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重章)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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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08년 6월 21일

대한제국 충청남도 덕산군 현내면 초량리[1]

사망

1932년 12월 19일 (향년 24세, 총 8948일)

일본 제국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본관

파평 윤씨(坡平 尹氏) 판도공 제학공 공간공파 32대손

별칭

아명(兒名)은 윤우의(尹禹儀)
아호(雅號)는 매헌(梅軒)
칭호(稱號)는 의사(義士)

직업

독립운동가, 시인, 교육자

가족

윤황(부), 김원상(모)
윤남의, 윤성의, 윤영의,
윤준의, 윤임의, 윤순례(동생)
배용순(부인), 윤안순(장녀),
윤종(장남), 윤담(차남)
윤주경(손녀), 윤주웅(손자)
윤주빈(종손)[2], 윤행복(증손)

학력

덕산초등학교(명예 졸업장 추서)

조직

한인애국단

의거

훙커우 공원 의거

현재 조선은 실력이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일본에 반항하여 독립함은 당장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강국피폐(强國疲弊)의 시기가 도래하면 그때야말로 조선은 독립하고야 말 것이다.

현재의 강국도 나뭇잎과 같이 자연 조락의 시기가 꼭 온다는 것은 역사의 필연의 일로서

우리들 독립운동자는 국가성쇠의 순환을 앞당기는 것으로써 그 역할로 삼는다.

물론 한두 명의 상급 군인을 살해하는 것만으로는 독립이 용이하게 실행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사건 같은 것도 독립에는 당장 직접 효과가 없음을 매우 잘 알고 있지만,

오직 기약하는 바는 이에 의하여 조선인의 각성을 촉구하고

다시 세계로 하여금 조선의 존재를 명료히 알게 하는 데 있다.

의거 후 일인 경찰의 취조 도중 밝힌 거사 이유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

1. 개요
2. 훙커우 의거 이전
4. 가족관계
5. 그 외
6. 관련 단체
7. 롯데그룹과의 관련 일화
9. 관련 문서

1. 개요

윤봉길(尹奉吉, 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은 대한민국독립운동가·교육자이다. 1932년 4월 백범 김구의 지시를 받아,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장절 및 전승 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義擧)를 성공시켰다. 본관은 파평 윤씨 판도공 제학공 공간공파 32대손, 호는 매헌(梅軒)이다.

2. 훙커우 의거 이전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덕산군 현내면 조량리(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목바리마을)에서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윤우의(尹禹儀)이다.

유년 시절 일본인 교사 아래에서 일본어 기초를 배우던 도중 동급생을 폭행(?)한 전력이 있다. 일본인 교사가 「[ruby(私, ruby=わたし)]は[ruby(日本人, ruby=にほんじん)]です。」(나는 일본인입니다.) 라는 문장을 따라해보라고 하였으나 아무도 하지 않자 마침 윤봉길 짝궁이 따라하여 보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윤봉길은 짝궁의 발을 밟으며 "왜놈된 기분이 어떠냐? 조선 사람이 왜놈 될려면 얼굴 생긴 것부터 뜯어고쳐야 돼!" 라는 말을 남겼다.

또 그와 관련된 대표적인 일화로, 동네에서 글자를 몰라 아버지의 묘소를 찾지 못하는 농부[3][4]를 보고 교육에 뜻을 가져, 월진회를 조직, 야학과 강습회를 열어 문맹 퇴치 및 계몽운동에 힘썼다. 참고로 월진회는 설립초기에는 계몽운동조합으로 운영되었지만, 현재는 농촌체험마을 사업이나, 마을 도서관 건립운동, 윤봉길 문화 축제 등을 추진하며 여전히 활동 중이다. 1944년부터 1946년까지 우진회란 이름으로 존속했지만 1946년에 다시 월진회로 환원했다. 현재 공식 명칭은 초대 회장이던 그를 기리는 의미에서 매헌윤봉길월진회로 쓰고 있다. 윤봉길은 이후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만주 등의 지역에서 갖가지 사회 활동을 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5] 한인 애국단에 소속되었다. 칭다오에서 일본인 부부가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일하며 때를 기다렸으나, 만주사변 이후 윤봉길은 "죽을 자리가 없어졌다."라면서 임시정부로 가서 김구와 만났다고. 이때 "이봉창 의사와 같은 일로 써 달라"라고 부탁했다.[6]

3. 훙커우 공원 의거

  자세한 내용은 훙커우 공원 의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가족관계

1922년에 배용순(1907~1988)과 결혼해 슬하에 딸 하나[7] 아들 둘을 두었다. 두 아들을 고국에 남긴 채 이역만리로 떠나,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자기 목숨 바칠 각오를 하면서도, 어린 두 아들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밟혔던지 아래와 같은 유서를 두 아들에게 남겼다. 첫째 아들은 고작 세 살이었으며, 둘째 아들은 아내의 뱃속에 있었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孟軻)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윤봉길 의사가 두 아들인 윤모순(模淳)과 윤담(淡)에게 남긴 위 유서는 후에 보물 568호로 지정되었다.

1949년 4월 29일, 충남 예산에서 거행된 '윤봉길렬사비' 제막식에 참가한 김구와 윤봉길 유족들.

안타깝게도 아들 둘 중에 작은 아들은 두 살 때 영양실조로 사망하였으며, 장남 윤종(1929~1985)에게서 장손녀 윤주경과 장손자 윤주웅이 나왔다.

장손녀 윤주경은 제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근혜 캠프 인수위에 소속되어 활동하였으며,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하였다. 친일 논란이 있는 만주군 장교출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과 함께 일한게 이상해보일 수도 있지만, 이건 그럴 수 있는게 광복 이후 많은 독립운동가 집안이 이승만 자유당 정권 아래에서 찬밥대우를 받았었다.[8] 그런데 이 상황이 크게 개선 된 것이 4.19 혁명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부 시절이었다. 그래서 김구와 윤봉길 등 독립운동가들의 서훈이 된 연도를 보면 1960년대 초반에 집중되어 있다. 윤주경은 실제로 이를 근거로 2012년 방송 인터뷰를 통해 진보진영의 이정희 후보를 비판했다. 아래는 그 인터뷰 내용.

앵커 : 이정희 후보가 TV토론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식 이름을 얘기하면서 박근혜 후보를 친일파의 후예라고 했는데 윤봉길 의사의 후예로서 일부에서 친일파의 후예라고 일하는 박근혜 당선인을 위해 일하는데 불편함 같은 것은 없나?

윤주경 : (불편함은) 없다. (다만) 이정희 후보에게 이런 얘기를 하고 싶다. 진보의 최고의 가치는 인간을 존중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후보가 가장 미워해야 할 것은 '연좌제'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후보는 박 당선인에게 연좌제를 적용했는데 이는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앵커 :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한 것으로 들었다. 친일파나 그 후손은 잘 먹고 잘사는데 독립운동가 후손은 힘들게 살고 있다는 지적이 진보진영에서 더러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윤주경 : 박정희 전 대통령은 산업화로 나라가 능력이 생기자 가장 먼저 한 일이 국가유공자 자녀들에게 대학교육까지 무상으로 보내줬다. 그 결과 사회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고 나름대로 살 수 있었다. 진보진영에서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더 잘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었어야 했지. 친일파들이 잘사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지난 참여정부에서 친일파들의 재산을 환수해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뭘 해주는 게 치욕스러웠다. 독립운동가 지원은 국가예산으로 해줘야 하는 것이지 그들(친일파 후손)도 부당하다고 하는 재산환수를 통해서 도와주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장손자 윤주웅은 고려대학교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93학번), 고려대 대학원 기계공학과 석박사통합과정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현대자동차 연구원에서 25년째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증손자 윤호석 역시 미국 명문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있다.#

친동생 윤남의(1913~2003, 호: 죽파)도 독립운동가이다.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순국한 직후 동료들과 함께 시신을 수습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이후 예산농업고등학교 독서회에서 활동했으나 독서회장 정종호가 독서회사건으로 체포되자 경찰을 피해 출가하여 해방될 때까지 선의라는 법명으로 승려생활을 해야했다. 친형의 추모사업을 주도하며 살다가 1996년 건국포장에 서훈되었다.

친조카 윤주는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을 비롯해 윤봉길연구소 이사장, 윤봉길식량지키기연합 공동대표를 지냈다.

조카 윤용은 고려대 신방과 교수를 지내다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윤봉길식량지키기연합 상임대표, '부정부패추방시민연합(부추연)' 대표 등을 역임했으며, 1992년 14대 총선 당시 무소속으로 동대문갑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교수 시절 1987년 유진오 빈소 설치 반대투쟁에 참여하는 등 '행동하는 지식인'처럼 보였으나, 세월이 흘러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당시 태극기 집회에 여러차례 참가하며 계엄령을 선포해서 촛불 시위대를 죽여야 한다거나 탱크로 밀어야 한다는 등 친박 발언들을 쏟아냈으며 태극기 집회에 참가해 문재인 정부를 비방했다.

또 다른 조카 윤홍은 남한에서 사업 실패후 월북한 경력이 있다. 2013년 송환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후 서울에서 지내고 있으며 자세한 것은 해당 링크로.

윤봉길의 증손인 윤행복은 2017년 8월 15일 대한민국 육군 홍보영상에 등장하기도 했다. # 당시 포병 병장이었던 윤행복은 현재 전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도 배우 윤주빈이 윤봉길 동생(죽파 윤남의)의 손자로 밝혀졌다. 기사

앞서 언급된 장손녀 윤주경 독립기념관장은 박근혜 정부와 관련이 있어서 그런지, 문재인 정부로 바뀌자마자 임기가 불과 4개월 남았음에도 피우진 보훈처장으로부터 독립기념관장직을 사퇴하라는 외압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기사 한편 독립기념관장 사퇴 이후 자유한국당, 현 미래통합당에 영입되었다. 기사

5. 그 외

의거에 실제 사용된 폭탄은 도시락이 아닌 물통 폭탄이었음에도, 불발된 도시락 폭탄이 왠지 모르게 '윤봉길 의사 전용 유니크 아이템' 이미지가 더 강해서, 어린 아이들이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던 시절 도시락을 던지며 윤봉길 의사 흉내를 내는 장난을 종종 하곤 했다.

윤봉길 의사가 사용한 폭탄은, 독립운동가김홍일 장군[9]이 제작한 것이다. 백범일지에 왕웅이라는 가명으로 나오는 김홍일 장군은 이봉창 의사가 사용한 폭탄도 제작했는데, 폭탄의 위력 부족으로 이봉창 의사가 실패하자 안타까워하면서, 윤봉길 의사가 사용할 폭탄을 열심히 제조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성능 실험에서는 성공적으로 폭발했으나, 도시락 폭탄은 터지지 못했다.

정확히는 누가 제작했는지 모른다. 독립운동의 경우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대부분이 독립운동가들의 기억에만 의존하는 경향이 매우 높다. 그렇기에 의열단의 활동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즉, 독립운동은 절대적인 객관적 기록이 부족한 상황이다. 그래서 이봉창, 윤봉길 폭탄에 대해서 말이 많은데, 이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혼선을 빚고 있다.

이에 대한 설은 2개가 있다. 하나는 김홍일이 제작했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김홍일이 폭탄제조자 왕백수(왕바이수)를 소개시켜주었다는 설이다. 결론은 둘 중 무엇이 맞는지는 모르나 김홍일이 이 사건에 깊이 개입했다는 것은 자명한 듯하다.

그러나 2010년 4월 28일 기사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을 제작한 인물이 공개되었다. 이름은 '향차도'라고 하며 19로군 후원회 병기책임자였다고 한다.링크

위키백과에서 저격수로 분류되어 있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스나이퍼가 아니고, 당시뿐이 아니라 현재에도 높은 사람을 어떤 형식으로든 처치하면 대개 '저격'으로서 분류된다. 여기서의 저격은 '총으로 쏴서 죽였다'는 뜻이 아니다. 저격(狙擊)[10]의 한자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는 문제.

2014년 7월 3일 진수한 손원일급 잠수함 5번함이 윤봉길함으로 명명되어 윤 의사의 애국정신을 기리게 되었다.

가끔 윤봉길의 폭탄투척 직전이 촬영된 사진이 있다고 얘기하는 몇몇 사이트들이 있는데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사진을 보면 윤봉길이라 추정되는 사람이 단상 앞에 위치해 있는데 실제로는 단상 앞이 아니라 뒤에서 폭탄을 던졌다. 게다가 사진을 보면 중절모를 쓰고 있는데 그 당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는 발언은 단 한마디도 없다. 고로 이 사진에 찍힌 사람은 윤봉길이 아니라 그냥 다른 행인일 수도 있다.

보훈처와 충청남도가 윤봉길 의사 관련 홈페이지인 충효넷의 계약을 관리 안 하다가 일본성인사이트가 먹어버리기도 했다가 현재는 warning.or.kr로 넘어간다(...)[11]

6. 관련 단체

7. 롯데그룹과의 관련 일화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현재의 롯데그룹과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는 시게미츠 하츠코라는 일본인 여성과 1945년에 결혼했는데, 시게미츠 하츠코는 시게미츠 마모루조카라는 설이 있다. 시게미츠 마모루는 주중공사였던 1932년,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에게 폭탄을 맞아 다리를 잃었으며 그후 의족을 사용했다. 2차대전 항복문서 조인식에 일본 외무대신으로 참석해서 항복 문서에 서명했던 인물이며, 도쿄 전범 재판에서 형을 확정받은 A급 전범이었으나 6.25 전쟁 와중에 사면된 것으로 알려졌다.

신격호 회장은 일본 내에서 굳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있다. 심지어 한국 이름도 안 쓰고 시게미츠란 일본 성을 쓰는데, 일본 국적 취득 당시 아내 시게미츠 하츠코의 성을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12]

시게미츠 하츠코는 신격호 회장의 아들인 신동빈, 신동주의 어머니이다.

한편 롯데그룹에서는 이 사실에 대해 그동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다가', 2015년에 경영권 다툼으로 롯데그룹과 일본과의 연관성이 언론을 통해 드러나면서 한국내 여론이 악화되자 이 부분을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롯데측은 오히려 시게미츠 하츠코가 남편의 성을 따랐다고 주장하는데 근거 자료를 내세운 것은 아니기에 단순히 이미지메이킹/언론플레이인지 아니면 정말 전범 집안과의 연관성이 있는 것인지는 확인이 되지 않았다. 어느 쪽이 정말 진실인지는 정확한 증거가 나오기 전에 알 수 없는 상황. 이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은 시게미츠 마모루, 신격호 문서로.

사실 시게미츠 하츠코는 2015년 현재 멀쩡히 살아있고, 경영권 분쟁 당시 김포공항으로 입국할 때 국내 기자들과 대면한 적도 있다. 시게미츠 하츠코가 명확하게 사실을 확인해주면 논란이 결론이 나겠지만, 특별히 부인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롯데그룹측의 해명과는 별도로 아직 명확한 진실은 알 수가 없다.

논란이 커지자 롯데그룹에서는 윤봉길 의사 기념 사업회에 후원을 했다. 10억원을 쾌척했음에도 윤봉길 의사 기념 사업회에서는 떨떠름한 반응.

8. 대중매체

  • 1980년대에 MBC에서 비록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와 그의 주변을 다룬 드라마가 많이 방영되었다. 1984년 작 조선총독부에서는 배우 정성모가 1989년 백범일지에서는 배우 박영태가 윤봉길로 분했다.
  • 1986년에는 광복절 특집 드라마로 <그의 아내>라는 작품이 방영되었는데, 특기할 것은 윤봉길이 아닌 그의 아내 배용순이 주인공이다.[13] 배용순 역은 김용선, 윤봉길 역은 박영규가 맡았다.
  • 1992년 의거 60주년을 기념하여 문화방송에서 특집 드라마로 만들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일제강점기를 다룬 영상물에서는 자주 나왔지만, 윤봉길 의사를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이 작품뿐. 제목은 문자 그대로 <매헌 윤봉길>. 윤봉길 역에 김상중, 김구 역은 정욱이 맡았다. 김상중은 훗날 백범 김구 전기 드라마에서 젊은 시절 김구를, 정욱은 이승만 역을 맡았다.[14]
  • 팩션 웹소설 재벌강점기에서는 소년 윤우의로서 일본 몰락 작전에 가담. 1925년 8월 15일에 히로히토 섭정의 연설이 열리는 도쿄 사쿠라다문 광장에 진짜 도시락을 들고 들어온 뒤[15], 어진 측에서 띄운 애드벌룬을 향해 총을 쏴서 엔화가 광장에 흩어지게 만든다.
  • 2018년 11월 18일, KBS가 그의 탄신 110주년을 맞이해 <열린음악회>를 열었다.
  • 2019년 6월 22일, MBC 금토드라마 이몽 28~29회에서 배우 이강민이 윤봉길 의사를 연기했다.
  • 2019년 10월 말, MBC 예능 프로그램 같이펀딩에서 윤봉길 의사를 다뤘다.

9. 관련 문서


  1. [1]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2. [2] 1989년생 배우, 2019년 3.1절 100주년 기념식에서 편지를 낭독했다.
  3. [3] 농부가 문맹인지라 글을 읽지 못하니 근처 묘소들에 꽂힌 묘비들을 모조리 뽑아 와 윤봉길 앞에 내려놓고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기가 막힌 윤봉길은 "이 중 어떤 것이 당신의 부친 묘에서 뽑아온 것인지 기억하시오?" 라고 물었고 농부는 그제서야 아버지의 묘를 영영 잊어버렸다며 통곡했다고 한다.
  4. [4] 이밖에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일화로는 길을 가다가 얼굴 한쪽이 흉하게 짓무른 여자아이를 보고 놀라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니, 어릴 때 눈에 다래끼가 난 것을 아이의 어머니가 어디서 선인장을 구해다 짓이겨서 눈에 바르면 다래끼가 낫는다는 말을 듣고 와서 그대로 했다가 그만 부작용만 나서 얼굴 한쪽이 완전히 짓무르고 말았다는 것이었고, 이에 충격을 받아 교육에 투신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도 있다.
  5. [5] 불교계에서는 이때 윤봉길을 김구에게 보낸 인물이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한용운과 함께 불교계 대표로 나섰던 백용성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점은 백용성의 제자였던 도문의 구술 말고는 입증할 만한 명확한 증거가 없다. #
  6. [6] 배경식 교수는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와 그 개정판인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을 통해 윤봉길 의사가 김구를 찾아간 것을 최대의 수확이라고 주장했다.
  7. [7] 첫 아이인 딸 안순은 어린 나이에 죽었다. 딸이 죽고나서 두 아들이 태어났다.
  8. [8] 찬밥대우의 이유는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이 강조되면 이승만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업적이 빛 바랠까봐 그랬다는 얘기가 있지만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9. [9] 독립 이후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 육군 중장까지 진급.
  10. [10] 노릴 : 노리고 겨냥하여 총을 쏘거나 치는 것
  11. [11] 도중에 터키의 도박 웹사이트로 넘어간듯 하다.
  12. [12] 허나 이 주장은 조금 무리가 있다고 보아야 맞을 것이다. 오마이뉴스 2015년 8월 5일 기사는 <월간중앙> 1976년 6월호에 실린 일제시대 창씨개명 기사를 인용하여 신격호 창업주의 본관인 영산 신씨와 뿌리가 같은 '영월 신(寧越 辛)'씨는 중광(重光; 시게미쓰), 신도(辛島; 가라시마)'로 창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辛(매울 신)의 고갑자가 重光이기도 하고, 신상묵(辛相默)의 창씨명도 시게미쓰 구니오(重光國雄)였으며, 독립유공자 신동하(辛東夏)의 창씨명 또한 重光을 사용한 重光東夏였기에 신격호가 아내의 성씨를 따랐다는 주장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13. [13] 배용순의 회고를 바탕으로 제작한 드라마이며 당시 생존해 있던 실제 배용순도 얼굴을 비춘다.
  14. [14] 이 드라마에서 중년 이후의 김구는 타짜의 너구리 형사로 유명한 조상건이, 윤봉길 의사는 차광수가 연기했다.
  15. [15] 나중에 순사가 이 도시락통을 보려고 몸싸움을 했다가 진짜 도시락인 걸 알고 난 뒤, 모리 순시가 자기 삼촌이라니까 겁에 질려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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