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르트헤이트

Apartheid

1. 개요
2. 배경
3. 정립
4. 실태
4.1. 대(大) 아파르트헤이트
4.2. 소(小) 아파르트헤이트
5. 문화 탄압과 백인 간 갈등
6. 붕괴
7. 폐지 후의 잔재
8. 기타
9. 관련 문서

백인 전용임을 알리는 표지판. 위가 영어 표기. 밑이 아프리칸스어 표기. 번역하자면 "백인 전용. 본 공공시설과 토지는 백인만 사용하도록 지정되었습니다."이다. 네덜란드어와 아프리칸스어에서 하얀색을 뜻하는 단어는 'wit'이지만 피부가 하얗다고 할 때는 'blanke'라는 표현을 쓴다. 한국어로 치면 '하얗다'와 '뽀얗다'의 어감 차이.

1. 개요

냉전 당시부터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민당 정권이 실시한 인종차별 정책. 1948년부터 무려 1991년까지 유지된 정책으로, 아프리칸스어로 분리, 격리를 뜻한다.

인종 간의 실질적인 신분제도를 설정한 몹쓸 정책으로 그 악랄함은 카스트 제도에 비교되기도 한다. "백인과 흑인을 격리하는 것과 차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라는 정신 나간 얼토당토 않은 발상에서 시작했지만[1] 그 본질은 차별의, 차별에 의한, 차별을 위한 추악한 신분 제도 정책이었다. 저따위 말 하고 싶었으면 흑인 전용도 만들었어야했다. 근데 그런 건 없었으니 인종차별을 그냥 돌려 말한 것에 불과할 뿐

이로 인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1960년대 이래 국제사회로부터 철저히 배척받아 고립되기까지 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시행된 지 40년(...)이 지난 90년대 들어 철폐되기 직전까지 남아공은 최후의 파시즘 국가 스페인과 함께 국제사회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악역 포지션이었다. 남아공노벨상 수상자 9명 가운데 노벨평화상 수상자 4명[2]이 아파르트헤이트 철폐를 주도했거나, 철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이유로 노벨상을 받았고 문학상을 받은 2명[3]도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시절의 남아공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는 이유로 노벨상을 받았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미국중국앙골라 내전에 개입했을때 아프리카 국가들과 전 세계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는데 그 이유인즉슨 남의 나라를 함부로 침공했다도 아니고 대학살을 저질렀다도 아닌 단지 남아공과 손을 잡았다는 이유로 엄청난 욕을 먹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취급이 어땠는지 알 수 있다.

2. 배경

17세기 케이프 식민지가 성립하면서 네덜란드인들이 남아프리카에 이주해 왔다. 이들의 후손들이 '보어인' 또는 '아프리카너'라고 불리는 사람들로 아파르트헤이트를 주도하게 된다. 이들은 아프리카 토착 백인임을 자처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굴러온 돌이었기에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다수의 흑인 민족들에게 영토와 재산을 빼앗기고 흑백 혼혈로 피가 더럽혀져 흡수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과 수적 열세에 따른 공포감을 항시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곧 아파르트헤이트의 근원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아프리카너들의 움직임은 남아프리카 연방 성립(1910년) 이후 남아프리카 국민당의 결성, 그리고 국민당의 1948년 집권 이후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실시, 공화국 수립(1961년)으로 이어진다.

'보어'는 네덜란드어로 '농부'를 뜻한다. 이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보어인들은 1652년 얀 판 리베이크가 데리고 온 네덜란드 농부들로부터 시작해 칼뱅교도들과 프랑스계 위그노들, 그리고 주류 종교에 탄압 받던 여러 개신교 성향의 백인들이 종교 활동의 자유를 찾아 지금의 남아공 지역으로 옮겨간 사람들로 구성되었다.[4] 후술할 다니엘 프란수아 말란(Daniel François Malan)도 이름에서 딱 알 수 있듯이 위그노 프랑스인이었다. 일반적으로 '남아공에서 몇 세대 이상 산 백인이고 문화적으로는 칼뱅파 개신교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비앵글로계이고 혈통과 상관없이 모국어로 아프리칸스어를 쓰는 사람들'을 아프리카너라고 한다면 크게 틀리지 않다. 이들에 대해서는 보어인 항목을 참고할 것.

이들이 서슴없이 인종차별적 정책을 감행할 수 있던 배경에는 이주하면서 같이 들여온 개혁교회[5]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당연히 네덜란드 본토와 비교하면 매우 보수적이고 원리주의적인 성향을 띄게 되었다.[6]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 측은 아프리카너들을 내다 버린 꼴통 자식, 반대 방향으로는 믿음의 배신자 정도로 서로 적대시했기 때문에 남아공 아프리카너들이 네덜란드에 대하여 느끼는 유대감은 퀘벡의 프랑스계 캐나다인, 호주나 뉴질랜드인들이 프랑스와 영국에게 가진 감정보다 훨씬 더 약하고, 그 연결점도 느슨하다.[7]

3. 정립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말은 1917년에 얀 스머츠(후에 총리)의 연설로부터 등장하지만 남아프리카에서의 인종 분리라는 개념은 영국 식민지였던 19세기 말부터 존재했다. 케이프와 나탈에서 실시된 통행법(pass law)은 백인과 유색 인종의 거주 구역으로 흑인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통제, 차단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 칼레도니아에도 비슷한 법률이 있었다. 이러한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 상황은 1년간 체류했던 간디에게도 영향을 주어 그의 비폭력 저항은 남아프리카에서 처음 전개된다.

이러한 정책은 1910년대 들어 남아프리카 정부 하에서 이를 법제화하는 한편[8] 원주민 토지법을 제정하여 흑인들에게 토지 거래권을 박탈하는 법을 통과시켰으나 영국계의 이익을 중시하는 정책을 펼치고 1922년 백인 탄광 노동자들의 파업을 강경 진압하면서 1924년 총선에서 보어인들이 주축이 된 국민당에게 정권을 내주었다.

본래 국민당은 1915년 바리 헤르초흐에 의해 창당되었다. 당시만 해도 임금법(1925년), 연금법(1927년)등으로 백인 노동자와 농민들의 권익을 향상시키는 '진보적'인 정책을 취했지만 백인과 타 인종 간의 혼혈(컬러드)이 나오는 것을 방지 시키려는 목적으로 풍기문란법을 제정했다. 물론 딱히 잘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그러다가 경제 대공황이 닥치고 나서 1933년 들어 얀 스머츠의 남아프리카 당과 기존 집권당인 국민당이 연립 정권을 구성했고 1934년에 연합당으로 합당 되었다. 그러나 다니엘 말랑을 비롯, 국민당내에서 이러한 움직임에 반발한 계파가 탈당, 순수 국민당을 설립했다. 그 이후에도 흑인 유권자들은 별도의 의원에게만 투표를 할 수 있게 하는 차별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이후 얀 스머츠가 다시 총리가 된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남아공 경제가 급부상하면서 백인들의 빈곤률이 급감하고 그 동안 갖은 차별을 당했던 흑인들의 사회 진출도 활발해지며 인종차별에 대한 반발이 격화되면서 얀 스머츠 정권하에서 인종차별 정책을 완화했으나 [9] 완화 정도가 낮아서 흑인들의 불만을 샀고 아프리카너들에게는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면서 헤르초흐계가 아프리카너 당으로 떨어져 나갔고 보어인의 지지를 상실하게 되었다.[10]

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의 피보호국이자 동맹국이었던 남아프리카[11]는 많은 수의 백인 남성을 북아프리카와 유럽 전선에 영국군의 일원으로 보냈는데 그들의 부재로 당시 남아공 내의 산업에 흑인, 특히 흑인 여성들이 빈 자리를 채우고 그들의 경제적 기여도가 높아져 감에 따라 권리 향상을 위한 요구도 높아져 갔다.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온 백인 병사들의 일자리와 백인 위주의 질서가 위협당한다고 느낀 당시 남아공의 백인들은 아파르트헤이트와 같은 정책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 치러진 1948년 총선거에서 국민당은 컬러드와 영국계가 많이 살던 도시 지역에서는 당시 집권당인 연합당에 득표율에서 11.5%나 밀렸지만(49.2% VS 37.7%) 반대로 네덜란드계 보어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농촌 지방에서 압승을 거두어 연합당을 5석 차(70석 vs 65석)로 누르면서 기어이 승리했고 아프리카너 당과 연립정권을 수립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실시가 본 궤도에 오른다. 즉, 당시 남아공 주민의 4/5에게 헬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12][13] 널리 알려진 아파르트헤이트 개념을 주창한 베르너 아이젤렌은 인종 분리와 백인 우위가 그 때 까지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주장했다. 1948년에는 정치적 분할 정책으로서의 아파르트헤이트는 완전한 인종 분리에 비해 유리한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즉, 흑인과 백인이 하나의 국가의 한 국민으로 묶여있는 한 소수 백인에 의한 지속적인 흑인 분리 및 통제는 비용이 많이 들고 지속하기 어렵기 때문에 백인 국가와 흑인 국가로 분할해 버리자는 것이다. 이 두 정책은 정치적 분할(대(大) 아파르트헤이트)과 인종 분리(소(小) 아파르트헤이트)로 구분되고 있다.

아무튼 위 과정을 통해 1948년 성립한 말란 내각은 인종간 혼인 금지법(1949), 배덕법(흑백간 성관계 금지)(1950),[14] 인종별 시설 분리법 제정, 통행법 강화를 통해 아파르트헤이트를 강화시켰다. 그 덕분에 많은 부부들이 강제로 이혼 당해 가정이 산산조각 나는 일이 수두룩했고, 특히나 흑인과 성관계 했다는 이유로 백인들도 감방에 가는 일이 속출하였기 때문에 백인 내에서도 이에 대한 반발이 일었다. 특히 컬러드 계층에서의 반발이 극심했으나 1953년 총선에서 국민당에게 유리하게 선거구가 짜여진 점을 이용해 연합-노동당 연합을 제압했고(94석 vs 62석)[15] 후임 스트레이돔 내각은 컬러드와 아시아계 유권자를 선거에서 배제 시키려는 법을 통과시키려고 했지만, 법원에서 패소 판결을 내리고 상원에서도 국민당과 아프리카너당의 의석이 과반조차 넘기지 못해 법안 통과가 불발되자 국민당 성향 판사들을 임명한 다음 상원 정수를 48석에서 89석으로 올리고 각종 편법을 동원, 국민당이 상원 의석의 77석을 차지하도록 조정한 뒤 사법부와 입법부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리고 나서 유색인의 공민권과 참정권을 사실상 박탈하는 법을 통과시켜 주요 야당인 연합당과 노동당을 식물 정당화시키는 데 성공을 거두었고, 이 시기 이후로부터는 연합당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수당은 꿈도 꿀 수 없고 나탈 주 의회에서만 다수를 차지하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이로써 국민당과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견제 장치는 완전히 무력화되었다.[16]

이런 비민주적 행보에 영국이 비난하고 나서자 국민투표를 통해 영연방에서 탈퇴하였고, FIFAIOC로부터 추방당해 1957년 아프리카 네이션스 컵에 참여하려다가 쫓겨났다. [17]

네덜란드 출신인[18] 헨드리크 페르부르트(Hendrik Verwoerd) 박사(1901~1966)[19]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시행의 건설자로 불린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는 너무나 다른 흑인과 백인이 이웃으로서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보어인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젊은 보어인들의 표를 사기 위해 선거 연령도 만 21세에서 18세로 낮추었으며, 지금의 나미비아인 당시 남아프리카 속령이었던 남서아프리카를 하나의 주로 인정해 참정권을 주었다. 국민당 정권의 1950년 원주민 담당장관을 거쳐 1958년 남아프리카 연방 수상이 되었고 1961년에는 보어인의 숙원이던 영연방 왕국 이탈-공화국 수립을 주도하였다. 그는 아프리카너 민족주의자로서 반투자치촉진법(=홈랜드 건설로 흑인 참정권을 완전히 박탈), 대학교육확장법(대학기관을 백인, 흑인, 인도인 기관으로 분리) 등 통과를 주도하였다. 1960년에 영국계 백인 농부에 의한 암살 미수는 피했지만[20] 1966년 케이프타운에 있는 의사당에서 그리스계 경비원[21][22]에게 칼로 찔려 암살당한다. 페르부르트의 서거 이후 서방 세계는 그에게 애도를 표했으며, 남아공 정부는 그의 이름을 따 일부 공항 및 도시의 이름에 '페르부르트'라는 이름을 넣었다. 1994년 ANC 정권의 출범 이후 아파르트헤이트 잔재를 없앤다며 그의 이름은 남아공 전역 에서 지워지게 된다.

4. 실태

아파르트헤이트주의는 반투스탄 혹은 홈랜드의 설정이라는 대(大) 아파트르헤이트와 일상 생활에서의 흑백 분리를 가리키는 소(小) 아파르트헤이트로 분리할 수 있다.

4.1. 대(大) 아파르트헤이트

흑인들은 대도시 중심가에 사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고 반투스탄 혹은 홈랜드[23][24]라고 불리우는 구역에 따로 살아야 했다. 1970년 "홈랜드 시민권법" 제정으로 흑인들을 대놓고 외국인 취급하는(...) 정말 뭣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홈랜드는 총 10곳이었으며 그 중 4개(트란스케이, 보푸타츠와나, 시스케이, 벤다)는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차례대로 독립했다. 백인 정부는 그곳의 땅을 떼서 흑인들에게 자치권을 주고 독립시켜 준다고 했지만 실상은 남아공 국민으로의 자격을 주기 싫다는 뜻. 전 국토의 13%에 불과한 이 황무지에 인구의 과반 이상이 살았고 대도시 근교지역의 주거여건이 위낙에 열악한 소웨토 같은 타운쉽에서 30%가량이 살았다.

당연하지만 반투스탄 지역은 개발도 안 된 척박한 황무지였고 교육, 복지, 의료의 혜택도 형편없었다. 결국 돈을 벌기 위해서 남아공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남아공 법률상으로 이들은 외국인이었다. 물론 반투스탄을 승인한 나라는 남아공과 반투스탄 상호간밖에 없다.[25] 결국 이 4개국은 만델라 정권 때 남아공으로 재편입되었다.

홈랜드의 주요 수입원은 남아공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일하는 흑인 노동자들의 임금 수입과 남아공에서 오는 백인들의 관광, 정확히 말하면 섹스관광, 곧 환락 산업으로부터 얻는 수입이었다. 남아프리카 국민당은 도덕적 엄숙주의를 강요하였으며 후술하듯이 유색 인종간의 흑백 성관계도 금지되어 있었는데 홈랜드는 (명목상) 외국이었기 때문에 카지노와 흑인과의 성관계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라나. 결국 반투스탄에는 아비 모르는 흑백혼혈이 넘쳐났고 새로운 사회 문제가 되었다. 그래놓고 백인 정권은 홈랜드에 사는 흑인들이 가난하고 도박과 섹스에 물든 자들이라고 선전하였다.

4.2. 소(小) 아파르트헤이트

흑인들이 도시에 들어오려면 허가증이 있어야만 했다. 주민등록증 같은 카드가 아니라 수첩처럼 두꺼운 거였다고. 흑인이 들어오는 경우는 주로 도시에서 노동자로 일하거나 관광 산업용. 물론 허가증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백인들과 같은 시설을 이용할 자격이 없었다. 허가증이 없으면 바로 체포되었다.

One-drop rule룰에 따라 피가 더러워진다흑백혼혈황백혼혈은 천시되었으며 유색 인종과 백인 간의 결혼과 섹스를 엄금하였다. 1949년 인종간 혼인 금지법 실시 후로 인종간 혼혈은 금지되었지만 그 전에도 백인, 흑인, 황인, 인도인들이 수백 년간 섞여 살았기에 혼혈이 많이 일어났고 외모로 인종을 구분 못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 신분증에 인종을 명시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이런 구분도 상당히 자의적인 것이어서 형제 간이라도 피부가 많이 그을린 쪽은 흑인, 안 그런 쪽은 백인으로 구분되기도 했다니(...)[26] 그뿐만 아니라 1950년 배덕법의 제정으로 흑백간 모든 성관계도 금지되었다.

유명 축구선수 스티븐 피에나르는 어린 시절 반투스탄이 아닌 도시에 살았는데 옆집 여자 아이가 백인들에게 능욕당하여 혼혈 아기를 출산하다가 죽었고 그의 친구가 백인들에게 살해되기도 했다.

더불어 대부분의 식민지 경영 국가가 그러했듯 남아공 백인 정권은 부족 간의 분열을 종용했다. 그러나 흑인 차별 자체가 너무 심해서 이 부족들끼리 이를 갈면서도 손 잡고 저항했다.[27] 넬슨 만델라는 코사 족이라 줄루 족이 상당수이던 남아공에서 반대도 많았지만 그래도 같은 흑인이라 백인보다 낫다고 지지한 줄루족도 상당수였다. 보통 이런 부족간 이간질 작전은 성공률이 높은 편[28] [29] 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남아공이 얼마나 악랄했병신이었나를 엿볼 수 있는 부분.

인도인, 중동인, 동양인 모든 비서양인 및 유색 인종들도 흑인만큼은 아니지만 차별 대우를 받았으며 백인과 흑인 혹은 유색 인종과의 혼혈인 컬러드(Coloured)도 차별받았다.

다만 일본인, 홍콩인 등 친서방 일부 동아시아인은 명예 백인(Honourary white)으로 분류되어 백인과의 섹스 및 결혼과 투표는 금지였지만 백인과 같은 시설[30]은 이용할 수 있었다. 심지어 대만인아예 공식적으로 백인으로 인정받았다. 외교적 고립이 심했던 대만은 아파르트헤이트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남아공과 수교를 했고, 남아공은 이런 대만을 배려해서 대만인을 공식 백인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31] 거기다 남아공에 진출한 대만 사업가들은 상대적으로 값싼 흑인 노동력을 제공받았다.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되자 대만정부는 당연히 비상이 걸렸다. 아파르트헤이트 폐지와 함께 중국 본토, 일본, 한국 등 다른 아시아 기업들이 남아공에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새로 정권을 잡은 흑인들은 과거에 아파르트헤이트를 인정한 데다 자신들에게 갑질을 일삼았던 대만인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할 리가 없었다. 수교국 하나라도 아쉬웠던 대만은 경제 지원 등의 조건을 걸며 단교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반대로 이제 고립에서 벗어나 하나도 아쉬울 게 없었던 남아공은 1998년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한다.

홍콩인들은 같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영어가 능통하며 교류가 많아서 명예 백인 대우를 했다. 일본과 함께 남아공의 대외 무역에서는 홍콩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기도 했다.

일본은 당시 남아공의 대표 교역국이였고 특히 인종 차별로 유럽 국가들이 국교를 단절하자 남아공의 대외 무역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 그런 판국이니 일본 상사원이 남아공을 방문할 때 인종으로 문제가 되면 남아공 지들이 손해이기 때문에 컬러드였지만 아파르트헤이트 후반이 되면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제외한 거의 모든 권리를 보장받게 된다. 그렇지만 당시 컬러드들도 위낙에 당한게 많았던 데다가 컬러드 의회의 권한도 그리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컬러드들도 투표에 불참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한국인의 경우는 백인 대우를 국가적으로 받은 게 아니라 그냥 일개 몇몇만 운좋게 일본인이나 홍콩인인 줄 착각해서 받았다고 한다. 공식적으로는 당시 한국도 다른 나라들처럼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표시로 1992년까지 미수교국이자 1994년까지는 여행 제한 국가였다. 미수교국이기는 했지만 경제, 문화 교류는 있었다. 심지어 남아공은 당시에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아프리카의 무역 상대국의 하나였다. 대한민국 기업이 남아공에 지사도 내고 교민도 건너가서 살기까지 했다. 다만 공산 국가는 아니었지만 1956년부터 사전 허가가 없는 경우 여행제한국가로 지정되었고(당시에는 권고사항이긴 했다) 한국인은 방문하면 인종 차별을 받을 수 있다는 불편함에 따른 우려로 방문을 꺼렸다. 당시에는 방문하려고 해도 정식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있지 않았고 제3국에서 비자를 발급받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이 '명예 백인'들도 같은 유색인종을 차별할 때가 있었다고 하지만 반대로 명예 백인으로 대접한다고 해 놓고선 남아공 당국에서 뒤통수 치는 사례도 많았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헨드리크 페르부르트의 암살범 드미트리 차펜다스가 그런 경우인데 그리스계 흑백혼혈이었지만 그는 서류상 '백인'으로 되어 있었고[32] 당연히 백인들만 쓸 수 있는 공공 시설도 문제없이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외모 때문에 진짜 백인계들은 그를 사적으로 차별했고 결국 페르부르트를 죽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더 웃긴 사실은 1970년대에 남아공에서 중국 음식점이 유행하자 중국인이 운영하는 중국집이 급증했는데 유색 인종이 운영하는 곳이라 백인 출입이 불가능해 백인들이 항의를 하자 중국집에 한해 '백인 이용 가능' 으로 지정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자 기존의 중국인들이 중국집에서 식사를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결국 중국집에 한해 중국인도 백인이 이용 가능한 식당에 출입 가능으로 만들었다.흑인 음식이 인기였으면 어쩔 뻔했어

일부 다른 유색인종들도 명예 백인이라며 우대했다. 미국에서 성공한 흑인 농구 선수나 뉴질랜드마오리족 럭비 선수를 명예 백인이라고 부르며 우대하기도 했다. (...) 당연히 미국 흑인 선수들은 대부분 응하지 않았고 미국에서 벌어지는 반아파르트헤이트 시위에 동참하거나 지지했다. 다만 뉴질랜드 마오리족 럭비 선수들은 입국했는데 남아공 백인들의 인기 스포츠인 럭비 경기에 뉴질랜드 대표팀을 초청했는데 거기 포함된 마오리족 선수들을 뺄 수가 없어서였다 카더라.

이렇게 강경 일변도로 막나가는 억압 정책을 펴는 주제에 상황 따라 제 입장 휘꺼덕 휘꺼덕 바꾼 박쥐 같은 나라가 그 악명 높은 나치 독일 되시겠다(...). 후술하겠지만 아파르트헤이트는 정말로 거기서 배워 온 짓거리였다. 정확히는 높으신 분들 중 몇몇이 현지 친나치 단체에 가담한 것이긴 했지만. 뭐, 수상이였던 얀 스뮈츠부터가 1,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편에 붙어서 매우 잘 싸웠고 국제연맹 창설에 많은 기여를 하기도 했지만, 정작 본인은 아파르트헤이트의 근본이 되는 인종간의 분리를 지지했다. 참고로 하드코어 백인우월주의자들 사이에서는 1, 2차 세계 대전 때 괜히 유럽전쟁에 끼어들어서 피를 흘렸다능, 2차대전 때 나치에 참전했어야 했다능! 하고 얀 스뮈츠를 배신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나마 이건 나은 거라서 이전에는 세계에서 성공한 흑인들의 소개를 금지하기도 했다. 덕분에 운동 선수나 흑인 가수들, 연예인들을 남아공 흑인들은 존재를 몰랐으나 오래 가지 않아 알려졌고 흑인들도 돈 많이 벌고 백인들에게 인기인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뒤늦게 정부에서 그 유명 흑인 인기인들은 명예 백인이라고 주장했으나 당연히 통할 리가 있나(...)

5. 문화 탄압과 백인 간 갈등

아파르트헤이트란 이름 때문에 인종 차별만 생각하기 쉽고, 백인들끼리는 꽤 자유롭게 살았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정반대에 가까웠다. 아프리카너들 대다수가 믿던 칼뱅주의 교리에 근거해 극단적인 엄숙주의 사회를 추구했고 외부 문물에 대해서도 매우 폐쇄적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도입만 해도 페르부르트가 앞장서서 악마의 선물, 핵폭탄, 독가스 등에 비유하며 도입을 결사반대했고 결국 웬만한 흑인 국가들보다도 늦은 1976년에야 보급이 개시되었다.[33]

집권당이던 국민당(NP) 정부는 동성애[34][35], 음란물, 도박[36], 낙태[37] 등 사회적, 종교적으로 불온하다 판단되는 것들을 모조리 금지시켰고 일요일에는 안식일이라는 하여 백화점이나 극장 등에 대한 휴무를 강제했다. 그리고 아무리 백인일지라도 공산주의자를 포함한 좌파나 자유주의자들은 얄짤없이 감옥에 집어넣었다(...).[38] 그래서 백인 공산주의자들이 당시 ANC와 협력을 하며 반정부 활동을 펼쳤고 조 슬로보, 브람 피셔, 루스 퍼스트 등 수 많은 좌파 출신의 양심적인 백인들을 반아프르트헤이트 진영으로 가게 만들어 이들은 무장 투쟁, 문화 사회 계몽 운동, 법률 투쟁 등에서 ANC에게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안드레 브링크, 브레이튼 브레이튼바흐 등 당시 문학계의 아프리칸스어 문학 르네상스를 주도하던 인사들은 죄다 반체제 진영으로 넘어가 전 세계 학계, 문화계에서 남아공을 보이콧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거기에 당시 영화 산업도 상당히 최악이었다.배우들은 거의 백인들만 나왔으며 흑인들은 그냥 단역만 따내면 감사할 정도로 안나왔다.그나마 흑인들로만 이루어진 영화가 나오긴했으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의해 40년간(!) 금지되었다가 [39]리마스터링으로 다시 나왔을정도.

특히 남아공 공산당의 최대 거물 중 하나였던 브람 피스허르(Bram Fischer)는 보어전쟁 당시 오렌지 자유국의 거물 정치인이자 남아프리카 연방 내무장관을 지낸 아브라함 피스허르(Abraham Fischer)를 조부로 두었을 만큼 혈족 중심의 폐쇄적인 아프리카너 사회에서도 뼈대 있는 성골 집안 출신이었는데[40] 보장된 그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신념에 따라 반정권 인사로 투신함으로서 넬슨 만델라의 변호를 담당했으며, 결국 자기도 만델라 따라 감옥에 들어가 장기간 감옥 생활을 하다가 병보석 석방 이후 2주일 만에 죽어 남아공 당국만 빼고[41] 전 세계에서 살아 있는 양심이라고 칭송받았다. 상류층이고 명문가 출신이라 남아공 당국에서도 부담스러웠는지 추방과 망명을 조건으로 석방 제의를 했는데 이를 거부하면서 한 말이 폭풍간지다. "나는 자랑스러운 아프리카너이고, 나의 조국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다. 내 정부와의 정치적 마찰 때문에 내가 조국을 떠나야 할 이유는 없다." 한마디로 자신은 하나도 부끄러울 게 없으며, 떠나야 할 쪽은 아파르트헤이트 당국이란 소리. 이를 두고 유대계 여성 운동가이자 반아프르트헤이트 투사였던 루스 퍼스트(Ruth First)는 자신을 심문하는 아프리카너 경찰들에게 "브람 피스허르라는 내 소중한 친구이자 동지이며, 정말 멋진 사람이다. 무엇보다 당신들 아프리카너란 종족 전체의 오명을 뒤집어 쓰고 이를 깨끗히 하는 아프리카너의 마지막 양심이다" 라고 평했다.

역시 남아공 공산당의 간부였던 조 슬로보(Jose Slovo)와 루스 퍼스트도 유명한 편인데 이 둘은 부부로 활동하다가 루스는 1982년 모잠비크에서 남아공 경찰에서 보낸 편지 폭탄[42]을 받고 사망했고, 조 슬로보는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후 넬슨 만델라 정부에서 주택부 장관에 임명되는 등 고생 끝에 보상을 받는 듯 했으나 퇴임 직후인 1995년 암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이 둘의 생애는 1988년 조와 루스의 자식인 숀 슬로보(Shawn Slovo)가 각본을 쓴 '갈라진 세계(A World Apart)'를 통해 영화화되었다.

그 외로 영화 감독인 얀스 라우텐바흐(Jans Rautenbach)가 영화에서 아프리칸스의 정체성과 흑백 혼혈에 대한 영화를 많이 발표했는데,대표적인 작품이 디 칸디다트(Die Kandidaat, 1968)[43], 카트리나(Katrina, 1969)[44]가 출시되었으며 현재까지 남아공 영화사에 남아있다.

70년대, 80년대에 들어 대외적으로 남아공 정부는 로디지아 전쟁, 나미비아 독립 전쟁, 앙골라 내전 같은 주변의 냉전의 대리전에 본격 개입하기 시작했고, 남아공 정부 반대편에는 쿠바소련의 지원을 받는 좌파 민족주의 게릴라들이 있었기 때문에 매카시즘 공안 정국을 유지했다. 상술 된 조 슬로보, 브람 피스허르 같은 진성 좌파 반아파르트헤이트 인사들이야 도덕적 명분은 둘째 치고 어쨋든 법만 따지면 분명히 적성 외부 세력과 깊게 협조하는 이적 단체로 때려 잡을 수 있다 쳐도, 냉전기 전체주의적 독재 국가들이 그랬듯이 여기서도 좌파나 남아공 내외의 게릴라들과 전혀 상관 없는 자유주의 계열 백인 정치 세력도 탄압했다. 웨스턴 케이프의 주지사이자 최근까지 남아공 제1 야당인 민주 연맹의 당수였던 헬렌 질은 당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 77년 흑인 민족주의 사상가이자 반아파르트헤이트 혁명가였던 스티브 비코가 불법 체포 후 구타당해 죽은 사건을 취재하다 높으신 분들의 압력으로 사퇴해야 했고, 이후 반아파르트헤이트 여성 단체에서 활동하다 당국에게 찍혀서 도주 생활을 해야 했었다. 심지어 당시 자유주의 계열 거대 야당의 지도자격 인물들로서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백인들의 입장을 대변했던 해리 슈바르츠(Harry Schwarz), 헬렌 수즈만(Helen Suzman) 같은 전국구 정치인들도 도청, 감시 등의 당국의 위법적인 방해와 탄압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좀 자유주의적인 영국계 백인들도 이러한 정책에 불만을 품었다. 흑백 차별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을 뿐이지, 영국계 백인과 아프리카너계 백인의 대립 또한 보어전쟁 이후 뿌리가 깊어 영국계 백인들은 컬러드 계층이 투표권을 상실한 이후 정권의 핵심을 차지한 아프리카너계에게 정계에서 소외 당했다. 종교적으로도 네덜란드계는 근본주의 칼뱅주의 개신교를 믿었다면, 영국계는 보다 유연한 성공회를 믿었다. 물론 영국계라도 다 같은 건 아니라서, 경제권을 쥔 돈 많은 계층들은 흑인들이나 컬러드를 값싸게 부려먹을 수 있었던 점도 있어서 70년대 이후에 국민당 지지로 남아있긴 했다. 그러나 영국계이던 네덜란드계이던 유대계던 정부에 반항적인 백인들은 명예 유색인(...)으로 분류하고 진짜 유색인들보다도 요주의 대상으로 삼았었다.

당시 남아공에 적지 않았던 인도계 주민들 또한 비록 흑인들 만큼은 아닐지언정 도시 내 할당 구역 밖으로는 마음대로 나오지도 못하고, 교육도 전적으로 공동체 자체적으로만 해결해야 했으며, 사석에서는 여전히 쿨리 소리 들으며 멸시 당하는 등 인간 대접 못 받았다. 70년대, 80년대를 거치며 본격적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대내외적으로 궁지에 몰리기 시작하면서 인도계는 투표권을 부여하고, 어용 단체 몇개 만드는 식으로 분열과 통치를 위한 사탕발림을 꺼냈지만 대부분 인도계는 선거에 참여하지도 않고, 남아공 인도인 의회를 비롯한 인도계 정치 단체들은 ANC와 연대하는 걸로 회답했다. 유대인들 또한 공식적으로는 아프리카너 민족주의 정권이 전후 이미지 세탁 과정에서 반체제 파시스트 단체 시절의 반유대주의를 버리고, 무엇보다 냉전기 국제 역학 관계와 지정학적, 전략적 유사함에 따라 이스라엘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면서 공식적인 차별은 없었지만 문화사회적 차원에서 멸시의 경험은 여전히 흔했다. 이에 따라 남아공 유대인, 인도계 공동체들은 좌익 노선이던, 자유주의적 개혁주의 노선이든 많은 수의 저명한 반아파르트헤이트 인사들을 대거 배출했다.

물론 가장 극심하게 탄압을 받은 것이야 흑인들이었지만,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본질은 단순한 인종 차별 정권이 아니라 그 거물 정치인들 대부분이 2차 세계대전 시절 공개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나치스에 동감하고, 이를 모델로 삼았으며, 여기에 자기들 멋대로 해석한 근본주의적 칼뱅주의를 종교적 기반으로 삼고[45], 이를 바탕으로 한 인종적, 문화적, 사회적 순혈주의를 추구한 집단이었다. 이데올로기적 뿌리 자체가 전간기 파시즘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46] 이러니 당연히 주 된 타겟인 흑인이 아니라도 전반적으로 폭압적이고, 폐쇄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정권과 사회적 분위기에 조금이라도 제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숨막혀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당연하지만 지금까지도 남아공 백인 칼뱅교도들의 이러한 악행들은 인종차별뿐 아니라 위선적 행태까지 저지른 전형적인 사이비 근본주의자들의 행태라는 평가를 얻게 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지도자의 대명사격인 헨드리크 페르부르트피터르 빌럼 보타는 현재까지도 독재자이자 인종주의자라는 평가 아래 남아공 국민들의 말과 문장으로 신나게 부관참시를 당하고 있다.

6. 붕괴

1976년에는 소웨토[47] 지역에서 흑인 학생들이 아프리칸스어[48] 수업 반대 시위를 하자 무자비하게 진압을 하여 많은 사상자가 나기도 했다.

또한 나미비아 지역을 자국 영토로 불법 점유하고 1960, 70년대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등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포르투갈군의 식민지 독립 운동 탄압을 거리낌 없이 지지하여 아프리카의 모든 국가들을 비롯 전세계적으로 큰 반감을 불러왔다.[49] 국제적으로 비난여론이 빗발침에도 백인 정부는 귀를 틀어막고 신경쓰지 않았다.

사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국제사회의 압력에도 나름대로 자신 있었던 건 백인이 지배했던 로디지아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였던 모잠비크, 앙골라와 협력하면 타개할 수준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즉 아프리카의 백인 국가들끼리 협력하면 괜찮다고 본 것. 게다가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방 주요국가들이 비록 인종 차별 정책을 펼치는 남아공 정부를 공식적으로 비난하기는 했지만 당시 냉전 상황에서 반공주의를 표방하는 남아공 정부와 민간차원에서의 교역이나 비공식적인 교류는 계속 해왔기에 냉전 시기 동안 그리 치명적인 타격은 입지 않았다. 사실 당장 미국조차도 1960년대까지는 남부지역에서 인종차별 정책이 펼쳐져서 남아공을 무턱대고 비난하기에는 영 개운찮았을 테고. 지들이 남말할 처지가 아니었거든

그러나 모잠비크, 앙골라, 기니비사우 등 포르투갈령 아프리카 식민지 국가들이 1974년과 75년 사이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고 설상가상으로 로디지아의 백인 정부마저 권력을 잃게 되면서 점점 궁지에 몰리고 경제에도 큰 타격을 입는다.[50] 악이 받친 남아공 정부는 핵무기를 개발하면서까지 최후의 발악을 해대며 버텼으나 국내외의 소요에 염증을 느낀 젊은 백인들의 탈출이민과 침체된 경제, 국제사회의 압력[51]으로 인해 결국 F. W. 데 클레르크가 집권하면서 유화책으로 돌아섰고, 냉전이 해체되는 무렵이었던 1990년에 넬슨 만델라를 전격 석방, 협상과정을 거친 뒤, 1992년에 유색인종에게도 백인들과 같은 권리를 주는 법안이 통과되어서 흑인들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졌다. 그 결과 1994년에 반투스탄이 해체되고 백인정권과 유착하던 흑인 기득권층과 백인 극우층들이 강력하게 반발하지만 이들의 저항은 진압되었고, 1994년 4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ANC가 압승을 거두고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아파르트헤이트는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7. 폐지 후의 잔재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 평생의 타도 대상이었으며 결국 그의 당선과 함께 아파르트헤이트도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너무나 오래 지속된 정책이었기에 지금도 잔재가 남아서 말썽을 일으키고 있고, 현재까지도 고질적인 빈부격차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무너지기 직전인 1980년대부터 상당수(대략 80만명으로 추산된다)의 남아공 백인들이 타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1990년대 당시에는 흑인정권의 보복을 두려워해서라면 2000년대 이후에는 해외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구할려는 목적이 강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뿐만이 아니라 언어적으로 비슷한 영국, 아일랜드, 캐나다, 미국,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그리고 폴란드, 러시아,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등으로 이민간 사람들도 있다.[52]

사실상 아파르트헤이트가 단순 차별을 넘어서서 경찰이나 자경단의 잔학행위도 수반했기 때문에 보복이 두려웠던 건 사실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일부 계층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만델라조차도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라는 구호 아래 "잔학행위도 솔직히 공개적으로 자수하면 봐 주겠음" 하는 식으로 나갈 정도였으니.

남아프리카 항공에 아직도 A340 기종이 많고 한때 보잉 747 기종이 많았던 것도 아파르트헤이트의 잔재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대부분 아프리카 국가들은 아파르트헤이트에 항의하는 뜻으로 남아프리카 항공에 대해 항로를 열어주지 않았고 이로 인해 남아공에서 인도/홍콩 등지로 가기 위해서는 인도양을 건너야 했다. 또한 남아공에서 서구권으로 가기 위해서도 아프리카 대륙을 거치지 않고 대서양으로 빙 둘러서 갔다는 것. 당시 ETOPS 규정이 매우 빡빡하여 대양을 건너거나 가로지를 경우 쌍발기로는 이동할 수 없었다. 따라서 남아프리카 항공이 수요가 나지 않는 구간을 운항할 때에도 대형기를 사용하였고 대형기를 선호했다는 것은 아파르트헤이트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무기 시장에서도 남아공은 독자적으로 나름 견실한 무기들을 자체 개발해 생산하는 것으로 나름 명성이 있는데 이것 역시 아파르트헤이트의 산물이다.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국제사회로부터 왕따를 당해왔으니 성능 좋은 무기를 외국에서 수입해올 수가 없어 거의 모든 무기를 자체개발해서 충당해야 했던 것. 또한 소수의 백인만으로 군대를 편성해서 넓은 국경지대를 방어해야 했기 때문에 남아공군은 각종 차량을 이용하는 기계화가 잘 되어 있고 전투원의 생존성을 매우 중요시하게 되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군 항목 참조.

그리고 1960년대부터 30년간 남아공의 국제 경기 출장 금지[53]로 인해 경험 부족으로 인한 남아공 스포츠계의 질적 저하도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축구가 처참한데 1996년 자국에서 치룬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는 우승을 달성했고 1998년 부르키나파소 대회에서는 준우승을 기록했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과 2002년 한·일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하였으나, 2006년 월드컵에서는 예선에서 탈락하였다. 2010년 월드컵에서는 같은 해에 열리는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예선과 겸하는 바람에 불가피하게 월드컵 2차 예선에 진출하였고, 한물간 나이지리아에게 털리고 탈락했지만 개최국 자격으로 월드컵에는 자동으로 참가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개최국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1라운드 탈락. 개최국이 2라운드에 진출 실패한 최초의 사례를 남겼다. 게다가 2014년 월드컵에서는 한 술 더 떠서 1차예선부터 올라온 초약체 에티오피아에게 털리고 탈락했다.[54] 에티오피아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쳐잡고 피파랭킹이 50계단 이상 상승했다. 이후 2018 월드컵 예선때도 최종 예선에서 조 4위 꼴찌를 차지하여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실감케 하였다.

남아공 개혁교회 역시 한동안 인종 차별과 사회 분열을 조장한 종교적 배후 세력이었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으며 당연히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로는 신자수가 감소하고 몰락 직전까지 가기도 했었다.망했어요 현재는 그 시절에 대한 반성으로 유색인 신자를 적극적으로 포섭하여 겨우겨우 남아공 최대의 개혁교단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경향을 자유주의 신학(...)이란 핑계로 물고 늘어진 일부 꼴통 백인들은 아프리칸스 개신교회(AP Kerk)라는 백인 전용 교단을 만들어서 분리했다.[55] 물론 현대 남아공은 과거와 달리 백인들은 네덜란드나 영국 본토처럼 무종교인이 늘어나서 더 이상 젊은 세대들은 교회를 다니지 않으며, 사실상 백인계 기독교는 멸망했다고 보는 추세이다. 반면 흑인 기독교인들은 만델라와 투투라는 구심점이 있었고 신심이 대단해서 증가하는 추세이다.

아파르트헤이트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국민당은 노선을 전환하고 1997년에 신국민당으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1999년 총선에서 당세를 크게 잃고 궁여지책격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야당인 민주당[56]과 합당 하여 민주동맹을 창당했다가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분리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다가, 결국 2004년에 아프리카민족회의에 흡수되어 해산되었다. 이들로부터 갈라져나왔던 재건국민당(HNP)은 2014년 기준으로도 군소정당으로 간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와 별개로 2008년 8월에는 극우 포퓰리즘 정당으로 이름이나마 부활했다. 하지만 유색인종 유권자들의 거의 다수를 적으로 돌리고 있고, 백인들조차도 대부분이 민주동맹에 표를 던지고 있는 만큼 그냥 듣보잡(...)

한편으로 흑인들이 정치적인 기득권을 차지하면서 다른 의미로 남아공이 개판이 되었다는 얘기[57]도 있는데 1994년 이후 남아공에선 새로운 다른 3000만의 국민을 먹여살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58] 경제성장률은 1980년대에 비해 오르기는 했지만 재정건전성에 신경쓴다고 예산 지출을 대규모로 하거나 하지는 않았기에 경제성장률이 높지는 않아서 대규모의 일자리 창출을 하기에 충분치 않은 수준이라[59] 당연히 대도시 지역에 실업자가 급속히 불어나면서 범죄율이 크게 늘어났고 그 여파로 백인들 중산층들이 대거 교외지역으로 빠져나가면서 요하네스버그나 프리토리아 등 주요 대도시의 중심가는 슬럼화가 가속화되었다는 것. 거기다가 흑인 우대 정책(BEE:Black Economic Empowerment)으로 인해서 백인들이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졌고 백인들의 유출이 가속화 된다는 것이고 백인 빈민층이 40만에 달한다는 등[60] 백인들의 불만이 상당하며 그래서 백인들을 대상으로 한 아파르트헤이트를 시행하고 있다는 말도 나오고 있을 정도지만, 애당초 흑인들 입장에서는 제국주의 시절부터 흑인들의 땅과 여자 및 모든 것을 빼앗고 부를 쌓아 배불리 떵떵거리며 잘살았던 백인들을 생긱해본다면 역차별설이나 남아공 개판설은 그야말로 적반하장. 여전히 백인들의 실업률은 흑인에 비해 크게 낮은데다가 주요기업들과 직책들도 백인이 차지하고 있는 등 백인들이 일반 흑인들보다는 훨신 잘 살고 있기 때문이다. 흑인들 사이에서도 경제적 아파르트헤이트가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고 나오고 있다는 등 불만이 많다.

또한 반투스탄을 다시 남아공에 흡수하는 과정에서 반투스탄 지역의 공무원들[61]이 구조조정되는 일 없이 그대로 남아공 공직사회에 흡수되면서 남아공 공직사회가 부패해졌다는 것이고 더군다나 BEE가 시행된다 한들 백인은 백인대로 불만을 가지고 흑인들 중 빈민층은 여전히 낮은 교육수준을 지니고 있기에 여전히 기회가 돌아가지 않은건 마찬가지이다.[62]

더군다나 전력같은 걸 민영화한다거나 파업 강경 진압 드립을 치고 노조와 공산당과 연합하면서[63] 정권을 잡고 있는 주제에 최저임금도 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 흑인들은 여전히 먹고 살고 힘들다며 불만이 강하고 BEE로 새로 등장한 흑인 중산층 입장에서도 잘 먹고 잘 사게 되었다지만 치안이 열악해서 길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기 힘들고, 대학등록금도 비싸서 자식들을 제대로 공부시키는 건 물론이고 취업해봐도 월급이 적다며 불만이 많다. 요약하자면 극심한 탄압이 폐지되고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도 없어졌다지만 흑인들이든 백인이건, 컬러드, 아시아계도 어느 하나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위에 나오는 불만이나 현상의 원인은 사실 ANC 정부의 무능이 원인이다. 만델라 시기야 아파르트헤이트의 후유증과 경험 미흡, 국민당과 인카타 자유당과의 연정, 과거사 청산등으로 인해 여러모로 복잡한 사정이 많아서 그렇다지만[64] 타보 음베키 때부터 그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나기 시작하여 경제는 성장했지만 이 시기를 기점으로 부패가 횡행하기 시작하고 인프라 공사의 구축도 늦어지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한데다가, 더군다나 경제성장의 과실이 골고루 돌아가지 않으면서 흑인들 사이에서의 불만이 팽배해지기 시작했고 치안 문제도 해결되지 못했다. 여기에 BEE의 실행으로 백인층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커졌고 음베키의 대안으로 집권한 주마도 애시당초 백인들에게 상당히 적대적인 언행을 보여온 데다가 집권 후에 공약(부의 재분배)을 지키지 않았고, 치안 문제는 상당부분 해결되었다지만 경제는 원자재값 하락의 여파로 침체일로에 있고 그 자신도 부정부패를 일삼으면서 흑인도 백인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

8. 기타

  • 1980년대 말 90년대 초 남아공 에서 흑인들이 반 아파르트헤이트 항쟁을 벌였을때 자신들이 백인에게 당한 수모를 그대로 백인들에게 돌려주자는 감정이 그들 사이에 팽배해 있었다. 이드리스 엘바 주연의 만델라: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 (2013년작) 을 보면 반 아파르트헤이트 시위에서 죽은 아들의 시체를 끌어앉고 오열하는 흑인 여자가 넬슨 만델라의 부인인 위니 만델라에게 꼭 복수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물론 아들의 죽음에 충격과 분노가 커서 나온 말이겠지만 당시 흑인들에게 이런 분위기가 있었다는 것. 만델라와 데즈먼드 투투 주교 그리고 F.W 드 클레르크가 노벨상을 받은 이유 중 하나가 이런 상황에서 흑인들에 의한 대(對) 백인 테러와 폭력을 어느정도 막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 영화 디스트릭트9은 남아공의 인종차별을 비판한 영화이다. 실제로 당시에 백인들이 흑인을 대한 태도는 일반적인 인종차별적인 생각인 '더럽다, 하층민'의 수준이 아니었다. 물론 이것도 충분히 글러먹은 사상이지만, 실제 태도는 인간의 형태는 갖추고 있지만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 정도의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그 당시 외국에서 남아공의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정확히 저런 취급을 했다는걸 생각해본다면.. 그렇기에 영화적으로 차별 대상을 외계인으로 설정한 것. 앞부분에 장황하게 나오는 외계인의 범죄나 두려움에 대한 다큐는 실제 나이지리아 입국자 및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다큐프로에서 따 왔다.괜히 제노(Xeno)포비아가 아니다? 그리고 케이프타운 인근에 나이지리아에서 건너온 흑인들이 모여 사는 슬럼가가 있었는데 도시가 커지면서 그곳이 노른자 땅이 되었고[65] 백인들은 여러 민족이 모여 사는 그곳을 '여러 민족이 교류하면 다툼만 일어날 뿐' 이라면서 강제로 백인거주지로 설정하고 기존 주민들을 몰아내었다. 정작 다툼을 만들어내는 건 자기들이면서 그곳이 바로 디스트릭트6. 영화 내에서도 슬럼가의 검은 세력이 나이지리아 갱단으로 묘사된 것이 그런 이유이다.
  • 2013년 11월 25일 이스라엘 방송 우브다에 나온 유태계 미국인 영화 제작자 아르논 밀천(Arnon Milchan)(그의 제작, 기획영화)이 말하길 1970년대 아파르트헤이트를 취하던 남아공에게 이스라엘 유태인 이민도 받아들이고 친미, 친이스라엘 정책을 취하면 그 댓가로 헐리웃 영화를 통하여 남아공을 좋게 받아주겠다고 더러운 거래가 시도되었다고 한다! 뭐 남아공 기득권을 가진 보어 및 백인계들이 거부한 탓에 빡돈 헐리웃에서 남아공 백인층과 아파르트헤이트를 까는 영화를 제작하는 것으로 보복했다는 것. 이에 대하여 밀천이 제작한 노예 12년 홍보를 위하여 그랬다는 의견도 있었지만...어쨌든 이런 더러운 거래가 있었던 셈.
  • 이 때문인지 몰라도 1970년대 이후부터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 폐지까지 아파르트헤이트를 신나게 까는 영화가 영미권을 중심으로 나왔는데, 이때 나온 영화로는 자유의 절규, 드라이 화이트 시즌, 파워 오브 원, 보파!, 갈라진 세계, 친구들이 있다. 다만 흑인이 주인공인 '보파!' [66]나 각본가의 개인사가 절절히 묻어나오는 갈라진 세계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너무 백인 중심 아니냐는 비판을 받는 편이다.
  • 리쎌 웨폰 2에서도 멜 깁슨이 Stop Apartheit Now라고 써진 피켓을 들고 영사관 앞에 등장하는 등 아파르트헤이트를 비난하는 장면이 나오며 남아공 미국 영사관[67]이 마약 밀매에 살해,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최종보스로 나온다. 웬만한 적성국이라도 저 수준으로 영화에서 다룬다면 외교적 마찰 등 많은 문제를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도 저런 식으로 묘사가 되었다는 건 당시 남아공이 찍혀도 크게 찍혔다는 뜻. 이 시절의 남아공은 말 그대로 당시 북한급의 대우나 별 다를바 없는 취급을 받았다.
  • 유명한 아나그램이기도 하다. 영문명인 The apartheid를 재배치하면 Hit,rape,death가 나온다.
  • 남아공의 코미디언트레버 노아는 어린 시절 이 아파르트헤이트를 경험한 적이 있어서 공연 때 이를 언급하기도 한다. 트레버는 어머니가 흑인이고 아버지가 스위스계 백인이었는데, 위에 나와 있듯이 흑백 결혼은 불법이어서 오랫동안 이를 숨겨야 했다. 심지어는 부모님과 함께 길을 걷다가도 멀리 경찰이 보이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남남인 척 길 맞은편으로 걸어야 했다고 한다.
  • 장 미셸 자르넬슨 만델라가 석방되기 2년 전, 자신의 앨범인 Revolutions에서 이 아파르트헤이트와 싸우다 프랑스 파리에서 암살당한 Dulcie September에게 헌정하기 위해 September라는 곡을 작곡, 수록한 적이 있다.

9. 관련 문서


  1. [1] 이런 아이디어는 '분리하되 동등한(Separate but Equal)'라고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 유지한 적이 있었고 20세기 초반에는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 심지어 저 판결이 나왔을때 반대했던 사람은 존 마셜 할란 이라는 사람 딱 한 명 밖에 없었다.(9명 중 8명 찬성, 1명 반대) 그러나 현실에서 인종 분리는 곧 차별과 다를 바 없다는 지적을 받았고 1950년대에 위헌 판결을 받아 폐지되었다.
  2. [2] 1960년 앨버트 루툴리, 1984년 데즈먼드 투투, 1993년 넬슨 만델라, 프레데리크 데클레르크.
  3. [3] 1991년 나딘 고디머, 2003년 존 맥스웰 쿳시.
  4. [4] 다만 좀 시간이 흐른 뒤로는 그냥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해서 이주한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5. [5] 네덜란드 본토처럼 남아공 개혁교회도 시간이 흐르면서 분열 과정을 겪었고, 현재는 크게 3개의 교파로 나뉘어져 있다.
  6. [6] 하지만 흑인이 백인에게 맞설 수 있게 된 원동력도 역시 칼뱅주의였다는 게 아이러니다.
  7. [7] '아프리카너(Afrikaaner)와 '아프리칸스어(Afrikaans)'라는 말 자체도 아프리카인이라는 뜻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백인은 맞지만 토착 아프리카인이라는 것.
  8. [8] 이를테면 국회의원 선거권을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백인과 혼혈인에게만 보편적인 선거권을 부여하고(여성은 1930년부터) 흑인과 아시아인들에게는 돈 많은 사람에게만 선거권을 주는 식이었다.
  9. [9] 페이건 위원회(Fagan Commission)를 설치했는데 이 위원회에서 인종차별을 완화해야 한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10. [10] 여담으로 이 시기에 넬슨 만델라는 이 시기 연합당 정부가 인도계 주민들을 차별하려는 조짐을 보이자 연합당 정부 규탄 집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11. [11] 남아공이 영국과 완전히 결별한 것은 1961년의 일이다.
  12. [12] 참고로 당시 남아공에선 영국처럼 소선거구제를 체택하고 있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에는 네덜란드처럼 전국 단위의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다.
  13. [13] 덕택에 만약 연합당 정부에서 도시 지역의 선거구를 대폭 늘리는 등 선거구 조정을 했으면 인종차별이 얼마간 더 지속될 수는 있어도 인종차별 정책 폐지 시기가 몇십년 더 앞당겨졌을 거고 흑인들과 컬러드 계층이 오지로 내쫓기거나 백인과 섹스했다는 이유로 강제로 처벌당하는 대참사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14. [14] 웃긴 게 반투스탄에서는 흑인 및 유색 인종 여성의 성관계가 허용되었다. 뒤로는 이런 식으로 성관계를 했던 거. 항목 참조.
  15. [15] 연합당과 노동당은 이 선거에서 국민당의 4배나 되는 선거비를 썼고 득표율에서도 국민당을 앞섰지만(50.4% VS 49.4%) 결국 게리맨더링의 한계를 넘기지 못했다.
  16. [16] 당시 제1야당이었던 연합당은 국민당의 막장짓거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거진 당하는 모양새가 되었고(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해 반대했긴 했지만 연합당의 주요 지지층 중 하나가 부유한 백인들이었던지라 적극적인 대응을 하기 어려웠다.) 결국 지지 기반이 눈 앞에서 대거 날라가는데도 변변한 대응책 하나 못 내놓는 연합당의 무능함에 빡친 일부 당원들이 1959년에 진보당으로 분당해나갔다.
  17. [17] 그래서 월드컵에선 지역 예선조차도 나가지 못하고 올림픽에도 역시 나갈 수 없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아프리카 국가 전원이 불참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는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럭비 경기를 한 뉴질랜드의 참가 허용에 반발해서였다.
  18. [18] 보어인이 아니고 2살 때 암스테르담에서 남아프리카로 이주했다.
  19. [19]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람의 손자는 할아버지가 만든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반감을 갖던 사람이며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직후 아내인 멜라니와 함께 진상 규명 위원회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기도 했었다. 때문에 할아버지와 비슷한 성향이던 아버지로부터 의절당한 적도 있었다.
  20. [20] 왜 백인들에게도 미움 받았는지는 후술
  21. [21] 백인계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흑백 혼혈. 단, 직계는 아니다. 일단 부모님은 각각 포르투갈인과 그리스인이었고, 그저 그보다 더 위의 조상 중 누군가가 흑인이었던 것.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흑인으로서의 특징이 어느 정도 몸에 드러난 탓에 피부가 하얀 데도 백인들 사이에서 따를 당하며 살았다고 한다.
  22. [22] 암살 사유는 명예 백인으로 인정해 놓고서는 불이익만 잔뜩 줬다는 것. 이에 대해서는 밑의 문단을 참고 바람.
  23. [23] 아프리칸스어로는 '퇴위스란트(Thuisland)'라고 부른다. 이름부터가 사실 '대도시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네 집으로 돌아가라'는 뉘앙스가 있다.
  24. [24] 아파르트헤이트가 한창 진행 중이었던 1980년대에 나온 동아 세계 대백과 사전에서는 남아공의 인종 차별 정책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이 홈랜드가 원주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퍽이나 별쇄 화보 속의 미소를 짓는 원주민을 보여 주면서까지 설명했다(...). 물론 실제로는 그럴 리가 없다.
  25. [25] 단, 브리태니커나 일부 자료집에서는 세계의 국기를 수록할 때 이 4개국을 빼놓지 않았다. 홈랜드 깃발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이 링크를 참조할 것.
  26. [26] 심지어 부모 양쪽이 백인인데도 머리가 좀 곱슬이고, 피부색이 좀 검다는 이유로(정확히는 조상들 중 한 사람이 흑백 혼혈로 오랫동안 대대로 발현되지 않았다가 격세유전 현상으로 인해 발현된 것이다) 흑인 판정을 받는 바람에 인생을 망친 사례까지도 있었단다(...) 참고로 이 사연의 주인공은 바로 '샌드라 레잉(Sandra Laing)'이라는 여성이며 2008년에 'Skin'이란 이름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27. [27] 다만 1980년대 이후 줄루족계의 잉카타 자유당은 ANC와 대립하기 시작하면서 남아공 정부의 지원을 받았고, 총선 실시 과정에서 깽판도 좀 치기도 했다.(...)
  28. [28] 그 유명한 르완다 학살만 해도 알 수 있다. 벨기에르완다에서 저지른 부족 이간질 정책의 여파로 벌어진 일이다.
  29. [29] 민주화가 이루어져 아프리카 민족회의(ANC)가 집권당이 되어도 부족간의 반목, 정확히 줄루와 코사의 사이는 그닥 좋지가 않았다. 만델라야 모든 민주화 투쟁을 이끈 영웅이니 부족에 상관없이 존경받았지만 후임인 음베키는 코사 족이었고 줄루 족으로부터 고까운 평가를 받았다. 현 대통령이자 반 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의 공산주의계 네임드였던 줄루 족 출신 제이콥 주마와 음베키는 앙숙지간이었다. 2008년 9월 음베키가 대통령 직에서 하야하고 이듬해 대선에서 주마가 압승함으로 줄루가 정권을 잡은 이후에도 코사와 줄루의 라이벌리는 아직 진행형.
  30. [30] 예를 들면 화장실(...). 맨 위의 사진에서도 나오지만 당시에는 공원 벤치조차 흑인용과 백인용이 따로 있었다.
  31. [31] 다만 중국 대륙 출신의 본토 중국인은 컬러드로 인정해서 차별 대상이었다고 한다(...)
  32. [32] 혼혈이긴 해도, 조상 중에 흑인 피가 섞인 거지 부모님은 각각 그리스인과 포르투갈인이라 피부는 하얬다고...
  33. [33] 참고로 이후 텔레비전조차도 인종과 민족에 따라서 볼 수 있는 채널을 제한했다(...). 예를 들면 1번 채널은 백인 전용(영어와 아프리칸스어를 번갈아 송출), 2번은 줄루족과 코사족용, 3번은 소토족, 4번은 도시에 사는 흑인들 전용으로 채널을 배정하는 식이었다.
  34. [34] 당시 남아공 정부에서 동성애를 교정한답시고 게이, 레즈비언들을 강제로 군에 입대시켰으며 이들은 그 과정에서 온갖 잔혹한 치료(?) 과정을 거쳤고 치료(?)가 더디다고 판단되면 레즈비언에게는 교정 강간, 게이에게는 강제 성전환 수술을 자행했다. 이를 'The Aversion Project'라고 명명하며, 피해자는 약 9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35. [35] 동성애 처벌법은 1996년에 폐지되었으며, 현재 남아공은 아프리카에서는 유일하게 동성결혼을 허용하고 있는 국가다. '국민당 정권하에 탄압받은 모든 이는 내 형제자매'라는 정치적 합의 하에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되고 새로 수립된 헌법에서 모든 종류의 차별을 금지했고, 성적지향도 거기에 포함된 것. 물론 실제 사회에선 동성애자들이 은근히 차별을 받는 경우도 많고 동성애자들을 상대로 한 범죄도 발생하지만 그래도 아프리카 내에서는 그나마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나은 편이다.
  36. [36] 90년대 이후 복권, 경마와 카지노를 전면적으로 합법화했고 특히 카지노(참고로 남아공은 한국과 인구수가 비슷한데 카지노 숫자가 37곳이나 된다!)에서 거두어지는 수입이 상당하고 동시에 사회간접시설 확충 및(카지노를 지어서 영업하는 조건으로 사회간접시설을 지어야하기 때문) 고용창출(주로 흑인들)도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여느 카지노가 그렇듯이 간간히 아니 많이 도박중독으로 돈을 탕진하는 사람들이 나온다거나 하는 문제점은 있지만.(...)
  37. [37] 참고로 남아공에서 1996년에 낙태가 합법화 되었다.(임신 13주까지 본인 선택에 의해서, 그 이후에는 건강상 문제가 있을 때 허용)
  38. [38] 물론 이들에게 무신론자란 이유로 괘씸죄를 씌운 건 덤.
  39. [39] 정확히 말하면 국민당 정권이 붕괴된 이후에도 상영이 되지 못하였다.
  40. [40] 다만 정당은 남아프리카당-연합당 계열이긴 하다.
  41. [41] 현재까지 몇몇 보어계 극우파들은 희대의 배신자라며 말도 안되는 고인드립을 치고 있다나(...)
  42. [42] 말 그대로 뜯으면 폭약이 바로 터지는 소포 폭탄이다.
  43. [43]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정치 스릴러 영화로 알려져있다.
  44. [44] 흑백 혼혈과 백인의 사랑을 다룬 영화로 당시 남아공 사회를 생각해본다면 상당히 파격적인 영화였다.
  45. [45] 우리나라에서도 장로교의 신학적 기반인 그 칼뱅주의 맞다. 애초에 아프리카너 민족의 문화적, 사회적 정체성의 근본은 네덜란드지만 막상 본국 네덜란드는 근대 세계를 겪으며 자유주의적인 곳으로 발전했던 반면, 이런 자유주의적 모습에 반발한 남아공 칼뱅교는 더더욱 수구적이며 근본주의적 성향을 띄게 되었고 모국 네덜란드에 대해서는 칼뱅주의를 배신하고 뿌리를 팔아먹었다고 비난했다.
  46. [46] 당장 훗날 남아공의 총리가 되는 다니엘 프랑수아 말랑, 발타자르 요아네스 포르스터(B. J. Vorster) 등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거물 지도자들 중 다수가 2차대전 당시 반영, 친독 현지 나치 끄나풀이었던 우마차 근위대 (Ossewabrandwag)라는 조직에 가담했던 죄로 콩밥을 먹었었다.
  47. [47] 요하네스버그 남서쪽에 위치한 흑인 빈민가. 얼핏 들으면 아프리카 흑인들의 토속어에서 따온 지명 같지만 사실은 South Western Townships(남서 거주 지역)이라는 영어 지명의 줄임말이다.
  48. [48] 보어인들이 쓰는 네덜란드어가 변형된 말이다.
  49. [49] 심지어는 앙골라와 모잠비크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자 이들 국가들에서 벌어진 내전에까지도 무단 개입하기까지 했다.
  50. [50] 로디지아 입장에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가 배신을 때렸다고 봐도 좋은 정도인데, 로디지아가 완전히 궁지에 몰리자 본인들도 거부한 흑인다수 자유정부를 세우는 것에 동의하고 오히려 로디지아/짐바브웨를 협박했다. 그야말로 내로남불
  51. [51] 미국영국은 반공을 표방했던 남아공 정부를 지원하지는 않았어도 크게 압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가기 시작하면서 남아공의 깽판을 내버려둘 이유가 사라졌다.
  52. [52] 1990년대 초반에는 백인인구가 500만을 넘는 수준이었는데 대대적인 이민과 출산율 저하(2.1명에서 1.8명)로 한때 430만에 못미치는 수준까지 인구가 감소하다가 2000년대 중반부터 다시 인구가 늘기 시작해 2010년대 초반에는 460만명까지 늘어났다.
  53. [53] 올림픽은 물론 신흥국 경기 대회에도 초대받지 못했다.가네포가 올림픽에 대한 반발성 대회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만의 리그에서 조치 따돌림 당했다는 건 뭐... 답이 없다
  54. [54] 2014년 월드컵에서는 비록 지역 예선에서는 떨어졌지만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 팀이 딱 3팀 있었다. 독일과 박빙의 승부를 연출한 스웨덴, 아르헨티나를 쳐잡아서 세상을 놀라게 했던 베네수엘라, 그리고 남아공을 잡고 최종예선까지 가서 나이지리아와 박빙의 승부끝에 탈락한 에티오피아이다.
  55. [55] 신학적, 정치적 성향이 모두 보수적이라 유색인의 입교를 금하고 있다. 네오 나치주의자인 외젠 테르블랑슈(Eugene Terre'Blanche)가 생전에 이 교회를 다녔다.
  56. [56] 계보상으로 보면 위에 언급된 연합당(UP)계열이다.
  57. [57] 다만 여기서 걸러들어야 할건 있는데 1990년대 이전에도 흑인 거주지의 상황은 애초에 좋지도 않았기에 치안이 좋을수가 없었고(...) 주요 대도시 지역에서도 컬러드와 아시아계의 항의로 인해서 수시로 시위같은것이 일어나기도 했다. 단지 흑인이 범죄를 저지르면 혹독하게 처벌하기 때문에 생계형 범죄가 덜 벌어진 것이다. 물론 1990년대 이후로는 대도시 지역의 슬럼화가 가속화되면서 범죄율이 급증한건 맞는 말은 맞는말이기는 하다.
  58. [58] 아파르트헤이트 때는 전체 인구의 10%를 겨우 차지하는 백인들이 남아공 영토 대부분을 썼고 거기에 있는 산업시설들도 전부 다 그들만을 위한 것 이었다. 나머지 90% 이상의 흑인들은 홈랜드에서 백인들과는 비교도 안되는 빈약한 인프라로 살았다. 그런데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되고 나니 10%를 위한 산업기반을 100%를 위해 써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59. [59]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넬슨 만델라 시기에 3%대였고, 타보 음베키 시절에는 5%대를 기록했고 주마때 와서는 원자재 가격 하락의 여파로 성장률이 다시 떨어졌다. 뭐이 정도도 서구권 기준에서 볼때는 높다지만 문제는 당시만 해도 남아공의 연 인구증가율이 2%에 달했고 1960-70년대 당시에 출산율이 6명대에 달했기 때문에 노동력 증가율은 5%대에 달하던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교육정책의 여파로 인해서 이들의 교육수준도 낮았기에 숙련직으로 진출할 기회도 적었으며 주변국에서도 노동자들이 몰려오는 상황인지라 실업률은 전혀 줄지 않았다.
  60. [60] 사실 1960년대에 거의 사라졌던 백인 극빈층이 등장하게 된건 1980년대의 남아공의 경제재제가 가속화 되었을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에 남아공의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지고 흑인들의 저항이 가속화되어 군사예산이 크게 늘어났는데 그 반대급부로 복지예산이 크게 줄어들어서 자연히 백인들에게 제공되었던 복지정책도 급속히 축소되었다. 경제권을 쥐고 있던 영국계 백인들은 일단 쌓아놓은게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빈곤층으로 떨어지는 사람이 적었지만 상대적으로 못먹고 못사는 사람이 많았던 보어인들 사이에서 중산층에서 빈민층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들의 백인은 흑인정권이 들어서면 더 못먹고 못사는 흑인들이 그 지원대상이 될게 뻔했기에 이들은 정치성향에서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고 아파르트헤이트 후반기에 국민당보다 꼴통인 보수당이 원내 2당이 될수있었던것도 이들 빈민층들이 흑인이 집권하게 되면 그야말로 쩌리 오브 쩌리가 될수있다거나 백인들을 강간 혼혈 학살 인종청소하여 흑인천국을 만들 수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물론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난 이후에 이들에게는 다행히도 백인들을 인종청소한다거나 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정책지원에서 밀리면서 쩌리 신세가 된건 맞고, 이들은 해외에 이주할 여력도 못 되기 때문에 그대로 남아공에서 눌러 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당장 3000만이 넘는다고 추산되는 흑인 빈민층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판에(...) 쪽수 자체가 적은 백인 빈민층 문제가 해결되기는 앞으로도 요원할 것이다.
  61. [61] 반투스탄도 명목상으로는 국가였기에 당연히 국가가 돌아갈려면 공무원을 고용해야하니 공무원을 고용하기는 했다. 물론 대다수의 반투스탄이 상황이 막장이었지라 공무원들도 부패하기 좋은 환경이기는 했다.
  62. [62] 사실 대학등록금이 비싸서 그렇다는 얘기가 많다. 대학에 들어와야 좋은 일자리를 얻을수 있는 건 남아공도 매한가지인데, 빈민층들이야 아파르트헤이트 해체 이후에 학교가 대대적으로 늘어나면서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받는 비중이 크게 늘어났기는 하지만 대학등록금이 비싸다보니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경제력이 안 되어 갈 수가 없고, 자연히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허드렛일이나 해야한다는 것이다. 참고로 남아공의 대학 등록금 수준은 연간 평균 10만 랜드로 약 850만원 수준인데 빈민층은 감당이 안되고 중산층들도 감당하기 부담되는 수준이다. 이 때문에 백인 학생들까지 등록금 시위에 참여하곤 한다고.
  63. [63] 공식적으로 ANC는 남아공 최대 노조인 남아프리카 노동 조합 회의 (COSATU)와 남아공 공산당과 삼자 동맹 (Tripartite Alliance)라는 선거 연합을 맺고있다. 물론 여기 서술 된 이유로 현대 들어와 코사투와 공산당 내에서도 이 연합을 깨버려야 한다는 의견도 심심찮게 부상하고 있다. 첨언으로 이것 가지고 실재로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은 어설픈 반공 멕카시즘 기믹을 띄워 ANC를 빨갱이 소련 첩자라고 불렀고, 현대에도 몇몇 인종차별주의자들과 극우쪽 인간들은 여전히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저항은 빨갱이들의 사주니 뭐니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넬슨 만델라 본인이 자서전에서 한 말 한마디로 반박된다. "공산당이 우리를 이용해먹으려고 들었다고 주장할 사람들은 항상 있을것이다. 하지만 그런식으로 따지면 우리(ANC)가 공산당을 이용해먹었다고 못할 건 뭔가?"
  64. [64] 사실 1990년대 초반에 남아공이 백인 극우파의 반발과 흑인내의 갈등, 반투스탄 기득권층의 저항 등 여러가지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있었기에 백인 대학살이나 내전이 일어날 수 있다는 예측까지도 나왔던걸 보면 사실 양호하게 처리한 수준이기는 했다. 물론 아파르트헤이트 청산을 너무 온건하게 했다는 불만도 있는데다가 에이즈의 확산을 막지못했다는 문제점이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흑백화합정책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끈건 사실.
  65. [65] 강남이 논밭이였다가 서울특별시가 개발되면서 노른자 땅이 된 것처럼.
  66. [66] 모건 프리먼이 감독했다.
  67. [67] 미국은 그 당시 남아공과는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해 단교 상태였으므로 대사관이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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