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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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각총리대신 (헤이세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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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安倍 晋三(あべ しんぞう)

생년월일

1954년 9월 21일 (63세)

출생지

일본 도쿄신주쿠[1]

본적지

야마구치나가토[2]

학력

세이케이대학 법학부 정치학과 졸업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정치학 중퇴

의원 선수

9 (중)

지역구

야마구치 4구[3]

정당

자유민주당(세이와정책연구회)

신장

175cm

아내

아베 아키에

가족[4]

사토 노부히로(현조부)
사토 노부히코(고조부)
사토 슈스케(증조부)
아베 신타로(증조큰아버지)
아베 간(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외할아버지)
사토 에이사쿠(대숙부)
아베 신타로(아버지)
아베 히로노부(형)
기시 노부오(남동생)[5]

SNS 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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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제 90대 총리

임기

2006년 9월 26일 ~ 2007년 9월 26일

일본의 제 96대 총리

임기

2012년 12월 26일 ~ 2014년 12월 24일

일본의 제 97대 총리

임기

2014년 12월 24일 ~ 2017년 11월 1일

일본의 제 98대 총리

임기

2017년 11월 1일 ~

1. 개요
2. 성장기
3. 정계 입문
4. 1차 내각
5. 총리직 사임 뒤 재기
6. 2, 3, 4차 연속 내각
6.1. 2012년: 재집권
6.2. 2013년: 참의원 선거 승리와 도쿄 올림픽 유치 성공
6.3. 2014년: 3차 내각 성립
6.4. 2015년: 아베 담화
6.5. 2016년: 리우 폐막식 등장
6.6. 2017년: 4차 내각 성립과 장기 집권 확정
6.7. 2018년
7. 경제 정책: 아베노믹스
8. 외교 정책
9. 저서
10. 트리비아
10.1. 역대급 수준의 장기 집권과 선거 연승

1. 개요

일본의 제 90, 96, 97, 98대 내각총리대신. 전후 세대 출신의 첫 번째 총리이자 전후 최연소[6] 총리이며, 동시에 사실상 가장 유력한 역대 최장수 일본 총리이다.[7]

2006년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뒤를 이어 첫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제 1차 아베 내각). 그러나 정치적으로 상당히 미숙한 모습을 보이며 권위가 실추된데다 건강 상의 문제가 겹쳐, 단 1년 만에 사퇴하면서 단명 총리로 남았다.[8]

하지만 이후 일본 자민당 출신 총리들도 1년 이하의 임기로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에서 일본 민주당에 정권을 내주었으며, 민주당 총리들 역시 단명 내각을 이끌며 3년 만에 지지율이 급전직하 하였다. 결국 2012년 12월 제46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에서의 승리로 정권 교체에 성공, 총리에 복귀하며 정치 재기에 성공한다(제 2차 아베 내각). 2년 뒤인 제47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에서도 압도적 다수 의석을 그대로 유지하였다(제 3차 아베 내각).

정치 측면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임기 종료 이후 약 7년간 회전문 총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불안정했던 일본 내각을 탄탄한 지지율을 기반으로 안정시킨 인물.[9][10] 경제 측면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아베노믹스라는 이름의 강력한 양적 완화를 실시해 일본의 경제를 회복시키는데 성공하였다.질리도록 오래 해먹는데엔 다 이유가..

외교 측면에서 아베는 미국, 영국, 호주서방 국가들에게, 러시아, 중국, 북한을 위시한 반서방 세력 견제의 매우 중요한 조력자로 인식되고 있다. 아베노믹스아베독트린이 국제 사회에서 별 잡음없이 통과된 데에는 이같은 인식이 깔려있다고 보면 된다. 반면 한국중국에서는 아베 신조의 그릇된 역사관을 이유로 들어 양국 관계 악화의 원인으로 지목해 비판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2013년에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기도 하였다.[11] 이후에도 계속 공물 봉납을 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며 주변국의 반발을 부르고 있다.[12][13] 실제로 일본 최대 극우 단체인 일본회의의 회원이다.

또한 국방 및 군사 측면에서는, 일본의 재무장 및 군비 증강을 추진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신 냉전 구도의 당사자인 중국은 당연히 이를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을 악화시키는 행동이라며 비판하고 있으며 한국 ‘국민’들도 이를 군국주의라 비판하는 중이다. 그러나, 일본이 다수 국가들의 반대와 재정악화에도 불구하고 과도하게 군비를 증강하고 있기는커녕, G7 선진국들의 강력한 ‘요구’에 응하여[14]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군국주의라 주장하는 것은 아전인수 격 해석이 될 수 있다. 더욱이 일본의 경기가 나아져 매년 늘어난 GDP와 세수액 및 예산을 비교해본다면, 비록 매년 증가하고는 있으나 여전히 1%대 군사비를 지출하는 일본은 오히려 한국(GDP/2.6%)이나 중국(GDP/2.0%(대외발표용))과 비교하였을 때 양호한 수치를 유지하고 있다 할 수 있다.

2. 성장기

아베 신조는 1954년 아베 신타로와 기시 요코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 집안이 무척 화려한 정계 집안인데, 외할아버지는 자민당 체제를 확립한 기시 노부스케 총리, 외종조부는 기시의 친동생이자 비핵 3원칙으로 유명한 사토 에이사쿠다. 할아버지인 아베 간 역시 중의원을 지냈고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는 외무장관을 지낸 후 유력한 총리 후보로 거론됐을 정도. 다만 친가와 외가 모두 유력 정치가문이지만 그 행보에 차이를 보이는 점은 흥미롭다.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가 1930~1940년대 만주국에서 요직을 지내며 일본 군국주의의 최전선에 있었다면 할아버지 아베 간은 '전쟁 반대'를 내걸고 도조 히데키가 이끄는 대정익찬회에 맞서 무소속으로 선거에 나설 만큼 군국주의에 비판적이었기 때문.

위의 내용에 관련한 내용을 첨부하자면 2014년 3월 15일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에선 안중근 의사와 관련한 일본의 불법 재판 사건과 관련해[15] 현 아베 정부의 특성과 방향, 아베의 출신 가문, 사상적 배경을 추적했다. 이 방송에서 방영된 바에 따르면 아베의 외고조부는 일본 정한론을 주장한 요시다 쇼인의 밑에서 사상적 영향을 받은 오시다 요시마사로, 이 자는 청일전쟁 이전 경복궁을 기습하여 점거한 전적이 있는 일본 육군 대장 출신이다.[16] 외조부는 위에서도 언급한 대로 기시 노부스케로 일본의 군국주의를 주도했으며 전후 총리대신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도 요시다 쇼인을 가장 존경한다고 말하고[17] (이토 히로부미에게 '조슈 번 번영을 위한 일본 황권 내란 수모자'라고 비난주며, 조선계 러시아인 최재형과의 히로부미 암살 공모를 꾸몄다는)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 말한 관방장관의 언행을 두둔하기도 했다. 참조.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계열학교까지 입시를 치르지 않고 자동으로 입학하는 체계(일관교육)를 가진 사립학교인 세이케이(成蹊) 초등학교해 입학, 세이케이 중학교, 세이케이 고등학교를 거쳐서 세이케이대학[18]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에 미국에 건너가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정치학과를 다녔지만 1979년에 중퇴했다.[19] 외조부와 부친이 도쿄대 법대 출신이었던터라 아베 자신도 집안 안팎에서 도쿄대 진학을 압박 받았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기사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유학경력에 대한 허위의혹이 존재한다. 1998년의 아베신조 홈페이지 경력란에는 서던캘리포니아대학 정치학과에 2년간 유학했다고 기재되어 있었으나 2016년 시점에서는 삭제된 상태였다. 2004년 '주간 포스트(週刊ポスト)'의 보도에 의하면 아베는 서던캘리포니아대학의 정치학과에 재적한 적이 없고, 이수한 코스 절반이 외국인을 위한 영어코스였으며, 실제로는 유학기간이 1년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기사

대학교에서 아베노 무네토(헤이안 시대 선조), 모리 모토나리처럼 양궁을 배웠다고 한다. 후지TV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양궁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1960년대에 찍은 걸로 추정되는 어릴적 사진

1972년, 고등학교 졸업사진 황광희? 류승룡?

3. 정계 입문

미국 유학 뒤 고베 제강이란 회사에서 일하다가 1982년 아버지 아베 신타로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1987년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20]의 주선으로 모리나가(森永) 제과(일본 최초 제과 주식회사) 마쓰자키 아키오(松崎昭雄) 회장의 딸인 마쓰자키 아키에[21]와 결혼하였다.

아버지 아베 신타로는 유력한 총리 후보였으나 암 선고를 받고 1991년 사망했다. 아베 신조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1993년 아버지의 지역구인 야마구치현 제1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하며 국회에 입성했다.

모리 요시로 총리 시절에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추천으로 관방장관에 임명되었고 고이즈미가 총리로 취임한 뒤에도 유임했다. 참고로 관방장관은 총리 비서실장 겸 내각 대변인으로 총리 집무실 바로 옆방에 사무실이 있으며, 총리를 보좌해서 내각의 조정업무를 담당한다. 대변인으로 언론에도 매일 나오기 때문에 유권자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알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보통 정치세력의 차세대 에이스들이 관방장관으로 경험을 쌓은 뒤에 총리가 되는 경우가 많다.

자민당에서 북한에 대한 강경파로 주목을 받았고 북한에게 무력 사용과 경제제재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해 인기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그 인기 덕인지 2003년 자민당의 간사장을 맡았다. 3선 밖에[22] 안 되는 젊은 정치인인 그에게 간사장직을 맡김은 2003년 11월 중의원 선거의 승리를 위해서였는데, 실제로 11월 총선에서 자민당은 과반 이상을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간사장으로서 아베 신조는 당내 개혁 조치를 폈지만 2004년 참의원 선거에서 목표치 51석에 못 미치는 49석을 확보하자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 그러나 후임 간사장의 요청으로 간사장의 밑인 간사장 대리를 맡는다. 어쨌든 간사장 대리로서 아베 신조는 우정개혁으로 촉발된 2005년 중의원 선거에서 반고이즈미파 낙선을 위한 소위 "고이즈미의 자객"으로 불린 미녀 후보들을 공천하는데 역할을 했고 큰 성공을 거뒀다.

4. 1차 내각

제90대 총리 취임 공식 사진

이런 활약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후임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고이즈미가 직접 아베를 후계자로 지명하여, 아베가 총재 경선에 뛰어들 수 있게 해줬다. 2006년 자민당 총재선거에 출마해 경쟁후보인 덕후 아소 다로와 다니가키 사다카즈 재무상을 물리치고 자민당 21대 총재에 당선됐다. 다수당 대표가 총리를 맡는 일본의 관례에 따라 제 90대 일본 총리에 올랐다. 전후세대 첫 총리, (전후) 최연소 총리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총리 취임후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경색한 한일관계, 중일관계 회복을 위해 2006년 10월 8일 중국후진타오 국가 주석과, 10월 9일에는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아베 1차 내각 시절의 아베 신조는 친한파 정치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의 180도 다른 인물. 우익 색을 드러내지도 않고, 한국국립현충원에 일본 총리 사상 최초로 참배하며, 일본의 과거사 문제와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과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해결하겠다, 제2차 세계대전에 자의에 상관없이 끌려간 사람들에 대한 위로가 필요하다고 하는 등 2018년의 아베 모습에 비추어보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아베가 지금처럼 우익적인 성향이 강해진 건 2010년 이후로 알려져 있는데, 일각에서는 한국에 저자세로 일관하던 일본에게 이명박 정부가 천황 사죄 발언 및 A380 독도 시범비행 등 일본에 상당히 공세적인 외교 스탠스[23]가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분석을 내놓았으나, 진실은 본인만이 알 길... 이에 대해서는 한일관계 항목의 일본의 입장 항목을 참조.

그러나 아베 총리의 재임은 내각의 각종 스캔들로 얼룩졌다. 사다 겐이치로 행정개혁상이 사무실 재정운영 문제가 불거져 사임했고 마쓰오카 도시카쓰 농림수산상이 각종 비리 의혹으로 자살했으며 규마 후미오 방위상은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는 어쩔 수 없었던 일[24]이라는 일본인에게 매우 민감한 발언으로 결국 주의 처분을 받고 사임했다. 후임 방위상은 고이즈미 총리가 2006년 자객후보로 공천한 고이케 유리코가 선임되었다.

이런 악재 가운데 열린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36석을 확보하는 데 그친 1989년 참의원 선거 이후 사상 최악의 성과를 거두며 연립여당인 공명당과 더해도 과반의석을 못 얻은 역사적 참패를 겪었다. 자민당이 83석, 연립여당인 공명당이 20석으로 모으면 103석, 여당계 무소속 2석을 더해 105석인데 민주당이 단독으로 확보한 의석 109석에도 못 미쳤다. 거기에 일본 공산당과 사민당이 7석, 5석을 확보했고 국민 신당과 신당 일본이 4석, 1석을 확보하고 야당계 무소속까지 모으면 139석이어서 자민당의 입장에서는 기록적 참패였다. 아베 총리는 내각을 계속 유지할 것임을 시사했지만 새로운 아베 내각에 국민들은 실망감을 드러냈다.

이렇게 되자 아베 총리는 2007년 9월 10일부터 열리는 국회에서 테러 특별조치법을 연장시키지 못하면 내각이 총사퇴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그러나 불과 며칠 뒤인 9월 12일 총리 사퇴를 선언해 무책임하다는 비판만 받았다. 사임의 이유로는 아베 총리가 일본 민주당 오자와 이치로 대표와 협상을 가지고 테러 특별조치법 연장을 위해 노력했으나 오자와 대표가 이를 거부해 사퇴를 결심했다고. 물론 건강이 안 좋아진 것도 원인이지만 자민당 안에서 아베 총리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계파간 밀실 합의로 밀려났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퇴임 뒤 수상 관저에서 나와 바로 병원으로 향했는데 이를 두고 영국 BBC는 '수상 관저에서 체크아웃해서 병원에서 체크인했다' 라고 비아냥댔다(...).

그러나 추후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정말로 건강이 안 좋았다고 한다. 그가 걸린 궤양성 대장염은 심하면 음식 먹은 지 5분 뒤에 대변으로 나올 만큼 심각한 병으로 그를 압박했으며, 아내 아베 아키에 여사는 "총리직보다 목숨이 더 중요하다"며 울면서 그를 설득했다고 한다.

이 당시 그의 이미지는 말 그대로 골골거리는 "도련님(봇짱)"이었다.

5. 총리직 사임 뒤 재기

한동안 몸을 챙기다가 2008년부터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25]#자민당 몰락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인물임에도 반성은 전혀 없이 자민당이 캐몰락한 2009년 중의원 선거에서도 당당히 자기 지역구에 출마해 당연히 당선했다.(...) 이후 고이즈미의 우정개혁에 반발해 탈당했던 히라누마 다케오를 자민당으로 복당시키고 총재선거에 출마하려 했지만 히라누마가 거부해, 자신의 측근인 니시무라 야스토시를 밀었지만 실패했다. 아마도 니시무라를 당선시켜서 막후에서 자민당을 이끌어보려고 했던 듯하지만 자민당 안에서는 니시무라의 총재선거 출마 선언에 웬 듣보잡이라는 반응이었다니...

보수 정치인답게 민주당 각료들은 단 1명도 참배하지 않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했고, 중국의 차세대 지도자로 불리는 시진핑이 일본을 방문할 때 덴노를 예방하자 이를 격렬하게 반대하는가 하면 중국을 나치즘에 비유하는 등 안티 중국 활동을 벌인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 일왕 사과 요구에 대해 '상식을 벗어난 행동이자 예의를 잊은 행동'이라고 맹비난했다. 물론 이 발언은 이명박 대통령이 나중에 '사죄 발언은 오해였다', '총리가 여러 번 사과하는 것보다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일왕이 말하면 쉽게 해결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라며 정정했으며 실제로 매우 심각한 발언이었다.[26]

한편 자민당은 다니가키 대표의 후임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데 일각에서는 아베 전 총리를 투표없이 대표로 추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은 자신의 보수신당에 아베의 참여를 요청하고 있어서 느닷없이 다시 일본 정계의 태풍의 핵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본인은 자민당에 남는 쪽으로 가닥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11월에 열릴 듯한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단독 과반 확보까지는 못 가더라도 제 1당일 가능성이 유력한지라 차기 당대표로 거론받는 아베 입장에선 다시 총리를 할 절호의 기회이고 자신이 다루기 어려운 하시모토와의 연대보단 이쪽이 훨씬 낫기도 할 테니...

6. 2, 3, 4차 연속 내각

2012년 12월 26일 96대 수상 취임으로, 전후 요시다 시게루 이후 처음으로 총리직을 공백기(5년 3개월)를 두고 2번 재임하는 총리를 했다. 공백기가 길기로는 역대 4위로 1923년 9년 5개월만에 정권을 찾은 야마모토 곤노효에 이후로 89년 만에 최초다.(참고로 일본 총리직의 역사가 고작 130년이다) 이보다 조금 짧은 게 이토 히로부미의 1차, 2차 내각의 격차가 4년 3개월, 마쓰카타 마사요시의 4년 1개월. 야마모토 이후로 아베 이전 공백기가 가장 길었던 와카쓰키 레이지로가 4년. 참고로 역대 최장 공백은 15년 5개월의 오쿠마 시게노부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베처럼 잊혀졌다가 완벽하게 부활한 인물은 전후에 전무후무하다. 공백 뒤 2차 내각이란 기준으로 이번 중의원 임기 중 사임하지 않는다면 (같은 조슈 번 출신으로의) 이토 히로부미(4년), 가쓰라 다로(3년)을 빼면 가장 긴 임기로 잔류할 수도 있다. 물론 공백이 아닌 단순한 2차 내각의 임기는 전후에도 긴 총리가 많다.

6.1. 2012년: 재집권

제96대 총리 취임 공식 사진

2012년 9월 26일 자민당 총재로 당선하고 11월 16일에 중의원이 해산해 2012년 12월 16일 치른 제46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공명당이 320석[27]이 넘는 의석을 확보하며 압도적인 승리로 96대 총리 및 아베 신조 내각이 재탄생했다. 총리 정식 취임일은 2012년 12월 26일로 결정했다.

선거철인 2012년 11월, 일본에서 무제한 양적완화를 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기사. 그러면서 시라카와 마사아키 일본은행 총재를 제일 먼저 짤라버리겠다는 공약은 덤. 그리고 총리에 당선되자마자 제일 먼저 시라카와 마사아키 총재한테 파면을 통보한다.(...) 이에 대해 시라카와 마사아키는 물러나기 전에 후임자 결정때까지는 자리를 보전할 수 있다는 규정을 이용해 버틴다. 결국 일본은행 총재 시라카와 마사아키를 굴복시키고 무려 10조엔에 달하는 1차적 양적완화를 폈다. 뉴스. 2013년 3월 31일까지 임기인 시라카와 총재를 곧이어 물러나게 하고 아베 신조의 측근을 심어서 양적완화를 하겠다는 뜻을 더더욱 밀어붙일 듯하다.

96대 총리로 당선하자마자 '센카쿠 열도는 일본 땅'이라고 발표했다. 기사. 그리고 야스쿠니 신사수상 임기 동안 반드시 참배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기사.

대체적인 분석이, 아베 내각의 출현은 한국 입장에선 달갑지 않다. 과거사 문제나 독도 문제야 차치하고라도 무제한 양적완화를 내세운 탓에 한국과 일본이 환율 전쟁을 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우려가 있다. 한편으로는 아베 내각이 한중과의 관계 개선을 안하면 일본 경제에 악영향이리라는 우려도 나온다. 하지만 동아시아 외교에서는 매우 강경한 공약을 내건 아베인지라 한중과의 관계 개선이 썩 쉽지는 않으니 문제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아베가 과연 일본을 부흥시킬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외조부 때부터 긴밀한 연을 맺던 박근혜 정부가 탄생했기 때문에 양자 사이의 친밀성으로 한일관계가 호전하라는 전망도 있다. 박근혜 당선인의 당선이 확정되자 아베는 박 당선인과 조속한 시일에 만나겠다는 의사도 보였다. 기사. 대놓고 "다케시마의 날 지정을 자기(아베) 임기 중에는 유보하겠다" 는 것으로 봐서 관계 개선의 의지가 정말 강한 듯 했다. 부인 아베 아키에의 한류 드라마 시청 재개 역시 관계 개선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걸 보여주는 듯. 중국을 자극할 우려가 큰 센카쿠 열도 공무원 상주 공약 역시 유보했다. 그야말로 집권하자마자 외교정책 관련 공약을 하나도 지킬 생각이 없음을 천명하는 패기를 보였다.

12월 21일에 아베는 박 당선자에게 직접 친서를 보내고 누카가 후쿠시로 전 재무상을 특사로 파견하겠다는 발표를 했지만 박 당선자측에서 주말이고 해서 일정이 안 맞으니[28] 아베가 총리에 정식 취임하는 12월 26일 이후에 일정을 조율하자는 입장을 밝혔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아베가 일방적으로 한일 관계 개선에 나서서 박 당선자 측이 부담을 느꼈냐는 분석이 나왔으나 박 당선자 측은 일정이 안 맞았을 뿐 정치적인 이유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12월 26일 이후에 아베의 특사가 박 당선자를 방문할 것으로 보인다. 2013년 1월 4일에 방문하였다.

12월 25일 내각 주요 인사를 내정, 한국에 각종 망언을 한 바 있는 아소 다로 전 총리가 재무부총리에 내정되는 등 극우 인사들을 대거 기용해 앞으로의 한-일 관계가 미궁 속에 휩싸였다. 하지만 12월 27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가 밝혔던 무라야마 담화를 이어갈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기사. 이로써 선거할 때 내놨던 외교 공약은 전부 폐기처분 확정. 다만 고노 담화 수정 검토라든가 집단적 자위권 행사는 추진하겠다고 밝혀 이것이 앞으로 한일 관계에 암초일 가능성은 있다.

그 밖에 탈원전 노선을 재검토하겠다고 밝혀 사실상 원전 재가동을 밀어붙일 개연성이 높아졌다.

일본 국민들은 '닥치고 경제나 살려' 라는 여론이 큰 편이다. 평화헌법 개정에는 약 50% 정도가 반대의사를 나타냈고 집단적 자위권 행사도 30% 정도가 반대의사를 나타냈다. 이것은 우경화 바람에 반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경제가 어려운데 쓰잘데기 없는 데에만 신경 쓴다는 쪽에 더 가깝지만, 아베 내각은 연립여당인 공명당도 신경써야 하기 때문에 이런 국민적 여론을 의식한 듯 우경화 정책을 보류하거나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여갔다.

물론 아베 내각의 행보가 우경화를 절대 포기하지는 않으리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런 분석에 힘을 싣는 상황이 나왔는데 12월 31일 산케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베 총리는 적절한 시점에 역사 문제에 입장표명을 하리라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을 언제 발표할지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대체적인 분석으로는 무라야마 담화는 그대로 두고서 새로이 아베 담화를 발표해 '침략전쟁이 피해를 준 것은 반성하겠지만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임을 드러내리라는 이야기가 있다. 발표 시점은 당장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일본 여론도 좋지도 않고 한국박근혜 정부, 중국시진핑 정권 등 새로 출발하는 정권들과 구태여 초장부터 각을 세우는 무리수를 두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담화의 발표 시점은 일본 패전 70주년이 되는 2015년일 공산이 커보인다고. 2015년은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한 지 20주년인 해이고 한일 기본조약(한일협상) 체결 50주년이기도 하다.[29] 장기집권 기반을 구축해놓은 뒤에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드러내겠다는 복안으로 보여 우려를 낳는다.

제2차 아베 내각이 처음 성립되었을 때 아베 총리가 다시 일본 경제의 부흥기를 가져오겠다고 하자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아베 총리가 심도있는 경제 정책을 펴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고 사실은 경제에 관심이 적은 사람이라고 비판하여 한동안 논란이 되기도 했다.

6.2. 2013년: 참의원 선거 승리와 도쿄 올림픽 유치 성공

2013년 3월 구로다 하루히코일본은행 총재에 지명하고 4월 1일부로 앉혀서 아베노믹스 기조를 본격화했다.

2013년 7월의 제23회 일본 참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 참의원 선거에서 이겨보기 위해 일본 엔화를 더더욱 떨어뜨리는 엔저 정책을 밀어붙였다. 이른바 아베노믹스. 각종 양적완화 및 경기부양책을 시행하는 것은 물론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해서 지속적으로 미국 달러유로화를 사들였다. 이에 따라 엔-달러 환율은 20% 넘게 올랐고(엔화 가치 하락) 일본외환보유고는 급속도로 늘어났다. 심지어 닛케이지수는 30% 뛰어올라 14000 포인트를 찍었다.

참의원 선거에서 낙승이 예상됨에 따라 아베 신조 정권에서 우익 성향을 조금씩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2013년 2월, 일본 유신회다함께당 등에 제안하여 헌법 개정안 발의 요건을 중의원, 참의원 2/3 서명에서 과반수 발의로 바꾸자는 개헌안을 내기로 한 것이 대표적이다. 기사.

심지어 안보 법제 간담회의 야나이 슌지 위원장은 집단적 자위권에 '한국과 호주도 들어간다'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즉, 한국과 호주에 대한 공격도 일본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서 자위대를 파병하겠다는 것. 다만 일본이 한미일 동맹체제에 들어가 있음을 감안하면 이전부터 추진중이던 것이기는 했고, 무엇보다 두 나라 모두 일본의 육상자위대라면 모를까, 해자대와 공자대는 필요한 입장이다.

미일관계 복원을 외치면서도 도쿄 전범재판을 '승자의 판단으로 단죄한 재판'이라고까지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한 마디로 저 말은 '미국이 이겼으니까 지들 마음대로 처단했지?'라는 뜻이라서 일본 안에서도 미일 관계에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2013년 3월 15일 TPP 협상에 정식으로 참가하겠다고 발표했다. 노다 요시히코총리가 참가하겠다고 선언했다가 보류한 뒤 다시 참가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2013년 4월 23일 기사. "침략의 정의는 학계에서도 전세계적으로도 확실치 않다며 국가 간의 관계에서 어느 쪽에서 보는가에 따라 다르다"고 말해 논란이다. 이런 극우적 발언에 일본 안에서도 '외교 관계가 가뜩이나 나쁜데 제정신이냐'며 비판했다.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을 침략이 아닌 '진출'로 여기는 극우파의 역사인식을 대놓고 까발린 셈. 극우파 정치인들의 대규모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함께 외교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킬 듯하고 이미 한국과 중국은 '이게 무슨 개소리야?'라며 격렬한 반응이다. 아사히신문은 '지지율 70%에 취해서 국제관계를 까먹었냐?'며 우려했다. 중의원 선거 이전에 무라야마 담화를 부정할 의사는 없다며 눈치를 보다가 압승이 확실하자 강공으로 나섰다는 분석도 있다.

4월 24일에는 '서울대 교수가 일제시대에 인구가 증가했다는 연구를 내놓은 바 있다'라면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들어 일제 통치의 정당성을 설파하냐는 논란이 있다. # 그리고 4월 28일 미군정이 끝난 날을 기념해 주권 회복의 날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기념식을 거행하리라고 밝히는 등 우경화 폭주를 이을 기세다. [30]

끝내 미국까지 나서서 비공식적으로 일본의 우경화 폭주에 우려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한중일 3국 재무장관 회담까지 취소된 데다가 일본 내에서 심지어는 보수적 언론인 요미우리 신문까지 신중론을 제기하자 아베도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였다. 4월 26일, "역사 인식문제가 정치외교 문제로 비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발언을 통해서 한 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인 것. 그러나 이런 행보는 일단 한 발 물러서는 척해서 현재의 국면을 타개하려는 제스처일 가능성이 높고 적당히 시기를 봐서 다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도 일본 안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니 아베가 폭주를 이으리라 생각해도 좋을 듯.

4월 27일, 니코니코 동화[31]가 주최한 박람회인 '니코니코 초회의 2'[32]를 찾아 "반드시 강한 경제를 되찾겠다. 지금 일본 영해와 영토에 도전이 이어지지만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33] 이어 자위대와 주일미군 부스에 방문해 군복과 헬멧을 쓰고 육상자위대 최신 전차 10식 전차 위에 오르기까지 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전차에 탄 총리는 아베가 전후 최초라고 한다. 당연히 군국주의 부활이라는 한국과 중국의 우려가 더 커졌다.

10식 전차에 오른 모습

모두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고 있다.
반대로 덴노 내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4월 28일, 주권 회복의 날 행사를 강행했다. 심지어 덴노 부처까지 동원해서. 이 때 한 기념사가 가관으로 "일본을 강한 나라로 만들어 전세계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나라가 되도록 하자". 게다가 행사 말미에는 패전 이후 공적인 장소에선 금기시하던 "덴노 헤이카 반자이(天皇陛下万歳, 천황 폐하 만세)!"도 외쳤다. 그러나 우경화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알려진 아키히토 덴노 부부는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나가서 불쾌감을 표현했다.[34][35]

침략의 정의가 나라마다 다르다는 발언에 내각 차원에서 표현부족으로 벌어진 오해라고 국회에서 야당이 질의하면 해명할 계획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개헌을 앞두고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행보란 분석이다.

2013년 5월, 미국 의회조사국이 아베의 견해에 침략을 부정하는 수정주의자의 견해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미국의 국익을 해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아베 내각이 침략사실을 부정한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다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고 한다.

5월 5일에는 도쿄돔에서 프로야구 시구[36]를 하면서 등 번호를 96번을 달고 시구를 했는데 이는 일본 헌법 96조의 개헌 발의요건을 완화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는 해석이라 어그로라는 비판을 받았다. 아베 총리가 96대 총리이기 때문에 썼다는 해석도 있어 당시에는 과민 반응이라는 의견이 있었지만 현재의 행적을 보면 개헌 의지 맞다. 어차피 교진의 슈퍼스타 아베(허나, 한자의 본성은 '阿部'로 다름)도 있는데 뭣하러 96번 같은 생뚱맞은 번호를...

731번 훈련기에 오른 모습

여기에 더해서 2013년 5월 12일, 아베 총리가 미야기 현의 항공자위대 기지를 방문해서 블루 임펄스 곡예비행단을 시찰했다. 이때 그는 훈련기 조종석에 앉아서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었는데 이 비행기의 번호는 731이다. 관련 기사. 이게 얼마나 미친 도발적인 행위인지는 731 부대 항목 참조. 어쩐지 731이라는 숫자 볼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했다 당장 중국은 명백한 도발이라고 맹비판했고, 한국에서도 메르켈 독일 총리가 하켄크로이츠 문양이 달린 비행기를 타는 일과 같은 행위라는 맹비판이 쏟아졌다. 우연히든 의도적이든 도발적 행위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이후의 폭주 행각들을 살펴보면 의도적인 도발임이 기정사실이 되었다.

2013년 5월 14일,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가 문제가 되고 있으니 새로운 시설을 만들어야 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쉽게 말해서 야스쿠니 신사에 전범들을 그대로 두겠다는 것이다.

2013년 5월 19일,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야스쿠니 신사와 알링턴 국립묘지가 뭐가 다른가라는 망언을 했다. 미친놈 너네는 전범을 묻어두거든? 한국과 중국에도 비판의 날을 세웠는데 몇 년 사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별다른 항의를 하지않다가 갑자기 이에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치른 5월 21일 지방선거에서 자민-공명 연합이 6개 선거구에서 3개 선거구 당선에 그쳐서 자민당 내에서 충격적인 결과라는 지적이 있다. 특히 자민당은 사이타마 시장 선거에 아소 다로 부총리와 이시바 시게루 간사장까지 지원유세에 투입하면서 아베노믹스의 성과를 홍보했으나 자-공연합이 내세운 후보가 현직 시장에게 패배했다. 아오모리나고야에서도 현직 시장들에게 패배했다. 득표 결과를 보면 공명당 지지층의 80%가 자-공연합에 투표했으나 자민당 지지층의 55%만이 자-공연합에 투표했다고 드러났다는 점에서 공명당이나 자민당이나 크게 우려하는 실정. 물론 이런 결과는 자민당이 고령의 지역 본부장이나 간사장을 공천해 비교적 젊은 현직 시장들에 맞서기에는 신선미가 떨어졌다는 지적이 많으며, 아베노믹스의 성과가 지역까지 못 퍼졌다는 지적도 있다. 반면 6월 23일 도쿄도의회선거에서 자민당과 공명당이 전원 당선 기록을 세웠다.

2013년 7월 참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 자민당은 아베 신조의 높은 지지율를 의식해서인지 아베와 부인 아베 아키에와 친분이 있는 인사들을 대거 공천했는데 이를 두고 정실 공천이라는 논란이 있다. 공천을 받은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가관인데 에이벡스 소속 가수인 이토 요스케, 올림픽 체조 금메달리스트 츠카하라 미츠오, 개훈련 전문가 다나베 히사토 등은 모두 아베의 부인 아베 아키에가 추천한 인물들로 알려졌다. 이토 요스케는 아베 아키에의 아버지가 사장으로 있었던 모리나가 제과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고 츠카하라 미츠오는 아베 아키에와 술친구라고 하며 다나베 히사토 또한 강아지를 좋아하는 아베 아키에와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사실상 공천에 총리 부인이 개입한 모양새라 뒷말이 무성한 듯하다. 심지어 이토 요스케는 자민당 간사장인 이시바 시게루조차 "그게 누구지?"라 했다고(...) 아베 또한 자신의 고향 친구인 기타무라 츠네오를 공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럼에도 상대당인 민주당은 인지도가 부족한 노조 출신들을 대거 공천했고 그나마도 공천을 포기하고 사퇴하는 인물들이 속출했다고 알려졌다. 개나 소나 공천해도 자민당의 승리가 유력하니, 일본 정치가 얼마나 개판으로 돌아가나 짐작할 만하다.

제23회 일본 참의원 통상선거 첫번째 유세지역으로 후쿠시마를 선택하였다. 이 부분에서 방사능 유출 사고가 터졌을 때 자기 지역구인 이와테를 버리고 도쿄로 도주한 오자와 이치로 일본 생활당 대표와 더욱 극명히 대비되고 있다. 기사. 이후 참의원 선거에서 65석을 확보, 민주당의 17석보다 크게 앞서나가는 결과가 나오면서 장기 집권이 유력해졌다.

2013년 11월 15일 일본의 주간문춘에 올린 기고문에 '한국을 어리석은 나라'라고 말했다는 보도가 나와 큰 논란을 일으켰다. 아베 본인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한 상태. 자세한 내용은 아베 신조 한국 비하 발언 논란 참조.

12월 5일 악명 높은 특정비밀의 보호에 관한 법률(特定秘密の保護に関する法律)을 날치기로 통과시켰으며, 12월 26일,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강행했다.

6.3. 2014년: 3차 내각 성립

특정비밀보호법으로 여론이 나빠진데 이어 2월 9일로 예정된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집권 자민당에 대항하여 전 총리인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출마하고 아베의 정치적 스승이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호소카와를 지지함에 따라 리더십이 상당히 흔들렸다. 만일 호소카와가 당선하면 아베의 집권기반이 흔들려 조기 퇴진할 가능성도 있다는 견해도 나왔을 정도.

일본 민주당은 호소카와를 지원하기 위해 아예 후보를 안 내기로 했다. 게다가 고이즈미의 아들이자 정치적 후계자이기도 한 고이즈미 신지로 부흥정무관도 자민당이 지원하는 후보에 지원할 대의를 못 느끼겠다면서 반기를 들었다. 아베는 되도록 원전문제를 안 거론하면서 고이즈미-호소카와 돌풍을 잠재우려 했고 신지로를 앞세워서 고이즈미에 맞서려 했지만 신지로의 이런 반발에 결국 포기했다.[37]

그러나 마스조에가 야권의 표가 우쓰노미야 겐지와 호소카와로 19%씩 갈린 틈을 타 42.9%의 득표로 무난하게 도쿄도지사에 당선되었다. 한숨 돌린 셈.

3월 11일 후쿠시마 원전 사고 3주년 행사에서,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규제 기준을 바탕으로(적합하다고) 인정되는 원전에 대해서는 재가동을 추진할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내각의 여성 각료들의 각종 스캔들과 경제정책에 대한 불신임으로 지지율이 떨어지자, 국면 돌파를 위해 기습적으로 중의원 해산을 내놓았다. 과연 2014년 12월, 제47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전체 475석 가운데 과반수를 훨씬 넘어서며 압승. 아베도 계속해서 총리직을 이어나가게 됐다. 일본 국민들이 아베와 자민당을 뽑았다기보다도, 사실상 무능의 극치인 제1야당 민주당을 뽑지 않은 것이라는 평.

투표 이전부터 뽑을 사람이 없으니 이번 투표는 제끼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한 상황이었고, 실제로 투표율은 태평양전쟁 이후 최저인 52~3% 정도로 집계되고 있다. 자민당도 민주당도 뽑고싶지 않으니 차라리 공산당을 뽑고 말겠다는 의견도 많았는데, 실제로 이번 선거에서 가장 득을 본 것이 의석수를 2배로 늘린 공산당이었다. 8석에서 21석으로 2.5배정도 의석을 늘렸다. 하지만 여당에 갈 표가 아닌 아닌 민주당표를 뺏어온지라. 결국 전반적인 국회의 구조 자체는 큰 차이는 없다.

대신 민주당은 정말로 죽쒔다. 현 민주당 대표 가이에다 반리씨와 전 총리인 간 나오토가 소선거구에서 떨어질 정도. 간 나오토는 도쿄 권역 비례대표 끝자락으로 생환했지만 가이에다 반리 민주당 대표는 그도 실패해서 아예 낙선이 확정되었다. 이 둘은 2012년 제46회 총선에서도 지역구에서는 낙선했으나 석패율제로 생환한 상태였다.

6.4. 2015년: 아베 담화

중의원 선거로 한숨 돌린 2015년의 시작부터 아베 내각을 반기는 (...) 것은 일본의 신용등급 강등 소식들이다. 사실상 작년 11월 말에서 12월 중순에 결정 된 것이나, 보통 1분기까지도 추이를 더 지켜보면서 여유를 주는 것이 일반적이란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특히 무디스의 경우는 일본 국내외로 불만이 좀 있었다.

이미 무디스2014년 11월에 결정을 내려 같은 해 12월 1일부터 강등을 시행시킨 상태였고(Aa3 → A1), 또다른 주요 신평사인 피치의 결정이 주목을 받고 있던 시점에서 피치 또한 12월 15일에 일본의 신용강등을 한 차례 강등하기로 결정을 내려 2015년 1분기 동안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A+ → A) 만일 아베 내각이 불과 한달 전 중의원 선거에서 했던 공약을 깨고 2017년까지 미룬다던 소비세 인상을 즉각 몰아붙인다면 2015년 1분기가 끝나기 전에 강등을 모면할 수도 있겠으나 현실적으론 불가능하다.

2015년 6월 12일 중의원에서 일본판 국회 공성전이 일어나는데 아주 큰 역할을 하였다(...) 일본의 파견노동법[38] 개정안 처리가 자민 + 공명 + 유신 3당 연합 강행처리를 하기로 하고 민주 + 사민 + 공산 3당은 격렬하게 반발하여 국회에서 대치하고 있는데 그 장면에 아베가 온 것. 민주당의 오카다 가쓰야 대표 등이 아베한테 파견노동법 개정안 처리 연기를 요청했지만 아베 신조 총리는 가볍게 웃으면서 데리고 온 자민당 소속 후생노동위 위원장한테 날치기 강행처리를 지시했다.

당연히 민주당 등 야당은 격렬히 반발해서 회의장 봉쇄, 의장석 점거 등을 하고 자민당은 질서유지권과 경호권 발동으로 한바탕 난투극이 벌어졌다.

2015년 6월 17일 참의원에서 선거권 연령을 만 20세 이상에서 만 18세 이상으로 낮추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선거 연령 변화는 1945년 이후 70년 만의 일이며, 개정된 법은 내년에 있을 참의원 선거때부터 적용될 예정이다. 이번 개정이 아베 정권의 헌법 개정 수순 중 하나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일본 헌법 개정은 의회의 3분 2 이상 찬성에 의한 발의와 국민투표에서 과반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국민투표 행사연령도 18세로 낮춰 집권 내에 개헌을 이룬다는 계산이다.

2015년 7월 6일 처음으로 아베 신조 내각에 대한 반대가 지지율을 넘어섰다는 여론조사가 나왔다. 기사 다만 자민당 내에서도 대체자가 없고 자민당의 지지율도 확고한 상태라서 아베 신조의 정치 기반에 크게 흔들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정치가 막장인 이유

2015년 8월 14일 전후 70주년 담화(아베 담화)를 발표했다. 이전 담화의 핵심 표현을 모두 언급했다는 점에서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수준은 아니지만, 표현을 복잡하고 어렵게 하면서 이전 담화의 핵심표현을 나열하는 수준에 그쳤고 무라야마 담화 등 역대 총리의 담화보다 역사인식 면에서 훨씬 후퇴했다는 평가.

안보 문제를 이유로 집단자위권 법안 처리를 강행하려 하자 일본 내에서도 그동안 쌓인 불만이 폭발해 8월 30일 아베 신조 정권의 안보법 처리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전국적으로 300여 곳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의사당 앞에서의 시위대 규모는 10만이 넘었는데 일본에서 정치적 시위의 규모가 점점 축소되는 추세였음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이례적인 사태였다. #

2015년 9월 16일 국제 신용평가회사 S&P에서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을 AA-에서 A+로 강등하였다. 이에 한국과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은 무디스, S&P, 피치 3사 모두에서 한국이 일본보다 높아지게 되는 역전현상이 나타났다.기사

2015년 9월 17일 오후 일본 참의원(상원) 법안심사위원회에서 자민당 - 공명당 연립정부가 안보법안을 야당의원들이 의장석을 점거한 것을 국회 공성전 난투극으로 진압하고 날치기 통과시켰다. 아베 신조 총리는 9월 17일 심야에라도 본회의를 열어서 통과시키겠다고 했고 일본 야당은 이에 본회의장 의장석을 점거하는 국회 공성전 2차전에 돌입한 상태.

기어이 2015년 9월 19일 오전 2시 20분경 참의원에서 안보 관련 법안이 가결되었다. 야당은 내각 불신임안 결의 등을 통한 필리버스터를 동원하며 최대한 시간끌기를 시도했지만 연립여당의 수적우세를 극복하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민주당의 에다노 유키오간사장은 내각 불신임안 결의안 때 2시간 가량 발언했다. 그는 “오늘(18일)은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한 날”이라며 “아베 총리가 되돌리려고 하는 일본은 쇼와(昭和) 초기의 폭주하던 시대의 일본이 아닌가”라고 비판했다.

10월 5일, TPP가 타결되었다.

2015년 11월 2일, 3년 반만에 한일정상회담이 성사되었고, 12월 8일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타결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협상으로 인해 일제의 피해자들인 7, 80대 지지층 조차 박근혜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결국 1 ...

6.5. 2016년: 리우 폐막식 등장

/2016년 문서 참조.

7월 10일 제24회 일본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또 승리하였다.

8월 22일 2016 리우 올림픽 폐막식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닌텐도가 제작하였던 슈퍼 마리오 시리즈의 대표 캐릭터 중 하나인 마리오로 분장해서 등장했다. 차기 올림픽 개최지의 대표로서 등장한 것이다.[39]

6.6. 2017년: 4차 내각 성립과 장기 집권 확정

/2017년 문서 참조.

10월 22일, 제48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를 통해 수상 4선에 성공했다. 11월 1일부로 수상 4선에 따라 4차 내각이 출범했다.

12월 26일, 아베 신조의 2, 3, 4차 연속내각이 취임 5년을 맞았고, 1차 내각을 합쳐서 6년 임기를 돌파하였다.

6.7. 2018년

/2018년 문서 참조.

7. 경제 정책: 아베노믹스

닛케이 225: 10395.18 (2012년 12월 28일) → 22471.34 (2018년 5월 7일)

아베 내각이 장기 독주하는 가장 크고도 결정적인 이유

적극적이고 강력한 친미와 친서방 정책을 바탕으로 G7 국가들에게 암묵적인 동의를 받아 실시한 아베노믹스는 상당한 성과를 냈다. 아베 내각의 경제 정책은 아베노믹스 문서를 참고할 것.

경제와 친서방 행보를 동시에 잡는 정책의 일환으로 당초 일본은 미국이 권유하는 TPP(다자간 FTA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참가 여부를 놓고 저울질했다. 그러나 당시 내각이 민주당인 데다가 농가의 타격을 우려한 만큼 농촌을 기반으로 하는 자민당의 반대가 많아 소극적이었으나 아베는 높은 인기를 기반으로 TPP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2013년 4월 TPP 참가국들의 참가 협상 승인을 받았고 # 미국은 자국 의회에 정식으로 일본의 TPP 협상 참여를 통보하였다. # 이것으로 한국의 FTA 행보(특히 한미 FTA)에 뒤처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던 일본이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TPP가 성사되면 일본의 국내 총생산은 0.66%(3조 2,000억엔)이 증가할 것이고, TPP 참여국 가운데 미일만으로 90%의 경제 규모를 차지하는 만큼 환태평양 경제권의 리더로 재도약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이 수치조차 보수적인 예측으로 피터 페트리 미국 브랜다이스대 교수는 니혼 게이자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TPPA 참여는 일본 경제 생산성을 높여줄 것"이라며 GDP를 10조엔(약 98조원) 정도 늘리는 효과가 있으리라 추산했는데 이것은 일본 정부의 예측치 3조 2천억엔의 3배를 넘는 수치다. # 일단 기대치는 그런 상황. 또한, 일본의 갈라파고스화가 된 시장과 규정을 TPP 참여로 단숨에 글로벌 규격에 맞추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노릴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정책은 긍정적인 측면만큼 부정적인 측면도 무시할 순 없겠지만, 일단 일본 국민들은 긍정적으로 평가한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베식 경제 개혁은 좋게 끝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이 존재한다. 양적완화는 반드시 장기 금리 상승으로 이어지기 마련인데 일본 경제는 구조적으로 국채 금리 상승에 취약해 불안을 가중시킨다. 이미 국채 자체가 GDP의 2배를 넘어간 지 오래고 이 상태에서 국채 금리가 올라가면 국가 신뢰도가 바닥을 친다. 안 그래도 못 갚을 수준의 빚을 더 못 갚으니까. 또한 세계 시장 사정이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 엔화 약세가 일본의 무역 수지 회복으로 안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많았다.

그러나 양적완화나 경기부양책의 목표는 기업들의 낙수효과와 소비심리 회복이다. 최근(?) 일본은 최저 시급을 전국 평균 24엔 인상하여 전국 평균 시급을 798엔에서 822엔으로 끌어올리는 정책을 노사정 위원회에서 결정하였다. 또한 8/2일 총 28조엔(305조엔)에 달하는 역대 3번째 규모의 경제대책을 발표하였는데, 대부분 여성 사회진출/저소득층 바우처 지급, 공공사업, 지진복구 등 실질적인 대책을 내놓았다. 일부 경제지에서는 비관적으로 평가하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추천' 정책은 외국인 노동자 수용이나 고용제도 개선(=고용의 유연성) 같은 정책이다.

일본 닛케이 지수는 아베가 본격적으로 아베노믹스를 밀어붙이자 하루에 3~4%가 넘는 급상승세를 펼쳐 5년 4개월만에 15,000선을 돌파했다. 그러나 2013년 5월 23일, 중국 제조업 지수(PMI) 하락과 폭등세에 대한 반동 때문에 2년만에 최대 급락폭인 7%까지 떨어지면서 불안을 나타내었다. # 그러나 6월 10일에는 다시 5% 증가. 이후 11월 말 다시 급반등하면서 15,000선을 재돌파한 뒤 안정됐다. 2015년 이후로는 거의 18000선 부근에서 안정을 찾았고, 2016 후반기부터 2017년 중반기에는 19000대 후반에서 20000사이를 오르내리는 중으로 경기가 많이 호전되었으며 엔/달러 환율 역시 111엔대로 상당히 안정적이다.

사족으로 통화 정책은 그 연구를 가장 활발히 하던 1980년대에도 국가 경제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정책으로서는 연구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미국에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경기 부양책으로 대대적인 세금 감면과 기술 개발의 정부 보조 등을 약속하는 와중에 이러한 조세 정책만으로는 자본이 제대로 나타날 때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는 비판을 받자(Timing Problem), 보다 단기적인 대책으로 통화 정책이 부상한 것이다.

8. 외교 정책

/외교 정책 문서 참조.

9. 저서

  • 아베 신조 대론집 : 일본을 이야기한다(安倍晋三対論集 日本を語る) : 2006년 4월 출간작.

  • 새로운 나라로 아름다운 나라로 완전판(新しい国へ 美しい国へ 完全版) : 2013년 1월 출간작.

3권 모두 2016년 기준 국내에는 번역 출간되지 않은 상태이다. 다만 한국에도 아베 신조에 대한 내용을 담은 최신 도서는 많다. 예를 들면 '아베 신조, 침묵의 가면이란 책이라던가... 아베 신조의 출생부터 지금 일본 정치의 최정점인 총리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인생을 서술한 책이다. 아베 신조라는 인물에 대해 보다 면밀히 알 수 있는 책이지만 작가의 성향이나 시각이 아베 신조 총리에 대해 상당 부분 편향된 시각을 갖고 있다는 것, 또한 책이 완성된 시기에서 보여지는 아베 신조의 행적과 현재의 행적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의 반영이 누락된 부분은 감안하여야 한다.

10. 트리비아

  • 일본인들이 영어를 못한다는 선입견과는 다르게 영어를 잘한다. 외신에선 "일본인들은 보통 영어 못하는데 잘한다"가 기본적 견해다. 물론 일본어 억양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다른 일본인에 비하면 영어 구사력이 좋은 편. 사실 미국에서 공부한 적이 있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첫번째 총리 역임 당시에는 외국관광객에게 환영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당시 일본 관광청의 "요코소 재팬(Yokoso Japan)"의 일환이다. 요코소 재팬, 2014년 다보스 연설
  • 일본 총리의 집무실인 총리관저에는 총리가 숙식을 하는 장소가 있지만 아베는 총리가 된지 5년이 지나도록 시부야에 있는 사택에서 총리 관저로 매일매일 출퇴근을 하고 있다. 이로 인해 민주당 등 야당에서 안보 위기 의식이 없다고 태클을 걸었지만 아베는 총리 생활과 사생활을 구분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총리 취임 뒤로 총리 관저에 들어가질 않아서 총리 관저의 귀신 때문에 못 들어가냐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실제로 일본 총리 관저에서 1932년 5.15 사건이누카이 츠요시 총리를 비롯해 여러 명이 피살된 이후로 이곳에서 전직 총리들이 귀신을 봤다는 소문이 있었다고.[40] 국회까지 이 문제를 거론하자 아베 총리는 귀신 때문에 관저에 안 들어가는 건 아니지만 소문은 알고 있다고 답변했다. 한편으로 6월 1일 요미우리 TV 방송에서는 모리 요시로 전 총리가 관저에서 귀신의 다리를 봤다는 이야기를 해서 귀신 때문에 못 들어가냐는 소문은 식을 기미가 없다.
  • 나무위키에 있는 일본 내각총리대신 항목 가운데 가장 내용이 방대하다! 총리 가운데 한국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인물인 이토 히로부미고이즈미 준이치로 항목보다 더 길다! 게다가 그의 정책인 아베노믹스는 따로 항목까지 있어 아베노믹스 항목까지 더한다면 나무위키에 개설한 일본 정치인 가운데 내용이 가장 많다. 그에 대한 한국의 높은 관심을 반영한다고 볼 만하다. 그 중에서도 무려 비판이 절반 이상인데 사실 아베 총리 스스로 부른 측면이 크다. 2013년 여름까지만 해도 이 항목은 최소한 객관적인 업적을 꽤 호의적으로 적었다. 그랬던 항목이 현재 이 모양임은 그만큼 짧은 기간에 수많은 문제를 터뜨린 탓이다. 다시 말해, 아베 총리가 이전의 일본 총리들과는 달리 한국에서 강하게 비판받는 이유는 그의 가치관이 전쟁 피해국들을 크게 자극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러한 행보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소 살펴볼 여지가 있다. 미국의 입김도 있었겠지만,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일본은 한국에 대규모 차관을 제공하여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고 그 이후에도 일본은 고노 담화, 아시아여성기금, 위안부 협정 등을 통해 추가적으로 해결하고자 노력했음에도 과거사 문제가 끝맺음을 맺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 여론도 이제는 답답해하고 성을 내는 흐름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한국 입장에서는 그깟 돈보단 진정성 어린 사과가 우선이라는 반론도 있다.
  • 페이스북을 매우 적극적으로 쓰는 총리로 하루 평균 1.8개의 페북 소식을 올린다고. '인터넷 재상'이라고 불릴 만큼 독보적 인기를 누리는데 늘 휴대하는 태블릿 PC로 전직 관료, 현직 야당 의원 등을 심하게 까내리면서 호평과 혹평을 함께 받는다. # 참 문제 많은 행태지만 일본의 보수와 젊은 세대들은 열광한다고. 특히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아베는 "폭거다. 점령하는 쪽이 도발적 행동을 하면 몰상식하다"는 글을 올렸고 반나절 만에 2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좋아요"를 연발했다.(...) 여하간 일본에선 대단히 보기 드문 유형인 인터넷 활동이라, 분명 대중적 인기를 끄는 총리다.
  • 보수 성향 정치인임에도 뜻밖에 한국계라는 떡밥이 있는 정치인이기도 하다. 보통 넷 우익들의 한국계 드립은 하토야마 유키오간 나오토 같이 진보 성향의 정치인에 치는 경우가 많지만, 아베 신조는 극우 성향임에도 한국계설이 나돈다.(...) 대표적으로 참의원 선거 때 파칭코 업계에게 5천만엔의 정치 자금을 받았다는 루머가 있었는데 파칭코나 야쿠자 정치 자금설은 어느 정치인에게나 흔하니 비방성 루머로만 그쳤지만 한국계 떡밥을 결정적으로 불지핌은 아베 신조 1차 내각이 나온 2006년 9월 주간 아사히가 아베가에서 40년간 가정부로 일해온 구보 우메와의 인터뷰에서였다.# 인터뷰에 따르면 아베 신조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가 스스로 "자신은 조선(인)이다. 조선(私は朝鮮(人)だ。朝鮮)" 이라 말한 적이 있었으며 입관식 때 본 그의 골격이 조선인 체형?이었다고. 출처가 어디까지나 가십 기사로 먹고 사는 주간 아사히이니 신뢰성에 의문은 있다. 이것 말고도 그의 조부인 기시 노부스케[41] 그들의 피를 이어받은 아베가 한국계라는 주장도 있다.
  • 역시 같은 강경보수끼리 통한다고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과 친분이 깊다. 이미 오래 전(2005년 간사장 시절)부터 서로 면식과 인터뷰를 한 경험이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2013년 집무실에서 인터뷰(녹음)도 했다. 조갑제 닷컴의 기사. 여하간 양국 관계가 나쁜 상황에서 한 아베 재취임 이래 한국언론 최초의 인터뷰다.
  • 16년 5월 1일 현역 총리로써는 이례적으로 일요 아침 예능 방송인 와이도나쇼(버라이어티성격의 시사프로)에 출연하였다.# 현 정권에서 보육원에 대한 정책 방향을 비롯해 인터넷에서의 비방이나 국회에서의 야유에 대한 생각, 그 밖에 음주와 관련된 에피소드등을 진솔하게 이야기하였다. 음주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과거 고베 제강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시절, 대장염으로 인해 전혀 음주를 하지 못했지만 야유회에는 참여했는데, 바로 운전수 역할이었다는 얘기.
  • 2015년에 정치자금 모금액 상위 20명 가운데 17명이 자민당 의원이며, 전체 6위를 차지했다.#
  • 2017년 2월 트럼프와의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악수할 때 트럼프가 손을 세게 잡는 악수를 했는데 악수가 끝난 후 아베의 표정이 뭔가 웃겨서 짤방으로 쓰이고 있다(...).문제의 악수

10.1. 역대급 수준의 장기 집권과 선거 연승

가히 놀라운 5 [42]

명실상부 전후 최강 선거의 제왕[43][44]

아베를 제외하고 쇼와 시대 이후의 일본 총리의 평균 임기는 약 1년 8개월(620일) 정도다. 2006년 9월 26일부터 2007년 9월 26일까지 1기 내각의 1년(366일)을 포함하여, 2012년 12월 26일 취임한 아베는 2018년 5월 기준으로 이미 2,300일 넘게 집권하고 있다. 의원 내각제는 일반적으로 헌법 등으로 임기를 명시하여 정해두지 않고, 집권당이 바뀌지 않고 당내의 지지도 동일하다면 총선거를 통한 재집권 또한 가능하다. 자민당이 계속 집권하고, 아베가 당 총재직을 연임할 경우 아베는 계속해서 총리직을 유지할 수 있다.

당초 자유민주당의 총재 임기는 ‘2기 6년’이었는데, 아베의 장기집권을 의식했는지 2017년 3월 당대회를 통해 ‘3기 9년’으로 개정하였다. 따라서 아베가 다음 총재 선거에서 연임을 성공한다면, 2018년 9월까지였던 임기를 2021년 9월까지 연장할 수 있게 된다.

2017년 5월 27일을 기준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1,980일 기록을 넘기며 쇼와 시대 이후 총리 중 역대 3번째로 길게 집권하고 있다. 2위인 요시다 시게루의 2,616일 기록과 1위 사토 에이사쿠의 2,798일 기록도 깨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2019년 8월 24일까지 집권하게 되면 쇼와 시대 이후 총리 중에 가장 길게 집권한 기록을 남기게 된다. 메이지 시대 총리를 포함하면 2,886일을 집권한 가쓰라 다로가 제일 길고, 아베 기준으로 2019년 11월 20일까지 집권해야 갱신할 수 있다.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 사건 등으로 20%대라는 역대 최저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자민당고이케 유리코에게 2017년 도쿄 도의회 선거에서 참패하는 등 장기집권에 먹구름이 드리우는 상황이 벌어졌으나 아베 정권의 최대 지지 요인인 경제 지표가 여전히 양호한 점으로 보아 지지율 복구는 예정된 상황이라는 관측이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북핵 위기에 대한 적절한 대처로 지지율이 반등한 결과 2017년 9월에는 50%를 넘는 지지율을 보이고 있어 거의 복구하게 되었다.

2017년 9월 지지율이 회복된 이후로 꾸준히 아베 신조가 곧 의회해산을 시전하고 제48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를 조기에 치를 것이라는 썰이 나오가 시작했다. 어차피 2018년이면 총선거를 해야 하는데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과 같이 정권에 불리한 스캔들이 시의적절하게 터질 가능성을 고려하면 지지율이 반등한 현 시점에서 치르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실제로 의회 해산이 이루어졌다.

해산 시점에서는 웬만한 스캔들이 터지지 않는 이상 자민당에게 절대 불리하지 않은 상황이므로 아마 아베의 장기집권이 다시 한번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았고[45]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ANN에서 발표한 2017년 제48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비례대표 연령별 투표 성향. 당 이름은 왼쪽부터 자민당, 공명당, 희망의 당, 일본 유신회, 입헌민주당, 일본 공산당이다.

일본에서 아베 수상의 장기집권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계층은 바로 10, 20대 젊은층이다. 그 이유는 아베노믹스와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을 위시한 여러 중산층 위주의 경제정책이 크게 성공했고, 이에 대한 최대 수혜자가 10~20대 계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연 150만명씩 은퇴하는데 반해 신규로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청년층은 70만명 수준인 상황이라 일자리가 넘쳐나 아베의 장기집권에 득이 되는 상황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아베 정권은 연금 수령 연령을 상향하고 노인 복지 규모를 축소하는 등 비록 증세에는 적극적이나 노인층 부양으로 인한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적극적이고, 당연히 젊은 계층이 좋아할 수밖에 없다.[46]

일본 야당의 상황도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 야당들은 현실 정치와 경제 상황과 괴리되어 '반대를 위한 반대' 또는 이상적인 정치 이념을 주장하는 등, 집권당인 자민당에 대한 효과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자리 창출, 일본의 국제적 위상 회복, 불황 탈출 등 현실적인 정책을 제시하고 점진적으로 성과를 내고 있는 자민당과 아베 총리를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아베 총리는 방송 출연, SNS 이용 등을 통해 젊은 층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이런 것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은 당 안팍의 정치적 경쟁자들과는 확연히 차별화된다. 즉, 문제가 많긴 하지만, 능력은 좋다는 게 대략적인 평.[47]


  1. [1] 부친인 아베 신타로도 도쿄 출생.
  2. [2] 즉, 舊 조슈 번. 아베 신조의 정치적 고향이라고 일본 언론에서 자주 언급되며 실제로 아베 총리는 휴가나 정치적 구상을 위해 자주 이곳에 방문하곤 한다.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의 묘소도 이곳에 있으며, 본인의 중의원 지역구인 야마구치 4구의 일부이다.
  3. [3] 시모노세키 시, 나가토
  4. [4] 증조백부와 아버지의 이름이 같은 것은 오타가 아니다. 발음은 동일하지만, 증조백부는 慎太郎이고, 아버지는 晋太郎이다.
  5. [5] 어머니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서 성을 갈았다. 이전에 자식이 없는 아베가 동생에게 지역구를 물려줄 가능성이 높다고 적혀있었으나 동생 기시 노부오도 소선거구 선출의 현직 중의원 의원이므로 잘못된 설명이다.
  6. [6] 2006년 9월, 1차 내각총리대신 취임 당시 만 52세. 메이지 유신 이후의 모든 총리들로 범위를 넓힌다면 초대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가 최연소 총리이다.
  7. [7] 2017년 9월 중의원 해산과 이어진 총선에서의 압승으로 사실상 2020 도쿄 올림픽 이후까지의 총리직 유지가 예측되고 있다. 이 예상대로라면 메이지 유신 이래로 최장기 재임 총리대신이라는 역사적인 기록의 주인공이 된다. 상세한 내용은 트리비아의 역대급 장기 집권 문단 참조.
  8. [8] 2017년 아내 아베 아키에동아일보와 나눈 인터뷰에 의하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을 이 무렵으로 지목했다. 당시에는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상당히 괴로웠다고 한다.
  9. [9] 여담으로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일본 언론들은 대통령제의 단점을 까는 기사를 많이 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회전문 총리 시기에는 내각제의 단점을 까며 일본도 실권자인 총리에게 강력한 권력을 쥐어줘야 국정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며 대통령제를 도입해야 된다는 기사가 심심찮게 나오기도 했다.
  10. [10] 아베 총리가 대단한 점은 자민당 내 강력한 정치력을 갖춘 총리직 경쟁자들 대부분이 자신의 정치파벌(아소 다로, 기시다 후미오, 니카이 도시히로 등)을 가지고 있다. 반면 아베 신조는 자신의 정치 파벌이 없는 대신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인 호소다 파에 소속되어 있다. 무서운 것은 원래 호소다 파의 전신(前身)은 마치무라 파였는데, 자신에게 대항하던 전 파벌 회장인 마치무라 노부유키를 부회장으로 몰아내고 바짓사장격인 호소다 히로유키를 회장에 앉히고 호소다 파로 개창시킨 것이다. 이로써 거대 정치 파벌을 운영하는데서 오는 주변의 견제나 반발을 완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11. [11]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이재호, 프레시안, 2013-12-26.
  12. [12] 아베 "야스쿠니 못 가서 미안하다"… 4년째 대리참배·시주, 김수혜, 조선일보, 2017-08-16
  13. [13] 아베,야스쿠니신사에 총리명의 공물 봉납, 박석원, 한국일보, 2017-10-17
  14. [14] 이전부터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일본이 군대를 가질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자신들에게 안보를 의존하는 짠돌이 행태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불만은 21세기 들어 급격히 팽창하는 중국과 미국의 연이은 파병 실패로 인한 군축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때문에 일본의 재무장 및 군비 증강은 일본 국민들에게 부담이 됨에도 불구하고 서방 국가를 고려하여 시행되는 정책이라 볼 수 있다.
  15. [15] 아직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지도 않았음에 불구하고 일본이 조선인에 대한 재판을 감행한 사건. 당시 구라치 데츠키치 외무성 정무국장이 정부의 지시를 일본 사법부에 중개하여 실행하도록 한 것도 큰 문제가 되었다. 이는 행정부가 사법부의 독립성을 사실상 짓밟은 삼권분립의 원칙을 심각하게 침해한 것이기 때문.
  16. [16] 정확히는 외고조부가 아니라, 아베 신조의 친할머니인 혼도 시즈코(本堂静子)의 외할아버지이므로 '진'외고조부이다. 오시다 요시마사(大島義昌)는 청일전쟁 당시 소장 계급으로 혼성 제9여단(제5사단 소속 2개 보병연대에 1개 포병대대, 1개 기병중대, 1개 공병중대 등이 증원되어 구성) 여단장 직을 맡아 용산에 주둔하다 동년 7월 23일 새벽에 경복궁을 기습 점령한다. 오시다 소장은 청일전쟁에서의 전공으로 남작 작위(후에 자작으로 승작)를 받고, 러일전쟁 뒤에는 육군대장까지 승진한다.
  17. [17] 물론 요시다 쇼인은 정한론 외의 다른 이론이나 능력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 이중적인 인물이긴 하다. 요시다가 옥사당하였던 안세이 대옥(이이 나오스케가 주도)을 불러일으켰다는 안세이 5개국 조약의 불평등을 (조슈 번 출신으로의) 가쓰라 타로 총리가 러일전쟁에서의 일본 승리 직후부터 평등으로 완화하였다는 일본 정부 발전 장점을 바라보면서 지지하고 있기도 하다.
  18. [18] 도쿄무사시노시 소재. 정적인 간 나오토 전 총리의 지역구이다
  19. [19] 일본 최고 정치 명문가의 자제이자 스스로가 최고위직 정치인인 신분에는 꽤나 어울리지 않는 낮은 학벌이다. 세이케이 대학은 일본에서도 2류 대학 정도인데 그마저도 중고일관제로 입학했으며, 미국 유학 경력도 도피 유학인 데다 졸업은 결국 못했기 때문. 정치인으로서는 컴플렉스로 작용할 수도 있는 요소이다. 하지만 당연히 정치인의 학벌이 정치적 유능함으로 직결되지 않는다. 아베 신조는 학벌은 일천해도 정치인으로서 어마어마한 집안 배경, 자민당 내부 각 파벌의 높은 지지, 스스로의 오랜 관료 수행 경험(역대 최장 집권 일본 총리에 연임 이전에 이미 총리직을 수행한 적이 있다.)으로 학벌을 커버할 수 있는 요소가 많다.
  20. [20] 재미있게도 아베의 후임으로 총리를 한 후쿠다 야스오 총리의 아버지다.
  21. [21] 당시 광고사 덴츠에 다니던 중
  22. [22] 한국이야 재선확률이 50%에 못미쳐 3선쯤 되면 중진이지만, 지역 기반이 확고하고 자리를 잡은(혹은 세습을 받은) 의원이 연임하는 일이 매우 흔한 일본은 상황이 다르다.
  23. [23] 이에 대해서는 수많은 문제로 유례없이 빠르게 찾아온 레임덕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였다는 해석도 있다.
  24. [24] 전문은 다음과 같다.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원폭 투하가 많은 인명의 희생을 야기했고 또한 일본 역사에서 비극이 아닐 수 없으나, 전쟁을 일으킨 전범 국가로서 미국의 원폭 투하는 역사의 대 역률적 관점에서 볼 때 합당한 일이며, 또한 원폭 투하로 군부의 불필요한 전쟁의지를 억제하고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켜 많은 일본인의 생명을 구하고 또한 지금의 일본의 밑거름이 된 데에 다행으로 생각한다.' 제3자의 기준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이 말을 하필이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당사자들 앞에서 했다는게 문제.
  25. [25] 현재 관방장관으로 재직중인 스가 요시히데가 아베 신조의 정치 복귀를 설득했다고 한다. 스가 요시히데는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지만 지금까지 오랜 기간 내각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집권당인 자민당에 적을 두지 않으며 정치적 중립을 잘 유지하는 우리나라의 고건 총리와 같은 인물이자, 아베의 총리직 수행을 지지하는 그의 측근 중 한 명이다. 자민당 내 다른 유력 인사들은 은연 중에 아베를 제치고 스스로가 총리가 되고자 하는 야심을 가진 인물들도 많다.
  26. [26] 히로히토가 죽은지 수십년이 지난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관여하는 것이 엄금된 허수아비인, 하지만 일본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덴노에게 최근의 극우 행보에 대한 반감으로 사과 요구를 하는 건 외교적으로 매우 부적절했다.
  27. [27] 중의원 2/3
  28. [28] 결정적으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구성을 아직 시작조차 않은 상태이다.
  29. [29] 여담으로 패전 60주년이었던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담화는 무라야마 담화를 그대로 답습, 계승하며 야스쿠니 신사에 (적어도 2005년 당일) 참배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한중의 반응은 냉랭했는데 만약 "아베 담화" 가 강경어조로 나온다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격랑이 일 듯.
  30. [30] 이 발언으로 인해 오키나와 현민들의 민심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오키나와에서 내지(內地)라고 불리는 본토의 경우 이 날을 기점으로 미군정이 끝난 것이 사실이나, 오키나와는 그 후에도 한동안 미국의 점령하에 남아있었던 탓이다. 아베의 이 발언에 일부 오키나와 현민은 TV 인터뷰에서 "우리는 일본이 아닌거냐?" 라는 돌직구를 날리기도 했다.
  31. [31] 2ch와 같이 넷우익 성향이 강한 사이트이다.
  32. [32] 이날 같이 온 유명인사는 그를 비롯한 일본의 정치인들 뿐 아니라 니시무라 히로유키(개최자), 빌리 헤링턴, moot, ZUN 등도 있었다.
  33. [33] 1차 중일전쟁은 청일전쟁
  34. [34] 이후 아키히토 덴노의 생전 퇴위 및 양위문제를 볼때 총리를 비롯한 일본 극우 진영에 자신들이 이용당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을 가능성도 있다. 여성 덴노의 문제도 거론되는 이유 역시 현재 덴노인 아키히토히사히토 황손을 낳은 차남 후미히토 친왕보다는 현재 덴노와 정치적 성향이 같은 나루히토 황태자의 무남독녀인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35. [35] 아키히토 덴노의 '생전퇴위'에 대해 아베 내각에서는 '특별 입법'을 통해 현재의 덴노(아키히토)에 한해서만 생전퇴위를 검토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유는 생전퇴위를 제도화 할 경우, 미래의 덴노가 정치적 압박을 받아서 강제로 퇴위되거나, 자기 마음대로 지위에서 물러나는 경우를 배제시키기 위함이다.
  36. [36] 이 날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미스터 베이스볼 나가시마 시게오와 교진군을 거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뉴욕 양키스에서 맹활약하며 월드 시리즈 MVP 등의 업적을 남긴 마쓰이 히데키가 일본 국민영예상을 받는 시상식을 가진 날이다.
  37. [37] 자민당이 지원하는 마스조에 요이치 전 후생노동상은 2009년 자민당의 중의원 참패이후 자민당의 시대는 끝났다면서 자민당을 탈당했던 전력이 있던 인물이다. 당시 자민당은 그에 격분하여 마스조에에게 제명처분을 내렸었고 이런 마당에 마스조에를 후원하겠다는 아베의 행동을 당연히 신지로가 납득할 명분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 명분으로 고노 타로 부간사장을 비롯한 소위 탈핵파 의원들이 호소카와 전 총리의 지원을 모색중이라고 아사히 신문이 보도했다. 사실상 탈핵이라는 명분을 들고나온 호소카와-고이즈미 연대에 자민당내 탈핵파들이 동조하면서 자민당 자체가 휘청였다.
  38. [38] 대한민국으로 치면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해당한다.
  39. [39] 이 장면은 도쿄올림픽 공식 홍보영상에서도 등장한다.
  40. [40] 하타 쓰토무 전 총리는 귀신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귀신을 직접 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41. [41] 기시의 동생이 사토 에이사쿠가 자신도 한국계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떡밥이 있다.
  42. [42] 이를 단순히 자민당 일당 독재(?) 국가인 일본의 정치 속성 덕분이다 라고 치부하기엔 꽤나 어마어마한 결과이다. 당장 아베의 1차 내각 이후 2009년에 압도적인 민주당 정권 교체가 있었고, 그 이전의 자민당 독주 시대에도, 단일 내각이 선거에서 연거푸 승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어떤 내각이 장기간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정치를 지속하는 것 자체도 쉽지 않을뿐더러, 설사 그렇게 성공적인 정책을 펼쳤다 하더라도, 오랜 기간 독주하는 권력에 대한 국민들의 견제 심리로 인해 선거에서 연승을 거두는 것은 상당히 힘들기 때문. 물론 2차 아베 내각 이후의 연승은 민주당 정권 시절의 심각했던 실정을 다시는 보고싶지 않은 일본 국민들의 심리에 의한 반대 급부 성격이 짙은 것도 부인하긴 힘들지만.
  43. [43] 2차 내각이 성립된 제46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를 시작으로, 제23회 일본 참의원 통상선거 - 제47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제24회 일본 참의원 통상선거 - 제48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를 내리 압승하였다. 이는 일본 내각제 130년 역사 이래 유례가 없는 놀라운 연승 기록이다. 이는 아베 내각의 경제적 성과와 더불어 정치적(개헌 추진과 군비 증강 정책), 외교적(강력한 친미, 친서방 정책) 스탠스를 국민들이 크게 지지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44. [44] 1차 아베 내각의 직전 내각총리대신이자 아베 신조의 정치적 스승이기도 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역시 선거의 제왕 소리를 들을 정도의 높은 인기를 누렸던 수상이지만, 2018년을 지나는 현 시점에서는 이미 그 수준을 능가했다고 볼 수 있을만큼 많은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45. [45] 사실, 초반에 위기는 있었다. 고이케 유리코희망의 당을 창당하자, 이후 여론조사에서 자민당과 호각세를 이루기 시작했었는데, 선거전이 흘러가면서, 창당 기대감이 한층 가라앉음과 동시에 민진당 출신 평화헌법 호헌 인사들을 배제한다는 발언을 하면서 지지도를 대부분 깎아먹어버렸다.
  46. [46] 여담으로 프랑스와 독일의 극우파들의 20대 지지율이 높은 이유도 이와 유사하다. 전체적으로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부를 축척만 할 뿐 소비를 하지 않으며, 노인 복지비로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되는 노인층에 대한 적대심리가 대단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경향이 무조건 긍정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47. [47] 사실 일본 민주당 집권시절에 대한 일본의 평은 최악이다.(엔고방치 및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대처 부실로 인한 경제추락,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대한 대처 미흡, 센카쿠 열도 (중국명 댜오위다오)에 대해서 중국에게 당하기만 하면서 미국에게는 버림받는 외교..) 입헌민주당이 창당되자마자 치룬 제48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가 기적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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