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영(1858)

일제강점기 조선귀족

{{{#!folding [ 펼치기 · 접기 ]

경술국치
이전
작위
수여자

후작

백작

박영효

윤택영

이재각

이재완

이해승

이해창

민영린

이완용

이지용

자작

고영희

권중현

김윤식

김성근

민병석

민영규

민영소

민영휘

박제순

송병준

윤덕영

이근명

이근택

이기용

이병무

이용직

* 이완용

이재곤

이하영

임선준

조민희

조중응

남작

김가진

김병익

김사준

김사철

김영철

김종한

김춘희

김학진

남정철

민상호

민영기

민종묵

민형식

박기양

박용대

박제빈

성기운

유길준

윤웅렬

윤용구

이건하

이근상

이근호

이달용

이봉의

이용원

이용태

이윤용

이재극

이정로

이종건

이주영

장석주

정낙용

정한조

조동윤

조동희

조희연

최석민

한규설

한창수

경술국치
이후
작위
수여자

계승자

후작

백작

박찬범

윤의섭

이달용

이덕룡

이완용

고희경

송병준

이영주

자작

김호규

민병삼

민충식

민형식

민홍기

박부양

윤강로

이규원

이창훈

이택주

이충세

이해국

이홍묵

임낙호

조대호

조중수

남작

김교신

김덕한

김세현

김석기

김영수

김정록

남장희

민건식

민영욱

민철훈

민태곤

민태윤

박경원

박서양

박승원

성주경

윤치호

이규환

이기원

이능세

이동훈

이범팔

이병옥

이원호

이인용

이장훈

이중환

이풍한

이항구

장인원

정주영

정천모

조중구

조중헌

최정원

한상기

-2 ※ [[오등작]] 중 [[일제강점기]] 조선귀족에 [[공작]]은 없었으며, 그에 준하는 작위와 관련한 정보는 [[왕공족]] 문서 참고.
※ --취소선 표시--는 작위를 박탈당하거나 반납한 사람을 뜻하고, __밑줄 표시__는 작위를 반납하려 했는데 일제의 거절으로 반납하지 못한 사람을 뜻함.
※ * 1872년생 이완용(李完鎔)으로 1858년생 [[이완용|이완용(李完用)]]과 다른 사람임.

}}}||

이름

이하영(李夏榮)

출생일

1858년 8월 15일[1]

출생지

경상도 기장현(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사망일

1929년 2월 27일 (70세)

사망지

경성부

본관

경주 이씨 백사공파 11세손[2]

직업

통역관, 외교관, 정치인, 기업인

종교

무종교

1. 개요
2. 생애
2.1. 성장기
2.2. 취직과 상경
2.3. 미국 공사관 취직과 갑신정변
2.4. 출세 및 외교관 생활
2.5. 기업인으로 새 출발
2.6. 사망
3. 평가

1. 개요

을사 3흉 중 한 명. 친일파. 이완용과 동갑인 1858년 음력 8월 15일 생으로 대한 제국의 외교관이며,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에서 최형배(하정우)의 집 벽에 걸려있는 사진의 주인공이다. 찢어지게 없는 집에 태어나서 온갖 우연의 연속으로 출세 후, 형님, 동생에게 벼슬을 안겨줬다. 물론 친일파 짓도 사이좋게(...) 게다가 후일 창업한 회사에 이런 인맥 저런 인맥 주주로 앉혀놓고 정치 빽으로 사업을 성공시킨다는 방식도 영화 내용과 비슷하다. 윤종빈 감독이 알고 초상화를 썼는지는 미지수.

친일파 중에서도 악명 높은 을사 3흉이었지만 떡장수를 전전하던 한 인간이 외무부 장관 그리고 20세기 초 조선 유수의 기업가로 성장하는 과정이 매우 흥미롭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시작하고 자신의 형편없는 실력을 극복하고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아임 파인 땡큐 앤유? 수준으로 궁에 스카우트되는 부러운 그 시절.[3]미스터 션샤인의 이완익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성장기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의 직계 10대손이다. '榮'자 항렬에서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신흥무관학교 교장이자 아나키스트 이회영 선생,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과 같은 파 같은 항렬이다.[4] 경주 이씨는 이른바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불리던 명문가인데 그 중에서도 백사공파는 벼슬 열력에서 경주 이씨 중에서 가장 화려했던 파로, 실제로 이회영, 이시영 형제의 가계는 대대로 정승을 지낸데다 조선 10대 갑부에 들었다.[5] 여기까지만 들으면 이하영이 되게 잘나가는 집안 출신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이하영에게는 아무런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냥 흙수저를 넘은 무수저.

이하영이나 이완용은 굉장히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었다. 이를 통해 삼대 안에 벼슬을 안 하면 아무리 옛날에 한자리했든 별 볼일 없다는 점과 양반이 다 같은 양반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 부의 세습이 몇 대 가지 않았던 조선의 사회가 역대 어떤 한반도의 왕조보다 사회정의 관점에서 나은 나라였다 라는 생각도 들지만 이하영의 어린 시절은 어려워도 너무 어려웠다. 이하영은 부산 기장군 출신으로 백사공 이후 벼슬한 사람이 직계에서는 없는 한미한 형편이었다. 아버지가 소작을 부쳐 먹고 살았고 다가올 보릿고개에 살아남으려면 입을 하나라도 줄이자고 해서 부모가 보낸 게 양산 통도사(...) 팔자에 없는 스님들 잔시중까지 들으며 모진 목숨을 이어갔다.

팔자에 없는 일은 무릇 오래갈 수 없는 법. 동자승으로 활동하던 그는 일이년 못 버티고 집에 돌아와 동생과 떡 행상에 나서기도 했다. 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삶에 지친 가정 형편이라 가방끈이 아예 없는 게 당연했다. 한참 나중의 일이긴 하지만 개화파 윤치호는 이하영을 두고 얼마나 무식하다 욕을 많이 했는지 윤치호의 일기를 보면 얼굴이 좀 화끈거릴 정도. '아니 나라 녹을 먹는 인간이 한문으로 편지 한 통 못쓰다니?' 정도가 제일 약한 표현이다.[6] 물론 친일파에 대한 증오도 담아서.

2.2. 취직과 상경

1875년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고 이듬해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이 외국인들에게 개항됐다. 이하영은 기장 본집을 나와 부산 초량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당시 일본 왜관이 있던 초량은 대일 무역 및 초창기 일본 공사관 성격의 제반 사무를 보기 시작했고, 일본인 거리가 본격 조성돼 이하영은 일본인 상점에 점원으로 들어갔다. 머리가 총명한 그는 19살 때부터 10년간 일본인 밑에서 일하면서 일본어와 상술을 어깨너머로 깨쳤다.

1884년 또박또박 모은 돈으로 드디어 자기 사업을 시작한다. 일본에서 물건을 떼다가 국내에 판다는 간단한 비즈니스 모델이었지만 당시는 큰 조선 상단들조차 시도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거래처 장사치와 동업에 나선 그는 정기 연락선 난징 호를 타고 나가사키로 함께 건너갔다. 그런데 아닌 밤에 날벼락으로 평양 출신 모 씨가 밑천을 몽땅 챙겨서 도주했다. 신고는커녕 일본에 조선 공관조차 하나 없던 시절이라 보호받을 수 있는 수단이 아무 것도 없었다.[7] 결론은 귀국.

타고 온 난징 호가 중국 상해에 갔다 되돌아오는 걸 기다려 다시 배에 올랐다.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10년이라는 고생의 세월이 너무나 허무하게 끝나버린 줄 알았다. 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하영은 배 위에서 미국인 의료선교사 알렌과 마주친다. 알렌은 장로회 소속으로 중국 선교에 실패하고 친구의 조언 하나 믿고 조선으로 건너오는 중이었다. 알렌은 한양 주조선 미국 공사관에 가는 길이었다. 둘은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알렌은 조선인이 궁금했고 이하영은 이게 뭐라는 동물인가 싶었다. 태초의 소통 수단 손짓 발짓으로 친분을 만든 그들은 부산항에 기착했다. 이하영은 갈 곳이 없었다. 무조건 알렌을 따라나서기로 했다. 알렌은 그를 길잡이 삼아 한양으로 향했다.

2.3. 미국 공사관 취직과 갑신정변

1884년 9월 20일(양력) 한양 미국 공사관(현재 덕수궁 후문 근처)에 당도한 그들은 짐을 풀었다. 미국 공사와 면담한 알렌은 선교 목적이 너무 노골적이면 신변이 위험하니 미국 공사관 직원 신분으로서 있는 게 좋겠다는 조언을 받았다. 알렌은 마이애미 의대 졸업장을 근거로 공사관 무급 외과의가 됐다. 영어 직분에 Physician to the Legation with No pay 라 돼있다. 이하영은 그의 요리사 자격으로 미국 공사관에서 숙식하게 됐다. 진짜 요리를 할 줄 알았는지 여부는 모르지만 살 길은 그것뿐이다.

드디어 운명의 12월 4일(양력), 한양 보신각 종 대각선 방향, 지금의 조계사 자리에 우정총국 완공 축하연이 벌어졌다. 주미 공사관 직원들도 주빈 자격으로 행사에 가는 바람에 주미 공사관은 적막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난리가 났다. 머리에서 팔다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갓 쓴 사람들이 업히거나 들것에 실려 주미 공사관에 들이닥쳤다. 공사관 주치의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됐다. 무급 외과의 역시 환자를 처리해야 했다. 문제는 언어였다. 한국어를 모르니 상투 튼 환자들이 어디가 아프다 저기가 어떻다 수술을 해야 하는데 보호자는 어떡할 거냐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알렌은 급히 이하영을 불렀다. 이하영은 호떡집에 불난 사람 마냥 여기저기 밤새 눈코 뜰 사이가 없었다. 3개월 간 알렌 옆에서 몇 마디 배운 영어라도 급했다. 게다가 간호사가 해야 될 일도 그의 차지였다. 이렇게 알렌과 이하영은 갑신정변에 휘말려 들었다.

개화파들의 삼일천하도 끝이 나고, 소란 사태는 진정됐다. 정변 가담자 색출 및 검거 선풍이 도성 내를 휩쓸었지만 미국 공사관은 치외법권이었다. 이하영은 간호를 하던 와중에 병상에 누운 환자들이 굉장히 지체 높으신 나리님들이란 걸 알게 됐다. 그 중에 여흥 민씨의 총아 민영익도 부상을 입고 누워 있었다. 이하영은 알렌 및 공사관 직원들과 민영익 사이에서 간단히 통역을 하고 주요한 대화에 모두 끼었다. 전문가들 중에는 이하영의 영어 수준이 현재 대한민국 공교육으로는 초딩 수준도 안됐을 것이라는 관측을 하고 있다. 단지 영어 몇 마디 안다는 이유로 무려 고종 황제를 배알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민영익의 소개였다.

2.4. 출세 및 외교관 생활

당시 고종은 일반적인 인식과 다르게 분명 근대화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수구파라 분류되는 인사들도 분명 청나라양무운동 모델을 통한 서구화에 대해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정변 전에도 청나라에서 파견된 묄렌도르프 등 서양인 고문이 있었고 정부 기구는 청나라식 조직명으로 바뀌어 있었다. (예 : 청나라의 총리 각국 사무 아문을 본딴 1880년의 통리 기무 아문 등, 임오군란 후 통리 군국 사무 아문과 통리 통상 교섭 아문으로 개편됨) 그리고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끼어 세력 각축장이 돼가는 한반도 현실에 대해 큰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황쭌셴의 조선책략 등도 널리 읽혀져 '미국'의 존재와 힘에 대해 관심이 높았으며 미국에 접근할 목적으로 고종은 알렌을 황실 주치의에 임명했다. 아울러 이하영도 당시 서구식 관료 재교육 기관으로 고종이 허가한 육영 공원에 일본어 교사로 옮겨갔다.

토익 900점, 일본어 JPT, JLPT 자격자들이 발에 차이는 게 요즘이지만, 당시 이하영은 일본인 사장 밑에서 어깨 너머 배운 일본어 수준과 고작 3개월 알렌 옆에서 몇 마디 익힌 영어 정도로도 당시 조선에서 경쟁자가 없었다.[8] 그는 육영 공원에서 시험 감독관으로서 문과에 급제한 대가집 자제들을 제자로 거느렸다. 그리고 이듬해인 1886년 무려 고종 황제의 개인 통역관으로 발탁된다. 곧 외무 아문 주사에 특채되고 바로 주미 조선 공사관을 설치하러 미국으로 건너간다. 초대 주미 공사 박정양, 동갑내기인 이완용, 그리고 아직 젊은 시절의 월남 이상재 등과 그의 필생의 은인 알렌도 함께였다.

1887년 12월 10일 조선 사절단은 영국 국적선 오셔닉 호를 타고 요코하마를 출발해 하와이 경유 샌프란시스코 도착이라는 긴 스케줄을 소화했다. 황천(해군 용어)도 거쳤다고. 태평양 횡단 기간 조선 사절단에 대해 호러스 알렌이 대략 12월 26일 일기에 묘사하길, '그들은 선실 안에 틀어박혀서 모든 걸 하인이 들여보냈고, 조선 관리 복색임에도 줄담배를 피느라 담배 쩐 내, 똥냄새, 입 냄새에 특이한 음식 냄새 때문에 내가 볼 일이 있어 선실에 들어갔다가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월남 이상재 선생에 대해 '특히 더티한 남자'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게 재미있다.(12월 21일 하와이 호놀룰루 입항, 28일 샌프란시스코 기항의 스케줄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 기항한 기쁨도 잠시, 천연두가 유행 조짐이라며 승객들을 억류시킨 미 당국 때문에 1888년 정초가 돼서야 뭍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한반도인으로서 엘리베이터를 최초로 탄 공식 기록자인 사절단 일행은, 환영 파티에 온 귀부인의 가슴 파인 옷에 '서양의 관기냐'며 차마 통역 못할 호기심을 보이기도 했다. 사흘 더 여독을 푼 그들은 기차로 대륙 횡단에 나섰다. 미국의 수도는 다들 알다시피 워싱턴 D.C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십리 길을 단 몇 분에 주파하는 서구 문명의 속도에 이하영은 말할 수 없는 충격과 신기함을 느꼈다. 워싱턴에 도착해서도 미 정부 관계자가 올 때마다 철도에 대해 묻고 철도 모형을 구하는 등 큰 흥미를 보였다. 그치만 사절단이 철도 자체를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다. 4년 전 민영익이 이끄는 보빙사도 그 열차를 탔고, 이미 경인선 계획도 정부 차원에서 검토 중이었다.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를 만나 국서를 교환하는 첫 만남에 한국식 큰절을 하다 만류를 당하는 등 촌극을 빚는 가운데, 혹 조선이 미국과 단독적으로 외교 조약을 맺는 것은 아닌가 상국 청나라에게 끊임없는 견제를 받았다. 사절단이 처음 미국 공사관을 설치하러 떠나기 전 청국 정부는 '영약삼단'이라는 것을 지키라며 독단적 외교 행위를 차단하려 했다. 겨우 약속을 받고 온 거라 각종 제약이 많았다. 결국은 박정양이 청국 정부의 질책에 대해 책임을 지고 본국으로 소환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참찬관 이완용도 몸이 좋지 않아 함께 돌아갔다. 결국 공사관에 덩그러니 남은 건 이하영이었다.

이하영은 특히 미국 출발 전 고종에게 밀명을 받았다. 원산, 인천, 부산 세 항구를 담보로 빌린 2백만 달러로 미군 20만을 빌려오라는 거였다. 이하영이 1926년 신민이란 잡지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고종께서는 아직 사절 일행이 여장도 꾸리기 전 내게 ‘대조선 해륙군 대도원수(大朝鮮海陸軍大都元帥)’라는 교첩까지 내리셨다. 내가 20만 미국 병사를 이끌고 북을 울리며 환국하면, 고종께서는 쉰양강(潯陽江, 양쯔강 남쪽) 건너편까지 통치하기 편하도록 평양으로 황도를 옮길 엄청난 계획을 품으셨다. (이하영, ‘한미국교와 해아사건’, ‘신민’ 1926년 6월호)

이하영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 뉴욕 은행이 2백만 달러 차관을 승인해 먼저 백만 불을 인출해 줬다고 한다. 그런데 나머지 백만 불과 20만의 미군 용병은 미 상원에서의 부결로 물거품이 됐다. 이하영의 증언 말고는 달리 자료가 없어 신빙성이 의심되지만 일단 그 뒤는 이렇다. 이미 쓴 돈은 미국 정부가 뒷감당할 테니 남은 금액을 뉴욕 은행에 반환하래서 16만 불을 뺀 84만 불 정도를 반환했다고 한다. 그 중 일부를 어떻게 꿍쳤는지 몰라도 주미 공관에서 그의 하루하루는 꿈같은 시간이었다고 한다. 매일 사교 파티에다가 그는 미국 춤을 마스터하고 정통 서양 매너가 몸에 배 '상투 댄디'란 별명까지 얻었다고. 심지어 미국 여자와 사귀었단다. 2년이 조금 못되게 열심히 일한(?) 그는 조선 정부로부터 소환령을 받고, 미국에 온 이완용과 바통 터치한다. 이완용은 부부 동반이었기 때문에 부인 양주 조씨는 서양에 간 최초의 조선 여성이 된다.

그는 조선에 미국 정부로부터 정교한 열차 모형을 구해서 돌아왔고 곧 조선 정부는 경인선 착공에 들어갔다. 그는 곧 음서직 등 소위 특채들이 거치는 현감직을 돌다 외무 아문 참의(정3품)로 승진했는데 그것도 모자라 한성부 관찰사(구 한성부 판윤, 즉 서울 시장), 주일 공사를 거쳐 1904년 외무 대신에 오른다. 물론 장시간의 외국 체류로 서구의 문화가 몸에 배여 이제는 예전의 송사리 이하영이 아니었다. 재산도 서대문에 99칸 짜리 대저택에 살 정도로 늘었다. 장장 대지 1500평에 달하는 그의 저택엔 아예 서양식 독채가 따로 있었고 하인도 수십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외무 아문에 있을 때는 일본에 충청, 황해, 평안 3도의 서해 어로권을 넘겼고 내륙 하천 항행권도 시원하게 선사했다. 일본 헌병대에 한양 치안마저... 그 때문에 우용택이라는 한 선비에게 뺨까지 얻어맞았다고.

을사늑약 때는 표면상 반대를 표해서 을사 5적에는 이름이 없지만 을사 3흉으로 따로 분류된다. 곧 찬성한다고 의사를 재표명했고 조선 귀족(일본 정부 지정)이 돼 자작 작위가 수여됐다. 당연히 총독부 산하 중추원에 이름이 올라있다. 천황이 주는 은사금도 챙겼다.

2.5. 기업인으로 새 출발

어차피 나라는 일본이 다스리는 마당에 그의 할 일은 얼굴 마담으로 총독부 주최 행사에 얼굴을 내미는 정도였다. 대신 그는 받은 은사금으로 공장을 차렸다. 고무신 공장이었다. 그는 '대장군 표' 고무신을 생산해 조선인 최초의 신발 회사 사장이 됐다. 회사는 크게 번창해 아예 '대륙 고무 주식 회사'라는 법인까지 만들고 사장이 됐다. 1922년 65세 나이에 조선 굴지의 대기업 사장이 된 그는 박영효, 이완용의 의붓형 이윤용 등 조선 귀족들을 주요 주주 자리에 앉혀 사업 안정을 꾀했다. 신동아 2006년 전봉관 교수의 칼럼 '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에 따르면 주주도 귀족이었지만 마케팅까지 귀족적이었다고.

본인이 경영한 대륙 고무가 제조한 고무화를 출시하니 이왕(순종) 전하께서 어용하심을 얻어 황감함을 금치못하며, 왕자 공주님들께서도 널리 애용하시고, 또 나인들, 일반 고객들이 각별히 애용하셔서 날로 달로 발전하여 이번에 주식회사 조직으로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고무 업계의 원조로서 더욱더 매진하여 조선은 물론 일본과 만주까지 진출하겠사오니, 더욱 애용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다른 회사가 조악(粗惡)한 제품을 본사의 제품이라고 사칭하여 판매하는 경우가 많사오니 본사 상표 ‘大陸’에 주의하시옵소서. -1922년 9월 대륙 고무 주식 회사 사장 이하영(‘동아일보’ 1922년 9월 21일자 광고)

워낙 명품이다 보니 짝퉁이 난립해 영업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식민지 출신 회사로서는 황감하게 일본인 직원들까지 두고 영업했다는데, 상표권 분쟁을 법원에서 다투는 등의 노력으로 1945년 광복 후에도 한동안 최고의 고무신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고 한다.

2.6. 사망

이하영은 온갖 영광을 누리다 1929년 2월 27일 노환으로 사망한다. 장지는 안산 동막 저수지 윗쪽이다. 그는 살아 생전 친형 이근영을 군수로, 동생 이준영은 관찰사까지 만들어줬고 친일 행각도 함께 했다. 일각에선 동생 이준영이 국문학자이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 근거는 박이정 출판사에서 2005년 만든 박종덕 씨의 《경상도 방언의 모음체계 변천사》 하나뿐이었다. 다른 근거가 없을까 구글링을 하니 이준영이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크며, 작은 형 덕에 1906년 강원 관찰사가 됐지만 아파서 금방 그만두고 세상을 떴다는 설도 있다. (추가 출처 확인 바람)

이하영의 손자 이종찬은 일본 육사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말기 태평양 전쟁에 종군해 뉴기니 등 남태평양에서 종전을 맞았다. 해방 후 6.25 덕에 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까지 지냈지만 늘 자신의 뿌리와 과거 행적을 부끄러워했고, 군인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하며 바른 소리하다가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의 눈 날 정도였다.[9] 결혼할 때의 에피소드가 있는데 부인될 여자를 집안 어른들이 반대하자 '우리 할아버지는 떡 장수 출신 친일파' 디스로 정면 돌파한 가슴 아픈 일도 있었다. 이종찬은 해방 전 자작 작위 세습을 거부한 덕분에 친일 부역자 명단에서는 제외됐다.

3. 평가

사실 이하영이 미국 정부로부터 백만불을 당겼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다. 김옥균은 그로부터 불과 3년 ~ 4년 전 일본에 무상 차관을 빌리러 갔다가 실패했고, 차선책으로 국채 발행을 시도했지만 모두 허사였었다.

어쨌든 이하영이 미국에 돌려주지 않은 16만 불 중 얼마를 비상금(?)으로 놔뒀는지는 몰라도, 당시 조선으로서는 막대한 돈이었을 텐데 그 행방이 투명하지 않다. 하여간 고종(대한제국)이 목돈을 만들라고 사람을 보내면 곱게 오는 경우가 없었다. 원래부터 부패 집단인 수구파들은 고사하고, 갑신정변을 말아먹은 김옥균 역시 1882년 제물포 조약 직후 일본에 가서 받은 17만 엔을 귀국해서는 수중에 한 푼도 안 남았다고 하는 걸 보면, 만약 용처가 사적이 아닌 개혁을 위한 군자금이었다고 해도 불투명한 건 사실이며(한성순보를 창간하는데 썼다고도 한다) 결과적으로 개혁에 독이 됐다. 당시 아직 입장을 정하지 않았던 많은 중도적 정부 인사들마저 등 돌리게 만들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884년 무상 차관을 준대서 김옥균이 일본에 갔건만 수구파들이 뒤에서 방해(비자금 루머 퍼뜨림)했고 결국 일본 정부한테 찬바람을 맞았었다. 1882년 임오군란 역시 불량미라는 불투명한 재정 집행이 도화선이 된 참사였다. 리더라는 사람들이 이 모양이었던 구한 말을 돌이켜볼 때 고종 옆에 있었던 인간들에게 근대화를 믿고 맡기기에는 경제적 식견이나 정치적 리더로서의 도덕성, 정치력 그 어떤 것도 부족하게만 보인다.

이하영은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에, 2007년 대한민국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의 친일 반민족 행위 195인 명단에 올랐다. 2008년 민족 문제 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 인명 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도 선정됐다.


  1. [1] 이완용과 동갑이다!
  2. [2] 경주 이씨 35세손 '榮'자 항렬이다.
  3. [3] 그런데 체계적인 배움 없이 그 정도면 절대 못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훗날 미국 생활로 영어가 훨씬 더 늘었다. 당시 조선에서 이하영보다 영어를 잘하는 인물이 겨우 4개월 외국에서 영어 배운 윤치호와 육영 공원에서 공부한 이완용 정도. 윤치호는 회화보다 영작문과 번역에 유창했고 이완용도 당시 기준으로는 초보였다. 공교롭게도 세 명 다 시류에 영합하거나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악명 높다.
  4. [4] 이시영, 이회영은 이하영의 14촌 동생으로, 이하영의 아버지 이유수와 이시영, 이회영의 아버지 이유승은 12촌 형제간이었다. 물론 서로 남남인 관계지만 이정도면 남남인 거치고는 촌수가 그리 먼 편은 아니다.
  5. [5] 인구 순으로는 익재공파, 국당공파, 상서공파 순인데, 원래 백사공파는 상서공파에서 분적한 파로 정식 명칭은 상서공후 백사문충공파이다.
  6. [6] 특채 주제에 나대기는... 이런 느낌이다.
  7. [7] 조선의 최초 재외 공사관인 주일 조선 공사관 설치는 1887년 5월
  8. [8] 실제로 그동안 거추장스러운 장식에 불과했던 이항복의 직계손이라는 타이틀도 그 이후가 되서야 빛을 발했다.
  9. [9] 때문에 이후 '참군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최종 확인 버전:

cc by-nc-sa 2.0 kr

Contents from Namu Wiki

Contact - 미러 (Namu)는 나무 위키의 표가 깨지는게 안타까워 만들어진 사이트입니다. (stat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