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표

이름

장기표 (張基杓, Jang gi pyo )

출생일

1945년 12월 27일

출생지

경상남도 밀양군

학력

서울대학교 법학과

소속 정당

경력

민중당 정책위원장
개혁신당 대표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한국사회민주당 대표
녹색사회민주당 대표
사회민주주의포럼 운영자
신문명연구원 대표
국민소리당 창당준비위원장

1. 개요
2. 생애
2.1. 재야 운동가
2.2. 정치 활동
3. 평가
4. 저서
5. 선거 이력
6. 관련 문서

1. 개요

1945년 12월 27일 출생. 김해진영중학교, 마산공업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학과 졸업.

재야 노동 운동가로 오랜기간 활동했으며 현재는 정치인이다. 국회의원은 14대부터 18대까지 계속 도전하였지만 모두 낙선했으며 다시 제21대 총선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영원한 재야(在野)라는 별명이 있다.

2. 생애

2.1. 재야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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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이 부인 조무하 여사, 가운데가 장기표 본인. 오른쪽이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김근태, 김문수, 노회찬, 심상정, 백기완, 이재오, 이광택, 조영래, 주대환 등 현재도 유명한 일부 정치인들[1]과 함께 재야 운동가였다.

서울대학교 법학과 출신의 단과대 학생회장였으며 전태일의 분신자살 이후 노동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시신이 안치된 성모병원으로 찾아가 어머니(이소선 여사)를 만났다. 당시 이 여사는 “우리 태일이가 그토록 대학생 친구 갖기를 바랐는데 죽고 나서야 나타나느냐”라면서 서울대 법대 복학생 신분이던 그를 두고 한탄했다고 한다. 서울대학교에서 전태일의 학생장을 치러주었다.

그는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으로 9년을 감옥에서 지냈고, 12년의 수배생활을 보냈다.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을 비롯해서 여러 번 복역과 가석방, 석방을 거쳤는데 위 사진도 그 당시 가석방 되며 찍힌 사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으며 일절의 배상금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국민된 도리, 지식인의 도리로서 할 일을 한 것일 뿐이고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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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이소선 여사 장례식장에서

2011년 7월 8일 이소선 여사가 쓰러지기 전 가족을 제외하고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 그였다고 한다. 이소선 여사가 평소에 “하원이 아버지가 좀 잘돼야 할 텐데”라고 했을 정도로 걱정과 격려를 많이 했다고 한다. 이소선 여사는 “기표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진실하고 바르게 살려는 첫 사람이자 나에게는 영원한 스승이었다”고 기억했다. #

이때부터 1980년대까지 꾸준히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서서 활동했다. 6월 항쟁 이후로는 재야 세력의 핵심으로 떠올랐는데, 모든 재야세력이 결집했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약칭 전민련)을 주도하는 40대 4인방(이부영, 이재오, 장기표, 김근태)의 일원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당시 재야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전민련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했으나, 독자정당 창당안이 전민련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되자[2] 독자정당추진파들과 함께 진보정당 창당에 나서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한다.[3]

2.2. 정치 활동

민중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부르짖던 장기표, 이재오, 이우재는 노동운동의 상징이었던 김문수와 손잡고 1990년 대중적인 진보정당을 기치로 민중당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1991년 지방선거에서 저조한 투표율로 강원도 의회에서 딱 1명만 당선시키는 데 그쳤고, 1992년 14대 총선에서는 아예 1명의 당선자도 못 내며 처참하게 실패하였다. 장기표도 서울 동작(갑)에 출마해서 21%를 득표했지만 3위로 첫 번째 낙선한다. 민중당은 총선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하면서 자동해산되었다.

1993년 집권한 김영삼이 여당(민주자유당) 물갈이를 염두에 두고 이우재, 김문수, 이재오 등을 영입하였으나, 장기표는 이들을 따라가지 않고 통합민주당에 합류하여 19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동작(갑)에 출마했지만 낙선 후 새로운 시대에 맞는 정책을 개발하는 "신문명정책연구원"을 만들어 정책 개발에 주력한다.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홍사덕과 함께 인터넷 정당을 선언했지만 홍사덕이 신한국당 선대위원장으로 가면서 이수성 조순 등과 함께 민주국민당을 창당한다.

2002년에는 8월 재보선을 앞두고 정권말기 현상으로 집권세력인 새천년민주당의 지지율이 급락하자 김근태 인재영입위원장의 영입으로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해서 서울 영등포구 을[4]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2위로 네 번째 낙선 했다

2004년에는 17대 총선을 앞두고는 한국노총한국사회민주당[5]의 대표를 맡았다가 녹색정치를 주장하던 녹색평화당과 합당해서 녹색사회민주당을 창당하고 공동대표를 맡았다. 녹색사회민주당 후보로 서울 동작구(갑)에 다시 출마했으나 득표율 4.8%, 5위라는 안습의 성적으로 다섯 번째 낙선하였다.

그 후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다시 정치권에 등장한다. 이번에는 보수이론가로 유명한 박세일[6] 교수와 손잡고 개혁적보수와 합리적 진보가 함께하는 국민생각 창당을 준비했지만[7], 국민생각과 결별한 장기표는 녹색통일당이라는 독자 정당을 창당하고 이후 이 당이 확대 개편된[8] 정통민주당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했지만 역시나 여섯 번째 낙선하였다. 정통민주당은 민주당계 지지층의 표를 분산시켜서 새누리당에게 총선승리를 안겨주는 역할만을 하고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한 채 자동 해산되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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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인터뷰 모습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선언을 했으나 결국 출마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국민의소리 시민단체를 만들어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광화문집회를 주도 했다.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박근혜에겐 최순실이 한명, 문재인에겐 최순실이 열 명"이라고 하기도 했다.#

제21대 총선을 앞두고 국민소리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자유한국당, 새로운보수당 등이 구성한 보수통합 논의 기구인 혁신통합추진위원회에 참여했다. # 나름 파격적인 결과로 미래통합당 창당준비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김해시 을 지역구에 단수공천을 받았는데, 가뜩이나 PK 민주당의 성지 취급받는 지역구에서 김해에 연고라고는 중학교를 나온 게 고작인데 살아올 수 있을지가 주목된다(...) 그런데 첫 여론조사에서는 의외로 지지율이 5%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는 박빙세를 보여주었다. 두번째 여론조사 에서는 36.4%로 상대 후보와 10%의 차이를 보여주며 격차가 조금 벌어졌다. 그런데 세번째 여론조사에서는 상대 후보를 넘어섰다. 민주당 지지자는 물론 미래통합당 지지자들도 어리둥절한 상황(..) 예상외의 선전을 보여주면서 김해 을의 선거 구도가 한치 앞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 무응답자 8%의 선택이 선거를 판가름 할 것으로 보인다.

3. 평가

1970년대~80년대에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서면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1990년대 이후로는 계속 제도정치권 진입에 실패했다. 오랫동안 정치에 도전하면서 그의 정치관에 공감하는 지지자들이 있었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노선과 이념과 상관없이 당적을 바꾸고 낙선을 거듭하면서 젊은 세대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잦은 당적 변동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민중당, 민주국민당, 녹색사민당, 정통민주당 등 여러 신당을 창당해서 선거에 도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선거 이후에 정당법에 의거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1대 총선을 앞두고는, 국민소리당 창당을 준비하다가 통합신당 창당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통추위에서는 처음에 당의 쇄신 부진을 이유로 불참입장을 표명했다가 결국 다시 합류하기로 했다.

4. 저서

1. 통일 초코파이(한반도 통일전략), 2016년, 도서출판 꿈과 의지, ISBN 9788983010513

2. 지못미 경제(청소년 경제 교과서), 2009년, 도서출판 시대의 창, ISBN 9788959401703

3. 불안없는 나라 살맛나는 국민(자아실현정치론), 2016년, 도서출판 구사, ISBN 9788996818519

4. 참된 진보정치를 선언하며(녹색사회민주주의), 2015년, 도서출판 글통, ISBN 9791185032160

5. 지구촌시대 민족발전전략, 1995년, 백산서당, ISBN 9788973271078

6. 한반도 통일과 중국, 2013년, 사회와 연대, ISBN 9788989097457

7. 문명의 전환 새로운 비전, 2013년, 백산서당, ISBN 9788973274857

8. 장기표의 신문명 국가비전, 2007년, 밀알, ISBN 9788941802587

9. 대통령님 나라 팔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1999년, 신문명, 절판

10. 새벽노래(에세이), 1988년, 미래사, 절판

11. 신문명 국가비전, 2001년, 신문명, 절판

12. 신문명 경제시론, 2001년, 신문명, 절판

13. 한국 경제 이래야 산다, 2006년, 도서출판 명상, 절판

14. 북한 위기의 본질과 올바른 대북정책, 2007년, 신문명, 절판

15. 부부사랑 그 지혜로운 행복(에세이), 2007년, 도서출판 밀알, 절판

16. 구국선언, 1998년, 신문명, 절판

17. 문명의 전환, 1997년, 미래 M&B, 절판

18. 우리 사랑이란 이름으로 만날 때, 1998년, 형성사, 절판

19. 사랑의 원리, 1996년, 한길사, 절판

20. 해방의 논리와 자주 사상, 1988년, 도서출판 친구, 절판

21. 민중 시대의 정치와 운동, 1991년, 한길사, 절판

22. 80년대의 상황과 실천, 1991년, 한길사, 절판

23. 대통령 대 국민, 2004년, 신문명, 절판

24. 한국사회개혁론(사랑의 정치를 위한 나의 구상 1), 1991년, 한길사, 절판

25. 지배의 논리와 해방의 논리 1,2, 1991년, 한길사, 절판

26. 창살의 노래 햇살의 노래, 1991년, 한길사, 절판

27, 우리 사랑의 기쁨으로(에세이), 1991년, 한길사, 절판

28,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세이), 1991년, 한길사, 절판

5.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동작 갑)

민중당

21,181(21.5%)

낙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동작 갑)

통합민주당

18,851 (19.1%)

낙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민주국민당

695,423 (3.7%)

낙선 (3번)

2002

2002년 재보궐선거 (서울 영등포 을)

새천년민주당

14,419 (37.7%)

낙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동작 갑)

녹색사회민주당

5,202 (4.9%)

낙선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정통민주당

48,624 (0.2%)

낙선 (1번)

2020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김해 을)

미래통합당

6. 관련 문서


  1. [1] 지금도 재야운동권/노동운동권의 전설로 통하는 김근태 - 김문수 - 심상정은 세명은 선후배 관계다. 서울대학교 선배인 김근태가 김문수에게 학생운동, 공활을 제안했었고 이후 김문수 역시 서울대학교 후배이자 노동운동 후배인 심상정에게 자신의 뒤를 잇게 하기도 했다. 세 사람의 관계도 각별한 편. 세 사람이 김근태는 생전 민주당계 정당, 김문수는 대한민국 보수정당, 심상정은 대한민국 진보정당의 획이 되었다는 점도 상당히 특이한 부분.
  2. [2] NL세력들이 결사반대했다.
  3. [3] 당시 전민련으로 결집한 재야 세력은 제도정치와 대선전략에 대해서 세가지 입장으로 나뉘어졌다. 첫째는 이부영이 주장하던 보수야당 경유론/김대중 비판적 지지론으로 일단 김대중이 주도하는 민주당계 정당에 입당해서 김대중으로의 정권교체를 도운 다음에 실력을 키워서 나중에 독립하자는 견해였다. 실제 이부영을 포함해서 수많은 재야인사들이 이런 논리로 대선을 앞두고 1990년대 초반 민주당에 입당했다.(하지만 이렇게 들어간 사람중에 나중에 실제 진보정당 창당을 추진한 사람도, 진보정당으로 돌아온 사람도 아무도 없다. 사실 이 논리는 그 이전부터 무수히 많이 나왔던 이야기로 198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진영에 합류했던 이해찬이나, 1988년 총선에서 김영삼의 영입제안을 받고 부산에 출마했던 노무현도 모두 진보정당을 하기 위해서 간다고 약속했었다.) 둘째는 김근태가 주장하던 민족민주전선론/김대중 비판적 지지론으로 지금처럼 모두가 단결해서 순수한 재야운동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이 입장에 서있던 사람들도 결국 1990년대 중반에 가면 모두 민주당계 정당에 입당해서 제도권 정치인이 된다. 셋째가 당시의 보수야당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던 노동운동 세력 일부와 이재오, 장기표 등이 주장하는 독자정당 창당/독자후보 대선 출마론이었다. 하지만 정권교체를 지상과제로 여기고 있던 재야세력 내에선 독자세력화는 분열이라는 반발이 극심했다. 이 때문에 장기표와 이재오는 노동운동의 상징이었던 김문수와 손잡고 민중당 창당에 나서고, 여기에 지하조직 활동을 정리하고 공개활동에 나선 노회찬 그룹이 합류한다.
  4. [4] 김민석이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위해서 사퇴한 지역구.
  5. [5] 민주노총과 노회찬이 주도해서 2000년 창당한 민주노동당이 4년간의 꾸준한 활동 끝에 17대 총선에서 원내진입이 유력시 되자, 경쟁관계였던 한국노총이 선거 직전에 급조한 정당이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꾸준히 연대를 제안했지만 민주노총과의 경쟁심리 때문에 한국노총은 독자 정당 창당에 나선 것이다.
  6. [6] 서울대학교 법경제학 교수로 김영삼 대통령의 수석비서관으로 일하면서 세계화 선언을 기초하고, 국내에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 노선을 도입한 인물이다.
  7. [7] 장기표는 자유무역협정(FTA), 특히 당시에 시끄러웠던 한미 FTA와, 역시 시끄러웠던 제주해군기지 건설에 부정적이었다. 반면 박세일은 보수 스탠스에 충실해 한미 FTA와 제주해군기지에 긍정적이었고 그의 입장이 당론으로 관철되었다. 이런 식으로 장기표 입장에서는 계속 본인의 신념이 배치되는 당론이 형성되니 회의감을 느꼈는지 결국 국민생각 창당준비위원회를 떠났다. 그 결과 국민생각은 그냥 별 특징 없는(?) 보수 성향 군소 정당이 돼 버렸고, 전여옥을 영입해 잠시 원내 정당이 되었지만 총선에서 폭망해 사라졌다. 장기표보다 3세 연하였던 박세일 교수도 5년 뒤인 2017년 세상을 떠났다.
  8. [8] 민주통합당 공천에서 탈락한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이 당에 추가로 합류하였다.
  9. [9] 실제 정통민주당 후보들은 지역구마다 3~5%를 득표했는데, 이보다 근소한 차이로 당선자가 결정된 곳이 태반이었다. 특히 수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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