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군영

1. 개요
2. 개설
3. 편제
3.1. 훈련도감
3.2. 어영청
3.3. 총융청
3.4. 수어청
3.5. 금위영
4. 개편
5. 여담
6. 관련 문서

1. 개요

五軍營

오군영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설치된 훈련도감과 후금에 대응하기 위해 설치된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그리고 이후에 수도를 방위하기 위해 설치된 금위영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이중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은 한양 도성을, 총융청은 북한산성, 수어청은 남한산성을 방어했다.

2. 개설

조선 초기의 오위는 이미 유명무실해졌고, 임진왜란 중 일본군에 대응하기 위해 설치된 훈련도감을 시작으로 개설되고, 후에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금위영이 설치되면서 최종적인 오군영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오군영 중에서도 실제 중앙군의 핵심은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이었으며 이들 삼군문(三軍門)은 후일 서인, 특히 노론, 세도정치기 정권유지에 병력통제 및 재정확보[1]에 있어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하며, 총융청·수어청은 수도 외곽의 방어를 전담하는 군영이었다.[2]

3. 편제

3.1. 훈련도감

약칭은 훈감(訓監), 훈국(訓局), 훈영(訓營) 등. 도감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5군영 중에 가장 오래된 군영으로 1593년 임진왜란 와중에 중앙군으로서 류성룡의 건의로 설치되었는데, 조총병 위주의 일본군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포수(조총수), 사수(궁수), 살수(도검수)로 이루어진 삼수병을 훈련시켰는데 이는 척계광기효신서를 따른 것이다. 소속병들은 일반적인 조선군과 달리 모두 말뚝을 박은 장기근속의 직업군인들이었다는 점에서 특색이 있다. 따라서 훈련도감의 구성원은 유생이나 한량으로부터 공노·사노와 승려에 이르기까지 신분적으로 다양했다. 입대자 대다수는 생계형이었으며, 정부가 전공을 세운 자에게는 면천 등의 특혜를 주었기에 신분 상승을 노리고 입대한 자들도 꽤 있었다.

1593년 설립 당시 병력은 고작 80여명의 군관과 표하군뿐이었으나, 인조효종의 국방정책으로 세를 확장하여, 숙종때는 좌영과 우영, 연영의 병력을 합친 병력이 무려 1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숙종 때 이르러 5군영체제가 완벽히 갖추어지자 훈련도감은 어영청·금위영과 함께 삼군문(三軍門)으로 불리면서 궁궐과 한성의 방어를 담당했고, 그 가운데에서도 훈련도감은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3] 다른 군영이 병력 자원의 부족과 질의 저하로 고초를 겪을 때도 훈련도감은 5000명 이상의 병력을 항시 유지했다.[4] (훈련도감은 좌영과 우영, 그리고 소규모의 기병대[5]로 편성되었으며, 동시대 유럽의 사단급 부대였다.) 수장은 정1품 도제조와 정 2품 제조가 있었으나 이들은 문관으로 대부분 겸직이고, 실질적인 수장은 훈련대장이다.

19세기에 조선왕조의 쇠락과 더불어 다른 군영, 특히 금위영과 어영청이 규모가 감소하는 가운데도 훈련도감은 그 규모를 유지하면서 세도정권의 물리적·재정적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고종 18년이던 1881년에 군제 개혁으로 별기군이 설치된 이듬해 훈련도감은 마침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3.2. 어영청

1623년 인조반정으로 국내 정세가 어수선하고 인조와 서인친명배금 정책으로 후금과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자 한양의 중앙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후금에 대해 강경책을 표방한 서인 정권은 인조가 친정(親征)을 하여 군대를 이끌고 개성으로 나아갈 것에 계획하였다. 현실은 시궁창 이러한 정책의 일면으로 개성유수에게 260여 명의 화포군을 선별하여 훈련하게했는데, 이것이 어영군의 시초다. 다들 알다시피 인조의 친정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지만, 개성유수가 훈련시킨 화포군은 해산되지 않았고, 다음해 개성에서 도성으로 거처를 옮겨 국왕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어영군은 새로운 편제 직후에 일어난 이괄의 난 당시 인조를 공주까지 호종했고, 정묘호란 직후에는 7천명으로 그 수가 크게 증강되어 5군영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이후 효종의 북벌계획에 의해 어영청은 크게 강화되어 그 규모가 3배 가까이 늘어난 2만 1천명의 부대가 된다.[6] 고종 때 이르러 그 이름을 장어영(壯禦營), 총어영(摠禦營)으로 바꾸기도 했던 어영청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완전히 폐지된다. 어영청은 주로 포수 (조총병)과 화병 (중화기 사수), 포병을 양성하였는데, 이때문에 훈련도감과 함께 5군영의 최정예로 손꼽히기도 했다. 대장은 어영대장으로 종2품의 당상관이었다. 주로 문관이 역임하였으나, 이완 같은 무인이 대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어영청은 주로 국경지대 수비나 반란진압에 투입되기도 했다. 대표적인게 나선정벌,이인좌의 난신미양요다.

한편 어영부영의 어원이 바로 이 어영청이다. 처음에는 군기가 엄한 정예군이었으나, 조선 말기로 갈수록 군기가 문란해져 당나라 군대가 되어감에 따라 사람들은 '어영청은 군대도 아니다'라는 뜻으로 '어영비영(御營非營)'이라고 불렀고, 이후 발음의 편의상 어영부영으로 변화한 것.

이괄의 난 시기에 인조를 공주까지 호위한 공이 있고 북벌의 총군영이라 급격히 성장하였으나 나중에는 한강이 얼기 시작하는 겨울철에만 충청 전라 경상의 군사들을 번상시켜 1000명을 채웠기 때문에 군기가 느슨해졌다.

3.3. 총융청

1624년, 전해에 발발했던 이괄의 난 때 반군이 관군의 저지선을 너무도 쉽게 뚫고[7] 한성을 점령하자 이에 대한 반성(...)으로 도성의 북부를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그렇지만 당시 국제정세에서 조선후금의 사이가 날이 갈수록 악화일로를 걸었던 만큼 총융군은 처음부터 수도를 직접 방위하고 왕을 호위하는 목적이라기보다, 후금과 조선 사이에 일어날지도 모를 전쟁에 대비해 수도 방어를 증강하기 위한 목표로 설립되었다.

보유병력이 설립당시에는 겨우 2천에 불과하였으나, 병자호란 직전에는 2만명으로 확정된 총융청은 북한산성 방어를 담당하며 약 200여년간 조선의 도읍이었던 한양의 북부 방어선을 책임졌다. 헌종 연간에 국왕 주도하에 총위영(摠衛營)으로 개편되어 정조 연간의 장용영(壯勇營)처럼 다른 군영들의 병력을 이전받아 세를 확장하기도 하였으나, 헌종이 사망하고 철종이 즉위하자 원상 복구되었다. 1884년 고종의 개혁정책에 따라 폐지되었다. 총융청의 대장은 총융사(摠戎使)였다. 총융청은 남한산성의 수어청과 더불어서 조선왕조의 무력기반이었으며, 상시 2만 3,500여명의 병력을 유지하였다. 근데 홍국영이 수어.총융청의 4만명을 사병화 후덜덜

3.4. 수어청

인조 4년이었던 1626년 도성 남부와 남한산성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경기병사 겸 총융사였던 이서(李曙)의 관할하에서 남한산성의 축조를 담당했으나 병자호란 이후 독립적인 군영으로 분리되어 수하에 수어청을 설치하게 된다.[8] 초기에는 본부가 도성 북부에 설치하며 한성부윤이 수어청의 업무도 겸하되, 주요 방어거점인 남한산성은 광주부윤(종2품)이 운영하였다. 이런 지휘계통의 이원화는 당연히 문제를 불러일으켰고, 거기다 붕당이 극심화되면서 특정 당파의 군사력 독점 우려가 커지고 있었다. 정조는 1795년 본부를 아예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광주유수(종2품)가 수어사를 겸하게끔 하였다. 그리고 한성에 있던 수어청은 호조로 편입되었다.[9] 참고로 남한산성의 가장 높은 곳에 수어장대(守禦將臺)가 있다.(ROTC 학생중앙군사학교 성남시절 후보생 출신이라면 추억의 행군 코스 수어장대)수어청의 대장은 수어사(守禦使)였다. 수어청은 약 1만 6,500명의 병력을 보유하였으며, 이들의 주요목표는 남한산성의 방위였다.

3.5. 금위영

이름은 가장 친위대스런 금위영이지만, 오군영 가운데 그 탄생이 가장 늦어 영조의 재위기간이었던 1754년에야 독립된 군영으로 편제된다. 금위영의 시초는 1682년 병조 소속의 정초군과 훈련도감의 별대를 통합한 것이었는데 그 통합의 이유가 안습하게도 경비 절감 차원이었다. 훈련도감 항목에 나와있듯이 도감군은 그 시대 다른 조선의 관군과 달리 직업군인이었기에 상당한 인건비를 요구로 하였는데 이 돈을 아끼고자 정초군과 훈련별대를 통합하여 금위영을 설치하였다. 훈련도감·어영청과 더불어 삼군문으로 불리며 국왕 호위와 수도 방어의 척추역할을 맡았던 금위영의 대장은 병조판서가 겸임하였지만[10] 영조 연간에 금위대장을 별도 임명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금위영은 어영청보다 늦게 만들어졌지만 훈련도감의 병력이 모태가 되었다는 근거로 어영청보다 앞서는 것으로 대우받기도 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집권시기 왕권 강화의 측면에서 일시적으로 그 위상이 강화되기도 했으나, 고종의 친정 이후 다시 원상복귀되어 1881년 장어영으로 통합되었다가 1895년에 폐지된다. 금위영은 무려 8만5,000여명의 군액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직업군인인 도감군만 해도 3만에 이르렀다. 이는 금위대장이 병조판서였던 것과, 금위영이 병조소속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영청, 수어청, 총융청의 3청은 비변사 소속이었다.)

4. 개편

1881년 조정이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관군을 별기군과 같은 신식 군대로 개편되면서 5군영도 무위영, 장어영으로 합쳐졌다.1882년 임오군란 이후 흥선대원군에 의해 재건되지만 알다시피 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되는 바람에 곧 다시 폐지된다.

5. 여담

'총융청'이 201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고려 관련 문제의 오답 선지로 출제되었는데, 모르는 수험생들이 많아서 오답자를 양산했다. 정답 선지는 역분전의 지급이었다.

6. 관련 문서


  1. [1] 어떻게 군대가 정치 당파의 재정적 기반이 되는가 싶지만, 운영 및 전시대비물자로 비축되는 군량을 환곡으로 운영해 이자놀이를 했다. 거기에 조선후기의 심각한 부패로 창고에 군량이 하나도 남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실제로 이러한 문제로인해 제대로 봉급을 지급받지 못한 군인들이 일으킨 난이 그 유명한 임오군란이다
  2. [2] 총융청과 수어청은 경기도 일대 속오군을 중심으로 편성되어 사실상 지방군화되었다.
  3. [3] 임금의 호위를 비롯해 궁성과 도성의 파수 등 여러 모로 친위대적인 임무를 수행하였다. 특히 궁궐 입초 경비는 금위영과 훈련도감 소속 병력만 투입되었다.
  4. [4] 헌종 이후 어영청과 금위영은 각각 8천명으로 축소되며, 고종때 이르면 훈련도감 병력이 전체병력의 20%를 차지하게 된다.
  5. [5] 세조 때까지 강력한 전력을 자랑하던 조선군 마군(馬軍)은 조선 후기로 가자 훈련도감 소속 몇 개 초(현재는 중대급)을 제외하고는 모두 해체되었다.
  6. [6] 당연히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친 조선 조정이 돈이 있을리가 없었고 이 거대한 규모로 성장한 어영청을 먹여살리기 위해 보인제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민중들의 불만이 높아지기도 했다.
  7. [7] 사실 이괄의 난 당시 반군은 조선이 당시 육성했던 최정예 병력이었던만큼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8. [8] 정확히 설명하자면 정묘호란 때 독립적인 군영이 됐으며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 방어을 전담하게 된다.
  9. [9] 덧붙여 정조가 자신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에 힘을 몰아주기 위한 정치적 포석도 수어청의 개혁에 한 몫 했다.
  10. [10] 금위영 설치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 숙종 초년의 실세 김석주였기 때문에 빚어진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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