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제국

영국령 인도 제국
British Empire of India

국기

문장

[1]

1757년 ~ 1858년[2]
/1858년 ~ 1947년[3]

국가

하느님이여
왕을 지켜주소서

위치

인도 반도

수도

콜카타(1858 - 1912)
뉴델리(1912 - 1947)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명목상: 인도 황제(영국 왕)
사실상: 총독

언어

영어,힌디어

주요사건

1767년 인도 지부 영국 동인도 회사 설립
1857년 세포이 항쟁 → 황제의 강제 퇴위
ELC령 인도 성립
1858년 인도 제국 전환
1885년 인도국민회의 성립
1919년~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저항 운동
1935년 신인도통치법 제정
1947년 해체

통화

브리티시 인디안 루피

성립 이전

무굴 제국

멸망 이후

인도 자치령 [4]

1. 개요
2. 영국 통치 시기
3. 독립 이후
4. 그 외
5. 역대 황제
5.1. 역대 부왕

1. 개요

브라질 제국의 후배, 만주국의 선배[5]

1876년부터 1947년까지 70년 넘게 존속한 인도제국. 인도 역사상 최대 판도를 이루었으며 당시 단일 국가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부양하던 대제국.

동시에 대영제국의 최대 식민지.[6]

인도에서는 British Raj(reign)[7]이라 표현한다.

2. 영국 통치 시기

순식간에 독립했던 브라질 제국과 더불어 한 시대에 제국과 식민지 타이틀을 모두 획득한 국가. 만주국도 1934년 국호를 만주제국으로 고쳤기 때문에 괴뢰국도 같은 범주로 포함시키면 이와 같은 케이스가 된다. 또 베트남 역시 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 의해 베트남 제국이라는 괴뢰국이 세워진 적이 있다.

크고 아름다운 인도 제국의 위엄.

지금의 인도 공화국,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미얀마[8]의 4개 나라[9], 아프가니스탄, 네팔, 부탄의 일부 지방, 멀리는 소말리아 앞바다 아라비아 해의 아덴과 페르시아 만 연안의 휴전 오만, 말레이 반도해협식민지까지[10] 포함했던 명실상부 식민지계의 메이저로, 흔히 문화나 민족 차원에서 인도를 칭할 때는 현재의 인도 공화국이 아닌 바로 이 인도 제국을 의미한다. 인도 제국의 최대 면적 [11]

제국이라는 타이틀 탓인지 무굴 제국과 혼동되는 경우가 많은데, 무굴 제국은 인도 제국이 성립하기 전 인도에 존재하던 별개의 이슬람계 주권 국가로서 강역이 인도 제국에 크게 못 미친다. 세계사 시험에 자주 페이크로 출제되는 사항이니 유의하자.

그래도 무굴 제국 시기까지는 형식적으로 동인도 회사인도척식주식회사가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고 국가로서의 주권은 존중하는 것이었으나, 인도 제국은 대영제국 정부가 동인도 회사를 해산시키고 직접 통치하던 속령이다. 지배 주체가 바뀐 계기는 세포이 항쟁.

그리고 이 때부터 섬나라 영국은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국 타이틀을 획득해 황제참칭주장할 수 있었다. "인도 제국이 우리 것인데 우리도 제국 아니냐"는 것으로, 그 이름도 찬란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더쉽게 말하면 걍 자뻑이다. 다만 영국은 관용상 '대영제국'으로 부르는 것과는 달리 스스로 제국을 칭한 바가 없었고, 따라서 영국의 왕인 동시에 인도 제국의 황제로서 인도에서 황제에 오른 것이다.

영국이 세계 최고의 국력임에도 불구하고 자국 왕을 황제로 올리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유럽전국옥새 로마 제국의 정통성과 무관했기 때문이다.[12]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황제를 자처한 제국 - 카롤루스 대제프랑크 왕국과 뒤이은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이나 심지어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까지도 - 은 반드시 로마 제국의 정통 후계임을 자처했다.[13] 잉글랜드 왕과 프랑스 왕이 신성 로마 황제 선거에 도전할지언정 자국의 황제를 자처하지 않았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로, 이런 전통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이르러서 깨진다. 나폴레옹은 스스로 권위를 창출[14]하여 황제에 올랐고, 그나마도 샤를마뉴의 후계자임을 자처했다.

유럽 내 국가들이 제국을 칭하기 위해선 상술했듯이 로마 제국과의 연줄이 있어야 했지만 로마와의 연줄 없이도 황제를 칭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타 문화권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중동이나 인도, 중국 등 유럽 바깥의 타 문화권에서 황제를 칭할 경우 이 제국들은 로마와의 연줄이 없음에도 유럽 국가들은 이들을 제국으로 인정해주었다.[15] 때문에 유럽 바깥의 타문화권인 인도를 제국으로 만들어 영국 국왕이 인도 황제를 겸해도 유럽 국가들은 이에 태클을 걸지 못한다. '인도 황제'라는 자리는 아예 타 문화권의 황제니까. 제국급의 식민지에 제국 타이틀을 달아준 것은 이런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실제적 지배는 영국의 총독이 했지만. 그리고 정작 인도에서는 두 번 다시 황제를 칭할 일이 없어지게 되었다. 인도 총독의 공식직함은 인도 부왕(Viceroy of India). 이전의 인도 총독들과는 달리, 황제를 대리해서 인도 제국을 통치하는 인도 부왕은 오로지 작위를 가진 귀족 만이 취임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역대 부왕 목록에서 귀족들의 작위의 상당수가 1대라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부왕직에 임명되면 작위를 수여하는 방식으로 평민 출신에게도 어느 정도 개방되었다. 평민인 웨이벌 원수도 인도 부왕직에 오르기 위해서 자작위를 받았다.

참고로 식민지에 제국 타이틀을 달아준 건 포르투갈이 만든 브라질 제국이 원조다. 이건 자국용이고 인정을 못받았다. 다만 이쪽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본토는 탈탈 털리고 브라질이 독립을 해서(...) 사실 브라질 왕국으로 할 수도 있었는데 굳이 제국을 자칭한 걸 보면 황제 호칭을 바라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덕분에 인도는 식민지가 되면서 완전 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다.[16] 때문에 인도 전역이 통일된 것은 인도 제국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전 인도를 지배한 왕조가 하나도 없었다.[17] 도저히 융합이 불가능해 보이는 인도 내의 수많은 민족, 종교, 계급, 이해세력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세계를 주름잡던 대영제국의 강력한 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다만 이것은 바꿔서 말하면 '인도'라는 민족성 자체가 대영제국의 식민지배를 통해 탄생했다는 얘기도 된다. 실제로 북부의 아리안계와 남부의 드라비다계는 종교를 제외하면 언어도 문화도 역사도 전혀 다르다.

하지만 그 영국조차도 선교계 최강의 힌두교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다. 적어도 인도 본토에서는 말이다. 더구나 과거에도 불교이슬람교의 도전을 모두 나가떨어지게 만들었다. 이슬람의 입장에서도 인도는 최종던전이다.

인도 제국이 세계사적으로 끼친 가장 유명하면서도 악명높은 업적은 아편이다. 당시 인도는 아편의 주산지였는데, 영국이 중국에 대한 거래대금으로 이걸 뿌리는 바람에 아편전쟁이 터졌고, 결과적으로는 이것이 청나라를 몰락시킨 간접 원인이 되면서 인도 제국은 중국의 붕괴를 사주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외에는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투쟁이라든가 하는 독립운동 이외에 별다른 세계사적 족적이 없다.

그래도 잘 살펴보면 인도인들이 영국군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 편이다. 식민지에서 '영국군'으로 싸운 군인들 중 인도인들이 은근히 많다. 인도 군인들은 청나라를 공격하는데 동원되기도 했으며 이는 중국과 인도 관계가 틀어지는 사실상의 시발점이 되었다. 1차대전 시는 영국 인도군이라는 이름으로 서부 전선, 갈리폴리 등에 투입. 특히 망해가는 오스만 제국과 치열하게 치고박고 싸우고 했던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타인 전선은 대부분의 장병들이 영국령 인도군(British Indian Army) 소속이었기 때문에 이를 두고 투르크와 인두스의 싸움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3. 독립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서 인도인 수십만 명의 피를 뿌리는 등 전쟁 수행에 협조한 것에다 영국 본국에 식민제국의 해체와 민족의 자결권을 주장하는 클레멘트 애틀리의 노동당 내각이 들어선 결과 기나긴 영국의 지배가 끝나고 인도 제국의 독립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독립이 임박했다는 기쁨도 잠시, 인도 제국 내 무슬림들이 무슬림 만의 국가 수립을 요구하면서 인도 제국은 무슬림과 비무슬림 간의 종교 갈등에 휘말리기 시작한다.

무슬림 만의 국가 수립을 놓고 인도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양대 독립운동 단체, 인도국민회의와 전인도무슬림연맹의 정치적 갈등은 인도 전역의 무슬림-비무슬림 간의 종교 갈등으로 번졌고 1946년 8월 16일, 다이렉트 액션 데이가 벌어진 캘커타에서 양측의 무력충돌로 수천 명이 사망한 것을 시작으로 인도 전역에서 무슬림-비무슬림 간의 충돌로 수십만 명이 사망하는 등 준 내전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영국은 인도 제국 내 무슬림 국가와 비무슬림 국가의 별개 독립을 승인했고 1947년 8월 14일, 무슬림 국가인 파키스탄 자치령이, 8월 15일, 비무슬림 국가인 인도 자치령이 수립되면서 인도 제국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2개 국가로 갈라지게 되었다. 독립운동을 지휘했던 간디는 기껏 이뤄놓은 통일 인도의 분열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들었지만 오히려 그에 반감을 느낀 힌두교 극우파 청년 나투람 고드세에게 암살당했고, 통일 인도가 분리되는 과정에서 비무슬림들은 인도 자치령으로, 무슬림들은 파키스탄 자치령으로 대거 이주했다.[18]

마침내 결국 1947년 카슈미르를 놓고 내전과 국제전 성격을 모두 가진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터졌으며 결과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은 지금까지도 확정되지 않았다. 지도를 찾아보면 인도-파키스탄 간 카슈미르의 국경은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두고 동족혐오라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보면 원래 이들은 문화도 종교도 언어도 상당히 이질적인 민족들을 영국점령기 치하에 한 나라로 묶인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이 한국과 일본, 만주, 대만 및 중국 동부 해안을 한 나라로 묶어서 '동아시아 제국' 따위의 이름으로 통치했다면 영국이 떠나간 이후에 이들간의 분열으로 헬게이트가 열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테고 이를 동족혐오라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다.[19]

1962년에는 인도와 중국간에 국경분쟁으로 전쟁이 터졌고(중인전쟁 또는 중국-인도 국경분쟁), 이때 인도는 한 마디로 개발살났다. 그리고 이때 문제가 되었던 국경 역시 지금도 점선이다. 이것은 역사상 최초로 인도계 국가와 중국이 국가 주도의 전쟁을 수행한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1965년에는 파키스탄이 인도가 중국에게 털렸던 것을 보고 자신감을 얻었는지, 석유가 묻혀있는 인도 서부 구자라트 주를 합병하려고 인도를 공격하면서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한다. 이 전쟁은 UN소련의 중재로 유야무야 끝났다.

인도 제국의 분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이번엔 파키스탄 내부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인도 제국 시절에는 벵골 주에 속했으며 파키스탄 독립 후 동파키스탄 지역이었던 방글라데시가 서파키스탄 중심의 파키스탄 정부의 지배와 지역 차별을 못 이기고 1971년 독립을 선언하면서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결국 1979년 12월 인도가 분쟁에 개입, 파키스탄을 공격하여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확대되었고 인도는 방글라데시를 파키스탄의 지배에서 독립시켜주었다. 그 결과 인도는 방글라데시를 우군으로 끌어들였지만[20] 파키스탄과의 관계는 더더욱 악화되었다.

이 같은 일련의 분열 과정은 인도 제국 시절의 역사와도 긴밀한 관련이 있다. 바로 1905년 영국이 인도의 지역감정을 조장할 목적으로 실시한 벵골 분할령이 그것. 인도인들의 통합을 막고 분열을 야기할 목적으로 실시한 이 정책은 아주 기가 막히게 효과를 봐서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3국 분열 모두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대망의 1998년, 3개월 차이로 인도와 파키스탄은 핵무기를 개발했다! 종교적 이견에서 출발한 갈등은 마침내 종교가 지구멸망을 초래할 수준에 도달해버린 것이다.[21] 만약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면 진원지로 가장 유력한 후보가 카슈미르라고 말 하기도 한다.

한편 인도 제국을 비롯한 영국의 남아시아 식민지는 1947년에 해체되었지만, 대신 인도 제국은 인도, 파키스탄, 실론(스리랑카)로 분할되어 각각 영국의 자치령이 되었다. 그래서 인도, 파키스탄, 스리랑카는 한동안 모두 형식적으로 영국 국왕을 왕으로 모시는 왕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각국은 헌법을 개정하는 방식으로 자치령 체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헌법을 제정하고 공화국이 되었는데, 인도는 1950년에 인도 공화국으로, 파키스탄은 1956년에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으로, 스리랑카는 1972년에 스리랑카 민주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다. 그러나 1931년의 웨스트민스터 헌장 이후 영국의 자치령은 내정 자치권뿐만 아니라 외교권과 군사권도 갖는 등 사실상의 독립국가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각국의 독립 시점은 자치령이 된 1947년(스리랑카는 1948년)으로 간주된다.

4. 그 외

인도 제국은 알게 모르게 한국의 역사에도 간접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바로 1905년 2차 영일동맹 당시 영국이 인도 제국의 지배를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일본의 조선 지배를 공인해버린 것.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입김이 강했던 영국이 한국 보호국화를 인정해버렸다.[22] 그렇다고 한일병합을 긍정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영국은 1910년 한일병합 당시에는 일본에 항의할 것을 고려해보기도 했다. 물론 30년 뒤 일본은 보기 좋게 약속을 파기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흔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인도까지 정복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알렉산더 대왕은 우리가 흔히 인도라고 부르는 곳의 본토에 침입하기는커녕 지금의 파키스탄 언저리만 살짝 찔러보고 회군해버렸다.[23][24] 다만 당시에는 이란 동쪽에서 인더스강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 인도였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인도를 정복한게 맞기는 하다. 그 유명한 간다라 미술도 본국인 인도 입장에서는 파키스탄 일부 지방의 변방 민속 예술 수준에 불과하다.

엘리자베스 1세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그 시절 인도는 영국 식민지도 아니었다 이는 토마스 칼라일의 말이 와전된 것이다.

지배국인 영국이 그래도 비교적 평화롭게 독립을 허용해줘서 인지, 인도 제국에서 갈라진 네 나라 모두 영연방에 가입해 있는 상태. 파키스탄은 인도와의 불화 문제로 1972년 연방을 탈퇴했으나 2004년에 복귀했다.

인도 제국에서 갈라진 4국은 하나같이 인구가 어마어마하다. 네 나라 중 가장 인구가 적은 미얀마도 5500만 명으로 대한민국보다 많고 인도 동쪽에 조그맣게 끼어있는 방글라데시 인구가 1억 6천만.[25] [26] [27] 파키스탄의 인구가 2억 인도는 뭐... 이 인구를 다 합치면 17억에 육박하며, 중국 인구를 압도한다. 더구나 산아제한정책으로 출산율이 세대교체율을 밑도는 중국과는 달리 이들 인도계 국가는 하루가 다르게 인구 폭증, 해마다 수천만 단위로 인구가 늘어난다. 인도 하나의 인구만으로도 2024년쯤 중국을 앞지르게 될 것이라고 한다(…).

만약 인도 제국이 간디의 소망대로 분열 없이 쭉 이어졌다면 중국은 인구 콩라인이 되었을지도. 아니, 현재 서서히 콩라인이 되어가는 중이다. 그래서 문명 5의 간디 특성이 그렇게 된 거였구나

5. 역대 황제

황제/여제

즉위연월일

퇴위연월일

재위기간

대관식(Delhi Durbar)

빅토리아 여왕

1876.5.1

1901.1.22

24년 21일

1876.5.1

에드워드 7세

1901.1.22

1910.5.6

9년 104일

1903.1.1

조지 5세

1910.5.6

1936.1.20

25년 259일

1911.12.12

에드워드 8세

1936.1.20

1936.12.11

10개월 22일

없음

조지 6세

1936.12.11

1947.8.14

10년 249일

없음

5.1. 역대 부왕

작위

이름

임기시작

임기종료

1대 캐닝 백작
(1st Earl Canning)

찰스 존 캐닝
(Charles John Canning)

1858. 11. 1

1862. 3. 21

8대 엘긴 백작
(8th Earl of Elgin)

제임스 브루스
(James Bruce)

1862. 3. 21

1863. 11. 20

1대 막달라의 네이피어 남작
(1st Baron Napier of Magdala)

로버트 코널리스 네이피어
(Robert Cornelis Napier)

1862. 11. 21

1863. 12. 2

윌리엄 토머스 데니슨 경
(Sir William Thomas Denison)

1863. 12. 2

1864. 1 12

1대 로런스 남작
(1st Baron Lawrence)

존 레어드 메어 로런스
(John Laird Mair Lawrence)

1864. 1. 12

1869. 1. 12

6대 마요 백작
(6th Earl of Mayo)

리처드 사우스웰 버크
(Richard Southwell Bourke)

1869. 1. 12

1872. 2. 8

존 스트레이치 경 [28]
(Sir John Strachey)

1872. 2. 9

1872. 2. 23

10대 네이피어 경
(10th Lord Napier)

프랜시스 네이피어[29]
(Francis Napier)

1872. 2. 24

1872. 5. 3

1대 노스브룩 백작
(1st Earl of Northbrook)

토마스 조지 베어링
(Thomas George Baring)

1872. 5. 3

1876. 4. 12

1대 리턴 백작
(1st Earl of Lytton)

에드워드 로버트 리튼 불워리튼
(Edward Robert Lytton Bulwer-Lytton)

1876. 4. 12

1880. 6. 8

1대 리폰 후작
(1st Marquess of Ripon)

조지 프레더릭 새뮤얼 로빈슨
(George Frederick Samuel Robinson)

1880. 6. 8

1884. 12. 13

1대 더퍼린과 아바 후작
(1st Marquess of Dufferin and Ava)

프레더릭 해밀턴템플블랙우드
(Frederick Hamilton
-Temple-Blackwood)

1884. 12. 13

1888. 12. 10

5대 랜스다운 후작[30]
(5th Marquess of Lansdowne)

헨리 찰스 키스 패티피츠모리스
(Henry Charles Keith Petty-Fitzmaurice)

1888. 12. 10

1894. 10. 11

9대 엘긴 백작
(9th Earl of Elgin)

빅터 알렉산더 브루스
(Victor Alexander Bruce)

1894. 10. 11

1899. 1. 6

1대 케들스턴의 커즌 후작
(1st Marquess Curzon of Kedleston)

조지 너새니얼 커즌
(George Nathaniel Curzon)

1899. 1. 6

1905. 11. 18

4대 민토 백작
(4th Earl of Minto)

길버트 존 엘리엇머리킨마운드
(Gilbert John Elliot-Murray-Kynynmound)

1905. 11. 18

1910. 11. 23

1대 펜스허스트의 하딩 남작
(1st Baron Hardinge of Penshurst)

찰스 하딩
(Charles Hardinge)

1910. 11. 23

1916. 4. 4

1대 첼름스퍼드 자작
(1st Viscount Chelmsford)

프레더릭 네이피어 세시저
(Frederic John Napier Thesiger)

1916. 4. 4

1921. 4. 2

1대 리딩 후작
(1st Marquess of Reading)

루퍼스 아이작스
(Rufus Isaacs)

1921. 4. 2

1926. 4. 3

1대 핼리팩스 백작
(1st Earl of Halifax)

에드워드 프레더릭 린들리 우드
(Edward Frederick Lindley Wood)

1926. 4. 3

1931. 4. 18

1대 윌링든 후작
(1st Marquess of Willingdon)

프리먼 프리먼토머스
(Freeman Freeman-Thomas)

1931. 4. 18

1936. 4. 18

2대 린리스고 후작
(2nd Marquess of Linlithgow)

빅터 알렉산더 존 호프
(Victor Alexander John Hope)

1936. 4. 18

1943. 10. 1

1대 웨이벌 백작
(1st Earl Wavell)

아치볼드 퍼시벌 웨이벌
(Archibald Percival Wavell)

1943. 10. 1

1947. 2. 21

1대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31]
(1st Earl Mountbatten of Burma)

루이스 프랜시스 앨버트 빅터 니컬러스 조지 마운트배튼
(Louis Francis Albert Victor Nicholas George Mountbatten)

1947. 2. 21

1947. 8. 15


  1. [1] 빨강색은 영국 직접 통치, 보라색은 토후국을 통한 사실상의 영국 통치. 세포이 항쟁 이후 영국 편을 든 토후국은 영국의 지배권 하에 두어 남겨 놓았다.
  2. [2] 영국 동인도 회사
  3. [3] 인도 제국
  4. [4] 인도는 1950년까지 영국 왕을 모셨고 그때까지의 국명은 인도 자치령이였다.
  5. [5] 식민지에게 제국 타이틀을 달아준 건 브라질이 원조다. 다만 이쪽은 2개월만에 바로 독립을 해서 그렇지만.
  6. [6] 면적은 캐나다호주가 훨씬 넓지만, 인구는 저 두 나라를 합쳐도 방글라데시의 절반도 안 된다.
  7. [7] 번역하자면 영국 치하, 영제시대 정도.
  8. [8] 미얀마 전역이 인도 제국에 편입된 시기도 있었으나 편입 시기가 인도 본토보다 훨씬 늦고 1937년에는 인도 제국과 별도로 영국의 직할령이 된다.
  9. [9] 의외로 인도 반도 바로 밑에 있는 스리랑카는 인도 제국의 일부가 아닌 영국령 실론이라는 별개의 식민지였다.
  10. [10] 여기는 1862년 인도 제국과 별개의 식민지로 독립한다.
  11. [11] 일부 대인도주의자 인도인들은 이 영토를 되찾아 한다고 주장한다
  12. [12] 영국 자체적으로 황제칭호를 부여하고 했던 시도가 있었다. 조지 3세 시절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거긴 하지만)프랑스 왕위 타이틀을 포기해야 했고 프랑스 혁명의 영향이 당시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고있던 아일랜드에 오는걸 차단하기 위해서 영국의 왕위와 아일랜드 왕위를 하나로 합치게 되었다. 이렇게 왕위 2개를 잃어버린 왕을 위로하고자 영국 의회에서 자국 군주에게 황제 칭호를 부여하고자 했으나 하노버 선제후(신성 로마 제국 산하의 봉신국)라는 이중직위 때문에 외교마찰을 우려한 조지 3세에 의해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13. [13] 자세한 것은 제3의 로마 항목을 참조.
  14. [14] 좋게 말해서 권위를 창출한거지, 풀어쓰자면 다른 유럽국가들을 힘으로 찍어눌러서 황제에 오른 것이었다. 교황도 납치해서는 제관은 직접 썼다.
  15. [15] 무굴 제국의 미르자, 페르시아의 샤, 명과 청의 천자, 일본의 덴노, 에티오피아의 네구스 네게스티 등 유럽 바깥의 황제급의 칭호를 유럽의 황제와 똑같이 취급한 것도 바로 이 이유에서였다. 오스만의 경우 (일단은)유럽 국가이지만 로마의 정통성과 무관했음에도 황제로 인정해주었는데 오스만 황제가 중동의 황제 격인 칼리파를 칭했기 때문이었다.
  16. [16] 포르투갈(고아, 다만, 디우, 다드라나가르하벨리)이나 프랑스가 지배한 곳(퐁디셰리, 야나옹, 마에, 카라칼, 찬데르나고르)도 있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통일이라고 할수는 없지만 포르투갈과 프랑스가 점유한 지역은 영국이 점유한 지역에 비하면 그야말로 코딱지만큼 작았던지라...
  17. [17] 마우리아 왕조무굴 제국이 최남단 일대를 제외한 인도 전역을 통일하여 통일 직전까지 간 적은 있었다.
  18. [18] 종교적 신념에 따라 자신들의 조국으로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은 대략 1500만 명. 비공식적으로는 2천만 명까지 잡기도 한다. 당시 통일 인도의 인구가 4억 정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전국민의 4~5%가 휘말린 것인데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집단 이주였다.
  19. [19] 오늘날 현재 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의 상당수 국가들이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아직까지도 내전과 전쟁, 민족분쟁, 종교분쟁, 영토분쟁등을 겪고 있다.
  20. [20] 그렇지만 방글라데시와 인도 역시 방글라데시가 독립한 이후에는 영토 분쟁과 국경 분쟁으로 관계가 안 좋아진 적도 있었다. 자세한건 방글라데시 문서 참조
  21. [21] 다만 아직 둘 다 보유하기는 했어도 투사력은 둘째 치고 위력이 확실한지에 대해서도 말이 많은 상황이다. 특히 인도는 어떨지 몰라도 파키스탄은.
  22. [22] 엄밀히 말하면 이미 반석에 오른 인도의 통치보다는 '인도의 국경선을 보장', 즉 영국이 병합한 지 얼마 안 된 미얀마의 병합을 승인하는 목적이 강했다. 참고로 영일 동맹의 가장 본질적인 조건은 영국 제1의 적이었던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는 것이었다.
  23. [23] 포루스 왕이 이끄는 코끼리 군단에게 의외의 고전을 한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사실 포루스 왕은 인도의 군벌 중 가장 약한 녀석이었지! "라는 소문에 경악해 겁에 질려버렸고(사실 이건 전투에서 진 포루스 왕의 병사들이 뻥을 친 것이다 포루스 왕의 펀자브 왕국은 당시 인도 내의 수많은 국가들 중 강하기로는 한 손가락 안에 꼽히는 나라였다), 천하의 알렉산더도 끝내 부하들의 사기를 되돌리지 못하고 바빌론으로 회군한 후 병사한다.
  24. [24] 물론 마케도니아 병사들이 펀자브 왕국의 병사들의 거짓말을 들었다고 사기가 바닥을 칠 정도로 바보도 아니였고 이들에게 심각하게 당한 것도 아니였다. 문제는 북서부 지역을 공략하고 이 거짓말을 들은 뒤 만난 다음 상대가 그 펀자브 왕국을 털어먹던 당시 인도 북부의 끝판왕 난다 왕국이였던 게 문제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난다 왕국의 군세 앞에서는 여태까지의 기세가 꺾이고 말았고, 난다 왕국의 강력한 군사력에 발이 멈춘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사기도 뚝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25. [25] 세계 7~8위. 방글라데시 인구가 러시아를 능가한다. 러시아 지도와 방글라데시 지도를 번갈아 비교해보면서 놀라주자. 일부 출처에서는 1억 6500만까지도 올라간다.
  26. [26] 더군다나 여기는 더 놀랄 일이 따로 있다. 바티칸 같은 도시국가를 제외하면 이 나라가 세계 인구밀도 1위이다. km²당 인구가 1100명에 달한다.
  27. [27] 참고로 2위가 대한민국(남한)이다.
  28. [28] 전임자 마요 백작이 암살당해 부왕 자리가 공석이 되자 임시로 맡음.
  29. [29] 수학에서의 log, 즉 로거리듬을 만든 존 네이피어의 후손이다. 단, 존 네이피어의 부계 직계 계승은 아니다. 6대 네이피어 경은 모계 계승이었다.
  30. [30] 대한제국사에 관심이 있다면 알겠지만 하야시와 함께 제 1차 영일동맹을 체결한 사람(...)맞다. 체결 당시 외무상
  31. [31] 피의 일요일 사건 보복으로 IRA에게 폭탄으로 끔살당한 그 양반이다. 그래서 암살당했을 때도 아일랜드 좌파들은 천벌 받았다며 고인드립을 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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