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오

兪鎭午

1906년 5월 13일 - 1987년 8월 30일

1. 소개
2. 일생
3. 관련항목

1. 소개

한국의 소설가, 법학자, 정치인, 친일파.

대한민국 헌법의 아버지로도 알려져있다.

2. 일생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제국대학 예과 1회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재학중일 때 이효석 작가를 만났다. 이효석은 소설을 유진오는 시를 서로 보여주고 평가하면서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이효석이 글을 써서 받은 고료로 자주 술을 먹었다고 한다. 이효석 작가가 임종하기 전 그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 중 하나일 정도로 깊은 관계를 가졌던 이효석 작가의 친우였다.

경성제국대학 시절에는 사회주의 서클 '경제연구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그때 유진오와 함께 활동한 사람으로는 최용달을 들 수 있다.

경성제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이후에는 경성제대에서 강사를 했다. 1931년부터는 이강국 등과 함께 '조선사회사정연구회' 활동도 하였다. 1933년부터는 동아일보 객원기자를 지냈다.

1937년에는 보성전문학교에 법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러나 그 뒤로도 작품 활동을 병행, '김강사와 T교수', '여직공' 등의 작품을 썼다. 거기서 일제에 야합하는 지식인들을 비판하고, 노동운동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중일전쟁 이 후 일본의 좌파 탄압이 심해지자 사회주의자의 비참한 말년을 그린 '행보'라는 단편소설을 마지막으로 친일반공노선을 택했다. 친일단체에도 가입했고, 언론에 친일 칼럼을 싣는 등 친일행동을 하였다. 이 때문에 해방 이후 사회주의 문인들의 모임에 참석했다가 이태준에 의해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 이 행적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이름이 올라가기도 했다.

대한민국 광복 후에는 우익 진영에 가담해 대한민국 헌법의 초안을 기초하였다. 하지만 광복 후에도 과거의 좌익 행적으로 인하여 의심을 많이 받았다. 그 예로 제헌헌법 초안에 '인민'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이승만의 측근인 윤치영이 "그건 공산당이 쓰는 단어잖아"라고 태클걸었던 걸 보면.[1]

유진오가 만든 제헌헌법 초안은 의원내각제를 기초로 하여 양원제를 채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승만과 미군정의 강력한 주장으로 대통령제를 채택하게 되었다. 오늘날까지 우리 헌법이 대통령제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의원내각제적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헌법과 관련하여 유진오 박사는 헌법 전문(前文)에 대한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지금 헌법을 제정하여 민주 독립 국가를 수립하고자 하는데 이는 단순한 연합각국의 승리와 후원의 선물이 아니고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나라 국민이 3・1정신과 같은 위대한 정신을 가지고 종시 일본제국주의와 투쟁한 결과이며 금반 헌법을 제정하여 수립하고자 하는 정부도 기미년에 삼천만의 민의에 의하야 수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하여 재건하는 것이라는 것을 웅장하게 선언한 것이다."[2]

이후 보성전문학교의 후신 고려대학교로 복귀해 법대 학장을 거쳐 15년 간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총장 재임 당시 매우 유능한 교육행정가였으며, 학교의 기강을 다잡아서 고려대학교의 강의와 교육이 옛날 일본의 제국대학 수준으로 충실하게 이루어지도록 기틀을 마련하였다. 강의능력도 뛰어나서, 그의 헌법강의는 대한민국 최고로 불릴 정도였다.

고대 총장직을 그만 둔 후, 1967년 민중당에 대통령 후보로 영입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그러나 신한당 윤보선 후보와의 대통령후보 단일화로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했다.

이 후에는 통합야당 신민당의 총재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3선 개헌안이 날치기로 통과된 것에 충격을 받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이후 당권을 유진산에게 넘겨준 뒤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이때만해도 박정희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 투사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과거의 친일 전력에도 불구하고 국민들과 대학생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의원직 사퇴 이후 자택에서 요양하다가 제5공화국 시절 29만원의 국정자문위원 제의에 응해 활동하여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1987년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고려대학교가 전직 총장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성대하게 치러주었는데, 당시 NL 계열이 장악하고 있던 총학생회는 "민족 고대가 변절자의 장례식을 치러주는 것은 수치"라고 주장하며 장례식장에서 농성을 벌였다. [3]

참고로 그의 사위는 외무부(現 외교부) 장관을 지낸 박동진이다. 그리고 외손자는 한홍구인데, 그는 진보적 역사학자이다. 또한 조카 유기준은 제일화학 대표이사 겸 제13대 국회의원이었다.

3. 관련항목


  1. [1] 참고로 일제강점기 시절 좌우 가리지 않고 사용하던 '인민'이란 단어가 이 사건 이후로 대한민국에선 완전히 금지어가 돼버렸다.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인민을 의미하므로, 국가우월의 냄새를 풍기어, 국가라 할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사람을 표현하기에는 반드시 적절하지 못하다. 결국 우리는 좋은 단어 하나를 공산주의자에게 빼앗긴 셈이다” (유진오, 「헌법기초회고록」65쪽, 일조각 刊)
  2. [2] 이를 두고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도 많다. 왜냐하면 이전에 친일행적 당시 대동아 전쟁 운운하던 사람이 광복을 하기 무섭게 이같은 행보를 보였고, 이로 인하여 다른 학자나 정치인들의 의심을 쉽게 받았다.
  3. [3] 단순히 총학생회뿐만 아니라 행정학과 이문영 교수를 비롯하여 여러 교수들도 저항했다. 이유는 유진오가 일제 말기 친일파로 활동하였으며, 정당성이 결여된 전두환정권의 국정자문위원을 맡는 등 이 같은 기회주의자에 대하여 민족고대로서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게 요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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