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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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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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오등작]] 중 [[일제강점기]] 조선귀족에 [[공작]]은 없었으며, 그에 준하는 작위와 관련한 정보는 [[왕공족]] 문서 참고.
※ --취소선 표시--는 작위를 박탈당하거나 반납한 사람을 뜻하고, __밑줄 표시__는 작위를 반납하려 했는데 일제의 거절으로 반납하지 못한 사람을 뜻함.
※ * 1872년생 이완용(李完鎔)으로 1858년생 [[이완용|이완용(李完用)]]과 다른 사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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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준(宋秉畯)

野田平治郞[1]

본관

은진 송씨(제명)

출생

1857년 10월 7일[2]

작위

조선귀족 자작백작

직업

관리

사망

1925년 2월 1일 (향년 67세)

비고

정미칠적, 친일인명사전 등재

1. 소개
2. 생애
3. 사후
4. 평가
5. 재산 환수 문제

1. 소개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함경남도 장진군에서 출생했다. 법을 가르치는 관리인 율학훈도 송문수와 기생 홍씨 사이의 얼자다. 친자검사도 없는 당시에 기생의 자식이 정확히 누구의 아이인지 뭘로 확신했는지 의문이다. 얼자긴 해도 관리의 자식이 갑자기 세도가의 식객으로 들어간것도 의문이지만 후에 정미칠적의 일원이된다.

일본식 이름은 '노다 헤이지로'이다. 초대 한국은행 총재 구용서의 처외할아버지이다.

2. 생애

2.1. 구한말

한양에 왔다가 민씨 척족의 거물 민태호의 눈에 띄어, 민태호의 애첩인 홍씨 집에서 일하게 되었고, 1871년 무과에 합격하여 수문장청에 배속되었다. 1873년에는 도총문 도사·사헌부 감찰 등을 지내다가, 1884년 갑신정변 후 밀명을 받고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지만, 도리어 설득되어 그의 동지가 되었다.

귀국하여 그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민태호의 양아들인 민영환의 주선으로 출옥[3]하였고 흥해군수·양지현감 등을 역임하다가 체포령이 내려져 다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노다 헤이지로(野田平治郞)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4], 야마구치현 하기(萩)에서 양잠업에 종사하다가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통역으로 귀국하였다. 이때부터 완전히 친일파로 돌아서고 일본의 개 노릇을 하기 시작했는데, 귀국 즉시 윤시병(尹始炳)과 함께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고 다시 이용구(李容九)와 함께 일진회를 만들어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기 위한 전초 작업을 시작하였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후에는 황제 양위 운동을 벌여 친일 활동에 앞장섰고[5], 순종 즉위 후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농상공부 대신과 내부 대신을 역임, 국권 피탈을 위한 상주문과 청원서를 제출하는 매국 행위를 했다. 그 후 다시 일본에 건너가 국권 피탈을 위한 매국 외교를 하여 나라를 팔아먹었다.

2.2. 일제강점기

국권 피탈 후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수여받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으며 자작에 이어서 1920년 다시 백작에 올랐다가 5년 뒤인 1925년 2월 1일에 죽었다. 사망 전날인 1월 31일 다이쇼 덴노의 특별 교지에 따라 정3위로 승서되었고, 사망 후에는 욱일동화대수장이 추서되었다. 다이쇼 덴노는 포도주 12병을 내려 조의를 표했고,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세인이 공지하는 동양 평화의 공헌자"라고 조문했다. 그의 작위는 장남 송종헌이 이어받았다.

3. 사후

1935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자신의 작위를 습작받은 아들 송종헌과 함께 선정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2007년 5월 2일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송병준과 송종헌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다. 위원회는 11월 22일 제3차 재산 환수 대상자를 선정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시행 이후 제3자에게 처분한 송병준의 재산에 대해서도 국가귀속 결정을 내렸다. 송병준의 증손자는 재산 국가귀속 결정에 반발하여 2008년에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했지만 2011년 5월에 패소했다.

4. 평가

이완용보다 개념이 더 없다는 평이 지배적. 참고로 이완용과는 달리 무덤은 파이지 않고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추계1리에 아주 멀쩡하게 잘 누워있다가, 무연고자 묘로 분류되어 땅 주인에 의해 임의로 화장되었다.

한 번은 순종과 함께 기차를 타고 지방 순시를 하던 도중, 먹고 궁녀가 탄 기차 칸에 침입하여 그들을 희롱하다가 당시 시종 무관이었던 어담이라는 사람과 투닥거린 적이 있다고 한다. 송병준이 취하여 까지 빼들었다가 그에 맞서 어담도 칼을 빼들었지만 주위 사람들이 말려서 겨우 끝나고, 송병준의 사이좋은 친구인 총리 대신 이완용이 대신 사과하는 것으로 해프닝은 마무리되는 것으로 보였으나...

이 해프닝은 기사화 되었으며, 전국에서 '황제가 타고 있는 기차에서 어찌 감히 난동을 부리는가'의 상소가 빗발쳤다고 한다. 결국 둘은 사이좋게 해고. 나중에 이 어담도 친일파가 되어 니시카와 단이치(西川潭一)로 창씨개명을 하고, 중추원 참의까지 하는 등 잘 먹고 잘 살았다.

원래 송병준 묘가 있는 땅은 후손인 증손자 송돈호(1945년 ~ )의 땅인데 그걸 다른 사람에게 판 뒤 떠나버린 것으로, 송병준의 묘를 이장하라는 분묘 개장 공고를 봤을 텐데 왜 조상의 묘가 파헤쳐지고 시신이 화장당하게 방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후손에게도 버림받은 셈이니 죄값을 치르고 있는 것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하지만 분묘 개장 공고는 무시하였어도 친일파 재산 환수를 반대해 아래와 같이 헌법소원을 제출한 적이 있다.

의외로 사람들이 많이 헷갈리는 것 중 하나인데, 송병준은 을사오적 명단에 포함되지 않는다. 대신 정미칠적 명단에 그의 이름이 있다.

복거일대체역사소설 비명을 찾아서에서 송병준의 손자 '노다 백작'이 주인공의 친구로 잠깐 등장한다.

5. 재산 환수 문제

송병준이 매국의 대가로 얻은 급부, 부정축재로 얻은 재산을 대한민국 정부에서 '국가 소유로 재산을 환수한다'는 결정을 내리자, 송병준의 후손들은 이에 불복하고 소송을 걸었다. 그 가운데 증손자인 송돈호는 송병준의 매국 행위에 대해 반성하거나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증조부는 애국자!라는 등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끝까지 증조부의 재산과 땅을 되찾겠다며 여러 차례 소송을 걸고 있다.

지금 송병준의 후손들이 부평의 옛 미쓰비시 공장 부지이자 부평 미군부대 부지였고, 부평공원이 조성될 예정인 땅을 돌려달라고 소송했다. 결국 2011년 5월 13일에 대법원에서 완전히 패배했다.[6] 최근에는 같은 매국노이해승의 후손이 소송을 걸었고, 당연히 패소했다.

여담인데 송병준의 증손자가 송병준의 일본 땅도 되찾겠답시고 변호사 등을 통해서 알아보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여기에 대해 그 증손자가 해명하기를 땅 소재지를 찾아주겠다는 브로커에게 이미 사기를 당했었다며 보도 내용을 부인했다.


  1. [1] 노다 헤이지로, 일본식 이름
  2. [2] 친일파 우범선과 나이가 같다.
  3. [3] 유감스럽게도 을사늑약 때 자결한 그 민영환이 맞다.
  4. [4] 이래서 송병준이 창씨개명 1호라고 아는 사람도 있는데, 최초의 창씨개명자는 1879년 10월 일본으로 건너가서 '아사노 도진'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한 이동인이다. 송병준은 일제강점기 때의 창씨개명 1호다. 갑신정변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개화파들도 줄줄이 창씨개명을 했는데, 송병준의 경우도 이 영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5. [5] 당시 어전 회의에서 고종의 면전에 '헤이그 밀사를 파견한 것에 대해 메이지 덴노에게 무릎꿇고 사죄해야 한다'면서 '자결을 하라!'고 개소리를 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신하가 주군에게 대놓고 자결을 명한 것이다. 고종이 계속 묵묵부답으로 있자, 제3차 어전 회의에서 이병무가 칼을 들이대며 위협을 가했고 결국 고종은 강제 폐위당한다. 흔히 이완용이 칼 빼들고 협박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나름 교양과 학식은 있던 엘리트였던 이완용 성격 상 그런 일은 없다 보는 게 중론이다.
  6. [6] 이완용 직계 후손들은 뿔뿔히 흩어졌고 현재는 거의 없다. 다만, 1992년에 증손자 이준이 조상 땅 찾겠다면서 소송을 걸어 이겼다. 그래서 이때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이후 이 토지에 또 다른 진실이 드러났는데 본래는 우국지사 민영환의 재산이었으나, 선생의 자결 후 송병준이 민영환 가족을 기망 또는 겁박하여 빼앗았다는 거... 그래서 이 땅을 놓고 소송까지 불사해가며 애국자 후손과 민족반역자 후손 간에 치열한 다툼이 일어났으나, 법원은 양쪽의 의견 모두를 기각했다. 구체적으로 민영환의 후손들은 ' '독립 당사자 참가인' 자격으로 소송에 참여해 소유권을 주장하였으나, 법원은 이를 이유 없다고 본 것이다. 어쨌든 결론은 국가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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