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重章)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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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손병희
孫秉熙 | Son Byong-hi

출생

1861년 4월 8일

조선 충청도 청주목 산외이면 대주리
(現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 385-1)

사망

1922년 5월 19일

일제강점기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국적

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 임시정부

본관

밀양 손씨(密陽 孫氏)

응구(應九)

가명

이상헌(李祥憲)

직업

독립운동가

종교

천도교

가족

손의조(부) 손병흠(남동생)
홍응화(부인) 손용화(삼녀)
방정환(사위) 손천민(조카)

1. 개요
2. 생애
3. 참고

1. 개요

천도교의 지도자, 독립운동가. 소파 방정환 선생의 장인이다.

2. 생애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아전서자로 태어났고 아명은 응구. 가난과 주위의 냉대 속에서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내면서 양아치 짓을 하고 다녔다. 1877년(?)[1] 괴산에서는 배짱 좋게 수신사를 팼다는데 그 이유는 그 수신사가 하인을 학대한다는 것이었다. 1882년 동학에 입도한 후 양아치 짓은 그만두고 신발을 만들어 팔면서 성실하게 수도하다가 이윽고 충주를 근거지로 한 충의포 도소의 대접주에까지 올라간다.

동학농민운동 제2차 봉기에 북접의 총 지휘자로 활동[2]하면서 남접전봉준군과 공동 작전을 벌여 관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으나, 동학군이 시망한 후 최시형과 살아남은 북접 간부들과 원산으로 피신해 지하조직 신세가 된다. 1898년 2대 교주 최시형이 처형당한 후 도통을 실질로 이어받았는데 계속되는 탄압을 피해 1901년 일본으로 밀항하여 도쿄 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로 근무하던 역관 오세창과 교류하면서 개화론자로 전향한다. 본래는 곧 청으로 망명할 생각이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일본에 재정착한 후 유학생을 유치하고자 조선과 일본을 왔다갔다했다. 이때 사용하던 가명이 이상헌(李祥憲)이다.

망명 시절 충주 출신의 조선인 부호로 행세하던 손병희는 한편 정치 활동에도 적극으로 나서서 이 시기에 일본에 망명 중이던 구 개화파 인사들과 두루 안면을 익혔다. 이때 이용구는 손병희의 명령으로 국내에 돌아와 1904년에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고 단발령 등 급진 개화 운동을 일으키는 한편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돕는 등, 손병희의 충실한 수족 역할을 했다. 그런데 러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진보회가 동학이었다는 사실이 국내에 알려져 정부에서 탄압당할 위기에 처한 때 이용구에게 송병준이 접근하여 자신들의 어용 조직인 일진회와 진보회를 합치면 일제의 힘으로 탄압을 면하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유령조직이나 다름 없던 초기 일진회에 진보회가 합쳐지면서 그 회장 자리를 얻은 이용구는, 그럴싸한 거짓말에 불과했던 정합방론에 지나치게 경도된 나머지 곧 합방주의자로 변신한 때 손병희는 아무것도 모르다가 일진회을사조약을 지지한다는 소식을 듣고 깜놀, 이용구와 갈등하고 정교 분리를 내세워 동학에서 일진회 패거리들을 즐라 버린다. 출교당한 일진회는 이용구를 교주로 하는 시천교를 세우고 원조 동학은 1906년 손병희를 교주로 하는 천도교로 개칭한다.

1908년 교주를 박인호에게 넘기고 민족주의 운동에 본격 투신한 손병희는 교육이 독립하는 열쇠라고 판단해 보성전문학교, 동덕여자의숙 등 애국지사들이 세운 사립 학교들을 인수해 교육 사업에 나선 후 천도교 대표로서 민족대표 33인 회의에 참석해 1919년 3.1 운동을 주도했다가 구속 기소되어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은 후 병 보석으로 석방되고서 가족이 보는 앞에서 임종한다. 손병희는 조선 민간인으로서 최초로 자기 소유한 자동차를 타고 다녔는데 그 자동차가 심지어 캐딜락이었다. 참고로 이 캐딜락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자신의 차가 고종의 캐딜락보다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임금의 자동차보다 좋은 것을 탈 수는 없다면서 고종과 캐딜락을 서로 바꾸어 탔다는 이야기가 있다.

손병희의 일화 운운 나온 것은 일제 연간에 당국에서 퍼뜨린 소문이 꽤 많다. 계간 '역사비평'에서 3.1 운동 당시 일제 당국의 발표나 분석을 따로 연구한 적이 있는데 당시 조선총독부 공식 발표나 기관지에서 자주 다루었던 기사가 요승 손병희의 엽색 행각이나 손병희와 기독교 선교사들 간의 밀착류였다. 전자야 당연히 흑색선전 목적이 짙었고 후자는 3.1 운동의 배후 세력을 기독교계 반일 인사들로 초기에는 봤다는 이야기인데 당대 현장 증인인 윤치호가 3.1 운동 연간에 쓴 일기에 "사이비 교주 손병희가 순진한 사람들 재산 털어먹으려고 독립운동한다고 나서는구나!"라고 쓴 걸 보면 일제가 퍼트린 흑색선전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3] 다만, 윤치호가 '독립운동이 쓸데없이 (시간 → 행동력을) 낭비하는 인생'이라고 비판하는 쟁점을 보며 고려해야 한다.

신복룡 교수가 일제의 이런 자료를 분석하고 여러 후일담을 넣어서 어느 신문에서 "3.1 운동은 기생집에서?"라는 기사를 올렸다. 주제는 민족 대표 33인은 진정한 민족 대표가 아니라는 이야기와 이런 손병희의 행각과 민족 대표의 전원 변절[4]을 들어 비판한다는 점. 문제는 그 신문에서 삽화를 기생이 민족 대표에게 서빙하는 장면으로 그렸다는 점이다. 당연히 천도교 쪽과 독립운동가 유가족들이 반박해서 사과하기는 했으나 단행본에서는 사과하지 않고 있다.

최근들어, 방송에서 민족 대표 33인을 비판한 인터넷 강사 설민석과 유족회간에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설민석은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를 하였으나, 현재 유족회는 설민석의 방송 출연 중단을 요구하는 중이다.

민족 대표 33인은 헌병 경찰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문을 낭독한 후 자발적으로 일본 경무총감부에게 연락하여 투옥하였기 때문에 탑골공원에서의 만세 운동이라는 역사의 중요한 현장에 없었다. 실질적으로 독립운동을 이끈 것은 학생들과 일반 대중들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민족 대표 33인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민족 대표 33인은 본래 종교인으로써 비폭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오히려 3.1운동이 일어나서 투옥되고 무참히 사살당한 희생자들이 발생할 것을 우려했기에 그런 판단을 했던 것도 있었다.

3.1운동은 전 세계에 조선의 실태를 알리는 방아쇠가 되었을 뿐 아니라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3.1 운동의 중요한 의의 중 하나인데, 3.1운동의 정신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근거와 기본 이념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서 3.1 운동 정신을 계승하였다는 문구가 빠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3. 참고


  1. [1] 천도교 측에서 1877년이라고 주장하지만, 수신사 파견 연도를 보면 1876년이 맞는 듯.
  2. [2] 이 시기 북접의 성향은 남접과 판이했다. 초기 북접의 거병 이유를 남접군을 때려잡으려고로 이해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다. 실제로 초기 활약은 남접에서 다 했고 북접과 활동한 시기는 오히려 쇠퇴기이다.
  3. [3] 출처 :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 윤치호 저, 김상태 역, 산처럼 출판사, 2013년
  4. [4] 항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것도 도시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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