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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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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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의 역임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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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감사원장

노태우 정부 (1988 ~ 1993)

문민정부 (1993 ~ 1998)

제14대
김영준

제15대
이회창

제16대
이시윤

대한민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제7대
윤일영

제8대
이회창

제9대
윤관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

기호

정당

이름

1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2

한나라당

이명박

3

민주노동당

권영길

4

민주당

이인제

5

국민중심당

심대평

6

창조한국당

문국현

7

참주인연합

정근모

8

경제공화당

허경영

9

새시대참사람연합

전관

10

한국사회당

금민

11

화합과도약을위한국민연대

이수성

12

무소속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

초대
김영삼

제2대
이회창

해당
,(한나라당 창당),

한나라당 총재

권한대행
이기택

제3대
이회창

권한대행
강창성

권한대행
강창성

제4대
이회창

권한대행
박관용

자유선진당 총재

창당

총재
이회창

총재직 폐지

제2대 대표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

총재
이회창

제2대
이회창

제3대
변웅전

초대
심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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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홍준표[1]

제15대
이회창

제16·17대
맹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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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홍문표

제18대
이회창

제19~20대
홍문표

}}} ||

이름

이회창(李會昌, Lee Hoi Chang)

출생일

1935년 6월 2일 (83세)

출생지

일제 강점기 조선 황해도 서흥군 신막면

(現 북한 황해북도 서흥군 서흥읍)

거주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동

본관

전주 이씨 주부공파

최종 학력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사

병역

대한민국 공군 대위(군법무관) 만기전역

종교

무종교천주교(세례명: 올라프)[2]

아내

한인옥

십이지

돼지띠

별자리

쌍둥이자리

자녀

슬하 2남 1녀

약칭

소속 정당

바른미래당

약력

대법원 대법원판사

대법원 대법관

제8대 중앙선거관리위원장

제15대 감사원장

제26대 국무총리

제15대 국회의원(신한국당 전국구 1번)[3]

신한국당 대표최고위원

신한국당 총재[4]

제15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후보

제15대 국회의원(서울 송파구 갑)

한나라당 총재[5]

제16대 국회의원(한나라당 전국구 1번)[6]

제16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후보

제17대 대통령 선거 무소속 후보

자유선진당 총재

제18대 국회의원(충남 홍성군·예산군)

자유선진당 대표최고위원

1. 개요
3. 평가
4. 논란
5. 여담
5.1. 이인제와의 관계
6. 선거 이력
7.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 법조계의 전설이자 대한민국 현대 정치에 족적을 남긴 인물.

김종필에 이어 대통령 빼고 다해본 사람.

대한민국법조인, 정치인이다. 법조계에서 큰 이름을 날렸으며, 현재의 선관위감사원을 확립했다. 호는 경사(徑史). 대법관, 감사원장, 국무총리, 한나라당 총재, 자유선진당 총재 등을 역임했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이 "대통령 빼고 다 해본 사람"이라고 한다. 외삼촌 김홍용, 김문용, 김성용도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유명한 대선 콩라인이기도 하다.[7][8]

2. 일생

3. 평가

이회창은 개혁보수에 가까웠고 실제로 군부 세력의 적폐를 청산하는 데 앞장섰다.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이 민주적이었던 시절의 최후의 보루. 민정계의 지지를 얻기도 했지만 이회창 본인은 독재정권에 비판적인 만큼 YS를 잇는 민주계에 더 가까웠고,[9] 이회창이 은퇴한 후 한나라당은 TK에게 넘어가며 권위주의 및 수구화를 겪게 되었다. 민주당 지지 유권자 입장에선 이회창이 무너지고 이명박근혜 및 홍준표가 나타났다고 보는 셈이다. 실제로도 YS-이회창의 개혁보수적 성향 탓에 현재 자유한국당이 갖는 경북 텃밭이 그 당시에는 없었는데도[10] 김대중/노무현과도 정말 아슬아슬하게 싸우다 아깝게 졌을 정도로 국민들에게 인기 또한 모자라지 않았다. 이명박의 국민행동본부, 박근혜의 어버이연합이 나타난 해가 2006년 경으로, 이회창과 민주계가 힘을 잃기 시작한 때이다. 뒤집어 말하면, 김영삼이나 이회창이 보수정당을 장악할 때에는 저런 우파 단체들도 날뛰지 않았다. 애초에 군부 세력을 구속시키고 청산하던 사람이니 그럴 일이 없었겠지만.

문민정부 당시 감사원장을 맡아 초창기 문민정부의 개혁운동에 큰 몫을 담당했던 인물이었고, 바로 이 성과 덕분에 이회창은 대권을 노릴 수 있는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 중 하나였던 포용력이 너무 부족했다. 이런 그의 실책은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여실히 드러났는데, 경선에서 진 이인제를 직접 설득하지 않아 독자 출마를 말리는 데 실패함과 더불어, 3김정치 청산을 주장함으로써 김종필이 이끌었던 자민련을 자극해 DJP연합을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결국 이 2가지는 근소한 차이로 김대중 후보에 밀리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1]

2002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진보진영이 노무현 후보를 중심으로 단결한 반면에 보수 진영은 상당히 사분오열 되어 있었다. YS나 박근혜는 이회창을 지지했지만 과거 이회창의 3김정치 청산 주장을 기억하고 있던 이한동, 김종필과 같은 충청 보수 세력은 끝내 이회창을 지지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그리고 이회창에게 팽당한 이기택과 같은 구 민주당 세력은 아예 노무현을 지지했다.

여기다가 이회창을 대권후보로 만들어 줬던 대쪽 이미지 역시 아들의 병역 문제와 관련한 노무현 진영의 흑색선전으로 인해 국민의 역린을 건드려 무너지게 되며 끝내 대권에 실패하고 만다. 이회창의 두 아들의 불법적인 병역기피 의혹은 결국 법적으로 무혐의 처분으로 종결되었다. 그리고 진실이 밝혀졌을 땐 이미 모든 게 끝났다.

이회창이 당권을 장악하던 때까지의 한나라당은 수구 이미지가 약한, 정상적인 보수주의/자유주의 노선의 정당이었다.(지역 기반도 TK/군부가 아닌 PK 중심의 민주화 세력이었다) 김영삼을 이은 보수정당 내 민주계 라인이었던데다 이회창 본인이 독재정권과 싸웠던 사람이라 빨갱이 몰이나 독재정권 찬양 등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고, 이 때문에 박근혜가 입당하고 나서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 이후 대선에 출마하였던 보수진영의 인사들과 비교하자면, 명확하고 구체적인 국가관 및 정책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명박, 박근혜, 홍준표로 갈수록 점점 질이 떨어진다는 말도 나올 정도.(유승민은 일단 논외.)[12] 정치에 민감한 민주당 지지자이나 중도보수 지지자들 사이에서 이명박근혜가 아니라 이회창[13]정도의 인물이 대통령이 됐으면 보수정당이 일본 자민당처럼 계속 장기집권했을 가능성 또는 최소한 보수가 제대로 망가지는 사태는 피할 수도 있었다는 말도 나온다. 후에 '우리 당이 수구적으로 변해간다' 라며 한나라당에서 민주당으로 이탈하는 정치인이 생기거나 한나라당이 권위주의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도 거의 대부분 이회창이 연패를 당하고 한나라당에서 물러난 후부터이다. 이명박이나 홍준표도 민주계와 관련이 있거나 그와 협력은 했던 관계이지만 하도 권위주의/종북몰이 등의 논란 때문에 김영삼-이회창과 전혀 다른 평가를 받는 이유도 그렇다. 이회창이 무너지고 나서 한나라당 내 민주계 세력이 약해지고 친이와 함께 다소 권위주의 노선을 걷고, 후에는 친박이 장악하며 수구 색채가 완전히 커져버린 것 때문에 후대에 이런 평가가 나오는 것이다. 김영삼-이회창의 한나라당 시기에는 워낙에 친박 지지층과 척을 져서 경북에서 반감을 샀던 때가 있었다.

물론, 이에 대해선 보수정권의 치명적이고 영원할 약점인 "차떼기[14]총풍사건[15]같은 부패 스캔들은 도대체 뭐냐?"는 지적도 있다. 대권후보로서 한 삽질은 비록 대통령이 되지 못했음에도 역대급으로 컸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회창 본인이 있던 시기의 한나라당은 정상적인 보수주의/자유주의 정당이었다고 하지만, 그 한나라당이 수구화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회창에게 있었다. 이회창 본인이 1997년 신한국당 대선 경선에서 승리한 데에는 민정계의 단합과 지지가 있기 때문이었고, 1998년부터는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동진정책에 맞서 기존 지지층의 재결합을 위해 본격적으로 민정계와 구 유신계에 손을 내밀었다. 김영삼이 독재정권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정치인들을 무작정 내쫓고 탄압하며[16] 반감을 샀었다. 사실 당장 박근혜를 영입하고 공천을 준 사람이 이회창이다. 물론, 박근혜는 그때 당시 좋은 이미지였기에 김대중도 박근혜를 영입하려 애썼고, 박근혜가 군부 출신을 정계에 다시 데려오는 것을 보고 독재정권에 반감이 있던 이회창이 갈등을 만들긴 했지만. 당시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동진정책이 매우 거셌고 특히 김대중의 국민회의는 정체성과 무관하게 세력확장을 위해 민정계 출신 인사들을 대거 영입하는 초강수를 두고 있었기에 이를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회창 본인이 있을 적에는 이회창의 강력한 당 장악력과 카리스마 및 독재정권에 비판적이던 민주계의 정신적 구심점으로서 한나라당은 정상적인 보수정당일 수 있었다. 그러나 2002년 대선 패배로 강력한 구심력이었던 이회창이 은퇴하면서 한나라당은 대혼란에 빠지고 결국 당 주도권은 박근혜와 민정계에게 넘어가고 만다. 남은 민주계도 차악으로 이명박을 지원했지만 이명박의 권위주의를 겪으며 하나하나 이탈하게 되고 박근혜에게 숙청당하게 된다.

의외로 현재 한국에선 생각하기 힘들지만, 보수정당 인물임에도 대선 당시에는 수많은 연예인이나 유명인들의 지지선언을 받았다. 심현섭, 강성범, 박성호, 김대희,[17] 이승철, 설운도, 이용식, 홍서범, 조갑경, 변진섭, 박철, 김인문, 심권호, 유남규, 베이비복스(!)[18] 등. 보통 유명인이나 연예인들은 민주당 후보들을 많이 지지하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19] 물론, 이회창이 라이벌이었던 노무현처럼 독재정권에 맞서고 양심을 지키던 법조인이라는 전적이 있기도 했지만, 현재 한국이 미국처럼 보수 지지 연예인이 이순재, 송해 정도 급의 거물급이거나 김흥국처럼 재밌는 이미지로 보수 색채를 상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힘들다는 걸 고려하다면 그만큼 이회창이 진보적인 유권자들 사이에서도 우호적인 인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명박 및 박근혜가 국정원 같은 공공기관을 악용했지만 김영삼과 이회창은 안기부/국정원을 민주화시켰고 압수수색이 가능할 정도로 만들어 놓았었다. 2010년대 후반 들어 보수정당의 여러 문제점 속에서 YS-이회창이 계속 재평가되는 이유도 그들이 독재정권/반민주주의에 맞섰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4. 논란

1997년 대선 당시 이회창이 전두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감옥에 있는 전두환이 이회창에게 "고맙다"며 "우리 때문에 정치적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냐" 화답할 만큼 매우 기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옥중 전 씨 사면 건의 이회창 대표에 고맙다, 구두 메세지 그에 대해 이회창 후보도 전두환의 화답에 "고생 많으시다. 추석 때 나오시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다"고 전두환 측에게 화답한 것으로 밝혀졌다. 李(이) 대표-全(전) 씨 비밀메시지 오갔다 사면파동 후 변호사 통해 동아일보 1997.9.24 당시 한겨레에서는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추석전 전두환 노태우 두분의 석방을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게 됐다"전두환 측근들에게 화답하였다고 보도했다.사면 노력해줘 고맙다” 전 씨, 이회창 대표에 인사말 1997.9.24 한겨레

이회창 비판자들에게는 "엘리트주의에 극도로 찌든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디어오늘>의 기사에 따르면 고려대 출신 기자에게 "고려대 나오고도 기자 할 수 있느냐??"라는 말까지 했다고 전해진다.[20] 기자는 못해도 대통령은 할 수 있다 만약 사실이라면 고작 고졸김대중노무현에게 패배한 것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고려대 출신한테 진 것도 충격이고 그러나 이회창이 영입한 비서울대 출신 인사들이 많고 (예컨대 연세대 최경환 경제부총리나 고려대 오세훈 전 서울시장) 이회창의 분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최측근인 이흥주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은 명지대, 오랜 세월 이회창을 보좌한 이채관 총재 정무특별보좌관은 경남대를 나왔다는 사실로 볼 때, 공적으로는 유능한 사람을 두루 뽑은 편이었으나 사적으로 마음 속 깊이 묻혀 있던 엘리트주의가 술자리를 빌어 표출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취중진담

5.16 쿠데타 직후 혁명재판소 1심 재판관으로서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사법살인행위 중 하나로 꼽히는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에 대한 사형선고에 참여한 바 있다. 참고자료 이 사건에 대해 이회창 본인은 초임 판사 시절에 혁명재판소 재판관으로 사실상 강제로 차출된 것이며 자신으로서는 해당 판결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고 해명하였다. 즉, 법률의 위헌적 소급적용에 의한 정치탄압 및 사법살인극에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는 본인도 부정하지 못한 이회창의 대표적인 흑역사이다.

5. 여담

  • 한나라당 총재를 지내던 2001년, 전주 이씨 종친회인 대동종약원 주최 행사에 참여해 한 발언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기사
  • 2002년 대선 당시 선거철의 정치인이면 누구나 그러듯이 시장을 찾아가 친서민 유세를 벌였는데, 한 상인에게 흙 묻은 생오이를 건네받고는 그대로 우적우적 씹어먹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었다. 인터넷에선 '이회창 흙오이 사건' 이라고 유명해졌으며 "분명히 봤다"라는 증언만 있을 뿐 진귀한 장면을 담은 사진 등 증거가 없어서 '인터넷 3대 미스터리' 로 화자되기도 한다. 이후 흙오이는 선거철만 되면 심심치않게 시장에 등장하는 정치인을 빗대거나, 정황은 아는데 찾을 수 없는 자료를 지칭하는 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하지만 기사 당시 대선 경쟁과정에 있던 상대당의 대변인의 발언에서 보듯이 꼭 카더라 통신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 2002년 이회창 대통령 후보가 5월 15일 서울 은평구 대조동 동명여자정보산업고등학교를 방문해 일일교사로 강의를 했다. 350여 명의 여학생들이 모인 강당에서 시작을 농담으로 해서 분위기를 풀어보자고 한말이 ""여러분들을 보니 명랑하고 '빠순이 부대'가 많은 것 같아요". "우리 당에도 많아요. 지방 돌아다녀보면 오빠부대 많아요. (저는) 오빠가 아니라 '늙빠'지. 늙은 오빠….". 분위기가 썰렁해지자 그냥 준비해온 강연을 하고 마쳤다. 기자들에게 비보도를 요청했으나 얼마뒤 새어 나가서 세상에 공개되었다. 알고보니 정병국 의원이 어린 여학생들 눈높이에 맞춘다고 써줬다고 한다. 이회창은 '10대 나이의 오빠부대'를 뜻하는 말로 썼는데, 학생들은 '술집 여종업원' 또는 '과도한 팬질을 하는 여학생'으로 그 말을 받아 들인것이다.
  • 자유선진당 시절 한 위키러는 모 사회단체 체육대회에 축사를 하는 이회창을 보고는 "저 양반 명색이 대통령 될 뻔한 사람이었는데 여기서 동네 체육대회 축사나 하는 걸 보니 한 편으로 측은(?)해 보였다"고.
  •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노무현에겐 '노사모'가 있었더라면 이회창에겐 '창사랑'이라는 팬클럽이 있었다. 이회창의 정치 입문과 동시에 천리안·나우누리 등 포털 사이트에 처음 생겼다.기사 하지만 지지자 연령대가 다소 높은 탓이었는지 노사모만큼의 활동량은 보이지 못했고 미풍에 그치고 말았다. 노무현 지지세가 강했던 젊은층 사이에서는 '이회충', 이회창 지지자들을 '회충알'이라고 부르면서 비토가 심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 존속은 되었는지 17대 대선에서 정계복귀에는 제법 역할을 했다.
  • 지금도 그렇지만 어떠한 사이트를 들어갈 때 광고배너창 하단에는 "창 닫기"라는 버튼이 있다. 그런데 당시 대선 정국 때 보수 언론사들의 사이트의 광고배너창 하단에는 이 버튼의 문구가 "창 한 번만 띄워주기"로 바뀌었다. 물론 대선이 끝나고 "창 닫기"라는 문구로 돌아왔다(...)
  • 박정희 군사정부하에서 사법살인 당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재판 때 배석판사 중 한 명이었다는 게 1997년 대선 과정에서 알려지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 자신의 본의가 아니라 강제로 하게 된 재판이고, 배석판사로 아무런 권한도 없었다고 해명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조용수 항목 참조.
  •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이회창이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미니홈피에 유세문구 중 하나로 킹왕昌!드립을 날리기도 했다. (킹왕짱은 2007~2008년 전후로 인기 좀 있었던 유행어였다. 게다가 이 무렵엔 각 커뮤니티와 젊은층 사이에서 反MB정서가 만연해 있었는데, 이회창은 이명박에 비하면 당시엔 상대적으로 수구적인 색채가 많이 옅어(?)보이는지라 이회충이라며 욕을 먹었던 16대 대선에 비하면 젊은층 사이에서도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21]
  • 정계의 거두였지만 재산은 많지 않은 정도를 넘어서 일반인으로서는 감당도 못 할 양의 채무를 지니고 있다. 08년 국회의원 출마 당시 재산신고 때 무려 채무만 120억 원(...)을 신고한 바 있다. 해명에 따르면 이는 대선 공탁금 등을 환급받지 못한 07년말 기준이라 그렇고 이후 환급받아 남은 빚은 20억 원 정도라고 하나 20억 원도 보통 큰 금액이 아니다. 대선에 3번이나 출마한 데다 마지막 1번은 무소속으로 출마해 모든 것을 차떼기도 못 받고자기 돈으로 해야 했으니 그게 전부 빚으로 남는 것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함 없는 생활을 누리고 있는데 그 이유야 뭐.
  • 2007년 대선 후보 당시 조선일보에서 진행한 문답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아이돌 스타로 원더걸스를 꼽았다. 참고로 2002년에는 이효리.
  • 2002년 대선 때 모 산부인과 의사가 '이회창 아들처럼 179cm의 키에 45kg의 몸무게를 지닌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불가능하다'라는 내용의 <179cm 45kg 인간 미이라>(...)라는 책을 출간했다가 공직선거법위반죄로 유죄판결(집행유예)을 받은 바 있다.#
  • 롄잔: 대만의 정치인인데, 만년 콩라인정치적 행보가 이회창과 흡사하다. 항목 참고.
  • 힐러리 클린턴, 리오넬 조스팽, 앨 고어: 셋 다 차기 대통령으로 가장 유력했지만, 끝내 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이회창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보수 성향의 이회창과는 달리 이 셋은 진보 성향이다.
  • 김종필: 대한민국의 정치인인데 이회창과 정치적 행보가 너무나 흡사하다. 이회창이 김영삼에게 천거되었듯 김종필도 박정희에게 천거되었고, 대통령과 가깝고도 먼 사람이기도 했다. 게다가 둘 다 충청권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국무총리 경력으로 유명하다. 애당초 이쪽이 원조 '대통령 빼고 다 해본 사람'이다.
  • 이주일 - 이회창과 목소리가 상당히 비슷하다.
  • 보수주의자인 것과는 별개로 동성애에 대해선 긍정적인 인식을 보였다. 2001년 딴지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어준 총수가 국방부장관이 동성연애자라면 어떻게 할 것이냐? 라는 질문에 국방부장관이 동성연애를 하는데 군의 전력이 약화가 되지 않는다면 딱히 문제될 것 없지 않느냐 라는 답변을 했다. 김어준은 이 답변을 듣고 공적 임무와 사적 자연인 사이의 경계에 대한 기준을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는 평을 내렸다. 괜히 이회창이 진보적인 유권자들에게도 긍정적인 인식이 있던 게 아니었던 셈 #
  • 이회창의 동생인 경제학자 이회성은 2015년 10월 IPCC(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 의장으로 선출되어 재임중이다. 이는 한국인이 국제기구의 수장이 된 5번째 사례이다.

5.1. 이인제와의 관계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진

둘의 관계는 3개의 짤방으로 요약 가능하다.

15대 대선 당시 이인제는 최연소 노동부 장관에 이어 민선 초대 경기도지사에 당선되면서 떠오르는 정치인으로서 주가를 올리던 시절이었다, 이는 이회창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적어도 대선 이전까지는 같은 당원으로서 교류가 있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선술한 15대 대선의 과정 속에서 둘은 경쟁하게 되었고 네거티브를 퍼붓는 관계가 되어버렸다. 위에도 서술했듯 결과는 둘 다 낙선하여 결국 상처만 남긴 싸움이 되어버렸다.

이후 이인제는 '피닉제'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철새테크를 탔고, 5년이 지난 16대 대선에서는 새천년민주당 소속이 되어 네임밸류를 밀어붙이며 경선 초창기엔 독보적인 지지율을 보이며 한나라당 경선을 통과한 이회창과 리턴매치가 성사될 '뻔'했다. 그러나 이인제는 노무현의 영남을 중심으로 강세를 몰아친 노풍을 이기지 못하여 경선에서 떨어지며 무산되었다. 낙선한 이인제는 탈당하여 자민련으로 갈아타 과거 행적에 대해 거듭 사과한 뒤 이회창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럼에도 이회창은 낙선했지만...

다시 5년이 흘러 17대 대선 시즌이 되자 새천년민주당[22]으로 돌아간 이인제는 출마를 선언하며 정식후보가 되어 기호 4번을 부여받았다. 초반에는 출신지인 충청도를 기반으로 10%를 상회하는 무시할 수 없는 지지율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회창이 출마하면서 판세는 완전히 달라졌다. 상대적으로 네임밸류가 컸던 포스를 몰아붙이며 충청도의 지지기반을 전부 흡수해 버린 것이다. 이로서 이인제의 지지율은 소수점대로 폭삭 무너졌으며, 이회창은 무소속 후보로서 중도층을 어필하며 15.1%의 득표율로 마감한 반면 이인제는 손써보지 못한 채 0.7%의 득표율을 기록하는 굴욕(?)을 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탈당하여 무소속 국회의원 자리를 지낸 이인제는 19대 총선을 앞두고 이회창이 이끄는[23][24] 자유선진당에 입당했다.[25] 이로서 껄끄러웠던 관계였던 둘의 사이는 개선되었고 14년 만에 동지로 회복되었다. 어쨌든 이인제로선 총선에서 당선되어 국회생활을 이어갔고 이후 이름을 바꾼 선진통일당 대표로도 활동했다.

이회창은 박근혜 대선후보를 지지하며 새누리당으로 돌아갔고, 이인제도 이끄는 당을 새누리당과 합당시키면서 둘은 새누리당에서 한솥밥을 먹는 신분을 이어갔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인제는 정계활동을 이어나가는 반면에 이회창은 은퇴하며 평당원으로만 지낸다는 것. 악연과 인연을 거듭하는 것을 보면 정말 질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인제도 최고의원직을 맡으며 신박으로서의 모습을 보이다가 20대 총선에서 더민주 김종민 후보에게 패해서 사실상 정계은퇴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여진다...고 추측했지만 친박계의 대권주자로 경선에 도전한다.

역설적이게도 1997년여당 신한국당에서 민정계의 대표주자로서 대선후보로 달리던 이회창은 2017년에는 유승민 지지를 선언하며 바른정당으로 옮기고, 민주계의 대표주자로서 신당을 창당하여 독자 출마를 감행했던 이인제가 자유한국당에서 대권주자로 달리다 경선 탈락했다.

사실 이인제를 사랑한다 카더라

6.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신한국당

6,783,730 (34.5%)

당선 (1번)

[26]

1997

제15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9,935,718 (38.7%)

낙선 (2위)

1999

6월 재보궐선거 (서울 송파 갑 국회의원)

한나라당

42,901 (61.5%)

당선 (1위)

[27]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한나라당

8,083,609 (37.9%)

당선 (1번)

[28]

2002

제16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11,443,297 (46.6%)

낙선 (2위)

2007

제17대 대통령 선거

무소속

3,559,963 (15.1%)

낙선 (3위)

[29]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홍성·예산)

자유선진당

49,908 (61.0%)

당선 (1위)

국회의원 선거 전승, 대통령 선거 전패

7. 관련 문서

  • 관련 사건 목록은 여기에 잘 정리되어 있다.


  1. [1] 당선 무효
  2. [2] 아버지 이홍규 씨가 자유당에게 밉보였다는 이유로 파직당했던 위기로부터 장면이 구해주면서, 가족 차원에서 가톨릭에 입교하였다고 한다. 장면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유명하다.
  3. [3] 대선 출마로 인해 1997년 11월 사퇴.
  4. [4] 1997년 6월 대선 출마로 인해 사퇴.
  5. [5] 대선 출마로 2002년 5월 사퇴.
  6. [6] 대선 출마로 2002년 11월 사퇴.
  7. [7] 이회창 본인이 정치 활동을 할 당시 대선 후보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정말 안습한데 김영삼의 경우 13대 대선에서 낙선했지만 14대 대선에서 당선에 성공했고 김대중의 경우 무려 4수 만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회창 본인보다 정치 경력도 짧은 노무현이명박, 박근혜의 경우는 단 1번 만에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문재인 역시 2번 만에 당선되었다. 대권에 3번 도전하고 3번 모두 떨어지며 대통령이 못 된 케이스는 거의 이회창이 유일하다. 이인제, 손학규, 권영길은?
  8. [8] 역대 대통령 낙선 후보들 득표 순으로도 18대 대선문재인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9. [9] 민정계로도 인식하는 사람도 있고, 민주계로 인식하는 사람도 있으나, 민주계의 대표인 김영삼과의 여러 갈등 및 일부 민정계 끌어안기 등 때문일 뿐, 엘리트주의적일 뿐이지 수구적인 이미지도 거의 없고 군부 독재세력에도 비판적인 행보를 보면 사실상 민주계 인물이나 마찬가지이다. 당장 민주계들이 YS 퇴임 후 이회창을 중심으로 뭉쳤고, 이회창 자체가 민정계의 핵심인 군부/안기부 등을 구속수사한 장본인이었으니.
  10. [10] 물론 이회창이 당권을 잡았던 시절의 15대 대선, 16대 대선에서는 TK도 이회창에게 표를 몰아주기는 했다.
  11. [11] 제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은 40만 표차로 이회창을 이겼는데, 여기에는 DJP연합으로 인한 충청권에서의 우세와 이인제가 500만 표를 들고 나간 것이 크게 작용했다. 만약 둘 중 하나라도 되지 않았다면 김대중 후보가 이회창을 이기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12. [12] 참고로 유승민은 이회창이 영입한 인물이다. 이회창은 19대 대선에서 유승민 지지를 선언하며 바른정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13. [13] 한 사람 더 이야기하자면 노무현을 상대로 한 색깔론 공세와 피닉제 행보에 친박 루트를 타기 전 이인제 정도만 되었어도 나라가 이렇게 시궁창으로 되지 않았을꺼라는 민주당 지지자들이나 중도보수 지지자들이 많다.
  14. [14] 이회창을 위시한 한나라 당의 선거 캠프에서 선거 자금을 차째로 뇌물로 받은 것이 드러난 사건
  15. [15] 한나라당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북한에다 무력 시위를 할 것을 요청하는 밀서를 보낸 게 드러난 사건
  16. [16] 결국 별 나쁜 일 저지르지도 않은 김종필, 박태준, 정주영은 김영삼에게 숙청당하고 나중에 김대중의 편으로 돌아서서 일제히 연합을 맺고 후임인 이회창의 한나라당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17. [17] 심현섭이 주도한 이 흐름에 김철호·이병진·황승환·이태식·김숙·김미진 등이 참석했다. #
  18. [18] 물론 베이비복스는 항목에서도 보듯이 소속사 DR뮤직에 의해 동원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19. [19] 한국 뿐 아니라 다른 국가들도 유명인은 거의 민주당이나 리버럴이 끌어모으기도 한다. 특히 미국은 이게 더 심해서 공화당을 지지하는 연예인을 찾기가 힘들다. 물론, 이런 연예인들의 지지가 반감으로 나타난 예도 있는데 그것이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였던 2016년 미국 대선이다.
  20. [20] 이 말은 나중에 김용민이 성대모사로 이회창 흉내를 낼 때 자주 써먹는 레퍼토리 중에 하나다.
  21. [21] 그러나 1997년 대선 당시 이회창이 전두환 사면에 대해서 전두환과 직접 저렇게 거래를 했던 것을 생각해보자.
  22. [22] 당시에는 열린우리당과 갈라진 뒤로 주요인사가 전부 빠져나가 지리멸렬해진 상태였다.
  23. [23] 입당한 2011년 당시에는 이회창은 이미 총재직에서 물러난 상태.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하곤 했지만...
  24. [24] 자유선진당국민중심연합과 합당할 때 동시에 합류했다.
  25. [25] 참고로 이인제는 자민련과 자유선진당과 합당한 국민중심당에 잠시 몸담갔던 시절이 있었다.
  26. [26] 1997년 11월 의원직 사퇴 (대선출마)
  27. [27] 전임자 홍준표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
  28. [28] 2002년 11월 의원직 사퇴 (대선출마)
  29. [29] 국민중심당과 선거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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