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이노키

현역 시절

현재

1. 개요
2. 전성기 시절
3. 안토니오 이노키 VS 무하마드 알리
4. 안토니오 이노키 VS 아크람 파르완
5. 이노키즘
6. 여담
7. 정치
8. 둘러보기

1. 개요

[1]

WWE 명예의 전당 헌액자

본명

이노키 칸지(猪木 寛至)

별칭

Burning Fighting Spirit
(불타는 투혼)

출생일

1943년 2월 20일

출생지

일본 요코하마

거주지

일본 도쿄

신장

191cm

체중

102kg

피니시 무브

마성의 슬리퍼, 엔즈이기리, 만자 굳히기[2]

테마곡

Michael Masser - 炎のファイター 〜INOKI BOM-BA-YE〜

"사람은 걸음을 멈추었을 때, 도전을 그만두었을 때 늙어가는 겁니다.

이 길로 나아가면 어떻게 될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하면 길은 없습니다. 일단 한 발 내디디면,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길이 될 것입니다."

일본 프로레슬링 사상 가장 성공한 선수로 예명은 불타는 투혼

프로레슬링을 통해 부와 명예, 인맥, 권력을 모두 쥐고 일본 참의원까지 했던 사람. 한마디로 인생의 승리자.

탄광산업을 경영하는 유복한 집안에 태어났으나, 이노키가 5살이라는 어린 나이 때 아버지가 사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2차 세계대전 뒤 가업이 도산하여 브라질로 이주하게 되고, 이후 농장에서 가혹한 노동을 하는 동시에 투포환 선수로 활동하다가 마침 브라질을 방문한 역도산의 눈에 띄어 제자가 된다. 당시 역도산의 지시로 '귀국자녀'가 아닌 일본계 브라질인이라는 컨셉으로 활동하게 된다. '안토니오'[3]라는 링네임도 브라질인 이미지를 위해서 붙인 것이다.

데뷔전은 1960년 9월, 상대는 오오키 긴타로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활동하던 김일로, 시합은 김일의 완승으로 끝났다. 연습생 시절 역도산에게 늘 구박받던 안토니오 이노키에게 김일은 선배로서 자상하게 대해줬다고 하며 이후 이노키와 김일, 자이언트 바바는 역도산의 3대 제자로 꼽히며, 이 세 명은 각각 신일본 프로레슬링, 일본 프로레슬링, 전일본 프로레슬링의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전성기를 이끄는 공로자가 된다.

일본 프로레슬링 시절, 이 당시 일본 프로레슬링은 니혼TV와 TV아사히에서 중계를 하고 있었다. 니혼TV가 먼저 방송을 시작했기 때문에 니혼TV쪽에 좀 더 공을 기울여 자이언트 바바는 니혼TV에서만 나오고, TV아사히 쪽에는 안토니오 이노키 등이 출연했다. 하지만 1971년에 일본 프로레슬링 경영진과 대립을 했는데 당초 안토니오 이노키와 함께 나서기로 했던 프로레슬러들이 모두 이탈하는 바람에(…) 이노키 혼자 반기를 든 꼴이 되어 해고당한다. 이 때문에 독자노선으로 나가서 1972년 1월 13일에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개양하게 된다. 라이벌 자이언트 바바전일본 프로레슬링은 같은해 10월에 개양했다.

양대 단체에 인기가 모두 빠져나가 경영난에 빠진 일본 프로레슬링은 1973년 4월 1일에 신일본 프로레슬링과의 합병을 추진했지만, 김일 등의 반대로 실패하고 몇몇 선수를 뽑아오는 데 그쳤다. 4월 6일에는 TV 아사히와 방영 계약을 맺는 데 성공하여 단체를 반석에 올려놓았다.

일본 극우당인 일본의 마음(日本の心)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안토니오 이노키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한 정치인들하고는 야한 단어(下ネタ)를 쓰며 외교해야 한다며 북한 정치인이 '사실 북한 미사일은 미국에 향해있지 일본에 향해있는것이 아니니 걱정을 말라'라는 대화의 대답에 '북한에는 미인이 많으니 우리 일본인들의 미사일(거시기)는 북한에 향해있다'라고 막말을 하여 화제가 되었다.http://virates.com/entertainment/2645529

2. 전성기 시절

전성기 시절의 안토니오 이노키는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적 프로레슬러였다.

가운을 걸치고 목에 수건을 두른 채 원기왕성하게 달려와 링에 올라, 항상 강조한 투혼을 그림으로 그린 듯한 경기를 보여준 뒤 폴을 따내고는 벌떡 일어나, 하늘을 향해 번쩍 주먹을 들어 올리며 "다아-!"라고 외쳤는데, 이 제스처는 이노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엄청나게 많이 패러디 된다. 일본의 영상매체나 활자매체 등에서 왠지 엄청 뜨거운 표정으로 주먹을 들어 올리며 괴성을 지르는 장면이 있다면, 십중팔구 이것의 패러디라고 보면 될 정도다. 그러나 국내 정발되는 만화 등에서는 이 특유의 기합성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약간은 아쉬운 면이 있다.

연수베기(延髄斬り 엔즈이기리)를 창시했으며, 이 밖에도 업도미널 스트렛치의 강화판인 만자 굳히기(卍固め. Octopus hold)가 트레이드 마크로 꼽힌다. 시각적으로도 충분히 위력적으로 보이고, 자이언트 바바의 노텐 챱이나, 김일의 원폭 박치기 같은 큰 상징성을 지니는 기술을 고안하겠다고 해서 만든 게 지금의 연수베기라는 설이 있다. 드롭킥을 어색하게 시전해서 이런 약점을 어느 정도 커버하려고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안토니오 이노키는 슬리퍼 홀드라는, 격투기나 실전에선 사람 잡는 기술이지만 프로레슬링에서 시간 때우기 및 경기 조율용으로 사용하는 서브미션 홀드를 마성의 슬리퍼 홀드라는 이름을 붙여 최고 위상급의 피니쉬 무브로 쓴다. 게이스러운 시전 폼도 그렇고, 이노키가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두꺼운 체형은 아닌지라 좀 볼품없어 보이지만, 단 한 번도 깨진 적이 없다.[4]

심지어 급속으로 상대를 실신시켜 서브미션승도 아닌 핀폴승을 따내며 초살시킨 적이 있을 정도다. 일단 걸리면 어지간한 선수들은 3초 내에 힘이 빠지면서 그대로 실신한다. '프로레슬링은 실전에서도 강하다!'라는 그의 철학 '이노키즘'을 확인할 수 있는 기술이다. 움짤에서 당하는 상대는 바로 투혼 삼총사의 필두 무토 케이지

점차 프로레슬링계에서 위상이 떨어졌지만 스즈키 미노루이이즈카 타카시 등 안토니오 이노키를 따라 슬리퍼 홀드를 피니쉬 무브로 쓰는 선수가 2010년대에도 남아있고, 북미권에선 로디 파이퍼가 즐겨 쓰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안토니오 이노키처럼 엄청나게 짧은 시간 안에 상대를 실신, 또는 실신 직전으로 몰고 가는 수준으로 강한 설정이 붙게끔 한 선수는 프로레슬링 역사상 없다.

이런 전설적인 내용들에 반해 추문도 제법 많은 편이다. 그 중 가장 큰 사건으로는 '신일본 횡령사건'으로,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회사 자금을 빼돌려 브라질에서 벌이는 사업에 투자했다는 사실이 들통나면서, 단체의 일부 중진들이 이노키의 퇴진을 요구하는 쿠데타를 벌인 적도 있다. 그러나 당시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방영권을 쥐고 있던 TV 아사히이노키 없는 신일본은 중계하지 않겠다는 폭탄선언을 하여 유야무야되기도 했다. 안토니오 이노키라는 레슬러가 얼마나 카리스마적인 인물인지 잘 알 수 있는 대목.

70년대에 이노키가 거물이 된 뒤에도 한국, 일본을 오가며 김일과 여러 차례 대전을 벌였는데 하나같이 명승부로 회자되었고, 덕분에 한국 팬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국 경기에서 일본인인 이노키는 물론 악역을 맡았지만, 김일의 필살기였던 박치기를 맞아도 버티고 일어나기도 하는 '강력한 악역'으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김일이 말년에 무관심 속에서 병마로 고통스러워할 때, 이따금씩 김일을 찾아와 여러 가지로 도움을 줘서 '의리파'라는 인상까지 남겼다. 거의 1년에 1번은 찾아왔다고 한다.

은퇴는 1998년 4월 4일에 도쿄돔파이널 이노키 토너먼트흥행에서 하였는데, 이날 모인 관객은 약 7만 명으로, 역대 도쿄돔 일본 프로레슬링 사상 최다관중 동원이었다. 메인 이벤트에서 격투가로도 유명한 돈 프라이를 상대로 은퇴 시합을 가져 코브라 트위스트로 승리를 거두었다.

2010년에 아시아인 최초로 WWE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게 발표되었고[5], 동년 3월 27일에 헌액되었다. 이때 미리 써온 연설문을 영어로 더듬더듬 읽고는 마지막에 "다아-!"를 외쳤다.

3. 안토니오 이노키 VS 무하마드 알리

1976년 무하마드 알리와 지금으로 치면 이종격투기 격인 대결을 가졌다 이때는 아직 종합격투기에 대한 인식이 없던 시절이라 룰이 엉망이었다. 때문에 이노키는 링에 누워서 킥 위주로 방어하는 방식으로 지루하게 경기를 펼쳐 혹평을 받았다. 이 경기 때문에 이노키 알리 포지션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는데, 창녀 파이팅(...)이라는 멸칭까지 붙었을 정도였다.

하이라이트 영상.

룰은 다음과 같았다.

  • 알리: 허리 아래 타격 금지, 파운딩 금지
  • 이노키: 로프 터치 금지, 그래플링 금지, 태클 금지

보다시피 '잡아야 하는' 레슬러가 그래플링과 태클을 못하고, '때려야 하는' 복서가 파운딩을 못한다. 복서보고 레슬링하고 레슬러보고 복싱하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애당초 서로 대결 성립 자체가 불가능했고 실제로 경기도 그랬다.'''

루머가 많은 경기[6]였지만 안토니오 이노키가 허리 위 타격 금지였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룰이 개판인건 맞는게, 이노키는 프로레슬러임에도 불구하고, 클린치를 비롯한 그래플링 일체 금지라는 엄청난 페널티를 안고 있었고, 무하마드 알리는 누운 이노키에 달려들어 펀치를 날리려다 심판에게 제지를 당하는 등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래서 알리는 이노키가 누운 상태일 때 킥 밖에 쓸 수 없었다. 알리 킥의 탄생에는 이런 비화가 있었다. 영상을 보면 클린치가 발생할 때마다 심판이 와서 뜯어말리는 걸 볼 수 있다. 결국 이노키는 계속 누워서 버티거거나 몸을 던지며 로우킥만 날려댔고, 알리는 누우면 킥하고 서면 펀치 견제나 하며 로우킥이 날아오면 그냥 피하는 게 경기의 전부였다.

무하마드 알리는 "누워서 돈 버는 놈은 창녀하고 이노키밖에 없다"고 불만을 터뜨렸고, 안토니오 이노키는 "넌 누워있는 창녀 앞에서 아무것도 못하는 고자냐?" 라고 받아쳤다. 이후 무하마드 알리 방한 당시 알리의 팬이었던 박정희 대통령도 같이 안토니오 이노키를 욕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무하마드 알리가 이노키에게 폭언을 날린 건 경기 내용 때문보다는, 며칠 전 벌어졌던 사건의 영향이 큰 듯하다. 경기 며칠 전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기자들과 카메라맨들이 동석한 가운데 둘이 간단한 스파링 퍼포먼스를 펼쳤는데, 이때 흥행을 위한 퍼포먼스용이라고 여겨 설렁설렁하는 무하마드 알리의 머리에 안토니오 이노키가 느닷없이 진짜로 엔즈이기리를 날렸고, 공격을 받고 순간 멍한 표정으로 쓰러진 알리에게 연이어 팔십자꺾기까지 했다. 안토니오 이노키가 본인을 어필하기 위한 퍼포먼스용으로는 최적이었지만 상대에 대한 매너 따위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행동이었고, 무하마드 알리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당시 통역의 문제로 무하마드 알리는 시합 자체를 흥행용 쇼라고 알고 있었고, 시합 6일전의 공개 스파링 날에 안토니오 이노키 측에게 '리허설은 언제 하냐'고 물어봤는데, 이노키 측에서는 '실전 시합인데 리허설이 어디 있냐'고 해서 그제서야 실전 시합인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무하마드 알리 측은 공개 스파링 당일 아침까지 워크 시합(양 측이 각본을 짜고 하는 쇼)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결국 누구 한 명 얻은 게 없는 경기였다. 알리는 로우킥으로 인한 피로 누적으로 혈전증이 생겨 이 후 열릴 복싱 헤비급 타이틀 매치 일정을 취소했고, 이노키는 로우킥을 너무 많이 날린 탓에 한 쪽 발에 골절상을 입었다. 굳이 따지자면 비교적 명성이 낮은 이노키가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된게 이득이라면 이득.

일본에서는 누운 채로 상대의 정강이를 차는 기술을 알리 킥이라고 하며, 철권의 킹이 사용하기도 한다. 모션으로 보면 킹의 것은 원조와는 조금 거리가 있으며, KOF 시리즈세스가 사용하는 초필살기 몸 넣기 탄월의 모션이 오리지널에 많이 근접한 편.

이 에피소드는 2017년 3월 12일 방영분 신비한TV 서프라이즈 익스트림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4. 안토니오 이노키 VS 아크람 파르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대결이야말로 이노키가 벌벌 떨 정도로 과격하고, 실제로 치고 박고 싸운 경기다.

현대에는 알리 전(戰)만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안토니오 이노키의 종합격투기 노선은 일회적인 이벤트는 아니었으며, 1970년대에 지속적으로 1~2번씩 경기를 가졌는데, 그중 같은 해 12월 12일에 절대 잊을 수 없는 경기가 있었다. 그게 바로 파키스탄의 프로레슬러 아크람 파르완(Akram Pahalwan)과의 완전 무규칙 경기였다.

1976년 12월 12일, 파키스탄의 카라치 내셔널 스타디움에서의 대결이 잡힌 이 경기는 놀랍게도 파키스탄의 프로모터가 먼저 안토니오 이노키 측에 대결을 제안한 경기였다.

일단 안토니오 이노키와 싸울 선수인 아크람 파르완이 나이가 이노키보다 14살이 많았고, 이미 전성기가 오래전에 지난 프로레슬러였고 낯선 곳에서의 경기이기도 하기에 큰 협의 없이 경기를 가지기로 했는데 이것이 큰 화를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다.

안토니오 이노키는 무하마드 알리와의 경기 같이 어느 정도의 협의를 해놓은 상태에서의 경기를 생각했지만, 이 대회는 두 선수가 링 위에서 무규칙으로 싸우는 대회였다. 안토니오 이노키의 세컨 측은 이런 상황을 모르고 출전한 이노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해하는 모습이 아직까지 기억이 난다고 한다. "내가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던 오만방자하던 프로레슬러의 모습에서, 정말로 싸워야 되는 상황에 놓이자 인간미적인 모습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합은 시작되었고, 말 그대도 피 튀기는 혈전이 시작됐다. 완력에서 밀리는 안토니오 이노키가 아크람 파르완의 두 눈을 찌르기 시작했고, 이에 파르완은 이노키를 깨무는 식의 장렬한 혈투 끝에 이노키가 암록으로 파르완의 인대를 골절시키며 승리를 거뒀다. 경기가 끝나고 안토니오 이노키의 더러운 플레이에 야유가 쏟아지기도 했지만 경기는 그럭저럭 좋게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이 경기 이후에도 안토니오 이노키는 공포심이 없어지지 않았고, 오죽하면 이노키는 경기가 끝나고 대기실에 들어가 세컨에게 "신마, 너 이 새끼야!!! 나에게 이런 대결을 하게 하다니!"라고 고함을 쳤다고 한다. 파키스탄 측의 세컨들은 "한 쪽 눈이 없거나, 한 쪽 귀가 없거나, 손가락이 없는 사람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싸움과 격투기란, 말 그대로 무규칙으로 "죽을 때까지 싸우는 그런 터프하고 원시적인 모습"이었다.

이후 1977년에는 미국 펜실베니아 주의 가라데 / 킥복싱 선수 더 몬스터맨(The Monsterman, 본명 : Everett Eddie)을 전미 가라데 챔피언(…)으로 소개하면서 대결해 승리했고, 무하마드 알리에게 딱 1번 다운을 빼앗은 것으로 유명한 척 웨프너(Chuck Wepner)와도 경기를 가져 승리했다. 이러한 종합격투기 흥행을 1979년까지 매년 1, 2차례 열었다.

5. 이노키즘

프로레슬링이야말로 모든 격투기의 교합점이라는 스트롱 스타일을 제창했던 만큼 실전 격투기에도 관심이 많아 이종격투기 시합을 여러번 치렀고, Rings, Shooto, Pancrass, UFO[7], PRIDE[8] 등에 관여하여 초창기 이종격투기 붐을 조성했으며, '이노키 봄바예(INOKI BOM-BA-YE)'란 종합격투기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이 당시 봄바예가 PRIDE로부터 에밀리아넨코 효도르를 빼돌리는 바람에, 봄바예 프로모터가 야쿠자들로부터 협박을 받은 적도 있으며, 효도르 외에도 봄바예를 거쳐 간 선수들 중에는 료토 마치다, 리치 프랭클린 등 쟁쟁한 인물들이 많다.

하지만 프로레슬러를 격투기 시합에 보낸 것이 원인이 되어, 이후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몰락을 불러왔단 점 때문에 안티도 많이 있으며, 실제로 프로레슬러 중에서도 이노키를 싫어하는 사람이 꽤 있다. 이긴다면야 문제가 없었겠지만, 이노키가 이종격투기 시합에 내보낸 프로레슬러가 대부분 개발살 당했기 때문이다. 안토니오 이노키가 횡령 혐의로 실각한 후에도 그의 단체인 신일본 프로레슬링은 이러한 노선을 어느 정도 유지했다. 안토니오 이노키와 대척점에 있는 무토 케이지는 프로레스 러브 포즈를 미는 한편 신일본의 이런 노선에 회의를 느끼고 켄도 카신, 코지마 사토시를 데리고 전일본 프로레슬링으로 이적했다.

무토 케이지는 프로레슬링을 배우기 전에 유도를 베이스로 하던 사람이라 실전에 능했기에 스즈키 미노루나 후나키 마사카즈 등의 후배들이 어쩌다 무토와 도장에서 겨룰 때 무토에게서 한 판이라도 따내는 날엔 엄청 기뻐했을 정도로 강자다. 무토 케이지 같이 유도나 아마추어 레슬링 등 실전을 겨루는 타분야에서 실컷 경쟁하고나서 프로레슬링 계에 온 사람들은 올림픽 같은 명예도 없는데 왜 프로레슬링에 와서까지 실전으로 겨뤄야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후지타 카즈유키는 아마추어 레슬링을 하고 프로레슬링 계에 와서까지 실전을 지향한 특이한 사례고, 안토니오 이노키도 프로레슬링 이전에 투포환만 해봤으며, UWF 계열의 대다수 선수들도 U계 프로레슬링을 하기 전에 다른 분야에서 실전으로 겨룬 일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다. 즉 무토 케이지 같은 사람들은 이노키즘이 지배하던 당시에 대해, 실전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 실전 지상주의를 내세우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고 회고한다.

사쿠라바 카즈시가 PRIDE에서 승승장구하자, 신일본 프로레슬링은 자기 단체의 레슬러들을 종합 및 입식 격투 무대로 대거 유입시켰는데, 이 격투무대에서의 실적으로 신일본의 벨트가 수여되는 암흑기가 도래하게 된다. 사쿠라바 카즈시는 순수 프로레슬링이 아니라 캐치 레슬링으로 어느 정도 효과를 본 선수였지만, 애당초 오로지 프로레슬링으로 나온 선수들은 그냥 말 그대로 쳐맞고 퇴출당했다. 어쩌다 격투 무대에서 승리를 챙긴 야스다 타다오 같이 절대로 챔피언감이 아닌 프로레슬러가[9]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이 되기도 했고[10], 밥 샙에게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 벨트를 주지를 않나[11], 후지타 카즈유키가 정통 프로레슬러인 텐잔 히로요시를 5분여 만에 초살시키고 챔피언이 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종합격투기에서 꽤 괜찮은 성적을 올린 나가타 유지가 당시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최다 방어기록을 수립한 것이 정점이었는데, 야스다 타다오의 프로레슬링적 기량은 꽤 문제가 있는 수준이었으나, 나가타 유지는 프로레슬링 센스와 기량 자체는 출중했다. 하지만 하필이면 효도르와 대전이 잡혀 1분만에 초살당하면서 이미지를 망쳤다.[12]

초창기 MMA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조쉬 바넷 등 프로레슬링 제일주의를 외치는 MMA 파이터들을 프로레슬링 링으로 불러들이고, 그의 50주년 기념행사에서 바넷을 비롯하여 팀 실비아, 돈 프라이, 밥 샙 등의 파이터들이 대거 참가해 프로레슬링 시합을 벌이기도 했다.

6. 여담

일본에서 턱의 상징. 턱이 매우 커서 턱에 대한 비화가 상당히 많은데, 부인이 너무 궁금해서 자는 이노키의 턱 아래에 손가락을 넣어봤는데, 집게손가락이 다 들어가더라는 말도 있다. 가도쿠라 겐, 우치카와 세이이치 등이 종종 방송에서 흉내를 낼 정도지만, 정작 이노키 자신은 "내 턱은 사람의 급소인 목 안쪽을 보호한다" 라고 했다는 말이 있다.

심지어 유희왕 내부에서 유명한 AGO의 유래이기도 한데, 공식 작화감독 중 하나였던 카가미 타카히로의 언급에 따르면 "작화 감독을 담당하는 회는 원작을 읽고 성격이나 배경을 생각해 그 장소의 상황같은걸 고려해서 캐릭터에게 연기를 덧붙입니다. 제가 느낀 죠노우치의 이미지는 열혈한이고 솔직하고 쾌활한 형님(+좀 바보)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거기에 열혈→프로레슬링 좋아함→안토니오 이노키 팬일 게 분명→AGO☆ 가 되었습니다(웃음)"라고. 다만 이 안토니오 이노키의 AGO는 죠노우치 카츠야의 AGO에만 영감을 주었으며, 팬들 사이에서 죠노우치의 AGO보다도 유명한 이노우에 요시카츠의 AGO는 그냥 작붕인 듯.

역도산이 살아있던 시절 자이언트 바바와 16번 대전했으나, 단 한 번도 이기질 못했다.

안토니오 이노키가 드롭킥 구사를 너무 못해서 이에 대해 고심하다가 결국 드롭킥 대용으로 만든 기술이 바로 연수베기라는 소문이 있다. 일본 위키에 따르면, 그의 기술 중에 드롭킥이 당당히 올라가 있으며, 도움닫기 없이, 배 쪽 혹은 등 쪽으로 착지하는 등 자유롭게 구사한 것으로 나온다. 실제로 전성기 때에는 3연속으로 드롭킥을 시전할 수 있었으나, 폼이 좀 어색했기 때문에 이 단점을 보완하고자 연수베기를 만들었다는 설이 설득력있다.

유명 레슬러이니만큼 비디오 게임등에서 패러디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NES의 게임 프로레슬링의 파이터 하야부사와 파이어 프로레슬링 시리즈에서 종종 등장한 빅토리 무사시. 게임에 따라선 슬리퍼 홀드보단 엔즈이그리를 피니쉬로 설정하기도 했다.

프로레슬링 경기 도중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팬티에 대변을 지린 에피소드 때문에, 만화 《괴짜가족》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대변을 보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살포하는 수준인 국회의원으로 패러디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짜가족》 연재 10주년이 되자 축전을 보내주었다.

연예 프로그램에서 투혼빈타(闘魂ビンタ)라 하여 연예인들 뺨을 때리는데, 그 유래는 이렇다.

의원 시절 와세다 대학에서 강연 중 이노키의 복부를 주먹으로 때리는 이벤트를 했었는데, 응모자가 하필이면 소림사 권법 유단자였고, 복부에 맞은 순간 대략 정신이 멍해진 이노키는 반사적으로 응모자의 따귀를 때렸다.

폭행죄로 의원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이었지만, 오히려 맞은 학생은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했으며, 그 후 '저 따귀에 뭔가 있어 보인다' 싶던 재수생들이 자청해서 따귀를 맞았고, 맞은 재수생 전원이 도쿄대학을 갔다는 전설이…

이후 정월이 되면 이노키에게 따귀를 맞겠다는 사람이 줄을 선다고 하는데, 정작 이노키 자신은 거북하게 여긴다고 한다. 이야기 출처.

낫토를 엄청나게 좋아하여 일본 낫토 협회로부터 표창도 받았다고 한다.

카리브해에 개인전용 무인도를 소유하고 있으며, 휴가 때 가끔 사용한다.

만화바키 시리즈》에서는 안토니오 이노키를 모티브로 한 '이가리 칸지'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포지션은 프로레슬러이며, 이 만화의 특성상 첫 등장시점을 제외하면 취급은 별로 좋지 못한 편이다 다만 프로레슬링은 강하다라고 피력하는 듯한 전형적인 일본 미디어물 스테레오타입의 프로레슬러 마운트 도바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강함의 한계를 지닌 프로레슬러의 모습과, 그것을 기반으로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에 상당히 와닿는 면이 있다. 대신 저자의 다른 작품인 《아랑전》에서는 안토니오 이노키를 모티브로 한 '그레이트 타츠미'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이쪽은 최영의를 모티브로 하는 또 다른 극중 인물 '마츠오 쇼잔'과 더불어 작중 최강급의 면모를 보인다.

《고교철권 터프》에서도 아이언 키바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시작은 비열한 악역의 이미지였지만, 주인공 키이치와의 대결 후 마지막까지 최고로 간지나고 감동적인 인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후속작의 외전에서 등장했을 땐 과거를 다룬 이야기라 그런지 굉장히 치졸했다.[13] 매체에서 그를 오마쥬한 캐릭터들은 대부분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 안 가리는 비정한 면이 부각된다.

일본 연예인들이 성대모사를 할 때 가장 많이 하는 사람. 성대모사를 한다면 반드시 겐키데스까(元気ですか)!를 해줘야 한다. 러브레터와는 별 관계없다. 성대모사 할 때 장난으로 "현금입니까 (現金ですか)!"[14] 라는 바리에이션도 있다. 본인도 이걸 한다. 곁으로 따라오는건 질문을 받을때 "응?"이라면서 못 알아듣는 척 하는 성대모사.

"겡끼데스까!"와 셋트로 이노키 흉내를 낼 때 단골로 쓰이기도 하는 그의 대명사로, "1, 2, 3, 다(ダー)ㅅ!!" 가 있다. 이노키가 간닷!!(行くぞ!!)로 신호를 보내면, 관객들과 함께 "1, 2, 3"의 카운트를 하고, 마지막엔 다함께 주먹을 치켜 올리며 "다--!!"를 외치는 퍼포먼스.

본래 이노키는 승리했을 때 등 기분이 고조되었을 때 "다!!" 를 외치곤 했는데, 이때는 아직 관객과 함께 외치는 식의 퍼포먼스는 아니었다. 1990년 2월 10일, 도쿄 돔에서 사카구치 세이지(배우 사카구치 켄지의 부친)와 태그 팀을 짜고, 쵸노 마사히로 & 하시모토 신야 태그에게 승리한 후에 처음으로 관객과 함께 "1! 2! 3! 다-!"를 외치는 퍼포먼스가 탄생했다. 이때 이노키는 "1, 2, 3을 세고 '다-!'를 하겠습니다" 라며 몸소 관객과 함께 퍼포먼스의 리허설을 하였다. 리허설을 한 후에 이노키가 이찌~ 니~ 싼~ (하이~) 다!!!~ 중간에 (하이~)넣어 관중들이 리듬에 맞출 수 있도록 했다. 그 후로도 이 "1, 2, 3, 다-!!"는 이노키의 대명사가 되어, 시합 후의 마이크 퍼포먼스는 물론 은퇴 후에도 이노키가 등장만 했다하면,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마무리는 어디서나 1, 2, 3, 다-!! 를 외치는 것이 약속처럼 되었고, 이노키를 상징하는 프레이즈가 되었다. "1, 2, 3, 다-!!"는 상표등록이 되어 있다. 심지어 소문에 의하면, 이 "1, 2, 3, 다-!!"를 외치는 것만으로도 300만엔 상당의 개런티가 발생한다고 한다. 한편 일본 만화에서 싸움에서 승리한 주인공이 하늘로 손을 내지르며 기합을 지르는 연출이 자주 나오는데 이것도 바로 이노키의 퍼포먼스 오마주이다.

테마곡으로 《불꽃의 파이터 이노키 봄바예~》라는 곡을 쓰는데, 무하마드 알리가 자신의 전기 영화 "THE GREATEST"의 테마곡인 ALI BOM-BA-YE를 안토니오 이노키에게 준 것이다.

IGF의 자금을 이용해 투자를 하기도 했다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무한 동력이라고 한다. 그런데 안토니오 이노키가 뜬금없이 2017년 6월, 그 IGF를 해체하겠다고 나섰다. IGF에 이념이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해체에 나섰지만 정작 IGF는 성명문을 여러차례 발표하면서 반박하고 있다. 안토니오 이노키가 IGF 운영진에게 전권을 맡겨놓고 이제와서 해체하겠다는 적반하장을 보이니 IGF 경영진 측으로써도 어이가 없는 듯하다.

최근 건강이 좋지않다. 슬슬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로 접어들고 있고, 본인의 말로는 '목부터 다리까지 전부 수술을 받았으니 성할 리가 있나.'라고 말했다. 특히 허리와 다리가 불편하다고 하며 최근 북한에 방북할때 휠체어에 탄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링크

전 부인은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에 자주 출연했던 바이쇼 미츠코. 하지만 1988년 이혼했다.

7. 정치

  • 정치 성향이 상당히 특이한 인물이다. 평화헌법에 큰 불만을 가지고 일본이 군대를 가져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일본 우익의 입장을 어느정도 대변하는 발언이나, 한국출신 선배이자 친우인 김일과의 관계를 의식하는지, 한일 간 역사 문제에 있어서는 다른 우익에 비해서 좀 더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편이다. 2000년에 김일 병문안차 방한했을 당시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로하기 위해 나눔의 집을 방문하고 기부도 하였다.[15] 그 외에도 스승 역도산에게 영향을 받아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극찬한 것을 비롯해 북한과의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강조하고, 북한 로열패밀리들과도 교분을 갖는등 친북적인 행보를 밟으며 일반적 우익하고는 상당히 다른 행보를 걷고있는 사람이므로 우익이라고 단정짓기에는 오류가 있다. 단순히 일본의 군대 보유라는 신념 하나 때문에 보수우파 정당을 전전하고 있을 뿐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이 군대를 보유한다는 논리도 억지력으로서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론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발언도 하였다.
  • 1989년 스포츠평화당(スポーツ平和党)을 만들고 그해 있었던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로 당선, 정치인이 된다.[16] '92년 일본 참의원 비례 대표구 정견 방송' 당시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가 내가 나설 때다(世の中が乱れ、混乱したときに、俺の出番という)"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인지 안토니오 이노키의 안티 중에는, 계속 국회의원만 하고 다시는 프로레슬링 업계로 안 돌아왔으면 하는 사람들도 있다. 1995년에는 평양에서 열린 WCW와의 합동 흥행에서는 릭 플레어와 경기를 가졌다. 링크
  • 1998년에 현역은퇴와 함께 정계은퇴도 했지만, 2013년에 다시 참의원 선거일본 유신회 소속으로 출마했다. 그리고 당선되었다. 당선된 지 얼마 안 돼 북한을 방문하여 장성택을 만나고, 원산에 일본 자본 투자를 이끌고, 납북 일본인 문제 해결을 한다고 큰소리도 쳤지만 장성택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숙청, 사형당하는 바람에 헛짓거리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8. 둘러보기

1996년 레슬링 옵저버 명예의 전당 헌액자

1995년 WCW 명예의 전당 헌액자

2010년 WWE 명예의 전당 헌액자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MVP (최우수 선수상)

(설립)

안토니오 이노키
(1974)

자이언트 바바
(1975)

자이언트 바바
(1975)

안토니오 이노키
(1976,1977,1978)

자이언트 바바
(1979)

자이언트 바바
(1979)

안토니오 이노키
(1980,1981)

타이거 마스크
(1982)


  1. [1] 이 사진은, 안토니오 이노키에게 원폭박치기를 시도하는 한국 프로레슬링의 대부 김일의 사진이다.
  2. [2] 해외 위키들은 엔즈이기리와 만자 굳히기도 피니쉬 무브로 기록하는 곳들이 있다
  3. [3] 포르투갈어 발음은 안토니다.
  4. [4] 안토니오 이노키의 슬리퍼 홀드가 최강급의 피니쉬 무브의 위상을 가지게 된 것은 그의 국회의원 시절부터였다고 한다
  5. [5] 2007년 헌액된 미스터 후지는 부모님은 일본인이지만 본인은 하와이 태생으로 일본어를 거의 못하는, 사실상 미국인이다.
  6. [6] 알려진 규칙조차도 안토니오 이노키가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자서전에서 주장한 게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는 말이 있다.
  7. [7] 초기 종합격투기 단체들 중 하나이며 UFC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8. [8] 이 경기들은 프로레슬링 거품이 꺼지면서 자연스레 지금의 종합격투기의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초창기에는 프로레슬링이종격투기의 사이 정도 되는 모습이었는데, 프로레슬러들을 위한 경기였기 때문이다.
  9. [9] 스모 선수 시절엔 세키토리 출신에다 삼역까지 해볼 정도로 나름대로 성공적이었으나 프로레슬링 커리어는 은퇴때까지 원패턴 기술 & 콤보밖에 못썼다. 경기력은 로만 레인즈가 준수해보일정도. 기껏 쓰는 패턴이 상대를 스모의 손기술로 코너에 밀어 붙이고 다시 다른 코너로 보내서 몸통 태클 이걸로만 십수년을 우려먹었다. 이건 뭐 사골도 아니고...
  10. [10] 야스다 타다오는 사생활도 그리 좋은 편이 못돼서 HUSTLE이라는 단체에서 활동할 때의 별명이 무려 빚쟁이왕(샤킨오)이었다. 소싯적부터 씀씀이가 말도 못하게 헤팠다고 하며 2007년에는 차안에서 연탄가스로 자살시도를 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경험도 있다. 유감스럽게도 2018년 기준으로도 어렵게 사는 모양. 결국 자기 복이다.
  11. [11] 다만 밥 샙은 프로레슬러로서 기량이 완전 꽝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연기력이나 쇼맨십 등은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다.
  12. [12] 이 시점에서 이미 이종격투기는 지고 완전히 종합격투기가 정립하였기 때문에 이념이나 훈련 방식 등이 완전히 다른 프로레슬러가 종합격투기에서 승리를 따내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힘들었다. 프로레슬러가 복싱룰로 복서와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꼭 프로레슬러가 아니더라도 특정 무술을 익힌 사람이 그것만으로 타 무술의 룰로 열리는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기 힘든데다 종합격투기는 성격상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다. 브록 레스너나 기타 프로레슬러들 중 MMA에서 괜찮은 성적을 낸 사람들은 전부 따로 종합격투기를 수련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프로레슬링 방식의 훈련만으로는 절대 종합격투기에서 활약할 수 없다.
  13. [13] 과거를 다룬 이야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안토니오 이노키에 대한 평가가 하락했기 때문에 이렇게 그려졌을 가능성도 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안토니오 이노키는 일본 프로레슬링계가 몰락한 주범으로 위상이 많이 낮아졌다. 1990년대에 연재한 1부에선 비열하지만 강력한 캐릭터로 나오는 데 반해 2000년대에 연재한 외전에선 프로레슬러 최강론을 외치다가 전직 군인인 엑스트라 격투가에게 맞는 역할로 나오는 등 너프를 먹었다.
  14. [14] 현금을 일본어로 말하면 "겐킨"이기 때문에 생긴 말장난
  15. [15] 물론 이것 때문에 혐한들이 제일 싫어하는 레슬러 중 한명으로 꼽힌다.
  16. [16] 스포츠 정신을 정치에 집어넣어 국민이 건강하게 함으로써 세계평화를 이룩한다는 신념의 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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