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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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韓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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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新羅

인장

진흥왕 재위기인 6세기 무렵 신라의 영토[2]

B.C. 57년 ~ A.D.935년 (도합 992년)

건국

기원전 57년 6월 8일
,(음력 4월 병진[3]일),

국호

사로,계림,신라,사라 등 여러 표기 →
신라(503년 국호 통일)

위치

한반도 동남부 →
한반도 중 ·남부

수도

서라벌

소경

중원경
북원경
서원경
남원경
금관경

정치 체제

군주제전제군주제

국가 수반

거서간[4]차차웅[5]
이사금[6]마립간[7]매금 [8]
[9] → 황왕[10](제왕, 태왕등)

국성

언어

고대 한국어
,신라어, 가야어,

종족

한민족, (예맥, , 말갈족[11] 등),

종교

토속 신앙 → 불교

성립 이전

진한 사로국[12]

멸망 이후

고려, 후백제

신라의 괴뢰 국가

보덕국

1. 개요
3. 독자적 연호
4. 간략한 역사
4.2. 성장
4.3. 중앙집권화와 국력 강화
4.4. 진흥왕 대의 전성기
4.5. 백제고구려와의 전쟁
4.6.1. 당나라와의 영토 협약에 대해
4.7.1.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4.8. 통일신라 의 발전
4.9. 쇠퇴기
9. 군사
11. 시기 구분
12. 다른 위키의 신라 문서
15. 신라의 유적
16. 신라의 유물
17. 신라의 도서
18. 신라를 소재로 한 작품
19. 관련 문서
20. 신라 틀

1. 개요

고대 한반도에 존재했던 국가이다.[13]삼국사기》의 서술에만 의존한다면, 고대 한반도에 존재한 삼국건국 시기가 가장 빠르다.[14] 현대 한국어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말을 기반으로 하는데[15], 현대 한반도의 지명들 역시 절대 다수가 이 나라 시절 붙여졌다.[16]

2. 국호

세계의 신라국호

한국어

신라(新羅)
의미는 '덕업일사방 : 德業日四方’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말 뜻은 다음과 같이 풀이된다.
金富軾, 三國史記 卷4 新羅本記 第1 智證麻立干 "四年, 冬十月, 群臣上言,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 臣等以爲, 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宜矣, 又觀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二世, 但稱方言, 未正尊號, 今群臣一意, 謹上號新羅國王, 王從之"
김부식, 삼국사기 4권 신라 본기 지증왕 4년 10월에 군신(羣臣)이 말하기를, "시조께서 나라를 세운(創業) 이래로 나라 이름이 일정치 아니하여 사라(斯羅), 사로(斯盧), 신라(新羅)라 하였으나, 신(臣)들은 생각건대 '신'(新)은 덕업(德業)이 날로 새로운 뜻이요, '라'(羅)[17]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므로, 그것으로 국호(國號)를 삼는 것이 좋을 듯하오며, 또 생각건대 자고로 국가를 가진 이가 다 제왕(帝王)이라 칭하였는데 우리 시조가 건국한 지 지금 제22대에 이르도록 단지 방언(邦言)으로 칭하여 존호(尊號)를 정하지 아니하였으니 지금 군신(羣臣)은 한뜻으로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이란 존호를 올리옵니다"고 하니, 왕이 거기에 좇았다.

다만 실제로는 '신라'라는 이름은 그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고구려와 함께 '신라'가 전진에 377년과 381년에 <자치통감> 등에서 기록되어 있고, 당대 사료인 광개토왕릉비에도 신라가 이미 등장하고 있다. 이 의미 풀이는 원래 존재하던 고유어를 한자로 표기하려는 과정에서 음도 의미도 적절한 한자를 찾아서 유교적인 해석을 끼워 맞춘 것이고 이전부터 사용되던 '신라'라는 이름을 유일한 공식 명칭으로 규정한 것으로 추정되며, 지증왕 대에 국호를 통일하기 이전까지는 사로, 사라 등 다른 표기를 혼용했다.

신라 이전에 불렸던 이름들은 걸의식국(乞衣食國), 비집기국(飛集基國), 시라(尸羅), 사라(斯羅), 시림(始林), 유계(有鷄), 계괴(鷄怪), 계림(鷄林)[18], 서야벌(徐耶伐), 서라벌(徐羅伐), 유잠국(有蠶國) 등으로 불렸는데, 이들 모두 가운데 일부가 누에치기와 관련된 이름들이라는 특이점이 있다. 일본에서 발견된 민정문서에서도 유달리 뽕나무 재배 수량이 많아 신라가 전통적으로 누에치기와 관련이 컸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에 관한 이름도 많은데 실제로 신라 건국설화에는 계룡이 등장한다.

중국어

신뤄(Xīnluó)

일본어

시라기(しらぎ) 혹은 신라(しんら)

초기부터 일본과 거리가 가깝고 서로 많이 얽혔던 관계라 백제를 쿠다라로 읽는 것과 같이 신라를 읽는 법이 따로 존재한다. 시라기는 일본서기의 훈을 따른 것이다. 때론 しんら, 즉 한국어 독음과 유사한 '신라'로 읽기도 하는데 이건 한자 新羅를 현대 일본어식으로 음독한 것으로 다만 한국어에서 신라를 읽을 때는 자음동화 현상으로 실제로는 저절로 '실라'라고 읽게 되지만 일본어로 しんら를 읽을 때는 실라가 아닌 '신'라 그대로 읽는다.

아랍어

알실라(Alshillaالسيلى) [19]

페르시아어

베실라(Beshilla), 바실라(Bashilla)

통일 신라 시기에는 아랍페르시아 사람들이 신라를 찾은 이후 아랍 문헌에선 신라의 국호가 '알실라(Alshillaالسيلى)', 페르시아 문헌에선 '베실라(Beshilla)' 등으로 표기됐다. 2010년 말 한국에 그 정체가 알려진, 신라에 관한 내용이 풍부한 페르시아의 대서사시 쿠쉬나메( کوش نامه, Kush Nama)에선 신라의 국호가 '신라(Shilla)' 또는 '바실라'라고 나타난다.

영어

SILLA/SHILLA

라틴어

SELLA [20]

인도

구구탁예설라(矩矩托禮說羅)

만주어

solho(솔호) / solongos(솔롱고스)

몽골어

Солонгос(솔롱고스)

3. 독자적 연호

신라는 한반도에 존재한 나라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국가다.

신라의 연호

건원(建元)

법흥왕 ~ 진흥왕 (536년 ~ 551년)

개국(開國)

진흥왕 (551년 ~ 567년)

대창(大昌)

진흥왕 (568년 ~ 572년)

홍제(鴻濟)

진흥왕 ~ 진평왕 (572년 ~ 583년)

건복(建福)

진평왕 ~ 선덕여왕 (583년 ~ 634년)

인평(仁平)

선덕여왕 ~ 진덕여왕 (634년 ~ 647년)

태화(太和)

진덕여왕 (647년 ~ 650년)

4. 간략한 역사

4.1. 건국

청동기가 전래된 이후 권력을 가진 부족장이 등장하면서 생성된 초기 신라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제적, 중앙 집권적인 영역 국가가 아니라 지금의 경주시 지역에 있던 6부촌(양산촌(이씨), 고허촌(소씨), 진지촌(정씨), 대수촌(손씨), 가리촌(배씨), 고야촌(설씨))[21]의 느슨한 소형 연맹체였다. 이 6개 촌 주민들은 삼국사기 기록상 남하한 고조선의 유민이라고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 6부촌이 협의하에 양산촌 출신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이후 6촌은 6부로 발전했는데, 각각 훼부, 사훼부, 본피부, 사피부, 잠훼부, 한기부가 되었다. 현대 사학계에서는 이들의 지도자 중에서 신라 전체의 지도자가 추대되다가 점차 훼부가 왕위를 독점한 것으로 추정한다. 각 지방마다 간, 또는 간지라고 하는 지도자가 있었고 각자 독자적인 세력권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왕(王)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간지라는 단어로부터 칸(khan)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고도 보이며, 동북아에서 (khan)이라는 단어가 기록상 가장 먼저 나오는 국가가 신라다.

군주의 명칭은 처음엔 거서간이었다가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으로 변했는데, 초대 왕(거서간)인 박혁거세부터 8대 아달라 이사금까지는 대부분 박씨가, 9대 벌휴 이사금부터 16대 흘해 이사금까지는 대부분 석씨가 계승하였다. 신라 초기에 박 - 석 - 김 세 성씨가 돌아가면서 왕위를 계승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초기의 신라는 기원전에 건국되어 초반부터 진한, 변한(=가야) 지역의 여러 나라나 바다를 건너오는 왜국과 상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교차검증이 가능한 해외 기록으로는 3세기의 중국 측 기록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진한의 하나인 "사로국"이란 명칭으로 처음 등장한다. 삼국사기나 일본서기는 좀 더 후대에 작성된 것이지만 정사 삼국지는 3세기에 작성되었으므로 사로국은 아무리 삼국사기가 오류가 있다 가정해도 3세기에는 확실히 존재했다고 보다 명확하게 인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호는 초기에 사로, 사라, 신라 등이 혼용되어 사용되다가, 503년 지증왕이 신라로 확정했다. 그 밖에 경주 일대를 뜻하는 지명인 계림이 신라를 지칭하기도 했다.

4.2. 성장

신라기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사로국 문서로. 역사 고고학적 성과가 대량으로 반영되었다.

신라는 성장하면서 주변 진한 12개국을 차례로 병합해 나갔는데, 첨해 이사금(재위 247년 ~ 261년) 시기를 전후로 진한 전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였다.

신라가 국가 체제를 공고히 하고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것은 금석문에 최초로 등장하는 내물 마립간(내물왕)(재위 356년 ~ 402년)때다. 이전에는 공화정이 아니였나 의심스러울정도로 박, 석, 김 3개 성씨가 돌아가며 이사금이 되었으며, 이사금 자리는 '연장자'라는 뜻이 말해주듯 도시 국가의 리더에 가까운 위치였다. 그러나 내물 이사금 대에 이르러 사로국은 영역 국가 신라로 재편되었으며, 김씨가 독점적으로 지도자 자리를 세습하는 '왕조 국가'로 거듭난다. 그리고 이때부터 '연장자'(이사금) 대신 '간干들의 우두머리'' 간干 중에 간이라는 의미의(마립간)를 지도자의 호칭으로 쓰기 시작했다. 또 내물 마립간은 중국 전진(前秦)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했는데 이를 통해 중국과 교류하였다. 46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재위에 있었던 내물 마립간 대에는 크고 작은 여러 사건과 전쟁이 있었다. 내물마립간 전기에는 백제 전성기인 근초고왕이, 후기는 고구려 전성기인 광개토대왕이 재위에 있었던 시기로, 이 시기에 삼국은 마한진한을 평정하고 비로소 국경에서 직접적으로 군사적 접촉을 시작하던 때였다. 또 내물 마립간 대에는 왜의 침략이 잦았는데 여러 차례 왜의 침략을 격퇴하는데 성공했지만 그의 재위 말기인 399년 백제, 가야, 의 연합군이 대규모로 침공했을 때는 우호 관계에 있었던 광개토대왕(재위 392년 ~ 413년)에게 사신을 보내 고구려군의 지원을 받았다. 광개토대왕의 5만 대군이 신라성에서 연합군을 격퇴하였고 종발성까지 격퇴시켜 왜구를 도륙했고 신라인에게 그 성들을 지키게 하였다, 이로 인해 이후 한동안 신라는 고구려에 조공하였다.

광개토대왕에 이어 장수왕(재위 412년 ~ 491년) 시절 전성기에 접어든 고구려는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기며(427년) 남진 정책을 펼치면서 백제와 신라에 본격적으로 압박을 가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눌지 마립간(재위 417년 ~ 458년)[22]은 백제의 비유왕의 화친 제의를 받아들여 나제동맹을 맺었다(433년). 나제 동맹은 진흥왕성왕이 대립할 때까지 약 120년간이나 지속되었는데, 455년과 475년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했을 때 신라는 백제로 지원군을 파병했으며,[23] 494년과 495년에 걸쳐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번갈아 침공해왔을 때도 백제와 연합해서 고구려군을 격퇴했다.

왜와 친밀했던 백제와 달리, 신라는 왜와는 거의 철천지 원수 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삼국사기에서 나오는 왜의 침략 공격 약탈의 수는 어마어마하다.

4.3. 중앙집권화와 국력 강화

지증왕(재위 500년 ~ 514년)과 법흥왕(재위 514년 ~ 540년) 때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불교를 장려하고 왕권을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하여 중앙 집권 국가로 변모하였고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지증왕(재위 500년 ~ 514년) 대에 대대적으로 체제를 정비하고 국력 강화를 이루었다. 503년 국호를 정식으로 "신라"로 확정하고[24], 마립간 대신 왕(王)을 칭하였다. 또 관등 정비(503년), 상복 제정(504년) 등을 통해 체제를 정비했고 지방 제도를 개편했다(505년). 아울러 502년 우경법을 실시하여 식량 생산이 크게 증대되어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국방력 강화에도 힘을 써 12개의 성을 축조했고, 동시전도 설치했으며(509년), 이사부가 지휘하는 수군을 보내 우산국(울릉도)를 복속시켰다(512년).

법흥왕(재위 514년 ~ 540년) 때는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크게 강화하여 영토를 확장하면서 중앙 집권 국가로 변모해 나갔다. 516년 법흥왕은 병부(兵部, 오늘날의 국방부)를 설치하고 병부의 장관인 병부령(兵部令)을 임명하여 군 체계를 정비하고 군사력을 강화했다. 520년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는 등 국가 체제를 정비했다. 527년에는 이차돈순교를 통해 불교를 공인했는데, 왕족을 석가족과 동일시하면서 왕권을 강화해 나갔고, 동시에 토속 신앙의 제사장이었던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531년에는 상대등 직위를 신설하여 귀족 대표를 관료 체계에 포함시켜서 귀족 세력을 왕권에 복속시켰다. 532년에는 가야연맹의 중심 국가인 금관가야를 병합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이러한 국력 신장으로 자신감을 얻은 법흥왕은 536년 마침내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25]하고 스스로를 황제로 칭했다.

이처럼 지증왕과 법흥왕의 치세를 거치며 국력이 탄탄해진 신라는 법흥왕의 아들 진흥왕 때 전성기에 이르게 된다.

4.4. 진흥왕 대의 전성기

신라는 6세기 진흥왕(재위 540년 ~ 576년) 때에 이르러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했다. 진흥왕은 기존에 존재하던 화랑도를 재편하여 국가적 조직으로 재정비, 발전시켰다. 또 호국불교의 융성을 통한 국가 결속의 강화를 위해 황룡사(545년)를 비롯하여, 법주사, 화엄사 등 여러 대형 사찰을 건립했다.[26]

이를 토대로 진흥왕은 대대적인 영토 확장을 시도했다. 551년 진흥왕은 나제동맹에 있던 백제와 동시에 고구려를 공격해 고구려의 10군을 점령했다. 이때 백제도 고구려로부터 한강 하류 6군을 점령했는데, 이후 백제군이 한강 유역에서 철군하자 553년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차지했다.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의 항구를 통하여 백제고구려를 거치지 않고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는 이후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신라가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진흥왕은 북쪽으로 고구려 경략을 계속하여 지금의 함경도 지역까지 진출했다. 556년에는 함경남도 원산, 안남 지역을 점령하여 비열홀주를 설치했다. 이후에도 북진을 계속하여 568년 점령 지역을 시찰하면서 마운령 순수비와 황초령 순수비를 세웠다.

한편 남쪽으로는 남아있던 가야 세력을 경략하여 대가야의 합병(562년)을 끝으로 가야 전 지역을 완전히 병합했다.

영토 확장과 더불어 여러 사찰의 창건이 눈에 띈다. 진흥왕은 측근들을 통해 황룡사를 비롯하여, 법주사, 화엄사 등 여러 사찰을 건립했다. 활발한 영토 확장을 벌이면서 불교를 통해 국력을 결집하려 했던 신라 고유의 호국 불교를 잘 활용하였음이 엿보인다. 황룡사는 수도 서라벌 한 복판에 세워져 국력을 결집하는 역할을 했으며, 법주사, 화엄사는 새로 편입된 전방 지역에 세워졌는데, 불교를 통해 새로 복속된 지역의 민심을 수습하여 해당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기록에 의하면 해당 사찰에서 고승들이 화랑들에게 불법을 강연하는 등 군사적 용도로도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세력의 확장을 통해 새로 복속된 지역에 적극적인 유화 정책을 펼쳤다. 가야 제국(諸國)의 경우는 동급의 진골로 바로 편입해주었고 고구려와 백제도 정복 초반엔 꽤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었다. 다만 고구려의 경우엔 결국 6두품, 백제의 경우는 5두품이어서 가야에 비해선 약간 쳐졌던 게 사실. 이유는 변한(가야), 진한(신라)의 상대적으로 강한 문화적 동질감에 있었던 걸로 추정되며, 월성 석씨 선원 세계도, 신라 김씨 선원 세계도 의하면 석탈해의 손녀 마정 부인이 그의 양자격이었던 김알지의 처가 되었다고 하는 게 그 근거.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장남의 이름은 강조(康造)라 하고, 월성 석씨 족보에서는 구광이라 하였으며 구광은 가야 국왕 김수로왕의 딸이다.즉 김알지의 계통 체계는 금관 가야 김수로와의 혈연적 연관이 보이며, 때문에 예전부터 신라와 가야 제국들과의 혼인 관계에 의해 진흥왕 시절 새로 편입된 가야 제국의 백성들은 위화감 없이 신라에 융화되었다고 추정한다.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가야 멸망 후 신라 왕족과 명목상 동급의 진골로 편입되었다. 다만 고구려 귀족 6두품, 백제 귀족 5두품으로 된 처우는 나쁘진 않지만 가야에 비해서도 그렇고 썩 좋은 우대라곤 보기 어렵다. 특히 백제의 경우 완전 동급으로 대우해줬던 전례와 비교하면 태수나 장군은 고사하고 깡촌 우두머리급인 5두품은 영? 이는 백제와 통일 전쟁 전후로 상호 원망이 쌓였던 게 일차적인 원인으로, 백제 왕족이나 고위 귀족이 일본으로 많이 간 건 원인으로 보기 어렵다. 설령 그랬다한들 전부 도망갔을지 어쨌을 진 모르는 일이며, 그렇게 따지면 역시 다는 건사하지 못했던 고구려 고위층한텐 백제 고위층보다 더 나은 대우를 해줄 다른 이유가 없다. 신라 측도 바보가 아니라서 오히려 애초엔 백제 쪽을 더 우대해주려고 했으나.. 지배층에 통합된 후의 공헌도에서 구 가야출신은 두말할 것 없이 전쟁에서 큰 역할을 맡았지만, 구 백제지배층은 신라 정부 생각대로 그렇게 쉽사리 협조적으로 움직이진 않았다.[27] 때문에 이런저런 이유로 고구려 유민과 백제 유민의 완전한 통합 시도는 고려 시대로 미뤄질 수밖엔 없었다. 이들이 성공적으로 신라의 고위 계급으로서 정착하였고 동화하였다고 생각하는 건 문무왕 대의 극히 초반 파격적인 조치를 신라 시기 전 시기에서 일어난 걸로 착각하는 견강부회이자 역사를 지극히 단순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소망의 발로로 실제 현실에서 일어난 일관 별도며, 이는 후삼국 시기 분리에서 입증된다.[28] 그러나, 후삼국시대는 200년 이상 뒷날의 이야기기 때문에 7세기의 통합 후유증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다시 갈라졌다고 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4.5. 백제고구려와의 전쟁

553년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백제와 고구려의 국경이 분리되었다. 백제의 경우 전 국경선이 신라와 접하게 되었고, 고구려의 경우에도 남쪽 국경선이 모두 신라와 접하게 되었다. 때문에 이때부터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진흥왕의 기세가 워낙 매서웠기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가 움츠려 들면서 6세기 후반은 삼국시대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전쟁이 없는 시기가 지속되었다. 백제 위덕왕은 재위 초기 성왕 전사를 복수하기 위해 몇 차례 신라를 공격했다가 역관광당한 후 죽을 때까지 더이상 신라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고구려 평원왕 역시 진흥왕에서 계속 영토를 빼앗기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어전 이외에 일절 보복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때문에 진흥왕 사후 진지왕진평왕 재위 전반기까지 삼국 간에 거의 전쟁이 없는 강제 평화기가 지속된다.

백제의 경우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한 후 그의 아들 위덕왕이 복수를 위해 왜와 연합하여 몇 차례 신라를 쳐들어왔으나, 진흥왕이 성공적으로 방어함은 물론이고 오히려 역습으로 백제의 영토를 추가적으로 점령하고 가야를 완전 합병(562년)하는데 이르자, 이후 백제는 왜와 동맹을 더욱 강화하여 방어에만 치중하게 된다. 당시 왜는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백제를 부추겨 함께 신라를 공격하기를 원했으나, 진흥왕의 기세 눌려 소심해진 백제 위덕왕은 왜의 요청을 번번히 거절하며 죽을 때까지 더이상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지 않았다. 한편 진흥왕 역시 백제의 배후에 왜가 버티고 있는 상황을 직시하고 더 이상의 백제 침공을 자제하고 대신 북쪽의 고구려 경략에 치중하게 된다. 때문에 562년부터 602년까지 40년 동안 신라와 백제간에는 이렇다할 전쟁이 발생하지 않는 휴전기가 지속된다.

한편 고구려의 경우, 진흥왕이 함경도까지 들쑤시고 다녔지만, 당시 고구려의 국왕 평원왕은 신라와의 대결을 자제했다. 평원왕은 중국의 위협이 계속되고 신라가 전성기에 이른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진흥왕이 고구려 영토를 잠식한 것에 대해 군사적 보복을 시도하지 않고 내치를 다지며 안으로 국력을 강화하는데만 주력했다.[29] 고구려에서는 온달 등 강경파들이 끊임없이 신라에 대한 보복 공격을 주장했으나 평원왕은 죽을 때까지 끝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590년 마침내 평원왕이 죽자 온달은 처남 영양왕을 설득하여 신라를 침공했으나 본인이 전사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590년). 그러나 이후에도 영양왕은 수나라를 물리친 것에 탄력을 받아 603년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해왔으나 진평왕이 직접 나서 이를 격퇴했다.

진흥왕 사후 진평왕(재위 579년 ~ 632년)은 53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보위에 있으면서 백제와 고구려의 연이은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며 신라의 전성기를 이어갔다. 진평왕은 한창 때 진흥왕처럼 손수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우는 용맹한 군주였지만, 그도 만년에 이르러서는 노화로 인한 쇠약을 피해갈 수 없었다.

7세기에 접어들자 백제는 무왕(재위 600년 ~ 641년)이 집권하면서 그동안 방어에만 급급했던 태도를 바꾸어 신라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백제 무왕은 602년, 근 40년만에 신라 공격을 감행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605년 8월 진평왕이 백제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자 백제는 왜, 중국과 외교적으로 우호 관계를 맺고 신라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이후 한동안 백제 무왕은 수나라에 여러차례 사신을 보내며 수나라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고구려와 긴장 관계를 이어갔다. 특히 무왕은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한다면 백제가 앞장서서 길을 터주는 앞잡이 역할을 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611년 수나라가 마침내 고구려 침공을 위한 동원령을 내렸고 이에 신라는 수나라와 고구려와의 결전을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렇게 신라의 시선을 고구려로 돌려 놓은 상황에서 백제 무왕은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612년 정월) 직전인 611년 10월 돌연 신라를 기습하여 가잠성을 함략했다. 616년 백제는 신라 모산성을 공격했고, 618년 신라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백제가 점령한 가잠성을 공격하여 성주를 전사시켰다. 이렇듯 신라와 백제는 일진일퇴의 소모전 양상이 거듭었다. 그러다가 진평왕 말년인 623년 백제 무왕이 신라 6개성을 함략하는 성과를 거두면서 백제는 드디어 가시적인 성과를 냈다. 그러나 수나라의 개입으로 10년간 소강상태가 이어지며, 632년 진평왕이 죽을 때까지 더 이상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632년 진평왕이 죽자 신라에선 성골 출신 남자 후계자가 없어 신라 최초의 여왕선덕여왕(재위 632년 ~ 647년)과 진덕여왕(재위 647년 ~ 654년)이 연이어 즉위했다. 신라에 여성 왕이 즉위하자 백제와 고구려는 이를 기회로 여겨 신라에 대한 집중적인 공세를 시작했다.[30]

백제 무왕은 선덕여왕 즉위 이듬해인 633년, 10년만에 다시 신라를 침공하여 서곡성을 함략시켰다. 이어 636년 백제 무왕은 다시 신라를 침공하여 독산성을 쳤으나 이번에는 패배하고 물러났다. 독산성 전투 패배 이후 무왕은 더이상 신라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고, 의자왕이 즉위할 때까지 백제와 신라간의 소강 상태가 다시 이어진다.

641년에 즉위한 백제 의자왕은 즉위 이듬해인 642년 신라를 침공하여 여러 성을 함락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특히 642년 8월 대야성 전투[31]에서 백제가 요충지인 대야성을 함략하고 당시 유력자였던 김춘추과 사위를 죽인 것은 신라로서는 뼈아픈 일이었다.[32] 대야성 함락 이후 642년말 김춘추는 직접 고구려로 가 두 달 전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연개소문에게 군사 동맹을 제의한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김춘추를 투옥했으나, 김유신의 신라군이 고구려 국경지대로 진군해오자 김춘추를 풀어준다. 직후 연개소문은 백제 의자왕과 동맹을 맺었다. 그 결과 백제와 고구려가 동시에 신라를 압박해오는 상황이 이어진다. 한편 백제 의자왕은 642년의 군사 활동으로 대야성을 비롯해 신라의 여러성을 차지하여 기세 등등해져 있었지만 김유신이 있는 신라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이에 백제와 신라는 서로 뺏고 뺏기는 소모적인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나 신라는 호전적인 의자왕에 맞서는 동시에 연개소문의 고구려와도 동시에 싸워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게 된다. 신라는 때때로 고구려, 백제 두 개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하는 등 쉽지 않은 상황이 계속되었다.[33] 이 당시 김유신은 군사의 사기 진작을 위해, 전장을 이곳저곳 돌다가 겨우 경주의 집 근처를 지나칠 때도 시간이 없어 집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아래 사람을 시켜 집 안의 우물물만 마시고 바로 다시 전쟁터로 떠났다고 한다.《삼국사기》 열전에서는 김유신, 계백, 관창 그리고 김영윤 등 많은 한반도의 영웅들의 상쟁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4.6. 나당동맹

대야성 함락(642년) 직후 신라는 백제와의 전투에 화력을 집중하기 위해 고구려와 화친을 맺기로 결정하고 김춘추를 고구려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처음에 김춘추를 환대했던 연개소문은 백제 성충의 밀지[34]의 편지를 받은 후 돌변해 김춘추를 투옥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642년).

고구려와의 회담이 결렬된 후 김춘추는 왜국으로 건너가 동맹을 제의했지만[35]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왜는 이를 거절했다. 마지막으로 648년 김춘추는 당나라로 건너가 동맹을 제의한다. 신라에서 차기 왕위 계승자인 거물 김춘추가 사신으로 오자 당태종은 김춘추를 환대했다. 김춘추는 한달간이나 당나라에 체류하면서 당태종과 여러 차례 술자리를 겸한 회동을 가졌고, 그결과 나당동맹이 체결되게 된다.[36] 나당동맹이 맺어지자 백제, 고구려, 일본이 연합을 맺어 이에 응수했다.[37]

신라가 나당 동맹을 맺어 외세의 힘을 빌려 동족을 멸망시켰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중국을 이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려는 시도는 백제의 오랜 외교 정책이었다. 백제의 개로왕은 472년 북위에 밀서를 보내 고구려를 침략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이 사실이 고구려에게 발각되어 분노한 장수왕이 군대를 이끌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략하고 개로왕과 귀족들을 처형하여 백제가 파탄난 적이 있었다(475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백제 위덕왕수문제에게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한다면 백제가 고구려 지형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물자와 군사를 보내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수나라가 실제로 고구려를 침공하자 백제는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하여 수나라를 지원했다. 그러나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은 실패로 끝냈고 백제는 오히려 고구려의 보복 공격을 당하여 어려움을 겪은 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덕왕은 수나라에게 고구려를 재침공해달라고 종용했다. 위덕왕 사후 무왕 역시 자발적으로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면서 고구려를 침략해 줄 것을 수차례 요청했으나 이는 수나라의 멸망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세워지자 무왕은 당나라에 고구려 침공을 거듭 요청했고 이는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기로 결심한 것에 일조했다. 한편 642년 김춘추가 고구려에 화친을 제의하기 위해 연개소문과 회담을 할때, 백제 성충연개소문에게 밀서을 보내어 고구려가 신라와 화친을 맺는다면 백제는 당나라에 협력하여 당에게 자원을 제공하고 고구려로 진격할 길 안내를 할 것이라고 압박하기도 했다. 백제 성충의 이같은 협박은 연개소문이 신라의 화친 제의를 거절한 결정적인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당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백제, 신라와 모두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당나라와 백제의 외교 관계가 결렬된 645년 이전까지 당나라는 신라보다 백제와 훨씬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645년 이전까지 당나라에 파견한 사신의 수도 신라보다 백제가 월등히 많았다. 백제 무왕이 고구려 멸망을 위해 당나라 외교에 무척 공을 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당나라는 신라와도 외교 관계를 맺고 있지만, 두 나라 간의 관계는 그리 매끄럽진 못했는데, 선덕 여왕을 여자라고 당 태종이 대놓고 조롱한 것도 이 때까지는 당이 신라를 중요한 외교 파트너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사례다. 아래에 나오지만 당 태종은 나중에는 태도를 싹 바꾼다.

당나라의 외교 정책에 변화가 생긴 것은 645년이었다. 당 태종은 645년 고구려를 침공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백제 무왕의 거듭된 간청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을 결심하는데 한몫했다. 당 태종은 출병하면서 외교 관계에 있던 백제, 신라에게 모두 원군을 요청했다. 연개소문의 김춘추 구금(642년)으로 고구려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신라는 당나라가 출병을 요구하자 원군을 보내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했다. 반면에 백제 의자왕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한다면 적극 돕겠다고 약속했던 선대 무왕의 약조를 지키지 않고 당나라의 파병 요청을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구려로 출정 중이던 신라의 배후를 공격했다. 백제의 이같은 행태에 격분한 당 태종은 백제와의 외교를 단절하고 죽을 때까지 백제의 사신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신라만이 당나라의 유일한 한반도 외교 파트너로 남게 되었다.

물론 앞서 전술된 것처럼 신라와 당나라의 관계는 꽤 삐걱댔다. 나당 동맹이 체결된 648년에 김춘추가 당나라로 파견된 것도 애초에 당 태종이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것에 대해 딴죽을 걸었기 때문이었고, 이를 해명하기 위해 신라 조정은 김춘추를 당나라로 파견했다. 당나라에 파견된 김춘추는 의외로 당 태종과 죽이 잘 맞았다. 체류하는 동안 당 태종과 김춘추는 여러차례 술자리를 가졌고 이 와중에 나당 동맹이 체결되게 되었다.

4.6.1. 당나라와의 영토 협약에 대해

나당동맹 체결 당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대동강을 경계로 국경을 나누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의 실제 기록에는 진덕 여왕 2년(648년)에 당시 이찬이던 김춘추가 당태종을 알현해 백제의 침공을 고하고 군사를 내줄 것을 요청하자 당 태종이 그에 응했으며 복귀하는 도중에 고구려의 순라병에게 걸렸다가 겨우 탈출한 이야기가 실려있으며 당 태종과의 영토 분할 협약에 대한 직접적인 내용은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물론이고 구당서신당서에도 등장하지 않고 있다.

다만, 구당서 199권 동이(東夷) 편에, 백제부흥군복신유인궤에게 보내는 서신의 내용 중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존재한다.

大唐新羅約誓, 百濟無問老少, 一切殺之. 然後以國付新羅.

듣자하니, 대당과 신라가 약조하여 맹세하기를 백제늙고 어린 것을 묻지않고 모조리 죽인 후에 나라를 신라에게 주기로 하였다고 한다.

또한 문무왕설인귀의 서신에 보낸 답장인 '답당설총관인귀서(答唐薛摠管仁貴書)' 서두에도 당태종이 했다는 약속이 표현되고 있다.

朕今伐髙麗, 非有他故, 憐你新羅攝乎兩國, 每被侵陵, 靡有寧歳. 山川土地非我所貪, 玉帛子女是我所有. 我平定兩國, 平壤已南百濟土地, 並乞你新羅, 永爲安逸.

내가 지금 고려를 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끌림을 당해서 매번 침략을 당하여 편안할 때가 없음을 가엾게 여기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바가 아니고 보배와 사람들은 나도 가지고 있다. 내가 두 나라를 바로 잡으면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하겠다. [38]

복신의 서신문의 경우, 복신 자신도 '聞(들었다, 듣자하니)' 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서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는 저항하는 것이다' 라는 의미로서 '인용'에 가깝지만 신라가 당과 짜고 백제 땅을 넘겨받기로 했다는 점이 당시 한반도의 통념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며 답당설총관인귀서에 등장하는 당 태종의 발언은 일종의 구두 계약에 가까운데다 남겨진 문서가 없어 밀약의 확증이 되기 어려울 뿐더러 만약 효력이 있었다면 당 고종이 웅진 도독부를 세우고 신라 왕을 계림 도독에 임명한 사건 등이 일어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 태종이 언급한 신라에게 할당하는 영토의 범위가 꽤 구체적이고 신라가 적극적으로 당과의 협력전에 열심이었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만 바라보기는 어려운 점도 있다. 당시 신라와 당나라간의 영토 협약이 어떻게 되는지는 확실치 않고 추정할수 있는 가설들 뿐이다.

이 후 영토 협약 문제는 성덕왕 34년, 성덕왕이 패강(浿江) 이남을 사여(賜與), 즉 빌려달라고 요청했고[39] 당시 당나라 황제였던 당현종이 등주(登州)를 침공한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김의충 편으로 패강 이남을 신라에 넘겨줌으로써 일단락되었다.

4.7. 삼국통일나당전쟁

4.7.1.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진덕여왕 사후 왕위에 오른 김춘추(태종 무열왕, 재위 654년 ~ 661년)는 나당연합의 백제와 고구려 정벌을 실행에 옮길 것을 당에 촉구하였고 당고종이 이에 응하여 마침내 660년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군과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각각 해상과 육로로 백제 공격을 개시했다. 이미 지속적인 전쟁으로 국력이 많이 소진한 상태에서 내부적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과 지배층의 향락으로 국가적 일체감을 상실했던 백제는 결국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한편 고구려고수전쟁부터 이어진 잦은 대규모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했고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하여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이러한 점을 간파한 나당연합군은 소규모 공세를 반복하여 고구려의 국력이 점차 고갈되기를 노렸다. 신라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나라와 대결이 있을 것을 미리 예측하고 고구려와의 전투에는 소극적으로 임하면서[40] 전력을 비축했다. 665년 실권자 연개소문이 죽자 세 아들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고구려는 극심한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특히 연남생은 대막리지에 있었으나 권력 다툼으로 인해 연남건 연남산이 연남생의 아들을 죽이고 연남생을 공격했다 연남생은 패했고 당나라에 항복하였다. 연남생이 요동 지역을 무너뜨리는데 많은 일조를 하였다. 고구려 남부 전선 역시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12개 성을 바치며 신라에 투항하는 등 제대로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고구려는 무너지고 있었다. 666년 제3차 고구려-당 전쟁이 발발했고, 신라 역시 전쟁 상황을 보다가 668년 국력을 총동원해 20만 대군으로 남쪽에서 쳐들어 올라갔으며 사천 전투의 승리를 거쳐 668년 7월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에 먼저 도착해 있던 당군과 합류해 평양을 포위했다. 9월 마침내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는 멸망했다.

4.7.2. 나당전쟁

하지만 백제고구려멸망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더 큰 전쟁이 남아있었으니 바로 나당전쟁이다.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결국 신라를 이용하여 삼국의 영토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심 때문이었다. 당나라는 신라가 차지하기로 되어 있던 구 백제 영토에 웅진도독부를 비롯한 5도독부를 설치하여 백제 땅을 날로 먹으려 했고, 이어 신라 본토에 계림대도독부를 두어 백제, 고구려에 이어 신라까지 먹으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심지어 당나라는 취리산 화맹 사건으로 문무왕과 괴뢰국 웅진 도독부의 도독 부여융을 거의 동급으로 대우하는 굴욕을 주기도 했다.

신라는 당나라의 직접 지배를 용인할 생각이 없었지만, 당나라의 연이은 굴욕적인 조치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발하지 않고 표면적으로 이에 응하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당나라와 있을 전쟁 준비에 돌입해 있었다. 당나라가 백제땅에 5도독부를 설치한 것은 대동강 이남은 신라가 차지하기로 한 약조를 깬 것이었지만, 신라는 이에 항의하기보다 5도독부에 주둔한 당나라군대를 백제 부흥 운동을 진압하는데 활용했다. 백제 부흥 운동 진압 과정에서 신라군은 당나라군과 협력 작전보다는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는 길을 택했는데 그 결과 토벌 지역을 신라의 직접 영토로 편입해 나갈 수 있었다. 신라 영토의 확대로 구 백제 지역에서 5도독부의 영토가 계속 줄어들자 결국 백강 전투(663년) 이후 당나라는 5도독부를 웅진도독부로 단일화하고 나머지 네개 도독부를 폐지했다.

이 와중에 신라는 대 고구려 전쟁에 당나라와 함께 참전하면서도 핑계를 대며 김유신을 출전시키지 않는 등 주력군을 최대한 아꼈다. 이와 동시에 문무왕구진천 등을 시켜 당나라와의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신라는 건국 이래 전통대로 백제와 고구려 정복 지역에 대해서도 유화 정책[41]을 펼쳤는데, 이는 점령지에서 무자비한 살육을 일삼았던 당나라군과는 대조적인 조치였다. 이러한 유화 정책은 고구려와 백제의 잔존 세력들이 신라의 편에 붙어 당나라와 싸우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신라는 '일통 삼한'의 기치를 내걸고 백제인과 고구려인들의 규합에 나섰다. 실제 나당 전쟁 당시 신라군에서 백제인, 고구려인, 말갈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과반수 이상이었다. 신라는 고구려 멸망(668년) 직후 투항한 고구려의 왕자 안승골품제 최고 등급 진골로 편입시켜 고구려 유민들에 대한 유화, 동화 정책을 펼쳤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문왕 6년(686년) 때는 고구려인에게 경관(京官)을 주었는데, 본국(고구려)의 관품(官品)을 헤아려 준 것, 문무왕 13년(673년) 백제에서 온 사람에게 서울과 지방[內外]의 벼슬을 주었으며 그 관등(官等)의 서차(序次)는 본국(백제)의 벼슬에 견주었다고 되어 있으니, 신라가 당시 상황을 얼마나 비상 사태로서 진지하게 해결에 임하려 했는지 알 수 있다.[42]

670년 3월 신라가 옛 고구려땅인 요동에 주둔하고 있는 당나라군을 선제 공격하면서 나당전쟁이 시작되었다. 요동을 일시 점령하며 당군을 저지하고 있는 동안 신라는 670년 7월부터 백제 땅에 주둔해 있는 당나라군을 차례로 공격하여 구 백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해갔다. 전쟁 개시 1년 후인 671년에는 백제의 고토를 대부분 수복했다. 그러나 곧 당나라 본국에서 대규모 군대가 신라 본토를 향해 출병했다. 당군은 요동을 비롯한 옛 고구려 땅에서 고구려계 유민이 중심이 된 군대와 1년여 동안의 치열한 전투를 거친 끝에 672년 7월 마침내 대동강에 다달았다. 672년 8월 석문 평야(현 황해도 서흥군)에서 당군과 신라군의 대규모 지상전인 석문 전투가 벌어졌으나 신라군이 패배하고 말았다. 그동안 요동을 비롯하여 황해도 이북의 옛 고구려 땅에서 벌어진 나당전쟁에서 크게 활약했던 고구려 유민계 부대도 계속되는 전투 끝에 전력을 크게 상실하고 있었다. 석문 전투 패배 후 대규모 회전으로는 당군을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한 문무왕은 일단 당나라와 일시적인 화친을 맺는 등 화전 양면 전술을 구사하여 시간을 벌었다. 그러는 사이 육상전에서 당군의 진격을 임진강에서 저지시키는데 성공했다. 673년말 이후 당군은 더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임진강과 한강 사이에서 지리한 소모전을 벌였다. 그러는 동안 신라는 공성전에서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여 각지에 대규모 축성을 실시하며 방어를 강화해 나갔고, 당군에게 상대적으로 승산이 높다고 생각한 수군을 강화해 나갔다. 당 고종은 문무왕의 화전양면술로 인해 한동안 적극적인 공세를 자제하고 추이를 주시했다. 그러나 문무왕의 화친은 시간을 벌려는 일시적인 전술에 불과했고, 당나라가 방심하는 틈을 타 신라군은 다시 평양성까지 치고 올라갔다. 문무왕의 화친이 일시적인 전술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분노한 당 고종은 674년 다시 당나라 본토에서 대규모 병력을 신라에 재출병시켰다. 본토에서 출병한 당군은 675년 신라 본토에 도달했다. 신라군은 당나라 대군을 맞아 675년 9월 매소성에서 당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했다(매소성 전투). 매소성 전투에의 승리는 신라가 전쟁에서 주도권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매소성 전투 패배 이후 수세에 몰린 당군은 더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이후 18차례의 전투를 치르면서 천천히 강원도쪽으로 후퇴했다. 매소성 전투 이후 승산이 사라지고 전쟁이 장기전 국면으로 전환되자 당나라는 장거리 보급선 유지에 상당한 곤란을 겪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당군이 더욱 불리해지자 마침내 676년 3월 이후 당군은 신라에서 단계적으로 철군하기 시작한다. 7월 이후 더이상의 육상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당나라가 신라 정벌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당은 마지막 수단으로 백제 멸망 때처럼 수군을 통해 일거에 돌파구를 마련해 보겠다는 의도로 대규모 수군을 파견했다. 이에 676년 11월 금강 하구에서 대규모 해상전인 기벌포 해전이 벌어졌다. 기벌포 해전에서 무려 22번에 걸친 전투 끝에 신라가 승리를 거두었고, 기벌포 해전에서 대패한 당나라군은 결국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당시 신라와 백제,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은 매우 컸고 당군은 크게 패하였다. 선뜻 보기에 당나라의 군사력이 훨씬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신라와 그 유민들도 만만치 않은 것이었고 결과는 당군의 패배였다.

당나라군이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한 후 당나라는 신라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하였다.

현대에는 나당 전쟁 이후 신라가 차지한 고구려 영토가 너무 적어서, 불완전한 통일을 이룩하였다는 점이 널리 지적된다. 일단 당시 신라인들이 삼한을 일통했다고 스스로 생각했던 것은 분명한데, 예를 들면 삼국사기 신문왕 12년(서기 692년)의 기사를 보면 김춘추김유신 등이 한마음으로 이룬 일통삼한(一統三韓)이 명시돼 있다.[43] 참고로 이 시기는 발해가 건국되기 이전이다. 상당한 수의 고구려 유민이 신라에 흡수된 것 또한 사실이며, 행정 구역 설정(9주 5소경)이나 군사 편제(9서당) 같은 걸 봐도 옛 고구려, 백제, 신라 땅에 거의 동등하게 영토와 군대를 분배하고 있다.

그러나 신라가 이렇게 통일 신라를 자부하던 중 북쪽에서 또 다른 고구려 유민 집단이 주체적으로 발해를 건설했는데, 고구려의 후계자를 주장한 발해의 존재를 고려한다면 삼국 통일이라는 용어는 적합하다고 보기 어려워지지만 이는 발해가 국제사회에서 고구려로 인정받지 못한 걸 간과하는 견해다. 당시 신라는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자성을 부정하면서 북국이나 북적이라고 불렀으며, 발해를 고구려라고 보면 이미 망한 고구려의 정통성을 흡수했다는 명분에 흠집이 생기기 때문이었으나 이는 신라 혼자만의 억지가 아니라 당나라도 인정한 견해였다. 현대에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 주장하며 북한을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니라 반국가단체 취급해서 나라 이름도 그 쪽이 자처하는 정식(조선 민주주의 ~)으로 불러주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이 문제에선 신라가 현대 대한민국보다도 월등히 유리했다. 북한은 그래도 국제 사회에서 두 한국 중 하나로 인정은 받는 반면 발해는 당나라에게서 고구려란 인정은 끝내 못받았으며 일본 왕한테서나 고려 왕을 자처하는 불쌍한 꼴이었다. 현대 한국인 입장에서야 만주 지역까지 넓게 색칠된 걸로만 보면 이견의 여지가 없는 고구려로 느껴지겠으나, 당대 현실에서는 영토 크기가 다가 아니기 때문에 실제 일어난 일은 꽤 달랐다. 고로 삼국 통일 이후로는 통일 신라 시대보단 남북국 시대라고 칭하는 사례가 현대에 늘어났다지만, 강대한 당나라를 물리치고 대동강 이남 한반도 지역을 수호한 것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일이며 사실 나당 전쟁에서 이겨 신라가 안동도호부를 격퇴하지 못했다면 30년 후 발해 건국도 불가능했다. 결국 신라는 나당 전쟁을 통해 한반도 남부는 직접적으로, 한반도 북부와 만주는 간접적으로 당나라에 대해 지켜낸 것이다. 이후의 기간은 나라의 이름은 통일 신라로, 이 시대를 통일 신라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북쪽에 곧 건국된 발해가 당대 외교적 명분에선 훗날의 고려보다 좀 쳐지는 면이 있었을지언정 고구려의 후신이었던 건 사실이기에, 오늘날에는 남북국시대라고도 많이 부르는 편이다. 이후 신라는 중앙 집권 제도를 실시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자랑하게 되는데 이 약 130년의 기간을 신라 중대라고 구분하며 대체적으로 신라의 전성기는 이때쯤이라고 볼 수 있다.

4.8. 통일신라[44]의 발전

가야백제 고위층 및진골 고위층을 섞어서 이주시켜 만든 서원경(지금의 청주시)과, 주로 고구려 고위층을 이주시켜 설치한 남원경(지금의 남원시 일대)이 설치되었고, 옛 고구려와 백제의 영역엔 여섯 를 설치하여 9주 5소경 제도가 완성되었다. 또한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와 백제계 인구를 포함한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게 되었고, 고구려계 3개 부대,[45] 백제계 2개 부대[46], 신라계 3개 부대[47], 말갈계 1개 부대[48]로 구성된 9서당에, 9주에 각각 1정씩(단 면적이 넓은 국경 변경 지대인 한주는 2개 정)을 두어 9서당 10정 편제를 완성했다. 신라가 나머지 두 나라를 무력으로 정복한 형태의 통일이었음에도 행정 구역을 고구려 백제 신라 각각 똑같이 3주씩, 신라 수도권의 방어와 치안을 담당하는 부대 9서당 역시 옛 삼국 소속국별로 비슷한 비율로 분배해서 배치한 것은 당대 신라의 삼국통일 의식의 나름대로의 실천으로 여겨진다.

이를 바탕으로 정치와 경제, 사회 전반도 안정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은 스스로의 통치를 돌이키는 과정에서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고 사회 전반의 안정을 가져왔다고 스스로 평하고 있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을 전후하여 나타난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왕권 전제화다. 태종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 군주로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했고, 갈문왕 제도도 없앴으며, 아울러 이 때부터 한동안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나아가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통일 이후 진골 귀족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전제화 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당시 통일 신라는 나름대로 파격적인 피정복민 회유 정책도 실시하였다. 신문왕 6년 때는 고구려인들을 위해서 본국(고구려)와의 관품을 해아려 주는 높은 관직을 주었고 문무왕 13년 때에는 백제인에게 서울과 지방의 벼슬을 주었는데 그 관등(官等)을 백제 본국의 벼슬과 견주어 주었다.예를 들어 경관(京官)인 신라의 대나마(大奈麻)는 본국(백제)의 달솔(達率)이었으므로 대나마에 임명하였다.

신라의 절풍

삼국통일에 힘입어 그 동안 군사력에 치중하였던 역량이 내부로 쏟아지면서 신라는 화려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화려한 예술품들과 불교 예술이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으며[49], 특히 헌강왕 시절에는 서라벌에는 집집마다 기와가 덮여있었고,집집마다 으로 을 하여 연기가 피어나지 않았던 등 국력의 강대함을 자랑했다.[50] 8세기 ~ 9세기에 들어 아랍페르시아의 신라에 대한 기록이 크게 늘어나는데, 관련 기사 일관적으로 귀금속이 많이 나고 자연 환경이 좋다고 나와있다. 물론 먼 나라의 이야기를 적은 얘기니만큼 황금의 나라 지팡구처럼 허구나 과장도 어느 정도 있겠으나, 알려진 절대 다수의 사료가 긍정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좋게 보여진게 있는 듯.[51] 알 마수디( المسعودي )의 기록 &lt;황금 초원과 보석 광산(The Meadows of Gold and Mines of Gems; مروج الذهب ومعادن الجواهر‎&gt; 프랑스어 번역판 346쪽 영문판[52][53][54] 원성왕릉(괘릉)을 지키는 무인상도 전형적인 중앙아시아 수피주의자의 터번을 쓰고있는 등 직접 보지 않으면 묘사하기 힘들 정도로 자세한 점을 고려할 때 이미 상당수의 서아시아, 중앙아시아계 집단이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당시 중동 사람들에게는 으로 여겨져 신라라는 섬이 있다고 기록된 경우가 많았다. 주로 무역 중심지가 배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남쪽인데다, 역사적으로 육로란 육로는 고구려백제부터 시작해서 발해, 고려, 후백제 등이 막고 있었기 때문에 접근할 수 없었으므로 이러한 인식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당시 수도 서라벌인구는 수십만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서는 "수도에 17만8936호, 1360방, 55리와 35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삼국유사진한조)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경주 한 곳에만 80만 ~ 90만 명의 인구가 살았다는 뜻. 고려 수도 개경의 2배 ~ 3 배, 조선 수도 한양의 4배가 넘는 수준이다. 그러나 학계는 서라벌은 커녕 통일신라 국가 전체의 최대 인구를 400만 내외로 추정한다. 또한, 그 시대에 전체 인구 400만명 가운데 경주에만 90만 명이 몰려 살았다는 건 근본적으로 납득이 어렵다. 그리고 지도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지만 경주 중심부의 경주 분지 지형상 90만 명이나 몰려살 수 있을만큼 들이 넓지 않다.[55] 그래서 삼국유사의 17만 8936호는 17만 8936구(약 35만)의 오기가 아니냐는 주장부터 서라벌과 그 일대 수도권을 다 합친 기록이 아니냐는 등의 설들이 있다. 또한 신라의 수도 범위를 경주로만 한정하지 않고 넓혀서 본다면 90만명이 충분히 살 수 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관련 기사

4.9. 쇠퇴기

8세기 후반에 이르자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중앙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치열해지고,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신라의 국운은 쇠퇴하기 시작하고 국가가 해체되는 국면에 접어든다. 이 시기에 성장한 신라의 지방 세력을 역사적으로는 호족이라고 칭한다.

혜공왕이 죽고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한 이후 왕권은 약화되었고 귀족 세력이 다시 정계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반란쿠데타가 일어나, 중앙 정치는 불안정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이로서 시중보다 상대등의 권력이 더 커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녹읍을 토대로 농민들의 부담은 무거워졌다. 설상가상으로 자연재해가 잇따르고, 왕족과 귀족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백성들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랐다. 피지배 계층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호족들에게 의탁하거나 아니면 도적이 되어 지방에서 반란이 잦아졌다. 지방 세력이 강화됨에 따라 공무역이 쇠퇴하고 9세기 중엽의 문성왕(文聖王) 이후 민간 무역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당과의 활발한 무역으로 인해, 신라인의 왕래가 빈번한 산둥반도(山東半島)나 장쑤 성(江蘇省) 같은 곳에는 신라방(新羅坊)이 생기고, 장보고 등의 해상 세력이 약진하기 시작한다. 장보고는 중앙 정치에도 개입, 신무왕의 즉위를 도왔지만, 태자비를 세우는 데까지 손을 쓰려다가 옛 부하였던, 수도에서 온 자객 염장 송일국 에게 살해당하고, 청해진도 해체되었다.

하지만, 녹읍제가 부활한 757년에 신라의 지방 행정 제도가 전면적으로 재개편되어 9주 5소경제가 정비된 점으로 미뤄 보아, 녹읍제의 부활이 전대의 녹읍과 같은 단순한 관리 녹봉의 성격을 떠나서 관료전의 설치 이후 촌락에 대한 국가와 관료의 이중적인 수취를 통한 지배의 불통일성을 배제하기 위하여 설치되었을 공산이 크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 무엇보다 녹봉제는 쌀의 운반에 드는 인력과 다시 재분배 하는 등에 소요되는 자원을 국가에서 부담해야 하지만 녹읍제는 관료가 직접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경제적이라는 이점도 컸다. 이 당시에 역병이 심하게 유행하여 국가의 인력이 크게 손상된 상황이었기에, 녹봉제를 실시하는 데 들어가는 부담을 덜어야 하는 상황이었던 점도 고려해봐야 하고. 그러나 문제는, 경덕왕 다음 왕인 혜공왕이 왕으로써 그다지 뛰어난 왕이 아니었다는 데 있었단 거다. 혜공왕이 결국 살해되어 무열왕계가 쫓겨난 후, 이 제도는 효과보다는 폐단이 커지게 된다.

그리고 통일신라 항목에도 있지만, 800년대 초반 이 시기는 쇠퇴의 시작은 맞지만 890년 이후의 국가 막장 테크 급은 아니다. 훗날의 후백제보다도 더 넓은 영역을 한때 차지한 김헌창의 난을 중앙군의 힘으로 상당히 빨리 진압하고, 수도에서 가장 거리가 먼 한산주나 명주 같은 지역의 도독이 가까운 반란군이 아닌 중앙군에 협조하는 등 지방 통제력도 강했으며 반란 진압에 공헌한 일부 지역에는 7년간 면세의 혜택을 줄 만큼, 9세기 신라를 막장 왕위 다툼과 식물 정부로 인식하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9세기 초 중반까지는 신라의 국가적 역량은 충분했다. 오히려 이를 기회로 다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었으나 천년에 이르는 세월의 한계인지, 아니면 골품제를 끝까지 유지해서인지 그 영광을 되찾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고 서기 890년경에 이르면서부터 일개 지방의 독립 선언도 못 막는 처지에 놓인다. 당대 신라에는 골품 신분에 의해 출세의 한계가 결정되는 것 때문에 과거 제도가 존재하는 당나라로 유학을 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빈공과 급제 후 귀국한 6두품 출신의 유학생 들과 선종 승려들은 지방의 호족과 결탁하여 반신라적인 입장에서 후삼국 시대를 주도하게 된다. 대체로 700년대 말 96각간의 난을 시작으로 신라가 멸망할 때를 멸망기로 보는 시각은 고려 왕조였고, 이는 삼국사기에 숱한 반란과 기근 흉년 등등을 근거로 하지만 조선 왕조에서는 헌강왕 사후를 쇠퇴기로 봤다. 동국사략에선 800년대 말 최치원의 등장기를 멸망 시점으로 보는데, 이는 대체적으로 전 왕조의 원 간섭기를 비판하기 위해 차라리 신라말이 나았다는 식의 비판을 하기에 그렇고 동국사략을 통해 신라 정통론을 확립한 것도 조선왕조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로 치면 고려 왕조의 쇠퇴를 무신 정권기가 아닌 오히려 몽골의 침입과 원 간섭기로 보는 것과 비슷하다.

4.10. 후삼국시대와 멸망

한국의 역사

남북국시대

후삼국시대

고려

고려 / 신라 / 후백제

진성여왕 대에 이르러, 부패와 사회 혼란이 극에 달해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지방에선 호족들이 득세하였다. 호족들은 지역의 지배자로 군림하며 군벌이 되었고 중앙 정부를 대놓고 무시했고, 심지어 세금 납부까지 거부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중앙 정부는 군사력이 약한 나머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결국 신라에 대한 반란을 합리화하고 지지 세력을 끌어모르기 위해 궁예후고구려, 견훤후백제를 건국함에 따라, 신라는 삼국시대 말기와 삼국 통일 전쟁 때 개척한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하고 삼국 시대 초반기 때의 영역인 수도 경주시영남권 일대로 다시 축소되어 다시 삼국이 정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여기서 후삼국 시대가 일어난 이유는 신라의 전국에 걸치는 지배력이 매우 약화되어 각지에 소규모 도적떼 반란이 일어나 진성여왕이 진압하지 못하고, 그것이 큰 지방 반란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일어났으니 백제 유민 의식과 고구려 유민 의식과는 별 관계가 없다는 이상한 주장이 있으나, 이는 전후 인과 관계인 것을 마치 어떤 문제에 대한 올바른 주관식 답 중에 하나만 가능한 상황으로 착각한 오해에 불과하다. 후삼국 시대 성립의 근본적 이유는 어쨌든 신라의 전국에 걸치는 지배력 약화며 유민 의식이 근본적 이유라고 보기 어렵다고 하는데, 물론 후삼국 시대 성립의 직접적인 원인은 신라의 지배력 약화지 유민 의식이 아니지만, 신라의 지배력이 약화된 여러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유민 의식임은 부정할 수 없기에 이는 인과 관계를 파악하지 못한 잘못된 반론이다. 후고구려와 후백제의 건국자가 유민 출신이 아니니 유민 의식과 관계 없다는 주장도 이에 덧붙여지지만, 중요한 건 유민 출신이 아닌 자가 예전에 망한 나라 부활을 캐치 프레이즈로 외쳐도 설득력이 통하는 조건과 시대 상황이지 건국자의 출신이 아니다. 그런 건 망한 나라의 부흥 운동에 대해 다분히 편견을 가진 현대 한국인의 이상한 전제 부여에 불과하며, 애초에 세계사의 여러 경우를 봐도 유민 출신이 아닌 지배국의 실력자들이 대부분 부흥 운동의 주역이라는 점을 간과한 얘기다. [56]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유민의식은 멸망한 국가가 남긴 피의 기억이 부활한 것이 아니라, 신세대가 구체제를 배반하는 명분으로서 활용된다.

이렇게 본래라면 중앙 정부에 충성하며 지방 반란 진압에 매진해야 할, 지배층의 핵심으로 기능해야 할 자들이 몇 백 년 전 망한 나라의 부흥 운동을 일으키는 상황 탓에, 후삼국시대에 들어오면 신라는 전성기의 성세가 무색하게 경상북도 지역도 유지를 버거워하는 국가가 되어 진흥왕 때는 고사하고 법흥왕 때만도 못한 상황으로 퇴보한다. 그러나 신라는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사력을 다해 있는 힘을 쥐어짜며 급변하는 상황에 대응했다. 아달라 이사금 이후 728년만에 박씨가 왕위를 되찾게 되었고, 망국의 이미지와는 달리 대야성에서 후백제의 공격을 몇 번이나 막아냈으며, 뭔가 해 보려고 견훤과 달리 신라에 덜 적대적이었던 왕건의 고려와 연합해 이런저런 조치를 하여, 후백제가 경상도를 더 이상 마음껏 제집처럼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가뜩이나 다혈질로 추정되는 견훤을 엄청나게 자극했고, 크게 분노한 견훤은 끝내 신라를 침공해 서라벌을 함락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김부(경순왕)을 왕위에 올린다.[57]

다만 그런 후에도 신라는 상황을 완전히 포기하진 않았다. 고려후백제의 싸움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에도, 신라의 경순왕은 형식적으로나마 취했던 존왕의 의마저도 마음껏 무시하는 왕건과 국서를 교환하고 있었을망정 그래도 나름대로의 저울질은 하면서 왕건에게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고 하였다. 그 과정에서 경주 내부에서도 반발하는 기운이 있었고, 견훤의 아들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 군대가 또 다시 경주를 점령하기 위해 육박한 크나큰 위기 상황에서도 고려와 연합 작전을 해서 경북 의성에서 침공을 막아낸다. 그러므로 경순왕과 신라가 그저 수동적으로 대세에 따라 좀 더 잘 대우해줄 것 같았던 고려에 나라를 갖다 바치고 망했다는 관점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견훤이 고려에 투항하면서 완전히 힘의 균형이 깨지고 대세가 기우는 상황 이전까지는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려고 열심히 노력한 임금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국력은 나날히 약해졌다. 그리고 930년과 934년 고려와 후백제간 고창 전투, 운주 전투에서 고려가 승리하면서 한반도의 정세가 고려에게 유리해지자 935년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하여 나라를 왕건에게 들어바쳐 고려에 흡수됨으로서 멸망한다. 그러나 신라 멸망 이후에도 고려 시대에 몇 차례 신라부흥운동이 있었지만 고구려, 백제, 발해의 부흥운동만큼 치열하지 않았고 모두 실패하였다.

5. 사회

신라는 같은 삼국 시대의 고구려, 백제에 비하면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 정착한 시기가 늦은 편으로 보인다. 나라를 세운 성씨 집안이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왕위를 차지하는 등 왕실 세력이 일정했던 고구려, 백제, 발해, 고려, 조선과 달리[58] 신라는 건국 초기 박씨, 석씨, 김씨 등 서로 다른 성씨 집안 사람이 왕위를 이어가며 박씨 왕조에서 석씨 왕조 김씨 왕조가 서로 번갈아 왕위를 이었다 . 삼국 시대 중기 내물왕 이후 김씨 왕조에서는 고구려의 문화가 전파되는 동시에 불교를 장려하여 중앙 집권 국가가 되는 것에 힘썼다.

5.1. 골품제

신라에는 혈연에 따라 사회적 제약이 가해지는 신분제인 골품제가 있었다. 신라의 골품제가 유명해서 그렇지 백제, 고구려를 비롯해 고대 왕국들은 대부분 골품제와 유사한 폐쇄적인 신분 제도가 있었고, 이에 대해선 해당 문서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참고하는게 좋겠다. 여담으로 신라가 멸망한 지 한참 후인 고려 시대까지도 옛 신라 출신 귀족들은 골품으로 서로를 텃세하며 같은 골품끼리 파벌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는 점을 볼 때, 신라에서 골품제의 전통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다만, 그렇게 서로 텃세해도 경순왕 귀부 전에 고려에 진출했던 6두품에 비교해선 상당히 입장이 약할 수밖엔 없었다. 다만 나말 여초에 발달한 전기 소설 중 김현감호(金現感虎) 조신(調信) 수삽석남(首揷石枏)」 등이 있는데 이것엔 신분간의 대립이 보이는 중에도 상층의 사고 방식과 말이 하층의 사고 방식이나 말과 활발히 교류하거나 뒤섞이는 특징이 보인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5.2. 관직

신라 중앙 정치는 귀족들의 합의 기관인 화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과, 국왕 직속의 행정 기관인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의 대립으로 대표된다. 귀족들의 세력이 강할 때는 귀족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상대등이 강한 권력을 지녔고, 왕권이 강할 때는 왕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시중의 권력이 막강했다. 일반적으로 신라 초기에는 상대등이 중기에는 시중이 후기에는 다시 상대등의 권력이 강화되는 추세를 보인다.

서열

관직명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중시령

시랑, 경

도독

사신

군 태수

현령

1

이벌찬

2

이찬

3

잡찬

4

파진찬

5

대아찬

6

아찬

7

일길찬

8

사찬

9

급벌찬

10

대나마

11

나마

12

대사

13

사지

14

길사

15

대오

16

소오

17

조위

신라관직골품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17등급으로 구성되어 있고 골품에 따라 골품 당 최대한으로 승진할수 있는 등급이 제한되어 있었다. 진골은 1등급인 이벌찬까지 오를 수 있으며, 6두품은 6등급 아찬, 5두품은 10등급인 대나마, 4두품은 12등급 대사까지만 승진이 가능했다. 각부의 장관급 인사라고 할 수 있는 령(令)은 5등급인 대아찬 이상부터 오를수 있었으니 사실상 진골만이 이 지위를 획득할수 있었고 각부의 차관격인 경(卿)은 11관등에서 6관등의 사람, 즉 진골과 6두품만이 오를 수 있었다.

17관등 위에 특별직인 대각간, 태대각간이 있었다. 1등급 각간(이벌찬의 다른 이름)에 대 자를 붙여서 높인 것.

태봉후백제, 그리고 고려도 초기에 잠깐 동안 신라의 관등 체계를 가져다 쓰거나 조금 변형해서 쓰기도 했다. 물론 이쪽은 골품제는 적용되지 않은 듯.

5.3. 화랑

신라는 청소년들은 화랑도에 귀속시켜 국가적 인재 양성을 꾀하였다. 대체적으로 고위급 자체들이 화랑이 되고 하위 골품의 인원들이 낭도가 되어 따르는 방식이었으며 이들은 유명한 과 큰 을 찾아다니며 제천의식을 행하고 사냥전쟁, 유불선 사상을 학습하면서 국가의 인재들로 성장하여 삼국 통일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매김했다. 다만 통일 신라기엔 그 과정에서 옛 백제나 옛 고구려 지역으로 쏘다니던 화랑들이 지역 사회에 민폐를 끼치는 현상이 일어났고, 화랑들이 딱히 옛 백제 유민이나 고구려 유민 등을 괴롭히려고 그랬던 건 아니었지만 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던 지방민들은 결국 반신라 감정을 키우게 된다.[59]

6. 언어

현대 한국어의 뿌리는 고조선부터 시작해서 진국과 마한, 변한, 진한 그리고 신라와 고구려 그리고 백제와의 언어 교류 그리고 통일 신라에서의 융화로 인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가지 자료를 들자면 《일본서기》에 신라어가 하나 기록되어 있다.일본서기에 의하면 왜의 장수가 신라군에게 패하고 신라 장수와 맞닥뜨렸으나 그 왜장은 훌륭한 말을 타고 있어서 성의 해자를 뛰어넘어 도망칠 수 있었다. 신라 장수가 성의 해자에 이르러 탄식하면서 "구수니자리(久須尼自利)"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일본서기》 본문에도 '신라어를 그대로 적은 건데 뜻은 모른다'라고 부연되어 있다. 鬪將臨城洫而歎曰 久須尼自利 (此新羅語 未詳也) "신라 장군이 성의 해자가에 서서 “久須尼自利” (이는 신라말로 자세하지 않다) 라고 탄식하였다. 일본서기 562년 7월 아무래도 다 잡은 적장을 놓쳐서 탄식하며 한 말 일 테니 뭔가 아쉬움의 표현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다른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일본서기 등을 보면 백제어고구려어,신라어는 같은 계통의 언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서기 비다츠 천황조에 의하면 백제어는 왜국어(고대 일본어)와 언어가 통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기본적으로는 삼한 계통의 국가였고 고조선계 유민들이 남하해왔기 때문에 조선(고조선)과 부여가 기본적으로 같은 종속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언어는 같았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거나 삼국유사나 해동고승전에 고구려와 신라 간의 기록을 보면 서로 간에 대화가 어렵지 않게 통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인명 자료에도 고구려와 신라의 것이 같다는 이유로 일본 학자 중에서도 고구려와 신라가 방언상 차이는 크지만 서로 언어가 통했을 거라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다.

부여어족을 일본어족과 연결시키는 게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게 정작 당대 기록을 보면 고구려 약광왕 관련 사료만 봐도 고구려인들은 왜국인(일본인)들을 자신들의 동족이라 여기지 않았다는 기록이 대놓고 나온다. 그리고 일본서기나 속일본기 기록만 봐도 백제어를 일본어와 연결시키는 걸 대놓고 부정하는 기록이 나온다. 일본 내 사서들부터가 부여어족은 왜국과 다른 계통의 언어였다는 걸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비록 언어 동조대적 개념에서 고구려, 백제의 영향을 받은 언어적 어휘가 많이 전파되기는 했으나 부여어족과 일본어는 계통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놀라운 건 일본서기 내에 나오는 가야어의 발음도 현대 한국어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가아야에서도 국가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현대 한국어와 동일한 '나라' 라고 표현하고 백제어에서도 곰을 뜻하는 단어로 고마, 곰, 고무 등이 있었다. 거의 똑같다. 고구려어나 가야어에서 '아래 (방향어)' 를 가리키는 단어로 아리라고 하여 현대 한국어의 아래와 발음의 굉장히 유사하다.

백제의 언어 경우 이기문 박사가 백제어가 계층별로 달랐다고 주장하나 삼국사기, 삼국유사나 일본서기 기록 등을 보면 이는 근거없는 주장일 가능성이 높다. 단지 건길지나 어라하 등의 칭호가 달랐다고 언어가 다르다고 할 근거는 없다. 조선 시대 때 신하들은 왕을 전하라고 부르고 일반 백성들은 임금님이라고 불렀다고 조선의 언어는 계층별로 달랐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일본서기에서는 백제계 귀족들도 백제왕을 건길지에 해당하는 코니키시라고 부른다. 단순히 호칭상의 차이일뿐 이런 게 언어가 달랐다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일본서기 인명만 봐도 아직기, 아화 등을 아지키, 아콰 라고 표기하고 있다. 현대 한국어와 크게 차이가 없다는 게 놀랍다.

고구려, 백제, 가야언어가 이렇게 현대 한국어와 유사성을 보이는데 신라가 이들과 언어가 달랐을 거라 생각하기 힘들다. 더군다나 수서 동이전 신라전에서는 신라고구려, 백제의복이 같고 풍속도 같다고 한다. 의복도 같고 풍속도 같은데 언어가 다를 가능성은 낮다.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고 백제도 부여계이며 마한과 변한, 진한으로 나뉜 진국도 고조선에서 나왔다.

백제어와 신라어가 같은 계통 언어였다는 건 삼국사기, 삼국유사보다 일본서기 내에 더 자세하게 나온다. 당시 일본은 백제, 신라 등 한반도의 국가들과는 언어가 통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경우도 한국어 계통으로 추정되는 고대 언어들과 퉁구스 제어가 통하지 않는다고 일관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일본어의 경우도 한국어 계통의 고대 언어들과 표기상 차이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중국 사서들에 의거해도 고구려, 백제와 신라 간에도 언어가 통한 기록이 있다.

6.1. 경제

구릉과 산지가 많은 한반도 북부와 달리 남부에는 비록 산지가 많았지만 농사에 적합한 기후에 산과 산 사이로는 평지가 많았고, 결정적으로 신라의 거점이었던 경주에는 거대한 하천인[60] 형산강이 있어 울산에서 경주까지 형산강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농경지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성립 초기부터 안정적으로 농업에 의존하며 세력을 형성하였고, 진흥왕 시기에는 한강 유역과 한반도 중부를 차지하여 막대한 농경지를 얻어 삼국 통일 이전부터 삼국 중 가장 많은 주요 농경 지역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경기 지역과 경상도 지역은 현재에도 마찬가지지만, 벼와 곡물 생산지로 유명했다.

한강과 형산강을 중심으로 대규모 하천과 평야 지대를 많이 접한 신라였기에 농업 용수를 공급하고 관개 설비를 정비하며 논 농사가 수월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한 전체 농토 중 논과 밭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통일 신라 시기를 다룬 행정 자료인 신라 촌락 문서에 기재된 촌락의 논과 밭의 비중은 논은 102결, 밭은 62결 정도로 밭보다 논이 더 많음이 확인된다. 물론 아직까지 전체적인 논과 밭을 다룬 토지 자료가 발굴된 적은 없기 때문에 전체 농토의 논 / 밭 비중이 어떠한지는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논 / 밭의 비중과 별개로 농토의 공 / 민유지는 전체논의 10% 미만 정도가 국유지 내지는 관유지이고 나머지 90%는 농민들의 농토로 보인다.

농토의 크기는 결과 부, 속 등으로 그 규모를 표기하였는데, 이것이 조선 시대 결부의 개념처럼 농지의 생산력을 기준으로 한 것인지 절대 면적을 기준으로 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이 기준에 따라 조세를 부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농토를 둘러싼 농민들의 소유 형태는 정전제를 볼때 오늘날 사유 재산의 개념처럼 온전히 백성의 사유지라기 보다 땅의 소유권은 전적으로 왕에게 있고 농민들은 그땅의 경작권만을 부여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땅을 파는 매매나, 땅을 담보로 하여 자금이나 물자를 빌린다거나, 땅의 소유권 등을 등기하는 것 등이 이루어졌는지, 이루어졌으면 오늘날처럼 자유롭게 이루어졌는지는 불분명하다.

정전제가 실시되었지만, 신라 말기에 호족 세력이 궐기한 점이나, 전체적으로 귀족의 경제력이 튼튼한 점 등 전체적으로 지방 유력가들이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주변국의 상황도 비슷하였던 점을 미루어 볼 때, 외부의 도움이나 간섭없이 자기 땅을 경작하는 자영 농민보다 서구 농노나 조선 시대 노비나 조선 초기 전호들처럼 자기 논밭이 있지만, 휴경 등의 이유로 자신의 논밭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 귀족의 논밭을 경작해주는 대가로 식물의 종자나 대형 농기구를 빌리는 형태의 장원(농업) 경작이 이뤄졌다고 추정된다. 물론 통일 신라나 내외부적으로 전쟁이 줄어든 시기에 한정된 이야기이고 외부로의 세력 확대나 주변국의 침입, 전쟁이 빈번하던 삼국 초기에는 휴경기에 귀족의 논밭을 경작하기보다 농민들을 전쟁터에 내보내는 일도 많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 밖에 신라 촌락 문서를 살펴보면, 토지와 주택, 주거지의 규모, 가축과 임목의 숫자와 종류까지 정확히 파악하여, 인구의 증감, 재산의 증감을 아주 정확하게 살펴보고 있다. 농업 용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후대에도 있었던 공통적인 사항이지만, 가축의 수를 정확히 파악하고 특히 농업용 가축이 아닌 말의 숫자를 파악하여 전쟁이나 군사적인 목적으로 상시 동원하고 관리할 체계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산림 지역을 무주 공산으로 방치해 전국에 민둥산을 양산했던 조선 시대와 달리 산림의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까지 개수와 수종을 정확히 파악하고 관리하는 것이 확인된다. 해당 문서나 다른 자료에서 신라의 수공업이 어느 정도였는지 기록하고 있는 것이 부족하여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수공업 자재의 일종으로 수천그루의 나무를 집중적으로 육성한 것으로 보아 비단 생산이나 목공을 위한 대규모 공업 시설이나 수공업 체계의 존재 등이 추정되고, 전성기 신라의 수도 경주에 대한 기록에서 으로 요리를 하며 사치를 누렸다는 것이 등장하는데, 체계적인 임목 관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땔감이나 목재의 공급이 안정적이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특히 문서에서는 전체 임목 중 뽕나무 재배 수량이 유달리 많은데, 촌락 문서에서 다루는 대상이 뽕나무 육성에 특화된 마을인지 아니면 신라가 전체적으로 뽕나무 육성에 주력하였는지는 이 시기 행정 자료가 촌락 문서 하나 뿐이라 더 상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신라라는 나라 이름의 라(羅) 자체가 비단이라는 뜻이 있고, 이 촌락 문서가 작성되기 한참 이전인 삼국 통일 이전, 신라라는 국호가 지증왕 대에 확정되기 전부터도 유잠국(有蠶國) 같은 누에치기와 연관이 깊은 이름을 썼던 기록이 있어서 원래 신라가 뽕나무 및 누에치기에 국가적으로 관련이 컸을 가능성이 있다.

뽕나무는 보통 뽕잎이 누에의 먹이로써 비단 생산을 위한 필수적인 수단이었고, 뽕나무 자체가 활과 화살통을 만드는데 주요한 재료였다는 점, 나뭇잎이 넓은 활엽수는 비록 나무 전체의 크기가 크지는 않지만 목질이 단단하여 가구재로서 적합해 수공업이나 공업용 재료로서 적합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촌락 문서의 뽕나무 재배 수량이 많은 점은 상공업을 위해 육성한 것으로 보인다. 뽕나무 항목에서도 살펴볼 수 있지만, 열매 채집 시기가 모를 심는 농번기와 겹치고, 뽕나무를 심으면 그 주변에 뿌리를 내려 다른 작물의 식생을 방해하므로 보통 농지와 멀리 떨어진 늪지나 습지 혹은 외곽에 심는다. 그러므로 농업을 보조하거나, 도와주기에 적합한 수목은 결코 아니다.

수공업 면에서는 신라는 자가 생산 자가 소비를 위한 농촌 가내 수공업 외에 귀족이나 왕족을 위한 소비 재화를 만들기 위한 수공업자들이 존재하였는데, 국가 권력의 통제에 따라서 장인의 신분도 등급별로 나뉘어 골품을 하사받는 기술자가 있는가 하면, 부역에 동원되어 기술 노역만 제공하는 사람, 그외에 왕실 수공업을 위해 노비들이 대거 동원되기도 하였다. 시장에 관한 기록은 지방에 있는 시장보다 수도 위주로 언급되는 것이 대부분으로 관영이나 사영 기술자들의 생산품은 주로 귀족들이나 왕족들의 사치품이나 소비재를 생산하는 경우가 많았고, 백성들의 생필품 등은 농촌의 가내 수공업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스스로 소비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체계적인 산업의 형태를 띄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 국가의 인력 동원 체제 등을 문서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정남은 20세 이상의 장정으로서 국가로부터 구분전(口分田)을 받고 요역(徭役)에 참가하는 사람, 조자는 정남을 도울 15세 이상의 남자, 제공은 요역을 면제받은 60세 이상의 연령층, 노공은 70세 이상의 노인 등으로 보인다. 또 호(戶)의 기준은 상상(上上)에서 하하(下下)까지로 나누었는데 그 구분은 인정(人丁)의 많고 적음에 따랐던 것 같다.

6.1.1. 무역

초기에 신라는 지리적으로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해 있었고, 북쪽은 고구려, 서쪽은 백제, 남동쪽은 왜가 있어 국제적인 흐름이나 교류에 뒤쳐져있고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5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토우(흙 인형) 중에 코끼리, 원숭이의 모습을 본딴 것들이 출토되고 있으며[61] 다만 개미핥기와 비슷하게 생긴 은 동남아에도 서식한다.동유럽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신라 황금보검이나 로마 제국유리로 제작된 국보 제193호 유리병, 보물 624호 유리잔을 비롯해 황남대총 등에서 서역산 공예품이 말 그대로 쏟아졌기에, 외부 세계와의 교역은 이미 삼국통일 이전에도 활발히 계속되고 있었다.

통일신라의 경우 8세기까지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공무역이 주축이 되었지만 9세기 이후 신라, 당, 일본 3국의 중앙 집권 체계가 약화되면서 민간 무역이 성행하였고 장보고등의 해상 세력은 당나라 산동 지역 등에 설치된 신라방 등을 통하여 활발한 민간 무역을 행하였다. 후에 무역으로 부력을 갖춘 호족들의 약진은 후일 호족들과 함께 후삼국 시대의 중요한 축으로 작용하였다.

당과의 무역에서는 초기에는 원자재나 지역 특산품을 수출품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후에는 비단 공예품과 금속 수공업품의 비중이 늘어나 신라 촌락 문서에서 대규모 뽕나무 숲을 육성한 것 역시 비단 생산을 위한 목적이 큰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공무역으로는 주로 금, 은, 우황, 인삼 등을 수출하고 당에서 비단과 당삼채 도자기 등을 수입했다. 삼국사기 잡지에 기재된 각종 외래 사치품은 주로 사무역을 통해 들여온 것으로 보는데 목도리, 중앙 아시아산 에메랄드로 상감한 빗과 모자, 바다 거북 껍데기로 만든 빗, 페르시아산 카페트 등이 있었다. 매신라물해 등 일본 기록에 남아있는 일본으로 수출하는 물품으로는 신라금(琴, 악기), 신라도((新羅刀, ), 구리 그릇 등이 있었다.

다만, 중국과 달리 화폐 제도는 민간에서는 본격적으로 자리잡지 못하여, 아직까지 물물 교환이 일상적이었다. 보통 거래의 결제 수단은 견포 즉 옷감으로 국가에서는 화폐로서 견포의 기준을 통일하기 위해 길이를 조정하고 정리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다.

6.2. 행정구역

통일신라행정구역9주 5소경으로 대표된다. 9주 5소경 문서 참조.

통일 신라 이전 시대의 행정 구역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데, 아직 신라의 영토가 경상도 일대에 영토가 머물러 있던 지증왕대인 514년에 지금의 함안군에 아시촌소경을 설치하고, 진흥왕 대 557년에는 충주에 국원소경을 설치한 기록이 있는 등 주(행정구역) + 소경식의 비슷한 행정 구역 체계는 삼국 통일 이전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7. 문화

7.1. 문학

한자가 주 문자 생활에 사용되었고 설총, 강수, 최치원 등의 유학자들이 활동하였으나 이들의 문학이 현재까지 전해지는건 그리 많지가 않다. 또 한자가 어렵고 고대 한국어와는 맞지 않는 부분도 많았기 때문에 이두(吏讀) 또는 향찰(鄕札), 방점, 서기체 등 한자를 이용해 한국어를 좀 더 정확하게 표기하려는 시도가 생겨나고, 그에 따른 문학도 발생한다. 또한 신라 하면 향가를 빼놓을 수 없다. 진성 여왕 때 편찬된 《삼대목(三代目)》에 향가를 모았으나 전해지지 않고 《삼국유사》등 몇몇 책에 향가의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그 외에 통일 신라 대에는 중국한시도 유행하여, 중국 본토에서도 필력에 대한 평가가 높았던 최치원이 자신이 지은 시들을 고국에 소개하기 위해 요약 정리한 계원필경 등이 지금까지 전한다.

7.2. 미술

고구려나 백제 고분 같은 횡혈식보단 도굴이 어려운 구조 덕에 다양한 고분 출토 유물이 남아있으며, 황금 왕관을 비롯해서 다양한 공예품들이 출토되고 있다. 일부 유물들로 미루어보아 기초적인 수준의 유리 공예를 통해 장식품을 제조한 흔적이 발견되었으며[62] 한반도에서 나지 않는 코발트 유리를 재가공한 흔적으로 보아 페르시아동로마 제국 문명과 교역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경주 월성을 비롯해 미발굴 유적이 매우 많고 계속 발굴 중이므로 앞으로도 더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신라 금관은 전반적으로는 스키타이 양식을 상당히 많이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과 같이 유리 제품이나 일부 금으로 만들어진 유물의 양식이 로마 제국, 레반트페르시아 지역의 것과 동일한 것도 있는데, 이는 무역을 통해 얻은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 사례로 불가리아에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 경주 계림로 보검이 있다.

그러나 고구려나 백제식과 달리 무덤의 양식이 달라서, 고분 벽화가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전해지는 신라 회화의 수는 오히려 고구려나 백제보다 적은 편이다. 천마총에서 나왔던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대표적인 신라 회화다. 천마총에서 나온 다른 두 그림(또다른 천마도, 기마 인물상)이 발굴 이후 2014년 처음으로 공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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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외선 촬영된 천마총 기마 인물도와 서조도(瑞鳥圖)

지금까지 전해지는 통일신라 시대의 그림으로는 국보 196호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의 변상도(變相圖) 불화가 있다. 링크

일본 도다이지 정창원에서 신라 모전(양탄자) 45점을 소장하고 있다. 만약 한국에 있었으면 전부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되고도 남았을 유물들에 보도된 사진을 보면 신라 때 것이라기엔 믿기 힘들만큼 보존상태도 좋은 편이다. 1999년 2월 6일분 역사스페셜 14회에서 신라모전을 다룬 적이 있다.

서예 역시 발달해, 김생[63], 영업, 요극일, 최치원[64] 등이 신라 대의 대표적 명필이었다.

7.3. 음악

신라 대의 작곡가로 우륵, 백결선생이 유명하다.

김부식은 가야금, 거문고, 비파를 신라삼현(新羅三絃)으로 소개했다. 가야금은 이름대로 원래 가야(대가야, 반파국) 지역의 악기인데, 가야를 정복한 진흥왕이 가야인 악사 우륵을 우대한 계기로 신라에 전해져 발달했다. 우륵은 고향 가야 지방의 지명들을 딴 12개 곡을 지었다.

사진의 출처는 histopia, 사진의 원출처는 일본 정창원 홈페이지

현대의 가야금의 원류가 되는 신라 시대의 가야금이 일본정창원에 한 기가 보존되어 있는데, 일본에서는 이 악기를 신라금(新羅琴, 시라기고토)라고 부른다. 850년 11월에 이 시라기고토를 일본 궁중에서 연주하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65]

거문고는 원래 고구려 지역의 악기였는데, 삼국 통일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에 들어오면서 도입되었다. 경덕왕 때 거문고의 대가 옥보고(玉寶高)가 거문고를 위한 새로운 노래 30곡을 짓고 신라 땅에 거문고를 보급했고, 이후에도 속명득(續命得)과 귀금선생(貴金先生)이 거문고의 대가로 활동했다.

비파는 당나라에서 들여온 악기이나 현을 바이올린 현 비슷한 철현을 쓰는 중국 비파와 다르게 독자적으로 발전시켰고 이후 시대에도 한국의 대표적 악기로 전승됐다.

신라의 음악은 정작 한반도보다 기록이 풍부한 중국, 일본 기록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수나라 궁중에서 신라 음악이 연주되었는데, 신라기(新羅技)라 했다. 당나라 때도 진평왕이 여악(女樂) 두 명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어, 당나라 때도 신라 음악의 당나라 궁중 연주가 이뤄졌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에서도 신라 음악이 종종 공연됐는데, 453년에 80명이 연주한 것이 최초고 561년, 684년에도 관련 기록이 있다. 대보율령(大宝律令), 일본후기(日本後紀)에 따르면 통일신라 때도 신라 악사들이 소수 파견되어 악기 연주와 춤을 일본에서 가르쳤다고 한다.

일본의 악보 인지요록(仁智要錄)에 수록된 신라릉왕(新羅陵王, しんらりょうおう)이라는 아악 노래의 복원 연주 영상이다.

7.4. 건축

목조 건축 문화권이었던 한국에서 고대의 건축물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나마 신라의 경우 안압지에서 온전한 건축 자재가 대량 발굴되기도 했고 문헌 기록도 그나마 더 많아서 알 수 있는 것이 많다. 국왕이 사는 궁전경주 월성이었으며, 문무왕삼국통일 이후 동쪽으로 궁전을 확장한 것이 동궁과 월지(구 안압지)이다. 이외에 일제강점기 이전 전 근대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황룡사 9층 목탑이 유명하다.

7.5. 역사

545년 진흥왕거칠부를 시켜 국사(國史)라는 역사책을 편찬했다. 삼국유사에도 《국사(國史)》 고려본기(高麗本紀)에서 인용한 글들로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뿐 아니라 고구려나 백제를 포함해 주변 다양한 국가의 역사를 기록한 내용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아 삼국유사가 작성된 고려 시대 후반 원 간섭기까지는 국사의 원본이 존재했으나 이후에 실전되어 현전하지는 않는다. 삼국통일 후에도 정사를 편찬했을 법 한데 관련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 수는 없고, 8세기경 김대문이 계림잡전, 고승전, 한산기, 악본, 화랑세기 등을, 9세기에는 최치원제왕연대력이라는 역사서를 편찬했으며 이 책들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66] 많은 내용이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쓰는 데 인용되었다.

7.6. 종교

7.6.1. 고유 토착 신앙

신라는 불교의 원조 인도나 중간 경유지 중국에서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백제고구려에 비해 불교의 도입 시기는 비교적 늦은 편이었고, 그 전에는 박혁거세알영부인, 김알지 설화 등에서 짐작할 수 있듯 하늘의 신이 내려왔다는 천신 탄강을 골자로 하는 토착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특정 지역을 신성한 성지로 숭상하는 문화가 있었으며[67] 골품제의 근간이 되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어 외래 종교인 불교가 처음 전해졌을 때도 반대가 컸다.

신라의 자체적인 국가 신앙 시설로 신궁(神宮)이 있었다. 신라 김씨 왕조 조상들을 기리는 유교적 종묘 체계인 5묘와는 별개로 운영됐다. 신라 왕이 새로 즉위하면 즉위 초기에 신궁에서 크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신라의 관례였으며, 신궁에서 제사지낸 주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은데, 김씨 왕계 시조를 기리는 시설은 따로 있었기 때문에 신궁은 박혁거세설이 좀 더 일반적이다.

7.6.2. 불교

불교는 초기 미추 이사금, 눌지 마립간, 소지 마립간 때 일단 전해졌고 흥륜사 같은 절이 왕의 허가로 겨우 초가집 수준으로 지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박해 속에 끝났고, 비로소 법흥왕이차돈순교와 불교의 공인 이후 급속도로 불교 국가화되었다. 신라 불교의 특징은 개개인의 구제보다는 국가의 발전을 비는 호국 불교의 성격이 매우 강했고, 인왕경이나 법화경 같은 호국경을 중요시했다. 임전무퇴를 제시한 원광 법사 역시 승려였다. 이후에는 불교가 융성하여 국가의 주도하에 많은 사찰 건축물이 창건되고 불교 미술품들이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신라 중대 ~ 통일 신라 대에 들어서면서 불교는 이전의 정치 이념으로서의 귀족 불교, 왕즉불 사상을 벗어나 대안, 혜숙, 혜공, 그리고 원효의상 등 여러 승려의 노력에 힘입어 거리의 불교, 신분을 초월한 불교 대중화로 나아갔다. 신라 불교계의 대체적 흐름은 9세기경을 경계로 해서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눠볼 수 있는데 전반기는 형식과 교리, 경전을 중시하는 교종, 후반기는 실천적 불교인 선종(불교)이 유행했다.[68]

통일 신라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이 된 불교 덕택에 신라 시기 사찰은 백제나 고구려에 비하면 그 명맥이 유지된 곳이 상당히 많다. 현재의 경주시 지역엔 신라에서 가장 중시되는 거대 사찰이었던 황룡사를 비롯해 사천왕사(四天王寺)·불국사(佛國寺)·분황사(芬皇寺)·흥륜사(興輪寺)·영흥사(永興寺)·봉덕사(奉德寺) 등 대사찰이 세워졌으며, 지방에는 부석사(浮石寺)·통도사(通度寺)·화엄사(華嚴寺)·범어사(梵魚寺)·법주사(法住寺) 등의 대사찰이 세워졌다. 그리고 이때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지금도 신라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상도는 전국에서 상대적으로 타 종교들에 비하여 불교가 초강세이다. 그러나 사찰의 창건 연대가 그러하다는 것이지 역시 목조 건축물 자체가 남은 것은 하나도 없으며, 대부분의 사찰들은 전부 고려 & 조선시대에 중건된 경우다. 현재까지 남은 신라의 건축물들은 석탑이거나 유허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석조 건축은 유명한 경주시의 석굴암, 그 외에 군위군 아미타 여래 삼존 석굴(소위 제2 석굴암) 등 신라 당대의 것이 남아있는 경우가 몇 있다.

7.6.3. 유교

유교의 경우 화랑(역사) 문화와 접목되어, 신라에서는 특히 신(信)과 충(忠)을 중요시하는 풍조가 강해서 세속오계임신서기석 등에서 이런 문화를 찾아볼 수 있다. 신문왕은 유교 교육 기관 국학을 설치하고, 거기서 오경을 가르치고 독서삼품과와 같은 제도를 실시해 유교를 보급했다.

또한 고유 조상 숭배 사상이 아닌 유교식으로 체계화된 종묘를 한국 역사상 처음 도입한 것도 신라였으며, 이는 고려조선의 종묘로 이어진다. 신라의 종묘 체계에 관해서는 종묘 문서 참조.

7.7. 과학

자연 과학 분야, 특히 농업천문학 분야에서도 통일 신라 시기에 발전하여 7세기에는 첨성대(瞻星臺)가 축조되고[69], 수학·의학이 발달하였다. 통일 신라 대에는 당나라와의 기술 교류가 활발해, 덕복(德福)은 당나라에서 가져온 기술을 이용해 역법을 만들었고, 김암(金巖) 등이 당나라에 유학해 천문학을 배워 신라에 보급하고, 그리고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서 전수하기도 했다. 그리고 삼국사기의 기록상으로는 718년(성덕왕 17년)에 물시계를 만들고 이것을 관리하는 관청을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이 만든 최초의 물시계가 671년 백제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삼국사기에 기록된 718년 훨씬 이전부터 물시계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학도 크게 발달하였을것으로 추정되는데 석굴암의 평면 구성이나 천장의 돔, 불국사 석가탑, 다보탑 등 여러 건축물의 균형 잡힌 비례 구성에는 모두 정밀한 수학적 지식이 활용되었을것으로 추측된다. 최고 학부인 국학에서는 수학 교육도 이뤄졌고, 717년에는 산박사(算博士) 제도를 시행했다.

또 기포가 거의 없이 완성도가 높은 성덕대왕신종을 제조하는 등 금속 공학 등의 측면에도 발전된 부분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인쇄 제지술이 발달해, 신라산 한지인 저지(楮紙, 닥나무 종이)는 색이 희고 질겨 중국인들의 찬사를 받았다. 보존성이 뛰어나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현재 남아있는 것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이며, 전란이 적었던 일본 땅에서 민정문서 등 신라 당대의 인쇄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8. 외교

백제와는 상쟁하면서 혈연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많은 전투가 있었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은 적도 있다.서로 국가에 이득을 위해 혈연이 맺어지기도 하였다. 참고로 장수왕 즉위 후 전성기를 맞은 고구려라는 공통의 적과 공동 대응하기 위해 맺은 120년간의 나제동맹 기간. 하지만 국가의 이익을 따라서 나제 동맹도 결렬된다.(관산성 전투)

고구려와의 관계도 국가의 이득에 따라 동맹하였고 또는 싸웠다. 광개토대왕 시절 광개토대왕릉비 [廣開土大王陵碑]에 의하면 왜의 공격에 5만의 군사로 신라를 구원하였고( 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住救新羅) 신라가 조공하였다고 한다(寐錦家僕句請朝貢) 장수왕 대에 고구려가 남진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이후 진흥왕이 반격에 나서 고구려의 남쪽 영토를 대거 빼앗기도 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 고구려군에게 잦은 공격을 받기도 하는 등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적대적인 관계를 지속하였다. 삼국 시대 말기까지도 무열왕은 고구려로 가서 연개소문을 찾아가 동맹을 하려고 하였다. 나당전쟁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도 하고, 그 후계 국가인 발해와도 대립하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가야와는 초기부터 경쟁하는 관계였으나, 금관국을 멸망시킨 후 구형왕 가문을 진골로 편입시켯다.

중국과의 관계는 고구려, 백제와 마찬가지로 조공이라는 교류를 하였으나 초기에는 한반도 동남부라는 지리적 위치상 한반도 서해의 중국과 직접 교역은 불가능해 많은 교류는 어려웠던 걸로 보인다. 그러다 진흥왕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서해안에 영토가 닿게 되면서 항구 도시 당항성을 통해 직접 교류가 가능해졌고, 고구려와 백제에게 남북으로 협공을 당하게 되자 수나라, 당나라와의 교류가 수월해졌다. 한때 나당전쟁으로 관계가 단절되기도 했지만 이후 발해를 치는 시늉을 한 뒤 회복되었고 통일신라 시대에도 신라의 인재들이 당나라에 유학을 가는 등 우호적인 편이었는데, 숙위 학생단이라는 유학생단을 만들어 10년 정도의 기간씩 교대로 유학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한때 그 숫자가 105명에 이르기도 했으며 일부는 빈공과라는 당나라의 과거 시험에 응시해 당나라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귀국해 신라에서 관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후 당나라가 멸망하고 중국에서 5대 10국 시대가 개막하고 태봉과 후백제가 신라에서 갈라져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어 한강 유역과 서해안을 상실한 이후에도 신라는 후당 등 중국의 5대 10국 국가들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멸망 직전에도 중국과의 교류를 했다.

일본과 거리가 가장 가까운 영남 지역에 위치한 신라였지만 왜국과의 관계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많은 침략을 받았다. 삼국사기 기록에서만도 박혁거세 시대부터 수십번을 쳐들어오고, 신라도 말기의 신라구를 제외하면 직접 왜의 침략한 기록은 없지만 일본서기에는 527년 큐슈 북부의 유력자 이와이(磐井)에게 왜군의 신라 침공을 저지하게 포섭한 일이나, 신라 원정군을 꾸리던 일본 왕자에 대한 암살을 사주했다는 설이 있는 등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왜는 백제를 하나의 번국으로 보았고 백제가 멸망한 직후에도 신라를 공격하고 후속 공격을 준비하기도 했으나(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백제가 완전히 멸망한 이후에는 신라와도 교류도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통일 신라 때도 일본과 신라는 아주 사이가 나쁜 시기와 그나마 덜 나쁜 시기가 나뉘는데, 대체로 서로 상대방이 오만하고 무례하다고 비난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일본과 신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편견과 달리, 이전 백제 때만큼은 아니지만 이후 시대인 고려조선 시대에 비해서는 양국간 교류량은 훨씬 많은 편이어서, 가령 조선 통신사 파견이 조선 후기 200여년간 고작 9회에 불과했지만 신라 때는 한일 양국의 사료를 종합해보면 670년부터 779년까지 1세기 동안 신라에서 일본으로 사신단이 39차례나 파견됐고, 동시기 일본 사신단은 신라를 25차례 방문했다. 사신단의 규모에 있어서도 성덕왕 2년(703년)에 204명의 사신단을 파견했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횟수까지 감안했을 때 1회에 3백명 ~ 5백명을 파견한 조선 통신사에 크게 밀리지 않는다. 8세기 중후반으로 가면서 일본의 자존 의식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자국을 상국으로 모실 것을 신라에 요구하는 형식적 외교 관례에 집착했고, 이러면 신라도 무례하다고 사신을 쫓아내고 개무시하면서 차츰 정부간 교류가 줄어들게 되는데 그래도 장보고로 대표되는 사무역이나 민간 교류는 9세기에도 꽤 많았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중동 지역과도 교류가 있어서, 아라비아페르시아의 기록에 '알실라(Alshillaالسيلى)', '베실라(Beshilla)' 등의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중동인들은 대체로 신라를 이상향마냥 살기 좋은 곳으로 기록하였다. 일본 도다이지 쇼소인에서 소장 중인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의 기록에 따르면 752년에는 아랍 상인단이 신라 사신단을 따라서 일본까지 갔다오기도 했다. 일부 중동인들은 신라에 정착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70]

후삼국시대의 경우 태봉은 신라와는 거의 불구대천의 원수와 같았다. 궁예는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칭하며, 우호적인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고 적개심을 드러내었다.[71] 후백제는 태봉에 비하면 신라 눈치를 보는 시늉은 했지만[72] 역시 후백제의 창업자인 견훤이 신라에 반기를 들고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그렇게 관계가 좋지 않았으며 후백제도 신라를 침략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약탈하기까지 하였다. 반면 태봉국을 쿠데타로 무너트리고 즉위한 왕건고려는 궁예와는 상반되는 친 신라 정책을 펼쳤으며, 동시기에 존재한 후백제보다는 고려 쪽에 신라가 의탁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9. 군사

신라는 초기에 6부(部)의 장정을 징발하여 편성한 6부병(六部兵) 제도로 운용되었다. 군사력은 결국 중앙 집권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법흥왕 때까지 분권화되어있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급속도로 팽창하는 시점인 진흥왕 때부터 늘어난 영토의 방위 목적 등으로 군사 편제의 변화가 있어보이며 6부 체제는 6정의 6개 군단 편제로 바뀌게 된다. 나중에 이 체제는 더 증편되어 진평왕 때에는 10정(停)으로 바뀌게되며 통일 신라 초창기까지 운용되다가 9서당으로 완전 개편된다. 지방 체제의 군단 편제 외에도 중앙군도 개편에 맞추어서 서당(誓幢 : 583년), 낭당(郞幢 : 625년)이란 부대로 개편되었고 왕궁 수비대인 시위부(侍衛府 : 624년)도 창설되게 된다.관련 정보 이러한 개편은 결국 신라가 그간 수천명에 동원되던 수준의 원정 능력에서 만명 단위 이상의 동원 능력을 보이는 계기가 되며 삼국 전쟁 말기에 고구려 원정에는 20만명이라는 최대 동원 능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신라군은 보병 위주의 군대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백제와 마찬가지로 말을 목축화하는데 어려운 지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백제와 유사하게 보병 중심이나 기마병을 정예로 치고나 귀족들 위주의 부대로 개편 운용되었을 확률도 크다. 고구려의 영향 전에는 판갑을 주력으로 운용했을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 광개토 태왕의 구원 이후 고구려의 영향 덕에 찰갑 등을 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군 하면 딱 나오는 이미지는 적지만 통일 신라 초기 쇠뇌에 대한 신라의 기술적 우수성이 나오는 부분을 보건데 쇠뇌와 같은 병과에서 위력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화랑이라는 제도 역시 운용하여 고구려의 경당 / 태학과 같은 역할 화랑 / 낭도 제도를 운용한 것도 특징. 대체적으로 화랑 / 낭도 형태로 아마도 고급 장교 - 하급 장교 / 부사관 급 인사를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보는 편이다.

10. 신라/평가

11. 시기 구분

한국사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특히 신라는 국가 존속 기간이 1,000여 년이나 되기 때문에, 시기별로 나라 체제의 차이가 커서 여러가지 시기 구분이 있어왔다. 옛날부터 사용되던 구분 방식으로는 삼국사기의 구분대로 상대, 중대, 하대로 구분하는 방법과 삼국유사의 구분대로 상고, 중고, 하고로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전자는 유학자 김부식이 주도해 집필한 책인만큼 왕의 혈통을 기준(성골태종 무열왕진골내물왕계 진골)으로 했는데, 상대는 혁거세 거서간 ~ 진덕여왕, 중대는 태종 무열왕 ~ 혜공왕, 하대는 선덕왕 ~ 경순왕이다. 상대는 통일 이전, 중대는 왕권이 강했던 전성기, 하대는 쇠퇴기와 대강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지금도 많이 사용되는 구분이다.[73] 후자는 승려 일연의 구분답게 불교와 연관됐는데, 불교 수용 이전(고유어 왕호) → 불교식 왕호 사용 → 중국식(유교식) 왕호 사용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상고는 혁거세 거서간 ~ 지증왕, 중고는 법흥왕 ~ 진덕여왕, 하고는 태종 무열왕 ~ 경순왕이다.

현대에는 좀 더 세분화해 여섯 시기로 구분하기도 한다. 사실 신화 시절을 포함하여 사로국으로 존속한 기간이 불분명하기는 하고 국가로 인정하기에는 미흡한 점들이 있기 때문에 신라의 역사를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어떻게 구분해야할지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74]

676년 이후의 신라통일신라로 부르는 문제에 있어서도 논란이 있다. '통일 신라시대'라는 용어는 발해까지 아울러 남북국시대라고 부르는 쪽으로 현대에는 대체가 된 편인데, 그럼 남북국 두 나라 중 남국인 신라를 뭐라고 불러야 하느냐고 하면 이 쪽은 지금도 통일신라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신라의 통일이 불완전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것도 부적절한 호칭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딱히 자리잡은 대체 용어는 없고 학자에 따라 대 신라, 후기 신라 등의 이름으로 676년 이전(삼국 중 1개국으로서의 신라)과 구분하기도 한다.

재미있게도 고려의 존속 기간인 474년과 조선의 존속 기간인 518년을 더하면 정확하게 992가 나오는데 이는 고려조선의 전신인 신라의 존속 기간이다.

12. 다른 위키의 신라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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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왕사

13.1. 왕비

14. 신라의 인물들

15. 신라의 유적

16. 신라의 유물

17. 신라의 도서

18. 신라를 소재로 한 작품

19. 관련 문서

19.1. 통일신라

20. 신라 틀


  1. [1] 링크 참조. "신라 사람들의 휘직은 띠를 푸르거나 붉거나 하는 등의 색깔로 구분하였고 모양은 반달의 형상을 취하였다. 계(罽) 또한 옷에 다는 것인데 그 길이의 길고 짦음에 대한 제도는 분명하지 않다."
  2. [2] 물론 진흥왕 사후 현재의 함경남도 지역은 고구려의 반격으로 빼앗겼고 실제로는 원산 정도까지 확장하였다.
  3. [3] 4월 정월 15일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4. [4] 1대 박혁거세 또는 2대 남해
  5. [5] 2대 남해
  6. [6] 3대 유리 이사금 ~ 16대 흘해
  7. [7] 17대 내물 ~ 21대 소지
  8. [8] 중원 고구려비에는 매금(寐錦)이라는 왕호도 등장한다. 진흥왕 순수비 등 금석문에서는 황왕(皇王), 제왕(帝王), 태왕(太王) 등의 칭호도 당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외왕내제적인 성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9. [9] 22대 지증 ~ 56대 경순
  10. [10] '황왕' 이라는 군주 칭호는 사서에는 안 나오고 오직 신라의 금석문에서만 나온다. 황제와 왕의 복합어로 외왕내제적 성격을 보여준다. 영어로 직역하면 'Emperor King'.
  11. [11] 대다수가 고구려 멸망 이후에 집중적으로 유입
  12. [12] 진한을 이루고 있는 12소국 가운데 경주 부근에 위치한 '사로국'으로 시작하여, 세력을 확장해 진한을 통합했다.
  13. [13] 세계사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정말 긴 기간 동안 유지되었다. 다만 초기와 말기의 석씨, 박씨 집권기를 제외한 경주 김씨 단일 왕조는 약 550년 간 유지되었는데 이것만 쳐도 후대의 고려조선, 상나라, 주나라를 제외한 중국사의 어떤 왕조들보다도 길다.
  14. [14] 그러나 신라 초기 왕들의 실존에 대해서는 쟁론이 많으며, 특히 초기 박 - 석 - 김 삼가가 돌아가면서 왕위를 계승했다는 기록에 대해서는 이후 신라 지배층에 포섭된 성씨들을 대우하기 위해 훗날에 술작된 왕권 전설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15. [15] 언어학자 이기문 교수는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추출한 어휘를 통해 볼 때 고구려어에는 분명하게 알타이적 요소가 있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으로 ‘매(買)’를 들었다. 이는 ‘물(水)’을 뜻하는 말로, 에벤키어의 ‘mû’, 만주어 ‘muke’, 중세몽고어 ‘mören’, 일본어 ‘midu’와 유사하며, 중세 국어의 ‘믈’로 이어져 현대 한국어 ‘물’이 되었다고 한다.
  16. [16] 조선의 수도인 '한양'이나 고려의 수도인 '송악'이 대표적인 예이다.
  17. [17] 어두에서는 두음 법칙에 따라 '나'이지만 둘째 음절 이하부터는 '라'로 발음.
  18. [18] 좁은 의미로는 경주시에 있는 작은 이름이자, 넓게는 신라국 전체를 이르는 이름. 공식적으로 신라라는 국명이 정해진 뒤에도 일종의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후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별칭으로도 쓰였다. 이순신은 계림 최고의 장수라는 식.
  19. [19] 아랍어 정관사 ال(al)+سيلى(silla)의 합성일 경우, 아랍어의 음운변화에 따라 앗실라로 읽는게 맞다. 아랍어로 중국을 지칭하는 الصين (앗씬)같이 정관사+단어로 구성된 국명이 많은데, 신라도 이와 같은 가능성이 높다.
  20. [20] 라틴어로 의자라는 뜻도 있다.
  21. [21] 여기서 병기된 성씨는 촌장의 성씨인데, 마을 전체가 이 성씨를 따랐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표적인 예로 박혁거세는 양산촌 출신이었는데 당시 양산촌의 촌장은 이알평이었다.
  22. [22] 참고로 《삼국유사》에서는 "내물 마립간"과 "실성 마립간"라고 나오지만 《삼국사기》에는 마립간 칭호는 눌지 마립간부터 생겼다면서 각각 내물 이사금, 실성 이사금으로 나온다. 이 글에서는 《삼국유사》쪽을 따랐다.
  23. [23] 개로왕 이 살해당했을때도 백제 지방에서 온 지원군보다 신라 지원군이 더 먼저 도착했다. 어차피 이미 늦었지만
  24. [24] 이전에 사로, 사라, 신라 등이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25. [25] 법흥왕 때 제정된 신라의 연호는 548년 나당동맹이 체결될 때까지 지속된다. 나당동맹 체결 당시 당나라가 연호의 폐지를 요구했고 신라가 이를 수용했던 것. 신라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국가다.
  26. [26] 황룡사는 진흥왕 대에 세워졌지만 황룡사의 상징으로 알려진 높이 80m에 달하는 9층 목탑은 이후 선덕여왕 대에 추가로 지어졌다.
  27. [27] 신형식 교수의 신라 통사 참조.
  28. [28] 그런 식이면 일제의 조선 왕족 및 양반 우대도 대단히 파격적이었고 일제 군인이나 공무원 중에 조선인도 많았으며, 조선인 판사를 모독하는 일본인 법정 공무원이 매우 엄히 일본법으로 처벌받은 사례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조선인이 완전히 일제에 융화되어 늘상 순순히 있었다고 볼 수 있는가? 프라퍼갠다적 시도를 현실과 혼동하는 게 이렇게 위험천만하다. 단, 삼국시대-후삼국시대의 간격은 2세기에 이르지만 일제강점기는 한 세대에 그쳤다는 점이 다르다. 마찬가지로 본토만 약 6개월간 나치에게 완전지배당했던 프랑스와 36년간 국권을 완전히 잃었던 대한제국을 맞비교하는 식으로, 이런 문제에서 경과한 시간과 세대교체를 간과하는 경우가 잦다.
  29. [29] 평원왕은 재위 기간 동안 침략 전쟁을 자제하며 내부적인 국력 강화에 힘썼으며, 덕분에 고구려는 안정을 되찾고 국력이 강화되어 그의 사후 이어지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입에 성공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30. [30] 삼국 시대 고대 국가에서는 국왕이 동시에 장수의 역할을 했다. 대규모의 전투에서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끄는 것이 기본이었고, 때문에 삼국 시대에 국왕이 전사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발생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전장에 서기 힘든 여왕의 즉위는 당시 관점에서 주변국에게 얕보이기 좋은 구실이었다.
  31. [31]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32. [32] 대야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훗날 후삼국시대에 신라가 쇠락한 상태에서도 후백제견훤은 대야성을 몇번이나 공격해서 번번이 실패하다 간신히 함락시킨 바 있다.
  33. [33] 백제 의자왕은 신라와 고구려가 싸우는 타이밍에 신라의 배후를 공격하기도 했다.
  34. [34] 김춘추가 고구려 평양성에 도착했을 때 백제 성충이 보낸 편지가 연개소문에게 당도했는데, 만약 고구려가 신라와 연합한다면 백제는 당나라와 연합해서 고구려를 치겠다는 협박이 담긴 내용이었다. 결국 연개소문은 고구려와 신라의 연합 제의를 거절하고 백제와 동맹을 맺기로 결심하게 된다.
  35. [35] 신라는 건국 이래 왜와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이 때 김유신의 파견이 왜와 처음이자 마지막 동맹 시도였다.
  36. [36] 이때 국경을 어떻게 나누는가에는 많은 추정이 있으나 당시 신라는 당나라가 신라와의 동맹으로 고구려의 격파 후 그 땅을 할양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돌변한 당나라의 태도에 대해 고구려 유민과 백제 유민을 지원하여 당나라와 전쟁을 벌인걸로 보는 견해가 있다.
  37. [37] 다만 일본은 백제 부흥 운동 때 백강 전투에 참여한 것 외에는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 없고,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은 나당연합만큼 원활하게 돌아가지는 않았다.
  38. [38] 삼국사기 권제7 신라 본기 제7 문무왕 11년 가을 7월 26일 (http://db.history.go.kr/id/sg_007r_0020_0100)
  39. [39] 전당문 장구령편
  40. [40] 2차 여당 전쟁에서도 신라는 평양으로 북진하다가 대전 부근에서 백제 잔당이나 좀 잡고 그 핑계로 말머리를 돌렸고, 평양에 고립된 소정방군에 군량만 전달하고 빠졌다. 3차 여당전에서도 고구려 패망이 확실해지는 시점에서야 대군을 파병하는 등, 전력을 아낀다는 성격이 강하다.
  41. [41] 앞서 언급했지만 먼저 복속시킨 가야에 대해서만큼은 아니었다만 그래도 이 당시엔 당나라군과 비교했을 때 굉장히 유화적인 조치였다.
  42. [42] 다만 이는 정복 초반 정복민을 위무하고 당나라와의 결전에 대비한 신라 측의 비상 조치로써, 이후 늘 신라가 그러한 태도로 일관했다고 보는 것 또한 실제 역사적인 사실 관계와는 대단히 동떨어져 있다. 당시 멸망 당한 백제인들과 고구려인들이 이후 결국 신라로부터 분리 독립 시도를 하게 된 건 신라의 융화 정책이 불충분했던 게 원인이며, 이를 지적하는 건 백제인이나 고구려인 등이 천민으로 편입됬다고 오해해서가 아니다.
  43. [43] 삼한이라는 단어를 보고 '신라가 말하는 일통의 대상에 고구려는 없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삼국 시대 후반부의 삼한은 마한, 진한, 변한이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 3개국을 뜻하는 단어였다. 고현 묘지명에 적혀있는 '요동 삼한인' 문구와 같이 고구려인들 본인들도 고구려를 삼한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삼한 문서 참조.
  44. [44] 통일신라 문서에도 나오는 얘기지만 신라통일을 불완전한 통일로 보고 고려의 통일을 완전한 통일로 보는 측에선 이 시기의 신라에 대해 '후기 신라'라고 칭하자는 움직임도 있으나 대중적으로는 통일신라가 더 넓게 퍼진감이 있다.
  45. [45] 정확히는 고구려인 1개(황금 서당), 보덕국민 2개 부대다.(적금 서당과 벽금 서당) 단 보덕국민들도 고구려 유민이다. 보덕국은 신라가 고구려 유민들을 지금의 전라도로 이주시켜 만든 체제고, 황금 서당은 전라도로 이주하지 않았던 나머지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
  46. [46] 청금 서당과 백금 서당. 부대 상징색은 이름대로 파란색과 흰색.
  47. [47] 따로 언급은 없지만 앞서 시대에 편입됐던 가야 유민들도 포함한 것으로 여겨진다. 녹금 서당, 자금 서당, 비금 서당. 녹금 서당과 자금 서당은 통일 이전 진평왕 때 만들었고, 비금 서당은 문무왕 때 설치한 장창당(長槍幢)을 효소왕 때 이름 변경한 것이다. 비금 서당은 말 그대로 장창으로 무장한 부대로 추정.
  48. [48] 흑금 서당. 상징색은 흑적(黑赤, 검붉은 색)
  49. [49] 신라의 뛰어난 공예, 건축 문화재들이 모두 이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불국사가 이 시기에 중수되고 석굴암이 건설되었다.
  50. [50] 가령 구한말 한양의 사진을 보면 초가집도 많았고, 숯으로 밥을 짓는 건 사치에 속했다.
  51. [51] 사실 외국인, 특히 멀리서 온 서역인들은 모두 수도이자 무역 중심지였던 경주시와 경주를 중심으로 한 인근의 번영한 항구나 도시 등에서 머물렀을테니 당대 서라벌의 영화로움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저런 식으로 쓰는게 무리는 아닐 수도 있다.
  52. [52] 노란색 부분이 신라(السيلى)', 빨간색이 중국(الصين), 파란색이 이라크(العـراق)다.
  53. [53] وليس بعد بلاد الصين مما يلي البحر ممالك تعرف ولا توصف، إلا بلاد السيلى وجزائرها، ولم يصل إليها من الغرباء من العراق ولا غيره، فخرج منها؛ لصحة هوائها، ورقة مائها، وجودة تربتها، وكثرة خيرها، وصفاء جواهرها إلا النادر من الناس، وأهلها مهادنون لأهل الصين وملوكها، والهدايا بينهم لا تكاد تنقطع
  54. [54] 영문판 해당 부분.
  55. [55] 그래서 그런지 경주 분지 땅에서 비교적 외곽 지역인 구 경주 경마장 부지에서도 집단 집터와 숯을 굽던 가마터가 20기나 발견됐다. 이는 당시 경주 분지 땅 안에서 인구 집중이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사례이다.
  56. [56] 이들이 그러한 주장을 하기 전에 우선 스스로의 힘부터 갖췄다는 것부터 지적을 하는 것은 그 자체로 성립하지 않는 넌센스다. 지배국의 지배력이 그래도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는데, 실력도 아직 충분하지 않은 자가 갑자기 그러한 주장을 하는 건 나를 죽여달라는 얘기밖에는 안 되는 것이다. 사실 백번 양보해서 그러한 주장을 하는 자가 예전에 망한 나라의 왕족이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사람을 모으고 경쟁자와 싸워 이기지도 않으면 결과는 비참한 실패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군벌로서 기반 세력은 전부 갖춰둔 뒤 칭왕 선포할 때 명분으로 통하는 상황이다.
  57. [57] 이 과정에서 견훤이 왕비를 겁탈했다는 말도 있으나, 견훤이 진짜 왕비를 강간했는가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삼국사기》라는 책이 신라 정통주의를 바탕으로 하였으며, 고려의 김부식이 지은 터라 고려와 대립을 했었던 후백제의 견훤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를 씌웠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록이 남은 자가 승자다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자세한 것은 경애왕 문서 참고.
  58. [58] 단, 해씨 고구려설, 비류계 백제왕 설과 같이 사실은 고구려나 백제도 주몽과 온조에서 이어지는 만세 일계는 아니었다는 설도 있다.
  59. [59] 역사 지리학 강의 참조
  60. [60] 현재의 경주 시내 형산강은 보문관광단지의 인공 호수를 지으면서 수량이 줄어들어 쪼그라든 상태다. 원래는 지금보다는 넓은 강이었다.
  61. [61] 개미핥기 토우가 있다는 주장도 있는데 개미핥기가 맞나 의문이 들 정도로 안 닮았을 뿐더러 개미핥기처럼 꼬리가 수평인게 아니라 개처럼 꼬리가 엉덩이위까지 올라가 있다. http://blog.naver.com/gesekideska 애초에 개미핥기는 아메리카에 사는 동물인데 그 시절엔 개미핥기의 존재 자체를 알 방법이 없다.
  62. [62] 당시에 유리 구슬은 일종의 보석 취급을 받았다.
  63. [63] 낭공대사비, 전유암산가서에 그의 글씨가 남아있다.
  64. [64] 지리산 쌍계사의 진감선사비문이 대표적.
  65. [65] 일본 몬토쿠 덴노 실록 권2
  66. [66] 화랑세기와 제왕연대력은 필사본이라 주장하는 책이 존재한다.
  67. [67] 화백회의를 개최하는 장소이기도 했던 사령지, 그리고 천경림과 문잉림처럼 신성 구역으로 정해놓았던 등. 사실 신라의 성지순례 문화는 불교 공인 이후에도 화랑의 풍습으로 계승되기도 했으며 울주 천전리 암각화, 제천 점말 동굴 등이 그 예이다.
  68. [68] 하지만 선종의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교리는 신라 말의 혼란기에 여러 지방 호족에 의해 악용되었고, 특히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자처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궁예가 타락하고 멸망하게 되자 고려 초기에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호국 불교 교종을 국가 이념으로 삼아 선종을 박해했다.
  69. [69] 하지만 첨성대가 정말 천문대인지는 논란이 있다. 일단 형태적으로도 별을 관측하기 불편하고 관련 기록도 많지 않기 때문.
  70. [70] 처용을 이 예로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71. [71] 어떤 국내 모 포털 사이트의 네티즌은 후백제의 견훤이 아니라 태봉의 궁예가 왕건의 쿠데타로 몰락하지 않고 신라를 침략했으면 신라 침공 후 경순왕만 세워놓고 괴뢰국화하는 선에서 그친 견훤과 달리 무력으로 멸망시킨 다음 태봉 영토로 강제 병합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72. [72] 892년에 사실상 왕이 되었지만 신라 서면 도통 지휘 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 전주 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 개국 공식 읍 이천호라는 형식상 신라의 신하로 깔고 들어가는 칭호를 자처했다. 백제 왕 칭호는 8년 뒤엔 900년부터이다.
  73. [73] 물론 세세하게 따지면 중대에도 너무 어린 왕이 즉위해 정국을 주도하지 못했기도 하고, 반대로 하대 초기에도 원성왕 ~ 헌덕왕처럼 개혁 정치를 통해 강한 전제 왕권을 추구했기도 하였기에 도식화가 완전히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74. [74] 고구려보다 국가 체제 발전이 늦었던 신라가 더 먼저 건국 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는 한국 고대 사학계의 쟁점 중 하나인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어디까지 믿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75. [75] 그야말로 문화재의 보고. 거의 모든 등산길에 10분마다 절터와 유적지가 분포해 있다.
  76. [76] 경주시는 2035년까지 3조 2,800억여원을 들여 황룡사를 복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다만 논란이 분분하다. 해당 항목 참고.
  77. [77] 신라가 익산에 세운 괴뢰국
  78. [78] 김헌창의난때 세운 국가
  79. [79] 이사부가 정벌한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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