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롱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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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 왕조의 역대 황제

응우옌씨 정권 10대 목왕 완복양

1대 세조 자롱제 응우옌푹아인

2대 성조 민망 황제 완복교

묘호

세조(世祖)

시호

개천홍도입기수총신문성무준덕융공지인대효고황제
(開天弘道立紀垂統神文聖武俊德隆功至仁大孝高皇帝)

능호

천수릉(天授陵)

응우옌(Nguyễn, 阮/완)

푹아인(Phúc Ánh, 福暎/복영)

연호

자롱(Gia Long, 嘉隆/가륭)

생몰기간

1762년 ~ 1820년

재위기간

1802년 ~ 1820년

1. 개요
2. 생애
3. 평가

1. 개요

250년 베트남판 남북조시대의 최후의 승자

베트남 역사상 대표 근성가이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초대 황제.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고황제(高皇帝), 이름은 완복영(응우옌푹아인, Nguyễn Phúc Ánh, 阮福暎) 혹은 완영(응우옌아인, Nguyễn Ánh, 阮暎). 완복영이 재위기간 동안에 사용한 연호는 가륭(嘉隆, Gia Long, 지아 롱)이며, 베트남 남부를 통치하던 응우옌씨 정권의 마지막 우두머리인 응우옌푹즈엉(Nguyễn Phúc Dương, 阮福暘/완복양)의 친척으로, 망국의 왕자의 신분으로 외국의 군대를 끌어들여 여러번 대규모로 떠이썬 왕조(西山朝, Tây Sơn)를 공격하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공격하여 결국 떠이썬 왕조와의 대규모 전쟁에서 승리하여 떠이썬 왕조의 대월을 멸망시키고 응우옌씨 베트남을 창건했다.

2. 생애

1762년 생으로 남부 응우옌씨 정권[1] 제 8대 왕[2] 세종 응우옌푹코앗(Nguyễn Phúc Khoát, 阮福濶)의 손자이자, 왕자 흥조 응우옌푹루언(Nguyễn Phúc Luân, 阮福㫻)의 아들이다. 아버지 응우옌푹루언은 권력다툼에서 밀려나서 감금당하고서 1765년, 옥중에 사망하였다.

이후 쯔엉푹로안[3]을 비롯한 간신들에게 나라가 휘둘리고 관리들의 횡포가 극에 달하여, 결국 1771년 농민 반란인 떠이썬 당의 난이 일어났다. 떠이썬 당은 응우옌씨 정권의 수도인 자딘(Gia Định, 嘉定)[4]를 함락하면서 안남정권은 멸망했고, 왕족들은 대부분 학살당했다. 살아남은 근성가이 응우옌푹아인은 베트남을 탈출하여 시암(태국)으로 망명하였고, 그가 15살인 1777년부터 기구한 유년기를 보냈다. 근성의 부흥운동의 시작 이후 떠이썬 당의 급진적인 세력확대를 두려워한 시암은 응우옌푹아인에게 군대를 지원해준다.

응우옌푹아인은 1780년대부터 시암의 짜끄리 왕조의 국왕 라마 1세로부터 지원 받은 시암군을 이용해 끊임없이 떠이썬 왕조의 국경을 공격하여 베트남 남부 일대를 일시적으로 장악하지만, 곧이어 떠이썬 군에게 밀려 실패한다. 1782년, 사덱 전투에서 떠이썬 왕조의 황제 응우옌반후에[5]이 이끄는 대월군에게 또 대패하고 시암군 2만명을 잃는다.

그러나 포기를 모르던 응우옌푹아인은 기회를 엿보다가 미얀마, 마카오, 시암, 베트남 등지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프랑스 주교인 피에르 피뇨 드 베엔(Pierre Pigneau de Behaine)과 만나 친분을 쌓아갔다. 이 친분을 계기로 서방 세력에서 보낸 우수한 화력을 가진 용병들이라는 든든한 원군을 얻었고, 모든 준비를 마친 응우옌푹아인의 용병들은 1789년에 드디어 대월 침공을 감행한다.

마침 사덱 전투에서 자신을 격파한 응우옌푹아인의 커다란 적수였던 떠이썬 왕조의 황제 응우옌반후에가 1792년에 병사하자, 전세는 그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광중황제와 중앙황제의 사망한 이후에 내분으로 인해서 떠이썬 왕조는 점차 세력이 약화됐으며, 때를 놓치지 않고 응우옌푹아인은 베트남 남부의 대도시이자, 과거 안남국의 수도였던 자딘을 수복하고, 그대로 북진하여 떠이썬 왕조의 수도 푸쑤언(Phú Xuân, 富春)[6]을 함락시켰다. 1802년에는 탕롱(하노이)을 함락시켰고, 베트남 전국을 통일하고, 푸쑤언을 수도로 하였고, 월남 최후의 왕조인 응우옌 왕조를 열었다. 세 번이나 도전한 끝에 마침내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이후 후에에서 살고 있던 떠이썬 왕조의 황족 및 인척들을 연좌제로 잡아들여서 피의 숙청을 벌이면서 과거 자신의 일족들을 죽였던 떠이썬 왕조에 대한 복수를 완료했다.

베트남 통일 후에는 일단 베트남의 북쪽 지방에 북성총진, 베트남의 남쪽 지방에는 자딘성총진을 설치하여 지방의 대폭적인 자치권을 인정하였고, 중앙정부의 힘은 약하였다. 1804년에는 청나라로부터 월남국왕(越南國王)에 책봉되었다[7]. 그리고 국호를 월남(베트남)으로 정하고, 연호를 가륭이라 하였다. 조선삘 1806년엔 칭황식을 올려 외왕내제를 채택하였다.

1815년, 중국식 유교제도를 모방한 가륭율례(嘉隆律例)를 발표하여 고전적인 유교 교육 및 공무원 제도를 복원하기도 했으며 캄보디아라오스에 제국주의적인 내정간섭을 하였다. 때문에 건국 초기에는 지원세력이었던 시암과 사이는 좋았지만, 나중에는 라오스, 캄보디아를 둘러싸고 사이가 점점 험악해진다. 또한 프랑스인들을 건국공신이라고 우대하긴 했지만 프랑스와의 통상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여 나중에 프랑스와의 사이가 안 좋아진다.

1820년, 응우옌푹아인은 58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명명제가 황제로 즉위하여, 뒤를 이었다.

3. 평가

세세한 사정이야 어떻든 외세의 힘을 빌려 왕조를 열었다는 단점이 있고, 크게 봐서는 베트남이 프랑스의 영향 하에 놓인 것은 이 인간의 책임이 있다. 그래서 응우옌 왕조가 1945년에 폐지된 된 후 현대 베트남에서는 응우옌반후에가 위인으로 추앙받는데 반해서[8], 가륭제는 초심을 잃고 권력 다툼에 매진하다 결국엔 구 왕조들의 삽질을 그대로 반복했다[9]는 평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또한 외세의 도움을 받았고, 프랑스가 베트남을 사실상 식민지화하는데 명분상으로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매국노로, 심지어 만악의 근원으로까지 평가하는 사람도 다수 있다 [10]. 현대 중국에서 조조사마의를 재평가하는 것과는 달리 가륭제는 상술한 역사적 관점의 무게 때문에 베트남 국내에서는 흑역사가 문제가 아니고 아예 사실상 금기로 간주 or 무관심으로 치부되니 앞으로도 재평가될 일은 상당히 요원하다.

인생 역경 자체는 대단하고, 기적적으로 나라를 재건했기 때문에 취약점은 그렇다 쳐도 걸물은 걸물이었다는 평을 내리는 사람들은 거의 다가 서양측 학자들일 뿐이며 베트남에서는 이 사람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해외로 망명한 베트남계 학자들[11]만이 연구할 따름이다. 게다가 이런 학문적 해석을 두고도 서양 학계는 아무래도 베트남 내부학계의 민족주의적 관점과 자국 중심적 관점에 반론하는 입장이다 보니 가륭제를 혁신적이고 진취적인 인물로 재조명는 과정에서 전임 여씨 왕조의 취약함과 서산당에 대한 환상을 시정하는데 치중하다 보니 베트남 내부에선 더욱 더 반발이 클 수 밖에 없다.[12][13]

후에에는 응우옌 왕조의 여러 황제들의 무덤이 있는데,(특히 현대 건축 공법을 사용한 계정능이 화려하다.) 거기서 멀리 떨어져 관광코스에서 소외된 가륭능은 관리를 포기하여 낙서와 오물로 가득차 있다. 후에 시 어디에서도 그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나 기념물이 없고 베트남인들은 그가 존재했는지도 잘 모르는 듯하며, 서양인들만 가끔 모험삼아 이곳을 찾는데 이것이 베트남인들이 이 인물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방증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베트남인들은 잊었는데 서양인들만 기억하는 군주.)


  1. [1] 당시 중국에서는 남부의 웅우옌씨 정권을 안남국(安南國), 북부의 찐씨 정권을 교지국(交阯國)이라 불렀지만, 사실 황제로는 레씨 황족들이 따로 있었다. 천황이 허수아비였던 일본과 비슷한 형국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2. [2] 당시 베트남은 조선과는 다르게 외왕내제 체제였다. 때문에 응우옌 왕조의 수장들은 모두 자신들이 레 왕조 황제의 제후임을 자처하였기 때문에 위에 황제가 있음에도 왕의 호칭을 사용하는것이 가능했다.
  3. [3] Trương Phúc loan, 張福巒/장복만.
  4. [4] 지금의 호치민 시
  5. [5] Nguyễn Văn Huệ, 阮文惠/완문혜. 연호를 따서 광중제(光中帝, Quang Trung)라고도 불린다.
  6. [6] 지금의 후에.
  7. [7] 원래 베트남에서 월남이 아닌 남월(南越) 국왕에 책봉해주길 간청했으나, 청나라는 과거 중국 광둥성 일대까지 영역을 넓혔던 베트남 고대국가 남월을 떠올리며 베트남인의 민족의식이 고취되어서 청나라에게 반기를 들 것을 염려해서 그냥 남월이라는 단어를 뒤집어서 만든 국호인 월남의 국왕으로 책봉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8. [8] 인기요소가 엄청나게 많을 수밖에 없다. "농민 출신으로 사회의 밑바닥을 경험하며 구체제에 회의를 느낌" + "농민들을 위해 사회 개혁정책을 폄" + "청나라의 대군을 격파하고 옛 남월의 땅이었던 곳까지 영토를 확장할 계획까지 세움" + "그러나 뜻을 완전히 이루지 못하고 39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사망".
  9. [9] 아무래도 본인이 과거 응우옌씨 정권의 후예인지라.
  10. [10] 알렉산더 우드사이드, 리엄 켈리 등 서구권 학자들이 주장하는 시선으로, 완복영 입장에선 상당히 억울한 평가이다. 어쨋든 정권 장악을 위한 물리적 투쟁이 끝난 이후 가륭제로서 완복영은 립서비스성 조언가 초청이나 선교의 부분적 허용 같이 전례와 크게 벗어나는 범주에서 딱히 프랑스에게 더 큰 이익이나 특혜를 준 바는 없으며, 완조 월남이 프랑스의 본격적인 침공 대상으로 전락한건 완복영의 탕롱 정복 이후 50년 뒤의 일이다
  11. [11] 주로 남베트남계라 응우옌 왕조와 관련 있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다.
  12. [12] 안 그래도 전근대 역사의 해석의 초점을 어디에 두고 있냐에 따라 베트남 자국 출신 학자들과 서구권 학자들의 온도, 시각 차이의 충돌은 큰 편이다. 베트남 학자들 본인들은 일단 한자 문화권의 유교 국가로서 정체성을 확실하게 재확인하고 조선, 명청사 같은 관을 중심으로 역사 연구를 시작하나, 서양 학자들은 베트남의 동남아적 정체성을 더 강조하며 16-17세기 남북조 시대 당시 관의 약화된 영향력과 이에 대비 된 남중국해 상업 네트워크나 참파, 크메르와의 관계 같은 다극화된 역사적 변경으로서 초점을 둔다. 이러한 관점과 초점의 차이를 두고 서양 학계는 베트남 학계를 전쟁과 혁명 시기의 민족주의적 프래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집착으로 치부하고, 베트남 학계는 서구 학자들의 접근법을 반대로 정치적 목적이 있는 베트남 민족성을 희석시키려는 유사학문적 의도로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13. [13] 참고로 20세기에 발흥한 신흥종교 까오다이교가 범세계적 포용론 교리를 갖춘 점은 이러한 베트남의 동아시아 vs 동남아의 완충지로서의 경향과도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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