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태우

<span style="text-shadow: 0 0 10px #ffffff; color: #fede58;">건국훈장</span> 애족장(愛族章)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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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한말의 애국 지사.(1882년 3월 4일 ~ 1950년 7월 22일 총 24977일.)

1. 소개
2. 암살 시도
2.1. 거사 과정
2.2. 거사 과정의 진위 여부
2.2.1. 달리는 열차에 던졌는가?
2.2.2. 일본쪽에 기록이 없는가?
2.2.3. 유력한 과정 3가지
3. 이후 말년까지
4. 여담

1. 소개

조선 후기의 과천군 하서면의 농촌[2]에서 출생했다. 농민 신분이라 학식은 높지 못했지만, 애국심과 의기는 무척 투철했다고 한다. 을사조약에 분노한 그는 최초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로 결심했으며 이토 히로부미에게 짱돌(!)을 던저 중상을 입히는 것으로 항거를 했다. 그때가 23살이었다.[3]

2. 암살 시도

2.1. 거사 과정

맹꽁이 서당에서 표현된 원 지사의 항거 과정. 독립 운동가 원태우 지사 기념 사업회에서 윤승운 화백에게 허락받아 포스팅한 것이라고 한다. 기념 사업회 / 블로그 스크랩글

1905년 11월 17일, 평소 뜻을 함께했던 동료 이만여, 남통봉, 김장성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때 이토 히로부미는 경부선 기차를 타고 안양 근처를 지나갈 예정이었다.[4] 그래서 원태우 지사는 철로에 커다란 돌을 놓고, 기차를 전복시킬 계획을 세웠다. 기차가 전복해도, 이토 히로부미가 살아 있다면 어떻게든 죽일 수 있을 거란 계획이었지만 거사 직전, 동료였던 이만여가 겁을 먹고 철로에 있던 돌을 치워버렸다.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달려오자, 원태우 지사는 서리재 고개[5]에서 있는 힘껏 돌을 던졌다. 돌을 던졌다고 해서 그냥 가벼운 돌팔매 테러 정도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원태우 지사가 던진 돌은 정확히 이토 히로부미가 앉아 있던 자리의 창을 깨고 들어갔다. 유리창이 박살이 나면서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에 유리 파편이 8군데나 박혔다. 자칫 했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중상이었다고 한다.

이 의거는 일본 신문에도 신속히 보도되는 등 열도를 흔들어 놓았고, 원태우 지사는 일본 군경에게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당했다. 그때 고문의 후유증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고자가 되었으며,[6] 여름에도 긴팔과 긴바지를 입어야 할 정도로 흉터가 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독립(해방)이 될 때까지 일제의 집중 감시를 받아야만 했다.

2.2. 거사 과정의 진위 여부

이 문단은 항거 과정의 신빙성 문제제기와 반박 의견을 정리한 것이다.

원태우 지사가 분명 이토 히로부미를 어떻게든 처리하려 했고, 상해를 입힌 사실이 발각되어 옥고도 치룬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이토 히로부미가 타고 있는 기차를 전복하려고 선로에 돌을 놓아서 암살하려 시도했고, 그게 실패하자 달리는 기차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중상을 입혔다" 라는 잘 알려진 방식으로 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교차검증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상해를 입혔다는 내용 자체가 명백히 밝혀지지 않아서 정확한 거사 과정 자체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것이 안타까운 사실이다.

아래는 이 내용의 의문점에 대한 찬반 내용을 기록한다. 참고로 이 문서의 35번째 버전에는 거사 과정을 허무맹랑하다고 표현하는 측의 의견이 적혀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그러나, 항거 과정이 알려진 사실과 다르거나 그 진위 과정이 불투명하다고 하더라도 항거를 "했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며 이를 허무맹랑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이 문단부터는 35번째 버전에서부터 지적한 의문점과, 이에 대한 보충 자료를 첨부하여 정리한다.

2.2.1. 달리는 열차에 던졌는가?

우선적으로 "전속력으로 달리는 열차에 돌을 던져 기차 안에 탄 이토 히로부미를 맞추었다" 라는 내용은 아직까지는 한국 내에서만 있다. 실제로 빠르게 달리는 기차에 돌을 던져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을 정확히 맞추는 것이 과학적으로도 상식적으로 매우 어려운 것이라, 이 점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논박이 많이 제기되어 오기도 했다.

이에 대해선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의견이 있다. 의견 출저

  • 1905년 당시 기차 속도는 시속 20km ~ 30km로 속도가 느렸는데 운전 면허 시험장에서 볼 수 있는 속도로 열차가 달렸다고 보면 된다. 물론 그 속도 또한 당시로써는 빠른 속도였겠지만, 그 느린 속도로 달리는 열차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앉은 의자를 향해 돌을 던졌고, 유리창이 깨지면서 부상을 입었다.
  • 돌팔매질을 한 장소는 당시 서릿재 고개라 부르던 곳으로 경사가 급하여 열차는 속도를 줄이며 넘어가야 할 정도였는지라 서행을 해야만 하였다는 곳어서 맞추기가 용이했다. 또 고개를 깎아 기찻길을 놓았기에 비탈진 위쪽에서 아래쪽을 느리게 지나가는 기차 내부를 보기가 쉬운 점도 한 몫 했다. 즉, 위에서 내려보는 위치에서 돌을 던졌기에 가능한 것이다. 현재 석수 IC가 있는 곳이 안양 육교 자리인데 이곳이 예전 말로는 서리재 고개였다. 도로로 개편된 현재에 봐도 기차길은 상당히 낮은 곳에 있어서 비탈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 정확하게 돌을 던질 수 있는 것이다.

정리해보면 그 당시 기차가 빠른 수준은 아니었기에 평상시같이 달리더라도 느렸을 것이고, 게다가 거사를 행한 서릿재 구간은 안그래도 느린 기차가 서행하는 구간이었으므로 그쪽의 지리를 잘 알던 원태우 지사가 기차를 내려다보는 위치에서 때를 기다렸다가 바로 돌을 던져 맞추었다는 것. 게다가 단순히 팔로 던진게 아닌 투석구를 이용한 투석이었으면 충분히 가능하다. 사거리가 200미터 - 300미터는 훌쩍 넘기 때문이다. 관련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실력 있는 자는 두개골 정도는 바로 부셔버릴 정도의 위력과 정확성을 가진다.

2.2.2. 일본쪽에 기록이 없는가?

그 외에도 일본 쪽 기록이 남아있지를 않아 교차 검증이 힘든 사실도 있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 정도의 거물을 암살 시도하여 그러한 중상을 입혔다면 일본 내에도 기록이 있을 텐데,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에서도 일본에 크게 보도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일본 내에서는 이러한 기록이 소실되었는지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일본이 이것을 굳이 감출 이유도 없을 것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일본쪽에서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일본 언론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점에 있어서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 전쟁 중이나 여러 사정으로 기록이 소실되었을 가능성
  • 그나마 적게 다친 상해였기에 뒤따를 복잡한 후폭풍을 막기 위해 법으로만 처리했을 가능성

후자의 경우, 돌을 던져 이토 히로부미에게 상해를 입히기는 했으나 완전히 중상이라기보단 경상 정도로 맞아 다치기만 했을 것이라 경찰들을 풀어 원태우 지사를 따로 잡아간 것이고 이런 사실이 함부로 알려진다면 조선 통치 정당화에 금이 갈 수 있거나 항일 운동의 불길이 거세지는 등 복잡한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7] 진짜 중상이나 사망이 아닌 이상 가벼운 항거는 언론에 크게 알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한다.

▲ 일본 측 전쟁 화보에 그려진 기록화 (사진 출처)

물론 그렇다고 현재까지 남은 일본의 보도 자료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그 중 일례로 일본 박물관 발행의 '일로전쟁화보' 제29권(1905년 12월8일 발행)에 일본 측 화가인 기무라 고타로가 그린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이란 기록화로 남겨져 있다. 여기서 원태우가 농부가 아닌 갓쓰고 두루마기 입은 선비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동판과 흉상 등에 나타난 선비 모습의 원태우 의사와 비슷하다. 출처 1 출처 2

2.2.3. 유력한 과정 3가지

정리하자면, 전혀 없는 거사 내용은 아니고, 항일행위를 한 것 자체는 사실이지만 그 방법은 다음 세 가지 중 하나로 정리할 수 있다.

  • 서릿재 구간의 기차를 내려다보는 언덕에서 기차가 서행을 할 때를 파악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칸을 확인하고 돌을 던져 맞추었다.
  • 이토 히로부미가 하루 일정을 마치고 기차에 타려고 하길래, 그 틈을 노려 기차에 타려는 이토를 향해 돌을 힘껏 던져 맞추었다.
  • 열차가 아직 출발하지 않았거나, 달리다가 잠시 서 있을 때 바로 이토 히로부미가 보이는 열차칸을 향해 돌을 던져 맞추었다.

이후에도 교차 검증이 가능한 자료가 있다면 추가바람.

3. 이후 말년까지

원태우 지사는 1950년, 69세(만 68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타계했다. 그나마 조국의 독립을 보고 세상을 떠났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까. 어쩌면 조국이 독립된 지 5년만에 전화에 휩싸이는 것을 보지 못 한 것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일로 여기는 7월 22일이면 이미 한창 한국 전쟁에 휩싸이고 있을 시기이기도 하다보니 전쟁 중에 휩싸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기일은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정확한 기일이 발굴이 되었을 경우 수정 바람.

4. 여담

학자이자 애국지사였던 송상도는 이 의거에 대해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의해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 꼬투리는 이미 원태우로부터 있었다" 라고 평하기도 했다.출처

생전에 돌절구맷돌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한다. 지사가 만들었던 돌절구 하나는 지금 독립 기념관에 기증되었다. 1990년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현재 안양시 만안 도서관에는 의거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 [1] 이 명판은 그야말로 문제 투성이다. 우선 본문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농민 신분이었는데도 쓰고 두루마기 걸친 전형적인 조선 시대 선비 모양으로 도장찍기해서 특징이 하나도 없는 것도 그렇고, 저 명판이 안양역에서도 사람들이 접근은 커녕 확인도 하기 어려운 위치에 박혀 있다는 것도 문제다. 제대로 읽으려면 계단의 중간에 서서 읽어야할 판. 거기에다가 청년기인 23세에 의거를 한 모습으로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명판의 모습은 중년의 모습이다. 그야말로 탁상행정의 본보기.
  2. [2] 현재의 안양시 안양동
  3. [3] 안중근 의사보다 4년 더 빨랐다.
  4. [4] 당시 수원에서 사냥을 한 후 서울로 올라오는데, 경부선이 안양을 지났다.
  5. [5] 현재 안양시 석수동 고가도로 있는 방면. 석수 체육 공원 인근. 운전면허학원에서 길을 건너면 설명판이 조그마낳게 하나 있다.
  6. [6] 본 위키의 고문 항목을 참조해보면 왜 그렇게 됐는 지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뿐만 아니라 해방 후 군사 정권 하에서도 이런 희생자가 많이 생겼다.
  7. [7] 일본 자신들이 조선을 식민 통치할 때 내부 원성이 대단하다는 사실이 세계에 알려지는 꼴이 될 수있는 데다가, 그 당시 민중에 뿌리내린 반일 감정이 항일 투쟁으로도 이어질수 있기 때문. 게다가 당시에는 자기 나라의 높으신 분인 이토가 모욕을 당하거나 다쳤다면 일본 내부에 흉흉한 소문이 돌거나 문제가 복잡해 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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