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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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보수정당

민주자유당

자유민주연합

국민중심당

신민당

한나라당

[1]

당시 자민련의 당색(黨色)과 로고를 확인할 수 있는 사진들[2]

※ 향후 원활한 편집을 위해 당색 및 타이포가 적용된 자민련 로고를 복원해줄 능력 있는 위키러의 수정바람.

자유민주연합

공식명칭

자유민주연합
(自由民主聯合, United Liberal Democrats)

약칭

자민련

창당일

1995년 3월 30일
(민주자유당에서 분당)

해산일

2006년 4월 7일
(한나라당에 흡수합당)

선행조직

민주자유당(1990년, 3당 합당)

중앙당사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전로 70
(신수동 103-4, 화수목빌딩[3])

국회의원

0석 / 297석(17대 국회, 해산 직전)

당 색

녹색 (#1B5B40)

이념

보수주의, 충청 지역주의

1. 개요
2. 역사
2.1. 창당과 약진
2.2. DJP 연합
2.3. 분당과 소멸
3. 역대 지도부
4. 트리비아
5. 역대 선거결과
6. 관련 문서

1. 개요

지역정당계의 전설

1995년부터 2006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중도보수 ~ 보수정당으로 1990년 3당 합당 이후에 나온 최초의 제2야당(원내3당)이었다. 통칭은 '자민련'(합). 연합이 두음법칙 문제상 련->연이라 이렇다.

김종필을 중심으로 창당한 정당으로, 충청도(정확히는 충청남도대전광역시)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 정당이었다. 이념적 성향은 자유민주주의, 보수주의. [4]

당시 홈페이지 도메인은 'www.jamin.or.kr'이었다.

2. 역사

1995년 3월 30일에 창당돼 2006년 4월 7일 소멸하여[5] 11년 8일 존속한 꽤나 장수한 정당이었다. 한나라당이 이 기록을 깼지만[6], 2004년 3월 23일 로고를 변경한 것을 감안하면 로고의 지속성 등의 정체성은 더 길었던 정당이다.[7]

2.1. 창당과 약진

1994년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은 1990년 3당 합당으로 인해 민정계[8]+민주계[9]+공화계[10] 크게 3계파로 구성되어있었다. 그런데 YS가 대통령이 된 이후 민주계가 높은 정권 지지율을 등에 업고 본격적인 당권 장악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민주계의 젊은 의원들은 1994년 말 당시 민자당 대표였던 김종필을 '개혁정권에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 인사'라고 몰아세우며 강력하게 퇴진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결국 김영삼 대통령 및 민주계와 갈등을 겪던 김종필 대표는 1995년 1월 자신을 따르는 공화계 의원들을 데리고 민자당을 탈당하여 자민련을 창당하였다. 여기에 민주계에 밀렸다고 생각한 민정계 일부가 가담했다.

그렇게 창당한 자민련은 창당 직후 열린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충청권을 석권하고 대구, 경북 일부지역에서 선전하는 한편 강원도지사와 강원도 지역의원 다수를 당선시킨다. 당시 주된 선거 전략은 김종필 대표의 '당 대표 쫓아내는게 세계화냐', '다른 지역에서 충청도를 핫바지로 보고 있다' 등의 말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충청도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핫바지론'과[11], '북한 쌀 보내기 결사 반대'[12], '김영삼 정부는 사이비 보수, 내가 원조보수다'라는 '원조보수론'으로, 강원도수도권 보수층의 민심을 얻은게 주효했다. 근데 이후 DJP로 뒤통수친게 함정 이후 노태우 대통령의 처남인 김복동의 신민당과 합당하는 등 4,5공 세력을 대거 영입함으로써 당시 PK정권이라 불리던 YS 집권기 소외감을 느끼던 TK 지역을 공략했다.

이후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선 충청권을 석권하고, 당시 반민자 정서가 팽배했던 TK 지역에서 원조보수론을 내걸고 선전하면서[13] 강원도와 수도권 당선자까지 합쳐서 총 50석으로 DJ의 새정치국민회의 다음가는 제2야당의 지위를 굳히며 리즈 시절을 찍게 된다. 다만 여기서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보통이면 젊은 의원이나 정치신인에게 주는 전국구 의원 상위순위들을 정상구, 정상천 등 줄줄이, 민정ᆞ공화계의 노장들로 채워버리는 짓을 했다. 반면 신한국당ᆞ국민회의는 비교적 젊은 정치신인들에 전국구 공천을 주었다.[14]

당시 자민련 소속인사들을 보면 대다수가 공화계 - 민정계니 관료, 군인 출신들이 많았다. 공화계의 수장이자 총재 김종필, 박준규, 박태준, 이병희, 정석모, 김용환, 이인구, 김칠환, 김종학 등이 공화계열, 박철언, 김복동, 강창희, 박준병, 이태섭, 이정무, 김일주, 박구일, 구천서, 김현욱, 이긍규 등이 민정계에서 넘어왔다.

정우택[15], 이의익[16], 허남훈, 이양희, 김의재, 박종근, 류종수[17], 김선길, 함석재[18], 오용운, 이재창[19], 조종석, 김화남[20]같은 관료출신들, 변웅전 같은 유명인사, 박신원, 어준선, 정일영, 김범명, 권수창 같은 지역유지 출신들도 있었으며, 이원범 같이 의외로 민주계 인사가 가담한 경우도 있다.

이상만, 김고성, 황학수 등이 신진인사였다.

2.2. DJP 연합

15대 총선이 끝나고 바로 다음해인 1997년 치뤄질 15대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DJ와 JP는 각각 단독 집권이 어렵다는 공통인식을 갖게 되었고[21], 김종필과 자민련은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로 대통령 후보를 단일화하고, 집권시에 내각을 공동구성한다는 일명 DJP연합에 합의해 15대 대선에서 DJ를 지지했다. 이후 김대중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자민련은 공동여당이 되었다.[22] 반대로 한나라당(신한국당)은 이인제가 경선불복을 선언하면서 국민신당을 창당해 출마하는 바람에 표가 분산돼버렸다. 마치 10여년전 김영삼, 김대중이 서로 아웅다웅하던 통에 표가 분산되고 그 결과 노태우어부지리대통령에 당선된 것과 비슷한 일이 다시 재현된 것. 물론 이인제가 양김 정도의 파워는 결코 아니었지만 넘어가자

국민의정부 시절에는 김종필, 박태준, 이한동국무총리 3명을 배출하고[23] 국무위원 다수를 배당받는 등 새천년민주당과 밀접하게 협력하였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 직후 열린 1998년의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DJP연합의 연장선상에서 새정치국민회의와 전 지역에서 후보를 단일화하였다. 이런 연합공천의 위력으로 자민련은 자신들의 텃밭인 대전광역시, 충청북도, 충청남도는 물론 인천광역시에서도 승리했다.[24] 강원도에서도 무소속 후보 난립이 아니었으면 승리했을 것이다. 이로서 여당야당이 국토 좌우를 딱 나눠먹은 모양새가 되었다. 합산 지지율 시·도지사 선거 49.8%, 시·도 의원 49.6%, 시장·군수·구청장 선거 45%. 부산에서도 보궐선거에서 김동주 후보가 당선되었다.[25]

참고로 이시기엔 대선과 지방선거의 연이은 승리로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간의 합당이 거론될 정도로 두 당 사이의 관계가 매우 화기애애했다. 오히려 당시엔 한나라당이 김종필 국무총리 인준안을 부결시키는 등 자민련에 대해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공세를 펼치고, 서로서로 의원 빼내기를 하는 등 같은 보수이념을 가진 당 맞나 싶을 정도로 날선 각을 세웠다. 당시 이한동[26], 김학원[27], 이완구[28] , 노승우, 백남치, 이상현, 오세응[29], 이택석, 김종호[30]등 한나라당에 남아있던 국회의원들도 탈당을 했다.

그러나 DJP연합이 2년차에 접어들던 1999년 자민련과 국민회의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된다. 두 당은 내각제 개헌, 햇볕정책, 남북정상회담, 재벌개혁 등 여러분야에서 사사건건 충돌하면서 감정의 골이 깊어진다. 결국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가 연내 내각제 개헌 추진 포기를 합의하자 자민련내에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고, 공동정권 철수 같은 극단적인 주장까지 나왔다.[31] 이런 연장선상에서 양당간에 2000년 16대 총선에서의 연합공천이 무산되었다.[32]

그리고 연합공천을 거부하고 호기롭게 16대총선에 나선 자민련의 결과는 대참패였다.

일단 비충청권 지역에선 모조리 망했다. 지난 15대 총선에서는 반민자비민주 정서에 힘입어서 수도권과 강원도, TK(대구경북) 지역에서 보수표를 끌어모아서 다수의 당선자를 배출하면서 50석을 차지했었다. 하지만 16대 총선에선 김대중 정부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비충청권 지역의 보수유권자들이 제1야당인 한나라당에 몰표를 던지고 연립정권의 공동여당이었던 자민련은 철저히 외면한 것이다. 그나마 될만한 선거구도 민주당과의 단일화 실패로 표분산이 이루워지면서 어부지리격으로 한나라당이 당선된 곳도 허다했다.

수도권은 애초부터 경쟁력있는 후보들이 거의 없었다고 쳐도, 보수성향이 강한 강원도와 영남지역에서 조차 대부분 지역구에서 한자리수 득표에 그치면서 전멸하였다. 16대 총선의 결과는 자민련은 충청도 지역정당이라는걸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그러면 충청권은 석권했느냐? 그렇지도 않았다. 충청권(대전,충남,충북)의 16대 총선 결과는 자민련 11석, 민주당 8석, 한나라당 4석.

일단 연합공천이 무산된 이후 새정치국민회의는 새천년민주당으로 당을 개편하고 16대 총선에 돌입하는데, 1998년 합류했던 충청권 출신의 유력 대권주자 이인제를 앞세워서 충청권 공략에 나서서 8명의 당선자를 배출한다.[33] 지난 15대 총선에서 국민회의와 통합민주당이 충청권에서 단 한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민주당이 일거에 8석을 차지한 건 대단한 성과. 거기에 낙선자들도 득표율이 현저히 높아지면서 전체적으로 충청권에서 민주당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고, 이인제 대세론이 형성되었다. 한나라당도 나름 4석을 차지하면서 면피.

반면에 자민련은 이인제를 앞세운 민주당에 지지기반을 잠식당하고, 보수표는 한나라당과 분산되면서 자신들의 텃밭인 충청권에서조차 절반도 안되는 11석을 얻는데 그친다. 쉽게 말해, 민주당이 충청권을 손대지 않았으면 자민련이 충분히 25석 이상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선거구제 개편으로 전체의석이 26석(299->273. 04년 도로 회복) 줄었고, 충청권 의석이 4석(28->24) 줄어든 것도 한 몫 했다. 강원도에서도 민주당에게 밀렸고, TK 지역은 DJ정권 시기 동진정책에도 불구하고 도로 한나라당에게 의석을 내주고 만다.

자민련은 충청권 지역구 11석에 전국구 6석을 포함해서 총 17석을 획득한다. 15대 총선의 50석에 비하면 16대 총선의 17석은 1/3로 쪼그라든 수치. 그렇게 총선에서 텃밭을 새천년민주당에 내주는 바람에 불과 20석도 얻지 못하고 원내 교섭단체가 되지 못하는 굴욕[34]을 겪었다. 그러다가 2000년 말 민주당 측이 '연정은 아직 깨진게 아니다'면서 의원 4명을 꿔주는 희대의 정치사건이 벌어진다.[35] 이때 송석찬 의원이 한 그 유명한 "여당으로 한 마리 연어가 되어 돌아오겠다."란 말이 두고두고 회자되기도 했다.[36] 결국 자민련은 아슬아슬하게 원내교섭단체로 등록할 수 있었고,[37] 이에 다시 만족한 자민련은 김대중 대통령 임기말까지 연정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38] 하지만 연정 후에도 민주당 115석 + 자민련 20석 = 135석으로 과반(137석)에서 2석 모자랐던 민주당은 민주국민당(2석)[39]에도 손을 벌려야했고, 민국당의 한승수 의원(강원 춘천)을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입각시키며 간신히 원내 과반수를 채웠다. 사실 보면 알겠지만 DJ정부 중기쯤부턴 사실상 내각책임제처럼 운영된 감이 있다. JP의 꿈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후 그럭저럭 유지되던 DJP연정은 2001년 한나라당이 제출한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결의안[40]에 자민련이 동조하면서[41]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결국 붕괴되고 만다. 그리고 자민련으로 갔던 민주당 의원 4명(송석찬, 배기선, 장재식, 송영진)은 당연히 연정 붕괴에 실망을 표하고 민주당으로 원대복귀했으며, 입각했던 자민련 소속 장관들도 사퇴하였다.[42]그러나 자민련 총재인 이한동 국무총리는 오히려 내각 잔류(!)를 결정했고, 자민련은 현직 총재이자 국무총리인 이한동을 당에서 제명하기로 결정한다. DJP연정이 붕괴되면서 결국은 양쪽 다 타격을 입게 되는데 민주당은 국민의정부 말기 들어서 국정운영에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고, 자민련은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상실하며 당의 존립 여부조차 위태해지게 된다.

결국 자민련의 안습한 상황은 계속되어 2002년 제3회 동시지방선거에선 텃밭이었던 충북과 대전까지 한나라당에 내주는 참패를 당하고 만다.[43]그리고 2002년 말 제16대 대통령 선거 정국이 되자, 자민련은 한나라당 지지를 거의 선언하기에 이른다. 선거 직전인 11월 7일의 기사 &quot;'이회창-김종필 협력론' 고개&quot;. 이로써 자민련은 한나라당과의 합당이 예측되었으나 과거 자신의 국무총리 인준안 거부, 자당의원 빼가기 등으로 한나라당에도 제대로 화가 나있던 김종필은 중립을 선언하며 끝까지 이회창을 거부한다. 이 때 이회창을 지지하던 당 의원들이 줄줄이 탈당해서 한나라당으로 가버렸는데, 이완구, 송광호, 함석재, 이재선, 이양희 의원이 이 시기에 자민련을 탈당했다. 또한 새천년민주당에서 노무현을 싫어했던 인사들이 입당했는데, 당시 차기 대권주자로 지목받았으나 권노갑의 정치자금이 문제가 되어 패배한 이인제안동선이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며 자민련으로 들어왔다.

결국은 충청권에 행정수도를 만든다는 공약을 내세운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다. 한편 하나로국민연합이라는 독자 정당을 만들어서 대선에 출마했으나 겨우 득표율 0.3%, 대략 74000여표로 간신히 4위를 차지했던 이한동 전 총재가 복당했지만 별다른 대중적인 반향은 없었다. [44] 이후 2003년 11월에 새천년민주당의 범친노계와 한나라당 5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 등 정계 개편으로 자민련의 입지는 점점 더 애매해져갔다. 그리고 그렇게 자민련의 마지막 시련이 다가오게 되었다.

2.3. 분당과 소멸

탄핵 열풍이 몰아치던 2004년, 명예총재로 당의 구심점이던 JP는 마지막 순간까지 탄핵을 원론적인 측면에서 반대했으나 소속 당원들은 일제히 탄핵에 찬성했다. 이때 JP를 제외하면 민정계 출신의 비례대표 김종호 의원만이 반대표를 던졌다.[45][46] 내각제 합의 등이 뒤에서 오간거 아니냔 관측들도 있었는데, 어차피 탄핵과 마찬가지로 내각제도 정족수의 2/3 이상 동의로 개헌이 가능한 것인지라....하지만 탄핵 역풍은 예상보다 거셌고 국민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한나라당민주당내각제의 ㄴ자도 안 꺼내면서 자민련이 가장 피봤는데, 당시 10선에 도전하던[47] 당 대표 김종필이 비례대표 1번으로 나선 상황에서 득표율 2.98%를 얻어 딱 0.02%차로 3%를 채우지 못해 비례대표 의석을 1석도 획득하지 못하는 굴욕을 당했다.[48] 결국 자민련은 충청권 지역정당임에도 불구하고 4석의 충청권 지역구 당선자로 막을내렸다. 결과에 충격먹은 김종필은 정계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그렇게 한때의 여당이자 제2야당이었던 민주당(2004년)과 자민련은 함께 몰락한다. 그러게 왜 헤어졌어 이 선거로 양당은 원내 제3당의 자리를 민주노동당에게 내준다.

김종필 은퇴로 자민련은 당내 구심점이 사라졌고, 당시 충남지사였던 심대평이 당을 탈당하고 자민련을 대신하는 충청신당인 국민중심당 창당에 나서면서 급속히 무너진다. 자민련은 결국 충청신당에 흡수되는 식의 합당합의를 했으나, 이 합의가 파기되면서 지역구 의원 4명 중 당 대표를 제외한 3명이 탈당의 방식으로 충청신당으로 가버렸다. 결국 자민련은 마지막 의원 1명(김학원 대표)과 조직, 당 자산 등을 갖고 한나라당과 합당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형식은 한나라당과의 합당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국민중심당이 자민련의 후신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후 이회창과 심대평을 중심으로 2천년대 후반 충청 지역을 잠시 석권했던 자유선진당-선진통일당,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국민중심연합의 전신이라고도 볼 수 있다.

2010년대 들어선 선진통일당도 2012년 새누리당과 합당하면서 충청지역 기반정당은 사실상 사라졌고, 구성원 전원이 현재는 민주당계 정당, 민자당계 정당으로 뿔뿔이 흩어진 상태다.

3. 역대 지도부

대수

이름

직책

임기

1

김종필

총재

1995년 3월 30일 ~ 1997년 6월 23일

2

김종필

총재

1997년 6월 24일 ~ 1997년 11월 21일

3

박태준

총재

1997년 11월 22일 ~ 2000년 2월 8일

4

이한동

총재

2000년 2월 9일 ~ 2001년 10월 8일

5

김종필

총재

2001년 10월 9일 ~ 2004년 4월 16일

(임시)

이인제

총재권한대행

2004년 4월 16일 ~ 2004년 4월 20일

(임시)

조부영

비상대책위원장

2004년 4월 21일 ~ 2004년 6월 7일

6

김학원

대표최고위원

2004년 6월 8일 ~ 2006년 2월 9일

7

김학원

대표최고위원

2006년 2월 10일 ~ 2006년 4월 7일

4. 트리비아

특이점으로는 창당 후 한 번도 당명과 로고를 바꾸지 않았다는 점이다.[49] 덕분에 위키러들이 편하다. 정당명을 자주 갈아치우는 한국 정치에서는 참 희귀한 경우. 다만 당명의 잦은 교체는 잦은 이합집산 탓인 경우가 많고 이 당도 결국 이합집산을 거쳐 창당과 소멸의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그 점에서 보면 희귀한 게 아닐지도...어쨌든 덕분에 한나라당과 합당될 당시를 기준으로 존재했던 정당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같은 이름을 써온 정당으로 기록되었다.

자민련 이후 참여정부 시기엔 원내교섭단체를 이룬 제2야당은 없었으나[50], MB정부가 들어서면서 각종 야당이 난립하고 특히 그 중 자유선진당이 제2야당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51] 이후 2016년엔 국민의당이 38석으로 원내교섭단체를 가뿐히 넘기며 제2야당의 입지를 다지게 된다. 다만 국민의당은 안철수라는 구심점과 기타 호남기반 정치인들이 뭉친 정당으로 자유민주연합-자유선진당과는 뿌리부터가 다르기 때문에 충청도 지역보수 정당의 맥은 선진통일당에서 끊겼다는 것이 중론이다.[52] 이후부터 충청 지역은 반기문, 안희정 등 그냥 충청 지역 정치인을 당가리지 않고 밀어주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역시 캐스팅보트

지역 기반에만 안주하는 정당을 가리켜 지역명을 붙여 XX자민련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53] 1995년에 창당된 정당 이름으로 쓰인 고유 명사에서 현재에는 지역 기반에만 안주하고 전국 정당이 되지 못하는 정당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로 쓰이는 셈. 예를 들어 충청을 기반으로 했던 자유선진당이 그러한 멸칭으로 불리었었고, 현재는 민주평화당자유한국당이 각각 호남 자민련, TK 자민련으로 불리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바른정당바른정당 탈당사태이후 합당전까지 지방선거에서 원희룡을 제외하곤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 없게 되자 눈물의 제주 자민련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54]

5. 역대 선거결과

6. 관련 문서



  1. [1] 당시 부총재인 피닉제이인제 의원이 연설하는 모습이다.
  2. [2] 진한 초록색을 주 색으로 썼지만, 간혹 청록색이나 연두색을 쓰는 등 당색이 통일되지 못한 면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당측에선 김종필 총재가 선호하는 진한 초록을 주로 썼고, 시도당위원회 등에서는 연두색도 간혹 썼다. 여담이지만, 이 점은 피플그린-해피그린 두 당색을 혼용하는 국민의당과 기막히게 각각 사용한 색채까지 닮았다.
  3. [3] 당시엔 인산빌딩
  4. [4] 보수주의를 표방하지만 의외로 반(反) 신한국당에 가깝고, 자민련이 살아있는 동안 아주 가끔은 농담삼아 '반(½)신한국당'으로 놀림받았다불렸다. 그래서인지 자민련과 자민련의 후신인 자유선진당 모두 해체 후 한나라당으로 안 가고 민주당계 으로 넘어간 의원(권선택 대전시장, 류근찬 전 의원 등)도 많이 있다.
  5. [5] 탄핵으로 인해 열린우리당이 선전하자 김종필 까지 낙선하고 고작4석만을 얻고 막을내렸다
  6. [6] 1997년 11월 21일~ 2012년 2월 1일까지 약 14년.
  7. [7] 참고로 광복 이후 국내에서 오래 존속한 정당1963년 2월 26일 창당하여 1980년 8월 신군부에 의해 강제해산당한 민주공화당(17년 8개월)이고, 2위는 신민당으로 13년 8개월, 1969년의 재창당을 고려하면 11년 1개월 존속했다. 물론 국내 기준. 미국과 서유럽 등의 민주주의 선진국에선 한 정당명으로 역사가 백년이 넘어가는 정당도 여럿 있다.
  8. [8]민주정의당 출신. 군부와 대한민국 검찰청/정보기관 출신이 상당수였다. 다만 민정당 출신 중에서도 김윤환을 중심으로 김영삼을 지지했던 통칭 '신민주계' 의원들이 대략 20여명 존재하였다.
  9. [9]통일민주당 출신.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자 민자당의 주류가 되었다.
  10. [10]신민주공화당 출신. 김종필이 당대표이긴 했으나 세 계파 중에서 가장 세력이 미약하였다.
  11. [11] 그러면서 당 신문 광고에는 지역주의를 배격한다고 했다.
  12. [12] 대북 식량지원을 시작한 것은 의외일지 모르지만 김영삼 정부 시기였다. 1995년 북한에 15만톤의 식량을 지원하면서 대북식량지원이 시작된다. 사실 이건 우루과이 라운드 관련(WTO가 1995년 1월 출범했다)으로 쌀수입문제와 추곡수매 등이 엮여서 남아도는 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 때문이기도 했다.
  13. [13] 대구 총 13석 중 무려 8석을 휩쓸었다. 다만 경북은 신한국당이 11석으로 무난히 1당을 차지했다.
  14. [14] 물론 신한국당도 공화계 중진인 이만섭(14대 하반기, 16대 상반기 의장), 민주계의 김수한(15대 상반기 의장), 김명윤, 민정계의 강용식, 정재철, 그리고 국무총리 직에서 물러났던 이회창, 이홍구 같은 중량감있는 인사들에게 전국구 공천을 주었다. 그렇지만, 황우여김영선, 박창달 등의 정치인들을 발굴했으며, 당선 당시에 만 31세였던 IT기업계의 신화인 이찬진을 공천하는 흠좀무한 일도 있었다.
  15. [15] 아버지가 신민당 총재 대행인 정운갑 이었다.
  16. [16] 전 관선 대구직할시장.
  17. [17] 공천탈락에 불복해서 자민련 입당
  18. [18] 법조인 출신
  19. [19] 관선 인천시장, 경기지사
  20. [20] 둘 다 치안본부장(조종석), 경찰청장(김화남) 역임.
  21. [21] 두 당의 연합은 이미 15대 총선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총선이 끝나자 두 당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가 신한국당으로 입당한 의원들을 향해 '민의를 저버리지 말고 무소속으로 되돌아가라'고 촉구했다.그러나 불과 2년도 안 되어 두 당은
  22. [22]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안택수 당 대변인을 비롯한 몇몇 의원들이 DJP연합에 반발해 탈당하기도 했다. 참고로 안택수 당 대변인은 대구 지역 의원이었다. 헌데 의외로 자민련내에서 DJP연합을 처음 적극 권유한 것도 TK중심의 민정당계였다고 한다. 자세한건 DJP연합 항목 참조.
  23. [23] 다만 이한동 국무총리는 이후 2002년에 자민련을 탈당하고도 총리직에 있다가 대선출마를 앞두고 사임한다.
  24. [24] 단 인천의 최기선 당선자의 경우 애초에 국민회의 간판을 원했다가 막판에 양당간의 조율로 자민련 후보로 결정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항목 참조.
  25. [25] 다만 김동주 의원은 부총재 자리까지 올랐으나, 2000년 3월에 탈당해서 민주국민당에 입당했다.
  26. [26] 2000~2002 국무총리. 2001년 9월에 연합내각이 붕괴되자, 현직 총재신분임에도 자민련에서 제명되었다. 다시 야당이 된 자민련은 김종필 총재가 다시 총재직으로 돌아온다. 이한동 총리는 무소속으로 2002년까지 총리직을 맡았고, 대선을 앞둔 4월에 사직했으며, 2007년에 한나라당에 복당한다.
  27. [27] 2004~2006 자민련 대표최고의원. 이후 자민련이 해산되고 한나라당에 8년만에 복당
  28. [28] 이후 한나라당에 2002년에 복당. 충남지사, 국무총리 역임.
  29. [29] 신민당 - 민정당 - 민자당 - 신한국당 - 한나라당을 거친 7선 의원. 15대 하반기 국회의장 선거에 나갔으나, 자민련 박준규 의원(9선)에게 패배. 2000년에 이회창 총재와 다투고 자민련에 입당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정치신인인 임태희에게 져서 낙선하고 정계은퇴..
  30. [30] 16대 총선에서 전국구 출마. 2004년 3월 의원직 사직(자민련 탈당).
  31. [31] 김종필 총재의 최측근으로 DJP연합 성사의 일등 공신이었던 김용환(1932) 의원은 아예 자민련을 탈당해서 희망의 한국신당을 창당했다. 김용환은 이후 극렬JP안티로 변신해서 계속 김종필에게 부담이 되었다.
  32. [32] 다만 김대중이 약속대로 내각책임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고 하더라도, 개헌엔 전체 의원의 2/3 동의가 필요한 만큼 야당인 한나라당이 반대하는 한 통과는 불가능했다. 성의표시라도 해주지
  33. [33] 경기도 안양에서 두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경기도 지사를 지냈던 이인제가 지역구를 옮겨서 자신의 고향인 충남 논산에 직접 출마하면서 대전, 충남에서 민주당 바람을 일으켰다. 자민련은 현직의원 김범명을 그대로 공천했고, 졌다.
  34. [34] 교섭단체가 되지 못하면 국가로부터 각종 보조금을 지원받지 못하고, 국회 상임위의 위원장이 될 수 없는 등 여러가지 불이익이 있다.
  35. [35] 말 그대로 남의 당 국회의원을 빌려왔다.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4명이 탈당하고 자민련에 입당하는 식. 송석찬 의원(대전 유성), 배기선 의원(경기 부천원미을), 송영진 의원(충남 당진)이 자민련으로 1차 입당했다. 그런데 자민련 부총재인 강창희 의원(대전 중구)이 이에 반발하여 교섭단체 등록을 거부하자, 당시 원내 교섭단체의 자리가 급했던 자민련은 강 의원을 출당시키고 민주당에서 다시 장재식 의원(서울 서대문을)을 데려와 20석을 채웠다. 이들의 당적 자체는 당연히 자민련이지만 사실상 소속은 여전히 민주당이었다. 이 행위 자체를 막을 법적 수단이 없는, 합법적이면서 편법적인 수단이다. 의원 꿔주기를 반대한 강창희 의원은 제명된 후 2001년말에 당시 자민련을 떠나서 독자적인 길을 걷던, 김용환 의원과 함께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36. [36] 이 당시에 김대중 대통령의 장자인 김홍일(전남 목포)를 보낼 예정이었다고는 하는데, 막상 이뤄지지는 않았다.
  37. [37] 정말 간신히 20석. 재밌는 사실은 이미 민주당이 16대 국회 개원 이후 자민련을 위해 원내 교섭단체의 조건을 10석으로 낮추려고 놀랍게도.날치기(...)를 시도하다 실패했다는 것이다. 만일 성공했다면 2004년 민주노동당도 덕을 봤을 것이고, 2008년 자유선진당도 20석 만드느라 창조한국당과의 연합을 안해도 되었을 것이다.
  38. [38] 이후 자민련은 김대중의 배려로 장관 3명을 입각시켰다.
  39. [39] 당 창당의 주역은 허주 김윤환이었으나 암 때문에 정치적인 행보는 당시에 보이지 않았다. 당시 민국당 소속 의원은 한승수(강원 춘천), 강숙자(비례) 단 두명이었다.
  40. [40] 8.15 평양축전에 사람들의 방북을 허용했다는 이유였다.
  41. [41] 새천년민주당과 연정 상태였으나 대북관에 관해선 의견차이가 컸다. 기본적으로 자민련은 한나라당보다도 더 오른쪽으로 치우친 보수정당이라 햇볕정책에 회의적으로 대북강경책을 주장하였다.
  42. [42] 참고로, DJP 연합이 깨진 무렵에 민주국민당도 새천년민주당과는 사실상 결별했다. 한승수 외교통상부 장관은 연합내각이 해체되자 2002년에 사임하고, 같은 해 말에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며 한나라당으로 복당했다.
  43. [43] 충북지사 한나라당 이원종, 대전시장 한나라당 염홍철. 당선
  44. [44] 이때 이한동의 바로 다음 5위가 불심으로! 대동단결! 국태민안호국당 김길수 0.2% 51000여표, 6위가 돈세상을 뒤엎어라 사회당 김영규 0.1% 22000여표였다.
  45. [45] 당시 충북 괴산.진천.음성 지역구에 출마하려고 정치적 계산을 했다는 비아냥이 있긴 했지만, 일단 김의원 본인은 탄핵 사유가 말도 안된다고 판단해서 반대표를 던졌다고 한다. 이후 탈당했으며, 변웅전 전 의원이 승계받았다. 또한 17대 총선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46. [46] 당시 탄핵 반대표가 2표였는데, 나머지 하나는 이낙연 새천년 민주당 의원. 이낙연 의원은 대선 직후에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의 대변인을 지낸 이력이 있었다. 이후 전남도지사를 거쳐 문재인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직에 오르게 된다.
  47. [47] 9선으로 YS와 함께 역대 최다선이었다.
  48. [48] 사실 지역구 의석이 5석 이상인 정당은 3% 제한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저 득표율로도 비례대표 당선자를 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한 석이 모자라면서 FAIL.
  49. [49] 자민련보다 장수 정당이었던 한나라당도 로고를 바꾼 적이 있다.
  50. [50] 교섭단체는 아니었지만 원내3당은 민주노동당이었다.
  51. [51] 다만 자유선진당만으론 원내교섭단체 수립이 안되어서 창조한국당과 연합해야 했다. 그나마도 1년만에 다시 비교섭단체가 된게 함정이지만.
  52. [52] 다만 JP는 안철수 의원에게 관심이 있는지 2016년 본인이 먼저 냉면 회동을 제안하기도 했다.
  53. [53] 물론 앞에서 서술했듯이 충청권 지역기반 정당임에도 불구하고 충청권에서 안습한 성과를 거두었다.
  54. [54] 자민련의 마지막이 비참해서 그렇지 초기 충청은 물론 대구, 경기 북부를 아울렀던 초기 기세와 더불어 아직까지 그 어느 원내 3당 중에 자민련처럼 공동정권의 한 축에 활동한 당은 없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지역기반에 안주했다는 이유로 'XX자민련' 이런 식으로 부르기에는 가벼운 감이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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