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 내전

열 흘 간에 걸친 교전 끝에 슬로베니아에서 철수하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1991년 7월 7일

'폭풍 작전' 당시 아드리아 해 해변에서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 측 반군에게 포격을 가하는 크로아티아군, 1995년 8월 5일

1. 개요
2. 역사적 배경
2.1. 중세
2.2. 1, 2차 세계대전기
2.4. 내전의 발단 -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의 유고 연방 탈퇴
3.1. 슬로베니아 전쟁(열흘 전쟁)과 크로아티아 전쟁
4. 보스니아 내전(1992년 2월 ~ 1995년 12월)
5. 유고 내전의 또다른 불씨 - 코소보 전쟁(1998년 2월 28일 – 1999년 6월 10일)
6. 후일담 - 끝나지 않은 전쟁
7. 결과
8. 관련 대중매체
8.1. 영화
8.2. 서적
8.3. 만화
8.4. 게임

1. 개요

발발 1991년 6월 25일[1]/6월 26일[2]/6월 27일[3]/8월[4] ~ 종료 1999년 6월 10일

1991년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1990년대 내내 일련의 전쟁을 통해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단순 전쟁이 아닌 내전으로 규정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유고슬라비아란 국가가 이미 없어진 이상 더 이상 내전으로 정의할 수 없다는 의견도 많다. 위키피디아의 "Yugoslav Wars(한국어판 : 유고슬라비아 전쟁)"라는 항목명이 대표적.

일각에서는 1998년에서 1999년에 벌어진 코소보 전쟁을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는 역사학자도 있다. 따라서 1995년 보스니아 내전을 끝으로 1995년 12월에 종료되었다는 주장이다. 또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에서 있었던 충돌을 근거로 1991년 3월을 발발 시기로 보는 시각도 있다.

2. 역사적 배경

2.1. 중세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은 원래 고대 로마 시대에는 일리리아로 불리던 곳으로서 게르만족서유럽으로 이동한 이후 움직이기 시작한 슬라브족은 7세기에 이 일대를 다스리던 동로마 제국롬바르드족, 사산 왕조, 아바르 칸국, 이슬람 제국 등 외부 세력과의 계속된 전쟁으로 정신없는 사이 일대에 눌러앉았다. 슬라브족은 계속 동로마와 연합 또는 침략을 반복해 가며 세력을 확장했고, 원래의 일리리아계 로마인들은 동화하거나 쫓겨나서 이곳은 완전히 슬라브족의 차지가 된다.

이곳에 정착한 슬라브족은 남슬라브족으로서 폴란드-체코와 같은 서슬라브족이나 러시아-우크라이나와 같은 동슬라브족과는 구별되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데, 교회의 대분열 이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의 서쪽은 가톨릭,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등의 동쪽은 정교회의 영역이 되면서 슬라브족의 종교도 동서에 따라 정교회와 가톨릭으로 갈라졌다. 이후 14세기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 제국이 이 지역에 들어오기 시작해 15세기에 합스부르크령으로 편입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일부를 제외한 지역 전체가 오스만 제국의 영역이 된다.

사실 민족적 갈등의 뿌리는 오스만 제국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고, 카톨릭-정교회가 갈라진 동서방 기독교 분열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오스만 투르크 시절 이 종교적 갈등이 고착화되었고, 오스만이 이런 종교적 갈등을 이용하여 이교도 지배민족인 남슬라브족을 교묘하게 분리지배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여기에 남슬라브족 일부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들은 이슬람교가 우선인 오스만 제국내에서 우대를 받고, 경제적, 정치적 우위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또다른 민족적 갈등을 부채질하는 원인이 되었다. 물론 아래 지적되는 것처럼 개종 초반 (15세기)에는 오스만 제국 내에서 혜택을 받기 위해 겉으로만 개종하는 자들이 있었고, 이런 사람들을 들어 민족적 갈등이 심각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개종의 역사에서 자주 보이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가 10세기 북유럽으로 전파되었을 때에도 대부분의 평민들은 왕이 개종하면 같이 세례를 받았지만, 기독교 교리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례를 받고도 그 몇세대 후까지 오딘토르를 섬기고 있었다.

오스만 시절 이지역의 민족적 갈등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다. 오스만 시기에 그다지 예를 들어, 크로아티아인이나 보스니아인이나 세르비아인이나 서로의 종교 축일에 서로를 방문해 축하하며 함께 축제음식을 나누고, 각 민족간의 통혼도 매우 활발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애초에 발칸지역에서는 종교에 대해 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보험삼아 두개 세개씩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매우 흔했다. 중세 기독교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서유럽에서 최초로 대규모이단 사냥과 서방기독교 세계 내부의 종교 전쟁, 학살이라 할만한 알비 십자군의 카라티파 또한 원래 보스니아 지방의 보고밀파에서 전파 된것이 정설로 통할 만큼 발칸 반도, 특히 몬테네그로-보스니아 산악 지대는 애초에 강력한 정복 제국들의 행정력이 닫지 않아 종교적으로 굉장히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였다.

이혼을 금지하는 가톨릭 교회법에서 벗어나기 위해 크로아티아 여성이 이슬람으로 (형식적으로) 개종하고 남편이 이교도라는 이유로 이슬람 법정을 찾아가 이혼판결을 받아내는 사례를 비롯해, 오스만 제국이 비무슬림에게 부과하는 세금을 거부하기 위해 "우리 마을 사람들은 무슬림이다!"라며 관리들을 쫓아내고 그러자 "그렇다면 당신들은 무슬림이니 군대를 가라!"라며 다시 징집관을 보내오자 "우리는 기독교인이다! 니들 행정문서 잘못된거 아님?"하고 거부하는 알바니아인 이야기도 그렇고 민족주의 시대 이전에 이 지역은 가톨릭과 정교회와 이슬람이 나름대로 공존하고 있었다.

정교회의 성인인 성 일리아스 아르두니스(Άγιος Ηλίας ο Αρδούνης)의 일화가 전해지는데, 젊은 시절에는 세금좀 덜 내겠다는 요량으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슬람으로 (형식적으로) 개종했다가, 아토스산을 여행하고나서 그곳에서 신성한 체험을 하고 수도생활을 8년동안 하고나서 고향인 칼라마타로 돌아온 그에게 시장에서 한 튀르크 군인이, "이보게 무스타파(일리아스의 무슬림 이름), 자네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다 왔는가?"라고 묻자, "나는 더이상 무슬림 무스타파가 아니라 정교인 일리아스라네."라고 답하고, 그러자 도시의 관리들이 그를 배교혐의로 고발해 처형했는데 화형대의 불길에도 불구하고 전혀 몸이 타지 않아 결국 칼을 맞고 죽었고, 죽은 일리아스의 몸이 밤이 되도록 밝게 빛나는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이 튀르크든 나이롱으로 개종한 무슬림이든 깜짝 놀라 다시 기독교로 돌아왔다고 한다. 당시엔 워낙 이슬람인 척 하는 기독교인이 너무 많아서 시성된 경우다.

하지만 위에서 보듯이 "배교자로 간주된 나일롱 무슬림을 처형했고, 그 사람을 정교회에서 시성했다"는 일화만 가지고서도 이 지역의 종교 갈등이 상당히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이슬람교 쪽에서 종교적인 개종을 배교로 간주하여 처형으로까지 다스릴 정도였는데, 투르크인 다수는 이곳까지 진출하지 않았고, 이스탄불에 수도를 두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행정력은 무슬림으로 개종한 남슬라브족을 통해서 투사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정복한 지역에 대한 이슬람 우대 정책을 펼치고 그에 따라 편의를 위해 이전에 이 지역에서 이단교파인 보고밀파를 믿던 남슬라브인과 알바니아인들이 오스만 제국의 정복 이후 급속히 이슬람으로 갈아탄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5] 오스만 제국 시기에는 제국 내 백성들을 각자 믿는 종교에 따라 공동체(Millet)을 형성하게 하고, 토착 종교를 기반으로 통치했기 때문에 그전까지는 애매한 구분만 존재했던 이 지역에 가톨릭 지역, 정교회 지역, 이슬람 지역 등으로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들 지역의 슬라브족은 대체로 정교회-가톨릭-이슬람의 신앙에 따라 민족도 갈려서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인,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인,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인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종교를 제외하면 언어나 혈통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이렇게 중세부터 이어진 민족간의 구분은 결국 19세기 민족주의 시대에 들어서 갈등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2.2. 1, 2차 세계대전기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발칸 반도의 남슬라브족들은 통일된 국가주체를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 독립한 세르비아 왕국몬테네그로 왕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던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유럽 영토였던 마케도니아가 여기에 해당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19세기 말부터 슬라브주의를 기치로 하여 새로운 통합 국가를 건설하려는 남슬라브족 통합 운동이 일어났고, 이러한 남슬라브족 통합 운동은 제1차 세계 대전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이후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전승국이었던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합병하여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후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은 몬테네그로도 합병하면서 1929년 국호를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변경하였다.

그러나 오랜 외세의 지배를 거치면서 서로 다른 종교와 역사적 배경을 가지게 된 발칸의 남슬라브족들은 이질적인 다른 민족이었다. 복잡한 다민족 국가답게 타 민족과 종교 집단 간의 대립, 공산주의자본주의 이념 대립, 민주주의파시즘 충돌이 매번 지속되어 사회 혼란이 심화되었다.

이에 알렉산다르 1세 당시 유고슬라비아 국왕은 계엄령을 선포해 입헌군주제에서 전제군주제로 전환하고 타민족의 민족주의를 억압하는 강압적 독재 정치를 시도하여 유고의 혼란을 잠재우려 했으나, 결국 1934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암살당하고 말았다.

한편 이러한 혼란상 속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고 결국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1941년 나치 독일이탈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 그리고 그들의 하수인들인 크로아티아 우스타샤의 협공을 받아 페타르 2세 국왕을 비롯한 왕실 인사들이 영국으로 달아나고 독일 국방군에게 점령당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전역에서 독일군과 나치의 하수인들이었던 크로아티아계 우스타샤에 항거하는 체트니치, 파르티잔 등의 무장 게릴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들 중 요시프 브로즈 티토, 밀로반 질라스 등 공산계 인사들이 이끄는 파르티잔이 강력한 주도권을 잡아 세를 불려 결국 소련의 도움으로 치열한 전투 끝에 1944년 베오그라드를 함락시킴과 동시에 이듬해인 1945년 유고 전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2.3.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집권

전쟁이 끝나자 유고의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파르티잔은 군주제 폐지와 망명 중인 페타르 2세 국왕의 군주 지위 박탈 등을 선언하고, 같은 해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유고 연방)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그리고 티토를 유고 연방의 초대 총리 겸 국방장관으로 선출하면서 유고는 공산당 독재 국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티토는 유고의 공산화 과정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소련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결국 1948년 소련의 독재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유고의 코민포름 회원국 자격을 박탈하며 공산권에서 축출했다. 코민포름에서의 축출 이후 티토는 독자적인 사회주의 체제 건설에 집중했는데, 2차 대전 이후 자본주의 미국과 공산주의 소련으로 대표되는 냉전이라는 국제정세 속에서 중립, 비동맹을 표방한 것이 대표적이다. 외교적으로 인도, 이집트, 인도네시아제3세계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비동맹 운동을 주도하는 등 이 시기 유고는 티토의 지도하에 자주적인 독자 노선을 걷게 되었다. (티토는 1953년에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티토는 복잡한 민족과 종족, 종교들로 이루어진 유고슬라비아를 안정적으로 다스려, 이 시기 유고슬라비아는 동유럽에서 잘 사는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공산, 자본 진영 어느 한쪽의 눈치도 안 보고 공산권의 맹주였던 소련MiG-21 전투기, 프랑스아에로스파시알 가젤 경공격 헬리콥터 같은 최신예 무기들을 사오고 외교적으로도 안정되는 등 큰 번영기를 누렸다. 문화산업도 크게 발달하여 락밴드아이돌도 많이 배출했고 올림픽, 월드컵과 같은 다양한 국제 대회에서 상도 많이 받았다.

2.4. 내전의 발단 -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의 유고 연방 탈퇴

1980년 5월 유고슬라비아를 안정적으로 통치해 온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그가 사망하면서 티토 집권 아래 잠재되어 있었던 민족과 지역 간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티토 사후 유고슬라비아는 6개의 공화국이 각 공화국 출신 대통령을 돌아가면서 선출하는 집단 지도 체제로 이행되었다.

그러나 새 정부의 경제 정책은 오일쇼크로 인한 성장저하와 1980년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인한 외채 폭증으로 일어난 경기침체, 그리고 물가 상승에 무기력했다. 그나마 외채 문제는 제3세계의 지도국이라는 타이틀 덕택에 상당부분 탕감을 받기는 했다만, 그럼에도 200억 달러가 넘는 외채를 끌어안고 있었으며 매년 2배가 넘는 물가상승과 10% 이상의 실업률을 기록하며 경제성장이 정체되는 결과를 낳았다. 외채위기는 또한 1950~70년대 당시에 드러나지 않았던 경제의 지역별 불균형 발전문제를 쟁점화했다. 그리고 티토 격하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하였고 지식인들은 물론 각 공화국의 지도자들이 민족주의를 내세워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키거나 민족주의자들이 지도자로 등극하게 되면서 1980년대 후반부터 각 공화국 간의 갈등으로 정치적인 혼란을 겪기 시작했다.

물론 매년 수백만명 가량의 해외 관광객들이 자유롭게 유고슬라비아 곳곳으로 놀러와 휴양을 즐기거나 올림픽을 열거나 내전 시작 1년전인 1990년에는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를 개최하는 등 겉보기에는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민족주의지역이기주의로 점점 분열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고, TV방송과 신문을 비롯한 매스미디어도 민족주의자들의 차지가 되는 바람에 상대 공화국과 자치주에 경제위기의 책임을 몰면서 국론분열에 일조했다.

1989년 동유럽의 공산 독재 정권이 연쇄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하고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유고슬라비아도 대세에 따라 공산당의 일당독재체제가 슬로베니아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탈퇴로 붕괴하였으나. 오히려 이러한 정치적 분열에 의한 붕괴는 민족 간의 갈등 해소에 딱히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후 1990년 12월 23일의 선거에서 각 공화국은 민족주의를 앞세운 정당들이 압승을 거두었으며,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를 중심으로 각 구성국은 지역경찰력으로 위장한 군병력 창설 및 독자적 외교행보를 하면서 연방정부의 대표성은 급속히 무너져갔다. 즉 유고슬라비아가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1991년 6월 25일에 연방 공화국을 구성하고 있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연방에서 탈퇴하고 분리 독립을 선언하면서 내전은 시작되었다. 연방 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세르비아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 선언을 격렬하게 비난하였고, 이에 따라 세르비아 주도의 유고 정부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진압하기 위해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 병력을 파견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사실상 내전 상태로 돌입했다

3. 유고 연방의 붕괴

3.1. 슬로베니아 전쟁(열흘 전쟁)과 크로아티아 전쟁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이 슬로베니아로 진격하자 슬로베니아는 경찰 병력과 지역 방위군 등을 모아 게릴라전으로 대항했고, 슬로베니아와 인접한 크로아티아에서는 유고 인민군과 크로아티아군 간 충돌이 치열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소수 민족들이 크로아티아의 분리 독립에 반대, 1991년 8월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RSK)을 수립하고 유고 인민군의 지원을 받아 저항하면서 사태는 복잡해졌다. 이에 대해서는 무력으로 크로아티아 전역을 점령해 연방을 유지하려던 유고 연방의 전략이 실패하면서 차선책으로 실행되었다는 시각이 있다.

국민의 90% 이상이 슬로베니아계로 구성된 슬로베니아를 지배할 명분이 없었던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고작 개전 열흘만인 1991년 7월 9일 전투를 중단(휴전)하고 철군하면서 사실상 슬로베니아의 독립을 인정했다. 이 짧은 전쟁의 별칭이 "Ten Day War"(열흘 전쟁)인 이유다.

사상자는 유고 연방 사망 44명, 부상 146명에 슬로베니아군 사망 18명, 부상 182명이었는데, 유고 인민군은 모두 현지에서 선발되었기 때문에 사상자 다수가 슬로베니아 출신이었다.

슬로베니아가 독립 선포 날짜를 하루 앞당겨서 유고 인민군의 진군은 전쟁이 일어난 지 24시간 뒤인 6월 26일이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슬로베니아는 슬로베니아 내부의 유고 인민군을 항복시키는 데 집중하는, 기발하면서도 다소 위험한 전략을 사용했으나 다행히 유고슬라비아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전쟁은 빨리 끝났다.

이 과정에서 4,693명의 유고 인민군과 252명의 경찰이 슬로베니아에 포로로 잡혔다. 이 전쟁은 크로아티아의 브리오니 섬에서 체결된 브리오니 협정으로 종료되었으며, 슬로베니아는 3개월 뒤인 10월 공식적으로 독립했다. 포로가 된 유고 인민군과 경찰들은 (휴전기간부터 이미) 무장해제 후 세르비아로 돌아갔다.

결국 이렇게 슬로베니아에서 철수한 유고 인민군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양쪽에서 전쟁을 치러야 하는 부담감을 어느 정도 덜게 되었고, 여력을 크로아티아로 집중시켜 독립 방해 뿐만 아니라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괴뢰 공화국인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을 지원하는 등 무력 공세를 더욱 강화하였다. 밀로셰비치의 유고 인민군과 크라이나 민병대는 2차대전 시기의 라이플, T-34 전차(그나마도 극소수)로 무장한 크로아티아군으로서는 힘든 군대였다. 공군은 더욱 상태가 불량하여 임시로 농업복엽기 안토노프 An-2폭격기로 이용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군은 고향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무척 사기가 높았으며 PMC의 도움을 받아 전열을 정비했다.

한편 유고 인민군과 크로아티아 공화국 간의 전투가 치열해져 가던 1991년 9월 남부의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유고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모든 군사력을 크로아티아에 집중시키던 유고슬라비아는 마케도니아의 이탈을 저지하지 못해 사실상 묵인해야 했다.

유고 인민군의 공세에도 저항이 만만치 않았고, 결국 유고 정부는 이듬해인 1992년에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의 주도권 유지를 명목으로 세르비아계 민병대에 대한 지원은 지속되어 내전은 계속되었으며 뒤이은 보스니아 내전에 크로아티아 역시 참전하는데 뒤에 보듯 그렇게 순수한 목표만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실제 휴전은 1995년 8월, 공식적으로는 1995년 11월 12일의 에르두트 협정 이후 전쟁이 끝을 맺었다.

크로아티아는 수도 자그레브, 유명한 관광지 두브로브니크, 플리트비체 호수 등 전 국토가 폭격 대상이 되어 독립을 위해 큰 대가를 치렀다. 특히 플리트비체 호수에선 첫번째 내전 사망자가 여기서 나왔는데 이 충돌이 공화국 선포 전인 1991년 3월에 있었기 때문에 위의 유고 내전 발발 시기조차도 논쟁의 여지가 생기게 된다.

4년에 걸친 유고 연방과 크로아티아의 전쟁으로 양방 2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42,000여 명이 부상했으며 약 25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크로아티아군은 당시 장비도 열악했고 조직력 및 숙련도도 형편 없어서 크로아티아군이 그나마 군대다운 군대가 된 것은 1995년 이후의 일이다.

결국 이 전쟁에서 크로아티아군 사망자는 세르비아군의 두 배, 부상자는 일곱 배에 이르렀고, 그나마도 세르비아군 부상자에 포함된 크라이나 공화국군이 전체 세르비아 사상자의 3/4에 달했다.

유고 인민군은 완벽하게 붕괴되었다. 많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계 출신들이 자기 민족을 위해 투신하여 예비군으로 싸웠고, 그나마 남아 있던 이들도 신 유고 연방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에 의해 모두 배제되었다. 원래부터 인민군 내에서 압도적인 인구 비율을 자랑하던 세르비아의 입지는 거의 확고해졌으며 당연하지 이젠 그냥 세르비아군이니 크로아티아계 중 일부는 유고 정부에 의해 크라이나 공화국군에 편성되기도 했다.

또한 세르비아는 정규군을 대규모로 투입하기보다는 세르비아계 민병대나 현지 자치공화국 군대를 적극 활용했는데, 준 제노사이드 경향을 보인 이 전쟁에서 책임 회피를 하기 위해서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실제로 그 의도는 적중했다. 국제 사회는 세르비아 자체에는 직접적인 책임을 크게 묻지 않고 민병대 지원 및 학살 지시에 직접 가담한 것이 확인된 밀로셰비치와 그 일당만 잡아들이는 선에서 만족했다.

마침내 같은 해인 1992년 2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마저 독립을 선언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결국 연방에 남아 있던 세르비아는 그해 4월 몬테네그로 공화국과 함께 국명에서 사회주의를 제거한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 즉 신 유고 연방의 수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것이 유고 내전의 종전은 아니고, 무척 끔찍하고 참혹한 두 차례의 전쟁이 남아 있었다.

4. 보스니아 내전(1992년 2월 ~ 1995년 12월)

유고 연방의 일부였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발생한 전쟁이다. 세 민족과 두 나라, 미국과 나토, 러시아가 모두 참전한 국제전이기도 했다. 항목 참조.

5. 유고 내전의 또다른 불씨 - 코소보 전쟁(1998년 2월 28일 – 1999년 6월 10일)

유고 연방 내 각 공화국들이 연쇄적으로 독립한 상태에서, 유고 연방 세르비아 공화국내 코소보 자치주 역시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벌어진 전쟁이다. 항목 참조.

6. 후일담 - 끝나지 않은 전쟁

국제전으로 번진 보스니아 전쟁과 코소보 전쟁의 전쟁사적 의의가 있다면, '공군만으로 승리한 전쟁' 이라는 점일 것이다. 물론, 미국과 NATO의 압도적인 힘에도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고, 앞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외교적 압박이 동원되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지만, 정치 외교적 압박은 여느 전쟁에서도 늘 있는 문제라 공군만으로 승리했다는 표현에 크게 무리는 없다.

그리고 새로운 정밀탄약 JDAM의 등장 역시 의미가 있다.

베트남 전쟁 중반에 등장해 1990년대 초반 걸프 전쟁에서 꽃을 피운 LGB(레이저 유도탄)는 중동 전선에서 약점을 드러냈다. LGB의 유도 레이저가 악천후, 연기, 습도 등에 상당히 취약해서 날씨가 나쁘거나 연기 등이 심한 지역에서는 유도 성능이 현저하게 떨어졌던 것이다. 결국 미군은 관성 항법 장치와 위성 항법 장치(GPS)를 한데 묶은 유도장치로 탄약을 목표로 조종하는 JDAM을 개발해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했다. 최초의 실전 투입인 코소보 사태에서는 B-2 폭격기만이 이를 활용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보편화되어 JDAM이 없는 미군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새로운 기술적 진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미국과 NATO를 속인 유고군의 기만전술 및 장비은폐술의 향상도 의의가 있다. 고가의 유도장비를 허접한 구조물로 속여낸 기만-은폐술은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 더욱 발전했고, 북한도 코소보 사태 종전 후 현지에 무관을 파견해 정보를 습득했다고 한다. 참호 파놨다가 무진장 얻어맞은 걸프전과는 상황이 달라진 것.

또한 '지상군의 아웃소싱' 경향이 드러난 것도 이 전쟁이 최초였다. 미국 등 서방국들은 공군과 같은 첨단 장비 위주로 작전을 수행하고, 지상군은 가급적 쓸만한 무장세력을 앞세우는 방식으로 1999년 코소보에서는 코소보 해방군(1~2만명 참전, 1700~4000명 사망)이, 2001년 아프간전에서는 북부동맹,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는 쿠르드 민병대, 2011년 리비아 내전에서는 리비아 반군이 그 역할을 했다. 잠깐, 그런데 코소보와 리비아는 아웃소싱이 아니라 애초에 내전에 뛰어든 사람들이 주력 아닌가. 미 육군이 파병을 안한 것이지 첨단 전쟁 앞에서 지상군의 역할이 상당히 반감된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전쟁은 지상군이 목표를 점령해야 끝나기 때문에 지상군이 전혀 없이는 전쟁이 불가능한 것 역시 엄연한 현실이다.

다만 폭격 기술의 발달과는 별도로 공군의 한계 또한 명확히 드러나게 한 전쟁이기도 하다. 보스니아 내전, 코소보 전쟁 두 사례 모두 공군의 대대적인 투입하에 거둔 승리인 것은 맞지만 그 세부사항을 보면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세력이 정치적 압박을 무기로 세르비아에게 전쟁을 포기하도록 만든 것에 가까웠다. 만일 세르비아가 이 모든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무작정 전쟁을 지속하기로 결의했다면 NATO 공군이 정말 효과적으로 세르비아군을 쓸어버릴 수 있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다.

실제로 NATO에서 공습을 선전한 것과는 달리 세르비아군의 중장비와 병력은 상당수가 무사히 고국으로 되돌아갔으며, 객관적인 지표로 보았을 때 NATO에서 직접 정예 지상 병력을 투입하지 않고서 공군만으로 세르비아군을 멈추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다. 더군다나 세르비아가 동원한 것은 본격적인 정규군도 아니고 대다수가 세르비아 계열 민병대 등의 비정규군이었다는 점에서 점수가 더욱 깎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공습은 지상군과 연계했 을때 최적의 효과를 내는 것이지 공군 단독으로 공습을 시행한다면 공포효과 이상의 것을 바라기는 어렵다는 결과도 될 수 있다.

물론 NATO군이 공습을 못했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고, 공군의 어쩔 수 없는 물리적인 한계로 일어난 일이었다. 가격대비 화력이 매우 좋은 육군과는 달리 공군은 한 소티당 들어가는 돈이 화력에 비해 정말로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육군의 경우 목표지점에 자주포 한 대만 동원한다면 그 자주포를 이동시키는 데 드는 기름값만 제하고서 수십 발의 휴행탄을 모조리 쏟아부어 박살을 낼 수 있지만, 공군의 경우에는 자주포탄 두세 개 정도 화력을 지닌 폭탄을 두어 개 떨구는 데 상당한 양의 고급 항공유가 소모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복귀 후에는 부단한 고급 정비를 필요로 한다.

단독작전에서의 현대 공군의 한계를 최초로 체감해 본 것이 유고 내전이었다는 것에서 의의가 있겠다.

한편 코소보 전쟁이 끝나자 유고 연방 붕괴 과정에서 세르비아와 유고 연방에 잔류하기를 결심했던 몬테네그로는 (애초에 전쟁에서 중립을 선언할 때 드러났듯) 코소보의 독립 요구로 촉발된 코소보 전쟁의 영향으로 독립을 요구했다. 반면 세르비아는 2003년 신 유고 연방의 국명을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에서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연방"으로 바꾸고, 국방, 외교를 제외한 모든 정치적 주도권을 몬테네그로에게 양보하는 등 몬테네그로의 이탈을 저지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결국 몬테네그로는 2006년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강행했다. 당시 몬테네그로가 세르비아로부터 분리독립을 결정한 당시 세르비아-몬테네그로의 국가대표팀이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 참가하고 있었고, 이들은 사전통보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결국 2006년 월드컵은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연방의 마지막 월드컵이 되었다.

7. 결과

내전 끝에 유고슬라비아는 결성 61년 만에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등 총 6개의 국가들로 해체되었다. 그리고 2008년 2월에는 세르비아에 속해 있던 코소보마저 독립을 선언한 상태이다. 그런데 코소보의 국가승인에 대한 입장이 각 나라의 입장이 달라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일단 세르비아는 다른 국가들은 가능해도 코소보 독립만큼은 인정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8년에 걸쳐 진행된 이 전쟁은 결국 유고슬라비아를 붕괴로 이끌었다. 특히 탈냉전 과정에서 나름대로 평화적,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해체되거나 구성국들이 분리 독립된 소련이나 체코슬로바키아와 달리 유고슬라비아는 (물론 마케도니아나 몬테네그로 같이 평화적으로 분리독립한 나라도 있었지만) 폭력적인 전쟁과 인종청소와 같은 잔혹한 방식으로 찢어졌다.

유고슬라비아는 체코슬로바키아처럼 평화적으로 구성국들을 해체, 분리 독립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이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 따로따로 살던 체코슬로바키아와 달리 유고는 세르비아는 물론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지에서 세르비아인들이 다수 분포하고 있었고 세르비아 본국의 세르비아인들과는 별도로 오래전부터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등지에서 살아오면서 주민들 대다수가 토착화된 상태였다. 오죽하면 유고 연방 시기,유고 내전 시기에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크로아티아계,보스니아계 분포지에 가로막혀 세르비아 본토와 월경지처럼 분리,단절되어 있었던 세르비아계 분포지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등지에서 살던 세르비아계마저도 본국이자 모국인 세르비아를 내전 당시 세르비아 유고군대와 함께 같이 손잡아 전쟁을 치렀던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다음으로 엄청나게 증오한다. 내전 당시 전쟁을 피해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에서 세르비아로 피난 온 사람들을 세르비아 정부에서 직장이나 일자리 등을 주지 않고 2등 시민, 하층민 취급하며 홀대하고 차별했기 때문... 러시아 극우들은 유로마이단에서 동포들부터 신경쓰던데 영 답이 없다 게다가 전쟁범죄에 가담하지 않은 세르비아계를 반역자나 스파이로 몰고 보스니아계 주민들과 함께 학살까지 했으니 더더욱 증오하는게 당연지사.

이 전쟁기간 동안 내전은 수많은 인권유린과 유혈학살 등 참혹한 파괴 행위로 점철되었고, 전쟁 전 서로 친구, 이웃처럼 지내던 사람들도 전쟁이 터지자 민족, 국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무기를 맞대고 서로 죽여대는 참극이 벌어지며 긴 시간 동안 유고슬라비아 구성국들의 분열과 갈등을 촉진시켰다.

유고 연방 소속 국가들이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통해 연쇄적으로 분리독립하자 유고 연방의 주도국이던 세르비아는 유고 시절 누렸던 발칸의 맹주국 지위를 그리스에게 넘기고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실제 발칸 국가들의 군사력 서열 역시 그리스>크로아티아>불가리아>세르비아 순이다).

더욱이 유고 연방 해체 과정에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등지에 거주하고 있던 세르비아인들이 저지른 학살과 전쟁범죄로 인해 세르비아는 전쟁범죄국가, 폭력살인국가라는 국제적인 불명예를 얻기도 했다.

한편 크로아티아도 전쟁 중에 학살 및 각종 인권 유린을 저지른 바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우스타샤 정권 아래에서 대학살을 자행한 전례도 있었고, 보스니아 내전에서는 아예 크로아티아계를 활용해 침략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방금 전에 세르비아와 싸우고 독립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나마 전쟁에서 가장 정상적인 부류였던 보스니아도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한 것과는 별도로 일부 군인들이 보복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현재 국제사회가 이 세 나라의 당시 군부 책임자들을 모두 처벌하는 이유는 다 있는 셈.

미국 국무부가 2000년에 배포한 전범 지명수배 전단. 위에서부터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라도반 카라지치, 라트코 믈라디치.

1993년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전쟁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 형사 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the former Yugoslavia)가 설립되었다. 대표적인 '인종청소'의 전범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1997년 신 유고 연방의 정권을 재장악하는데 성공했으나 2000년 민중 봉기로 물러났으며 체포되어 감옥에서 재판을 받다가 2006년 옥사하였다. 하지만 2008년 이 재판소에서 45명의 세르비아인, 12명의 크로아티아인 및 4명의 보스니아인이 보스니아에서의 전범 재판으로 기소되는 등, 전쟁 범죄 처벌과 내전 가능성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들 대부분은 아마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일생을 교도소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 국제사법재판소는 사형을 선고하지 않으며,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 법정 최고형이기 때문이다.

왼쪽의 변장한 카라지치, 오른쪽의 변장하지 않은 카라지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같은 혐의로 기소된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의 지도자이자 전범인 라도반 카라쥐치(카라지치) 박사는 전쟁이 끝나자 재빨리 모습을 감춘 채 베오그라드에서 '드라간 다비치'라는 가명을 쓰며 대체의학 전문가로 평범하게 살아 갔다. 흰색 턱수염을 잔뜩 기르고 강연을 하기도 하고 잡지에 글도 기고했다. 그는 스스로를 영적 탐험가라 칭하며 자신의 웹 사이트에 심리학 및 에너지 분야 연구자라는 소개글을 올렸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지명수배 사진이 떡하니 붙어있는 마을 선술집에도 자주 드나들며 악기를 연주하며 술집 손님들을 위해 노래를 선사하기도 했지만, 결국 인터폴에 의해 2008년에 체포되었고 재판을 받고 있다.

스레브레니차를 비롯한 보스니아 내전에서 학살의 주도자였던 라트코 믈라디치 장군은 전쟁이 끝난 후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군 사령관 자리에서 사임했다. 그리고 세르비아군 기지 내에 있는 작은 주택에서 부인과 함께 살았다. 이 주택은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공격에 대비하여 지은 안전가옥이였다. 전 유고슬라비아 국제전범재판에서 대량학살, 대량학살 공모 및 인간을 상대로 한 범죄 혐의가 인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교적 개방된 공간에서 염소까지 기르며 살아 갔다. 참고로 기르던 염소들에 과거 보스니아에 주둔했던 UN 사령관의 이름을 붙여줬다(...). 그러다가 2001년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체포되어 네덜란드 헤이그 재판장에 서게 되자 자취를 감추었으나 결국 도주 16년 만인 2011년에 체포되었다.

한편 내전에서 전범 혐의로 재판을 받던 사람이 법원에서 음독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에 크로아티아군 사령관이었던 슬로보단 프랄략(72세)이 11월 29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자 갑자기 일어나더니 “난 전범이 아니다”를 외치면서 독약을 마신 후에 “지금 독약을 마셨다”, “나는 전쟁범죄자가 아니다. 이번 선고를 거부한다”'''고 개드립을 시전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재판부가 프랄략을 황급히 병원으로 이송시켰으나 결국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제적으로 보면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90년대 유일 초강대국이 된 미국이 맞닥뜨린 (걸프전에 이은) 두 번째 시험대였다.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는 이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세계의 경찰"로서의 미국의 지위를 만방에 드러냈지만, 내실이 크지 않은 성과와 여러 망신살로 반전 세력 등에게 '전쟁광'이란 비판과 국내 입지 약화도 면치 못했다. 이 전쟁은 행정부 단독(즉, 대통령 권한)으로 치러진 것이었고, 당시 공화당이 우세였던 미국 의회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의회의 동의가 필수적인 지상군(육군) 투입이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오늘날 시리아 내전에서도 드러나듯 이런 문제는 정당 성향보다는 의원 개개인의 의견에 따라 갈리는 측면이 있지만, 미 상하원의 다수 의원들은 전쟁, 그것도 행정부 독단으로 치러지는 전쟁에 우호적이지 못하다.

클린턴의 개입은 뒤에 벌어지는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전쟁에 비하면 나름의 근거(세르비아의 전쟁 범죄 등)가 있었지만, 상대방의 전쟁범죄를 근거로 이쪽에서의 참전과 살상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 초강대국이 다른 나라의 전쟁에 개입하는 것은 패권주의적 발상이 아닌가 하는 의문은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는 먼나라 이야기가 아닌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상황에 직결되는 문제다. 1994년 북핵문제만 해도 클린턴 행정부가 공군 폭격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전례가 있다. 당시 한국군의 현대화가 제대로 안 된 상태였고 북한은 반대로 전투력이 상당한 규모로 유지되고 있었기에 전쟁이 발발했다면 양측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것이고 경제적인 손실도 상당했을 것이다. 미국이 북폭을 포기한 이유 중 하나이다.

2013년 현재 시리아 사태에도 시사하는 바가 커서, 클린턴 전 대통령은 이번에도 즉각적인 개입을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촉구했다. # "(미국 내의 반대 여론은) 정말 개입하지 말 것을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 '조심하라'는 일종의 '경고등' 같은 것"이란 것이란 주장으로, 요약하면 개입할 때 국내여론 걱정으로 개입하지 못하면 나중에 여론이 반대로 흘렀을 때 대통령만 바보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 경제 상황이 워낙 막장이라 결국 불개입으로 결론났다.

8. 관련 대중매체

8.1. 영화

  • 언더그라운드 (Underground, 1995)
  • 10분 동안에 (10 Minutes, 2002)
  • 그르바비차 (Grbavica: The Land Of My Dreams, 2005)
  • 노 맨스 랜드 (No Man's Land, 2001) : 포스터에 낚이지 말자. 국내에서 개봉될 때 코미디 영화로 속였다.
  • 더블 스나이퍼 (Shot Through The Heart, 1998)
  • 해리슨의 꽃 (Harrison's Flowers, 2000)
  • 비상 전투 구역 (Guerreros, 2002)
  • 에너미 라인스 (Behind Enemy Lines, 2001)
  • 프리티 빌리지, 프리티 플레임 (Pretty Village, Pretty Flame, 1996) : 놀랍게도 세르비아에서 만든 영화다. 그것도 보스니아 내전이 한창인 스릅스카 공화국에서, 단순 Remove Kebab같은 내용이 아닌 세르비아인 시각으로 본 영화이다.
  • 웰컴 투 사라예보 (Welcome To Sarajevo , 1997)
  • 세이비어 (Savior, 1998)
  • 피와 꿀의 땅에서 (In The Land Of Blood And Honey, 2011)
  • 레니게이드 (Renegades , 2017)

8.2. 서적

  • 안녕 요정
  • 군인은 축음기를 어떻게 수리하는가
  • 네 이웃을 사랑하라
  • 발칸의 음모

8.3. 만화

8.4. 게임


  1. [1]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 선언 날짜이다.
  2. [2] 크로아티아의 충돌이 시작된 시점. 하지만, 브리유니 조약으로 크로아티아가 독립 날짜를 3개월 늦추며 휴전협정을 맺었다.
  3. [3] 슬로베니아의 충돌이 시작된 시점
  4. [4] 부코바르 전투와 함께 크로아티아 충돌이 시작된 시점.
  5. [5] 2002년 월드컵 이후 급격히 늘어난 친터키 역덕들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미화하며, 오스만 지배하에서 민족적 갈등이 불거졌다는 사실을 부정하는데, 대학 도서관에서 구할 수 있는 영문판 세르비아의 역사서 중에서 오스만 지배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역사서는 단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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