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카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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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완틴수유
Tawantinsuyu
[1]

국기

1438년 ~ 1533년

위치

서남아메리카 대륙 일부

수도

쿠스코

정치 체제

군주제

국가 원수

사파 잉카[2]

언어

케추아어

민족

잉카족

종교

잉카 토속 종교

주요 사건

1438년 건국
1529년 ~ 1532년 남북전쟁
1532년 카하마르카 전투
1534년 멸망[3]
(1572년 황실 폐지)

성립 이전

쿠스코 왕국

멸망 이후

에스파냐 제국의 식민지

1. 개요
2. 역사와 사회
3. 종교
4. 기술과 문화
5. 몰락
6. 군사
7. 후예
8. 역대 통치자들
9. 그 밖

1. 개요

보통 잉카 제국이라 하나 진짜 이름은 타완틴수유로 이는 4방위의 나라란 뜻이다. 잉카는 쿤티수유, 친차수유, 안티수유, 코야수유 네 개의 수유(땅)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잉카는 이 나라를 다스린 귀족들을 일컫던 이름이지 황제를 '잉카'라 했던 것이 아니다. 황제는 사파 잉카라고 따로 이야기했으며 모든 잉카는 자신들이 태양신 인티의 자손이라 여겼다.

수도는 쿠스코로 이곳을 세상의 배꼽이라 생각했다.[4]

또한 케추아족이 잉카를 세웠다고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잉카족이 뒷날 케추아족의 문화를 받아들인 것일 뿐이며 사실 케추아족 같은 것도 엄밀히 말해선 존재한 적 없다. 케추아는 지역 특성을 일컫는 이름과 부족명을 헷갈려 했던 스페인 사람들이 오해해서 붙인 이름을 '케추아족' 본인들이 받아들여버린 것이다.

2. 역사와 사회

타완틴수유는 잉카족이 쿠스코에 자리를 잡은 뒤 끊임없는 정복전쟁을 통해 커갔고 남으로 칠레 남부, 북으로는 콜롬비아 서남부까지 뻗어나갔다.[5] 새로 황제가 된 잉카는 거의 언제나 전쟁을 해야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황위 계승에서 밀린 혈족에서 분가해서 법적으론 '고아'가 되어버리고, 또한 그렇게 자신을 떠나보낸 황족에게 이전 사파 잉카의 개인 재산(국가 재산 말고)을 다 물려줘야했기 때문이다.

황제가 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선 '알거지'가 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어떻게든 정복을 해서 자기 땅을 얻어야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잉카가 사실은 둘이었고 잉카 가운데 하나는 쿠스코에 머물고 다른 하나는 지방에 있는 이원제였다는 설을 요즘 정설로 받아 들이는 분위기가 커 가고 있다.

잉카 가운데 하나는 하난(Hanan)이라 했고 다른 하나는 우린(Urin)이라 하였는데, 하난은 정복 활동에 종사하고, 우린은 수도에 머무르며 농경 활동에 관련 제사를 맡았다고 한다. 하난과 우린 계승 의식은 틴쿠이(Tinkuy)라 했는데 겉보기엔 전쟁과도 같았고, 승자는 하난이 되었다고 한다.[6]

이 설에 따르면 아타우알파는 형제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자가 아니라 틴쿠이 의식을 통해 결정된 하난 잉카였다. 페루 역사학자 프랭클린 피즈의 간략한 페루 현대사에서는 이런 잉카 이원왕정을 오해 반, 고의 반으로 완전히 왜곡해 버린 게 스페인 측의 식민사학이었다고 하는데... 하지만 역사 연구가 상당수가 그렇듯 아직 다른 의견도 있고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믿거나 말거나.

잉카는 시민들을 미타(mit'a)라는 노동력 단위의 세금으로 관리했다. 잉카의 시민들은 1년에 108일 동안 국가에 자신의 노동력을 바쳐야 했다. 도로를 닦고, 요새를 건설하고, 신전을 건설하는 등 노동을 해야했다. 또한, 노동을 하는 날짜를 가족들에게 나누어줄 수도 있었는데, 가족이 4명일 경우 1인당 27일을 일하고, 가족이 12명이면 1인당 9일을 일하고, 가족이 54명이면 1인당 이틀을 일한다(15~60세의 남자에게만 해당한다). 이런 이유로 잉카의 가족은 대부분 대가족이었다.

잉카 정부는 주민을 원시적이지만 효과적인 방법으로 관리했다. 10개의 푸릭(가구)을 충카라고 불렀으며, 충카의 관리자를 '충카 카마욕'이라 하였다. 그리고 충카 카마욕, 파차카 쿠라카(100명), 와랑가 쿠라카(1,000명), 우누 쿠라카(10,000명)가 각각 10개의 하위 쿠라카들을 관리하였다. 이것이 잘 되고 있는지 감시하는 사람이 '모든 것을 보는 자'라는뜻의 '토코이리콕'이며, 우누 쿠라카와 토코이리콕의 상관이 전국 88개 지방수도를 담당하는 '토크리콕', 토크리콕의 위에는 '아푸'라고 하는 4개의 수유(쿤티수유, 친차수유, 안티수유, 코야수유)를 관리하는, 사파 잉카 바로 아래에 위치하는 최고 귀족들이 존재했다.

잉카는 보통 포위 전술로 지역 사람들을 쫄쫄 굶긴 다음에 살살 달래서 알아서 무릎꿇게 하는 식으로 정복했다. 그리고 그곳 풍습을 인정하고 그곳의 우두머리를 쿠라카(curaca)라는 관리로 인정하여 고향을 다스리게 했다.가장 작은 행정 단위로는 아이유라는 집성촌 비슷한 것을 만들고 한 사람이 열명씩을 책임지고 이런 책임자 몇몇을 또 다른 한 사람이 책임지고 하는 식으로 사회를 구성했다.

아이유는 위에서도 말했듯 집성촌 같은 것으로 잉카가 정해준 땅을 마을에서 함께 관리했다. 마을 땅, 종교행사에 쓸 물건을 얻으려고 쓰는 땅, 잉카의 땅으로 나뉘었는데 뒤에 나오는 두 땅을 일구는 게 세금이었다. 물건이나 돈(그런 게 있지도 않았지만)으로 내는 세금은 없었다는 게 정설.

전쟁에 징병되는 것도 세금의 하나. 잉카는 백성들이 놀고 먹는 것을 싫어하여 엄청 가난한 사람들은 해마다 벼룩(이?)을 잡아서 바치게 했다.[7]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늙었거나(50세 이상이 기준) 병든 사람, 과부들과 부모를 잃은 고아들은 마을에서 무조건 도와주도록 되어있었다. 어쩌다 가뭄이라도 나면 마을 창고를 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면 잉카의 창고를 열어 먹을 것을 나눠주었다.

또한 제국차원에서 의료제도도 상당한 수준으로 정비되어서 평민들도 병이 들면 당대 기준으로 상당한 의료혜택을 받을수 있었다.

이처럼 신분제 국가이기는 해도 평민들을 위한 사회복지 제도는 잘 정비되어 있었고 토지도 적절하게 배분되어 빈부격차도 적은 데다가 거지는 없었고 잉카인들은 심각한 격차없이 비슷한 생활수준을 누렸다. 유럽에서 현대적인 형태의 사회복지제도가 도입된 것이 19세기 중반에서부터 20세기 중반 시기라는 걸 감안하면 수백 년은 족히 앞선 것이라고 볼 수 있었으며[8], 빈부격차가 심각한 현대의 중남미 국가와도 비교되는 모습이기에 잉카제국을 신권적 사회주의 국가니 사회주의 제국이라고 칭하는 후대의 사가들도 있지만, 잉카제국의 복지정책 혹은 선정을 입증하는 것으로 언급되어 온 활동 가운데(흉년에 대비해 곡물을 모아뒀다가 기근에 공동체에 푸는 등의) 많은 것이 사실은 잉카정복 이전의 마을 혹은 아이유들이 전통적으로 수행해 온 기능들이었다.

잉카의 지배하에서 아이유 사회 내의 복지정책은 계획적으로 그 구성원 가운데 일부를 제거하고 그 자리를 외부인들로 채우는 방식(미타마에 체제)으로 인해 약화되었다. 다양한 규모의 토지가 마을에서 탈취되어 잉카 국가나 국가 사원에 귀속되었다. 아이유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땅과 쿠라카의 땅 이외에도 잉카 국가나 사원 토지도 경작해야 했다.

잉카제국은 또한 마을 주민들의 강제 노동을 이용하여 산비탈을 개간하거나 계단식 밭을 일구어 새 경작지를 만들었고,이 새 경작지는 당연하게 쿠라카나 잉카의 군사 지도자들 혹은 잉카제국에 공을 세운 귀족들에게 돌아갔다.이 사유지들은 아이유 공동제에서가 아니라 야나코나라는 잉카제국에 의해 탄생한 새로운 노예 계층에 의해 경작되었다.[9]

농사 이외에도 평민은 미타라는 제도하에서 길을 닦고 관개용 운하나 성채 건설에 무급으로 동원되고, 광산에서 일해야 했으며, 병사들이나 귀족들에게 입힐 일정량의 옷을 생산하여 국가에 바칠 의무도 있었다.

이런 통치 방식에서 사회주의나 복지국가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다. 그것은 평민이 아닌 잉카 황족, 귀족, 사제, 전사, 관리를 우대하는 방식이었다. 잉카제국이 한 일은 국가의 땅이나 사원의 땅에서 농민들의 강제 노동으로 생산된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를 세우는 것뿐이었다. 이 창고에 보관된 옷과 곡식은 군대, 황제를 위해 일하는 수공업자, 공공사업을 위해 징모된 노동자, 쿠스코와 그 외 도시에 거주하는 관리들을 입히고 먹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경제정책의 법과 현실에 거리가 생기는 것은 동아시아 지역의 정전제균전제와 유사점을 찾을 수 있고 제도의 흥망조차 비슷한 부분이 있다. 이런 동아시아의 제도 역시 사회의 안정을 위한 공평한 분배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귀족이나 성직자라는 특권계층이 항상 존재했고 이들은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이용해 세금은 덜 내며 세습도 가능한 사유지를 대대로 늘려나가다 길면 수백년 쯤 지나는 동안 토지는 모조리 귀족 소유의 면세 대농장으로, 백성 역시 국가 납세를 하지 않는 노예로 변화해 국가 조세수입도 거덜나면서 왕조가 붕괴하는 일들이 반복적으로 벌어졌다.

3. 종교

나라 종교로 인티(태양)를 섬겼고 사파 잉카의 형제나 그 밖의 가까운 친척이 대사제 일을 맡아 했다. 야마나 그 밖의 동물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일도 없지않아 있었으나 메시카(아즈텍)처럼 무더기로 죽여대는 수준은 아니었다. 사파 잉카가 아프거나 하면 하늘로 보내는 사자로 사람을 뽑아 희생시켰다. 멕시코 고원 일대의 아즈텍이나 마야에서 태양신님 목마르실 텐데 주스라도 드세요라는 식의 대책없는 살육은 아니었다.

순장 풍습 또한 있었으나 자발적(?)이었고 이제 그만 자살하라고 정부 쪽에서 말렸다고 한다.

사파 잉카의 권한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반면, 그만큼 사파 잉카를 얽매는 풍습도 많았다.

가령 사파 잉카는 태양과 동일시되었으므로, 모든 물건은 그의 손이 닿는 순간 버려졌다. 태양이 하루에 한 번 지면 다시 새로운 태양이 뜬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파 잉카가 하루 입은 옷은 하루가 지나고 나면 불태워졌으며, 사파 잉카가 신던 신발도 역시 하루가 지나면 불태워졌다. 사파 잉카가 한번 동침한 여자도 마찬가지로 하루가 지나면 그걸로 끝났다.[10] 사파 잉카는 스스로 걸을 수 없었으며, 어딜 가든 황금 가마를 타고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누구든 사파 잉카에게 직접 말을 거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차스키(Chasqiy)라고 불린 파발꾼들은 사파 잉카에게 보고할 때 먼저 '대리인'에게 보고했고, 그 대리인이 사파 잉카에게 다시 보고하면, 사파 잉카가 이에 대한 조치사항을 대리인에게 지시하고, 그 대리인이 다시 차스끼에게 전달하는 식으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 아무리 고관이라 하더라도 사파 잉카의 얼굴을 직접 보는 행위 또한 금지되어 있었다. 사파잉카를 알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허락이 필요했다.

그 밖에 스페인의 콘키스타도르들이 수녀로 잘못 안 여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아클라(Aclla)라고 한다. 이들은 예쁘거나 핏줄이 좋거나 해서 뽑혔다. 죽을 때까지 처녀로 한 곳에 모여 살면서 고급 직물을 짜고, 술을 빚고, 이런 저런 일을 해야 했다. 이 중 일부는 사파 잉카가 후궁으로 삼거나 쿠라카들에게 역시 첩으로 선물하기도 했다. 하렘과는 좀 다른 것이 아클라들이 사는 수녀원(?) 같은 것이 곳곳에 있었고 잉카라도 맘대로 이 여자들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아클라를 건드리는 보통 남자는 처형, 그 가족까지 모두 죽였다. 한 때 이를 중동의 하렘과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잉카가 여성을 매우 억압적으로 대했다는 근거로 보는 시각도 있었으나 현재는 사실이 아니라는 게 정설이다. 오히려 최근의 발굴 결과에 따르면 잉카 제국 이전 시기에 존재했던 문명 중 하나인 모치카 문명에서는 여제들도 많았다.

죽은 사파 잉카들은 미라로 만들어 살아있었을 때처럼 모셨다. 그리고 이따금씩 '무덤'(비록 땅 위에 있긴 하지만)에서 끌어내어 말도 걸고 밥도 주고(?)하였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춤 추자고 끌어내는 것 말고는 뭐든지 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도 흔히 돌아가신 분들을 살아계신 것처럼 부르고 밥 차려드리고 하니까 그렇게 이상하게만 볼 것은 아닐성 싶다.

4. 기술과 문화

바퀴를 쓰지 않고(즉, 수레가 없었다)[11] 도 쓰지 않아서 뒤떨어진 문명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미 정밀한 태양력을 사용하는 고도의 천문학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땅심이 쉽게 빠지지 않는 계단식 밭이나 도시를 흐른 수도 시설, 면도칼 하나도 들어가기 힘들 만큼 정교하게 짜맞춘 바위벽[12] 같은 것을 보면 단지 발달 분야가 다를 뿐이지 어떤 면에선 당대 유럽보다 앞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잉카의 채취 기술은 스페인이 이 지역을 정복한 뒤로도 한참 동안 계속 쓰였고 특히 풍부한 은광이 있지만 산소가 희박한 고산 지대 포토시에서 각광받았다. 당시의 스페인식 기술로는 산소가 부족한 이 지역에서 고열을 일으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72년 획기적인 수은 아말감법이 개발되면서부터는 잉카의 재래식 은 채취법은 씨가 말라버린다. 여담으로 이때 생산된 은은 가격혁명으로 유럽 경제를 뒤흔들어 놓고, 몇 세기가 지나 이 은은 모두 명나라, 청나라대의 중국으로 흘러든다. 그리고 그 은은 아편 사느라 다 날려먹는다. 물론 그렇게 은을 산 영국도 아니나다를까. 식민지 전쟁과 세계대전으로 탕진했다. 물론 그 은을 산 국가는 당연히 미국. 결국 당시에는 있지도 않았던 미국이 최후의 승자가 되었고 오히려 스페인은 은 때문에 산업육성이고 뭐고 안하고 놀자판으로 살다가 처절하게 몰락했으니 잉카 나름의 복수를 하게 된 셈.

타완틴수유 곳곳으로 뻗은 잉카의 도로 역시 유명하다. 마치 로마의 도로들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차도 등으로 이용되는 로마의 도로 처럼 잉카의 도로 역시 상당수가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13] 그러한 도로들은 산을 오르는 데 가장 효율적인 경사를 따라서 놓였기 때문이며, 해발 4000m이상의 고산지대에서 차도는 사치다. 잉카의 다리 제작 기술 또한 대단하였는데 식물섬유를 꼬아서 깊은 낭떠러지나 높은 계곡 사이에 구름다리를 만들수 있었다. 이 들중 상당수가 19세기까지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오늘날에도 험준한곳에 자리잡은 시골동네에서는 꽤 자주 보인다. 해마다 다리를 보수해야만 하는 문제가 있어 현대의 다리와 견주긴 뭣하지만 처음 이 다리를 본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에겐 놀라운 건축 기술로 보였을 것이다. 천길만길 낭떠러지 사이에 어떻게 저런 걸 만들었나 싶었을지도. 무엇보다도 이 다리는 방어에도 효과적이였는데, 외부세력이 침략해올 경우 다리를 끊어버리게되면 상대측 입장에서는 이 마을로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리를 새로 구축하려 한다 하더라도 마을에서 견제가 가능할테고.

잉카 문자가 있었다, 없었다 말이 많은데 아직까지 정설은 없었다는 것이다.[14] 하지만 키푸라 하여 매듭으로 숫자를 나타내는 방법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키푸카마욕이란 관리들이 키푸를 다루었는데 이 방법은 에스파냐의 정복 이후에도 한동안 쓰였고 키푸카마욕들은 지역 정보를 지닌 사람으로서 어느 정도 지위를 누린 듯하다. 돈 잘 벌어 무역선을 산 사람도 있었다.

5. 몰락

상세한 내용은 프란시스코 피사로 항목과 곤살로 피사로 항목을 참조하기 바람.

스페인침략자들쿠바멕시코, 미국 플로리다, 카리브 해 일대 등 북아메리카를 장악한 뒤 눈을 돌린 곳은 광대한 남아메리카 대륙이었다.

앞서 아즈텍을 몰락시킨 에르난 코르테스의 사촌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그 선봉으로, 당시 황제인 아타우알파의 실정과 맞물려 손쉽게 제국을 거덜내버린다.

피사로가 왔을 당시 잉카는 아타우알파가 형 와스카르를 죽이고 황제로 즉위했으며, 내전이 막 끝나 황제가 귀환하던 중이였다. 황제는 당시 10만 군대를 거느렸는데, 그 때문에 200명에 불과한 이들을 경계하지 않았다.다들을 만나 회담을 하였는데 스페인 인들이 기독교 선교를 위하여 성경을 건넸고 이 성경에 어떤 신령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황제는 귀를 대었으나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자 땅에 내던졌고 이것을 본 스페인 인들은 황제를 곧바로 사로잡았다.[15] 이 때 회담장 안에 잉카 근위대 6000명이 있었는데 그들의 석기는 스페인의 강철에 통하지 않았고 4000명이 살육되고 황제는 포로로 잡혀버렸다. 스페인 전사자는 0명이였다.

황제는 생포된 뒤 약 8개월 동안 포로생활을 했는데, 그 동안 서로 친해졌다고..... 이후 그들에게 자신이 감금된 방을 가리키면서 자신을 풀어주면 그 방을 황금으로 채우겠다고 하였다. 피사로는 이것에 동의하였고 그 이후로 계속 황금을 상납받게 되었다. 하지만 콩키스타도르들 간의 의견차이로[16] 황제를 처형하게 되었는데 카톨릭으로 개종을 하고 교수형에 처하게 될것인지, 아니면 개종하지 않고 화형에 처하게 될것인지 선택하게 했으며 황제는 전자를 선택했다.

그렇게 아타우알파를 살해한 다음 그 아우 망코를 괴뢰 왕으로 삼았는데 반전이 일어났다. 망코가 에스파냐인들의 막장 행각에 분개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자신의 아내[17]까지 피사로 형제 중에서 막내인 곤살로 피사로에게 빼앗겼으니 말 다했다. 게다가 피사로 형제에게 항의했다가 구금당했을 때는 욕을 듣는 것도 모자라 스페인인들이 몸에 오줌을 갈기고 수염에 불을 붙이는 등, 갖은 치욕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는 몰래 빌카밤카로 도주하고는 대규모의 반에스파냐 봉기를 선동했다. 잉카군은 수적 우세를 기반으로 스페인군을 곳곳에서 물리쳤고, 한때 쿠스코가 잉카군에게 포위, 함락될 뻔한 상황도 연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잉카 군대에 전염병이 창궐하고, 수 만명이 잉카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며 설상가상으로 전투도 스페인 사상자 5명, 잉카 사상자 4000명을 기록하고 대패해버렸다.

참고로 이 과정에서 잉카군의 화공으로 쿠스코는 건물 한채를 빼고는 모조리 불타서 이후 페루의 거점은 해안도시 리마로 옮겨졌다.

쿠스코에서 약탈한 부를 이용해 신도시 리마의 건설에 착수하던 피사로는 알마그로와의 갈등 끝에 내분이 일어나고 결국 피사로가 사태를 평정하게 되지만 이후 알마그로의 잔당세력에게 끔살당하고 만다.

또한 잉카를 통치하던 그의 형제들도 차례차례 불운을 겪는다. 에르난도는 스페인 감옥에서 징역을 살다가 석방됐고 후안은 망코의 봉기 때 전사했으며, 곤살로는 카를로스 1세가 보낸 총독을 죽인 죄로 처형당했다.

한편 망코는 스페인인 탈영병들[18]을 받아들여 기병화기병을 양성했지만, 자신이 받아들였던 스페인인들에게 암살된다. 아타우알파가 살해되고 망코 잉카가 등극한지 11년째인 1544년의 일이었다.

이후 잠시 잉카는 스페인인들과 화친하지만, 망코 잉카 사후 28년 뒤인 1572년에 전쟁이 재발하였다. 이 전쟁은 2개월 만에 잉카의 패배로 끝났고[19] 이로써 잉카는 완전히 멸망했다.

잉카를 정복한 스페인군들은 이후 일사천리로 남아메리카 전역의 군사력이 약한 부족들을 차례로 짓밟으며 구석구석 쓸고 다닌다. 피사로의 휘하였던 아귀레도 일단의 병력을 끌고 황금이 묻혀있을 남미의 오지를 원정하러 나섰는데, 그 비참한 여정은 영화 아귀레, 신의 분노에 잘 묘사되어 있다.

쿠스코는 에스파냐 양식으로 다시 재건되었지만, 원주민 양식과 에스파냐 양식이 섞여서 상당히 이질감을 준다. 잉카 시대의 석벽 위에 에스파냐 양식의 건축을 지어놓아서 이질적이면서도 독특한 느낌이 든다. 과거 태양신전이었던 코리칸차(Coricancha) 위에는 성당이 들어섰는데, 과거 쿠스코에 지진이 발생했을때 성당은 반쯤 부서졌지만 기단인 코리칸차는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리고 쿠스코 근처에는 꽤 유명한 요새인 삭사이와만(Sacsayhuamán=배부른 송골매 요새)이 남아있다.

6. 군사

잉카의 군대 모집력은 가히 대단했다. 망코가 봉기를 일으켰을 때, 몇 주 만에 20만의 대규모 전사들을 모집할 수 있었던 것도 앞서 말한 '미타'의 힘이다. 잉카 정부는 시민들을 '미타'로 빠르게 불러모아 무장시켰다.

이렇게 모인 시민군을 루나시미(잉카의 공식언어)로 '와카 카마유크'라고 한다. 와카 카마유크는 투석부대, 투창부대보병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투석부대는 루나시미로 '와라카'라고 불렸다. 와라카들이 사용했던 슬링볼라는 위력이 굉장히 강했는데, 상태가 좋지 않은 철제검을 두동강내버릴 정도라고 했다.[20]

투창부대는 아틀라틀과 유사한 투창기를 사용했다. 이들 중에서는 '아이유스'라는 볼라로 무장한 병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 기병 부대였고, 볼라로 기수나 말을 넘어뜨릴 수 있었다고 한다.

보병 대부분은 촌타라는 나무로 만들어진 나무곤봉으로 무장했으며 돌도끼나 나무곤봉에 날카로운 청동을 두른 둔기로 무장한 경우도 있었다.

잉카 군대에서는 궁수를 거의 쓰지 않았다. 궁수들은 안티스(아마존)에서 지원받은 부대로, 극소수였다. 하지만 궁수와 같은 사격 병력이 소수에 불과하니 에스파냐인들한테 큰 피해를 입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7. 후예

프란시스코 피사로 일당에게 멸망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스페인군들의 입성 2년만에 멸망한 아즈텍 제국과는 다르게 쿠스코 점령 후에도 망코 잉카, 투팍 아마루 등의 살아남은 잉카인들이 상당히 오랫동안 항전해서 잉카 전역이 스페인에게 정복될때까지 거의 4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스페인 식민지배가 확고해진 18세기에도 투팍 아마루의 후손을 자처한 원주민 독립운동가 투팍 아마루 2세(1742~1781)에 의해 원주민 봉기가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페루와 우루과이에서 투팍 아마루 2세의 이름을 딴 무장단체가 등장하는 등[21] 라틴아메리카에서 투팍 아마루는 해방과 혁명의 상징이다. 이 잉카인들이 숨긴 황금의 양이 어마어마할 것이라 하고, 이를 찾아 헤매다 하이럼 빙험이 마추픽추를 발견하기도 했다. 근데 정말 숨긴 황금이 있었는지 지금에 와선 알 수 없다.

8. 역대 통치자들

파차쿠티 이전에 잉카를 다스렸던 통치자들의 재위기간 및 생몰년도는 정확한 기록이 부족한 상태이다. 역대 통치자 목록에 니난 쿠요치가 우아이나 카팍, 우아스카르 사이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우아이나 카팍이 죽고 니난 쿠요치는 즉위하기 전에 전염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사실상 통치하지도 못했다.

순서

이름

재위기간

생몰년도

비고

01

망코 카팍
Manco Cápac

1200년?~1230년?

? ~ 1230년?

잉카 건국시조

02

신치 로카
Sinchi Roca

1230년?~1260년?

? ~ 1260년?

03

료케 유판키
Lloque Yupanqui

1260년? ~ 1290년?

? ~ 1290년?

04

마이타 카팍
Mayta Cápac

1290년?~1320년?

? ~ 1320년?

05

카팍 유판키
Cápac Yupanqui

1320년? ~ 1350년?

? ~ 1350년?

06

잉카 로카
Inca Roca

1350년? ~ 1380년?

? ~ 1380년?

하난 왕조의 시조

07

야와르 우아카
Yáhuar Huácac

1380년?~1410년?

? ~ 1410년?

08

비라코차
Viracocha

1410년? ~ 1438년

? ~ 1438년

09

파차쿠티
Pachacuti

1438년 ~ 1471년

? ~ 1471년

잉카 제국 성립

10

투팍 잉카 유판키
Túpac Inca Yupanqui

1471년 ~ 1493년

? ~ 1493년

11

우아이나 카팍
Huayna Capac

1493년 ~ 1527년

1468년? ~ 1527년

전염병으로 사망

12

우아스카르
Huáscar

1527년 ~ 1532년

1503년 ~ 1532년

아타우알파에게 폐위됨

13

아타우알파
Atahualpa

1532년 ~ 1533년

1500년? ~ 1533년

카하마르카에서 에스파냐인들에게 살해됨

14

투팍 우알파
Túpac Huallpa

1533년

? ~ 1533년

에스파냐의 괴뢰황제

15

망코 잉카 유판키
Manco Inca Yupanqui

1533년 ~ 1544년

1516년~1544년

에스파냐의 괴뢰황제였으나 에스파냐인들에게 대항하여 봉기한 뒤 빌카밤바에서 망명정부 수립

대립황제

파우유 잉카
Paullu Inca

1536년 ~ 1549년

1518년 ~ 1549년

에스파냐의 괴뢰황제로 망코 잉카 유판키의 빌카밤바 망명정부와 대립함

16

사이리 투팍
Sayri Túpac

1544년 ~ 1560년

1535년? ~ 1560년

빌카밤바를 떠나 에스파냐에게 영지를 받음

17

티투 쿠시
Titu Cusi

1563년 ~ 1571년

1529년 ~ 1571년

의문사

18

투팍 아마루
Túpac Amaru

1571년 ~ 1572년

1545년 ~ 1572년

잉카 제국의 완전한 멸망

9. 그 밖

사파 잉카 가운데 둘은 이름이 참 희한했다. 한 사람은 이름 뜻이 '쓸모없는 놈'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재앙'에 가까웠는데 그렇게 이름이 붙은 사연이 있긴 하지만 현대인이 보기엔 참 희한해 보인다.[22]

베네수엘라 아야쿠초 전자도서관에서 잉카에 대한 연대기를 내려받아 볼 수 있다. 에스파냐어가 되는 사람은 심심하면 보도록 하자.

테메레르 시리즈에서는 황금도시 언급도 나오는 등 번영하고 있다. 영국인들이 여기서 용알좀 사려다 실패했다.

KOEI사의 대항해시대 4의 주인공 티알 와만 챠스카가 멸망한 잉카제국의 왕족으로 등장한다.

페루의 국민 음료수인 잉카 콜라가 이 문명에서 이미지를 따온 음료수다. 코카콜라가 페루에서 이기질 못해 결국 생산 회사 지분을 사서 소유해버렸을 정도로 인기가 좋다.

총,균,쇠에 따르면 아즈텍 제국과는 4,200km의 밀림과 고산지대를 사이에 두고 있고 조선해운업이 발달한 것도 아니라 서로 있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현재 잉카 제국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였었던 페루는 잉카 제국은 페루의 역사라며 현재까지도 잉카 문명의 적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예 해외에 페루 관광 홍보를 하면서 잉카 제국과 마추픽추, 쿠스코와 같은 잉카 제국 시대의 유적지와 유물들을 앞세우며 잉카의 후손이라고 대외적으로 홍보할 정도. 하지만 스페인 침략 이전 페루와 같이 잉카 제국의 영토에 속해 있었던 에콰도르,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콜롬비아가 페루의 이러한 행동에 지금 역사 도둑질하냐며, 잉카는 페루뿐만 아니라 스페인 식민지화 이전 남미 공통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따라서 페루의 잉카 제국 적통 주장에 반대하고 있다.[23] 해당 국가들 중 특히 잉카 제국 역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는 볼리비아인데, 볼리비아는 케추아계 및 아이마라계 주민들이 주류인 점에서 페루와 매우 가깝다.


  1. [1] 잉카제국 언어인 케추아어의 한글 및 로마자 표기
  2. [2] 케추아어로 대충 '위대한 존재'란 뜻이다.
  3. [3] 사파 잉카 황실은 그대로 유지
  4. [4] 쿠스코는 케추아어로 배꼽을 의미한다. 관계 없는 이야기일지 모르나 리마(Lima)는 'Rimac'을 스페인인들이 잘못 부른 것이다. Rimac은 '왕들의 도시'란 뜻이었다고 한다.
  5. [5] 그렇지만 북으로 남으로 쭉쭉 뻣어나갔던 타완틴수유도 현재의 칠레 중남부와 아르헨티나 서남부 일대에 살았던 마푸체족만은 이기지 못한 채 결국 정복을 포기해버렸고 마푸체족은 스페인에게도 맹렬하게 저항하는 데 성공하여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6. [6] 위에서 나왔지만 사피 잉카는 그 지위에 오르면 빈털터리가 되어서 정복을 통해 재산을 모아야 했다. 이러니 하난이 더 좋을 수 밖에
  7. [7] 이상해보이겠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벼룩이 많이 꼬이는건 당연하고 벼룩이 많이 꼬이면 전염병이 퍼지기 쉬운 만큼 벼룩을 바치게 함으로서 전염병이 퍼지는 것일 줄이는 효과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8. [8] 아닌 게 아니라 현대의 중남미 국가들보다 나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 데다가, 유럽 기준으로 봐도 제도상으로는 19세기보다 나았을 지경이다.
  9. [9] 스페인인들에 의해 '영원한 하인'이라고 불린 이들은 아이유 공동체 내에서 차출해서 잉카 지배층에 보내야 했으며 이들은 잉카의 사원이나 궁궐에서 일하거나 개인적인 봉사를 수행했다.
  10. [10] 죽이거나 한 건 아니고, 태양의 처녀로 만들어 평생 사파 잉카를 위해 이런저런 잡일을 했다.당연한 말이지만 진짜로 죽이면 자식을 얻을 수가 없다.
  11. [11] 그래서 발빠른 사람을 써서 물자 수송을 했다. 그들을 차스키라 부른다.
  12. [12] 한때 마법이나 초고대문명의 기술이니 그랬지만, 만드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구리나 석재 끌로 깎아내고 모래로 맞춰지는 면을 연마한 거다.
  13. [13] 물론 그 모두가 차도로 쓰인다는 것은 아니고 보통 보도로 쓰인다. 로마의 도로는 말, 혹은 전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넓다랗게 설계되었지만, 교통수단으로서의 가축이 아메리카에는 없었기 때문
  14. [14] 중앙아메리카 대륙과 다르게 남미 서부일대에서는 발전된 형태의 문자가 쓰이지 않았고, 그래서 기록물들도 남은것이 없기 때문에 잉카 이전의 역사는 서사시나 설화, 신화나 고고학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다.
  15. [15] 또는 스페인인이 성경을 건네며 '여기엔 하느님의 말씀이 있다'라고 했고, 황제는 그 말씀을 들으려 성경에 귀를 대었으나 들리지 않자 땅에 던졌다는 설도 있다. 사실 이는 황제의 무례한 행동이라기 보다는 나름대로 그쪽의 전통에 의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피사로 항목 참조.
  16. [16] 프란시스코 피사로 항목에도 나온 말이지만 그는 아타우왈파 처형에는 극렬 반대한 사람이다. 이는 당시 스페인인들의 기록에도 남아있다.
  17. [17] 후궁은 많았으나 그중에서 본부인은 따로 있었다.
  18. [18] 특히 피사로를 살해하고 도주한 알마그로의 잔당세력들
  19. [19] 잉카 제국에 반감이 컸던 지방의 도시들과 부족들이 스페인에 가담한게 큰 원인이었다.
  20. [20] 에스파냐인 병사들이 이 무기에 의해서 큰 피해를 입었다. 망코의 봉기 당시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동생인 후안도 이 무기에 의해 사망했다.
  21. [21] 정작 잉카 문명의 영역권이었고 틈만 나면 자국을 잉카 제국의 후예들이라고 자처하는 페루와 다르게 우루과이는 잉카 제국의 일부에 속한 이력도 없다.
  22. [22] 사실 동아시아도 이름을 천하게 지으면 오래 산다는 미신 때문에 아기에게 희한한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23. [23] 심지어 페루와 에콰도르, 칠레와 볼리비아, 이렇게 페루는 스페인의 식민지배에서 독립 후 주변국들과 을 수없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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