 그리고 토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농경과 목축이 시작됨에 따라 소위 '신석기 혁명', 또는 '농업 혁명'이 시작된다. 이는 수렵채집경제로부터 생산경제로 옮겨가는, 인간의 생활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꾼 인류사에 있어 아주 극적인 변화로, 식량을 수렵/채집하는 단계에서 생산 단계로 발전함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였다.

농업은 중동에서는 기원전 10,000년경, 지금의 중국에서는 기원전 7000년경, 인더스 계곡과 유럽 대륙에서는 기원전 6000년경,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기원전 4000년경 즈음에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곡물의 재배와 동물의 가축화는 보리를 재배하고 염소가 길들여진 기원전 8500년경 중동지역에서 처음으로 일어났다. 인더스 계곡에서는 기원전 6000년경 를 가축화하여 모내기를 했다. 중국의 황하 인근에서는 기원전 7000년경에 , , 수수 등의 서곡(黍穀)을 재배했지만, 장강 인근에서는 기원전 8000년경에 농사를 시작해 을 주식으로 삼았다. 아메리카 전반에서는 해바라기가 기원전 4000년경 재배되었고, 기원전 3500년에 중앙아메리카에서는 옥수수이 재배되었다. 남아메리카안데스 산맥에서는 감자가 처음으로 재배되었으며 라마알파카도 가축화되었다.

다만 이 시대에 농경이 등장한 것은 맞지만 이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수렵과 채집을 기본으로 하며 생활하였다. 또한 예외도 있어서 일본의 신석기 시대는 수렵 및 채집 생활이 충분한 자원을 제공할 수 있는 경우, 아예 농경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보인다. 일본의 신석기 시대인 조몬 시대가 그 예이다.

이 당시에는 관개기술이나 파종법 등 농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신석기 후기에 들어서도 농경은 조악한 형태와 소규모로 할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농경(벼농사)은 아무래도 철제 농기구 사용과 관개수로 정비에 노동력 동원이 가능한 계급제와 국가 제도가 정비된 청동기, 초기 철기 시대 이후의 일이다. 그래도 탄수화물(섭취 후 당으로 변환되며 지방으로 축적됨) 섭취량이 증가했기 때문에 성인병과 비만은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다.

또한 이 시기부터 인류는 동굴천막을 버리고 진흙으로 만든 벽돌로 을 짓기 시작하며, 이나 과 같이 본격적으로 돌을 이용한 건축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초기형 물레와 베틀은 이 시기에 이미 존재. 즉 이 시기부터 직물이 생산되고, 천옷이 존재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류가 '노동'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때부터다. 흔히 '도구와 기술이 발달하면 삶의 질도 향상한다'라는 선입견과는 다르게, 농경이 시작되자 수렵 채집을 하던 시절보다 여가 시간과 영양 수준이 오히려 줄었다.[5] 7만 년 전 인간이 살았던 아프리카 동부 해안 유적에서 조개 껍질을 갈아 만든 목걸이 따위가 나올 정도로, 구석기 시대에조차 인류의 정신 문화는 싹트고 있었다. 하지만 농업이 시작되면서 유물의 질적 수준은 급격하게 하락한다. 채집 시절에 근사하게 목걸이도 만들고 절구도 모양 좋게 다듬어서 썼지만, 농사 짓기 시작하면서 바빠서 그런 건 없다가 되어버렸다. # 이러한 신석기 시대의 '정신 문화의 상실'은 잉여 자원과 이로 인한 '재산' 개념의 생성, 나아가 이를 기반으로 시작된 계급사회와 '사치'의 개념이 도입되고 나서야 원래대로 회복한다. 쉽게 말해 농업이 인류 전체의 문화를 일시적으로 앗아간 셈인 것이다.

유골의 경우도 채집 시절에는 영양 상태가 고르고 키도 컸지만, 농경 시대에 들면서 키도 작아지고 관절의 마모도 심해졌다. 그러고도 식량이 모자라 다툼이 잦았는지, 이 시대에 발견되는 유골의 상당수에서는 전투로 인한 타박상의 흔적이 발견된다. 이는 대체적으로 농업이 불러온 폭발적인 인구증가가 현상의 원인이라고 지목되고 있다. 아무리 조악한들 농사는 농사고 농업과 채집, 수렵의 병행은 인류로 하여금 '정착생활'을 가능케 했다. 그 결과 전쟁약탈 행위가 벌어지고 그 흔적을 남기기 시작한 것이다. 허나 원시적인 초기의 농경으로는 급격히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었고, 특히 일시적인 기상 변동 등 국지적인 자연적 압력에도 취약했던 것은 분명하다. 여기에 급작스런 인구 밀도 증가와 무엇보다 가축 사육이 필연적으로 불러오는 전염병 등으로 공동체가 와해되는 시기를 겪기도 하는 등 농경사회의 정착은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이뤄진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신석기 시대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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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대 시대(기원전 3000년경~서기 500년경)

고대 시대는 최초의 문자인 쐐기 문자의 등장 시점, 즉, 인간이 문자를 발명함에 따라 문자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시작된 기원전 3000년경부터 시작된다. 이 고대 시대가 언제 끝나는지는 애매한 부분인데[6], 본 문서에서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476년)했을 때 즈음인 서기 500년을 고대의 끝으로 잡는다.

이 시대는 문자의 발명, 고도화된 문명의 출현, 제국의 탄생 및 확장, 전세계적인 학문의 발달 등의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3.1. 고도화된 사회와 문화

쟁기질하고 씨를 뿌리는 농부 부부
고대 이집트, 기원전 1200년경

농업은 훨씬 더 밀집된 인구를 허용했고, 이는 곧 국가로 조직되었다. 농업은 또한 식량 생산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다른 직종에 종사할 수 있게 할 수 있게 만들어,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또한 농업의 발달로 최초의 도시가 탄생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도시들은 무역, 제조업, 정치의 중심지로 탈바꿈하였다. 기원전 6000년경 제리코나 차탈회윅과 같은 초기 형태의 도시가 출현했다. 이는 농업의 발전으로 인해 조직적인 행정과 사회 구조가 형성되었다는 가설이 정설이었으나, 최근에는 기원전 9600년 무렵에 발전한 것으로 추측되는 괴베클리 테페가 등장하면서 아직 농경 문화에 들어서기 전인 수렵 채집민들도 이미 조직적인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흔히 서양권에서 '문명의 요람'이라고 부르는 비옥한 초승달 대지 지역, 즉 이집트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전 3000년경 문명이 맨 처음으로 탄생했으며, 이러한 문화는 바퀴, 다양한 청동기, 선박, 직물, 건축물, 그리고 문자회계의 발명 등으로 이어졌다. 주변의 문명에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문자를 발명한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기원전 3400~3100년경), 고대 이집트(기원전 3250년경), 중국 문명(기원전 2000년경), 그리고 메소아메리카 문명(기원전 650년경)이 있다.

3.2. 주요 고대 문명

많은 사회가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며 세계적으로 도시국가들이 발달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메소포타미아티그리스 강유프라테스 강, 이집트나일 강, 인도 반도인더스 강, 중국양쯔강황하 인근, 그리고 현재 페루의 노르테치코 지역의 포르탈레자 강, 파티빌카 강, 수페 강 인근 등 큰 강 유역에 집중되었다[7]. 큰 강의 유역이 문명의 요람이 된 이유는 수로를 통한 교통이 편리하고, 관개 농업에 유리한 물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메소포타미아에서 인류 최고(最古)의 문명이라고 불리는 수메르 문명에서 기원전 4000년 경에 우루크 등 다수의 발달된 도시국가들이 출현하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3000년경에 쐐기 문자가 발명되었다.

한편 고대를 시작으로 지중해를 인근으로 큰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유럽아프리카, 아시아의 경계를 잇는 지리적 특성상 지중해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아주 중요한 바다로 평가되곤 하는데, 이는 상업의 발달, 그리고 사상과 과학기술의 교환으로 이어졌다. 또한 기마술과 전차가 발달했으며 이는 군사 기술이 발전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발전은 수많은 국가들, 특히 제국들의 탄생과 확장으로 이어졌다.

메소포타미아에는 수많은 도시국가들 사이에서 교류와 분쟁이 이어졌고, 이집트에서는 상, 하 이집트의 두 왕국이 존재했으며 왕국 안에는 30여 개의 도시국가들이 저마다 성벽을 두르며 사실상의 자치를 누리며 살고 있었는데, 기원전 3100년 경 상 이집트의 왕이었던 나르메르가 이를 통일함에 따라 이집트 왕조가 시작된다. 크레타 섬에서는 기원전 2700년 경부터 미노스 문명이 발현했으며, 이는 유럽 최초의 문명으로 간주된다. 기원전 25~21세기에는 사르곤 대왕 치하에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다스린 아카드 제국, 그리고 아카드가 멸망한 뒤엔 수메르 제국의 다양한 왕조들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평정했다.

다음 천 년 동안, 문명은 전 세계에 걸쳐 발전했다. 중요한 자원에 접근하거나 중요한 무역 루트를 통제하는 국가들이 우위에 오르면서 무역은 점점 힘의 원천이 되었다. 기원전 17세기 부터 시작된 미케네 문명이 기원전 15세기 경에 전성기를 맞았다. 《일리아스》에 따르면 비슷한 시기 소아시아에 위치했던 강력한 도시국가 트로이와 적대 관계였고 이후 두 번이나 패퇴시켰다고 하는데, 트로이 전쟁의 실체는 아직 분명하지 않으나, 전쟁이 실제로 발발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기원전 12~11세기 경에 일어난 것으로 추측한다.

한편 인도에서는 기원전 15세기 경에 인도에 정착한 아리아인들에 의해 베다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이 시대는 베다가 쓰여지며 초기 인도 사회의 힌두교와 다른 문화적 측면의 근간을 마련했다. 기원전 550년경부터 인도 반도 전역으로 십육대국이 세워지며 베다 시대는 끝을 맞는다.

중국에서는 최초의 왕조 국가인 하나라가 출현한 것으로 보이지만 고고학적 단서가 부족해 국가로서의 그 존재는 확실치 않다. 존재가 확실한 상나라는 기원전 17세기부터 기원전 11세기 무렵까지 번성했으며 청동기가 발달했고 갑골문자과 무덤 유적 등을 남겼다. 주나라는 상이 멸망하고 기원전 11세기 무렵에서 기원전 256년까지 존재한 나라로, 고공단보(古公亶父)의 시대에 집단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주문왕의 시기에 국(國)으로의 정체성을 확립했고, 주무왕목야대전(牧野大戰)에서 상나라를 패퇴시키고 당시 중국의 패권을 차지했으나, 기원전 770년 경 주나라가 견융의 공격을 받아 천도 한 뒤(동주시대)부터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된다.

한편 아메리카 대륙은 비교적 다양한 지역 문화로 분열되어 있었다. 북아메리카는 전통적인 수렵채집 형태 안에서 다양한 형태의 문화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메소아메리카남아메리카에선 기원전 1500년부터 서기 500년 사이에 올멕, 마야, 사포텍, 모체, 나스카 문명 등 보다 복잡하고 중앙집권적인 문명이 출현했다. 올멕 문명은 석조 거대 두상 등의 유물을 남겼고, 마야 문명역법, 천문학, 철학 등에서 높은 수준의 학문적 발달을 경험했으며, 나스카와 인근 문명들은 나스카 지상화를 남기는 등 여러 부분에서 문화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3.3. 철학과 종교의 발달

석가모니
(기원전 480?~400?)

공자
(기원전 551~479)

소크라테스
(기원전 469~399)

고대 시대의 인류는 전세계적인 철학종교의 동시다발적 발달을 목격했다. 독일의 철학자인 카를 야스퍼스는 1949년의 그의 저서 《역사의 기원과 목표》에서 이 시대를 거시적이고 역사철학적인 시선으로 분석하였고, 기원전 800년경에서 서기 200년경 사이를 '축의 시대'라고 명명했다. 이 시대에는 유라시아 전역, 정확히는 페르시아, 인도, 중국, 그리고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직접적 문화교류 없이 독자적으로 철학적, 종교적 발달이 나타났는데, 중국에서 출현한 유교, 인도에서 출현한 불교자이나교, 고대 그리스의 철학 사조, 페르시아에서 출현한 조로아스터교와 레반트에서 출현한 유대교 등의 유일신교 등이 전부 기원전 800년을 기해 600년 경에 특히 발달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시대에 정립된 철학과 종교들이 발달, 확산, 교류되며 세계 각각의 문명의 역사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고, 더 나아가 현재까지의 역사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며,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전세계의 인류가 이 시대의 산물의 종교적, 철학적 사상의 영향력 아래에 있게 되었다.[8]

동아시아에 특히 영향을 끼친 것은 중국의 동주시대에 쏟아져 나온 제자백가 사상으로, 춘추전국시대를 겪으며 제후국들이 부국강병을 추구하여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고자 했던 배경 속에서 다양한 사상들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공자, 맹자, 순자 등이 주장한 가족 윤리를 중시하여 중국 주류 사상을 수립한 유가, 노자, 장자 등이 주장한 자연의 순리를 따를 것을 주장하여 중국인들의 자연관, 예술관에 영향을 끼친 도가, 그리고 한비자가 집대성 한 엄벌주의를 통한 사회 질서 유지를 주장한 법가 등의 사상들이 탄생해 중국사에 큰 정치적, 철학적 영향력을 끼쳤다. 특히 유교는 이후로도 20세기까지 정치, 제도, 철학, 종교 등에 넓게 걸쳐 동아시아 세계의 근간으로 작용했다.

남아시아에서는 기원전 7세기경에 우파니샤드 철학이 등장하며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자이나교, 힌두교불교 교리의 이론적·사상적 토대를 이루는 우파니샤드는 현대의 대중에게 친숙한 (業), 윤회(samsara) 등의 개념을 맨 처음으로 언급하였으며, 종교뿐만 아니라 고대 인도 철학의 기본적 근간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기원전 6세기경 마하비라가 아주 엄격한 계율과 고행을 통해 해탈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종교인 자이나교를 창시했다. 또한 유사한 시기에 고타마 싯다르타(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고 인도 북부를 중심으로 가르침을 펼침에 따라 불교가 탄생했고, 평등과 윤리적 실천을 통한 해탈이라는 개념이 크샤트리아와 바이샤 세력의 지지를 얻었다. 이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기원전 4세기경 북부 인도를 통일하고 마우리아 왕조를 수립하여 아소카 대왕 시기에 전성기를 이룩했는데, 신실한 불자였던 아소카 대왕의 치하 아래 불교 철학, 문학, 예술이 높은 수준으로 발달하였고, 그러한 흐름 속에서 상좌부 불교가 발달하여 동남아시아 세계로 전파된다. 한편 1세기 무렵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 시기에 새로운 형태의 불교이자 대중의 구제를 강조하는 대승 불교가 출현하였는데, 대승 불교는 중국에 전파되고 곧 삼국시대의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도 전파되게 되어 동아시아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한 7세기 송첸감포 왕 때 티베트에 불교가 전해지고 8세기 티송데첸 왕이 불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티베트에 불교가 자리잡기 시작하였는데, 대승 불교가 번성하였던 북인도, 중앙아시아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티벳에서는 인도로부터 유입된 정통 대승불교가 흥성할 수 있었고, 밀교에 영향을 받으며 곧 티베트 불교라는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한다.

서아시아에서는 기원전 6세기경 자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하게 된다. 다신교 사회였던 고대 페르시아에서 그는 선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를 숭배하는 유일신교를 창시하였고, 세상이 선과 악의 대립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개념, 천국과 지옥의 개념, 그리고 구세주의 개념과 같은 세계관을 창시했다. 조로아스터교는 동부 이란을 중심으로 여러 이란계 종족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하고, 조로아스터교를 추종하는 메디아아케메네스 왕조가 서아시아의 패권을 쥐면서 급성장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으로 아케메네스 왕조가 패망하자 조로아스터교 역시 국교의 지위를 잃고 약화되었고, 이후 헬레니즘 시대와 파르티아의 지배를 거치면서 아나히타미트라 등 하위신격들을 숭배하는 변종 분파들이 널리 퍼졌으나, 사산 왕조가 등장하며 사산 왕조는 그 이전 400년 동안 이란을 지배한 파르티아인들의 유목민적 전통과 느슨한 봉건제도, 타 종교나 문화(특히 헬레니즘)에 대한 호의적 태도 등을 비난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건설을 주창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를 국가권력 강화와 사회 통합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이에 따라 사산 왕조 초기 조로아스터교는 정통 교리와 경전을 확립하는 작업, 국가권력과 연계된 관료적 성직기구의 정비 작업 등을 진행하며 다시 한 번 국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는 유대교, 기독교와 같은 종교들에게도 영향을 주게 되고, 반대로 유대교, 기독교, 불교의 영향을 받아 서기 3세기에 마니교라는 종교도 생겼으나 사산 왕조에게 이단으로 취급받아 탄압을 당했다.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 철학이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데, 소피스트들의 출현과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사상가들에 의해 서양 철학의 기틀이 잡히게 된다. 아테네 민주정의 발달로 영향력 있는 정치가가 되기 위해선 말솜씨가 뛰어나야만 했고, 이런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변론술과 수사학 등을 돈을 받고 가르치는 "지혜로운 자들", 즉 소피스트들이 등장했다. 소피스트들은 진리의 상대성, 주관성을 강조했는데, 이를 비판한 소크라테스는 보편적, 절대적 진리를 강조했고, 변증술을 처음으로 고안했으며, 또한 서양철학의 근본적인 화두이면서도 결코 그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들을 제시했다.[9] 그의 직계 제자인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을 비롯한 이전 철학자들을 계승하여 앎, 우주, 그리고 인간 등에 관하여 방대한 철학적 사유를 남겼고, 교육기관 아카데메이아를 설립하여 자신의 철학을 기록했다. 플라톤의 수제자 중 하나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 사후 아카데메이아에서 나와 플라톤과는 사뭇 다른 방향의 철학적 탐구를 개진해나갔다. 예컨대 실제 자연에 대한 탐구를 보다 중시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 문학 등 그야말로 다양한 학문 분야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고 현대의 '철학'에 대한 관점에서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윤리학에서 현대까지 계승되는 주요한 관점들을 제시하였다. 자세한 것은 철학사/서양 문서의 '고대 철학' 소문단 참고. 이 철학자들의 사상은 기원전 4세기 경 알렉산드로스 대왕 치하의 마케도니아 왕국이 팽창하며 유럽 전역과 중동으로도 뻗어나가게 된다.

한편 이러한 흐름에 해당하지 않았던 대다수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지역의 사람들도 근대 시대에 접어들고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축의 시대 종교/철학의 영향력 아래 놓여지게 된다.

3.4. 제국들의 출현과 흥망성쇠

4. 고전후 시대(500년경~1500년경)

고전후 시대(Postclassical Period)는 고대와 근대 사이를 일컫는다. 보통 이 시기는 흔히 중세로 불리고는 하지만, 이 중세라는 것이 참 유럽중심적이면서도 정의하기도 애매하고 민감한 것이기에... 당장 중세라는 개념이 나온 유럽사 내에서만 해도 중세를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끝나는 것으로 봐야하는지에 대한 사학자들의 토론이 아직까지도 이어진다. 그러니 이를 세계사에 대입하고자 하면 혼란이 일어나는 당연한 것이다. 그 예로 한국사만 봐도 중세가 남북국시대에 시작되는지 고려시대에 시작되는지 애매하고, 러시아사의 경우 중세라는 표현을 아예 피하고 표트르 대제를 기준으로 그 전을 고대 러시아라고 부르며,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의 경우 전고전기-고전기-후고전기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혼란을 피해 현재 세계사에 한해 학계는 고대와 근대의 사이 시대를 '고전후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추세가 되었으며(예: 영어 위키백과Post-classical history 문서[10]), 이 문서도 같은 표기를 사용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러한 시기는 단순 편의를 위한 구분법이며 절대적인 기준점이 될 수 없음을 명심하자.

이 시대는 세계 문명의 지리적 확장, 문명 간의 교류 네트워크 발달, 세계 주요 종교들(기독교, 이슬람, 불교 등)의 영향력 확장, 몽골 제국의 팽창, 유라시아 대륙에서의 흑사병 발병,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정치경제적 판도 변화 등의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4.1.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아랍 제국의 영토 확장

중동과 그 근역은 7세기까지 동로마 제국사산 왕조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7세기에 접어들자 아랍 지역에서 무함마드에 의해 창시된 이슬람이 발흥하였다. 무함마드는 아라비아 반도의 분열되어 있던 아랍 부족들을 이슬람의 기치(旗幟) 하에 통합하였다. 동로마로부터 시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고 페르시아를 완전히 정복하여 중동 대부분 지역이 아랍-이슬람 문화권이 되었다[11].

정통 칼리파 시대의 이슬람 제국은 급격한 팽창과 성장을 이루었다. 정통 칼리파 시대가 끝날 무렵 이슬람 제국의 영토는 이미 아라비아 반도에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페르시아, 레반트, 리비아를 아우를 정도로 성장했으며, 이들 영토는 후의 우마이야 왕조가 추가로 확장을 한 이후에도 이슬람 세계의 중심부로서 기능하였다. 여기에 맞먹을 정도의 팽창을 이룬 중동의 제국들은 아케메네스 왕조오스만 제국 정도를 빼면 전무하며, 후대의 우마이야 왕조가 정복한 영토까지 합치면 중동 역사상 최대의 제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마이야 왕조는 두 번째 이슬람 칼리파 시대로써, 현재 시리아에 있는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이슬람 제국을 통치하였다. 우마이야 왕조는 정통 칼리파 시대의 정복을 이어받아 마그레브 지역과 이베리아 반도, 트란스옥시아나, 페르가나, 신드 지역 등을 정복하였다. 전성기인 아브드 알 말리크 대에는 예루살렘에 현재도 남아있는 바위의 돔을 건설하였으며,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모스크 등 기존 로마 건축을 받아들인 건물을 각지에 남겼다. 이 시기 이슬람은 그 세를 크게 확장하여,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이란 고원에서 북아프리카까지 넓은 영역을 관할하였다. 4대 칼리파인 알리가 암살당하고 난 후, 정통 칼리파 시대는 끝나고 무아위야 1세에 의해 첫 세습 왕조인 우마이야 왕조가 통치하게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도 정복사업은 계속되어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까지,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 인도 북서부까지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718년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에 실패한 후 쇠퇴하였으며, 740년경부터 호라산에서 아바스 가문이 대두할 때에 마침 시리아 일대는 내전에 시달렸다. 또한, 아랍인들이 새로운 이슬람 개종자인 마왈리(대부분 페르시아인)에 대한 차별을 일삼아 결국 시아파와 마왈리의 지지를 받은 아바스 혁명군에게 패해 마지막 칼리파 마르완 2세가 살해되며 750년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우마이야 일족은 잔치에 초대된 후 방심한 틈을 타 모조리 숙청되는데, 히샴의 손자가 살아남아 서쪽으로 도주하여 알 안달루스(이슬람 지배기의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국가가 바로 후우마이야 왕조이다. 시즌 2

한편 우마이야 왕조 이후 성립된 아바스 왕조는 동아시아 근방까지 진출하여 탈라스 전투(751)에서 당나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중앙아시아의 통치권을 확립하였다.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벌어진 중국이슬람 제국의 분쟁이며, 중국의 서역팽창 저지와 중국이 독점하고 있던 종이를 제조하는 기술인 제지술이 이슬람 문명으로 전파되어 유럽까지 퍼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후 당나라가 완벽하게 패배함으로써 실크로드 교역로를 포함한 중앙아시아이슬람 세력권에 넘어갔다.

〈압바스 제국 도서관의 학자들〉
1237년 야햐 알와시티 作.

아랍인들은 정복지의 제도와 문화적 유산들을 빠르게 받아들였으며, 그 결과 8~11세기 동안 중동 지역은 정치, 경제, 문화 전반을 통틀어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는데, 이를 이슬람 황금기라고 부른다. 그 예시 중 하나가 9세기 경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 마문이 현재의 바그다드에 건립한 지혜의 집으로, 지혜의 집은 중세 학문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어 중세 중동의 문학, 사학, 철학, 종교학과 같은 인문학의 구심점이 되었다. 또한 알 가잘리와 같은 철학자도 등장하여 중세 이슬람 철학의 기반을 닦았다. 건축학, 의학, 약학, 공학 등의 과학기술도 발전했는데, 특히 의학 기술이 당대의 다른 지방에 비해 비약적인 발달을 겪었다.[12] 실제로 당나라 시기에 이슬람 제국을 방문한 중국인의 기록에서, 구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시리아 출신의 의사들이 이슬람 제국에서 크게 활약했음을 알 수 있고, 사산조 역시 동로마에서 박해받고 찾아온 네스토리우스 교인들의 고전 그리스-로마 문화를 잘 흡수했으며, 뿐만 아니라 동쪽에서 인도 세계의 의학적 지식까지 흡수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의 거의 대부분을 지배하던 압바스 왕조의 통제력이 약해져 지방 세력들이 난립하고, 용병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유목민 튀르크인들이 아대규모로 이주해 오기 시작하면서 중동 지역은 극심한 정치적 혼란 상황에 빠졌다. 이에 더해 11세기 말에는 유럽에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고, 13세기 초에는 몽골이 쳐들어오는 외우내환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유럽 십자군 세력은 이집트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서부 이슬람 세계가 정치적 통일성을 되찾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격퇴되었으나, 이란을 중심으로 한 동부 이슬람 세계는 튀르크인 도래 이후의 오랜 정치적 혼란에 뒤이은 몽골의 무자비한 약탈과 파괴로 인해 황폐화되었다. 게다가 중동 지역 대부분은 사막 혹은 건조 기후이기 때문에 원래부터 농경지로 쓸 만한 땅이 많지 않았는데,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한 관개 시스템 역시 수천 년에 이르는 집약적 농업으로 인한 토양의 염화와 관개 시설의 파괴, 사막화로 인해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로 인해 13세기 이후 중동 지역은 인구-생산력 측면에서 유럽 지역에 비해 열세에 놓이기 시작했고, 곧 문화-기술적 측면도 유럽 지역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따라잡히게 되었다. 그나마 비단길, 바닷길을 이용한 아시아-유럽 간 중계 무역으로 큰 이득을 보았지만, 이 역시 지리상의 발견과 대항해시대의 시작으로 막히게 되었다. 또 중동권 역시 흑사병에 의해 유럽 못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4.2. 유럽

유스티니아누스 1세
(482~565)

476년 서로마 제국이 완전히 멸망하자 프랑크 왕국은 스스로 '가톨릭의 보호자'를 칭하며 교황의 종교적 권위를 등에 업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와 대등한 지배권을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또한 가톨릭의 보호자로 나서면서 가톨릭을 믿는 서유럽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기도 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496년에는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13]가 가톨릭 교도로 개종[14]하여 강성해지고,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이 아리우스파 게르만 왕국들을 공격하여 약화 쇠멸시키자, 남은 게르만족 왕국들도 상쟁하다가 멸망하거나, 국가안정을 위해 동로마인과의 융합을 도모하며 결국 가톨릭으로 전향하면서, 아리우스파는 사라진다. 그리고 두 개의 정통파 교회인 가톨릭정교회는 처음에는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으나, 신학적·정치적·문화적인 다양한 문제로 인해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양대 총대주교구를 중심으로 세력이 나뉘면서 7세기에 상대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후에는 서로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려 하기 시작했다.

당시 로마의 교황이 갖고 있던 정치·사회적인 권위는 강하지 않았다. 초기에는 여전히 강성한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수호자로 남아 지원하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권력에 있어서 더 우위에 있었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도 오랜 기간 동로마 제국의 라벤나 총독부가 여전히 이탈리아 반도에 남아있었고, 535년부터 시작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이탈리아 원정으로, 이탈리아 반도가 동로마에 수복되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로마 황제의 눈치를 봐야 했던 시기도 꽤 길었다.[15]

그래도 로마 교회는 이전부터 총대주교구들 중 첫 번째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서방에서의 교황권 강화를 계기로 삼아 로마 교황이 전체 기독교 교회를 지배한다고 천명했고, 동로마 황제가 비호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16]에서는 로마 교황이 단지 다섯 총대주교 중 1명일 뿐이라고 반박하며 자신의 칭호에 '전 기독교 세계의 총대주교'를 덧붙였다.

814년의 유럽

하지만 726년, 동로마 황제 레오 3세성상파괴령을 내리자 양 교회의 사이는 더욱 벌어졌다. 당시의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동로마 황제의 성상파괴령을 단호히 거부했으며, 동로마 제국에서 한 세기가 넘은 내전 끝에 843년에는 성상이 재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교회의 결합은 요원해 보였다. 정치적으로는 포티우스 분열 등의 사건이 발생했으며, 특히, 동로마 제국이 내전에 시달리는 중이던 서기 800년, 로마 교황 레오 3세프랑크 왕국의 왕 카롤루스 대제[17], 즉 샤를마뉴를 서방의 새로운 황제(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시킴으로써 두 교회 중심지의 골은 이제 메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던 와중 프랑크 왕국은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분할되고 만다. 카롤루스 대제까지는 프랑크의 세속군주가 가톨릭의 교황보다 더 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의 사후 아들들이 제국을 분할 상속[18] 받으며 제국은 한 세대 만에 분열되었고, 이후 북쪽에서부터 바이킹이 침공해와 정착하며, 서유럽은 봉건 사회로 접어들게 된다. 이 시기 교황의 권위와 권력이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동시에 교황령 또한 크게 늘어나게 됐다.

845년에는 마자르족아르파드가 동유럽의 판노니아 평원으로 정복활동을 벌인 후, 정착해 나라를 세운다. 이후 그의 손자와 증손자에 의해 10세기 초 가톨릭으로 귀의한 뒤 대공의 지위를 얻으면서 헝가리 대공국이 된다. 962년 독일 왕국오토 1세이탈리아 왕국을 병합하고 신성 로마 황제로 임명되면서 새로운 신성 로마 제국이 건국되었다. 헝가리 대공국의 군주 이슈트반 1세는 신성 로마 황제 오토 3세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으며 1000년에 헝가리 대공국은 헝가리 왕국이 된다.

카노사의 굴욕(1077)
하인리히 4세(中)가 클뤼니 수도원장 후고(左)와 마틸데 여백작(右)에게 간청하는 것을 그린 12세기의 삽화이다.[19]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과 노르망디 공국)의 사상·종교·사회·정치에 있어서 교황은 막대한 권위와 권력을 지니게 됐다. 특히 교황의 권한이 세속 국가들을 압도할 정도로 커졌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 1077년의 하인리히 4세를 굴복시킨 카노사의 굴욕과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을 굴복시킨 존 왕에 대한 파문 사건(1209년) 등이 있다. 당시 교황의 힘은 단지 종교계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영적 권력뿐만 아니라, 교황령이라는 이탈리아의 노른자위 땅+각국의 교회에서 걷히는 세금을 바탕으로 한 세속 권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교황이 황제나 왕과 직접 군사력으로 맞서는 것까지는 불가능했지만, 당시 황제나 왕들도 자국 내에 자기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왕 못지않게 강력한 대영주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의 눈치를 계속해서 봐야 했다. 교황은 이들에게 황제나 왕의 관을 씌워줄 권한이 있었고, 현직 황제나 왕보다는 약간 못 미치는 세력의 이들을 지원해 줄 군대와 돈이 있었기에 이렇게 강력한 교황권이 가능했던 것이다.

흔히 교황과 황제의 대립 과정에서 황제들이 옹립한 대립교황들의 존재가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교황이 이런 목적에서 세운 대립왕(Contrarex, 다른 번역명으로는 반왕)들도 많았다. 카를 4세가 교황이 세운 대립황제가 황제가 된 대표적 예이며 프리드리히 2세, 콘라트 3세 등도 유명한 대립황제 출신 황제들이다. 이렇게 교황의 지원을 받은 황제들은 당연히 교황의 눈치를 잔뜩 볼 수밖에 없었고 성직 임명권, 교회 과세권 등을 넘겨주며 교황권을 강화시키게 된다.

이렇게 종교의 사회적 지위나 권력이 올라가자 한때 교황들이 유럽의 왕이나 황제보다도 강력한 실존하는 권력을 뽐낸 적도 있다. 1305년부터 1978년까지 모든 교황은 삼중관이라는 관을 썼는데 왕관 3개가 쌓여 있는 형태이다. 이 삼중관은 서유럽, 더 나아가 전체 가톨릭 세계의 왕과 황제, 대통령, 총리 등의 세속 지도자들보다도 교황의 권위와 권세가 높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인 장치였다. 그러다 결국 막강해진 교황권에 의해 십자군 전쟁(1069년-1291년)이 시작된다. 이 종교전쟁은 오래 지속되었지만 4차(1204년 4월 13일,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에 이르렀을 때에는, 성지인 예루살렘 탈환은커녕 목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던 동로마 제국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해 버림으로써, 정교회와의 연을 끊어버리는 등, 사실상 유럽권이 패배한 전쟁이 되었다.

전쟁이 교황의 예상과 달리 실패했기 때문에, 교황권의 몰락과 신앙의 약화를 가져왔고, 결정적으로 1350년대에 유럽을 덮친 흑사병이 치명적으로 작용하면서 교회의 권위가 떨어졌다.[20] 몽골의 지배 하에 있던 중앙아시아 평원 지대에서 시작되어 동유럽의 해상 교역로를 따라 유럽 전역으로 퍼진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은 7,500만명~2억 명의 인구, 즉 당시의 유럽 인구의 최소 30%에서 50%, 지역에 따라서는 70% 이상이 몰살하는 대재앙을 겪었다. 이로써, 기사와 영지를 기반으로 한 장원 경제의 붕괴가 찾아왔고, 동방으로 향하는 무역로를 새롭게 개척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도시 경제와 화폐 경제가 발달하게 되었다. 즉,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가 탄생할 기반이 만들어진 것이다.

잔 다르크
(1412~1431)

유럽의 중세 말기에 중요한 사건 하나는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1337~1453)으로, 백년전쟁은 잉글랜드 왕국의 플랜태저넷 가와 프랑스 왕국의 발루아 가 사이에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일어난 일련의 분쟁들을 통틀어 일컫는 것이다. 기사도가 최대 정점을 찍음과 동시에 쇠퇴기에 들어간 시기이며, 당사국인 영국프랑스 양국은 물론 서유럽의 중세 봉건시대의 종언과 절대왕정의 시작을 알리는 심대한 영향을 주었고, 두 나라의 국민정체성을 싹트게 했다. -그렇게 19세기 초엽까지 가는 오랜 라이벌 대결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연히도 같은 1453년에 동쪽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오스만 베이국에게 함락당하면서, 1453년은 유럽의 중세와 근세를 가르는 분기점이 된다.

이 시기 오스만 제국은 최전성기를 누리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넘어(1453) 유럽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헝가리 왕국,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들이 최선을 다 했으나, 결국 헝가리 왕국모하치 전투(1526) 이후, 나라가 분열되고, 왈라키아 공국(1522)과 몰다비아 공국(1476)은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된다.

4.3. 동아시아

4.4. 동남아시아

4.5. 남아시아

4.6.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4.7. 아메리카

4.8. 오세아니아

5. 근대 시대(1500년경~1945년)

근대 시대는 고전후 시대가 끝난 16세기 경 이후의 시대를 의미한다. 근대는 다시 전기 근대(early modern period)와 후기 근대(late modern period)로 나뉘는데, 전기 근대는 근세로 번역되기도 한다. 전기 근대는 주로 르네상스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후기 근대는 산업 혁명프랑스 혁명을 즈음하여 시작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종종 근대 안에 현대를 넣어 근대를 전기 근대-후기 근대(근세)-현대의 셋으로 분류하기도 하며 근대와 현대를 분리하는 경우 대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를 현대로 본다. 이 문서에서는 근대와 현대를 분리하고 전대, 후기 근대를 '근대'로 한데 묶어 설명한다.

이 시대는 르네상스, 대항해시대, 이른바 '화약 제국'이라 불리는 이슬람 권역의 확대, '신대륙' 문명의 붕괴 및 유럽의 착취, 대서양 무역, 계몽주의, 시민 혁명, 산업 혁명, 모더니즘, 식민주의, 제국주의, 국민국가, 민족주의, 두번의 세계대전 등의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5.1. 근세 서양 세계의 변화와 확장

5.2. '신세계'와 '구세계'

5.3. 화약제국

5.4. 15~19세기의 지역세계

5.5. 혁명의 시대

5.6. 후기 근대의 변화

5.7. 제국주의와 저항

5.8. 두번의 세계대전

6. 현대 시대(1945년~현재)

현대 시대근대의 다음 시대이자 바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시대이다. 세계사적인 시점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1945년) 이후 지금까지를 일컫는다. '현대'라는 개념은 근대에 포함되거나 ‘근현대사’ 등의 표현으로 묶이고는 하지만, 과학 기술의 발달 등으로 인한 인류의 생활 방식의 변화, 그리고 여러 세계사적 비극을 겪고 스스로를 더욱 객관적이고 회의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함에 따른 인류의 사고 방식의 변화를 고려하여 근대와 현대는 다른 시대로 분류되고는 한다. 아무래도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의 역사인 만큼 더욱 신중하고 객관적인 분석이 필요할 수 밖에 없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대는 냉전, 포스트모더니즘, 비식민지화, 인권민주화 운동, 우주 개척의 시작, 인터넷, 환경오염기후변화, 세계화 등의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6.1. 냉전

6.2. 탈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

6.3. 인권 의식의 변화와 민주화

6.4. 기후변화

6.5. 21세기, 바로 지금

7. 관련 문서


  1. [1] 자잘한 오류가 조금 있으니 시청 시 유의할 것.
  2. [2] 최근에 후반부 배경음악에 오류가 생기고 마지막 배경음악이었던 인셉션의 dream is collapsing은 아예 사라졌다.
  3. [3] 다만 유리 가가린이 1961년 우주 공간에 진출하기 전 타발적으로 우주로 쏘아 올려진 동물들이 있기에 인간은 '최초로 우주에 진출한 지구 생물'은 아니다. 그 영광은 1947년의 초파리(...)가 가지게 되었다. 포유류 최초는 1949년 앨버트 2세라는 이름의 원숭이로 복귀 중 낙하산 고장으로 추락사했다. 1957년에 우주로 떠나 영원히 별이 된 최초의 우주견 라이카도 유명하다. 자세한 것은 이곳 참고.
  4. [4] 대부분의 유라시아인 및 아메리카 원주민.
  5. [5] 여담으로 이보다 더한 일이 산업 사회에서 일어났다. 할 수만 있다면 24시간 일을 시켜도 생산량은 계속 늘어날 것이라 기대할 수 있으므로 노동 시간을 한없이 올릴 수 있다. 실제로 바로 그런 이유로 증기기관이 발명되자마자 19세기 노동자들의 근무 시간과 강도가 미친 듯이 높아진다. 때문에 노동자들의 인권 착취가 극심해지고 심지어는 아동노동까지도 동원되게 되었으며, 이는 공산주의가 탄생하고 민중들 사이에서 공산주의가 공감을 얻을 수 있게 되는 또 다른 역사적 배경이 된다.
  6. [6] 고대-중세-근대라는 구분법이 유럽 역사 이론에서 비롯된 시대 구분의 하나. 시대 구분 자체는 르네상스 시대에 자신들과 중세를 구별하면서 시작되었으며, 마르크스의 역사 발전 단계 이론이 나온 후, 경제적 발달 수준에 따라서 구별하는 추세가 우세하다. 자세한 사항은 고대 문서 참조.
  7. [7] 한국에서 흔히 세계 4대 문명이라고 꼽히는 문명들이 바로 이들이지만, 그 척도가 불분명하기에 학계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표현이다. 최근에는 언급한 남미 대륙의 노르테치코 문명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8. [8] 당장 한국만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이어져온 불교유교의 영향력이 아직까지도 한국인의 생활에 진하게 남아있으며, 다수의 한국인이 믿는 기독교 또한 축의 시대 즈음에 중동에서 비약적인 발달을 한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이자 유일신교이다. 현대세계 4대 종교로 손꼽히는 기독교, 이슬람, 불교, 힌두교의 경우, 전자의 2개의 경우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이며 후자의 2개의 경우 축의 시대의 인도에서 출현, 발전하였다.
  9. [9] 플라톤이 묘사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는 경우가 없으며, 책의 중심이 되는 주제는 언제나 미궁(aporia)의 상태에 빠지면서 끝난다. 이 미궁은 인간이 끊임없이 질문하지만 그 해답은 주어질 수 없는 난제들로, 현대 철학에서까지 이른바 '실존의 부조리'로 언급되고 있다.
  10. [10] 중세(Middle ages)의 경우 유럽의 중세만 설명하며 해당 시기의 세계사는 Post-classical history 문서를 참조하라는 주석이 붙어있다.
  11. [11] 이슬람 발흥 전 시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지역은 기독교 문화권, 이란은 조로아스터 문화권이었다.
  12. [12] 내외과적인 치료법은 물론 정신과적인 질병을 의학적인 측면으로 접근한 것은 아랍 문화권에서 최초로 이루어졌는데, 현 시리아 알레포의 아르군 병원에서 정신병 환자들에게 햇볓 쬐기,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요양하기, 그리고 음악 듣기를 처방한 것이 기록으로 남았다.
  13. [13] 갈리아의 투르네 지방에 정착한 클로비스 1세(466년 ~ 511년). 메로빙거 왕조를 세움.
  14. [14] 클로비스는 보통 게르만의 전통 종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여겨지지만, 아리우스파로 개종도 고려했거나, 아리우스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설도 있다.
  15. [15] 사실 이 시기는 동로마 제국이 랑고바르드족 등 적대적 이민족들로부터 군사적으로 로마를 지켜주던 시기라 황제의 권위가 강할 수밖에 없었다.
  16. [16] 물론 로마 황제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항상 같은 편이었던 것은 아니고, 로마 황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견제하기 위해 로마 교황을 끌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17. [17] 궁재 출신의 카롤링거 가문이 메로빙거 가문의 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카롤링거 왕조를 세운 후, 카롤루스 대제(768년 ~ 814년) 때 전성기를 맞이함.
  18. [18] 동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
  19. [19] 하단에 라틴어로 "Rex rogat abbatem / Mathildim supplicat atque"(국왕이 아빠쓰에게 부탁하다. 또한 마틸데에게 탄원하다)라고 적혀 있다.
  20. [20] 이때 아비뇽 유수도 발생한다.
  21. [21] 다만, 고대 동양사는 별로 정확하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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