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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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육영수 (陸英修)

출생일

1925년 11월 29일

사망일

1974년 8월 15일 (향년 48세)[1]

출생지

충청북도 옥천군

최종 학력

옥천공립보통학교
배화고등여학교

남편

박정희

자녀

1남 2녀(의붓자녀 박재옥[2], 친자녀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

종교

불교 (법명: 대덕화)

1. 개요
2. 결혼 이전
3. 박정희와의 만남과 결혼
4. 결혼 이후
4.3. 드라마에서
5.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의 재발견
5.1. 최태민을 조심하라는 발언
5.2. 김종필 발언에 의한 논란 진위
6. 트리비아

1. 개요

박정희의 후처, 박근혜·박근령·박지만 남매의 어머니.[3]

이순자와 함께 약간 다른 이유로 주목받은 영부인이자 역대 최장기간 영부인 생활을 한 인물.

박정희의 아내라 하면 대개 육영수를 떠올리는데, 박정희의 첫 아내는 김호남이었고, 이현란과 결혼을 전제로 동거(사실혼)하기도 했다. 이현란, 김호남과 이별하고서야 만난 여인이 육영수.

2. 결혼 이전

1925년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갑부 육종관과 본처 이경령 사이의 1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위로는 언니 육인순과 오빠 육인수, 아래로 여동생 육예수가 있다. 박정희에게는 각각 처형, 손위처남, 처제다.

육종관은 본처 이경령 외에도 3명의 들을 거느렸는데, 그 중에는 경기도 개성시 출신의 친자매도 있어서 각각 '큰 개성댁', '작은 개성댁'으로 구분해야 했다. 이렇게 복잡한 여자 관계 때문에 육종관은 적자서자를 모두 합해 총 12남 10녀를 두었다. 당연히 본처 이경령은 육종관의 축첩을 싫어했지만, 경제적으로 자립할 능력이 없는 여성이 식민지 조선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경제권을 독점한 가장을 거역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경령의 울분은 딸 육영수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육영수는 옥천공립보통학교(現 죽향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하여, 경성부 배화고등여학교[4]로 진학했다. 배화고녀[5]는 1898년 미국인 선교사 조세핀 캠벨 여사가 설립한 개신교(감리교) 미션스쿨로, 전통 깊은 명문 여학교였다.

그런데 배화고등여학교 재학 당시 육영수의 거처는, 다름 아닌 '큰 개성댁'의 집이었다. 물론 집 주인은 아버지 육종관이었지만, 실세는 서울에 왔을 때나 가끔 머무는 육종관이 아니라 큰 개성댁이었고, 상경과 동시에 육영수는 신데렐라 처지에 놓이게 된다.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서모(庶母)와 적녀(嫡女)의 사이는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고, 실제로 큰 개성댁은 친어머니 이경령이 서울에서 기숙 중인 육영수에게 보낸 물자를 중간에 가로채기도 했다. 하지만 육영수는 배화고녀 재학 4년간 부모에게 불만 한 마디 꺼내지 않았다.

육영수가 재학하던 당시 배화고등여학교에서는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육영수는 무척 가고 싶어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가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육영수는 배화고녀 졸업 후 대학에도 가고 싶어했지만, 아버지는 딸들의 대학 진학을 반대했고 아들들만 대학에 보내겠다고 했다. 육종관은 매우 부자였으므로, 그가 딸의 수학여행과 대학 진학에 반대한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다. 워낙 보수적이고 남존여비가 심하던 시절이라, 여자가 집을 떠나 멀리 여행하거나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을 몹시 부정적으로 보던 당대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고등여학교까지 졸업한 것만 해도 당시로서는, 특히 여성으로서는 상당한 고학력이었다.

배화고등여학교 졸업 후 육영수는 고향 충청북도 옥천군으로 내려와, 옥천여자전수학교(現 옥천여자중학교)에서 1년 3개월간 교사 생활을 했다. 과목은 가사.

3. 박정희와의 만남과 결혼

1950년 8월 이종사촌인 송재천[6]의 소개로 당시 소령이었던 박정희를 만났다. 박정희는 집안 어른들이 정해주는 대로[7] 1936년 김호남과 결혼하여 이듬해 박재옥이라는 딸을 낳았으나, 첫 번째 부인인 김호남에게는 그다지 정이 없었다. 박정희는 김호남을 두고 이현란이라는 여대생과 1948년부터 1950년까지 동거하였으나, 이현란과도 헤어지고 김호남과 이혼한 후 곧 육영수를 만나 결혼했다.

1950년 12월 12일[8]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나이는 박정희가 34세, 육영수가 26세. 결혼 사진을 보면 육영수의 얼굴이 부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전날 육영수가 위경련을 겪어서 생긴 일시적인 후유증이라고 한다. 결혼식 때 주례를 섰던 허억 대구 초대 시장이 두 사람의 이름 때문에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이라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 근데 주례 선생님 성함도 만만치 않으십니다[9] 또 결혼식에 쓸 예물 반지를 가지고 있던 육영수의 사촌오빠가 결혼식 날 반지를 잃어버려 부랴부랴 반지를 사왔다고 한다. 다사다난한 결혼식

친정아버지 육종관은, 당시 군인이었던 박정희가 육영수와 결혼하는 것을 결사 반대했다. 반대의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1. 일단 둘의 교제 시기가 1950년 8월이었는데, 당시엔 인민군경상도를 제외한 한반도를 석권하고 있었다. 낙동강 방어선이 뚫려 적화통일이 달성되면 국군은 제거대상 1호인데, 하필 군인이랑 사귀냐는 점. 대지주 역시 숙청 대상입니다만?

2. 신식 교육을 받은 부잣집 아가씨가, 자식도 있고 첫 아내와 이혼까지 한 나이 많은 남자에게 시집 간다는 점.

3. 육종관이 사윗감으로 미리 점 찍어둔 조건 좋은 남자가 있었고 혼담까지 오고 갔는데, 이 판을 엎어버리고 생판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 간다는 점.

육종관은 자기 자신과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서,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나서도 사위로 인정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집권한 뒤에도 청와대에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았다. 일설에는 "박정희랑 결혼하면 육영수가 죽는다"는 예언을 들었다고.

친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친정어머니 이경령과 육영수 자신의 고집 덕분에 결혼을 밀어붙였다. 이경령이 육영수의 사주를 무속인들에게 보이니, 다들 "재취(후처) 자리로 시집가야 잘 산다"고 풀이했다고도 한다.[10] 결국 육종관은 육영수의 결혼식에도 찾아오지 않고, 이경령&육영수 모녀와 완전히 갈라섰으며, 경제적 지원도 일절 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1965년에 숨지기 직전, 육종관은 병문안을 온 사위 박정희에게 "내가 부덕하여 큰 인물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사과하였다. 그러나 친정아버지가 한 예언은 끝내 현실이 되었다.

4. 결혼 이후

결혼 후에는 당시 군인이었던 남편의 월급이 박봉이었던 터라 구멍가게를 열었다고 한다.[11] 6년 후에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에 집을 마련하였는데, 당시 대문이 낮아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야 했던 박정희를 보고, "남자가 고개를 숙이면 기개가 꺾인다"며 대문을 개조하였다고 한다. 다른 버전으로는 "이 집에 오시는 분은 다 귀하신 분인데, 어떻게 들어오시면서부터 고개를 숙이게 할 수 있는가"하며 대문을 개조했다는 얘기도 있다. 키를 생각해 보면, 자신이 불편해서인지도 모른다[12]

박정희와 육영수 사이에서는 첫째 박근혜, 둘째 박근령, 셋째 박지만 총 1남 2녀가 태어났다. 첫째 박근혜는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가 탄핵으로 쫓겨났다.[13]. 일각에서는 육영수가 문세광의 총탄에 암살당하지 않고 1970년대 후반기까지 더 살아 있었다면 박정희와 박근혜, 박지만 등 박정희와 육영수 소생의 자녀들의 이후 행보가 극단적으로 변하거나 지금처럼 마약 범죄에 사이비종교, 부정부패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14]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이 그런 시각을 가진 책 중 하나인데, 안 그런 것 같지만 아내에게 내심 굉장히 의지하던 박정희는 육영수가 암살당한 충격 탓에 마음이 극도로 약해졌고, 결국 차지철 같은 사람에게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추측은 유신정권 후기 박정희의 행보를 설명하려는 가설에 불과하고, 실제로 당시 박정희의 심리가 어땠는지는 알 길이 없다

육영수의 사망 이후 편지를 통해 최태민박근혜와 만났을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생전에 육영수 또한 최태민을 만났다. 딸 박근혜가 학업에 집중하지 못한 것을 걱정해서 집중력 강화를 위해 최태민을 통해 최면술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박근혜가 중년 시절에도 국회에서 펜 세우기 따위나 하고 이산화탄소를 이산화가스라고 말하는 거 보면, 진짜로 어렸을 때부터 주의가 산만하고 공부도 안 하고 뺀질거린 게 맞긴 맞는 모양이다 한마디로 진짜 드럽게 말 안 듣는 똥강아지 그냥 똥

고전판 엠씨스퀘어.

4.1. 한국의 영부인으로서

정부에 비교적 비판적 논조를 보이던 'TBC 석간'의 진행자 봉두완[15]의 회고에 따르면, TBC나 DBS 동아방송이 정부비판적 보도를 하여 관련자들이 고생할 때 옆에서 견제하며 뜯어말리고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봉두완, 박정희, 육영수가 3자대면한 적도 있다고. 이런 부분은 연합통신/동아일보 출신 이만섭국회의장의 회고록에서도 교차 검증된다.

이렇게 남편을 다독이다 보니, 그녀에게는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

항상 한복 차림과 매우 꼼꼼하고 소박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어린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 고아원과 보육원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였으며, 1971년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봉사를 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육영수는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을 청와대에 초청하고 직접 봉사한 최초의 인물이다. 1973년 한센인들을 청와대로 불러 다과회를 열고 구호물자를 보냈다고 한다. 또한 1971년 전남 나주시의 한센인촌, 1972년 전북 익산시의 한센인촌을 방문하는 등 한센인들의 인권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고, 이후 1974년 소록도 양로원 준공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그 해 8월 문세광의 저격으로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출처. 이후 2000년대에 이희호 여사가 영부인으로서 소록도를 방문하게 된다. 출처.

당시의 박정희의 권위, 그리고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좋지 않았던 인식을 생각해보았을 때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육영수의 행보는 대중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실제로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인식 개선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환자들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대한 점은 아직도 소록도에서 회자되며, 덕분에 지난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전통적으로 전라도 지방에서 우세당이었던 민주당인 만큼 1,839개의 투표소 중에 1,838개의 투표소가 문재인 후보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였으나, 유일하게 소록도에 있는 도양읍 제7투표소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62.65%의 지지(득표수는 박근혜 270표, 문재인 158표)를 받는 등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16]

그렇다 보니 박정희에게 맞서 싸웠던 민주화 운동가들도 육영수에 대한 비판은 자중하는 모양새다. 실제 장녀인 박근혜가 정계에 들어온 후 박정희의 행적에 대해선 끊임없이 비판이 쏟아졌지만, 육영수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었다. [17][18]

또한 1973년 육영수는 청계피복 노동자들의 실태에 대해 듣고, 노동자들이 전태일의 뜻을 받들어 노동교실을 설립하자 이를 적극 챙겨 지원하는 등, 노동자들의 권익에도 신경을 썼다.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는 2014년 경향신문에 올린 본인의 글에서 한국행정학회가 조사한 한 자료에 따르면 역대 영부인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육영수만 긍정적으로 나타났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해당 글에서 육영수가 청계피복노조의 노동운동을 지원하였으나, 육영수 사후 1977년 박정희가 노동운동을 탄압하였다는 점을 언급하였다. [1970 박정희부터 선데이서울까지](24) '퍼스트레이디' 육영수[19].

불우 청소년들의 직업 보도를 위해 정수직업훈련원을 설치하고 만화잡지 보물섬을 발간한 것으로 유명한 육영재단이나 어린이회관을 짓는 등 아동복지와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들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20]

4.2. 사망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박정희를 노렸던 문세광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사인은 두부관통상이며, 이때가 향년 48세. 이때 육영수 뿐 아니라 합창단원으로 참가했던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21] 2학년 장봉화 양(1957-1974)도 총에 맞아 사망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당시 현장에서 회수된 6발의 총알 중 육영수의 머리에 맞은 총알만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넘겨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탄환이 우뇌 깊은 곳에 박혀서 탄을 꺼내려면 시신 훼손이 심각해지기에 탄을 꺼내지 않고 장례를 치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탄환과 함께 묻혀 있는 셈이다. 남편 박정희도 1979년 10.26 사건으로 숨졌다. 육영수 저격 사건에 대해서는 음모론이 끊임없이 나오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한다. 다음 링크의 영상이 가장 대표적인 음모론을 소개하고 있다. #

육영수의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조문객 수만 200만명의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1975년에 정부에서 추모사진집을 만들었고, 학교에 배부한 듯하다.

육영수의 모교인 배화여자중학교·배화여자고등학교 교정에는 그녀를 기리기 위한 '육영수 여사 기념관'이 세워졌고, 이어 배화여자실업전문학교가 세워졌다. 이 학교는 2/3년제 전문대학배화여자대학교로 개편되었고, 기념관은 배화여대의 대학본부로 쓰이고 있다.

육영수가 사망한 후, 프랑스에 유학하던 22살의 장녀 박근혜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영부인 역할을 대신했다. 이때부터 박근혜는 어머니처럼 올림머리를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2016년 육영수가 암살된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추모공연인 <백목련>이 열렸다. 목련은 육영수가 생전에 좋아하던 이며, 한복을 입고 올림머리를 한 그녀의 모습을 당시 사람들이 목련에 비유했다고 한다. 배화여자대학교의 교화(校花)이기도 하며, 배화여대에는 목련관이라는 이름의 건물도 있다.

4.3. 드라마에서

5.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의 재발견

5.1. 최태민을 조심하라는 발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역대급 사건이 터지면서, 최태민 때문에 육영수도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박근혜의 여동생 박근령의 남편인 신동욱 공화당 총재가 TV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육영수가 생전에 박근혜에게 "최태민과 가까이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고 밝혔다. #, #

이 인터뷰는 박근혜최태민이 처음 만난 시점과 관련해서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육영수가 비극적으로 사망한 일로 박근혜가 큰 충격을 받았을 때 최태민이 박근혜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이 만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신동욱의 말이 사실이라면, 육영수가 생존해 있던 시기부터 이미 박근혜와 최태민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또한 이 신동욱의 말이 사실이라면 러시아 제국 시절 당시 니콜라이 2세 치세 시절과 놀라울 정도의 데자뷰를 보여주는 것인데, 그쪽은 국가지도자의 부인(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이 사이비(그리고리 라스푸틴)의 꾐에 빠진 것을 장녀(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공주)가 말리려 했다면, 이쪽은 국가지도자의 장녀(박근혜)가 사이비(최태민)의 꾐에 빠진 것을 부인(육영수)이 말리려 했다. 어머니와 장녀만 포지션이 맞교환되었을 뿐, 상황이 완벽하게 동일하다.

이 주제는 2016년 11월 26일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다루어졌다. 최태민의 아들의 증언에 의하면, 육영수 생전부터 최태민이 청와대 출입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주간지에서 1972년에 최태민이 청와대에 출입했다는 기사를 찾아내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육영수는 TV에서 본 최면술 시범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서 최태민에게 직접 시범을 보여봐 달라고 불렀단 내용이 적혀져 있다.

5.2. 김종필 발언에 의한 논란 진위

최순실 게이트가 한창이던 2016년 11월 14일, 주간지 시사저널은 동월 3일 자사 경영진이 김종필 씨와 나눈 대화 내용을 녹취 공개하였다. 당시 크게 주목받은 내용은 "박근혜는 5천만 국민이 몰려가서 하야하라 해도 끝끝내 따르지 않을 성격의 소유자"라는 김종필의 분석이었으나, 그것과 별도로 육영수에 관한 흥밋거리 위주의 증언도 들어있었다.

김종필은 육영수에 대해 "대통령 부인이라는 이름에 맞게 행동하는 것처럼 꾸민 것일 뿐, 실제로는 남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며, 육영수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는 발언을 했다. 그 일례로 박정희가 권력자가 되기 전이었던 시절, 자신의 아내 박영옥이 겪었던 일을 들었다. 박영옥은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의 딸이다. 따라서 육영수는 박영옥의 숙모가 된다.

김종필이 미국에 가 있는 동안 박영옥이 첫 아이를 낳고 이 없어서 쫄쫄 굶었는데, 꼴에 숙모라는 육영수가 자기 식구들에게만 밥을 먹이고[23] 산모였던 자기 조카딸 박영옥에게는 밥을 먹었느냐고 묻지도 않았다는 것. 그래서 김종필이 귀국했을 때 박영옥이 김종필을 붙잡고 서러움에 울면서 그 이야기를 했고, 분노한 김종필이 육영수에게 "남도 아니고 조카딸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따졌다는 것.

그런데 정작 인터뷰를 했던 김종필은 "고향 사람이라고 찾아와서 시중에서 나도는 이야기를 농담 삼아 주고 받았을 뿐인데, 몰래 녹음까지 해서 왜곡·과장해 비열한 기사를 만들어 자기 신문에 냈다"며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박영철 시사저널 편집국장은 "왜곡이나 과장이 아니라 이야기를 주고 받은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달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종필의 주장대로라면 김종필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고향 사람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것이지만, 일단 법적으로는 시사저널의 행동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김종필은 뒤통수를 맞은 게 아니라, 일부러 이야기를 흘린 후 '뒤통수 맞았다'고 말로만 주장한 것"이라 보는 사람이 많다. 알다시피 김종필은 수십 년이나 정계에 몸 담았던 사람이며, 정치적 처신에 능숙하다. 그런 자가 순진하게 기자 앞, 더구나 진보 매체 기자 앞에서 논란이 될 게 뻔한 육영수의 숨은 면모를 말했다는 부분부터가 미심쩍다. 어차피 이야기의 주제는 박근혜 하야 여부 문제였으니, 그냥 "박근혜가 너무 고집이 세서 스스로 하야하지 않을 것"이라고만 말해도 충분하다. 그런데 수십 년 전에 사망하여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아무 상관 없는 육영수의 이중적인 면모를 굳이 폭로하는 식으로 언급하며, "박근혜가 육영수의 안 좋은 성격을 닮아 하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을까?

또한 이 이야기에서 피해자가 김종필의 아내 박영옥인데, 이걸 농담 삼아 말한다는 것은 고인드립이라고 볼 수도 있는 행동이다. 김종필이 치매라도 걸렸거나, 아니면 아내와의 사이가 실제로는 매우 나쁜 게 아니라면 도저히 함부로 농담으로 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다. 다만 그의 건강이 악화한 걸로 봐선, 정신 판단에 좀 무리가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보도에 대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만 했을 뿐 실제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고 있지 않아서, 뒤통수 맞은 걸 가장해 고의로 육영수의 이야기를 언론에 흘렸을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한 건 그냥 정치적인 부담을 조금 줄이기 위한 '블러핑'에 가깝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렇다면 육영수의 소위 진면모에 대한 증언이 지금까지 없었는지 설명이 안 간다. 청와대에 입성하기 전에는 일반 주부였는데 왜 소문이 하나도 없었을까? 그 시절에도 소문이나 찌라시는 무성했는데. 그리고 증거도 없이 소문에 근거한, 남이 조작할 수도 있는 소문을 함부로 보도하는 것은 윤리정신에 위배된다. 그런데 당시 육영수와 김종필의 집은 서로 다른 동네에 있었다. 같은 집에 살지도 않는데 물어볼 필요가 있나?

오히려 박정희 정권 당시 2인자라는 이유로 꽤 심한 탄압을 받은 그가 박근혜를 몰아내면서 친박계의 기둥 중 하나인 육영수를 음해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당사자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말만 잘하면 완전범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2016년 11월 19일 '대통령의 시크릿' 편을 방송하면서 1951년에서 1952년 사이에 부산시대구시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박정희와 육영수 부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의 제보를 받는다고 공지하였는데, 이 내용에 따라 김종필의 인터뷰 내용의 진위 가능성을 판가름할 내용이 방송될 수도 있다.[24]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김종필의 발언으로 어수선한 와중, 2016년 11월 29일 충청북도 옥천군에 있는 육영수 생가[25]에서 소위 숭모제[26]라는 것이 거행되었는데, 보수 시민단체와 진보 시민단체가 부딪쳐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서로 고성과 욕설이 난무하고, 보는 사람들까지도 어쩔 줄 몰라했다고 한다. 영상.

월간조선 2017년 1월호에 육영수의 조카 홍정자의 인터뷰가 실렸으며, 앞서 언급된 김종필의 이야기는 거짓말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링크.

6. 트리비아

  • 키가 170cm로 대한민국의 역대 영부인 중 가장 키가 크고[27], 한복에 어울리는 체형이었다고 한다. 이후 영부인이 되는 이순자영 좋지 않은 한복 센스 때문에 더 부각된다. 박정희보다도 키가 컸다고 한다. 참고로 박정희는 158cm로 역대 남자 대통령들 중 가장 키가 작다.[28] 딸인 박근혜는 162cm. 동년배 평균보다 조금 큰 편이다. 이거 때문에 부부가 같이 행사에 참석할 땐 행사 주최측에서 육영수 쪽이 키를 조금이라도 작게 보이게 하려고 신경 썼다는 말이 있다. 다만 박정희 본인은 굳이 키를 크게 보이려는 생각이 전혀 없어서 굽이 높은 구두나 깔창을 쓰지 않았고, 어떤 자리에서는 주최 측이 박정희의 의자에 올려 놓은 두툼한 방석을 던져버리기까지 하였다고.
  • 한때 "푸른 기와집에 정희와 영수가 사는데, 누가 남자고 누가 여자게?", "대통령 부부가 싸우는 걸 3글자로 줄이면?" 같은 농담이 떠돌았다. 후자는 정답이 "육박전"이다. 이 농담을 맨 처음 고안해서 써먹은 전유성은 즉각 출연정지를 먹었고, 프로그램은 폐지되었으며, 담당 PD는 중정에 끌려가서 개박살이 났다고 한다. 박정희 & 육영수 내외는 이 농담을 대통령 전용기의 스튜어디스에게서 들었다고 하는데, 당사자들은 그 개그를 듣고 박수를 치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 # 스튜어디스 배짱 좋네[29]
  • 2010년 들어서 <퍼스트 레이디>란 제목으로 그녀에 대한 영화가 기획되었으나 번번히 무산되고 있다. 주연으로 내정되던 감우성[30]을 비롯한 배우들이 각본 등의 여러 이유로 거부하였고, 제작비 투자도 부진한 상황이라고 한다. 거기에 청와대에서 국비 지원한다는 헛소문까지 돌아서 감독이 불쾌감을 보인다는 소문도 있으나, 투자 설명회에서 나온 각본이나 설정이 그야말로 유치찬란한 수준이라 투자자들이 멍 때리고 나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 가운데 변호인이 대박을 거두자 이 영화 제작투자가 다시 활기를 띈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오래 가지 않아 역시 흐지부지되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하여 박정희 일가에 대한 환상이 산산이 부서지고 환멸만 남아버린 2016년 이후 우리나라 대중 정서를 감안하면, 이 영화가 만들어지기는 몹시 어려울 듯하다.차라리 홍소자, 홍세표 남매가 주인공인 영화 만들어보지?[31] 아니면 남편 김종필 전 총리를 열심히 내조한 박영옥 여사의 일생을 영화화화든가
  • 유시민 작가에 따르면, 전태일 열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모친인 이소선 여사가 죽은 아들의 영정을 끌어 안고 청와대 정문 바리케이드 삼거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걸 안 육영수가 이소선 여사를 청와대 안으로 데려와 를 대접하고 박정희를 만나게 해줬다고.
유시민 작가는 물론 그 만남으로 산업화 시대 때 노동자들의 살인적인 근무 환경이 개선됐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사람이 죽었고 그 사람의 어머니가 고통에 몸부림칠 때 차를 대접하고 위로하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 아니겠냐며, 박근혜에게 면담을 요구하면서 청와대 청운효자동 사무소에서 장기간 농성을 하던 단원고 학생 유가족들을 무시로 일관했던 박근혜를 비판하기도 했다.# 어머니를 존경한다는 사람이 어머니의 행동을 배우지 못할 망정, 왠 뚱땡이 아줌마 시다바리나 하고 있다니
  • 출처는 확인할 수 없지만, 육영수는 평생 아버지 육종관의 축첩을 경멸한 것으로 추정되나, 박정희의 권력 기반이 탄탄해진 1965년 이후에는 어머니 이경령보다 훨씬 지독한 꼴을 봐야 했다고 한다. 당연히 박정희의 복잡한 여자 관계에 대해서는 치를 떨었으며, 관련 소식을 접하면 주변 사람들이 '평소에는 그 온화하고 다정다감한 영부인 맞나?' 싶을 정도로 엄청 화를 냈다고 한다. 박정희의 그쪽 일을 도맡아 처리했다고 알려진 이후락청와대 건물 부속실 직원들에게 "사… 사… 사모님 계, 계시냐?"라며 떨면서 물어보고 관저를 출입했다고(…)
여자 관계를 들킨 박정희에게 적반하장으로 손찌검을 당하거나, 날아온 재떨이에 얻어맞는 일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청와대 출입 기자들은 육영수의 얼굴이 부어 있거나 상처 자국이 있으면 '오늘 각하가 저기압이시구나' 하고 유추했다고 한다.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나중에는 포기한 나머지 밤나들이를 나가는 박정희에게 &quot;아이만 만들지 말라&quot;는 당부만 했다고. 다만 상술했듯이 이 이야기는 출처는 알 수 없이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이전에도 육영수와 박정희 간에 주색 문제로 싸웠다는 내용은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정말 관계에 심각한 수준이는다는 근거는 없다. 재떨이와 관련된 주장으로는 청와대 출입기자가 육영수 얼굴의 멍을 목격한 것을 보고 이런 저런 추측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1968년 미국 특사가 남긴 문서에 관련된 내용이 남아 있긴 하다.이런 얘기가 나올 정도면 싸우기는 제대로 싸웠는듯...


  1. [1] 참고로 이 날은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된 날이기도 하다(…)
  2. [2] 박정희가 첫 번째 아내 김호남에게서 낳은 딸
  3. [3] 언니 육인순과 여동생 육예수 소생의 자녀들에게는 이모.
  4. [4] 청와대에서 매우 가깝다. 교문을 통과해 언덕을 올라 학교 건물까지 가다 보면 청와대가 보인다. 운명??
  5. [5] 고등여학교(高等女學校)를 줄여서 고녀(高女)라고 했다. 오늘날의 여자중학교+여자고등학교 과정. 일제강점기 때 여학생들을 위한 중등교육기관은 여자고등보통학교라고 불렀다가, 1938년부터 고등여학교로 개칭되었다.
  6. [6] 송재천은 박정희대구사범학교 후배이기도 했다.
  7. [7] 본래 박정희는 좀 더 나이를 먹은 후 자신이 좋아하는 여성을 만나 결혼하길 원했으나, 부모 및 집안 어른들은 그를 김호남과 억지로 결혼시켰다.
  8. [8] 29년 후 일어날 그일이랑 똑같은 날짜다.
  9. [9] 비슷한 예로 방송에서 "육영수 여사"라고 해야 할 것을 "육영사 여수"라고 방송사고를 낸 일도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방송사고가 난 건, 방송에서 원체 수없이 육영수 여사, 육영수 여사 하다 보니 순간 실수한 거라고 하는데 방송에서 수없이 육영수 여사라는 단어를 부를 시기, 바로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에 벌어진 방송사고라고 한다. 히익, 코렁탕 출처는 이계진의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
  10. [10] 다만 육종관이 들었던 예언은 저기서 더 살이 붙는다. 바로 "재취(후처) 자리로 시집가야 잘 살기는 하지만 마지막에는 두 사람 다 비극적인 결말을 맞을 것이다."가 그것.
  11. [11] 부잣집에서 자란 사람이 스스로 어렵게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에서는 그런 점에서 육영수를 고평가한다.
  12. [12] 육영수는 키가 170cm인 장신이었다. 2017년 시점에서도 여성이 170cm면 대단한 수준이다. 1950년대에는 남성의 키도 170cm이면 꽤 컸다.
  13. [13] 제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소록도 선거구에서 박근혜문재인보다 더 많이 득표했는데, 이는 전라도 지역에서 유일한 모습이었다. 또 충청도에서도 문재인보다 10% 정도 많이 득표했다. 이는 박근혜의 어머니 육영수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전자는 육영수가 소록도를 지원한 것 때문일 것이며, 후자는 육영수가 충청도 출신이며, 세종시 행정수도 백지화를 추진하려고 했던 이명박 정부에 맞서 세종시 원안 고수를 지지했던 것 때문이었다. 대전광역시의 정치 지형을 보면 주로 신개발지구인 서부가 진보, 구시가지인 동부가 보수적 성향을 보이는 양상이 나오는데, 특히 육영수의 고향인 옥천군 출신들이 구시가지에 많이 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14. [14] 실제로 박근혜는 어머니 육영수를 여의고 난 뒤 영세교 교주인 최태민과 최순실 부녀에게 극도로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최태민과 최순실에게 빠지게 되었다.
  15. [15] TBC의 간판 뉴스 앵커였고 당시 인지도는 엄기영 전 MBC 사장이나 손석희 JTBC 보도부문 사장과 거의 동급이었다. 이후 전두환 정권 때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1대, 제12대 국회의원을 하였다.
  16. [16] 물론 전라도 뿐만 아니라 경상도 등 전국 각지에서 온 환자들이 많은 것도 있다. 실제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도 민주정의당 노태우김대중보다 표를 많이 얻기도 했다.
  17. [17] 과거 민주당에서 영남권 인사들을 영입할 적에 박근혜도 영입 대상에 있었다. 1999년 5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이 이제는 역사 속에서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박 전 대통령이 잘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역사 속에서 재평가 받게 해야 할 것. 형식은 민간주도로 하고 예산은 민간 모금과 정부 재정 지원으로 해야 할 것. 기부금 모금을 허가하는 등 정부와 대통령이 앞장서면 국민 호응도 클 것이고 꼭 성공할 것"이라 말한 적도 있었다.
  18. [18] 박근혜는 1998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면서 정치권에 입문하였다. 앞의 김대중의 발언은 이미 박근혜가 정치권에 입문한 직후의 이야기. 김대중은 1994년 아태평화재단 이사장 시절 온건보수 성향의 인사들을 대거 영입하면서 박정희에 대해서 과거와는 다르게 긍정적인 측면도 많다는 식의 평가를 내리기 시작했고, DJP연합으로 집권한 이후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을 국가예산으로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19. [19] "박정희에게 매우 비판적이나, 육영수는 비난할 수 없다"는 논조의 글이다.
  20. [20] 육영재단은 손기정 선수의 메달을 기증받아 보관하고 있다. # 그러나 정작 손기정 선수의 장례식 당시, 장례식을 위해 메달과 상장을 대여해달라는 유족들의 요구를 단칼에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밖에 청와대에 보관되어 있던 다양한 문화재들이 박정희 저격 이후 사라졌는데, 육영재단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의혹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안중근 의사의 유묵.
  21. [21]성동글로벌경영고등학교. 이름은 바뀌었으나 여전히 여고이다.
  22. [22] 격동 50년의 전신인 라디오드라마
  23. [23] 이전 버전에는 "자기 아들딸들에게만 밥을 먹이고"라고 되어있고 박영옥과 육영수의 나이가 비슷해서 당시 박근령이나 박지만은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김종필의 말이 의심쩍다는 듯이다. 하지만 김종필의 인터뷰를 보면 "자기 아들딸"이라는 말은 없다. "저쪽에서는 밥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는데"라고 해서 육영수네 식구는 밥을 먹었다는 것을 표현했을 뿐이다.
  24. [24] 하지만 1년이 넘도록 해당 내용이 방송되지 않은 걸 보면 별다른 증언이나 증거는 확보하지 못한 것 같다.
  25. [25] 99칸 한옥이다. 오래되고 낡은 집을, 옥천군에서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약 37억 5,000만원을 들여 복원했다.
  26. [26] 육영수의 생일을 기념하는 제례.
  27. [27] 2014년 기준 한국 성인 여성의 평균 신장은 160cm로, 지금도 여성이 170cm이면 장신이다. 1970년대 한국 여성의 평균 신장이 155cm였던 점을 감안하면, 170cm는 거인인 수준이었다. 이 당시 국가대표 여자 배구 선수가 거의 이 정도 체격이었다.
  28. [28] 뭐 이렇게 작나 생각할 수 있지만, 박정희가 태어난 시대인 1910년대는 지금과는 식량 사정이 달랐다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고령 박씨. 일족은 기골이 장대하기로 유명했고 박정희의 형제들 모두 기골이 장대한데, 박정희 혼자만 왜소하다. 이는 백남의가 40대 중반에 늦둥이로 박정희를 임신했을 때, 안 그래도 가난한데 가족이 너무 많아져서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생길까봐 박정희를 낙태하려 했는데 그게 실패했고, 그 후유증으로 박정희만 왜소한 것이다.
  29. [29] 전유성이 가수 윤형주의 <0시의 다이얼>에 출연해 이 개그를 했었다. 근데 윤형주가 알던 누나인 최은자 씨가 대통령 전용기의 스튜어디스여서 그걸 박정희에게 말해줬고, 그 후 상술한 대로 탄압을 받았다. 훗날 전유성 본인은 그 사건이 자신에게 "세상은 참으로 치열한 육박전이구나!"라는 걸 알게 해줬다고 자신의 저서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에서 밝혔다. 당시 윤형주회고에 따르면 당시 방송사엔 중앙정보부에서 파견한 조정관이 있어서 방송 멘트까지 일일이 검열했는데,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하다가 "제비가 박씨를 물고 갔다"는 멘트가 나오자 "왜 박씨냐? 무슨 저의가 있는 것 아니냐?"라며 지적을 했다고. 그런 시절이었으니 전유성도 당연히 출연금지를 먹을 수밖에.
  30. [30]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한 배우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31. [31] 홍세표와 홍소자 남매는 육영수의 언니이자 본인들의 어머니인 육인순이 투철한 교육자인것과는 별개로 부친 홍순일의 친일 전력 논란이 있긴 하지만 부모님 사후 마약과 부정부패, 이혼과 재혼등 불안정한 삶을 영위했던 박근혜, 박지만, 박근령 등 이모 육영수-이모부 박정희 소생의 자녀들과 달리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향후 영화화 해도 별 논란은 없긴 하다.그런데 이것도 이모 소생의 사촌동생들이 국정농단에 마약에 크게 사고 쳐버린 이상 불가능할지도?
  32. [32] 이에 대한 에피소드최불암 항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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