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지

1. 개요
2. 역사
3. 활동
3.1. 동구권 최고의 정보기관
3.2. 전국민 감시 프로젝트
3.4. 적군파 도와주기
3.5. 클라우스 쿠론 사건
3.6. 서독 극우로 위장해서 서독에 혼란 조장
4. 실패 사례
4.1. 베르너 슈틸러 사건
4.2. 베를린 장벽 붕괴와 몰락
4.3. 판도라의 상자
5. 평가

1. 개요

국가안전부(혹은 국가보위부)

  • 독일어 : Ministerium für Staatssicherheit, MfS
  • 러시아어: Министерство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й безопасности
  • 영어: Ministry for State Security

과거 독일민주공화국의 정보 및 방첩 기관이다. 흔히 부르는 슈타지(STASI)라는 명칭은 약칭인 Staatssicherheit(국가안전, 슈타츠지허하이트)에서 Staat(국가)에서 따온 STA와 Sicherheit(안전)에서 따온 SI를 따서 만들어진 명칭이다. 과거에 번역된 국내 서적에서는 스타지, 스태시, 스타시 등의 오역을 찾을 수 있다.

2. 역사

1950년 2월 8일 당의 방패와 검(Schild und Schwert der Partei)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소련의 국가안전부[1]를 모델로 해서 만들었다. 초기에는 빌헬름 차이서(Wilhelm Zaisser)가 부장이었고 에리히 밀케(Erich Mielke)는 부부장이었다. 차이서는 1953년 동베를린 사태 때문에 밀려났고 에른스트 볼베버(Ernst Wollweber)가 부장 자리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볼베버 역시 발터 울브리히트(Walther Ulbricht)와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의 협공을 받아 물러나고, 부부장이었던 에리히 밀케가 그 자리를 물려받아 동독 붕괴 전까지 슈타지의 부장을 맡았다. 이렇게 30년 넘게 정보기관의 수장 자리를 지키는 것은 무척 드물긴 한데, 밀케는 슈타지의 부장자리에 있는 동안 호네커를 비롯한 동독 고위층의 약점이 기록된 비밀 파일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왠지 이 분이 생각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1960년대에는 나름 경쟁 관계에 있던 동독 인민군의 군 첩보국을 감시 대상에 넣었고 그 뒤에는 대내외적인 정보 수집 및 감시활동을 펼치다 1989년 12월 14일 공식 해체되었다. 세계 최대의 정보기관이라는 타이틀이 있는데, 이는 아래서 후술한다. 또한 다른 정보기관들은 공식적인 인원수나 조직이 비밀에 부쳐져 있고, 슈타지는 동독이 망하는 바람에 그 조직과 정체가 상세하게 알려졌다.

세부 조직은 다음과 같다

  • 정찰총국: 서독, 나토, 기타 국가에서 첩보활동, 1952년부터 1986년까지 이곳의 책임자였던 마르쿠스 볼프가 유명하다.
  • 공조총국: 소련 정보 기관과 공조활동
  • 통신보안 및 인원보호 총국: 동독 수뇌부 보좌 및 경호, 동독정부 통신 보호
  • 간첩행위 보호국: 중공업 기술과 연구시설 보안 담당
  • 거수자에 대한 투쟁 총국: 동독 내 외국인 감시 담당
  • 쓰레기 분석부: 서방세계의 물건의 흔적을 찾기 위한 부서로, 요주의 인물들의 집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를 몰래 들고 와서 뒤져보는 건 첩보 분야의 중요 임무 중 하나다.
  • 제 12호 관리국: 편지, 전화통신 첩보 담당
  • 제 2000호 관리국: 국가인민군 감시.
  • 펠릭스 제르진스키 근위연대: 슈타지의 의장대 겸 경비대이다.

3. 활동

3.1. 동구권 최고의 정보기관

각종 공작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으며, 소련의 KGB는 가장 중요한 해외협력기관으로 슈타지를 꼽았다. 협력이라고는 하는데 사실상 KGB가 갑이고 슈타지는 을인 관계였다. 슈타지는 모든 사항을 KGB에 알려줘야 했던 반면에 KGB는 슈타지가 알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는 것만 알려줬다. 슈타지 공작원은 유럽이나 서독 대상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활약했으며, 많은 공작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미국에서는 KGB와 함께 슈타지의 악명이 자자했다. 1980년대의 미드 맥가이버에서도 KGB뿐만 아니라 슈타지가 자주 나오며 존 르 까레의 소설인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에서도 슈타지가 주된 적으로 나온다. 영화 썸 오브 올 피어스의 원작인 톰 클랜시의 소설 '공포의 총합'에서도 팔레스타인 과격파와 슈타지 잔당이 손을 잡고 미국에서 핵 테러를 일으키고 베를린에서 미군과 소련군의 오인 교전을 유도했다.

방첩/공안 기관의 인구대비 비율[2]

국가

기관명

인구대비비율

미국

FBI

32,037:1[3]

소련

KGB

5,380:1[4]

나치 독일

게슈타포

5,830:1

동독

슈타지

175:1

슈타지의 사부KGB의 31배나 되는 후덜덜한 비율로 그 만큼 촘촘한 감시망을 자랑했다는 것이다.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지경이다. 청출어람.

3.2. 전국민 감시 프로젝트

동독 국민 수십만명을 공포에 빠뜨린 프로젝트. 감시대상이 사는 집 지하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해놓고 감시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이웃 주민, 친구, 직장 동료 심지어는 가족들 중 한 명을 매수하여 정보원(독일어로 Inoffizieller Mitarbeiter, 줄여서 IM)으로 만들어서 감시하게 하였다. 동독 붕괴 이후에 동독 국민 약 15만명의 감시 기록 카드가 발견되어 세계를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다. 아직 대부분이 보존되어 있으며 신청만 하면 열람도 가능하다. 물론 사생활 보호를 위해서 사생활 보호 신청되어 있는 기록 카드는 본인 외에 열람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전 국민의 체취를 모두 모아서, 탈주자가 있을 경우 군견에게 그 체취를 기억시켜 추적하는 충공깽한 시스템도 운영되고 있었다. 이렇게 상호감시가 일상화된 당시의 모습은 독일 영화 '타인의 삶'에 잘 묘사되어 있다.

감시가 얼마나 철저했냐 하면 동독 국민 약 89명당 1명 꼴로 슈타지의 협력자였다. 당신이 친구 3명 뿐인 외톨이일지라도, 친구 셋이 각각 29명의 인맥을 갖고 있다고 치면 총 87명, 거기에 친구 3명까지 더하면 90명이니 당신은 이미 직간접적으로 슈타지 감시체제 하에 들어간 것이다. 부모님 2명까지 당신의 인맥에 포함한다면 친구 한 명마다 인맥이 28명씩만 있어도 된다! 이렇게 되면 28*3+3+2=89다! 통일 이후 친구나 아내가 슈타지에 소속되어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는 사례가 속출하여 사회 문제가 되었다. 조금 얘기가 다르지만 소위 두 독일의 작가라고 불리며 야콥을 둘러싼 추측들[5]이라는 작품으로 데뷔한 동독 작가 우베 욘존도 이런 사례에 해당된다. 동독에 있으며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어느 날 동독 사회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상술한 작품을 쓴 후 서독으로 이주하지만 동독에서는 물론이고 서독에서도조차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해 다시 영국에 정착한다. 그러나 슈타지는 욘존의 아내를 포섭해 욘존을 감시했고 후에 이 사실이 알게 된 욘존은 크게 충격을 받게 된다. 이후 욘존은 1984년 영국 해안 마을에서 나이 49세에 심장 질환으로 쓸쓸히 사망하게 된다. 시신은 사후 19일 뒤에 발견되었다.

심지어 슈타지는 독일에 저항적인 서브컬처가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70년대 중반 이후 열병처럼 번져가던 펑크 록 붐에도 감시원을 붙었다. 심지어 동독의 초기 펑크 밴드들은 슈타지의 공작에 의해 해체되기도 했다. 요원들이 밴드 멤버들과 친해진 뒤 서로를 이간질 시켜서 해체를 유도한 것(...). 동독 해체 후 펑크족 젊은이들을 감시하는 영상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래도 10월 유신처럼 붙잡아다가 머리 자르고 미니스커트 단속을 안 한 건 다행인 건가 사실 70년대 당시 한국은 거의 종교 원리주의 국가에 가까울 정도로 심하긴 했다(...). 동독이나 소련의 경우 정치적으로는 억압이 심했지만 문화적으로는 개인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러다 보니 서방 음반이나 비디오 테이프들이 암시장을 통해서 많이 유통되었고, 그러다 보니 동독 내에서 록음악이 흥해서 서독에서도 동독 록을 오스트록이라고 해서 알아 주었을 정도였다. 또한 동독은 성생활이 자유분방해서 여름철만 되면 누드비치가 성업했을 정도였다. 명목상으로 포르노의 유통은 금지였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명목상이었고 암시장에서 구할 건 구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동독의 지도자 발터 울브리히트에게 누군가가 신문에서 오려낸 울브리히트의 사진에 뚱땡이라고 쓴 뒤에 우편으로 보낸 적이 있다. 그러자 울브리히트는 슈타지 책임자를 불러서 색출하라고 했다. 슈타지는 발행하는 모든 신문의 울브리히트 얼굴 사진에 가시광선으로는 보이지 않는 특수펜으로 번호를 썼다. 다음에도 사진이 오자, 특수펜의 번호를 식별해서 어디서 왔는지 알아냈다. 놀랍게도 지도자의 정적이 보낸 것이었다.[6]

3.3. 귄터 기욤 사건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서독 총리의 비서였던 귄터 기욤(Günter Guillaume)은 사실 슈타지가 1950년대에 위장탈출 시켜서 서독으로 잡입시킨 간첩이었다. 당시는 베를린 장벽도 들어서기 이전이라 서독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슈타지는 기욤뿐만 아니라 많은 첩보원들을 이런 방식으로 서독에 침투시켰다. 1974년에 터진 이 사건으로 인해 동독을 포용하는 동방정책을 펼치던 빌리 브란트도 간첩으로 오인받았고 결국은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슈타지의 사주를 받고 동방정책을 만들었다는 의심을 받았다. 귄터 기욤은 이 사건 이후 서독 교도소에 갇혀있다가 동독의 제의로 동독에 잡혀있던 서독 간첩과 4:1 교환으로 동독으로 귀환했다.

3.4. 적군파 도와주기

서독의 공산주의 혁명을 외치며 여러가지 테러 사건들을 터뜨린 바더 마인호프(Rote Armee Fraktion - 흔히 독일 적군파라고 부른다.)에게 동독 정부가 슈타지를 통해 무기를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3.5. 클라우스 쿠론 사건

어떤 면에서는 귄터 기욤 사건보다도 심각하다고 할 수 있는 사건인데, 왜냐면 클라우스 쿠론은 슈타지의 서독 침투를 방어하는 기관인 연방헌법수호청의 방첩부서 간부였기 때문이다.

1962년부터 헌법수호청에서 일한 쿠론은 나름 실력을 인정받아 과장급 지위에까지 올랐지만 더 이상 승진이 되지 않고 자신의 급여로는 아내와 네 명의 자식과 함께 넉넉한 생활을 하기 어렵다는 점을 깨닫자 1981년에 직접 슈타지에 편지를 보내서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쿠론은 자신이 대졸자가 아니라서 능력에 비해 승진도 못하고 인정도 못 받았다고 주장한다. 혹시 함정이 아닐까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한 슈타지는 이 제의가 진짜라는 것을 알고 1982년부터 본격적으로 쿠론을 정보원으로 활용하면서 매달 4천 마르크씩 제공했다고 한다. 또한 슈타지는 쿠론이 관련된 서독 측 정보원은 한동안 체포하지 않는 등 쿠론의 정체를 발각되지 않게 하는데 신경 썼다. 쿠론이 담당하는 정보원들이 가장 먼저 슈타지에 잡혀 들어간다면 당장 발각될 테니...쿠론은 동독이 붕괴될 때까지 총 69만 2천 마르크를 받고 서독의 방첩작전에 대해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슈타지에게 제공했다. 동독이 붕괴된 후에 정체가 탄로난 쿠론은 체포되어 1992년 12년 형을 선고받았다.

3.6. 서독 극우로 위장해서 서독에 혼란 조장

서독의 나치 극우주의자들과 협력을 하거나, 슈타지 요원들을 극우주의자로 위장하여 반 유대인 테러 및 서독 사회에 혼란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4. 실패 사례

4.1. 베르너 슈틸러 사건

1979년 1월 19일 슈타지 공작총국의 과학기술담당 부서의 베르너 슈틸러가 슈타지 정보원들의 명단이 포함된 기밀 서류와 국경통과용 여권을 들고 서독으로 망명하였다. 이걸 동독측 국경검문소에서 내밀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보내주었다고 한다. 라이프치히의 칼 마르크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슈틸러는 슈타지 내에서 나름 인정받는 요원이었고 심지어 공산당원이기도 했지만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망명하기 한참 전부터 서독의 연방정보국(BND)에 협조하고 있었다고 한다. 슈틸러의 망명으로 인해 17명이나 되는 슈타지의 정보원들이 정체가 탄로나 서독 당국에 체포되었으며 슈틸러는 서독에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지내며 CIA와 뭔가 하다가 거액이 든 계좌를 받고 다시 서독으로 돌아와 잘 살게 되었다.

슈틸러는 뜻밖의 정보도 서방에 제공하는데 그것은 바로 슈타지 공작총국의 수장 마르쿠스 볼프의 얼굴과 이름을 알려 준 것이다. 서독의 BND는 그전에 마르쿠스 볼프의 사진은 입수했지만 누군지는 모르고 있었는데 슈틸러가 이걸 식별해 준 것.

4.2. 베를린 장벽 붕괴와 몰락

베를린 장벽무너지던 날인 1989년 11월 9일 이후 슈타지의 존재 가치는 급속도로 하락했다. 며칠 뒤인 13일에 총수 에리히 밀케가 동독 인민의회(당시 동독 인민회의는 그전과는 달리 공산당 일당독재가 무너진 상황이었다.)에 나타나 그 동안의 악행을 변명하려고 했지만, '저는 정말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Ich liebe doch alle Menschen!)'라고 하자마자 의원석에서 비웃음이 터져나오면서 역관광당하고 말았다. 이 장면은 동독 텔레비전에 의해 생중계되었다. 그런데 막상 영상의 독일어 댓글을 보면 "저 비웃는 인간들은 얼마 전까지는 전부 한 통속으로 동독 정권에 충성했다 이제 와서 밀케 혼자만 악당으로 만드냐"고 까는 댓글, 심지어는 "밀케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일을 충실히 했을 뿐이다."라고 도리어 그를 옹호하는 댓글이 꽤 보인다. 물론 이건 통일 이후 오히려 동독에 대한 향수가 생긴 사람들이 꽤 있는 탓도 있지만.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엄석대의 몰락이 연상되는 부분이다.

동독의 높으신 분들은 밀케의 굴욕에도 불구하고 슈타지를 존속시키려고 했는데, 밀케 퇴진 후 한스 모드로 총리는 슈타지를 '국가안보청(Amt für Nationale Sicherheit)'이라고 개명했다. 하지만 모드로의 아이디어도 마찬가지로 동독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위기감을 느낀 슈타지 상부에서는 12월 초에 본부와 각 지부에 기밀문서들을 파기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하지만 이 명령이 밖으로 새나가면서, 도처에 있던 슈타지 지부들이 시민들에게 털리기 시작했다. 루마니아나 헝가리에서는 거리에서 비밀경찰 요원들이 시민들에게 맞아 죽기도 했으나 동독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았다. 12월 4일에 에어푸르트 지부를 시작으로 불과 1주일도 안되어 동독 내 거의 모든 지부가 시민들의 손에 장악되었고, 이런 와중에 파기되지 않았거나 손상이 미미한 문서들도 대부분 시민들에게 빼앗겼다.

결국 동독 정부는 시민들의 항의와 압박에 굴복했고, 모드로는 1990년 1월 11일에 여야 모두가 참가한 원탁회의 석상에서 국가안보청의 존속 없는 해체를 선언했다. 하지만 슈타지 고위 간부들은 원탁회의 참석자들을 설득해서 공작총국의 문서를 파기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내었다. 4일 뒤인 15일에는 동베를린에 있던 본부도 시민들에게 점령당하면서 슈타지의 역사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현재 슈타지가 남긴 모든 현존 기록물들은 BStU(Bundesbeauftragte für die Staatssicherheit-Unterlagen, 연방국가안전부기록물보존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모 지부에서는 시간이 급박하여 손으로 일일이 찢어서 폐기했으나, 독일 정부는 그 찢긴 문서 조각도 모두 자루에 담아서 보존하고 있다. 해당 지부의 보존/복구 책임 담당자는 10년 동안 조각모음을 해서 8포대를 해치웠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4.3. 판도라의 상자

위에서 말한 대로 시민들에게 순식간에 털리는 바람에 대부분의 기록물이 파기되지 못했다. 이 기록 때문에 동서독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이익을 봤다. 서독보다는 동독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는데, 양심적으로 알려졌던 인사들이 슈타지의 정보원이었음이 들통나서 망했어요. 특히 동독의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고, 동독 체제의 붕괴에 앞장섰던 인사들마저도 슈타지 부역 전력이 드러나 정계를 물러나야만 했다. 동독 체제를 붕괴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동독 기독민주당 당수 로타르 드 메지에르조차도 물러나야만 했던 것이 그 증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워낙 많은 사람들이 슈타지 정보원 노릇을 했고 그 중에는 강요당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는 게 밝혀지면서 현재는 동정론이 일고 있다.

그리고 인권탄압을 명령했거나 실행했던 동독 인사들은 대부분 감옥에 갔다. 그래도 비폭력적인 방식을 주로 동원한 덕택인지 처벌은 매우 가벼웠는데, 에리히 호네커에곤 크렌츠는 동독 체제 당시 내렸던 월경인들을 사살하라는 명령 때문에 재판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석방되었다. 월경시도자 사살은 분단국 뿐만 아니라 우방국 간에도 국경 경비가 삼엄한 곳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고, 국가원수라면 충분히 내릴 수도 있는 명령이라 이 혐의에 대해 논란도 많았다. 당장 대한민국에서도 월북자를 사살하는 경우는 처벌받지 않는다. 유명한 피겨 스케이팅선수인 카타리나 비트와 1990년대 초 독일의 세계적인 여자 100m 스프린터 카트린 크라베도 슈타지 파일 때문에 곤욕을 치뤘다.

한편 미국이나 서독 등 서방과 관련된게 많은 슈타지 공작총국의 문서는 대부분 통일 직전에 원탁회의의 동의를 얻어 파기하였지만 1993년 부터 CIA가 독일 연방헌법보호청에 넘긴 로젠홀츠(Rozenholz) 파일에 공작원들에 관한 상세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35만 장의 마이크로 필름을 381장의 CD에 옮긴 것, 2003년에야 전부 독일로 넘어오게 된다. CIA가 이걸 어떻게 입수하였는가는 오늘날까지도 비밀인데 슈타지 본부가 털릴 때 요원들이 들어가 입수하였거나 통일 직전에 슈타지 간부가 CIA에 신변보장과 돈을 받고 팔아넘긴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미국은 이 파일을 넘겨줄 때 독일 내에 거주하지 않는 전 슈타지 공작원들의 정보는 빼고 독일에 넘겨주었다. 이 파일로 인해 라이너 룹[7]과 같이 동독 붕괴 이후에도 드러나지 않은 서독 내 간첩들의 존재가 발각되게 된다.

서독에서도 슈타지 협력자들이 중형을 받았다는 설이 있으나, 동독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벼웠다. 대부분 몇달, 최악의 경우도 몇년 이내의 징역을 살다가 나왔다. 1990년대에 슈타지 때문에 동서독을 불문하고 여러명이 큰 곤욕을 치루었고, 이 때문에 독일에서, "더이상 과거 논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많았다.#

5. 평가

독재국가의 정보기관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잔인했다고 평가받고 있지만 이들 역시 다른 공산국가의 정보기관들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악랄했다.

슈타지 본부에 위치한 슈타지 감옥은 유보트(U-Boot)라고 불렸는데, 독일의 잠수함을 뜻하는 이 용어는 이 감방에 물이 항상 고여 있고, 감방 문에는 창이 없어 어둡다고 해서 유보트라고 불렸다. 불도 인공적인 불빛만 쬐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자연적인 햇빛 같은 게 아예 안 들어왔다는 것. 지하감옥 시절에는 물고문도 자행하고, 형무소에 있는 범죄인들을 이용해서 반체제 인사들을 제거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행위는 독재국가에서 아주 잘 나타나는 사건이다. 슈타지뿐 아니라 KGB, 삼청교육대 등 수많은 지역에서 비슷한 일이 자행되었다. 심지어는 불치병을 유발하는 약물을 주입하여 고통을 주어, 나중에 반체제 인사들이 석방되더라도 주입받은 균으로 인해 동종의 병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고문인 경우, 젖은 옷을 입은 채로 방치하거나, 한 겨울에 물을 퍼 붓고, 뒷골목에 일정하게 물을 떨어뜨려 수인성 전염병으로 수감자들을 죽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슈타지는 국제적으로 인권 개선이라는 압박에 부딪히고 소련도 동독을 국제 사회에 내세우는 공산권의 상품으로 간주해서 인권 개선의 필요성을 인정하자, 1961년 지하감옥을 폐쇄하고 지상으로 옮겼다(스탈린이 죽은 게 큰 요인이기도 함). 그리고 정신적으로 조지는 걸로 바꿔버렸다. 차에서 내려 감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입실, 이동, 조사까지 모든 수형 관리를 체계적으로 관리했다. 예컨대 체포한 정치범을 눈을 가린 채 외부와 단절된 특수 개조된 차량으로 끌고 오는 것부터 시작해서 차에서 내려 옷을 다 벗긴 채 복도에 서게 하고 신입이 들어올 땐 각 감방의 문을 차단해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게 하는 식이다. 특히 지상감옥의 핵심은 처음 끌려온 모든 정치범이 거쳐야 하는 블랙박스로 불리는 독방이다. 이 감방은 창문 하나 없이 둥글게 만든 내부 벽을 검정색 고무로 만들어 깜깜해서 어두울 뿐만 아니라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다. 벽을 둥글게 만든 것은 공간을 파악하지 못하게 해서 인간을 미치기 직전의 상황으로 몰아가기 위함이라고 한다. 게다가 벽이 고무로 만들어져서 자살을 할 수도 없다.

또, 취조를 받던 조사실은 책상과 의자들이 전부인데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나라의 그것과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고도의 심리 파괴가 진행됐다. 조사를 받는 사람의 자세와 조사실의 온도, 조사 시간, 인원, 취조 질문 등이 모두 정교하게 고안돼 인간의 심리를 가장 나약하게 만들도록 매뉴얼화돼 있었다. 여담이지만, 지상감옥의 구조를 저렇게 설계한 이는 동독의 정신과 의사라고 한다. 현재도 이곳 근처에서 사는 듯.

이 때문에 슈타지 고문에 대해서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고 양형도 그만큼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그 많은 슈타지들을 다 잡아넣는다는 건 형식상으로는 흡수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합의통일을 하는 상황이라 절대 불가능했다.

가택수사를 할 때는 이 잡듯 뒤지다가도 증거도 불충분하고 해당 집주인이 애먼 사람이라고 판단될 경우에는 뭔가 동구권 정보기관답지 않게 피해보상도 제대로 해 주던 것 같다. 픽션이긴 하지만, 독일 영화 『타인의 삶』에서 주인공인 게오르그의 집을 뒤지던 슈타지 요원들이 증거불충분으로 철수 하게 되었을 때, 게오르그에게 슈타지 본부 주소와 전화번호를 건네주며 수사 중 망가진 물건에 대한 피해청구를 하라고 한다. 같은 시기 안기부를 생각해 보자. 안기부는 없는 사건도 만들어내기로 유명하다! 해당 장면에서의 슈타지 요원 역의 배우는 2008년작 발키리에서 늑대소굴에서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을 보조하는 육군 포병소령(해프텐 중위가 아님), 한국 영화 베를린에서 러시아 무기상 역을 맡았다.

여담이지만 불법으로 포르노 비디오를 만들었다고도 한다.(...) 동독에서는 여름철만 되면 사람들이 나체로 수영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거나 서독과 다르게 낙태가 합법으로 지정되어 있는 등 당시든 현재든 한국 기준으로 보았을 때 매우 자유분방했지만. 공식적으로는 포르노 잡지 수입과 창간이 금지되어있는 등 보수적인 면도 있었는데, 슈타지에서 용돈벌이(...)를 위해서 포르노 산업에 손수 뛰어들었던 셈이라서 독일 내에서는 꽤나 비웃음거리 취급받고 있는 중.


  1. [1] KGB의 전신.
  2. [2] FBI 시크릿, 로드리 제르리스-존스 지음, 23페이지
  3. [3] 2차 대전 직후 미국 인구는 1억 4,000만, FBI 요원은 4,370명이었다. FBI를 여기에 대비하는 게 적절한가 의문이 되지만 그 외 마땅한 방첩/공안 기구가 없고 당시 시카고 트리뷴지가 "후버국장이 FBI를 슈퍼 게슈타포로 만들려고 한다."라고 비난한 적도 있으니 대충 퉁치자.
  4. [4] 2차 대전스탈린 시대 기준
  5. [5] 이 작품에도 슈타지가 등장한다.
  6. [6] 크렉 필리전, H. 키스 멜튼, "스파이 가이드"
  7. [7] '토파스'라는 암호명을 가진 간첩으로 브뤼셀의 NATO 본부에서 근무하면서 NATO의 상세한 군사력이나 유사시 작전계획 같은 기밀 정보들을 빼돌렸다.

최종 확인 버전:

cc by-nc-sa 2.0 kr

Contents from Namu Wiki

Contact - 미러 (Namu)는 나무 위키의 표가 깨지는게 안타까워 만들어진 사이트입니다. (104.70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