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11740 0%, #C6234A 20%, #C6234A 80%, #C11740)"


일본 내각총리대신 (메이지 시대)}}}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border:0px solid; margin:-11px; margin-top:-8px; margin-bottom:-6px"

제1대

제2대

제3대

제4대

이토 히로부미

구로다 기요타카

야마가타 아리토모

마쓰카타 마사요시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이토 히로부미

마쓰카타 마사요시

이토 히로부미

오쿠마 시게노부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가쓰라 다로

사이온지 긴모치

제13대

제14대

가쓰라 다로

사이온지 긴모치

← 에도 막부 역대 쇼군

→ 다이쇼 시대 일본 내각총리대신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bottom, #1C20B2 0%, #4449D3)"

이토 히로부미의 역임 직위}}}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bottom, #1C20B2 0%, #4449D3)"

일본 제국 제1·5·7·10대 내각총리대신
{{{#C3C965 [ruby(伊, ruby=い)][ruby(藤, ruby=とう)] [ruby(博, ruby=ひろ)][ruby(文, ruby=ぶみ)]
이토 히로부미[* 이름인 博文은 히로
미(ひろふみ)라고 읽기도 한다. 인명에 들어가는 문(文)은 '후미(ふみ)'라고 읽는 경우가 더 흔하며(대표적으로 인명은 이 사람이 해당.) 일본 위키피디아에는 '히로부미'와 '히로후미' 두 발음 모두 기재되어 있다. 물론 일본에서도 '히로부미'로 더 많이 알려져 있고 일본 교육 과정에서도 '이토 히로부미'라고 가르치는데, 일본 사람들(특히 학생들)도 이 사람 이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헷갈려하는 경우(세 링크 모두 "伊藤博文"은 '이토 히로부미'라고 읽나요? '이토 히로후미'라고 읽나요?"라는 내용의 질문이다)도 적지 않은 듯하다. 이 항목도 '이토 히로후미'라고 검색해도 들어올 수 있다.]}}}}}}

출생

1841년 10월 16일

에도 막부 조슈 번 쿠마게군 쓰카리초
(現 일본국 야마구치현 히카리시)

사망

1909년 10월 26일 (향년 68세, 총 24,847일)

청나라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하얼빈역
(現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국적

에도 막부 일본 제국

주요 직위

일본 제국의 초대 내각총리대신

1885년 12월 22일 ~ 1888년 4월 30일

일본 제국의 초대 추밀원 의장

1888년 4월 30일 ~ 1889년 10월 30일

일본 제국의 제5대 내각총리대신

1892년 8월 8일 ~ 1896년 8월 30일

일본 제국의 제7대 내각총리대신

1898년 1월 12일 ~ 1898년 6월 30일

일본 제국의 제10대 내각총리대신

1900년 10월 19일 ~ 1901년 5월 10일

한국통감부 초대 통감

1906년 3월 2일 ~ 1909년 6월 14일

서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11px;margin-top:-5px;margin-bottom:-5px"

부모

부친 이토 쥬조, 모친 이토 코토네

배우자

선처 이토 스미코, 후처 이토 우메코

자녀

장녀 이토 사다코(요절)
차녀 스에마츠 세이코 - 사위 스에마츠 켄초
삼녀 니시 아사코 - 사위 니시 겐시로
사녀 오타케 사와코 - 사위 오타케 타케
양자 이토 히로쿠니
서장자 이토 분키치
서차남 이토 신이치

학력

쇼카손주쿠

종교

유교신토

정당

입헌 정우회

}}}}}}

1. 개요
2. 생애
3. 처참한 말로
3.1. 1차 시도
3.2. 2차 시도
3.3. 장례
4.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합병을 반대하는 인물이었다?
4.1. 그에 대한 반론
4.2. 그 외 암살에 대한 논란
5. 인격
6. 평가 - 전형적인 19세기 제국주의 정치인
7. 결론: 제국주의자
8. 기타
9. 주요 경력

1. 개요

일본의 초대 및 5, 7, 10대 내각총리대신이자, 초대 한국 통감.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인물이자, 조선의 일제방국화를 추진했으나 일제강제병탄은 반대한 인물이다. 도합 7년 6개월(2,720일)을 지냈는데, 1885년 만 44세 2개월의 역대 최연소 총리로 취임해 마지막 총리를 지낸 1901년에는 만 60세에 조금 모자란(만 59세 7개월) 나이였다.

야마구치현 쿠마게군(現 히카리시) 출생.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와 더불어 "조슈 3존"으로 불리는 인물. 한국 한자음으로는 '이등박문'이라 읽으며 한국의 어르신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풍신수길이라 부르는 것처럼 이등박문으로 더 많이 부르는 편이다. 이토 암살 후 이토를 기리기 위해서 서울 남산에 지어진 사찰도 히로부미 절, 즉 박문사(博文寺)이다.[1] 참고로 박문초등학교, 박문중학교, 박문여자고등학교나 출판사 박문각은 이 사람과 무관하며, 한자 이름이 우연히 겹친 것에 불과하다. 이는 박사나 박학다식에 나오는 것처럼 학문에 힘쓴다는 뜻.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식민지 국가에 만행을 일삼았던 인물들인 데라우치 마사타케, 미나미 지로, 도조 히데키, 이시이 시로, 기무라 헤이타로, 고이소 구니아키는 아는 사람만 아는 정도지만[2], 이토 히로부미는 대중적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아무래도 초대 총리이기도 하고 몇 안 되는 독립운동가의 거물 암살 성공 사례이기 때문인 듯하다.[3] 때문에 한국인에게 '구한말 침략의 원흉' 이라 물으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 그러나 실제로 이토 히로부미는 처음에는 일본의 조선 강제 합병은 반대했다. 합병이 수지타산이 안 맞다고 여겼기 때문. 하지만 이 역시 한일병합을 급하게 추진하는 것을 반대한 것일 뿐, 병합 생각이 아예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4] 이토는 일본에 대한 조선인들의 호감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급하게 병합을 추진할 경우 조선인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힐 것을 염려했다. 물론 애초에 당시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이미 조선 강제 합병이 날치기 결정된 상황인지라, 그가 살아있든 없든 그가 합병을 반대하든 찬성하든 그 시대에 한일합방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토 씨(氏)는 일본에서 인수로 따지면 5위 ~ 6위나 될 정도이다. 대한민국과 달리 일본은 동성(同姓)이 별로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 흔한 성씨라는 것. 그런데 이 사람 때문에 박힌 '이토' 씨에 대한 좋지 않은 이미지 때문에 이토 성을 가진 수많은 일본인들이 여럿 봉변당했다. 사실 일본인은 성씨에 대한 관념이 상당히 흐릿한 편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성을 바꾸는 것이 아주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금지되어 있지만 (양육자의 재혼, 부모 중 다른 한 명의 성으로 바꾸는 경우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결혼만 해도 성이 바뀐다. 심지어 데릴사위가 되면서 성을 처가 쪽으로 바꾸기도 하고(대표적인 사례가 김전일). 또한 전과자가 성씨까지 개명해서 살아가는 일 또한 흔하다. 그러니 성씨에 대한 관념이 뚜렷할 수가 없다. 일본의 다른 역사적 유명인들은 명문 사무라이나 귀족 출신으로 성씨가 워낙 독특하기에 성이 같은 사람이면 후손일 확률이 그나마 높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평민 출신이기 때문에 흔하디 흔한 평민 성씨라서 일반인의 이름과 별로 분간이 안 되는 것이다. 오히려 덴노의 전쟁 책임에 대해 주장했던 양심적 정치인인 이토 잇쵸 전 나가사키 시장 같은 인물도 있다.

일본에서는 초대 일본 총리로서 메이지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고 현 일본의회 제도와 양원제를 확립한 위인으로 분류된다. 일본 국회 건물 정문 쪽 메인 홀에는 방의 4귀퉁이 중 한 귀퉁이에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이 서 있다. 심지어 패전 이후에도 1,000엔짜리 지폐의 주인공이었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교체되었다.

2. 생애

어릴 적 이름은 리스케(利助)였으나, 천하다 하여 도시스케(利助), 슌스케(春輔)를 거쳐 히로부미(博文)로 이름을 바꿨다.

원래 그의 아버지 하야시 주조(林十臓)는 소작농 출신이었지만, 추겐 미즈이 다케베에게 근면함을 인정받아 그의 양자가 되면서 추겐 신분을 얻는다. 추겐(中間)이란 최하급 무사 아시가루와 평민 사이의 세습제 신분으로 짧은 칼을 차는 것은 허용했지만, 상급 무사의 신변을 돌보고 잡일을 담당하는 평민과 다름없는 신분이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도 이 신분 출신이었다. 이윽고 미즈이 다케베가 이토 가의 양자가 되면서 아시가루가 되고, 두 부자도 하급 무사 아시가루 신분을 얻는다.

1857년, 16살 때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송하촌숙)을 찾아가 배웠다. 15살 때부터 초슈번의 지금의 말단 공무원(9급 공무원)으로 에도만 경비직으로 파견갔는데, 윗 상관인 쿠루하라 료조가 요시다 쇼인의 송하촌숙을 추천하면서 거기 가보라고 해서 찾아갔다. 신분이 낮아서 교실 밖에서 서서 수업을 들었다고도 한다. 쿠루하라 료죠, 카츠라 코고로의 종자(하인) 일을 하면서 공부했다.

쇼인의 제자들은 후에 조슈 번 유신지사로 메이지 유신을 위해 크게 활동하고 근대 일본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기도 다카요시이노우에 가오루, 노기 마레스케를 제외한 대부분의 조슈계 인사들은 대부분 쇼인의 제자. 가장 대표적인 예만 들어봐도 쇼인 문하의 천재로 불렸던 타카스기 신사쿠, 부정 선거의 달인 시나가와 야지로,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있다.

이토 히로부미의 출세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요시다 쇼인의 마츠시타촌숙 선배들의 행동 대장 똘마니 노릇을 하던 히로부미. 선배 잘 만난 덕분에 영국 유학도 경험하고 능력있는 선배들이 메이지 유신이라는 밥상 차릴 때, 부엌에서 밥이나 짓던 쫄따구 히로부미. 선배들이 밀어주고 당겨줘서 고위직을 맡고, 선배들이 차례차례 죽으면서 어느새 자신이 일본 초대 총리로 최고 우두머리가 된다. 물론 개인적인 능력도 있었고 국제 정세를 읽는 감각이 있었지만, 한마디로 선배 잘 만나서 대성공한 케이스.

이토는 쇼인에게는 인정받은 일이 없고[5], 오히려 타카스기 신사쿠이노우에 가오루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이노우에 가오루와는 나이 차이도 있고, 계급 차이도 있었지만 절친한 평생의 동지였다.

1859년 스승이었던 요시다 쇼인이 이이 나오스케의 안세이의 대옥사로 죽은 후, 존황양이 도쿠가와 에도 막부 타도 운동에 불타올랐다. 19살 때인 1862년 다카스키 신사쿠, 이노우에 가오루 일당이 주도해서, 에도의 시나가와에서 건설 중이던 영국 공사관 방화 사건에서 불을 붙이는 역할을 한 적도 있고, 본인은 부인했지만 천황의 퇴임을 주장한 국학자를 암살하기도 했다(1863년 2월).

조슈 파이브 (오른쪽 맨 뒤가 이토)

22살 때는 상급 무사 이노우에 가오루(당시 28살, 사진의 하단의 좌쪽의 인물)의 제안으로 '조슈 파이브[6]'라고 불리우는 친분이 있었던 4명와 함께 조슈 번의 거액의 공금을 횡령[7] 해서 그 돈으로 영국으로 밀항(1863년 5월 12일), 영국에서 해군 기술을 배우려고 유학하려고 했지만 이들이 요코하마 항구를 출발한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초슈 번과 영국사이에 전쟁(시모노세키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에서 이 소식을 알게되고 영국 생활 6개월 만에 귀국을 결심, 전쟁을 중재하려고 노력했다.

사상적으론 영국으로 가는 길에 들린 상하이에서 아편전쟁 이후의 중국의 실태를 실감하고, 영국에서 생활을 하면서 선진 문명을 접하면서 존황양이에서 양이를 버리고 개화파로 돌아선다.

귀국한 뒤에는 조슈 번에서 일하며 조슈번이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과 벌인 시모노세키 전쟁의 영국과의 중재 회의에 통역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영어 실력은 서툴러서 실제 통역은 영국 측 어네스트 사토가 다했다.

막부(幕府)와 조슈번(長州藩) 사이에 내전(幕長戰爭 '제1차 조슈 정벌')이 터진 뒤 막부와의 타협을 생각하던 보수파를 몰아내는 데 참여,(타카스기 신사쿠의 시모노세키 거병) 이후 조슈번을 주도하게 된 소장파의 일원이 된다. 타카스기의 거병에 맨 먼저 참여했고 이것은 일생 자랑거리가 된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맨 나중에야 거병에 참여했는데, 이토는 이 일을 들먹이면서 평생 야마가타의 기를 죽였다. 그때 너는 뭐하고 있었어?

도사, 히젠(사가), 사쓰마 사이에 벌어진 정한 논쟁 등의 여러 정쟁에서 조슈와 사쓰마 파벌을 중재하면서 사쓰마 파벌의 오쿠보 도시미치의 신임을 얻어 사실상 후계자로 낙점되었으며, 오쿠보, 기도 등의 거물들이 잇따라 숨지면서 생긴 정권의 공백을 메우면서 수완을 발휘하고 1881년 오쿠마 시게노부와의 정쟁 직후 메이지 정권의 명실상부한 최고 실권자가 되었다.

1885년에는 내각제 시행과 함께 초대 총리 대신이 되었고, 뒤이어 추밀원 의장, 의회 창설과 함께 귀족원 의장에 취임하는 등 정상가도를 달렸다. 평민이나 다름 없던 일개 하급 무사가 멀쩡한 무사들도 평민이 되던 시절에 되려 공작이 되는 벼락 출세를 한 것이다. 그런데 메이지 유신 극초반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노선은 비주류 노선에 가까웠다는 견해가 있다. 아무래도 사쓰마 파벌의 영향력이 워낙 강한 초기에는, 정치인 - 관료 진영의 (비교적) 온건파 조슈 파벌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노선은 상대적으로 비주류였던 듯하다.

3. 처참한 말로

1909년 러시아와의 회담이 예정돼있던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의 총탄 세발을 맞고 처단되어 실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3.1. 1차 시도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조약을 하고 얼마 후 수원에 사냥을 하러 갔다. 이때 과천[8]원태우라는 농부가 있었다. 원태우는 조국을 도적질한 이토 히로부미와 그가 체결한 을사 조약에 크게 분노하던 상태였다.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가 수원으로 놀러 갔다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아내자 길목에 매복해 있다가 열차 레일에 바위를 걸쳐서 열차를 전복시키려 했다.

원태우는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이토가 탄 열차가 지나갈 철로에 바위를 놓았다. 그러나 거사를 일으키기 직전 한 동료가 겁을 먹고 몰래 바위를 치우는 바람에 계획이 낭패하고 말았다. 원태우는 포기하지 않고 돌을 집어서 이토를 향해 힘껏 던졌고, 돌은 서리재 고개에서 달리는 기차로 날아가 유리창을 깨고 거짓말처럼 이토의 머리에 정확하게 명중되었다. 이때 깨진 유리 조각도 같이 이토의 얼굴에 무려 8조각이나 박혔다. 이토는 뇌진탕을 일으켰으나 동승하고 있던 주치의가 응급 조치를 해서 살아났다. 멀리서 던져 맞힌 사실을 보면 돌 던지는 솜씨가 여간 뛰어난 것이 아닌데, 조선 시대의 평민들은 석전이라는 돌 던지기 싸움 놀이를 심심찮게 했으니 거기서 비롯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달리는 열차를 향해 돌을 던진 것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위키러들도 있었으나, 이런 의문은 다음과 같은 당시 환경을 보면 이해가 어느 정도 가능하다. 1905년 당시 기차 속도는 시속 20km ~ 30km로 속도가 느렸는데 운전 면허 시험장에서 볼 수 있는 속도로 열차가 달렸다고 보면 된다. 게다가 돌팔매질을 한 장소는 당시 서릿재 고개라 부르던 곳으로 경사가 급하여 속도를 줄이며 넘어가야 할 정도였는지라 안 그래도 느려터진 열차가 서행을 해야만 하였다는 곳어서 맞추기가 용이했다. 또한 서리재 고개가 언덕을 깎아 기찻길을 놓았기에 비탈진 위쪽에서 아래쪽을 느리게 지나가는 기차 내부를 보기가 쉬운 점도 한몫 했다. 그 느린 속도로 달리는 열차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앉은 의자를 향해 돌을 던졌고, 유리창이 깨지면서 부상을 입었다. 이러한 과정상 의문점에 대해서는 원태우 항목 참조.

원태우는 바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온 몸을 상처로 도배하다시피 하여 불구가 되었다. 이때 원태우는 너무 모질게 고문을 당하는 바람에 정말로 성불구자까지 되어서 후사를 남길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이후 일본 경찰들에게 시종일관 감시를 당하며 힘겹게 살다, 정말 다행히도 광복을 맞이하고 1950년 7월 22일 시흥군 안양읍 비산리 수푸루지(현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국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돌아가셨는지, 벌어진 뒤에 돌아가셨는지는 불명. 보셨더라면 분명히 통탄하셨을 것이다. 비록 암살이 미수에 그쳐 안중근에 비해 인지도는 떨어지나 한 독립 운동가로서 충분히 훌륭한 인물이라 할 것이다.

안양역 1번 출구에 가면 원태우 의사의 모습을 새긴 동판이 있다. 그런데 그 동판이 역으로 통하는 에스컬레이터 한가운데 있는 데다가 제법 멀리 있어서 동판에 새겨진 글귀 읽기도 쉽지 않고 이름을 읽기도 어렵다. 안양 사는 사람 대개가 그냥 장식인지 누군가를 기리기 위한 동판인지 전혀 모른다. 게다가 농부인데 동판엔 갓을 쓴 선비로 표현되었다. 정말 제대로 표현한다면 23살의 농부로서 이토가 탄 기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모습을 표현해야 할 것이다. 고증오류탁상행정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3.2. 2차 시도

안중근하얼빈역에 이토 히로부미가 나타난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과 조를 나누어 우덕순은 채가구역을,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매복했다. 근데 기차는 채가구역을 그냥 통과하고 하얼빈역에 정차했다.

당시 이토는 이때 일행들과 함께 열차에서 내렸기에 누가 이토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고한다. 오늘날과 같이 사진이 흔치 않았던데다 더욱이 원태우의 암살 미수 사건 때문에 그 후 이토는 자신의 사진이 시중에 유포되는 것을 극히 금지했다. 결국 안중근은 저격 대상인 이토가 코 옆에 이 있다는 식으로 설명만 들어 알고 있었을 뿐 얼굴을 모르는 상태에서 하얼빈역으로 가게 되었다. 또한 플랫폼에 이토가 하차했을 땐 워낙 많은 수행원들이 함께하여 도저히 누가 이토인지 분간할수 없었다. 이에 안중근은 체념했으나 이토의 하얼빈 방문을 환영하는 현지 일본인 환영객들 중 누군가가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를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 주는 덕분에 안중근이 그 자의 얼굴을 보고 점 등을 확인하여 본인임을 알아보고 저격을 할 수 있었던 것. 정말 천재일우의 기회였다.[9]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안중근이 이토를 FN M1900[10]으로 3발 저격하고 그 주위의 일본 측 인물에게도 4발 저격했다. 1탄은 이토의 오른팔 윗부분을 관통하고 흉부에 박혔고, 2탄은 이토의 오른쪽 팔꿈치를 관통해 흉복부에 박혔으며, 3탄은 갈비뼈 아래로 들어가 허리에 박혔다. 3발 다 급소를 맞혔다고 한다.[11] 그리고 남은 총알로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의 팔꿈치에 1발, 이토의 수행 비서 모리의 복부에 1발, 만주 철도 이사 다나카의 왼쪽 무릎에 1발, 만주 철도 이사 나카무라의 오른쪽 장딴지에 1발을 맞혔다. (네이버 캐스트 '안중근'과 원재훈의 '안중근, 하얼빈의 11일' 참조.) 하지만 민간인이 다칠 것을 우려하여 머뭇거리다가 체포당했다. 안중근은 체포당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Корея Ура! Корея Ура(!까레야 우라! 까레야 우라!)" [12]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에서 안중근의 저격을 받고 열차 내로 옮겨졌다. 이토는 이때까지는 살아있었으며 동반했던 비서 모리의 안부를 묻고 눈을 감았다.

그 외의 내용은 이 기사 참조.

3.3. 장례

사후 그의 유해는 군함 아카쓰시마에 운구되어 도쿄에 도착해 아카사카 관저에 안치됐고, 일본 정부는 유해 도착 전부터 장례 준비를 진행한 후 국장으로 정했다. 국장 당시 유가족을 비롯해 야마가타 아리토모, 도쿠가와 요시노부, 이노우에 가오루 등 국내 요인들과 허버트 키치너 장군 등 외국 사절들이 참석했으며, 대한제국 측도 조중응과 민병석 궁내부대신을 보냈다.

11월 4일, 히비야 공원에서 노제를 치르고 시나가와구 니시오이에 안장됐다.

4.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합병을 반대하는 인물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을 근대화하는 것에는 동의했으나 합방하는 것에는 반대였다. 즉 정한론을 반대했던 인물이었다. 그 이유는 이토는 조선을 만주국처럼 독립한 채로 괴뢰국으로 놔두길 원했다. 일본은 당시 러시아 남하를 막기 위한 일환으로 영국과 네덜란드의 지원을 받고 메이지 유신에 성공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나 연해주와 조선이 가까웠기 때문에 조선을 합병하면 일본의 병참기지를 많이 만들고 그 기지를 유지하기 위한 병원이나 철도 등 여러 시설들을 많이 지어야 했다. 또한 일본은 당시 공장에서 만든 물건을 팔아 일본 내의 거리나 시가지의 전통 목조 주택을 허물고 빌딩을 세우거나 현대화된 건물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었으므로 예산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조선은 당시 농업국가였고 제대로 된 화폐 경제가 전무한(백성은 노비가 대부분이어서 임금을 받지 않고 양반집 밑에서 일만 했다. 소작농들은 농사를 짓고 관아에 바치거나 주로 물물교환을 교환을 했다) 곳이어서 이런 상품을 팔 수가 없었다. 따라서 수지타산이 안 맞다 여기고 이토는 조선 합병을 반대했다. 그러다가 안중근에 의해 살해되자 일본 대신들과 이토의 제자였던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조선 합병을 반대한 사람을 조선인이 죽였으니 매우 화가 나게 된다. 데라우치는 이토 히로부미를 스승으로 모셨으므로 스승의 뜻에 따라 정한론을 반대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스승이 죽자 매우 반조선 감정이 심해지고 조선을 강경 통치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이 때부터 일본은 합방쪽으로 노선이 확 기울고 조선에 대한 민족 말살 정치가 시작된다.(Itō probably meant that An had killed the one Japanese leader who had a moderating and sympathetic approach for Japan’s Korea policy. Indeed, Itō’s assassination was a factor contributing to Japan’s annexation of Korea in 1910.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Ito-Hirobumi/Assassination)

다음은 월간조선 1984년 10월호에 실린 내용으로 조갑제가 이토 히로부미의 손자 이또 도시오씨를 만나 인터뷰한 내용이다.

4.1. 그에 대한 반론

위와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한일합병을 반대했던 이토 히로부미를 안중근 의사가 암살하였기에 한일합병이 가속화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 "역사의 아이러니" 란 논지로 서술된바 있다. 하지만 저자인 이원복 교수의 역사관에 대한 비난이 이어지자 재판본에서는 "한일 합방을 시급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을 뿐 언젠가는 반드시 한반도를 일제의 아래에 넣으리라 생각했다."라는 내용으로 수정되었다.

실제로 이토 히로부미는 급진적인 한일합병을 반대했던 것이지, '한일합병' 자체를 반대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당시의 정한주의자들보다 무서운 인물이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토는 한국의 괴뢰국 삼고 근대화를 시키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호감을 얻어 일본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거부감을 희석해가는 식의 단계적 합병을 추진하려고 했다. 이는 급진적인 합병은 반드시 문제를 야기할 거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일례로 이토는 스스로 한복을 입기도 하고 순종의 전국 순행에 동참하는 등 한일 관계를 다방면으로 한국인들을 납득시키려 노력했다.[13]

만에 하나 이토 히로부미가 죽지 않고 그의 뜻대로 조선이 괴뢰화되었다면 지금의 대한 독립은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토의 생각대로 온건적인 합병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왔다면 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 대한 반감은 실제 역사에 비할 바가 안 되었을 수 있으며, 오히려 일본의 개화와 문화에 감화된 당시 조선의 젊은이들이 한일 합방을 지지하거나 괴뢰국의 백성으로서 천황에게 충성하는 데에 별다른 거부감을 지니지 않았을 가능성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이는 이토가 조선을 내적으로부터 일본에 감화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2차 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하였다면 당시 괴뢰국이었던 조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독립이 이뤄졌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정한론을 주장하던 일본 제국의 급진적인 군부 세력과 정치적으로 대립되는 위치에 있었다. 이토의 사망이 일본 제국의 군국주의를 가속시켰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애초에 일본은 미국을 침공하지 않거나, 연합군의 편을 들었을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다. 실제로 이토가 사망한 직후, 견제 정치를 상실하면서 정한론이 대두되고 급진적인 한일합병과 동시에 일본의 군국화가 겉잡을 수 없이 이루어졌다. [14]

때문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였기 때문에 한일합병이 가속화되었다며, 마치 한국인이 한국 편에 섰던 온건한 일본 정치인을 죽였기에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결과적으로는 조선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왔다는 주장은 굉장히 편협하고 몰이해한 시각이다. 당시 조선인들 입장에서 가장 경계해야할 무서운 정치인은 바로 조선을 뿌리부터 감화시키려 했던 이토 히로부미였다. 강경한 식민정책보다 온건한 식민정책이 식민통치에 무서울 정도로 효과적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살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 합병을 반대했던 것이 아니다. 급진적인 합병을 반대했던 것 뿐이다. 그리고 이는 순전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고 급진적인 합병은 여러 부작용밖에 낳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지 결코 조선을 위했던 것은 아니다.

또한 조선 병합 부분만 놓고 따지면 별개로 합방 자체는 이토와는 관계 없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사실상 결정되었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미국은 20세기 초부터 일본과 장기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고자 했고, 어중간한 선전포고로 진주만 공습을 일으킨 일제조차 한번 제대로 혼내준 뒤 21세기까지 우호적 관계를 구축하고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4.2. 그 외 암살에 대한 논란

  • 또한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 통감이란 직책은 그의 정치 행보에선 동양의 세력 구도를 결정짓는 요직이었고, 사망 시점에서 이토는 통감 자리도 내놓고 추밀원 의장이 된 상태였다는 것에 대해서도 다른 시각도 있다. 사실상 한일 합방을 확정짓기 위한 일들은 대부분 이토가 했고, 메이지 덴노가 그리 반대했는데도 끝내 그를 설득시켜 황태자 요시히토의 방한을 추진한 것도 한국 통감을 맡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였다는 주장이다. 이후 실제로 통감 자리를 내놓은 후에 다시 추밀원 의장 직을 맡기도 했다. 이런 것을 보면 그가 정치권에서 아예 밀려난 게 아니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즉 오히려 이토가 한국의 뒷처리에 집중하기 위해 잠시 국내 요직을 일부러 떠나있었다는 것이다.
  • 이에 더해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것이 아니라, 독립군으로서 일본과 교전하였으며 그 결과 이토 히로부미가 전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주장의 연장선상으로 안중근 또한 일본 측에 "본인은 독립군 중장의 신분이니 전쟁 포로로 취급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이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제3국의 입장에서도 이를 인정할 수는 없었는데 이는 당시 상황에 근거한다. 안중근은 당시 독립군복 등 자신의 군적, 즉 교전권자임을 상징하는 복장이 아닌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법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상식적으로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공격하는 행위를 국가간의 교전으로 인정하면, 민간인을 위장한 적군으로 오해하여 민간인을 사살하는 등 여러 민간인 피해 위험성을 증가시키므로 이를 인정하지 않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만약 이 주장이 맞으려면 다른 역사적 예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는데 민간인 옷을 입고 시리아나 이라크에서 테러를 저지르는 테러리스트들을 정식 군대로 인정해 줄 수 밖에 없다. 또한 독립군이라고 할지라도 조선을 강제통치하자던 일본 내각들에 반해 근대화만 찬성할 뿐 조선 합방을 반대한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으니 안중근이 독립군의 입장을 대변한다면 독립군은 조선 합방을 찬성한다는 이상한 결과가 나온다. 결국 진퇴양난이다.

오히려 일제가 국제법을 위반한 부분은 암살 이후 안중근의 처우에 대해서가 아닌, 재판에서 사형에 이르기까지의 그 절차에 있다. 일제는 행정부의 명령으로 안중근을 사형하기로 결정한 뒤 이에 끼워 맞추는 재판을 진행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이 시기는 서구 열강 사이에서도 국제법 위반이 빈번하게 벌어지는 상황이었고, 삼권 분립이 확립되지 않은 국가도 상당수 있었음을 감안할 부분은 있다.
  • 또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것이 아니란 주장 중에 러시아 군이 위에서 암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서는 러시아와 일본이 둘 다 조선, 즉 러시아에서는 태평양 연안의 항구 등으로 이용할 수 있는 조선을 탐냈고, 일본에서는 섬에서 대륙으로 나가는 하나의 통로로써의 조선을 탐냈다. 여기서 일본이 조선을 독점하려고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으며, 러일전쟁의 결과는 러시아의 패배로 막을 내린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의 피해는 비등비등하였고 위 문서의 내용과 같이 러시아에게서 배상을 얻어내려는데, "협상하기 싫느냐"라는 압박과 조선의 독점권을 지켜야 하는 것 중 조선에 대한 독점권을 선택해 적은 보상으로 휴전 협상을 마무리하게 된다. 이 중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상과 대화하기 위해 러시아의 블라디 보스토크로 가 대화를 하게 되는데,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고 돌아가는 중 안중근에게 총살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단의 첫 줄과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기다리고 있던 역 건물 위의 러시아 저격수가 총을 쏴 죽였다고 하며, 이토 히로부미의 총상은 위에서 아래로 박혀있었다고 주장한다.
  • 일본 군부에서 언젠가는 처리해야 할 대상이었으며, 그에 따라 일본 군부의 훼방으로 비참한 말로를 보낼 운명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안중근이 암살한 덕분에 영웅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알다시피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내에서 근대화를 이끈 주역이며, 여러번 총리를 맡은 거물급 인사인데, 조선에 대해서는 온건파#였던 인물이며, 조급히 한일병합을 추진하려고 하지 않았었다. 물론 한일병합을 적절한 시기에 하려는 생각이 있었다는 거지 한일병합 생각이 아예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와 반대로 일본 군부 내에서는 이토 히로부미 등 온건파에 비해 매우 급진적인 정한론이 우세였고, 대륙침략의 야욕을 보이며 일본내각을 장악하여 추진력을 얻고자 했으나, 이토가 천천히 하자며 가로막고 있으니 일본 군부가 직접 암살사건을 꾸미거나 타살을 방치하도록 고의로 경비를 허술하게 했다는 것인데, 실제로 당시 하얼빈역에는 일본군보다 러시아군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당시 러일관계를 생각하면 객관적으로도 경비가 허술했다는 것은 틀림없다.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거물급 인물이었음을 감안하면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오히려 일본군이 더더욱 적극적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안전을 지켜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5. 인격

"남자의 배꼽 밑에는 인격이 없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는데, 여성 편력으로 덴노에게 야단을 맞았다는 야사까지 있을 정도니 그야말로 본인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관련 일화 중 어린애한테 손댔다는 이야기도 있고, 가면무도회 등에서 화려한 스텝으로 활약해 뭇 귀족 부인들과 바람을 폈다는 일화도 있는데 그 중의 한 명이 이와쿠라 토모미의 딸이었다. 다행인지 야마가타 아리토모와는 달리 돈엔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럭저럭 문제 없이 넘어갔다고 한다.[15]

한편 친일 반역자 배정자를 수양딸로 거두었다는 둥, 애첩으로 뒀다는 둥의 소문이 유독 한국에서만 나돌고 있지만 사료적 근거는 전무하다. 이토 히로부미의 화려한 여성 편력은 워낙 유명한지라 그가 사망했을 때에도 여자 문제를 풍자하는 만화가 일본 신문에 실렸을 정도였다. 그래서 생전 사귀었던 여성들의 신상은 일본 언론이나 사학자 등에 의해 모두 밝혀졌지만 그 어디에도 배정자[16]의 이름은 없다. 실제로 배정자와 이토 히로부미 간의 비밀스런 관계나 출세 배경에 관한 일화의 출처는 모두 배정자 본인이거나 악랄한 그녀의 행적을 비난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간의 소문이 전부다.

또한, 최승희와 함께 1920년대 - 1930년대를 풍미하였던 무용가 배구자는 배정자의 조카인데 사실은 이토 히로부미와 배정자 사이에서 태어난 숨겨진 사생아라는 소문이 꾸준히 돌았다. 배구자의 동생 배한라는 "언니가 이토 히로부미와 고모 배정자 사이의 딸이었던 까닭에."라고 직접 발언했었던 적도 있다. 그러나 이 배구자 또한 2003년까지 살면서 98세의 나이로 장수를 했는데 말년에는 자신이 메이지 천왕의 10번째 딸이고, 할머니는 민자영 이고, 자신의 어머니는 조선의 공주라는 헛소리를 하고 다녔다.메이지 덴노명성황후의 아들이다?? 두 사람이 모두 1851년생인데?? 자식을 0살에 낳은건가??

女ずき者の最後

위에서 말한 피탄 위치와 비슷하고 그림자는 ''의 형상을 하고 있다.

살아생전 醉臥美人膝 醒掌天下權(술에 취해 미인의 무릎을 베고 눕고, 깨어서는 천하의 권력을 잡는다)라는 한시를 남긴적도 있다.

이토의 여색 밝힘은 해당 기사를 참조할것.

6. 평가 - 전형적인 19세기 제국주의 정치인

일본 내에서는 온건파 노릇을 했던 탓에, 안중근 의사의 의거로 그가 죽은 덕분에 일본의 급진적인 군국주의가 심화되고 제2차 세계대전을 불러와 패망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고 한다. 물론 이 사람이 일본에서"만" 온건파였던 건 사실이다. 초대 총리로 입헌 군주제의 확립 등 일본의 근대화에서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같은 골수 천황주의 계열 보수파들과 대립하면서 크게 기여한 것도 사실이며, 가급적이면 전쟁을 억제하려는 평화주의자적인 행보도 사실이다.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 모두 개전에 반대했다. 이 점이 일본에서는 위인으로 취급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일본의 입장에선 일본의 제국주의를 더디게 만든 걸림돌 같은 인물이었던 셈이지만 말이다.

안중근 의사에게 죽었을 때 실제로 기뻐한 것은 이토의 정치적인 적들이었던 보수파 정치인들인 것도 사실이라고. 마리우스 젠슨 같은 일본 근대사 학자는 이토를 정치적 수완과 미래에의 비전을 동시에 갖춘, 메이지 원로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했다. 반면 일본 제국의 폭주에 명확한 책임이 있는 군국주의자 야마가타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 다른 원로들은 뭐 총리 대신직을 감당할 정치적 역량이 부족한 인사들이고, 사이온지 긴모치는 다음 세대에 가깝다.

이토 히로부미는 경비가 많이 드는 합병보다도 한국을 완충지대로 두고, 강력한 일본의 영향력안에 드는 "한국의 속국화"를 기획한 약간은 온건주의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 이미 가쓰라 다로 등 정부 요인들의 한국 병합이라는 결과를 승낙한 뒤, 적절한 시기를 가늠하고 있었다.[17]

이에 대한 이유는 여러 의견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이토 히로부미라는 인물의 출신 성분에 있다는 견해가 보통이다. 일단 정치적 성장 배경이 진보적 유신지사들이 주축이었던 조슈파였고, 그곳에서 정치적인 기반을 다졌기에 온건파의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초대 총리까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한론 정변에서 정한파를 몰아내고 승리한 주역으로서 일본 정부의 거두 오쿠보 도시미치의 신임을 얻어 다음 후계자로 낙점되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다른 말로 당시 이토의 제국주의 정책이 온건하게 보일 정도로 당시 일본에서 과격한 주장들이 많았다.

그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정책을 바탕으로 그의 정책 기조를 수립했다. 우생학, 근대 만능주의 사고에 의거해 침략과 영토 확장을 정당화하던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정책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는 일본을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해 근대 제국주의를 그대로 수용한 전형적인 19세기 정치가였다.

한편 이토 히로부미가 친한파이며, 한국 근대 발전에 기여했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주장은 진보 중에서는 김기협 같은 작가들도 고종을 까다가 이런 주장에 동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토는 식민지 주민들의 감정을 고려해 완전 병합하기보다는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어 기생충처럼 빨아먹으려고 한, 일본 제국주의에 충실했던 인물이다. 이 보호국이란 이집트에서의 영국과 베트남에서의 프랑스, 서부에서의 미국처럼 천천히 잠식하다가 나라까지 빼앗긴 사례처럼 지역 또는 국권을 강탈하는 포석이 되기 때문이다.

한일병합을 묵인하고 을사늑약, 고종 폐위를 통해 한국이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노예'를 다루듯이 '채찍과 당근'처럼 채찍을 '덜' 때리면서 이를 통해 한국 사람들을 감화시키려 한 인물이다. 당연히 이런 행보를 일반 백성들이 알리 없었고 이토의 겉모습에 속아넘어가 친일파들이 대량으로 늘어나게 된다.

다시 말해 이토는 한국인들의 감정을 고려해 완전 병합하기보다는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던 일본의 제국주의에 충실했던 인물이다. 천천히 잠식하다가 나라까지 빼앗는 격이다.

대외적(백성)으로는 감화 정책을 펼쳤지만 내부적(한국)으로는 을사 늑약을 강요하고 고종을 폐위시킨 인간으로 한국인들의 감정을 고려해 완전 병합하기보다는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려고 했으며 이를 실행에 옮기려 했던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의 국가 정체성을 잃게 만들어 저항의 의지를 흐리는 식으로 식민지화를 추진했다. 만약 이토가 계속 살아있었다면 과격한 군부가 감화 정책을 통해 한국을 부드럽게 스며들게 해 한국의 독립의 의지가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천천히 잠식하다가 나라까지 빼앗는 19세기의 영국이 연상될 정도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1909년 대한 제국 주재 프랑스 영사는 본국에 보내는 보고서에 "이토는 보호령을 경영하는 영국의 방식보단 식민지로 편입시키는 우리 프랑스의 방식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다고 기록했다.[18]

그런데 만약 그 이야기대로 이토의 생각대로 온건적인 운영이 이뤄지고, 강제 징용, 위안부 문제 등의 수탈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우리 나라에 좋을 것이 없다는 사실은 변할 게 없다. 단기적으로 볼 때는 한국에 미치는 피해를 줄일 수는 있겠지만서도 장기적으로 보면 한국 내의 반항을 줄이고 친일파의 득세를 통한 문화적인 종속을 꾀했기 때문에 독립군의 규모도 자연스레 줄어들고 그 의지도 사그라들었을 것이다. 안 그래도 지금까지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도 못한 한국인데 이토의 계획대로 독립에 대한 의지를 해이하게 만드는 것에 성공하게 된다면 직접적인 피해는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국민들이 독립에 대한 의지를 완전히 잃어 현재도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는 최악의 상황이 도래할 수 있는 등 문화적인 측면에서나 역사적인 측면에서는 현재보다 훨씬 더 큰 리스크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이토의 암살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위험한 변수들이 많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이토의 이후 계획이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과연 이토가 한국을 수탈하거나 한국인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을 것이라 단정하기도 힘들며, 이토의 뒤를 이어 한국 통감이 된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헌병 경찰 통치로 조선인들을 탄압하는 등 이토 사후로도 한국 수탈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더더욱 힘들다. 비록 온건파라고 해도 을미사변의 배후로 지목되는 만큼 잔혹한 행동을 해야 할 때는 할 수도 있을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며, 이토의 성향을 모아봤을 때 그가 살아있어서 꼭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설령 지속적인 온건적인 운영을 통해 한반도가 일본에 완전히 종속되었다고 해도 내선일체 정책이 일본인 다수에게 환영받지 못한 것과[19] 부라쿠민이나 아이누, 류큐인, 히키아게샤의 일본 내에서의 인식과 대우가 어떤지를 생각해 보면 현재까지도 한반도 출신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본토 출신 일본인 사이에서 은연중에 차별이 자행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멕시코, 페루스페인 치하에서 스페인어가 완전히 공용어로 자리잡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조차도 스페인 본토와의 갈등을 봉합하지 못하고 끝내 무력을 통해 스페인으로부터 대거 독립해버린 역사를 감안하면 한민족이 일본화된다고 해서 한민족과 야마토 민족의 갈등이 완전히 없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안중근 문서에서도 나와있지만 일본 내에서는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일본 위인들에게 바쳐지는 신사가 없을 정도다. 과거엔 한일 병합 이후 경성부 종로에 박문사라고 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신사가 건립되긴 했지만 8.15 광복 이후 파괴되었다. 그리고 현재 일본 본토에는 그를 기리는 신사는 없다고.[20] 대신 요시다 쇼인을 주제신으로 하는 쇼인 신사에서는 그의 제자들도 신으로 섬기는데 제자들 명단에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도 있다.

뒤에 나오듯이 독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 영국의 벤저민 디즈레일리,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처럼 근대화의 주역이기에 평가는 엇갈려도 대체로 위인 취급은 해준다.

7. 결론: 제국주의자

메이지 유신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점에서 일본 내의 역사적인 평가는 호의적이다. 물론 이토 한 명이 혼자서 일본을 근대화시킨 것은 아니나 그가 일본의 근대화 및 선진국으로의 급부상에 큰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평가가 엇갈리긴 해도 대체적으로 이토를 위인으로 대우한다. 다만 최근에 들어서 일본에서도 수많은 학자들에게 안중근이 재평가되는 일이 많아지고 이토의 행실 하나하나에도 문제가 많은 게 드러나자 안습 행보를 걷고 있다. 따라서 한국, 일본에서는 자신의 조국을 위해 이웃 나라를 희생시킨 제국주의자로 취급되어 공과를 평가받고 있다.

만약 그가 1905년 한국인에게 가장 증오스럽게 만든 을사 늑약과 고종 황제 강제 퇴위, 군대 해산 전에 이전으로만 한정되고 한국에 제국주의적 행위를 저지르지만 않았다면 오늘날에 그냥 한국 역사학계에선 사카모토 료마이와쿠라 토모미, 오쿠보 도시미치 정도의 일본을 근대화시킨 중립적인 인물로 취급을 받았을지 모른다.

8. 기타

1963년부터 1984년도까지 일본 1000엔권 지폐 도안 인물로 선정됐다. 1000엔권 인물 도안은 1984년 이후 한국 및 중국과 경제 교류가 늘어나면서 이 두 나라를 의식해 나츠메 소세키로 변경하였다. 그 뒤 나츠메 소세키가 그려진 지폐를 2004년까지 발행하다가, 현재는 노구치 히데요가 그려진 지폐를 사용한다.[21]

구한말 배경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 사람이 등장할 때는 배우 윤주상[22]이 많이 연기하는 편인데, 실제로 많이 닮았다. 2018년작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김인우가 연기했는데 상당히 분위기와 외모를 잘 살려냈다.

바람의 검심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영화판에서 등장한다. 배우는 오자와 유키요시(小澤征悦). 비중있는 역할로 등장하지만, 닥친 상황을 극복하기보다는 허위 사실을 흘리게 해 능구렁이처럼 피해가거나 권력을 위해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시키는 냉혹한 정치인으로 그려진다. 켄신을 체포하도록 전국에 포고를 돌리고 켄신이 제 발로 잡혀 들어오자 온갖 소리를 다 붙여 켄신에게 시시오를 처단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래놓고는 후에 켄신이 연옥 호에 올라타고 시간이 오래 걸리자 아예 육상에서 포격을 가해 시시오와 켄신을 같이 매장시켜 버리려고 한다. 그리고 간신히 나룻배를 타고 일행과 불바다에서 탈출해 초죽음이 되어 돌아온 켄신에게 사무라이라고 부르며 경례를 붙이는 모습이 압권.

아이돌 사변에서는 6화에서 일본을 만든 정치인으로 등장해 주인공에게 조언을 해 주는 단역으로 등장한다.

소설 비명을 찾아서에서는 안중근이 이토 처단에 실패해서 살아남는다. 비명을 찾아서를 원안으로 한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서는 미래에서 건너온 일본 극우파인 이노우에의 도움으로 살아남지만 후반에 역사가 다시 바뀌면서 안중근에게 처단된다.

마사코의 질문이라는 책에서 방구 아저씨라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일본순사로 나와 쇠곤봉으로 내려치는 강도로 나무곤봉으로 방구아저씨를 죽인다.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올랜덤 인물전에서 F급 영웅으로 나온다. 유닛은 캐리어지만 인터셉터가 없는 깡통이라서 쓰레기 취급을 받는다.

놀랍게도 「동아찬영회」라는 팬클럽이 있었다. 총재는 장석주이라는 친일파이다. 그는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유신의 폭풍 막말지사전에서 좌막파로 플레이하여 이토 히로무비를 처단 할 수 있다.

꽃 타오르다에서는 일본코메디언게키단 히토리가 이토 히로부미 배역을 담당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게키단 히토리는 친한(親韓) 성향의 인물이다.[23] 살짝 어리버리하고 심약한 인물로 나온다 보고있으면 참 답답하다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무진전쟁에서 막부가 이기는바람에 어부로서 훗카이도의 하코다테에 은신중이다. 여전히 체제변혁을 생각중이며, 하코다테에서 대한제국 남부 지역으로 은신처를 바꾼다.

영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측근에게 "난 지금 당장 정치가 그만 둬도, 영어 교사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말하거나, 동료 정치가들에게 직접 번역한 영미 신문 발췌본을 돌리기도 했을 정도로 영어를 잘 했다고 한다.

죽기 전에 규장각 보관 문서 1,079권을 대출했는데, 도중에 안중근에게 처단당하였기 때문에 반환하지 못했다. 현재까지의 연체료를 계산하면 대략 37억 원. 규장각 장서들은 현 일본 황실 도서관의 전신인 도서료에 보내졌고, 이 장서들은 이후 일본 황실 도서관인 궁내청 서릉부에 보관 중이었다. 원래 일본에서는 한국에 돌려줄 마음이 없었으나 2010년 하반기 간 나오토 내각과의 협의 결과 1,205권을 마침내 반환받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한국에 올 때마다 기생집에서 놀기를 즐겼으며 한국인 도 있었다.

고려 청자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졌는데, 그가 조선 통감에 부임을 한 후에 일본 천황과 귀족에게 선물한다는 명목으로 전국에 있는 고려 청자들을 사들였다. 1906년에 통감부 법무원 재판장 평정관이었던 미야케 조사쿠(三宅長策)의 회고록『그때의 기억-고려 고분 발굴시대』에 의하면 '이토는 틈만 있으면 일본인을 시켜 '얼마든지 좋으니 고려 청자를 가져오라'했고, '몽땅 사자'는 식으로 마구 사들였다.'라고 증언하였다. 그가 개인적으로 수집하여 반출한 고려 청자의 수는 최소 1,000점 이상으로 추정된다.고려 청자를 찾아라

한복을 입은 사진도 여럿 남아있다. 이토의 평소 생각이 드러난다. 한국 그 자체의 문화와 사회는 인정한다는 메시지를 황실에 전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기 본마누라 우메코(梅子)에게 한복을 입히고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가운데의 쓴 노인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다

기사 링크 책 링크

을미사변에 당시 총리였던 이토를 비롯해서 무츠 무네미츠 등 일본 내각이 개입했다는 증거 자료가 공개되었다.

좋아하는 음식으로는 복어 라고 한다. 먹어보고 매우 좋아서 식용 금지를 해제할 정도로 복어 매니아다.

고향인 히카리에 이토 히로부미 기념공원이 있다.[24]

당대 한국에서는 이토가 고메이 덴노를 암살했다는 음모론이 돌기도 했다. 메이지 덴노 대역설에서 더 나간 이야기로,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뒤 주장한 이토의 죄목 중에 '대일본 명치 천황 폐하 부친 태황제 폐하를 시살(弑殺)한 대역불도의 짓'이란 내용이 있으며 최익현은 의병을 일으키는 격문을 통해 ''자기 나라 임금을 죽이고 다른 나라 임금까지 침범한 이토 히로부미는 마땅히 세계 여러 나라가 함께 토벌해야 할 역적'이라고 주장하였다.

9. 주요 경력

일본 역대 내각 총리 대신

총리직 신설

1대

2대

이토 히로부미
(1885년 12월 22일 ~ 1888년 4월 30일)

구로다 기요타카

4대

5대

6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이토 히로부미
(1892년 8월 8일 ~ 1896년 8월 31일)

마쓰카타 마사요시

6대

7대

8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이토 히로부미
(1898년 1월 12일 ~ 1898년 6월 30일)

오쿠마 시게노부

9대

10대

11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1900년 10월 19일 ~ 1901년 5월 10일)

가쓰라 다로

일본 역대 외무대신

1대

대행

2대

이노우에 가오루

이토 히로부미
(1887년 9월 17일 ~ 1888년 2월 1일)

오쿠마 시게노부


  1. [1] 박문사가 헐리고부터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영빈관이 있다가 현재는 서울신라호텔이 들어서 있다.
  2. [2] 여기서 도조 히데키는 안경 쓴 대머리에 히틀러 콧수염이라는 전형적인 일본군 외모로 유명한데다 일본군 생김새를 묘사할 때 자신의 외모로 고착시켜버린 장본인이어서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많이 알려져 있다.
  3. [3] 잘 알려지지 않은 다른 사례로는 조명하가 있는데, 이 사람은 이토 히로부미보다 더 높은 거물인 일본 황족을 암살했다. 그것도 다른 황족이 아닌 천황의 장인을. 그러나 끝판왕은 바로 천황을 노린 이봉창, 하지만 이쪽은 알려졌다시피 실패했다.
  4. [4] 한일병합 당시 일본 외무성 정무국장이던 구라치 테쓰기치의 회고록에 1909년 4월 "이토가 병탄에 동감한다고 명확히 말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5. [5] 쇼인이 이토에게 내린 평가는 한마디로 '재능 없음'
  6. [6] 2006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長州ファイブ>
  7. [7] 이노우에 가오루는 서양의 최신 증기선 등을 구입하는 공직에 있었는데, 선박 살 돈을 빼돌렸다. 이노우에는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돈과 여자 둘 다 더러운 인성에 문제가 있는 인물이다.
  8. [8] 오늘날에는 안양시.
  9. [9] 안중근과 같이 거사를 담당했던 유동하의 친척의 증언.
  10. [10] 벨기에제 FN M1900이고 .32 ACP 라는 엄청 작은 권총탄을 사용한 호신용 권총이었다.
  11. [11] 일본 야마구치현 히카리시의 한 박물관에서는 이토가 사망했을 당시에 입고 있었던 내복을 보관하고 있다. 그 내복을 통해 어디에 총탄을 맞았는지 알 수 있다. KBS1 역사스페셜에서 박물관을 찾아가 이토가 입었던 내복을 촬영했다.
  12. [12] 러시아어로 한국 만세라는 뜻.
  13. [13] 그 친일 성향을 가진 조선일보에서도 이토 히로부미의 이러한 음모를 기사로 싣기도 하였다. 관련 기사
  14. [14] 사실 이점이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인데, 이토의 죽음으로 가속화된 한일 합병과 스승의 죽음으로 분노한 당시 당시 3대 총리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강경한 식민 정책 노선, 그리고 걷잡을 수 없어진 일본의 군국주의화가 수없이 많은 조선인들을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그러한 광기가 있었기에 일제에 대한 조선인들의 반발심은 적극적인 항일 운동으로 이어졌으며, 이토와 같은 영리한 정치인의 부재로 말미암아 일본 제국이 미국을 공격하고 그들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게 된 결정적 계기가 마련되었다.
  15. [15] 돈과 여자 둘 다 더러운 놈은 이노우에 가오루. 이토와 더불어 '메이지 시대 스캔들 메이커'였다.
  16. [16] 일본명 다야마 사다코.
  17. [17]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 형식도 이와 비슷한 형식이었다. 베트남 북부와 남부는 떼어내고 비록 중부 지역만을 명목상 주권자로 당시 베트남 황실이었던 응우옌 왕조에게 남겨졌지만 실상은 프랑스 식민 당국이 지배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당시 베트남에 황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누가 봐도 프랑스의 통치임이 명백했던 상황이었던 것이었다.
  18. [18] 민유기 著 <프랑스의 1910년 한일 병합과 그 결과에 대한 인식>
  19. [19] 다수의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창씨개명하고 일본어를 쓰면서 일본인으로 둔갑하여 자신들과 맞먹으려 드는 정책으로 생각하며 불쾌하게 여겼다.
  20. [20] 사실 오늘날 일본 극우파의 입장에서는 제국주의자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온건파였던 이토 히로부미를 굳이 띄워줄 이유가 없을 수도 있다. 이들의 실질적인 전신이 일본 제국 군부로 대표되는 급진적 정한론자(조선 병합 이전), 대륙 침략 주도 세력(쇼와 시대 초기)이었으니 말이다.
  21. [21]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노구치는 과학사기꾼이 아니냐는 논란이 생겼다. 자세한 것은 노구치 히데요 참조.
  22. [22] 영화 도마 안중근에서도 이토를 연기했다.
  23. [23] 이런 케이스는 또 있는것이 게키단 히토리 보다도 더 친한 연예인으로 유명한 초난강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을 맡은적이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일본의 정서하고도 너무 다른 히데요시라 이질감이 심하다 애시당초 히데요시는 초난강과 다르게 못생긴게 상징적인 인물인데....
  24. [24] 야마구치 출신의 시타오 미우가 여기에 간 사진을 올리는 바람에, 프로듀스 48 출전 도중 엄청나게 비난을 받았다. 결국 이 여파로 시타오 미우는 최종 데뷔조 입성에 실패하고 말았다.

최종 확인 버전:

cc by-nc-sa 2.0 kr

Contents from Namu Wiki

Contact - 미러 (Namu)는 나무 위키의 표가 깨지는게 안타까워 만들어진 사이트입니다. (255.83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