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슈페어

말년의 모습

1. 개요
2. 생애
2.1. 군수부 장관으로
2.2. 제2차 세계대전 이후
3. 건축가로서
4. 대중매체

1. 개요

Albert Speer(1905.3.19 ~ 1981.9.1)

나치 독일의 군수부 장관. 건축가. 히틀러의 측근으로, 제3제국의 건축물들을 다수 설계하였다.

2. 생애

"만약 히틀러에게 친구라는 것이 있었다면, 분명히 나는 그의 몇 안 되는 친구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Wenn Hitler überhaupt Freunde gehabt hätte, wäre ich bestimmt einer seiner engen Freunde gewesen"

회고록 <기억 -제3제국의 중심에서->

건축가아돌프 히틀러가 생각해낸 다양한 건축물들을 실현하는 실무를 맡았다.

만하임의 부유한 중산층 정도 되는 건축가 집안[1]에서 태어나 1920년대에 여러 대학을 다니면서 건축학을 전공하였다.

베를린 기술대학의 유명한 건축가인 하인리히 테세노(Heinrich Tessenow)의 문하에서 최종적으로 학위를 따고 22살의 나이로 그의 조수로 일했다. 원래는 역시 유명 건축가였던 한스 푈치히(Hans Poelzig)의 조수를 지망했었지만, 떨어졌다. 재미있는 것은 푈치히의 경우 모더니즘을 지향하는 진보적인 건축가였지만, 테세노는 그와 정 반대되는 고전주의 건축가였다. 자신의 건축 세계를 순식간에 정 반대로 바꿔버린 것. 그래도 테세노 밑에서 슈페어는 진심으로 열심히 일했고, 테세노 대신 강의를 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1930년에는 학생들의 권고를 받아 나치당 집회에 참석한 후 히틀러의 카리스마에 감동을 먹어서 1931년에 나치당에 가입하였다. 그의 당원번호는 474,481번이었고 그렇게 나치당에 참여한 것이 그의 화려한 경력의 시작이었다. 그가 훗날 증언하기를 히틀러가 말했던 공산주의의 위협과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 문제에 큰 관심을 가져 히틀러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나치당 베를린 지부의 간부인 카를 한케를 알게 되어 그의 집을 무상으로 수리해주었는데, 한케는 이를 고마워하며 슈페어가 고향에서 직업을 얻지 못하고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괴벨스에게 베를린 지부당의 리모델링 공사를 슈페어에게 맡길 것을 청원하였다. 여기서 슈페어는 괴벨스에게 호평을 받아서 1933년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후 신설된 선전성 청사의 리모델링을 위임받았으며, 각종 행사의 미술을 멋지게 기획하였다. 특히 당대회를 위한 경기장이 건설중이자 152개의 서치 라이트를 동원하여 기둥처럼 세우는 창의성을 발휘하기도 했는데, 빛의 기둥들이 늘어선 장관은 마치 대성당 안처럼 느껴진다고 해서 빛의 대성당(Cathedral of light)이란 별명을 얻었고 이후로도 계속 사용되었다. 참고

그는 건축과 예술에 관심이 많은 딜레탕트였던 히틀러의 호감을 사서 심지어는 매일 히틀러의 저녁식사에 초대받았다고 한다. 슈페어는 나치당 주임 건축가, 건축부 수장, 제국수도 총건축 감독관 겸 제국 의회 의원의 직위를 차지했다. 나치 전당대회장 건설을 설계하고 감독했으며,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독일 파빌리온으로 금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1936 베를린 올림픽이 열린 경기장과 뉘른베르크에서 체펠린 비행장(Zeppelinfeld) 등을 건설하였다. 경기장은 처음엔 그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유리로 제작하려 했지만 히틀러의 요청으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후술하겠지만 슈페어는 제3제국이 세계를 지배할 경우 그에 어울리는 수도인 게르마니아의 도시계획을 히틀러와 함께 마련했으며, 국제적으로 높아진 명성으로 인해 심지어는 스탈린의 초청으로 모스크바를 재건설하는 작업을 위탁받기도 하였다. 이는 모스크바가 베를린을 능가하는 위엄을 가진 도시가 될 것을 우려한 히틀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히틀러는 프랑스 침공 이후 파리를 방문했을 때에도 슈페어와 함께했는데, 슈페어의 회고록에 따르면 파리를 방문한 히틀러는 평생 꼭 한 번 와보고 싶은 곳이 파리였다며, 파리를 파괴할까 싶기도 했지만(...) 게르마니아가 완성되면 파리보다도 더 위대한 도시가 될 테니 굳이 파리를 파괴할 필요는 없다고 슈페어에게 말했다고 한다.

신 총통 관저[2]

그의 경력에 쐐기를 박은 작품이라면 1939년에 리모델링된 히틀러의 신 총통 관저(Neue Reichskanzlei) 공사를 들 수 있다. 이 때 알베르트 슈페어는 히틀러가 청중들에게 연설할 수 있도록 발코니를 추가했는데 이에 히틀러는 크게 만족했으며, 나치당에서 승승장구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히틀러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반영한 이 건물을 통해 총 한방 쏘지 않고 같은 해 3월 15일 체코슬로바키아를 집어 삼킬 수 있었다. 총통관저는 긴 면에 출입구를 두는 일반적인 건물과 달리 건물의 좁은 측면에서 진입하게 만들어져 긴 복도를 가지게 되었고, 기능적으로는 별 쓸모가 없던 건물이지만, 적어도 겉모습으로는 사람을 주눅들게 만드는, 나치의 정체성에 아주 잘 부합하는 건물이었다. 당시 독일의 군사적인 힘에 대해 부담을 느끼던 하하 체코 대통령은 히틀러와 담판을 짓기 위해 독일로 찾아왔는데, 그렇지 않아도 심장이 약했던 그는 마치 '무기와 같이 위압적인' 총통관저의 400m가 넘는 복도를 지나고 나서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그리고 굴욕적인 항복 문서에 서명을 한다.#

2.1. 군수부 장관으로

전쟁 중반기인 1942년 2월 8일 군수부 장관인 프리츠 토트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히틀러의 강권으로 군수부 장관을 맡았다. 관료들을 싫어하는 예술가적 기질을 가지고 있는 히틀러에게 자신과 건축관이 유사한데다 프로젝트 관리능력까지 출중한 "예술가"인 슈페어는 히틀러의 몇 안 되는 믿을 수 있는 친구였다.

당시 독일의 전시경제는 관련기관과 권력이 분산된 채로 통합적으로 관리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나치당료의 과도한 개입과 겹쳐서 상당히 저하된 상태였다. 슈페어는 군수부 장관이 된 후 히틀러의 지속적인 신임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독일 군수체계에 남아 있던 여러 가지 비효율적인 관행을 뿌리뽑아서 생산성을 높이 끌어올렸다.

다만 이런 관리의 천재에게도 현실의 어려움은 타개하기 어려웠는지

"누군가가 당신에게 베토벤 9번 합창 교향곡을 '하모니카로만 연주해야만 한다'고 명령했다고 생각해 보시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에게 불만을 토로하며

  • 슈페어의 전시생산 관리능력에 대한 반론도 있다. 채승병의 블로그에서는 나치 독일의 전시경제 생산성 향상은 1930년대부터 투자되었던 대규모 생산시설들이 슈페어의 취임시기와 맞물리면서 완공되면서 일어난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독일 경제의 군수품 생산능력을 향상시키는 계획안은 이미 전임자인 토트가 완성시키고 있었고, 슈페어는 단지 그걸 실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군수부 장관을 맡기 전에 건설부 장관으로 있을때도 슈페어는 그 능력으로 호평을 받고 있었고, 슈페어가 변덕스러운 독재자인 히틀러의 지속적인 호감과 신임을 얻음으로서 이를 바탕으로 난맥상인 독일 전시경제체제를 어느 정도 효율화시킬 수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슈페어의 능력은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의 주동자 등 여러 반나치 인사들이 '대단한 군수품 생산관리 능력'을 이유로 나치 척결 뒤 예비 내각의 일원(!)에 슈페어를 포섭하려고 했다는 데서 드러난다. 암살 계획은 발각 되었지만, 슈페어는 "아직 포섭이 필요하다"는 말이 붙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결국 1943년에 이르러 독일경제가 생산하는 군수품이 획기적으로 늘어나게 되면서 슈페어는 자연스럽게 히틀러의 후계자 후보군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나치 권력의 상층부에 있던 괴링, 마르틴 보어만, 힘러와 대립하게 되었다.(이 시기 나타난 나치 고위층들의 추악한 욕망은 슈페어가 전후에 나치들을 비판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이들은 1944년 슈페어가 와병하면서 그가 가진 행정권을 탈취하려고 시도했고, 결국 그들의 음모에 질린 슈페어는 히틀러에게 군수장관과 건축책임자의 자리를 사임하겠다고 청원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군 원수 밀히를 필두로 하는 군수관련 인사들의 청원 덕분에 슈페어는 히틀러의 신임을 다시 얻어서 관련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독일의 무기 생산량은 연합국의 전략폭격이 심화된 1944년 후반기에 되어서야 감소세로 돌아선다. 다만 슈페어의 회고록에서 전략폭격은 상당히 평가 절하된다. 그에 따르면, 연합국의 전략폭격이 1943년까진 부정확하고 체계없이 이뤄져서 별다른 타격을 못 입혔으며, 1944년에 가서야 정확한 정보에 입각한 폭격이 이뤄지긴 했지만 효율적인 타격은 아니어서 독일의 패망을 몇 달 미뤘다고 여겨진다.

  • 대표적인 예로 악명 높은 슈바인푸르트(Schweinfurt) 폭격 작전이 있다. 독일 전시생산의 속도를 결정하는 '병목' 공정은 볼베어링 공장[3]이었는데, 슈페어는 연합국의 폭격이 완파 전에 중단되어서 치명적이진 않았으며, 생산량이 38% 떨어진 정도에서 폭격이 그친 것이 너무나도 다행이었다고 술회했다.(연합군은 당시 376대의 미 육군 B-17 폭격기들 중 77대나 격추당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어 도중에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히틀러는 피해가 이정도로 그친 것이 다행이란 것을 깨닫지 못했다.(...) 또한 루르 지방의 수력발전 댐과 라인강 철교를 폭파시키지 않은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실책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이 각각 파괴되었으면 전력과 공업용수, 프랑스 지역의 독일군 병참선이 붕괴했을 것이란 것이다.

슈페어는 독일의 군수공업의 아킬레스건은 무기의 재료로 쓰는 합금강 생산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희귀금속이었다고 밝힌다. 결정적인 것은 1944년 말이었다. 무엇보다 터키서 수입하는 크로뮴이 6개월치 이하로 바닥나면서, 발칸반도가 소련에 넘어간 1945년 부터는 무슨 수를 써도 파국을 면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 크로뮴만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니켈, 몰리브데넘, 망간 등의 비축량도 바닥나기 시작했다. 니켈이 없으면 항공기의 구조 재료를 생산할 수 없고, 크롬과 몰리브덴이 없으면 균질압연장갑, 더 나아가 티거판터 등 전차의 생산은 완전히 끝장난다. 당장 티거 2가 이런 희귀 금속이 부족하고 폭격 때문에 공정을 야매로 할 수 밖에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져 카탈로그 스펙보다 방어력이 크게 저하되는 추태를 보였다. 이 보고를 들은 히틀러는 아무 말도 없이 다른 각료들과 신형 전차의 개발을 논의하러 갔다. 유체이탈

결국 1945년 3월, 독일의 패배가 거의 확정적인 상황이 되자 자포자기한 아돌프 히틀러는 광기에 들려 독일 내의 공업지대나 사회간접자본을 모조리 파괴하라는 미친 지시를 내렸다. 슈페어는 히틀러에게 관련 행정권을 받은 후 해당 권력을 사용하여 은밀히 경제계 인사나 정부관리들에게 독일의 인프라를 파괴하는 대신 보존하도록 설득하였고 대체로 성공했다. 이는 전범 재판부 판결문에서도 정상참작되었다. 슈페어가 사형을 피해간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

1945년 3월 20일과 24일, 알텐키르헨의 B집단군 사령부에서 루르의 산업 시설에 대한 네로 명령을 거역하기 위해 회의 중인 모습. 왼쪽부터 귄터 라이히헬름, 한스 크렙스 OKH 작전 참모차장, 알베르트 슈페어, 폰 블로트니츠 대령, 발터 모델 원수, 빈리히 베어.

히틀러가 자살한 후 슈페어는 히틀러의 유언으로 대통령에 임명된 크릭스마리네의 수장 카를 되니츠 해군 원수플렌스부르크 정부에 참가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기간 동안 슈페어와 되니츠 제독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되니츠 제독이 유보트 생산에 자원을 우선 분배해달라 요청한 것을 슈페어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며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

2.2.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유죄혐의가 인정되어 20년형을 받았다. 유죄 판결을 받은 이유는 대체로 전시중 외국인 강제동원과 관련된 것들이다. 사실 슈페어는 군수부 차관인 자우어가 그랬던 것처럼 독일 기업들에게 배치된 외국인 노동자들의 동원실상에 대해서 증언해주고 기소를 면제받거나 형량축소의 타협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이를 거절하고 있었다. 덕분에 독일의 대기업들은 경제부흥시기에 외국으로 수입이 유출되는 것을 성공적으로 차단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독일 대기업들이 외국인 강제노동에 혈안이었다고 솔직히 말하고 기소중지된 자우어가 전후 극심한 생활고를 겪은 반면에 슈페어 일가가 평온한 시간을 보낸 것은 슈페어가 독일기업들의 전쟁범죄 혐의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뒤집어 쓴 사연 덕분이었다.

이 판결은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는 판결이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연합군 검사단에게 유리한 진술을 적극적으로 행함으로써 얻어낸 일종의 사법거래였기 때문이다. 형량 감경을 위해서는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모두의 동의가 필요했으나, 미/영/프 판사들이 10년형 정도를 검토했으나 소련이 강력히 반대했기에 20년 형을 다 살아야 했다. 연합군의 감형에는 유명 인사들이 슈페어의 재능을 높게 사서 슈페어 사면 청원 운동을 벌였던 탓도 큰데, 사면 운동에는 프랑스의 샤를 드 골 대통령, 심지어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검사팀 중 한 명이었던 하틀리 셔크로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슈페어와 비슷한 죄목의 프리츠 자우켈의 경우 사형을 판결받았으며, 이 때문에 자우켈은 집행 직전 최후 진술에서 자신의 형량이 불공평하다고 말했다. 슈페어와 마찬가지로 회개한 데다가 자신의 전쟁 기록까지 모두 연합군에게 넘긴 한스 프랑크 역시 사형을 당했다. 게다가 판결 이후 슈페어가 자신이 몰랐다고 침묵으로 일관한 유대인 학대에 가담한 사실이 더욱 자세하게 드러난 문건이 공개되기도 하였다.

복역기간 중 슈페어는 회고록을 집필하였고, 이는 1966년에 출옥한 후 간행되어 나치 시대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이 1차 사료로 사용하게 되었다. 국내에도 <기억 - 제3제국의 중심에서>이라는 제목으로 완역되어서 출간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슈페어가 양심적인 인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유대인 학살을 "몰랐지만 참회한다"고 밝힌 것이다.(공공연했던 나치 치하의 유태인 학대 문제는 다른 모든 외국인 강제노동 동원에 묻어가는 식으로 돌려서 진술했다.) 그러나 후에 A급 전범에 대한 1차 재판이 끝난 후 개최된 종범 재판들에서 추가 공개된 증거들에 의해 슈페어 역시 알면서도 묵인했거나 참여하기도 했음이 입증되었다. 끝내 슈페어는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 친밀한 고위 당직자들의 암시를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조금만 주의 깊게 나치 체제를 관찰했다면 바로 알 수 있는 문제였음을 자서전을 빌려 인정했다. 한편 대놓고 행해지던 유대인 학대 자체는 불쾌하게 여기면서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고 적었다. 이런 식의 내용은 적어도 후자에 한해서는 이 문제를 기재한 구 제3제국 관련 인사 모두의 자서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나, 슈페어의 경우는 그나마 정직한 편인 게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나치 인사들이 안 적었다.

슈페어가 출소 후 슈페어의 친형은 자신의 친필 편지를 통해 그가 유대인 수용소에서 대해 "유대인? 그들은 이집트에서도 200년 간 벽돌을 굽지 않았는가?"라고 말한 걸 기억한다며 반박했다.[4] 중요한 대목이나 구체적인 증거에 대해서 '기억이 안 난다', '모두 히틀러의 지시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는 다른 전범들에게 엄청난 월급을 받는 편지배달부들!이라고 일갈했지만, 유체이탈 화법을 쓰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또한 회고록에서는 마르틴 보어만과 같은 정적에 대한 공격과 슈페어 자신이 개인적 호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변호하는 내용이 상당하다. 슈페어 회고록의 변호성 기록의 한 예로, 괴벨스의 부인 마그다 괴벨스의 죽음이 있다. 슈페어의 자서전에는 그녀가 남편의 강요로 인하여 아이들과 자살한 것으로 그렸지만, 사실은 정 반대였다. 광적인 히틀러 추종자였던 그녀의 행보와, 유일하게 밖에 있던 루프트바페에 입대했다 연합군에 포로로 잡혀 있어 괴벨스 일가에서 홀로 생존한 의붓아들 하랄트 크반트(Harald Quandt) 공군 중위[5]문제의 사진에게 보낸 편지[6], 결정적으로 괴벨스가 마그다 괴벨스에게 아이들과 베를린에서 비행기로 탈출하라고 설득했다는 괴벨스 부관의 증언으로 인하여 부정되었다.

슈페어 스스로도 군수장관 등용 전에는 히틀러의 과대망상적 건축에 일조하면서 독일의 산업 능력을 까먹는 데 충분히 일조했으며, 권력에 초연하던 모습도 입각 뒤로는 사라졌다는 것이 여러 인사들의 증언을 합한 중론이다. 스스로는 '권력투쟁에 희생될 뻔 했다'고 썼지만, 실상은 마르틴 보어만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괴벨스, 괴링과 3인 동맹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회고록에는 많은 관심을 끈 나치의 핵개발 문제가 언급되어 있다. 실무자들이 '모든 조건이 충족되고 최대한의 자원이 투입된다 하더라도 어렵다'고 보고했으며, 자신 역시 '나치의 전황과 기술력으로는 실현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그래서 우라늄비축량 700톤을 해군 원자력 잠수함 배터리 개발 계획에 사용하라고 남김없이 방출했다고 밝혔다. 한편 V1, V2 미사일 개발과 생산에 대해서 연합국의 전략폭격은 수지가 남지 않는 밑지는 장사였다고 평가절하했다.

가장 허풍어린 부분은 독가스를 이용해 히틀러 암살을 하려고 했다고 주장이다. 만약 이게 사실이었다면, 이런 어설픈 알베르트 슈페어의 히틀러 암살계획은 모든 암살계획 중 마지막 암살계획이었다. 슈페어는 해당 암살 계획의 위험성에 대해서 "패전으로 상황이 갈 때까지 가 있었기 때문에, 그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위협을 느끼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SS 경계병들이 독가스를 주입할 만한 곳을 지키고 있었고, 원래는 낮던 굴뚝도 상당히 높게 개조되었기에 사실상 슈페어의 허풍으로 평가된다.그러면 하시지 그랬어요

일설에는 슈페어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변호사의 권유와 검사단의 진술 요구에 응해 암살 계획을 털어놓아 옥살이한 20년 내내 전 나치 동료들에게 왕따를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소문에 불과하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당시 왕따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군인 출신 다른 전범들과 달리 나치 정권을 비판하는 개과천선 흉내를 내며, 연합군 당국의 입맛에 맞게 전략폭격과 나치시대 군수생산정책을 매우 협조적으로 진술하는 바람에 혼자 살고 싶어서 안달난 배신자로 매도된 것이지, 암살과는 전혀 관련 없다.

도리어 슈페어는 징역형을 받은 사람들 중 루돌프 헤스, 되니츠 제독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원래부터 슈페어와 비교적 친한 편이었고, 그 중 가장 친했던 발두어 폰 쉬라흐[7]를 제외한 전원이 1954~1957년 사이에 출감했다. 결국 슈페어는 감옥에서 왕따를 당할 수 없었다.

이런 일들 덕분에 슈페어에 대한 평가도 둘로 갈린다.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한 나치 또는 비열한 기회주의자. 진실은 본인만 알겠지만 당시의 독일 관료 및 군 지휘관 다수를 떠올려보면 완벽히 어느 한쪽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1981년 9월, 영국의 BBC 방송에 출연하기 위해 런던에 도착한 알베르트 슈페어는 그곳에서 갑작스럽게 발생한 심장마비로 인해 사망하고 말았고, 그의 유해는 하이델베르크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가족에는 아내 마르가르테와의 사이에서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녀 힐데독일 녹색당의 정치가가 되었으며, 장남 알베르트 주니어는 아버지를 따라 건축가가 되었다.[8] 차녀 마르가르테는 사진작가가 되었으며 차남 알노르트는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3. 건축가로서

현재 베를린 경기장은 리모델링만 되어 베를린에 남은 나치 시대 유적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좋다.

또한 체펠린 비행장도 나치 조형들이 파괴된 뒤 일부 부분이 철거된 채 계속 남아 현재 독일 국민들의 휴양처로 이용되고 있다.

군수 관리자로서의 슈페어는 (부풀려졌다고 할지라도) 꽤 쓸만한 인물이었지만, 정작 본업인 건축가로써의 평가는 그다지 대단하지는 않다. 건축가로서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만드는 감각은 있었지만, 구시대적인 고전주의 건축의 그늘에서 못 벗어난, "시대를 읽지 못한 건축가"였으며, 사실 그 점이 히틀러의 취향에 맞았다.

사실 슈페어의 학생 시절 일화나 설계된 건물들의 세부를 보면 슈페어 역시 현대적인 건축물로의 흐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의식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신의 줏대를 권력 때문에 버렸다. 그 유명한 르 코르뷔지에미스 반 데어 로에조차 히틀러에게 공사를 받기 위해 노력했었지만, 슈페어 정도로 자기의 건축 철학을 버리면서까지 타협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슈페어의 건축물은 철저하게 히틀러의 스케치와 아이디어를 구체화시켰을 뿐이다.

또한 슈페어의 건물은 오로지 사람을 압도하는 기능만을 중요시 한 것이 대부분으로,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 건물들이 아니었다. 슈페어와 히틀러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제3제국의 수도 게르마니아와 그 중심의 거대한 돔 "국민회관"은 전쟁이 아니더라도 사실상 실현되기 어려운, 무리한 것이었다. 슈페어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런 기획이 그 당시 기술로도 충분히 가능했다고 주장했지만...

국민 회관(Volkshalle, 폴크스할레), 오른쪽의 작은 건물은 "독일의 개선문"인 브란덴부르크문으로 보이는데 크기 비교를 위해 놓은 것.

누가 좋아할 것 같은 건물

18만 명의 군중을 수용할 수 있는 290m짜리 구조물 '국민 회관'과 120m의 개선문 같은 것. 개선문은 평양 개선문(60m, 세계 최대의 개선문)의 2배이며, 판테온을 모델로 한 국민 회관의 돔은 현재 세계 최대의 돔인 카우보이 스타디움(275m)보다도 더 크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보다 17배나 큰 규모였으며 돔 상부에 있는 채광탑의 지름(46m)은 석재 돔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인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 지름보다 약간 더 컸다.[9] 건축공학 전문가들은 수도의 예정지와 거대한 돔 밑의 지반이 너무 약해서[10] 엄청난 기초공사가 필요할 것으로 평가하였다. 설사 돔이 건축된다고 하더라도 기울어지거나 무너질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게다가 위와 같이 거대한 돔이 성공적으로 건축되었다 한들, 계획상으로 그 거리에는 거의 관공서만 배치되어 길게 늘어져 있는 등 물리적인 문제 이외에도 수도 계획 자체에 한참 문제가 많았다.

슈페어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실용성보다 그 존재만으로 "사람을 압도시키는 기능"을 중요시했던 히틀러의 구시대적 취향을 설명해놓았다.[11] 그러면서도 나치 패망 이후 건물 크기나 높이가 건물의 가치나 사람에 끼치는 위엄에 대해선 별 상관이 없었는데 뒤늦게 깨달았다며, 특히 국민회관의 경우 "다시 보아도 전혀 정상적인 계획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며 "자신이 보는 눈이 없었다"고 자책했다.[12] 다만 이 자책도 어느 정도는 정치적인 것이, 나치의 건축물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만나는 자리마다 신나게 자신의 건축물을 설명했다고(...).

히틀러와 슈페어는 건물을 최대한 웅장하게 보이게 원했으며, 수천년이 지나 건물이 파괴되더라도 웅장한 흔적이 남을 것을 신경썼다. 슈페어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와 같은 자신의 건축 철학을 '폐허 가치 이론'이라고 부르고 있다. 즉, 그 시대의 사람들이 역사에서 퇴장한 후에도 당시 시대에 남은 크고 아름다운 건축물로 '존재'를 알려야 된다는 것이다. 마치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고대 로마 시대의 콜로세움처럼. 웃긴 것은 당시 나치당 간부들이 이것에 반대했는데, 그 이유가 "위대한 독일 제국이 폐허가 되어 갈 때를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하다"였다고. 물론 제3제국은 역사상 가장 단명한 제국으로, 15년도 못 갔다(...). 결국 이런 을씨년스러운(...) 건축관은 쓸데없이 넓은 중앙대로 등으로 비효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한편 같은 시대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건축가들은 스탈린의 건축물이 천년만년 새 것 같은 건축물이 될 것이라고 아첨을 떨었다.[13]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파리에 온 히틀러는 이 앞에서 알베르트 슈페어와 함께 정ㅋ벅ㅋ 기념 사진을 찍었다. 히틀러는 소싯적에 파리에서 좀 있어서 파리를 돌아다니며 측근들에게 파리 여기저기를 설명해주기 좋아했다고. 땅밟기 보불전쟁 때부터 이어온 유구한 전통이다 하지만 히틀러가 오기 전에 레지스탕스들이 엘리베이터의 전력을 끊어놔서 올라가지는 못했다.

4. 대중매체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서는 전통적으로(?) '관리의 천재'로 나와 공업 능력(IC)을 10% 향상시켰다. DHR에서는 '천재적인 조직자'인데, 사기적인 능력 때문에 지속적인 하향을 당하고 있다(...). 1.04 RC1 기준 'IC +8%, 외국 IC +8%, 외국 인력 사용 +8%, 소비재 수요량 -10%, 전력/금속/희소 물자 생산 +10%, 불만도 증가 비율 +10%, 비축량 +10%'라는 우수한 능력을 갖고 있다. 1.03 정식 버전 이전에는 IC +20%, 외국 IC +30%의 괴물이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지는 미국보다 높은 독일의 IC로 정리된다(…).

월드 오브 탱크에서는 독일 경전차 유저들에게 수년 간 고통을 안겨줬던 사람이다. 20톤급 정찰경전차 계획을 보고 차체의 특징이 판터 전차 차체와 비슷하니 아예 판터 차체를 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사실이 제작사인 워게이밍의 눈에 띄어서 정말로 판터 차체를 쓰는 경전차나와버렸다. 물론 중량은 40톤으로 원본 판터와는 5톤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20톤급이라며? 사실 워게이밍 입장에서는 제대로 된 경전차보다는 고티어로 가는 것을 막는 장애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 괴악한 설계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슈페어의 이름이 게임 내에서 직접 언급되지는 않아서 욕을 먹지는 않는다. 9.9 패치로 슈페어의 정찰판터는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대전 후 서독에서 개발된 장갑차 경전차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더이상 게임에서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영화 다운폴에 나온 슈페어, 왼쪽에서 부터 에바 브라운, 아돌프 히틀러, 알베르트 슈페어. 슈페어는 하이노 페르히(Heino Ferch)가 분했다. 꽤나 닮았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을 다룬 영화 뉘른베르크에서 헤르베르트 크나우프(Herbert Knaup)[14]가 분했다. 다만 몰락하고 다르게 캐스팅이 하나도 안 닯은 편.


  1. [1] 할아버지부터 장남(본 항목의 본인 기준)까지 계속 건축가로 활동해오고 있다. 더불어 아버지 때부터 이름을 물려주었기 때문에 3대가 같은 알베르트 슈페어. 장남의 경우 베이징 올림픽의 주경기장 설계에 참여하기도 했다. 인터뷰
  2. [2] 400m가 넘는 복도로 가기 전에 위치한 첫 대리석 홀의 모습.
  3. [3] 전차 전투기 차량등 구동부라는 게 있는 모든 종류의 군장비를 생산하는 데 필수적이다.
  4. [4] 귀도크놉 著, 《히틀러의 뜻대로 -조력자들-》 참조.
  5. [5] 중사가 아니라 최종계급은 중위였다. 널리 알려진 괴벨스 가족사진은 1944년에 찍고 보정한 합성사진이며, 하랄트 크반트는 러시아 전선에서 싸우고 있던 관계로 사진을 찍을 당시 함께 있지 못했다. 사진을 합성할때 크반트의 얼굴만 가져다 대충 아무 군복이나 합성했는데 이 때문에 사진엔 장교가 아니라 부사관인 것 처럼 잘못 묘사되어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Harald_Quandt
  6. [6] 제3제국이 없는 세계는 의미가 없으니 아이들에게 그런 세계에서 살지 않게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7. [7] 그도 슈페어처럼 재판에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한 인물이었으며, 슈페어 스스로도 의사와의 면담에서 그가 가장 적극적으로 참회하고 있다고 진술한 바 있다.
  8. [8] 2008 베이징 올림픽의 올림픽 단지 디자인을 총괄했다.
  9. [9] 히틀러가 승리한 세계를 그리고 있는 걸작 대체역사소설 당신들의 조국에서는 이 건물에 18만 명이 꽉 차면 사람들의 입김이 돔 지붕 밑에서 구름으로 응결되어 비를 내릴 정도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외에도 나치가 승리한 대체역사에서 그 특유의 쓸데없는(...) 웅장함과 거대함 때문에 꼭 등장한다.
  10. [10] 베를린은 원래 늪지대를 메우고 건설한 도시로 지반이 아주 취약하다. 당장 저 베를린이라는 이름조차 '물기가 많은 땅'을 의미하는 슬라브 계열 단어 'Birlin/Berlin'에서 온 말이다. 이런 곳에 저런 엄청난 크기의 건물을 짓는다는 건 그야말로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짓.
  11. [11] 히틀러가 기교를 별로 부리지 않는 고전적인 순수함을 추구했고 찬탄해 마지않던 건은 고대 그리스도리아 양식이었다. 그는 그리스 식민지 출신이 본국에 대한 '열등감'으로 이오니아 양식으로 '타락'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12. [12] 같은 건축가였던 그의 아버지는 슈페어를 보고 "네가 미친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13. [13] 한편 이 동네에서도 소비에트 궁전(Soviet Palace)라는 엄청나게 거대한 건물을 구상하고는 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고 흐지부지 되었다(...).
  14. [14] 영화 타인의 삶에서 슈피겔지 편집장으로 나온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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