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무대신

제6대
다케나카 헤이조

제7대
스가 요시히데

제8~9대
마스다 히로야

일본 내각관방장관

제78대
후지무라 오사무

제79~81대
스가 요시히데

현직

일본 중의원 (가나가와 2구)

선거제도 개편

제41~48대
스가 요시히데

현직

스가 요시히데
[ruby(菅 義偉, ruby=すが よしひで)]

생년월일

1948년 12월 6일 (71세)

출생지

아키타현 오가치군 오가치정[1]

학력

호세이대학 졸업

정당

자유민주당

일본의 제79대 내각관방장관

임기

2012년 12월 26일 ~ 2014년 12월 23일

일본의 제80대 내각관방장관

임기

2014년 12월 24일 ~ 2017년 10월 31일

일본의 제81대 내각관방장관

임기

2017년 11월 1일 ~ (현직)

일본의 제7대 총무대신

임기

2006년 9월 26일 ~ 2007년 8월 27일

일본의 제41~48대 중의원 의원(가나가와현 제2구)

임기

1996년 10월 21일 ~

1. 개요
2. 생애
2.1. 성장 과정
2.2. 정치 입문과 시의원 활동
2.3. 중의원
2.4. 아베 신조 내각
2.4.1. 총무대신 (2006년 ~ 2007년)
3. 여담
4. 둘러보기

1. 개요

일본정치인. 8선 중의원 의원이다.

2006년 들어선 제1차 아베 신조 내각에서 총무대신을 맡았으며, 2012년 다시 집권한 제2차 아베 신조 내각에서도 내각관방장관으로 중용됐다. 자타가 공인하는 아베 신조의 최측근이자 내각의 2인자로 평가받으며, 자민당 내에서 보수강경파로 손꼽힌다.

2. 생애

2.1. 성장 과정

1948년 12월 6일 빈농의 아들로 아키타현 오가치군 오가치정(현재 유자와시)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누나 2명, 남동생 1명이다. 아버지 스가 와사부로는 남만주철도의 직원으로서, 당시 만주국의 수도였던 퉁화(通化)에서 일본의 패전을 맞이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온 뒤 고향 아키노미야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아버지는 '아키노미야 딸기(秋の宮いちご)'를 브랜드화하는 데 성공하여 아키노미야 딸기 생산출하조합의 조합장과 오가치정의회 의원, 유자와시 딸기 생산집출하조합 조합장 등을 역임하였고, 2010년에 93세로 사망하였다. 어머니와 숙부·숙모는 전 교사이며, 두 누나도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곧바로 상경하여 골판지 공장에 취직하였고, 상경 2년 후 고학으로 당시 사립대학 중 가장 학비가 저렴하다는 이유로 호세이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진학하였다. 1973년 대학을 졸업하고, 겐덴세비 주식회사(建電設備)[2]에 입사하였다.

2.2. 정치 입문과 시의원 활동

1975년에는 정치인을 지망하여 호세이대학 취업과와 상담을 하였고, OB회 사무국장으로부터 호세이대학 출신인 제57대 중의원 의장 나카무라 우메키치의 비서를 소개받아 같은 파벌이었던 중의원 오코노기 히코사부로의 비서가 되었다. 이후 11년에 걸쳐 비서를 맡았다. 1983년에는 오코노기 중의원이 통상산업대신에 취임함에 따라 대신 비서관을 맡게 되었다.

1987년에는 요코하마시 니시구(西区) 선거구 출마하여 시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 이후 시의원으로 재선까지 성공한다. 시정에 큰 영향력을 가졌던 오코노기 중의원이 사망한 후에는 정치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오코노기 의원의 사실상 대리인으로서 활동하였다. 중의원 비서 시절에 맺은 정·재계의 인맥을 활용하여 실력을 발휘하였다. 다카히데 히데노부 시장으로부터 인사 등에 대해 상담을 자주 받는 등 '요코하마의 그림자 시장'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2.3. 중의원

1996년의 제41회 중의원 총선거에는 가나가와현 제2구에서 자민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하였고, 신진당의 공천을 받은 우에다 아키히로와, 구 민주당(1996~1998)의 공천을 받아 출마한 오이데 아키라를 누르고 당선되었다.[3]

1998년의 자유민주당 총재선거에서는 소속되어 있던 헤이세이연구회(平成研究会)의 회장 오부치 게이조를 지지하지 않고 스승으로 받드는 가지야마 세이로쿠를 지지하였고, 헤이세이연구회를 탈퇴하였다. 이후에는 고치카이(宏池会, 굉지회)에 가입하였다. 2000년 제2차 모리 요시로 내각의 불신임 결정을 둘러싼 소위 '가토의 난'에서는 가토 고이치[4] 등에 동조하여 불신임안 투표에는 결석하였지만, 이후 가토파가 분열되었을 때에는 친 가토 그룹인 오자토파가 아니라 반 가토 그룹인 호리우치파에 가담하였다.

2005년 11월 2일에는 제3차 고이즈미 준이치로 개조내각에서 야마자키 쓰토무와 함께 총무부대신(副大臣)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9월 26일까지 총무부대신을 지낸다. 다케나카 헤이조 총무대신 아래에서 일하면서, 총무성 내부 통제의 수장으로 임명되어 사실상 인사권을 행사한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2006년에는 재도전지원의원연맹의 설립에 참가하였다. 이 의원연맹은 실질적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후임자를 선출하는 2006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아베 신조를 지원하는 모임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후 총재선거에서 아베 신조가 승리하였고, 아베 신조가 총리로 취임하며 총무대신으로 입각한다.

2007년 제21회 참의원 통상선거 패배의 책임을 묻는 형식으로 내각 개편이 이루어졌고, 2007년 8월에는 총무대신과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의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자민당 선거대책 총국장에 취임하였다.

2007년 9월에는 아베 신조 총리의 퇴진과 함께 치러진 자유민주당 총재선거에서 후쿠다 야스오를 지지한다는 고치카이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아소 다로를 지지하였고, 아소 다로의 추천인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후쿠다 야스오 내각 하에서는 선거대책 총국장이 격상된 선거대책 위원장에 고가 마코토가 취임하였고, 스가 요시히데는 선거대책 부위원장으로서 선거 대책 업무를 계속하여 맡았다.

2008년 9월 24일 아소 다로 내각 출범 후에는 아소의 측근으로서 낮은 지지율을 기록하던 아소 정권을 지지하였으며, 적극적으로 정책을 제안하여 정부지폐[5]의 발행과 무이자국채의 발행, 정치인 세습 제한 등을 주장하였다.

2009년 7월에는 고가 마코토가 도쿄 도의회의원 패배의 책임을 지는 형태로 자민당 선거대책 위원장을 사임하였으나, 스가 요시히데는 자민당 선거대책 부위원장직을 사임하지 않고 위원장 대리로서 직후의 제45회 중의원 총선거를 지휘하였다. 그리고 2009년 8월의 제45회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가나가와현 제2선거구에서 민주당의 미무라 카즈야의 맹추격을 548표의 근소한 차이로 따돌리고 5선에 성공하였다. 상대 미무라는 비례대표 병립제를 통해 첫 당선에 성공하였다.(이른바 부활당선) 이후 2009년 9월 28일에 치러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는 1996년 당선 동기인 오무라 히데아키·신도 요시타카·마츠모토 준 등과 함께 고노 다로를 총재 후보로 추천하였고, 이와 함께 고치카이를 탈퇴하였다 하지만 자유민주당 총재에는 다니가키 사다카즈가 당선되었다.

2010년에는 자민당 국회대책 부위원장 및 홍보본부장 대리에 취임하였고, 2011년에는 자민당 조직운동본부장에 취임하였다. 2012년 4월에는 우정민영화법 개정안 표결에서 자민당의 찬성 당론에도 불구하고 반대에 투표하였다.

2.4. 아베 신조 내각

2.4.1. 총무대신 (2006년 ~ 2007년)

2006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아베 신조를 적극 지원하였고, 2006년 9월에 출범한 제1차 아베 신조 내각에서는 당시 4선에 불과했던 스가 요시히데를 총무대신(우정민영화 담당대신 겸직)으로 임명하였으며, 이로써 첫 입각을 이룬다.

2006년 10월 NHK 단파 라디오 국제방송에 대한 방송 명령에 정의된 방송사항에 (북조선(북한)에 의한) 납치문제를 추가하려는 방침을 밝혔다. 당시 일본 방송법 제33조에는 '국제방송 등의 시행 명령 등(国際放送等の実施の命令等)'이라는 항목이 있었으며, 거기에 '총무대신은 협회에 대하여 방송구역·방송사항 그 밖에 필요한 사항을 지정하여 국제방송을 해야 할 사항을 명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었다.(2007년 12월에 방송법이 개정되면서 '명령'에서 '요청'으로 표현이 바뀌었다)

2006년 11월 10일에는 방송사항에 '북조선(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에 특히 유의할 것'을 추가하라는 명령을 NHK에 보냈다. 한편 '보도의 자유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방송 내용이나 방송 횟수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NHK의 편집권에 대한 존중 입장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방송법 제44조에는 '편집권'에 관하여 '방송 프로그램의 편집 등'이라는 항목이 있고, 거기에는 'NHK는 국제방송의 방송 프로그램 편집에 대해 해외 동포의 적절한 위안을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당시 해외에서 방송되던 단파방송 '바닷바람(しおかぜ)'에 대해, 무선국 허가장을 교부하여 일본 국내 방송에 길을 터주었다.

2006년 12월에는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지방분권개혁) 보직도 받았다. 2007년에 발각된 연금기록문제에 관해서는, 후생노동대신 야나기사와 하쿠오이 아니라 총무대신이었던 스가 요시히데가 검증을 담당하였다.[6]

일본 우정공사 총재 이쿠타 마사하루와 회담을 가진 후에는 "이쿠타가 '총재를 사임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하고 발표하였다. 이후 후임 일본 우정공사총재에는 미쓰이 스미토모 은행 출신 니시카와 요시후미가 취임한다는 발표가 있었는데, 이쿠타 마사하루는 '나는 사의를 표명한 적이 없다'는 반박 기자회견을 하기도 하였다.

2.4.2. 내각관방장관 (2012년 ~)

2012년 9월 아베 신조가 자유민주당 총재에 취임하면서 동시에 자유민주당 간사장 대행으로 기용되었다. 2012년 12월 열린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민주당의 미무라 카즈야의 부활을 저지하고 압승하면서 6선에 성공하였다. 그 결과로 2012년 12월 26일에는 제2차 아베 신조 내각이 출범하면서 내각관방장관에 임명되었다. 2013년에 우정 민영화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본우정사장 사카 아쓰오를 취임 6개월만에 퇴임시키고, 고문직에서도 해임하였다. 같은해 발생한 알제리 인질사건 때에는, 방위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출을 위해 전례 없이 일본 정부 전용기를 보내기도 하였다.

한편 2014년 5월에는 아베 대신 내각인사국 국장 인사를 주도하여, 국장에 내정되었던 스기타 가즈히로 대신에 가토 가쓰노부를 임명했다는 설도 있다. 전직 내각참사관이었던 다카하시 요이치에 의하면, 국장 인사를 통해 관료를 완전히 통제하에 두어 역대 관방장관 중 가장 강한 정보 수집 능력을 확보했다고 한다. 2014년 7월에 출연한 NHK '클로즈업 현대(クローズアップ現代)'의 방송내용에 대해, 방송 후 'NHK에 관저를 통해 간접적으로 압력을 행사했다.'고 보도되었으나, 스가 요시히데 본인은 이를 부인하였다. 또한 2014년 11월에는 중의원 해산을 통해 총선거를 집행할 것을 아베 신조 총리에게 진언하였다고 한다. 관방장관이 된 이래로 2번의 중의원 총선거에서 연승하여 현재는 8선 의원이다.

관방장관을 지내면서 2기 아베 내각을 7년 이상을 이끌게한 것도 스가 요시히데의 공도 크다는 것이 정설이다.

코로나19 사태에서 정치적인 문제 대해서 거의 배재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IOC나 조직위원회, 도쿄도와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준비를 착실하게 진행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전날까지 도쿄 올림픽에 관해 ‘예정대로’ 개최하기 위해 준비한다고 언급했는데 이날은 예정대로라는 표현을 삭제한 점이 눈에 띈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가 올림픽 연기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25일 NHK 등 일본 주요 매체에 따르면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은 정례 브리핑을 통해 이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아베 신조 총리와 가진 전화통화에서 잘했다고 말했다 전했다. 스가 장관은 또 두 나라 정상이 우한 코로나 감염증(코로나19) 치료제 개발 등과 관련해 긴밀한 협력을 계속 하기로 합의하고 북한 정세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고 전했다. 그는 도쿄올림픽 개최 시기에 대해서는 "늦어도 2021년 여름까지 개최하는 것으로 합의했다"며 "구체적인 일정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최종 결정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도민들의 사재기가 심해지자 급기야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26일 기자회견에서 이같은 사재기 현상에 대해 “올바른 정보에 근거해 냉정하게 대응하길 부탁하고 싶다”고 당부하고 나섰다. 

도쿄올림픽 연기를 발표한 뒤 확진자가 크게 늘고 있는 일본은 그동안 소극적이었던 감염 검사를 늘리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을 받고 있지만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이날 정례 기자회견에서 긴급사태 선언과 관련한 질문에 “긴급사태 선언은 국민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점을 고려해 다방면의 전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신중히 판단할 필요가 있다”며 “현시점은 그러한 선언을 할 상황은 아니다”고 말했다.

3. 여담

  • 성씨는 간 나오토 전 총리대신과 완전히 똑같은 '菅'자를 쓴다. 다만 스가 관방장관의 경우에는 이 글자를 스가라고 읽고, 간 전 총리의 경우에는 으로 읽는다.
  • 역대 최장수 관방장관이다. 종래 1289일간 관방장관을 지낸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가 최장수 관방장관 기록을 갖고 있었지만 2016년 7월 7일에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이 기록을 깼으며, 지금까지 현직으로 있다.
  • 철저한 표정관리로 속마음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으며 위기관리 능력을 인정받아 롱런한다는 평. 민감한 질문을 받아도 동요하는 법 없이 "논평을 삼가겠다", "말하는 것을 삼가고 싶다" 하고 일축하거나,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도 질문의 핵심과 거리가 있는 답변으로 대신하면서 기자들의 진을 빼는 등, 정부 대변인으로서는 노회한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다.
  • 현재는 어느 파벌에도 소속하지 않았다. 정치생활을 오래도록 하였음에도 자신만의 파벌도 만들지 않은 관료형 정치인을 고수하고 있다. 성격이 진중하고 침착할 뿐만 아니라 술담배나 유흥 따위도 일절 하지 않으며[7]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관방장관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일본/정치계에서 평판이 좋다. 이런 처신 덕에 일본 언론에서 비판을 받지 않는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다.
  • 그러나 한일 간에 일상적인 갈등 탓에 한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 실제 한일관계에 대한 논평을 보더라도 지극히 냉랭한 편. 생전에 김종필도 스가 요시히데에 대해서 "이 사람이 한국에 대한 인식이 좋지 못하다. 한국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 한국에서의 '친일'과 일본에서의 '친일'의 의미 차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하다. 2019년 2월 문재인 대한민국 대통령의 '친일 청산' 언급에 대해서 "3·1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국독립운동사의 기억과 독립운동가의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맥락에서 이뤄진 것으로 알고 있다" 하고 설명했다"이런 문맥에서의 친일은 전쟁(태평양전쟁) 전이나 전쟁 중 일본 당국에 협력한 관계자를 반민족주의자로 비판하는 용어"라며 "일본어로 말할 때의 친일과는 의미가 다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8]고 덧붙였다. #
  • 2019년 4월 1일 신 연호 발표를 하기로 결정되자 누가 신 연호를 발표할지를 두고, 즉 아베 총리가 할지, 아니면 전례처럼 스가 관방장관이 할지를 놓고 말이 많았다. 2019년 3월 27일에는 쇼와에서 헤이세이로 넘어갔을 때처럼 신 연호 발표는 스가 관방장관이 발표하고, 그 뒤에 아베 총리가 신 연호에 관한 담화를 하기로 결정했고, 동년 4월 1일 11시 40분 레이와 시대 시작을 발표했다. 따라서 향후 스가 장관도 일명 헤이세이 아저씨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오부치 게이조 당시 관방장관처럼 레이와 아저씨가 될 것 같다. 실제로도 4월 1일 신 연호 발표 이후 스가 장관도 '레이와 아저씨'라는 내용이 조금씩 나왔다.[9] 하지만 당시에는 연호를 생중계로 공개한다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어서 관심이 높았던 탓도 있고, 특히 신문 등 아날로그 매체의 영향력이 높았던 시대라 신문 1면에 떡 하니 박힌 오부치 장관이 일본 국민에게 몹시 강렬히 각인됐던 까닭이 크다. 더군다나 오부치 장관과는 달리, 스가 장관은 최장수 장관으로 7년 넘게 각종 정부발표를 해오고 있어서 별 감흥이 없다는 말이 많다. '그냥 원래 발표하는 아저씨구나.' 하고.
  • 2019년 4월 28일 니코니코초회의 2019에 아베 수상을 대신해 처음으로 등단했다. 참석자들의 반응은 '진짜다!' 스가 장관은 '주목받아서 저도 놀랐습니다. 한번 오고 싶었습니다. 열기가 대단하네요' 라고 웃으며 코멘트했다. 또한 레이와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언급. 기념 촬영에는 역시나 레이와의 레플리카가 등장했다.

4. 둘러보기


  1. [1] 현재의 아키타현 유자와시
  2. [2] 현 주식회사 케이네스(ケーネス)
  3. [3] 이때 2위인 우에다 후보와의 득표율 차가 불과 2%였다.
  4. [4] 리버럴 성향으로, 1992년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 당시 관방장관 자격으로 일본 정부가 군 위안소(일본군 위안부) 설치와 운영·감독에 관여했다고 처음으로 인정한 이른바 '가토 담화'를 발표했다.
  5. [5]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을 거치지 않고, 일본 정부가 직접 발행하는 지폐
  6. [6] 참고로 '연금기록문제'란, 2007년에 국회가 사회보험청 개혁관련 법안을 심사하던 중 사회보험청의 전산에 오류나 미비점이 많다는 것이 밝혀져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사건이다. 2007년 7월 29일에 있었던 제21회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이 패배한 원인 중 하나로 언급된다.
  7. [7]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속한 아베 내각 3인방의 한명이자 악우(惡友)인 아소 다로 부총리는 화족 출신+재벌가문의 부유한 배경과 술담배와 유흥에 조예가 깊은, 자신과 정반대의 인물이다(...),
  8. [8] 일본에서 '친일'이라 하면, 한자 그대로 일본에 친근감을 느낀다는 의미 혹은 일본에 호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즉 '친일파 청산'이라는 언급은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매우 극단적인 표현으로 오해될 수 있는데 스가 장관은 이러한 차이를 파악하고 있는 것.
  9. [9] 오부치와는 다르게, 은색 손목시계를 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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