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

1. 개요
2. 상세
2.1. 유대교의 경우
2.2. 천주교의 경우
2.3. 정교회의 경우
2.4. 이슬람교의 경우
3. 대한민국 개신교에서의 십일조
3.1. 십일조를 옹호하는 입장
3.2. 옹호하는 입장에 대한 반론
3.3. 십일조에 대한 바람직한 인식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개신교인이라면 참고할 만한 십일조에 대한 토론 영상.

1. 개요

十一租 / tithe[1]

그리스도교에서 자신의 수입의 10%(=1/10)을 헌금 등으로 납부하는 것.11조를 바치는게 아니다!!! 당연하겠지

2. 상세

그리스도교에서 자신의 수입의 10%(=1/10)을 헌금 등으로 납부하는 것이나 수입이 수익인지 수입인지를 따져야 한다. 물론 후자가 더 헌금 액수가 많아진다. 구약의 원어를 살펴보면 '테부아'로서 열매, 증가, 수익이라는 의미가 있다. 결국 원래는 농사를 지어서 나온 수확물의 십분의 일이었다. 목축업은 전통적으로 첫 새끼를 바치는 것이 원칙이다. 양계장으로 따지면 초란은 원래 다 헌금해야 할 것. 현대사회에서 농사를 짓지 않는 월급 생활자들과 자영업자로서는 실질적으로 비용을 공제한 수익이 원래 의미에 가까울 것이다. 월급생활자들이 많아서 보통 한국의 교회에서는 달마다 걷지만[2] 성서에 따르면 연마다 걷어야 하는 것이고,[3] 논리적으로 수익보다 빚이 많아 실질적으로 마이너스 수입이라면 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십일조의 근거가 되는 구절은 성경 신명기 14장 22절부터 29절까지로, '매년 토지의 소산의 십분의 일을 가지고 예배하며 먹고 마시는 것과 삼 년마다 너희 소출의 십분의 일을 떼어 성중의 고아과부를 먹이고 레위 지파인들에게 주라'라는 것이었다. 더욱이 다음 구절은 7년마다 빚 탕감하기... 원래 그리스도교 예배는 설교 후 빵과 포도주(즙)를 나누어 먹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고, 유대교 예배도 희생제물을 불에 태우는 등으로 제사를 지냈는데 이 과정에서 제거되는 부위는 주로 피와 내장 부위였다. 남은 제물의 부위를 굽거나 삶은 고기나 빵, 과일 등의 음식들을 예배자들끼리 나누어 먹는 것이었다. 따라서 예배 후 같이 밥을 먹는 것은 유구한 전통이 있는 것. 그리고 그 구절의 유래는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아브라함멜기세덱에게 바쳤던 노략물의 10분의 1 구절.[4]

중세 유럽의 교회에서 교구민(敎區民)으로부터 수입의 1/10을 징수하기도 했는데 '10분의 1세', '10분의 1교구세'라고도 했다. 고대의 유대교도에게 수입의 1/10을 하느님께 바칠 것을 명한 구약성서의 율법에서 연유한 것인데, 구약시대의 제사 의식에 참예하는 유대인들은 형편에 따라 포도주를 들고 와서 나누어 먹기도 하였고, 바쳐진 것의 9/10은 레위인들의 소득을 위해서, 1/10은 제사장들을 위해서 사용되었다.

특히 10세기에 성행한 사유교회제(私有敎會制)를 이용하여 세속 영주(世俗領主)들은 자신들의 영민(領民)들이 바치는 십일조를 점차 사유화하여 갔다. 교회는 라테란 공의회(1078) 및 1179년 교황 성 그레고리오 1세의 교회 제도 개혁을 통하여 영주로부터 십일조를 환수하려 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그 대부분은 세속 영주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소교구(小敎區)의 사제(司祭)는 그의 생활과 교회의 관리·유지를 명분으로 곡물·포도주·가축·사료(이상 대십일조), 아마(亞麻)·가금(家禽)·채소(이상 소십일조), 개간지(開墾地:신십일조) 등에 십일조를 부과하였다.

한국 가톨릭의 경우엔 "교무금"이라는 것이 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항목을 참조.

참고로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유럽에는 십일조가 없다'라는 오해가 퍼져있는데, 당연하지만 유럽에도 십일조는 있다. 테오도시우스 대제 이후 그리스도교가 국교였던 유럽 국가들은, 십일조가 세속법에 의해서 보장이 되었는데,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권에서 차츰차츰 교권과 속권이 더 엄격하게 구분되며 '세속법에 의한 십일조 보장'이 폐지되었기에 이런 오해를 부른 것이다. [5] 어차피 한국에서는 천주교든 개신교이든 국교가 된 역사가 없고, 따라서 한국의 그리스도교에서 십일조는 역사상 언제나 '세속법이 아닌' 순수한 종교적 의무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혁명 이후의 유럽권 교회와 유사하다. 물론 종교적으로 의무라고 하더라도, 가난한 신자의 경우 신부나 목사와 상담하여 사정을 설명하면 얼마든지 면제받을 수는 있다. 중세와의 차이점은, 이것을 세속법이 보장해주느냐 마느냐이다.

2.1. 유대교의 경우

유대교의 경우,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함께 레위 지파로 이루어진 제사장 계급이 사라지면서, 성전 참배를 토라 학습으로 대체하고 종교적 지도자의 역할은 랍비들이 대신하였으며 성전의 역할은 회당이 이어받게 되었다. 이와 때를 함께 하여 레위 지파 제사장들을 위한 십일조 제도도 같이 없어졌다. 성전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제사장도 필요 없고, 제사장 계급이 없으니 제사장 계급의 생계유지를 위해서 걷던 십일조 제도도 더 이상 존속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랍비들이나 시나고그(유대교 회당)에서는 십일조를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레위 지파의 제사장'이 거두도록 되어 있는 십일조를 제사장이 아닌 다른 지파 사람들이 받는 것은 하느님의 법을 어기는 짓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유대교에서도 현재의 상황이 구약 시대와 맞지 않아 십일조를 폐기한 마당에, 레위 지파는커녕 유대인도 아닌 개신교목사들이 구약 성경의 구절들을 근거로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랍비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별도의 직업을 따로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전업 랍비는 이스라엘군의 군종 랍비(military rabbinate)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그에 비해, 특히 한국의 개신교에는 목사가 다른 부업을 갖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그렇다고 이런 분위기가 십일조를 합리화할 수는 없다. 서로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애당초 목사는 교회에서 월급 받는다.

2.2. 천주교의 경우

천주교에는 십일조와 비슷한 것으로 교무금이란 것이 존재한다. 이는 교회법상 가톨릭 신자의 6가지 의무 중 하나(교회 유지비 부담의 의무)이며, 매년 일정 금액을 약속하여 납부한다.[6][7] 신자 재량에 따라 20분의 1, 30분의 1 정도만 내도 전혀 문제가 없으며[8] 실제로 교무금으로 얼마를 내든지 신자의 철저한 자유다.[9] 직접 사무실에서 현금으로 내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자동이체나 CMS출금 같은 방법도 많이 쓴다. 일단 각 본당에서 걷은 교무금은 전부 교구청으로 보내서 다시 각 본당에 나누어주고 교구청에서도 쓴다.

다만, 혼자 사는 어르신이라든가 생활보호 대상자, 학생(취준생, 공시생 포함) 등 교무금을 내기에 경제적 사정이 넉넉지 않은 경우, 본당신부와 면담을 하면 면제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의무사항이기 때문에 이걸 밀리게 되면 밀린 것의 일부든 전부든 일단 정산해야 하며, 서울대교구 같은 경우 교무금 정산을 하지 않으면 교적[10] 이동을 해주지 않는다고 한다. 밀리면 꼭 전부 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 일부라도 반드시 정산하자. 아니, 애초에 부담 없는 내에서 교무금을 설정하고 추후에 조금씩 올려가도록 하자. 처음부터 교무금이 너무 많으면 나중에 부담스러워지기 때문이다.

교무금 말고는 미사 성찬의 전례 전에 내는 기본적으로 내는 헌금(봉헌금)이 있고, 그 외에 2차 헌금이라고 부르는 특정한 목적[11]을 위한 별도의 헌금, 감사미사나 위령미사를 봉헌할 때 자발적으로 내는 미사예물[12] 정도만 있고 다른 것은 없다.

번외적으로 건축 등을 할 때 돈을 받기도 하지만, 이는 헌금이 아니라 건축 기금[13]이란 이름으로 받는다. 주로 우리 본당[14]을 건립하기 위한 자금으로 사용되며 돈을 낼 시 주보에 이름이 실리는 명단에 작게 실리게 된다. 본인이 원할 시 단체명이나 익명이 기입될 수 있다. "암만 건축기금이라 해도 이름이 실리면 결과적으로 돈 낸 사람을 우대해 주는 것이 아니냐"라는 식으로 천주교를 비판할 수 있겠으나, 헌금과 기금이란 의미의 근본부터 다르다. 이름을 등재하는 건 순전히 성당 자체적으로 감사를 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백만 원을 내든 달랑 몇천 원 정도만 내든 똑같이 이름이 실린다.[15] 그러므로 딱히 우대해주는 거라고 보긴 어렵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홍보하고 싶으면, 차라리 주보에 광고를 싣는 게 더 낫다.[16]

교무금, 헌금 등은 모두 종교 기부금으로 처리되므로 연말정산 때 기부금 공제를 받을 수 있다. 낼 사람은 내고 종교기관에 연말정산 영수증 발급해달라고 말하자. 이것은 개신교의 헌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신부님들에 의하면 돈을 내든 안 내든 성당 다닐 수 있고, 차별하지 않는다.고 한다. 천주교는 돈 걷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지 않다. 즉 돈에 집착해서 믿음을 망치지 말라고 하는 것이 공통된 입장이다.[17] 사실 애초에 천주교 자체가 강압적인 것이랑 거리가 먼 종교다.

2.3. 정교회의 경우

정교회는 애초에 역사상 한 번도 십일조를 의무화 혹은 법제화한 적이 없다.

정교회는 특별히 각 교인이 얼마를 교회에 바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정해 놓지 않지만 교회가 운영되어야 하고, 자선 사업과 선교 사업이 행해져야 하며, 또 성직자들과 사무직원들에게 최소한의 생활비를 지급해야 하므로 교인들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많이, 자진해서, 교회에 헌금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2.4. 이슬람교의 경우

이슬람교의 경우, 무슬림들이 지켜야 할 5가지 의무 중 '자카트(زَكَاة ; 희사 혹은 자선이라는 뜻)'라 하여 무슬림들은 ‎수입의 일부분[18]을 바쳐야 한다.

보통 이 돈은 와크프(وقف, 재단이란 뜻‎‎)로 들어가 새로운 성원을 짓거나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인다. 하지만 굳이 와크프에 내야 하는 건 아니고, 그냥 동네의 가난한 이웃들이나 여행객 등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베풀 수도 있다.[19] 간간이 이러한 자금들 중 일부가 테러 단체로 흘러드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이외로는 사다카(صدقة‎‎)라는 헌금도 있는데, 이는 모스크에서 아무 때나 낼 수 있는 일종의 기부금이다. 자카트와는 자유로 낸다는 점에서 다르다.

3. 대한민국 개신교에서의 십일조

개신교의 경우, 걷히는 헌금에 대해 지출하는 구제비는 3.8% 미만이기 때문에, 이들이 걷는 십일조는 사실상 성경에서 말하는 십일조라고 하기가 어렵다. 착각하기 쉬운 것이, 십일조로 받은 돈은 100% 구제에 사용되어야 한다. 이를 착복하고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성경에 분명히 나와있다.

이에 대한 변명으로 '제사장에 속하는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도 십일조를 주라고 했으니 목사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뭐가 나쁘냐는 주장이 있으나, 개신교 교리에 의하면 예수십자가에서 사망했을 때 성전의 휘장이 둘로 갈라졌는데 이것은 제사장을 거치지 않고 누구라도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증표라고 했으며, 개신교를 창시한 마르틴 루터가 제창한 '만민사제주의'에 의하면 목사는 제사장에 속하는 사제도 아니고 흔히 '평신도'라고 불리는 일반 교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애초부터 천주교에서 사제들이 갖던 배타적인 권한을 부정하면서 나온 것이 개신교였다.

개신교에서 구원을 특히 강조하는 경향에 대해 십일조를 이용하여 비꼬는 유머가 있다. 왜 구원을 주느냐고 하니까, 원래는 10원을 주려고 했지만 십일조로 1원을 떼가서 결국 잔액인 9원만 준다는 식의 블랙 코미디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11조 내고 9원 받는다는 개그도 있다. 십일조가 배를 불리기 위한 수단으로 만연하여 이곳저곳에서 폐단을 내보이는 행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가장 큰 문제는 2가지로 첫째로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을 크게 강조하여 마치 많이 내야만 믿음 있는 사람인 것으로 포장하는 것이다.(교회에서의 직위를 가진 사람에게 많은 헌금을 강요한다든든가, - 아래 반론 참고) 2번째로 목사와 그 처자식의 생계, 필요를 넘어서 과도하게 물질적인 를 안겨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목사에게 자동차가 필요하다고 할 때 단순히 이동수단으로서의 차를 넘어서 다른 이에게 과시하기 위해(특히 다른 교회에게) 고급차, 혹은 외제차를 준다든든가 말이다.

현재 이 정도 수준으로까지 물질에 집착하는 교회는 전 세계에 한국의 개신교를 제외하고는 진짜 얼마 없다. 사실 섬기는 이 따로 있다든가 가 섬기는

3.1. 십일조를 옹호하는 입장

1. 민수기 18장에 하나님이 최초의 대제사장인 아론에게 십일조에 관하여 계시하는 부분이 있다.

내가 이제 레위 후손에게 줄 것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거둔 십일조 전부이다. 이것은 만남의 장막에서 예배를 보좌한 보수로 주는 것이다.

민수기 18장 21절 (공동번역)

간단히 요약하자면, 레위 지파는 제사장 직분 때문에 가나안 정복 과정에서 토지를 분배 받지 못하였으므로 레위 지파에게 이스라엘의 나머지 11지파에서 10%씩 소득을 거둘 수 있는 권한을 준다는 내용으로, 달리 소득이 없는 성직자들의 생계비라는 의미이다.

현대에서도 달라질 것이 없는 것이, 성직자라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생활하는 게 아니며, 신자들에게 제공하는 용역 역시 공짜가 아니다. 천막 하나 치고, 또는 솔로몬 성전 하나만 관리하던 그 시절에 비하면 오히려 돈 쓸 일은 더 많아졌다. 신자들이 모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은 구휼보다 앞서는 교회의 목적이므로 허술하게 할 수도 없다.

2. 마가복음 12장에 보면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일화가 나온다.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겨우 렙톤 두 개를 넣었다. 이것은 동전 한 닢 값어치의 돈이었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넣었으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다."

마가복음 12장 42-44절 (공동번역)

부자가 많은 돈을 헌금한 것보다 가난한 과부가 적은 돈을 헌금한 것을 예수가 훨씬 높이 평가했는데, 이는 부자는 넉넉한 가운데 일부만 떼어내도 많은 돈이므로 그 정도의 돈은 아깝지 않지만,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바친 것이므로 비록 적다고 할지라도 부자의 헌금보다 더 많은 셈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비율로서 이해할 수 있으며, 이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 한국의 개신교이다. 즉 버는 돈에서의 비율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 하나님에게 많은 것을 바치게 되는 셈이므로, 최소한 십일조는 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3. 서양에서는 십일조가 폐지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교로서의 지위를 박탈하는 과정에서 국가 규모의 강제사항 또는 조세로서의 십일조가 폐지되어있다는 의미이며, 개인이 내는 (십일조를 포함한) 헌금은 자유 사항이다. 애초부터 당연한 소리이므로 우습다. 이 점은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흔히 십일조를 세금 걷듯이 걷어간다는 인식이 많지만, 교회가 개인의 소득 조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개인이 알아서 계산해서 가져오는 것이다. 물론 집사, 권사, 장로 등의 직책을 맡으려면 십일조의 납부 여부가 중요해지겠지만 애초에 이런 직책들은 교회에 헌신적이고 신앙이 투철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명예직이고 실익이 없기 때문에 십일조 가지고 상처 입을 정도의 사람이라면 탐낼 필요도 없는 타이틀이다.

십일조를 내는 신자는 전체의 30%가량으로 알려져 있는데, 십일조를 내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모든 소득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십일조에 별다른 반감을 보이지 않는다. 십일조 안 낸다고 교회에서 파문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내기 싫으면 안 내도 되고, 십일조 가지고 시끄러운 교회 있으면 교회를 옮겨버려도 그만이다. 돈 쓸 일이 많은 교회 입장에서야 강조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기본적으로 십일조는 신자 개인의 자유이며, 교회라는 공동체 내부의 문제이므로 교회 외부의 사람이 관여할 일도 아니다. 물론 교회 외부에서 교회의 문제점들에 대한 건전한 비판은 당연한 것이지만 십일조에 대해 극단적인 반감을 지닌 안티 기독교들이 비아냥대는 것처럼 신자들 돈을 강도처럼 뜯어간다는 식의 강요는 절대 아니란 것이다.

4. 복음서에서도 제자들을 보내면서 스스로 쓸 것을 가지지 말라 하면서 복음 받은 자들을 통해서 물질적인 필요를 채움받는 것을 말하였고(마태복음 10장 9~11절[20]) 바울도 배우는 자가 가르치는 자에게 주라고 하였으며(갈라디아서 6장 6절[21], 디모데전서 5장 18절[22], 고린도전서 9장 9절~15절[23]) 실제로 받기도 하였다.(빌립보서 4장 16절[24]) (다만 사람들에게서 금전적 이득을 취한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안 받기도 하였다. 고린도전서 9장 12절[25], 15절[26]

6. 예수가 십일조를 명령했다는 주장이 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

마태복음 23장 23절(공동번역)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믿음과 행동 모두를 챙겨야 한다는 대목이며 여기서 행동은 십일조로 표현된다. 모두 알다시피 마태복음은 신약서다.

7. 십일조의 원조는 멜기세덱에서 부터라는 주장이 있다

성경에는 예수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라고 되어 있다(시110:4, 히5:10). 그래서, 멜기세덱의 제사법을 따라서 최후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로 유월절을 알려 준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구약의 십일조는 엄밀하게 말하면 아브라함계 종교에 따른 육신적인 예수로 인해 폐지된 율법이며, 진정한 것은 멜기세덱의 반차에 따른 십일조라는 것이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레위 가문에 속하지 않았는데도 아브라함에게서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받았고 하느님의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다시 말할 것 없이 축복이란 것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해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7장 6절(공동번역)

즉,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짬이 높다. 아브라함이 레위 가문보다 짬이 높다. 고로 멜기세덱의 반차가 레위의 반차보다 높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레위 반차에 따른 십일조가 아니라, 레위보다 높고, 아브라함보다 높은 멜기세덱의 반차에 따라 십일조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게 예수 산하에 있었던 사람들이 군대도 아니고 짬차이로 '내가 오래 더 있었으니 내가 높고 너는 낮아!' 이것이 말이 되는가? 기본적으로 제자들은 모두 평등한 관계인 것이 아닌가?

3.2. 옹호하는 입장에 대한 반론

(위 주장과 비교했을 때 번호 순서가 맞지는 않으니 주의할 것.)

너희는 나를 속이면서도, '사람이 하느님을 속이다니요? 어떻게 하느님을 속이겠습니까?' 하는구나.

소출에서 열의 하나를 바친다고 하면서도, 그대로 바치지 않으니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냐?

이 천벌받을 것들아, 너희 백성은 모두 나를 속이고 있다. (공동번역)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개역개정)

말라기 3장 8-9절

현대 개신교 교회에서 목사들이 주로 하는 설교이다. 목사들이 교회에 십일조를 잘 내지 않는 성도가 많으면 주로 하는 설교인데,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며, 그것을 도둑질하는것은 저주받을 행위이므로, 십일조는 꼭 지켜야 하고 꼭 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저 구절은 일반 성도가 아닌, 목사에게 하는 소리이다.

보통 3장 8절과 9절만을 읽게 하는데, 앞뒤 문맥을 읽어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십일조로 받은 헌물을 제사장(현대의 목사)들이 사사로이 사용한 것. 십일조는 100% 과부와 고아, 거지와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한 돈이다. 즉, 목사가 십일조를 받았으면 한치의 흠도 없이 그 십일조의 모든 돈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고아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목사들 중, 소수의 개혁파 목사들(무교회, 무보수 목사)을 제외하면, 모두가 저 구절에 걸린다. 기독교인들, 특히 목회자에게 성경은 양날의 검이며, 남을 베려다 자신이 베일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다니,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실, 이 단락만으로도, 국내의 십일조 변명은 한번에 정리가 된다.

만약, 십일조를 받았다면 모든 목사들은 그 십일조를 한푼도 사사로이 사용해서는 안 되며, 십일조를 모두 기부하거나, 모두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데 사용하여야 한다. 단 한푼도 이 외의 용도에 벗어나는것은 하나님이 명시한 저주받을 행위이다.

1. 위의 비판에도 잘 드러난다. 일단 구약 시대 레위 지파 제사장들과 현 개신교 목사들은 동일 위치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목사는 제사장은커녕 성직자조차 아니다. 그냥 평신도일 뿐. 이는 개신교의 근본정신인 만인사제주의를 무시하는 결과이기도 하다.

목사의 생계를 내세워 십일조를 합리화하는 것도 병크다. 목사라는 직업 자체는 일종의 자원봉사로서 목회 활동 자체는 수익구조가 불분명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십일조 이외에 매주마다 걷는 헌금은 정작 따로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교단의 지원도 받는다. 또 목사 개인의 강연활동 등으로 투잡을 뛸 수도 있으며, 현대에서는 맞벌이가 일반적이기에 배우자나 직장이 있는 자녀 등 외적인 수입원이 있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렇기에 십일조로 생계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은 더더욱 설득력을 잃는다. 유대교 항목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랍비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자기 직업을 따로 가지고 그걸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사도 바울 또한 텐트를 만들어 파는 텐트장인이었다.

아예 종교인로서 무소유의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사례도 분명 있다. 애초에 한국의 개신교에서 교회의 빈곤이란 개척교회 시스템에서 비롯된 성장단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2. 흔히 들을 수 있는 변명 중에 하나가 건축자금이다. '신자들이 모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은 구휼보다 앞서는 교회의 목적이므로 허술하게 할 수도 없다.'고 하는 주장인데, 이는 예수의 가르침과 전혀 반대에 있는 주장이다. 예수는 그 호화로운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라고 선언했으며 통곡의 벽 빼고 그대로 되었다. 오늘날의 교회 건물도 여기 해당이 안 된다고 할 수 없다.

또한 그 전에는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27]을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28][29] 라는 구절, "너희 중 가장 낮은 자 하나에게 해 주는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는 것이다."라는 구절도 있으며, 최후의 심판 시에 일생 동안 '옥에 갇히고, 굶주리고 목 마르고 나그네 된 주변의 헐벗고 가난한 이웃들'을 돕지 않은 것이 예수 자신을 돕지 않은 것이라고 하며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들을 돕지 않은 이들을 악인으로 분류하여 지옥에 떨어뜨리기도 한다. 자기 주변의 가난하고 헐벗은 예수들을 구제하는 것보다 교회 건물 마련하는 것이 앞서는 목적이라고 생각하나 보다.

십일조에 대한 비판은 '청빈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종교가 돈을 요구하고, 그 돈을 구제나 사회정의 구현 등에 쓰는 대신 목사의 사업자금 내지는 비자금으로 쓰이는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다. 애초에 십일조가 정말로 목사 생계 유지를 위해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돈이고 목사가 그 돈을 최소한 구제하는 데라도 잘 썼다면 십일조 비판이 나오기나 했을까?

3. 대부분의 교회에서 권사, 장로의 직분을 줄 때 정기적인 십일조의 여부를 확인한다. 가장 개혁적이라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총회장을 하던 목사가 담임목사로 있는 교회의 경우에도, 권사 임직시 200만원, 장로 임직시 1,000만원의 헌금을 여러 구실로 낼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일부 이단 드립을 치겠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독일같은 나라에서는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 정부에서 교회세를 떼어가서 종교예산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 차라리 독일처럼 정부에서 관여하여 교회세를 떼어가면 모를까, 한국의 개신교목사들은 분류상 '개인 사업자'로 분류되면서도 단 1원의 세금도 내지 않는다.

또한 주마다 주보에 감사헌금 및 십일조를 납부한 사람들의 실명 명단을 공개하는 교회가 대부분인데다, 그것이 일정 액수, 이를테면 10만원 이상이면 따로 명단을 올리기도 하는 교회가 상당수이기에, 개인의 자유로 내는 것이라는 말도 사실상 궁색하기 이를 데 없어진다. 위의 상단 짤방을 다시 보자.

4. 십일조라는 것은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과 같은 맥락인 구약 율법의 일부이다. 예수가 와서 구약 율법을 일일히 지키지 않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하였음에도 같은 구약 율법인 십일조는 지키도록 남겨두고 있다는 점에는 모순이 있다. 또 십일조로 마련된 금액은 성경대로 '고아와 과부'를 위해서 써야 하는데, 십일조를 포함해서 교회 내 헌금의 8할 이상은 목회자 월급과 성전건축에 들어가는데 이에 반해 구제비는 3.9% 미만이라는 통계자료가 존재한다.[30] 또, 십일조 자체가 강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에서 십일조 납부를 장려하는 주보의 문구나 목사의 설교를 대부분의 교회라면 흔히 접할 수 있다. 또 십일조를 착실히 작정하였다는 록펠러를 앞에 내세워 십일조를 권유하기도 한다.즉 십일조를 강제하지 않지만 이를 강요하는 분위기가 산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안 내면 그만'이라는 옹호론의 가장 큰 문제는 만약 십일조가 '안 낼 수 없고, 내도록 강요하는 것'이라면 응당한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할 문제가 된다는 점이다. 물론 교회가 십일조를 강도처럼 뜯어가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목사 이하 교직자들은 죄다 쇠고랑 찼을 테니까. 그나마 강탈해 가지는 않으니 이런 원론적인 수준에서 비판하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끼리 우리 맘대로 하는데 무슨 참견이냐? 라는 주장은 십일조 작정에 대한 본 문제를 회피하는 것으로, 십일조 옹호론에 대한 근거로서 적절치 않다.

5. 또 복음서사도행전 등등에서 12사도들이나 바울이 '물질적 도움'을 받은 것을 들고 나오는데 그러한 사례금을 어디까지나 '사례금'의 명목으로 받은 것이지, '십일조'라는 이름으로 받아 주머니에 넣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제자들이 받은 사례는 어디까지나 기본적이고 최소한적인 의식주를 해결할 정도 조금 더 되는 금액이었지, 매달 부를 축적할 정도의 받은 것은 아니었다.

6. 가난한 과부 이야기는 오히려 '십일조를 착실하게 내라'보다는 '종교인들아, 가난한 사람들 등쳐먹지 마라'라는 의미에 더 가까운 일화이다. 우선 이 일화 전에 예수 그리스도는 바리사이, 율법학자들과 논쟁을 한다. 특히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디스하면서 했던 다음 말들을 천천히 읽어보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받을 것이다. 너희는 과부들의 가산을 몽땅 삼켜버리는가 하면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를 길게 늘어놓는다. 이때문에 너희는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23장 14절 (공동번역성서)[31]

"또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오래 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만큼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 12장 40절 (공동번역성서)

"그리고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도 기도만은 남에게 보이려고 오래 한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그만큼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루카 복음서 20장 47절 (공동번역성서)

그리스도는 부패한 종교인들이 가난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다고 직설적으로 비판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다음 장면에서 한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닢을 헌금함에 넣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겨우 렙톤 두 개를 넣었다. 이것은 동전 한 닢 값어치의 돈이었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넣었으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다."

마가복음 12장 42-44절 (공동번역)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넣었다.

저 사람들은 모두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예물로 바쳤지만 이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가진 것을 전부 바친 것이다."

루가 복음서 21장 3~4절 (공동번역성서)

즉 여기서 그리스도는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먹어라 이 나쁜 놈들아"라고 말하는 어조에 더 가깝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조금 전까지 "가난한 과부의 재산을 등쳐먹는 놈들"이라고 부패한 종교권력을 욕하다가, 잠시 후 진짜로 가난한 과부가 헌금을 냈다. 당연히 이것은 과부에 대한 칭찬보다는, 부패한 종교권력에 대한 비판에 훨씬 가깝다. 즉 먹사들이 성경의 이 일화를 언급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십일조는 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리고 그 직후 십일조로 만든 성전을 나가면서 예수는 과부를 등쳐먹으면서 만든 성전에 저주를 퍼붓는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하였다. “스승님, 보십시오. 얼마나 대단한 돌들이고 얼마나 장엄한 건물들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또,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나중에 더 크게 주신다는 신학적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교단 내부에서 통하는 내용이므로 십일조 옹호론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다수에게 기독교 교리를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그 설득력이 매우 낮다.

3.3. 십일조에 대한 바람직한 인식

여러분이 전에는 잘못을 저질렀고,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으로서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었으나, 이제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주시고 우리의 잘못을 모두 용서해 주셨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달갑지 않은 조항이 들어 있는 우리의 빚문서를 무효화하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권세와 세력의 천신들을 사로잡아 그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구경거리로 삼아 끌고 개선의 행진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문제나 명절 지키는 일이나 초생달 축제와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로 아무에게도 비난을 사지 마십시오.

이런 것은 장차 올 것의 상징에 지나지 않고 그 본체는 그리스도입니다. (공동번역)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개역개정)

골로새서 2장 13-17절

율법 완성의 관점에도 치명적인 결점이 있는데 예수의 이 일화는 십자가에 대속하기 전의 일이고, 십일조나 제사와 같은 각종 율법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대속하게 됨으로써 모두 새롭게 완성되었기 때문이다.[32] 다만 어쨌든, 이러한 구약에서의 십일조는 신약으로써 리모델링된 셈이므로, 반드시 십분의 일을 바쳐야 한다는 근거는 이제 더는 없는 셈이다.

예수의 죽음과 함께 유대인들에게 속했던 모든 절기법과 사회법과 종교법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장사되었다는 것은 기독교인이라면 충분히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가 스스로의 죽음을 통해 구약의 내용을 신약으로 새로이 완성했으며, 여기에는 십일조 또한 포함된다. 즉 십일조는 유대교에서 끝이 났다. 기독교는 십일조와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구약의 십일조를 의무화한다고 하면 다른 제사법 또한 동일한 이유로 지켜야만 하는 셈이다. 성경/구약 교리 요약의 규칙을 보면 이거 다 지켰다면 인생 살기 피곤한 수준을 넘어서서 사실상 사회생활이 안 되겠구나 싶은 규약들이 차고 넘친다. 이슬람의 할랄 푸드보다 더 제약이 많은 것이 구약의 율법이고, 이걸 실제로 지키고 있는 하레디 같은 유대교 극단주의자들은 안식일인 토요일[33]에는 전등불도 자기 손으로 안 켜고, 전 세계 어디에 가든지 자기들의 율법에 맞는 음식만을 직접 싸들고 다니면서 먹는다. 기름이나 피는 절대로 먹지 못 한다는 규율을 오히려 확대해서 지키는 것이, 수혈을 거부하고 죽어가는 여호와의 증인들이다. 규율에 따르면 합성섬유로 만든 옷을 입지 못하기 때문에 입을 옷이 거의 사라지고, 먹는 것도 엄청난 제약이 따르고, 움직이는 것도 제약이 따르고, 온갖 제사와 규율과 금기들이 당신을 기다린다.

다른 제사법에 관해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대속했으므로 지킬 필요가 없다.' 라는 교리를 통해 절대 지키지 않음에도, 같은 등급의 내용인 십일조에 관해서는 '성경에 나오므로 반드시 지켜야 한다'면 정말 이보다도 완벽한 아전인수는 없는 셈이다. 현대의 소피스트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십일조와 비슷한 형태의 교회세(예를 들어 1/10 교구세 등)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던 중세 유럽 등의 교회는 현대 세속국가에서 종교가 담당하는 역할과는 차원이 다른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도 감안해야 한다. 예를 들어, 중세 유럽에서 교회(기독교회)는 관혼상제와 호적관리등의 민사적 영역에서 교육과 학술연구, 복지, 지역공동체의 도덕적 규범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군사력과 형사재판(이건 대체로 영주의 권리니까)을 제외한 정부의 역할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중세 초기 프랑크 왕국같은 경우 당대에 거의 유일한 전국적 조직망이던 교구 조직이 기사계급의 조악한 행정조직을 대신하여 실질적으로 국가를 규합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정도. 중세 서유럽보다 훨씬 건실한 행정조직을 갖추고 있던 비잔티움 제국에서도 교회의 재원으로 세워진 병원들이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이던 비잔티움의 의학기술을 견인했고, 이런 병원들의 경우 사실상 무상으로 운영되면서도 환자들에게 비교적 양질의 식사를 공급했다고 할 정도로 충실한 복지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고대 히브리 사회같은 경우도 유목민 사회에서 문화와 지식을 간직하고 전수하고 행정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사제계급의 일임을 생각하면 역시 아주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을 것임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십일조는 그 비율만으로 따져도 명백한 일종의 세금이고, 세금을 거둬가는 조직은 당연히 그에 걸맞는 사회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의 기독교회는? 위와 같은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지 않고, 담당할 수 없으며, 정교분리의 원칙상 담당해서도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세금이나 다름없는 십일조를 요구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일까?

현재 한국의 개신교에서 걷는 십일조는 성경에서 말하는 십일조가 아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실현' 또는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충성하는 사람을 확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유지비를 위해, 그리고 교회와 담임목사에 충성하는 사람들을 확인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존재하는 셈이다.

현재 교회에서 십일조의 명분으로 헌금을 걷는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신자들로부터 매달 수입의 10분의 1을 징수 받기에 가장 편리한 구실이자 그럴듯한 명칭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이비가 아닌 대부분의 기성 교단들도 십일조를 강권한다는 것이 문제다. 십일조를 내라고 강요할 수는 당연히 없고,너무 속 보이니까 따라서 십일조를 내면 더 크게 돌려 받는다거나[34], 복을 받는다는 식의 기복 신앙으로 꼬드기는 경우가 대다수다. 예수론(loan)

결론적으로, 교회 재정에 보태기 위한 돈을 걷을 거라면 그 헌금은 십일조라는 이름으로 걷으면 안 되고 따로 솔직하게 교무금이나 기부금이라는 이름으로 걷어야 할 것이다. 만약, 위에서 살펴본대로 근거는 너무 빈약하지만, '그래도 구약의 구절에 근거해서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헌금을 계속 걷는 게 맞다'고 생각되어 십일조라는 이름으로 돈을 걷을 거라면 현재의 3.8% 미만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100% 이웃들을 위한 구제비로 지출해야 옳을 것이다.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늑대와 양피지 - 정교가 부과한 십일조에 대해, 윈필 왕국이 반발을 일으켰고 이에 교황이 윈필 왕국의 성직자들에게 성무 정지를 지시내리며 갈등이 커진 상황이 작중 배경이다. 15세기 경 유럽의 상황을 모티브로 삼았다.
  • 문명 5 - 신도 4명마다 금이 1 늘어나는 교리로 등장한다.
  • Warhammer(구판) - 브레토니아에서는 이게 역전되어서 농노는 수확물의 10분의 1만 가지고 10분의 9를 귀족에게 바쳐야 하는 막장 세율로 등장한다. 브레토니아의 별명이 헬레통이 된 이유 중 하나.
  • Warhammer 40,000 - 인류제국은 각 행성마다 세금으로 인력이나 물자를 바칠 것을 요구하는데, 이를 제국 십일조(Imperial Tithe)라 한다. 제국 방어를 위해 각 행성 병력(PDF)의 일정 비율(대체로 10분의 1)을 의무적으로 임페리얼 가드로 징집하는것이 대표적이며, 이 외에도 행성의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납부해야 할 것의 종류나 비율은 달라질 수 있다.
  • TCG 매직 더 개더링에서도 Tithe란 이름의 카드로 등장했으며, 그 이외에도 여러 카드의 이름에 들어갔다.(Mana Tithe, 십일조의 대천사) 이 카드들의 공통점은 전부 정의와 신성을 상징하는 백색이라는 것인데, 실제로 나온 카드들의 성능이 하나같이 깨알같으면서도 강력한 어드밴티지 효과를 지니고 있다. 워낙 사용하는 맛이 찰진지라 이 카드들을 쓰는 것만으로도 먹사들이 십일조를 빨아먹는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


  1. [1] 영어 고어로 10분의 1(tenth)의 뜻으로 쓰였으나, 현재는 종교적 의미로만 쓰인다.
  2. [2] 미국처럼 월급보다는 주급 생활자들이 많은 곳에서는 매주 걷기도 한다.
  3. [3] 농경 사회에서의 "수익"은 달마다 있는 게 아니라 1년에 1번, 추수할 때 얻어진다.
  4. [4] 제정일치 시대의 세금 개념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구약성경을 보면 당시의 제사장들은 정치 지도자를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모세를 봐도 종교 지도자이지만 또한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으로 이동시키는 정치 지도자 역할도 하고 있다. 또한 사울이나 다윗의 경우 기름 부음을 받음으로써 종교적인 권위도 함께 가지게 된다. 이때 레위 지파 사람들은 아예 신전 관련 업무가 아닌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5. [5] 단, 독일의 경우 종교세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세속법에서 보장한다. 이름만 세금이지 납부는 자율이다.
  6. [6] 가톨릭 교회법 222조: (1)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교회가 하느님 경배, 사도직과 애덕의 사업 및 교역자들의 합당한 생활비에 필요한 것을 구비하도록 교회의 필요를 지원할 의무가 있다. (2)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사회 정의를 증진시키고 또한 주님의 계명을 명심하여 자기의 수입에서 가난한 이들을 도와줄 의무도 있다.
  7. [7] 교무금은 어려운 시절을 거쳐왔던 한국 천주교의 전통이고, 해외의 경우 교무금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경우 헌금이나 나라에서 걷어주는 교회세로 성당의 유지비를 충당한다.
  8. [8] 이 정도면 사실상 몇만 원밖에 안되는 수준
  9. [9] 일반적으로 30분의 1을 권장하지만, 그 이하로 책정하는 신자도 많다.
  10. [10] 신자 명부를 호적에 비유하여 교적이라고 한다.
  11. [11] 군인주간에는 군종교구로 보내는 것, 자선 주간에는 자선 단체에 기부하는 것 등.
  12. [12] 관습적이고 암묵적으로 정해진 최소한의 액수가 있긴 하지만, 어긴다고 경찰이 출동하거나 쇠고랑을 차지는 않는다. 손님 신부님이 오시면 손님 신부님 용돈 드린다고(...) 일부러 감사미사 넣어서 미사예물을 내는 분들도 있다. 물론 내든지 안 내든지 아무 상관없다. 비슷하게, 봉사활동으로 잘 알려진 이태석 세례자 요한 신부는 수단 현지 봉사를 위해 암 말기 상태에서 본당들을 돌면서 모금을 하기도 했다.
  13. [13] '건축 헌금'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14. [14] 가끔은 다른 본당 건물
  15. [15] 이론상 몇백 원 내도 실릴 수 있지만(...)
  16. [16] 일부 본당에서는 해당 본당에 소속된 천주교 교우들이 운영하는 사업체(서점, 개인병원, 미용원 등)의 토막 광고를 싣기도 한다.
  17. [17] 사실 예수께서 가장 혐오한 인간들이 바로 종교를 이용해 돈을 뜯는 부패한 성직자들 이었다.
  18. [18] 샤리아법에 따르면 1/40이 이상적이지만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더 내도 되고,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다면 내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19. [19] 그래서 가끔 중동지방을 여행하다가 대박을 맞는 배낭여행자들도 존재한다(...)
  20. [20]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21. [21]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과 좋은 것을 모두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22. [22] 사실 성경도 "타작 일을 하는 소에게 부리망을 씌워서는 안 된다.", 또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말한다.
  23. [23] 사실 모세의 율법에, "타작 일을 하는 소에게 부리망을 씌워서는 안 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소에게 마음을 쓰시는 것입니까? 어쨌든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물론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기록된 것입니다. 밭을 가는 이는 마땅히 희망을 가지고 밭을 갈고, 타작하는 이는 제 몫을 받으리라는 희망으로 그 일을 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영적인 씨를 뿌렸다면, 여러분에게서 물질적인 것을 거둔다고 해서 그것이 지나친 일이겠습니까? 다른 이들이 여러분에게 그러한 권리를 갖는다면 우리야 더욱 그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에 어떠한 지장도 주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고 있습니다. 성전에 봉직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양식을 얻고, 제단 일을 맡은 이들은 제단 제물을 나누어 가진다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복음으로 생활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권리를 하나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또 나에게 그렇게 해 달라고 이런 말을 쓴 것도 아닙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습니다. 아무도 나의 자랑거리를 헛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24. [24] 내가 테살로니카에 있을 때에도 여러분은 두어 번 필요한 것을 보내 주었습니다.
  25. [25] 다른 이들이 여러분에게 그러한 권리를 갖는다면 우리야 더욱 그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에 어떠한 지장도 주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고 있습니다.
  26. [26] 그러나 나는 그러한 권리를 하나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또 나에게 그렇게 해 달라고 이런 말을 쓴 것도 아닙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습니다. 아무도 나의 자랑거리를 헛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27. [27] 오역이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낙타가 아니라 밧줄이라고 주장한다.
  28. [28] 누가복음 18장 25절
  29. [29] 여기서 부자라 함은 베풀지 아니하고 남의 것을 빼앗아 재산을 불린 자를 말한다.
  30. [30] 교회 내부의 재정을 공개한 교회에 한해 교회 내부 단체인 '사랑 크리스찬 연대'에서 조사한 통계치.
  31. [31] 참고로 몇몇 버전에서는 없는 구절이다
  32. [32] 다만 주의할 점은, 구약의 율법들의 의미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더욱 새로운 형태로서 완성된 것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새로운 약속이라는 뜻에서 신약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다.
  33. [33] 정확히는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 직전까지
  34. [34] 당장 본 위키의 옹호하는 사람들의 입장 항목에 토시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쓰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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