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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遊牧

1. 개요
2. 원인
3. 종류
4. 유목 대상
5. 전투력
6. 고된 유목생활
7. 현재
8. 전통
9. 유목민의 특징
9.1. 엄청난 전투력
9.2. 민족적 개념
9.3. 혈통에 대한 집착
9.4. 음식
9.5. 문자
9.6. 취수혼과 아내를 빌려주는 풍습
10. 세계의 유목민
10.1. 유라시아 대륙
10.1.1. 아시아
10.1.1.1. 중앙아시아
10.1.1.2. 동아시아
10.1.1.3. 북아시아
10.1.1.4. 서아시아
10.1.2. 유럽
10.1.2.1. 중부유럽
10.1.2.2. 동유럽
10.1.2.3. 남유럽
10.1.2.4. 북유럽
10.2. 아메리카 대륙
10.3. 아프리카 대륙
10.3.1. 북아프리카 및 서아프리카, 중앙아프리카
10.3.2. 동아프리카
10.3.3. 남아프리카
11. 가상의 유목 민족 혹은 그를 모티브로 한것들
12. 관련 문서

1. 개요

가축을 거느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먹이가 될 풀밭을 찾으며 가축을 기르는 생활 활동. 양치기카우보이와도 겹치는 부분이 크다.

2. 원인

유목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 장소에서 가축에게 풀을 뜯게 하다 보면 건조한 스텝 지대에서는 풀이 남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열대지역마냥 비 한번 내려서 풀이 우후죽순 자란다면 이럴 필요가 없겠지만, 애초에 그런 열대지역에서 목축을 할 이유가 없다. 의외로 이런 현상은 초보적인 농경민에게도 흔히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예가 화전. 숲에 불을 질러 경지를 확보하고 지력이 고갈될 때까지 농사를 짓다가 지력이 고갈되면 이동하는 생활이다. 물론 이 경우에는 최소 20년 이상 주기를 두고 휴경하기 때문에 숲의 파괴는 크지 않다.

3. 종류

학문적으로 볼 때 유목은 크게 Nomadism과 Pastoralism으로 나뉜다. 한국어로는 구분하기 힘들지만, 전자의 경우 일정한 장소없이 물과 목초가 있는 곳을 찾아 유랑하는 형태의 유목을 의미하고, 후자의 경우 정해진 거주지가 있으면서 여름과 겨울, 혹은 일정 시기마다 정해진 목축지를 오가며 이동하는 형태로 유목과 정착식 목축의 중간적인 성격이다. 교과서에서는 전자를 유목(遊牧), 후자를 이목(移牧)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요뤽(Yörük)이라 불리는 터키의 유목민들은 여름에는 산악지대에 올라가서 양과 염소를 치고, 겨울에는 하산해서 헛간 같은 곳에 양과 염소를 키우면서 여름내 만들어두었던 건초를 주는 식으로 유목을 한다.

전자의 전형적인 유목민으로 알려져있는 아라비아 사막의 베두인들의 경우 자신의 부족들이 공유하는 여름 목축지와 겨울 목축지, 봄 목축지를 순회하면서 목축을 한다. 이는 딱히 영역의 구분이 없는 몽골, 튀르크멘 유목민들과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이며, 몽골도 야크를 기르는 경우에는 유목이 아닌 이목을 한다.

여름이 되어 산악지대로 이주하는 요뤽 유목민들의 모습

4. 유목 대상

초원지대에서는 의 조합을 선호한다. 사막 지대에서는 낙타를 선호하기도 한다.

5. 전투력

이들은 말에 익숙한 만큼 농경민족보다 전투병력의 비중이 극도로 높다. 농경민족 관점에서 보자면, 기병은 육성하는 데 시간도 많이 들고 기수에게도 말에게도 돈이 막대하게 들어간다. 하지만 유목민족의 입장에서는 말이 농경민족보다는 상대적으로 값싸고 사람들 대부분은 말을 탈 줄 안다. 과거 전차나 장갑차와 같았던 기병 병종을 훨씬 쉽게 모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으로 보면 유목민족은 성인 남성 대부분이 짧은 시간 안에 기병으로 전장 투입이 가능한, 고대기갑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아무래도 말은 생물이다 보니 현대의 기갑 부대에 비하면 어처구니 없는 참패도 당하는 편이라 기병을 쉽게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기병들이 올린 전설적인 전공들을 보면 보병은 현실적으로 다 죽일 힘이 부족해 불가능한 종류의 것들도 많다. 십자군 전쟁이나 윙드 후사르 등등에서는 진짜 놀라운 교환비를 세운 적도 있다. 거기다 유목민들 같은 경우 수렵까지 병행하는 경우도 많아 각종 무기에 대해서도 농부들보다 익숙하다. 즉 기병이라는 점만으로도 무서운 것인데 숙련도도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강력한 무력을 생산하기 쉬움+생산력의 상대적 저하라는 두 가지 요소가 겹쳐서 대부분은 약탈민족 성격도 커서 공포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키루스 대왕 같은 군주들에게도 유목민들이 시비를 걸기도 했다. 때문에 제대로 된 지도자가 나타나면 무시무시할 만큼 극도로 성장하며 이것은 게르만족조차도 밀어버려서 서로마 제국의 멸망까지 나비효과를 일으킨 훈족의 성장이나 거란, 몽골 제국 등 유목민족의 중국한반도 침략으로 이어졌다. 특히 몽골 제국의 경우 칸국들까지 합치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나라를 이루었으며 헝가리까지도 몽골의 피가 섞여 있는 걸 생각하면 고대에 그들의 잠재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특히 파르티아는 소수 유목민들이 중동의 정주민족 인구 400만을 정복한 다음에 인구 5,000만의 로마를 위협적으로 압박하기도 했다.

흔히 생각하는 사막의 민족들은 대부분 유목민족이다. 파르티아아르메니아, 베르베르, 아바르족 등등.

다만 농경민족을 정복한 후 오히려 그들의 문화에 역으로 점령돼 버리는 일이 흔하다. 원래부터 인구도 적은 데다, 편하고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은 어쩔 수 없어서 농경민족의 풍족하고 편안한 생활을 접하고 급속도로 동화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민족성을 유지하겠다고 온갖 정책으로 막으려 들어봤자 수백만에 달하는 인구 전체를 통제할 수도 없고 군주제의 한계 때문에 군주가 바뀌면 정책도 바뀌거나 하여 결과적으로 패권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도리어 먹혀버리기 일쑤. 동아시아, 특히 중국한반도의 역사는 농업이 정착된 후 이들 유목민족을 막거나 먹히는 역사로 점철돼 있다. 요나라, 원나라가 모두 이들의 역사이며 이들 민족의 기마 부대는 언제나 공포로 군림해 왔다.[1]

또 유목민족은 빠른 성장만큼이나 쇠퇴도 빨라서 거란의 경우 북송금나라에 의해 멸망했고, 원나라도 그 엄청난 영토를 생각하면 너무 쉽게 무너져 버렸고 심지어 대제국을 이룬 청나라도 불과 100년 만에 자기들의 언어와 정체성을 거의 잃어버리고 중국에서 소수민족 대우를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튀르크족 역시 한때 이슬람의 주도권을 쥐었으나 결국 문화적 헤게모니는 아랍인과 페르시아인들에게 내어줬을뿐더러, 유목민들 중 거의 유일하게 기독교 문화권에 편입된 마자르족 역시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유목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은 거의 상실하게 되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다른 민족들과 별 차이가 없어지게 되었다. 북아메리카의 유목민족인 수우족 역시도 리틀 빅혼 전투 이후로는 상당수가 미국 사회에 동화되어 살았다.

6. 고된 유목생활

"용사는 화살 한 발에, 부자는 한파 한 번에 끝장난다."

- 몽골 속담

로망을 가진 사람이 많지만 절대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유목 생활은 농사짓는 것보다 훨씬 고되다는 것이다. 애초부터 유목을 하는 지역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척박한 땅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겨울이 되면 그 소중한 가축들이 얼어죽거나 굶어죽는 일이 빈발하다. 몽골에서는 이런 한파를 조드(Zud)라고 부른다. 기온만 떨어지는 블랙 조드는 그래도 피해가 크지 않지만, 눈이 목초지를 덮어버리는 화이트 조드 때는 유목민 재산 1호인 가축들이 고스란히 굶어죽거나 얼어죽고 병들어 죽어 유목민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대기근을 겪는다. 유목 생활이 얼마나 고된 것인지는 과거의 영화를 자랑한 몽골이 현대에도 나름 거대한 영토에 비해 인구가 300만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사실 영토만 클 뿐 농경민족이 이미 금싸라기 땅을 차지한 상황에서 그들은 변방의 사람이 살기 힘든 땅에서 활보한 것일 뿐이며 인구 수와 문화 면에서는 상대가 안 되었다. 물론 이는 약간 편견도 있는데, 초원길은 주요 무역 루트였고 유목 민족들의 주변에 이란이나 중국처럼 부유한 농경 제국들이 존재하여 이를 기반삼아 대상들을 털며 도적질하며 살아가던 유목민들도 있어서 생각보다 부유한 유목민들도 존재했다. 유목민들의 생산력은 낮아도 이게 자산을 털어버리는 짓거리[2]라 유목민족들의 역사를 소재로 하는 영화에서 유목민들 무장이 생각보다 중무장인 것도 고증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약한자가 살아남기 힘들 뿐이다.

농경은 바로 고구려만주에서 영토를 확장하면서도 만주보다 한반도, 특히 한강에 집중한 이유이며, 유목민족들이 중국을 차지하고도 오히려 중국의 문화에 휩쓸린 가장 큰 이유이다. 농경민족의 경우 산이나 강을 경계로 한 방어선의 확립이나 군주의 정복 욕심에 대외정벌을 한 경우가 큰 데 비해[3] 유목민족은 정말 살기 위해 농경민족을 약탈하려는 목적으로 침략한 것이기에 전투력이 그렇게 높은 것이다. 우리에게 크게 다가오는 만주가 그런 경우인데 공업과 상업이 발달해서 과거에 쓸모가 없었던 영토들도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근대가 되기 전까지 이 땅은 차지해도 이득이 적고 손해가 많은 땅일 뿐이었다.[4] 특히 기후를 많이 타는 쌀농사. 현재 만주 지역에서 좋은 쌀이 나오는 곳은 지열 덕에 그나마 쌀농사가 편한 것으로 이마저도 대부분 구한 말 이후 조선사람이 건너가서 개척한 것이다. 이 지역에서 현재 주로 생산되는 작물인 옥수수감자는 당시에는 없었다. 다만 만주를 위한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오랜 기간 농경민족에 의한 관리가 없기도 했다. 고구려도 마찬가지지만 강성해진 세력들은 대부분 더 농사에 적합한 지역으로 세력을 옮겼고 남은 세력은 미개한 취급을 당할 정도로 문명 자체가 뒤떨어졌다.[5] 그나마 후금이 한족들을 동원해서 개간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자국 영토에서 한족들에게 테러를 받을 정도로 한족들이 고분고분하지도 않고 하필 시기도 이상기후가 심하던 시절이라...

중국만리장성부터 고려동북 9성을 쌓으면서 이들을 저지하고 조선에서도 심심하면 이들을 토벌하러 가면서도 정작 만주에 대한 영토 욕심을 내지 않은 것은 이것 때문이다. 물론 생산력 문제뿐만 아니라 지정학적 문제도 있다. 만주 지방 같은 경우, 제대로 된 방어선을 설정하기 힘들뿐더러 이를 감당할 인구가 없다면 뚫리기 십상이다. 그 고구려도 요동 방어선을 제대로 설정하기 전까지 선비족과 같은 북방 유목 민족에게 생각보다 쉽게 털렸으며 요동 지방을 어설프게 지배했던 발해도 제대로 된 방어선을 설정하지 못해 요나라에게 일격으로 당했으니...

고려 말 공민왕 시절 실행되었던 제1차 요동 정벌에서도 결국 같은 이유로 요동성을 함락시키고도 내어주었다. 물론 이 경우 남쪽에서 치고 올라오는 왜구도 감당했기 때문에 전선을 확대할 수 없었던 사정도 감안해야 한다.

게다가 세종대왕 시절부터 단행된 4군 6진에 대한 사민 정책도 이주 과정에서 백성들에 대해 상당한 고통을 유발했고 다산 정약용도 이 점을 지적하여 국력에 넘치는 요동 정벌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제대로 된 국력과 역량을 지니고 있다면 오히려 이 지방을 경영하는 것도 괜찮다는 의견을 보이긴 했지만. 실제 조선 왕조에서 왕조 차원이든 민간 차원이든 이 지방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시점은 인구가 서서히 팽창하고 경신대기근과 같은 사태로 국토가 당시 인구를 감당하기 힘겨워지기 시작한 현종 무렵부터였다. 농경민족의 입장에서 이들은 문화를 파괴하는 침략자일 뿐이었다는 것. 거대한 영토에 현혹되지 말자.

물론 농경 기반 정주민들 입장에서는 그들이 같은 인간이라기보단 야만스런 들짐승과 같이 보였겠지만, 반대로 유목민족 입장에서는 정주민족들이 줄에 묶여있는 가축과 같이 생각했다고 한다.[6] 단백질은 유목생활로 충분히 얻을 수 있었으나 생존에 필요한 탄수화물을 얻기 위해서 정주민을 약탈했다는 것. 물론 당하는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뛸 노릇. 달래도 보고 때려도 봐도 도무지 통하질 않으니.중국 통일왕조? 세계최강? 훌륭한 탄수화물 공급원이죠.[7]

7. 현재

유목민의 직접적 후손을 자처하며 현대에 와서도 유목생활을 일부 유지하는 민족으로는 몽골족튀르크족, 베두인족, 베르베르족, 쿠르드족, 카자크족 등이 있고, 유목민 중심으로 현대적 국가를 형성한 나라로는 대부분이 중앙아시아인 몽골,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이 있다. 그렇다고 ~스탄이 모두 유목문화권은 아니다. 우즈베키스탄, 힌두스탄, 하야스탄만 해도 먼 옛날에나 유목 문화권이었지 지금은 정주 농경 문화권이다. 공산주의 시대에 유목생활은 탄압을 받았지만, 지금도 떠돌아다니며 유목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들에는 적지 않다. 당장 몽골만 봐도 유목이 엄연히 1차 산업의 주류이며[8], 몽골에서의 시골은 농촌이 아닌, 곧 유목 지대를 의미한다.

몽골계와 튀르크계로 대표되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현재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유목민인 베두인족과 베르베르족, 투아레그족이 아직 남아 있다. 이들은 애초에 자기들이 마음대로 다녔던 곳이 국경으로 지정되어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일단 통행증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일단락 되었지만 이것은 유목민족의 삶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할힌골 전투의 발단도 이런 갈등으로 발생한 셈. 유목민들이 마음대로 다니던 북방 영토가 소련이며 만주국이며 몽강국의 국경으로 나뉜것은 유목민의 사회에 많은 혼란과 분열을 가져왔다. 그 밖에 마사이 족도 일부 유목생활을 하고 몽골이나 터키나 유라시아나 중국,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일부 유목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남아있다. 그러나 당연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들 유목민의 수는 갈수록 줄어든다. 왜냐면 유목민들이 살고있는 해당 국가들의 정부가 정착하여 살기를 권장하고, 직업도 도시에서 구하는 데다 고된 생활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기 싫기 때문에 결국 유목을 포기하는 경우가 늘기 때문이다. 또한 낙농업자와 목축업자들이 땅을 사서 농사와 목장을 짓는 곳에 유목민을 직원으로 고용하기도 한다.

유목의 역사가 늦어서 빨라도 16세기경부터 유목 생활을 시작한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경우[9], 유목 생활이 자리를 잡아가던 시절이 하필이면 산업 혁명기와 겹치게 되면서 자신들의 땅에 철도를 놓으려던 미국인들과 격렬한 충돌을 빚었다.[10] 그래서 북아메리카 유목민들은 철도의 설치로 인해, 유목의 대상이던 들소가 열차와의 충돌로 인해 폐사하거나, 철도 공사를 명목으로 원래의 영토에서 추방당하는 등의 피해를 당하면서 이에 저항하는 운동도 많이 일으켰다. 19세기 후반의 리틀 빅혼 전투나, 아파치족들의 봉기가 대표적이다. 현재는 수우족을 포함한 몇몇 부족들에 의해서 유목생활의 흔적은 보존되었으나, 20세기를 전후해서 유목생활 자체는 전부 중단되었다.[11]

남아메리카 역시 이 처음 유입된 16세기 이후부터 이른바 가우초라고 불리는 유목민이 등장했는데, 본래 남아메리카 원주민이나 백인 무법자, 탈주한 흑인 노예 등, 남아메리카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이 뭉쳐서 이루어진 집단이었다.[12][13] 이쪽도 유목 생활을 지속하기가 어려워서 20세기경에는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처럼 유목을 거의 포기했다. 애초에 농사짓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면서, 유목 생활의 메리트가 비교적 줄어드는 요인을 무시할 수가 없다. 다만, 농경문화가 기본적으로 소작농이나 피고용인 같은 불평등을 초래하는 요소가 다소 있기에, 유목을 포기해야 하는 심적 거부감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아르헨티나가우초들은 20세기를 전후해서 대부분이 유목 생활을 포기하고 정주민이 되었는데, 이렇게 정착해서 농경민이 된 가우초의 대다수가 대지주들의 밭을 임대해서 부쳐먹는 가난한 소작농이 되거나, 대기업 소유의 농지에서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으며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가 되어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도 현재는 적잖은 수가 유목을 포기하고 정주 생활을 하고 있다. 다만, 가우초와는 달리, 많은 수가 아직도 유목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 이유인즉슨, 가우초들이 사는 아르헨티나남아메리카 최대의 농업국인데 반해, 중앙아시아 지역은 대다수가 사막화가 극심한 곳이라서 농경 생활을 오래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꽤 적지 않을 뿐이다. 사실 이곳의 유목민들의 상당수가 정주민화된 이유는, 소련 시절에 당국에서 유목 생활을 금지하거나, 유목민들을 대거 도시로 이주시키는 등의 행위를 마구 저질렀기 때문이다.

8. 전통

유목민들 대부분이 손님을 환대하는 전통이 있다. 유목민족이 사는 땅들은 대체로 인구밀도가 낮고 척박한 땅이 많기 때문에 식당이나 호텔 같은 숙박업소 따위가 적재적소에 있을 리도 없고, 내가 도와줘야 다음에 내가 어딘가를 여행할 때도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상부상조 격의 행동으로, 광활한 땅을 안전하게 여행하기 위한 상호간의 생존수단으로서의 전통이다.

역사적으로 유목민들의 삶은 대체로 각박한 데다 거칠었고[14], 이 때문에 각 부족 간의 대립과 분쟁, 약탈 역시 늘상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손님을 환대하거나 설령 환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손님을 공격하는 것을 매우 불명예스러운 일로 여기는 유목민들의 전통은 이런 상시적 대립 속에 있는 사회가 원활히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만약 손님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공격하기 시작한다면... 다수의 전력과 함께하지 않고서는 부족의 영역 밖으로 단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게 될 테고, 타 부족 간의 교류 역시 불가능하거나 극히 어려워질 것이며. 이 때문에 결국은 부족사회 자체가 붕괴되고 고사할 수밖에 없는 것. 그리고 이에 더하여 보통 폐쇄적이고 고립된 부족 중심의 사회에서 손님은 외부의 정보와 문물을 전달하는 중요한 창구였다는 점 역시 손님을 환영하는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더 자세한 분석은 접대의 관습 항목을 참조 해보자.

물론 각박한 현대사회에는 아무리 유목민족의 후예들의 나라들이라고 해도 이런 개념이 다소 약해진 것도 있지만 그래도 도시를 벗어나면 현재도 꽤 통하는 편이다. 몽골,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중동베두인이나 투아레그족 등의 유목민 천막에 아무 연고도 없는 한국인 여행자가 대뜸 찾아가도 따뜻한 차와 최대한의 성의를 담은 식사, 천막 상석의 잠자리를 공짜로 해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히려 먼저 들어와서 차나 한 잔 하고 쉬다 가라고 잡아끄는 경우도 많다.[15]

물론 히치하이킹 등이 그렇듯 강도인신매매의 위험 때문에 대놓고 강추하지는 못하지만, 이런 풍습이 있는 것을 알고 몽골 서부의 버스 타고 며칠을 가야 하는 시골에 가서 한 달 동안 이렇게 공짜로 먹고 자면서 여행한 한국인 블로거도 찾아보면 있다. 몽골어 한마디 못 해도 가능하다. 이렇게 선뜻 먹여주고 재워주고 하는 대가로 돈을 지불하는 것은 유목민족에 따라 호의를 금전적 관계로 해석하는 실례이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현지인 쪽에서 당당히 1박만큼의 대가를 원하기도 한다. 지역에 따라서도 달라서 가령 몽골 같은 경우 도시화나 현대화가 많이 된 곳일수록 돈을 받거나, 관광객을 상대하지 않는 평범한 유목민 천막에서는 돈을 줘도 안 받으려 하기도 한다.

여담으로 한국에서는 어쩐지 목축(牧畜)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차이점은 링크를 참조하자.

사진은 이란 쉬라즈에서 유목을 하는 투르크계 민족 카슈카이족이다.

보통 유목을 하는 사람들은 옷차림도 남루하고 화려한 것이랑 거리가 멀다는 편견도 많다. 하지만 실제 유목민들은 화려한 장신구와 의상을 좋아한다. 특히 베두인과 같이 정해진 영역이 있는 유목민들은 대상(隊商, caravan)에 종사하거나, 잉여생산물을 인근의 정착민 마을에 내다팔아 사치품을 교환하는 식으로 상업도 겸했기 때문에 의외로 부유하다. 당연히 유목민들도 사람인지라 부유한 생활을 싫어할 리 없고, 단순 유목만으로는 국력 신장에 한계가 있으니 많은 유목민족들은 상업을 중시했다.[16] 게다가 유목민들은 정주민에 비해 집이나 가구 등에 대한 중요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의복에 대한 사치가 더 비중이 크다.[17]

허영만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를 연재할 당시 작품에 나오던 몽골 및 유목민들 귀부인 여성들 옷차림이 화려한 것이나 갑옷을 입고 싸우는 게 오류라고 주장하는 글이 여럿 있었다. 때문에 이 책 단행본에서 허영만이 몽골 취재로 가서 직접 찍은 울란바타르 박물관에 전시 중인 당시 여성 귀부인 사진을 싣으면서 유목민이 화려한 옷차림이나 갑옷을 입지 않았다는 건 편견이라고 일침을 가했다.[18]

신부 이야기에 나온 실제 아제르바이잔 쪽 유목 여성 옷차림 그림도 실제 옷차림을 보고 그린 것이다.

9. 유목민의 특징

9.1. 엄청난 전투력

나는 다른 점에서는 스키타이족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한 가지 가장 중대한 인간사에 있어, 그들은 우리가 아는 모든 부족들을 능가한다. 그들이 해결한 중대사란 그들이 추격하는 자는 아무도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이 따라잡히고 싶지 않으면 아무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을 타고 을 쏘기에 능하고, 농경이 아니라 목축으로 살아가는데 그런 그들이 어찌 다루기 어려운 불패의 부족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헤로도토스 역사 6권 46p

유목민들은 상술했다시피 척박한 땅에서 맹수들을 상대하고 다른 유목민 부족들의 침공을 방어해야했기에 가족과 가축을 지키기 위한 승마술과 사냥술(궁술)이 생존을 위한 기본 수단이 되는 관계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구성원 대부분이 기마 병력이나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인 말타기나 사냥을 넘어 완전히 군사적 훈련 자체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던 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더구나 이 기병이라는 병과가 탄생시점부터 기관총전차가 등장하는 1900년대 이전까지 인류 최강의 전투 병과였다. 농경 민족은 이런 수준의 전사를 농사짓던 사람들 무장시킨다고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직업 군인을 양성해야 했다. 거기에 오늘날 소총수 훈련은 2주에서 4주면 끝인 데 반해, 고대에는 중장보병이나 기마병을 훈련하는 데 최소 10년이 걸렸다고 하며 중세 시대에도 궁병을 기르기 위해 걸리는 훈련 기간이 수년이 걸렸다.

반면 유목 민족에게 승마술과 사냥술은 일상생활이기에 전원이 궁기병이었다. 그로 인해 근대 시대까지만 해도 유목민들의 군사적 역량은 위협적이었다. 규합하기가 어려웠을 뿐이지, 규합만 했다 하면 정말 소수의 유목민에게 압도적으로 다수인 농경 제국이 매번 탈탈 털리기를 반복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제국들이라서 더 불리한 점들도 있었는데, 우선 영토가 너무 넓으면 농경민들은 유목민들의 기동성을 따라가기가 매우 어려워서 농락당하기 일쑤였다. 특히 교통·통신이 발달하기 전에는 싸우기도 전에 행군하다 보급이 끊기거나 토질병 등으로 죽을 수도 있었으며 유목민들은 역청야전술로 지나가는 곳마다 초토화를 시켜서 완전히 맥이 빠지는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이탈리아 반도처럼 바다를 끼고 옆에 광활한 지형이 적은 곳은 드물었고, 다른 지역의 세력이 침공할 목적으로 지도를 살피면 유럽으로 가는 길은 상당히 복잡한 편이기에 유럽은 상대적으로 나았지만 중국은... 더구나 개활지에서는 기병에게 더더욱 답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일반적으로 경제적 이유 때문에 험한 지역에 주요 도시를 건설하는 민족은 드물었기 때문에 농경 제국들은 유목민의 공격을 근본적으로 방어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경제력과 기술력 덕분에 건설한 크고 아름다운 성벽만을 본다면 인구와 병력이 엄청나 보이지만 막상 근대 이전까지는 병력 밀도가 그리 높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군사훈련 및 장비에 드는 비용, 보급 문제까지 감안한다면 동원력이 압도적인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최근과 꽤 가까운 시대이며 인구가 많았던[19] 명의 수도나 주요 도시마저 50만~100만 정도의 인구를 넘는 곳들이 거의 없었고, 총력전 이전까지 동원 가능한 병사가 인구비 1/100임을 감안하면 정주민의 군대가 유목민족보다 압도적인 물량을 과시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는 뜻이다.

위의 이유로 인해 유목민족은 정주민의 군대를 대등하게 상대하거나 각개격파할 수 있었다. 기병 자체가 무장을 불문하고 일반 보병보다 우위를 점하기 쉬운 병종인지라, 무장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당시 병법에 따라 단순 전력으로 계산하면 오히려 압도적인 전력을 투하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제국을 세운 민족들 역시 정복이니 개척이니 하고 다녔던 상대들이라 생각보다 쉬운 상대는 아니었으며, 유목민족이 제아무리 기병 중심, 인구비례 병사 비율이 높았다고 해도 워낙 무장이 빈약했기에 정주민의 영토를 정복하지 못할 경우 결국 패배를 맛보게 된 경우도 많았다. 특히 대통합이 이루어지기 이전에는 중장기병같은 근접전에 특화된 병과 운용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20], 의외로 작정하고 나서는 정주민 군대에게 패배한 기록이 꽤 많다. 흉노, 오환, 돌궐 같은 유목 제국을 건국한 유목민족들도 결국 중국의 통일왕조에게 패배하여 무너진 것들이 그 대표적인 예. 기본적으로 유목민들은 숫자가 많지 않았고, 전쟁에서 대패할 경우 그대로 부족 전체가 몰락하기 일쑤였다. 파르티안 샷이나 스웜 전술은 정주민 군대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정주민 군대가 만만치 않은 기병전력을 갖추거나, 혹은 공성전같이 기동력 발휘가 어려운 전장에서 싸울 경우 유목민들의 기마부대도 생각보다 허무하게 무너졌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목민족들은 대제국[21]을 건설했다. 동아시아에서는 흉노가 그 시작이었는데, 그 이후에도 5호 16국 시대, , , 몽골, 과 같은 유목 제국들이 나타났다. 이들의 공통점은 중국의 혼란기와 자신들의 팽창기가 겹쳤으며, 이 시기 정주민의 땅을 비교적 빠르게 점령하여 풍부한 물자를 확보하면서 경기병뿐만 아니라 중장기병들까지 갖추게 되었다는 점이다. 페르시아나 중동지역에서 유목민이 정주민을 정복한 것 역시 유사한 상황. 따라서 대개 어떤 지역의 제국을 깨뜨린 유목민들은 거의 세계 최강으로 봐도 될 정도였고 실제로 주변의 다른 지역들도 박살을 내고 다닌 경우가 태반이었다.

심지어 근대 이후에도 기병들은 강했다. 대표적으로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는 베두인 기병으로 오스만 제국의 근대적 요새들을 점령하기도 했다.오스만 군이라 우습게 보일 수도 있었지만 영국군도 의외로 고전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걸 부족 기병들로 해낸 것이다. 물론 이 양반은 영화 등에서 과장된 면이 있긴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도 아랍 부족들이 말 타고 설치며 영국군이 오기도 전에 오스만 군을 다마스쿠스에서 몰아내는 활약을 했다. 이븐 사우드가 고작 40명의 병력으로 독립 운동을 하다 광대한 영토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도 기병빨이 좀 있다.아마 한반도에서 독립 운동을 했다면 끔살 당했을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토를 살피면 일단 머리가 좀 돌아가는 사람이 말 타고 돌아다니며 설친다고 가정할 때 잡는 난이도가 장난이 아니다.[22] 사실 의외로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창기병 같은 고전적 기병들도 활약했다. 기병 문서 참고.

유목민족들의 전투력의 비결과 원리, 그리고 한계 등에 대해서는 스웜 전술 문서를 참고하자.

9.2. 민족적 개념

인구 밀도가 지독하게 낮기 때문에 혼인 상대를 찾는 것도 어렵다. 따라서 부족 단위로 인종적 특징과 결속이 나타난다. 이것은 당연히 각 유목민의 활동 영역에 한정된다. 그런 이유로 유목 국가가 출현하더라도 이들은 서로 결속이 매우 약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와 몽골의 역사와 국가 체제만 살펴봐도 이런 흔적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이런 유목 국가의 흥망이나 부족 간의 항쟁, 기후변화 등에 따라 유목민의 공동체는 해체와 재결성이 반복된 탓에 고대 시절 갑툭튀해서 세계사를 뒤집어 놓은 유목민족들의 후예가 누구이고 뿌리가 누구인가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실 구대륙의 구석에서 살며 서로 피가 좀 많이 섞일 조건이 되었던 민족들이 아니면 농경 민족들도 이런 문제들이 좀 있다.

9.3. 혈통에 대한 집착

위의 민족적 개념과 다소 모순되어 보이지만, 오히려 혈통 자체에 대한 집착은 농경민보다 더욱 강하다. 부족 단위로 결속을 나타내고, 법률이나 규칙을 따로 글을 통해 남기는 경우가 적다 보니, 그 부족 내에서 정통성과 권위를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방법은 혈통 자체였기 때문이다.

9.4. 음식

혹독한 환경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보르챠육포(肉包) 같은 보존 식품이 발전하였다. 고기를 말등과 안장사이에 끼워두면 압축효과와 마찰열로 쉽게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다. 또 안에서 불을 피우는 천막이라는 주거형태와 최대한 알뜰하게 동물을 활용해야 했던 관계로 내장, 선지나 스튜 형태의 음식 문화가 발달했다. 이런 음식 문화는 동유럽부터 한반도까지 남아있다. 한반도가 유독 요리가 발달 한 것이 유목민과 접점이 많았던 탓일지, 원래 한반도의 문화였는지, 몽골지배 시절 유행하게 된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확실한 것은 농경 문화에서 나타나는 흔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천막에서 항상 불을 피우는 주거 형태는 증류주 제조에도 유리했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소주도 원형은 몽골 지배 시절에 들어온 것이다.

9.5. 문자

부족 규모의 공동체 특성 때문에 유목민은 자연스럽게 문자의 발명과 기록의 역사를 남기지 못한 편이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유목민들이 사료를 남기지 않은 관계로 세계사를 다룰 때 그들이 유라시아 대륙에 끼친 영향에 비해 비중있게 다뤄지지 못한다고 이야기 한다. 오늘날 다뤄지는 유목민의 기록들은 대부분 중국과 이슬람 같은 피정복자에 의한 사료뿐이다. 그렇지만 이도 유목민 나름이라서 원조비사 같은 기록을 남긴 몽골[23]이나 거란, 여진, 돌궐, 만주, 티베트처럼 국가체제가 갖춰진 이후에 문자를 만든 유목민들은 많았고, 헝가리나 베두인처럼 진작에 문자를 가지고 있었던 유목민도 있었다.[24]

9.6. 취수혼과 아내를 빌려주는 풍습

지역에 따라 예외도 있지만 대부분의 유목민은 혼인 시 여자가 남자의 집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 신랑 측 집안에서 대가로 많은 선물을 하는 것이 관례이다. 신부는 이렇게 몸값이 나가는 관계로 한번 취한 신부는 남편이 죽게 되면 그 형제들이 형수를 취하는 취수혼(娶嫂婚)의 전통이 많다. 취수혼은 결혼으로 맺어진 부족 간의 동맹 관계를 깨지 않기 위한 목적, 과부가 된 여성의 생존과 인권, 또 유목인 공동체의 와해를 막는 등의 다양한 장점이 있었다. 한정된 목초지를 두고 경쟁하기 때문에[25] 이웃한 부족 간 관계는 대체로 험악했고 이를 혼인으로 푸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취수혼의 전통은 유목민뿐 아니라 알래스카인들에게도 발견된다. 농경 문명에선 보통 여자는 노동생산력이 없으면서 식량소모가 늘어나기 때문에 여자 쪽에서 혼수를 하는 풍습이 많지만 유목민에겐 여성도 식량생산을 담당하는 데다 인구생산이 더 절박한 문제인 관계로 반대의 풍습이 나오는 것이다. 때문에 장남이 신부를 데려오면 이후 형제들은 집안 형편에 따라 결혼을 못 하거나 좀 하자가 있는 여성을 싸게 데려오든가 형이 죽기를 바라야 하는 상황이 나오고 만다. 다만 이러한 풍습이 이누이트에게도 있다고 왜곡되는 경우가 있는데 유목민이라고 죄다 이런 게 아님을 알아두자. 이누이트 인들은 보수적이라 취수혼 같은 건 없었다는 건 아니라 극히 일부 지역, 남자가 적어서 자칫하면 그 부족이 아예 절멸할 상황같이 어쩔 수 없이 이런 경우가 있긴 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극히 일부이고, 이런 경우는 전 세계적으로 찾아보면 많다. 포르투갈이라든지 파라과이 같은 나라도 전쟁이나 여러 이유로 남자 인구가 너무 줄어서 이런 상황이 되면 노예같이 사람 취급도 안 하던 이들을 자유롭게 풀어줘 여자들과 맺어지게 했다[26].

또한 드물게 가임기의 딸이나 아내가 이방인 여행자에게 밤일을 제공하는 풍습이 있다. 이는 낮은 인구 밀도에서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려는 생존 본능에 의한 것이다[27].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이런 풍습이 더욱 많이 발견 된다. 우리와 같은 정착민의 개념으로 보기엔 매우 미개하고 문란한 성문화 같지만, 이는 지독하게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에서 부족의 생존을 위해 발전시킨 풍습이다. 영화 "마지막 한 걸음까지 (2001)"(So weit die Füße tragen)에서도 주인공이 이런 풍습을 체험하는 묘사가 나온다. 허나 이는 터무니없는 낭설이라는 말도 있으며, 부족이 절멸하기 직전처럼 긴박한 때에만 등장하지, 사실 몽골티베트 불교의 영향때문에 남녀 구별이 엄격한 국가다. '몽골 바람에서 길을 찾다'란 책의 저자인 한국 출신으로 몽골의 교수 한성호는 오히려 이런 소문을 비웃으며 세상에 아내를 빌려주는 멍청이가 어디 있냐 라고 반문했다. 애초부터 이는 마르코 폴로가 전한 말인데, 마르코 폴로는 동방에 다녀왔는지도 의문이니 믿을 수 없다.

10. 세계의 유목민

등의 가축을 타고 이동하면서 목축업을 주로 하는 유랑민만 언급하도록 한다. 이목(pastoralism) 생활을 하는 이들도 포함한다.

10.1. 유라시아 대륙

10.1.1. 아시아

10.1.1.1. 중앙아시아
10.1.1.2. 동아시아
10.1.1.3. 북아시아
10.1.1.4. 서아시아

10.1.2. 유럽

10.1.2.1. 중부유럽
  • 켈트(코카소이드 유목민, 기원전 1200년 ~ 기원전 700년): 할슈타트 문화를 기원으로 갖고[42] 이후 전 유럽으로 퍼지나, 모두 로마 제국에게 복속되고 문화가 융합되었다. 이 중에서 서유럽으로 이주한 켈트족은 유목생활을 중단하고 농경민이 되었다[43].
10.1.2.2. 동유럽
10.1.2.3. 남유럽
10.1.2.4. 북유럽

10.2. 아메리카 대륙

10.3. 아프리카 대륙

10.3.1. 북아프리카 및 서아프리카, 중앙아프리카

10.3.2. 동아프리카

  • 마사이족: 동아프리카. 특이하게도 등의 짐승을 타고다니는 생활을 하지않고, 도보로 이동하면서 유목 생활을 한다. 그래서 관점에 따라선 유목민이 아니라, 단순한 목축민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 바까라족: 북아프리카 및 동아프리카. 대부분의 아프리카 유목민들이 낙타를 이용해서 유목 생활을 하는 것과는 달리, 이들은 을 이용한 유목 생활을 한다. 주로 말과 을 길러서 먹고 살며, 과거에는 코끼리기린 사냥을 하기도 했다[53]. 보통의 경우는 유목 생활을 하다가, 비교적 비옥한 곳에 기장이나 수수의 씨앗을 뿌려놓았다가 이곳을 다시 지나갈 때 수확해서, 유목 생활로 얻은 가축의 고기나 젖과 함께 먹는 방식을 택했다.
  • 베쟈족: 위의 베르베르족과 함께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유목민으로, 기원전 2천 년경부터 관련 기록이 등장했다. 계절에 따라 일정 지역 내에서만 유목 생활을 하는 이목을 주로 했으며, 이 때, 겨울[54] 거주지인 지역에 수수를 뿌려놓았다가 겨울이 오면 이를 수확해서 먹는 식으로 반농반목 생활을 했다.

10.3.3. 남아프리카

11. 가상의 유목 민족 혹은 그를 모티브로 한것들

12. 관련 문서


  1. [1] 금나라를 건국한 여진족과 여진족의 후예이면서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은 농경과 목축, 그리고 물고기 잡이를 겸업하였고 심지어 여진족은 해적질로도 악명을 떨쳤다.이들의 거주지가 초원이 아닌 삼림지대였기에 순수한 의미로서의 유목민족과는 꽤나 다르다. 이러한 민족들을 어렵(漁獵)민족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2. [2] 까고 주요 마피아나 마약상 등을 조사하면 그들 자신의 생산력은 낮아도 남의 자산을 강탈하여 부유한 경우가 분명 존재한다. 영국 등 역시 해적질로 스페인 등의 자산을 털어 본래 가진 생산력보다 훨씬 부유한 정부를 만들었던 역사가 있다.
  3. [3] 대표적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아소카 대왕의 사례가 있다. 동아시아의 경우 전자에 해당하는 대표적 사례로는 조선 초기의 여진족 정벌이 있으며, 그로 인해 압록강두만강이 국경선 역할을 하게 된 바 있다. 후자에 해당하는 대표적 사례로는 일본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이 있다.
  4. [4] 중국의 동북3성이 왜 20세기 들어서야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는지를 생각해보자. 그런데 사실 지금까지도 중국 정부가 북방에 많은 지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방의 항구도시들에 밀려오고 있다. 사실 남부지방이 중국 경제를 지탱할 정도로 이 지방은 중국 경제권에서 매우 멀다.
  5. [5] 비하의 의미가 아닌 정말로 다른 세력들보다 문명 자체의 수준이 낮았다.
  6. [6] 칭기즈 칸한족에 동화되어 도시 안에서 주로 살던 금나라여진족들을 보고 갑갑하게도 한 곳에 갇혀산다고 말했다는 얘기도 있다. 도시 자체가 정주생활의 정점에 이른 체제인 데다, 옛날 도시들은 방어를 위해 주변에 성벽까지 둘러쳤으니 유목민들 입장에서는 도시민들이 닭장 안의 닭처럼 답답하게 산다고 했을 법도 하다. 칭기즈 칸의 입장에서 오늘날 도시에 사는 몽골인들(대표적으로 울란바토르 시민들)은 성벽도 없이 개방된 곳에서 정주민족마냥 갑갑하게 갇혀사는 셈이다.
  7. [7] 그러다 보니 청나라가 준가르를 토벌할 때 섬멸전과 초토화라는 초강경책으로 나간 것도 이것 때문이다. 실제로 섬멸전과 초토화로 나가서야 청나라가 준가르를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었다.
  8. [8] 정확히는 독립국가인 외몽골 한정. 중국의 내몽골 자치구와 러시아의 부랴티야 공화국은 현재 유목이 아닌 방목을 한다.
  9. [9] 아메리카이 없었던 까닭이 크다. 북아메리카에서의 유목의 역사는 이들의 영토를 침공했던 유럽인들이 데려온 말을 훔치거나, 축사에서 탈출해서 야생화된 말을 다시 길들이면서 시작됐다.
  10. [10] 서부극 장르 자체가 원래 이 시기를 소재로 하는 장르이다.
  11. [11] 참고로 수우족은 본래 말을 들여오기 전까지는 농경생활을 주로 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원래의 삶으로 돌아온 셈이다.
  12. [12] 동유럽슬라브계 유목민인 코사크족도 가우쵸와 비슷하게 러시아우크라이나의 가난한 소작농들이나, 범죄자들이 모여서 공동으로 말 등의 가축을 키우고 마을을 이루며 살아갔던데서 비롯된 민족이었다.
  13. [13]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장편 애니인 라틴 아메리카의 밤3인의 기사에서 가우초의 생활상이 간략하게 소개되었다.
  14. [14] 물론 농경민족들도 살기 어려운 것은 다를 게 없었지만. 보릿고개가 대표적인 예다.
  15. [15] 심지어 일부 유라시아 유목민들은 자기 부인과의 잠자리(!)까지 제공해주기도 했다. 다만 이 경우에는 그 부부가 요구하는 물건을 주어야 하므로, 사실상 매춘과 비슷했다. 물론 진짜 매춘처럼 다크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르코 폴로동방견문록에서도 언급되는 풍습이다.
  16. [16] 칭기즈 칸몽골을 통일한 후에 눈을 돌린 부분이 타국과의 무역이었다. 이미 몽골 통일에 많은 국력을 소비했다고 생각한데다, 언제까지고 주변국의 어그로를 거하게 끌면서까지 약탈로만 일관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호라즘 제국으로 대규모 상단을 보내어 무역길을 트려고 했다. 다만, 일이 꼬여서 상단이 약탈당하는 굴욕을 겪자, 순식간에 교역로가 침략로로 바뀌었을 뿐이다(...).
  17. [17] 한족 왕조였지만 선비족 등 유목민족의 영향을 진하게 받았던 당나라한푸, 청나라 만주 귀족 여성들의 복장이 매우 화려했던 것도 그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인 한족 왕조들의 경우 유교의 영향으로 옷을 입는 데 있어 검소함을 추구하기도 했지만 일단 전형적인 정주민족 왕조이다 보니 집이나 가구 등에 대한 중요도가 매우 커지면서 상대적으로 의복에 대한 사치의 비중이 줄어든 면도 있다.
  18. [18] 중장기사로 유명한 동유럽의 헝가리까지 모히 전투에서 이긴 몽골 군대만 해도 갑옷을 잘 갖춰입었으며, 당대 몽골군의 갑옷은 만주족의 청나라와 고려를 계승한 조선의 갑옷들과 서로 굉장히 비슷하다. 두정갑 참조.
  19. [19] 호적에 등록된 인구는 6천만이었지만 실제 인구는 2배가 넘는 1억 5천만이었다.
  20. [20] 왜냐면 중장기병은 돈이 많이 드는데 유목민은 중장기병을 대규모로 운용할 수 있는 경제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당장에 유목민 군대에서 경기병이 주력인 거만 봐도 답이 나온다.
  21. [21] 문명의 요람에서 세계 4대 문명으로 알려진 곳들은 물론 아랍, 이란이나 그리스(오스만 1세오스만 제국 참조)까지 유목민들에 의해 넘어갔다. 오스만 제국은 유럽 덕분에 문명화가 빠르기는 했지만 처음 출발은 청과 비슷했다.
  22. [22] 청나라 역시 몽골 고원에서 준가르를 상대할 때 이와 비슷했다.
  23. [23] 다만 현대 몽골에서는 몽골문자는 실생활에서 별로 쓰이지 않는데 1930년대 초중반 모 독재자의 문자개혁으로 키릴문자로 갈아치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몽골문자는 중국령인 내몽골에서 훨씬 더 쓰인다.
  24. [24] 그러나 헝가리돌궐의 일파에서 분리된 이웃한 민족들인 불가르족, 하자르족, 페체네그족 등이 쓰던 돌궐 문자에서 파생된 로바쉬 문자를 사용했고, 베두인들은 정착민들인 아랍인의 일파였던지라, 아랍 문자를 그냥 받아들였다. 즉, 유목민들이 스스로 문자를 만들어 쓰는 경우는 있어봤자 베르베르인 정도밖에 별로 없었다.
  25. [25] 지금은 이런 경우 법으로 해결하지만,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아프리카 등에서는 아직도 부족들 간의 전쟁이 일어난다. 칼과 창 대신 총을 들고.
  26. [26] 파라과이삼국동맹전쟁에서 패하면서 남자들의 수가 크게 줄어서 일부다처제를 정부에서 용인해줄 정도였고, 포르투갈대항해시대를 맞아서 남자들이 먼 바다로 나가서 탐험이나 무역에 종사하여 여자들이 결혼할 상대가 부족해진데다, 이들이 더러 항해 도중에 사고나 해적의 습격으로 인해 죽어버리는 경우도 다반사여서, 상류층이라도 백인 아니면 어떠냐, 남자 구실만 하면 그만이지하는 식으로 타 인종과의 결혼에 적극적이었다. 그 결과로 파라과이는 자기들이 정복했던 과라니족을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언어를 공용어로 채택할 만큼, 인종 문제에 있어서 남아메리카의 그 어느 나라보다도 개방적인 나라가 되었으며, 포르투갈 역시 인도계 사람수상으로 등극했을 만큼,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인종차별 문제에서 꽤 자유로운 편이다.
  27. [27] 꼭 유목민에게만 발견되는 문화는 아니고, 농경민이나 수렵채집민들에게도 이런 문화는 종종 발견된다. 이것도 역시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시도인데,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친구이자 트로이젠이라는 폴리스의 왕이었던 피테우스를 찾아간 아이게우스에게 피테우스가 몰래 그가 묵는 방에 자기 딸 아이트라를 들여보내어서 외손자인 테세우스를 얻었다는 이야기나, 훈자족같은 히말라야 산맥 원주민들이나 일본의 일부 시골 마을의 잠자리에 대한 풍습, 그리고 마르코 폴로원나라를 탐방하는 중에 한족 가정집을 방문하고 고급 비단 몇 필을 댓가로 그 집의 부인과 잠자리를 한 것을 기록으로 남긴 것 등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물론, 인구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때는 이웃한 다른 마을이나 부족, 다른 가문의 사람과 혼인을 하지, 구태여 외지인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몽골만 해도 오늘날은 딱히 인구 감소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지라, 애저녁에 이런 문화가 사라졌다.
  28. [28] 아래에서 언급되는 베쟈족이나, 베두인, 베르베르, 투아레그족이 키메르인들보다도 역사는 더 오래되었지만, 키메르인이 등장했을 시기에 이들이 유목민이었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래서 유목민임이 분명하다고 밝혀진 민족들 중에서 최초의 유목민은 이들이다.
  29. [29] 토하리족상나라 시대의 한족과 접촉한 적도 있었는데, 그 흔적이 바로 한자 蜜이다. 한자 ' 밀' 자는 고대 토하리어인 ḿətə에서 왔는데, 이게 벌꿀술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mead와 어원이 같다.
  30. [30] 다만, 대부분의 몽골인은 유목민이지만, 몇몇 몽골계 민족들은 유목민이 아니다. 중국에 거주하는 몽골계 무슬림 종족인 둥샹족보안족, 그리고 선비족의 먼 후손인 토족은 몽골계 민족들 중 단 셋 뿐인 농경민이며, 사준사구의 일원인 제베수부타이의 출신 민족인 우량카이족은 수렵채집민이다.
  31. [31] 명나라 황제인 정통제오이라트 원정 중에 오이라트군에 체포된 사건으로, 중국의 황제가 외국 군대의 포로가 된 유일무이한 사례다.
  32. [32] 참고로 인류 역사상 최후의 유목제국이다.
  33. [33] 물론 인구의 대부분은 유목 생활을 했지만,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더운 사막 지대고 오아시스 주변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으므로, 준가르인의 일부가 농경 생활을 시도했다.
  34. [34] 러시아 연방을 구성하는 자치 공화국 중의 하나다.
  35. [35] 참고로 독립국인 외몽골에 거주하는 몽골인할하족이라고 한다.
  36. [36] 유명한 격투기 선수인 아오르꺼러가 바로 차하르족 출신이다.
  37. [37] 나머지 하나는 오환족이다. 참고로 동호는 유목민이 아니라 수렵채집민이었다. 이들의 후신인 오환족과 선비족은 동호를 정복했던 흉노의 영향으로 유목민이 되었다.
  38. [38] 참고로 선비족몽골계로 추정되는데, 몽골어족튀르크어족이 공통 조상을 갖는 자매 언어군이라고 추정하는 언어학자들은 선비족이 쓰던 언어인 선비어를 두 언어군의 조상으로 추정되는 가설 상의 어족준몽골어족(Para-Mongolic languages)의 일원으로 본다.
  39. [39] 삼국지의 주역들 중 하나인 그 조조다.
  40. [40]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사건을 별거 아닌 것처럼 간략하게만 다루는데, 실제로는 오호십육국시대의 도래를 1세기 뒤로 미뤘다고 할 만큼, 중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다.
  41. [41] 정확히 말하면 투란 지방에서 유목생활을 하면서 살던 아리아인이 대대적인 이주로 이란 고원에 정착하면서 정주민족화 되었다. 아케메네스 제국의 유물과 유적에 유목 문화의 흔적이 남아있는 등 본래 유목민이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들 중 일부는 쿠르드족, 발루치족과 같이 유목생활을 이어가기도 했다.
  42. [42] 위의 키메르인들이 중부유럽서유럽 일대로 쫓겨가서 형성된 문화다.
  43. [43] 유목민에서 농경민이 된 이들로선 가장 농경 생활에 적응한 이들이 오늘날의 프랑스 지역에 거주했던 갈리아인이었다. 이들을 정복한 로마 제국이 거꾸로 농사를 배워갈 수준이라서, 라틴어의 채소 관련 어휘의 60%가 갈리아어에서 차용된 것이다.
  44. [44] 불가르족들 중에서 원 거주지이던 볼가 강 인근에 잔류한 이들은 뒷날 볼가 불가르로 불리게 되었고, 이들은 러시아의 구성국들 중의 하나인 추바시 공화국을 세우는 추바시인의 기원이 되었다.
  45. [45] 카자흐족은 튀르크계이고, 코사크족은 슬라브계 유목민이다. 그러나 둘 다 어원이 튀르크계 제어의 어휘인 kazak로 같다.
  46. [46] 일정 영역 내에서만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방식의 유목 생활을 말한다.
  47. [47] 루돌프 사슴코에서도 나오는 산타클로스의 썰매가 이들의 순록 썰매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48. [48] 다만 마자르족헝가리 건국 후에 유목생활을 중단하고 농경민이 되었다.
  49. [49] 그러나 수우족과는 달리, 코만치족은 유목 생활을 하기 이전부터 수시로 약탈을 자행하는 호전적인 민족으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이들 민족의 이름부터가 먼 친척뻘되는 민족인 우트족이 이들에게 당한 울분에 "저들은 적이다!"라고 외친 데서 유래했을 정도다. 심지어 이들은 본격적으로 유목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미국이나 멕시코의 백인 마을을 습격해서 사람들을 학살하고 유용한 물건들을 마구 약탈하는 통에 미국이나 멕시코와 전쟁까지 벌이는 북아메리카의 깡패로 군림하기도 했다. 서부극에서 원주민들이 악랄한 약탈자로 묘사되는 게 마냥 백인 우월주의적인 편견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이, 실제로도 호전적이었던 코만치족의 이미지가 어느 정도 반영됐기 때문이다. 당장 우리가 '인디언'이라고 하면 깃털 장식을 한 존재로 묘사되는데, 그게 이들에게서 유래한 이미지다.
  50. [50]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목민들은 빠른 이동을 위해 텐트 형식의 가옥을 선호했다. 쇼쇼니족의 티피 이외에는 몽골이나 튀르크계 유목민들의 게르가 대표적이다.
  51. [51] 미국카우보이가우초와 같은 독자적인 인족 집단으로 간주되지만 않았을 뿐, 주로 을 이용한 유목 생활을 했다. 이들도 혈통 상으로는 잡탕 수준으로 마구 뒤섞여있어서, 대부분은 백인 이주민이나, 멕시코 출신의 히스패닉 부랑자들로 구성되어있었지만, 극소수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끼어있던 데다, 심지어는 흑인 카우보이도 있었다.
  52. [52] 다만, 형질인류학적으로는 흑인(니그로이드)에 더 가까운 민족이다. 정확히는 현지의 반투계 흑인들이 아프리카아시아어족 계통의 민족들이 북아프리카에 확산되면서 동화되어 형성된 경우다.
  53. [53] 현대에는 코끼리기린이 멸종위기에 몰린 탓에 더이상 사냥하지 않는다.
  54. [54] 겨울이라고는 하는데, 엄청나게 무더운 사막 지대인 북아프리카동아프리카 지역의 특성 상 여름에 비해 상대적으로 서늘해지고 추워지는 기간이지, 한국이나 러시아의 겨울에 비하면 엄청나게 뜨거운 날씨다. 단지 밤이나 한파가 닥치는 날에만 서리가 내리는 수준이다.
  55. [55] 동시에 인류 역사상 유일의 게르만계 유목민이다. 고대 게르만족도 양이나 염소 같이 전형적인 유목민의 가축을 키우긴 했지만 그렇다고 유목민이 되지는 않았다. 스위스알프스 산맥이 있는 곳의 게르만계(독일계) 목동들도 유목민과는 거리가 멀다.
  56. [56] 대신 이 끄는 마차를 이용했다는 점만 빼면, 미국카우보이도 이런 식으로 유목 생활을 했다. 다만, 둘은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보어인반투계 및 코이산흑인이 절대다수를 이루는 곳에서 소수민족으로 있던 만큼 엄연히 독자적인 민족 집단으로 분류되는 데 반해, 카우보이는 자기들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으므로 독자 민족으로는 간주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는 보어인은 미국카우보이보다는 남아메리카가우초와 더 유사하다.
  57. [57] 짐바브웨보어인들은 짐바브웨 역사상 최초의 흑인 국가원수인 로버트 무가베의 집권 이후로 전재산을 몰수당하면서, 살 길을 찾아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나미비아 등으로 대거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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