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이씨

전주 이씨(全州 李氏)

전주 이씨의 종문
,*종중(宗中)에서는 가운데에 '종(宗)'자를 새겨넣기도 한다.,

관향

전라북도 전주시

시조

이한(李翰)

중시조

선성군, 덕천군, 무림군, 양녕대군, 효령대군,
광평대군, 밀성군, 덕흥대원군, 임영대군

집성촌

함경북도 길주군
함경남도 북청군
전라북도 부안군
전라남도 나주시
평안북도 정주군
경기도 연천군

인구(2015년)

2,631,643명 (3위)

비고

조선의 왕족 성씨
대한제국의 황족 성씨

1. 개요
2. 기원
3. 상세
3.1. 용어
3.2. 전국 분포
4. 전주 이씨 인물
4.1. 대한제국 황실 직계
4.2. 양녕대군파
4.3. 효령대군파
4.4. 광평대군파
4.5. 덕흥대원군파
4.5.1. 11세손
4.5.2. 12세손
4.5.3. 13세손
4.5.4. 14세손
4.5.5. 15세손 이후
4.6. 덕천군파
4.7. 그 외의 파계(派系)
4.8. 계보 불명

1. 개요

전라북도 전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조선대한제국국성으로, 조선의 왕족들과 대한제국의 황족들이 전주 이씨에 속한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의 21세손이다. 대한제국 황실 복원과 관련된 황실 후손들 대부분은 전주 이씨거나 전주 이씨와 관련되어 있다.

참고로 을사오적이근택, 이지용이 전주 이씨. 반면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독립운동가 이준, 이위종도 전주 이씨이다. 이위종의 부친 이범진 또한 나라와 운명을 함께 한다.

2. 기원

시조는 남북국시대(혹은 통일신라시대)때의 전주 출신 이한(李翰)이다. 이한의 조상에 대한 두가지 설이 있는데 그것은 중국 유래설[1]박혁거세 시대 초기 신라의 6촌에서 유래되는 경주 이씨로부터의 분적설[2]있다. 그러나 삼국시대, 고려를 거쳐 조선 말기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알평에서부터 이거명까지의 무려 36대에 이르는 경주이씨 계보가 어느날 갑자기 무더기로 발견된 점이나, 이희두(李禧斗)의 동생으로 진두를 거명하며 두(斗)라는 동일 항렬자를 쓰고 있는 점, 그리고 동일 항렬자를 쓰는 것은 조선 말기 당시 족보제작이 유행하면서 정착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런 주장은 신뢰할 수 없다. 전주 이씨는 전주의 토착 성씨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전주 이씨는 전라도 전주(全州)의 대대로 내려오던 토착 성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성씨 개념은 고려시대 초반인 문종 9년(1055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문종이 성이 없는 사람은 과거에 급제할 수 없다는 법령을 내리게 되면서 귀족들이 성씨를 사용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애시당초 문종이 그런 법령을 내린 계기가 그 전에는 명문가 출신들도 중국에서 유래한 성씨 사용의 필요성을 못느꼈기 때문에 성씨를 잘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경우만 해도 어떠한 기록에도 선대의 성에 대한 기록이 확실치 않다. 문종 9년(1055년) 이전의 삼국시대같은 경우 우리가 흔히 할고 있는 박혁거세나 김알지도 당대에는 그냥 이름인 혁거세, 알지로 불리었고, 성은 뒤늦게 후손들이 붙여주었다고 한다. 그전에도 중국의 영향으로 성씨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귀족들이 본격적으로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한건 고려때부터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각 지역의 토착세력인 호족들에게 본관과 성씨를 지정해주는 '토성분정'을 실시하면서부터이다. 이를 보완한게 문종 9년(1055년) 과거 응시자의 본관과 성씨를 응시 자격으로 하는 '봉미제도'이다.

이성계가 역성 혁명을 일으켜 고려왕조를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많은 권문세족들이 숙청당했지만, 대부분의 고려 귀족이 조선에 그대로 승계되었고, 조선 초기에 이들 양반의 수(고려시대 귀족)는 소수였고, 17세기 광해군이 공명첩을 시행하면서 급격하게 성씨를 쓰는 이들이 늘어나게 되는데, 돈을 주고 벼슬을 사는 매관매직이 늘어난 탓이었다. 임진왜란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세수가 필요했고 우려에도 불구하고 공명첩을 시행한다.

조선말기인 1894년(고종 31년)에는 갑오경장에 의하여 신분제도가 철폐되고 모든 국가 제도가 근대적으로 바뀌게 되면서, 양반 상민의 신분 격차가 없어지고, 매관매직, 족보를 사고 파는 행위는 더더욱 늘게 된다.

결정적으로, 1909년에 일제가 모든 사람이 성씨를 갖도록 하는 민적법을 시행하면서, 상당수 성씨가 없던 사람들이 성씨를 갖게 되었다. 일제시대가 들어서면서 돈만 주면 누구나 족보를 세탁할 수 있게 되었고, 족보를 세탁하다 간혹 다른집안끼리 1대 조상(시조)이 겹치는 웃지못할 경우가 있었는데, 이럴땐 애초 다른 집안끼리라도 족보를 아예 합쳐버려 같은집안으로 만들어버리는 웃지못할 합본행위도 성행하였다.[3]

3. 상세

전주 이씨 사람들은 대군의 4세손, 왕자군의 3세손까지만 왕족이었다. 그 이후에는 다른 양반들과 별반 다른 게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충무공 이순신과 동명이인인 무의공 이순신. 조선 왕족인 양녕대군의 6대손[4]이지만 딱히 이렇다할 혜택은 없었다. 양반이면 다 받는 병역면제와 세금면제가 주어졌다. 원래는 관리가 되어야 병역이나 세금면제였지만, 조선 후기에 양천제반상제로 바뀌어 가면서 다 빠져나가긴 했다. 그래도 왕족이라 전주 이씨 출신의 서얼들은 양반과 같은 대우를 받았고, 2차 왕자의 난 때문에 왕족 대우 못받은 회안대군 이방간의 후손들도 선원록에 오르려 애를 써서 숙종 때 소원성취했다.

조선왕조의 종친인 전주 이씨는 '이(李)' 성을 쓰는 어떤 집안과도 혼인하지 않는다. 조선 세종대왕 때 '같은 성씨를 쓰는 것은 본관은 다르더라도 근본이 같은 것'으로 해석하여, 간택에서부터 동성이본(同姓異本), 즉 이(李)씨 성의 아가씨는 완전히 배제했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민법상 동성동본간 통혼도 가능하기에 큰 의미가 있겠나 싶지만 적어도 조선 시대가 멸망할 때까지 이 불문율은 상당히 철저하게 지켜졌다. 이렇게 보면, 중국에서 귀화했다고 하는 연안 이씨나 고성 이씨는 귀화(한반도로 도래)했다는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의미이다. [5]

매천야록[6]에 따르면 이렇게 전주 이씨가 많아진 것은 흥선대원군이 왕권을 강화하고자 전국적으로 전주 이씨를 발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주요 관직에 전주 이씨들이 줄줄이 오르게 되면서 규모가 압도적으로 커진 것으로 보인다.[7] 그러나 매천야록은 저자 황현이 큰맘 먹고 쓴것도 아니고, 야사에도 못오를 수준의 당시 흘러다니던 야담들을 수록했으니 예를 들어 이완용이 며느리와 바람 피우는 장면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장남이 보고 충격받아 자살했다는 이야기나, 김병국과 민규호가 둘이 사귀는 관계(호모)였는데 김병국이 이조판서가 되자 민규호가 "당신이 판서이니 이제부터 나는 정경부인"이라고 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등으로 그 수준을 감안해야 한다.

조선 전기에 일찍 분파한 파일수록 후손의 수가 많아[8][9] 현재 효령대군파, 양녕대군파, 광평대군가 현재 각각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을 차지하고 있다. 다만 돈 주고 산 족보가 존재하기 때문에 큰 의미가 있지는 않다. 물론 돈 주고 족보를 샀다고해도, 그 시대에 재력이 있는 가문이어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민적법(民籍法)은 일제에 의하여 1909년 4월 1일부터 시행되었고, 그 이전에는 전주 이씨는 왕성이라 감히 함부로 넘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조선의 국성 아니랄까봐 과거 합격자의 수가 상당히 많아서, 생원과 진사과, 문과를 합쳐서 최다 합격자를 배출했다. 전주 이씨는 혜택도 많지만 권력이 커지면 왕권에 위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제약도 많았다. 그 다음 순위인 안동 권씨, 파평 윤씨도 전주 이씨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 전주 이씨는 왕성이니 예외이지만 일반 가문들을 급제자 수로 서열을 매기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급관리는 아무리 많아도 쳐주지도 않는다.[10] 전주 이씨는 왕실의 번영을 위해서 왕손이 많을수록 좋다며 이를 권장하였으며 또한 이를 감당할 능력이 충분하므로 가령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양보한 왕의 형제 효령대군 같은 경우는 손자가 33명, 증손자가 109명이었다. 갈수록 후손이 늘어나는건 당연하다.

전주이씨 종친회인 대동종약원(大同宗約院)의 종묘제례보존회는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보유단체'로 지정었다. 즉, 문화체육관광부가 공인한 무형문화재 보유 단체로서, 정부에서 대동종약원에 종묘대제(宗廟大祭)의 종묘제례 관련 업무를 위탁한 형식이다. 종묘나 사직 대제 준비현장에 가면 전주 이씨 종친회 노인들이 제사 일로 논의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남양주 소재 홍유릉의친왕, 덕혜옹주, 회은황태손 등의 묘역은 평소엔 접근이 불가능하지만 제사 날짜에 맞춰 가면 손쉽게 입장하여, 제사 과정을 지켜볼 수도 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전주 이씨다.[11][12] 다만 왕실 직계는 아니고 양녕대군[13] 방계 후손. 양녕대군의 다섯째아들 장평도정 이흔의 큰아들 부림령 이순의 후손이다. 무의공 이순신의 직계손이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으나 실은 무의공의 10대 방계손.[14][15]

조선을 건국하면서 악행 하나를 저질렀는데 그것이 바로 선대 왕조인 개성 왕씨들을 학살시킨 왕씨 몰살이 그것이다.

3.1. 용어

한국의 성씨 중 전주 이씨의 경우 가문에만 쓰이는 독특한 한자 용어가 있다. 임금님의 조상을 '선원(璿源)'이라고 한다든지, '제왕불감조기조(帝王不敢祖其祖)', 또는 '군왕불감기조(君王不敢其祖)'라고 하는 표현 등은 모두 가문의 독특한 용어다. '제왕불감조기조'는 제왕 또는 임금은 감히 그 임금을 시조로 하는 종파의 조상으로 둘 수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임금님은 모든 백성 공동의 부모, 곧 국부이므로 한 파의 시조 또는 중시조(中始祖)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금을 1세로 하여 세대를 따지는 것은 불경스러운 것으로 여기어 왔다.

그래서 아래의 다음과 같은 명칭의 계통이 나오게 되었다.

  • 선원선계(璿源先系): 시조로부터 태조 이성계의 직계 조상인 목조 이안사 이전에 갈라진 계통. 직계와 시중공파(侍中公派)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주부공파(主簿公派) 등의 3계 방계가 있다.
  • 선원세계(璿源世系) 또는 선원본계(璿源本系): 왕통(王統)인 이안사 이후부터 순종까지의 계통.
  • 선원파계(璿源派系) 또는 선원속계(璿源續系): 왕자, 왕자군에서 갈라진 계통. 총합 125파이나 계통이 끊어진 것이 있어 105파가 되고, 2012년 현재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 등록된 것은 86개 파라고 한다.

3.2. 전국 분포

전국의 이씨들 중 가장 많은 성씨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많이 살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충청도, 전라도에 특히나 거주 비율이 높다. 반면 경상도강원도는 쪽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편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뿐, 실상은 전국에서 세 번째로 많은 성씨인 만큼 경상도에도 전주 이씨들은 볼 수 있다. 그 밖에 북한에도 꽤 많이 살고 있는데 특히 함경도 쪽에 많다. 애초에 조선의 건국자 태조 이성계부터 함경도 영흥 출신이니 딱히 이상할 건 없다.[16]

4. 전주 이씨 인물[17]

고려시대에 유명한 전주 이씨론 무신정변으로 유명한 이의방이 있다. 현재 존재하는 전주 이씨들의 시조격인 태조 이성계는 이의방의 동생 이린의 후손이다. 다만 이의방과 그의 형 이준의는 역신이란 이유로 전주 이씨 족보에서 이름이 누락되었다.
조선 이후부터는 일단 맹주에 해당되는 조선 임금의 직계종파(현 대한제국 황실 직계)가 최대의 명문가로 인정되며 주로, 최고의 관직을 '점령'하고 숱한 문인을 배출한 효령대군파, 광평대군파, 덕천군파, 밀성군파, 양녕대군파가 명문가로 뽑힌다.

4.1. 대한제국 황실 직계

고종황제는 생전에 여러 자녀를 두었으나, 장성한 자녀는 명성황후에게서 본 순종황제와 장귀인이 생모인 5남 의친왕, 엄귀비가 생모인 영친왕, 고종이 환갑의 나이에 복녕당 양씨에게서 본 고명딸 덕혜옹주까지 넷 뿐이다. 개중 순종은 두 명의 황후 사이에서 자녀를 보지 못했고, 영친왕의 장남 이진은 만 1세가 채 되기 전에 요절, 차남 이구가 장성하여 일본에서 지내다 자녀 없이 사망했으며, 덕혜옹주는 일제에 의한 정략혼인으로 대마도주 소(宗)씨 집안에 시집가 1녀를 두었는데, 이 딸은 유서를 남기고 행방불명되었다. 따라서 현재 이른바 '황손(皇孫)'으로 칭할 수 있는 인물들은 모두 의친왕 가계이다. 의친왕이 스무 명이 넘는 자녀를 보았고, 고령이지만 직계 자녀만 해도 아직 10여 명이 생존해 있다. 이들을 통해 고종황제의 증황손[19], 고황손[20]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황손들 중에 유명한 인물을 아래 적는다.

  • 이상협(李相協) - 시조 44세손. 대한제국 황실 수장으로서의 이름은 이원(李源). 1962년 생으로 현직 대한제국 황실 수장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조선 임금의 계보 유지' 차원으로만 존재하는 것일 뿐이지 황제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명목상 칭호는 황사손(皇嗣孫)이며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총재다. 태조고황제의 건원대제부터 시작해 크고 작은 조선 왕실-대한 황실의 행사를 집행하는데, 빼먹을 수 없는 제사만 하더라도 1년에 50가지가 넘는다(...)
  • 이우 - 의친왕의 차남. 자세한 내용은 이우 문서 참조.
  • 이충길(李忠吉) - 시조 43세손. 황사손 이원의 생부로, 그밖에 차남이 국내에 거주 중이다. 통용 중인 충길은 아명으로 호적명은 해룡(海龍), 황실명은 이갑(李鉀)이다. 1939년에 태어나서 한국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간간히 국내 제례, 행사를 위해 일시 귀국하다가 2014년에 미국 롱아일랜드 자택에서 사망했다. 사망 전까지 황실의 남자 후손 중 최연장자로 집안의 큰 어른 노릇을 도맡았다. 의친왕의 9남으로 모친은 함정례이다..
  • 이해석(李海錫) - 시조 43세손. 의친왕의 10남. 아명은 영길이며 호적명 해석, 황실명이 석(錫)이다. 미8군 무대에서 노래를 시작했던 가수 출신으로 대표곡은 '비둘기집'이 있다. 흔히 언론에 자주 노출되던 인물로 "마지막 황손"으로 알려져 있지만, 상기한 것처럼 사실과는 다르다. 모친은 홍정순으로 다른 남매가 더 있다.

4.2. 양녕대군파

4.3. 효령대군파

4.4. 광평대군파

4.5. 덕흥대원군파[27]

4.5.1. 11세손[28]

4.5.2. 12세손[33]

4.5.3. 13세손[35]

4.5.4. 14세손[39]

4.5.5. 15세손 이후

  • 이계주: 덕흥대원군 - 연령군 15세손, 시조 44세손. '柱'자 항렬. 숙명여대 교수.
  • 이남주: 덕흥대원군 15세손, 시조 44세손. '柱'자 항렬. 신화건설 회장.
  • 이방주: 덕흥대원군 - 능원대군 15세손, 시조 44세손. '柱'자 항렬. 현대자동차 부사장.
  • 이봉주: 덕흥대원군 15세손, 시조 44세손. '柱'자 항렬. 마라토너.
  • 이철주: 덕흥대원군 - 연령군 15세손, 시조 44세손. '柱'자 항렬. 연세대 교수.
  • 이웅평[41]: 덕흥대원군 15세손, 시조 44세손. '柱'자 항렬. 남도건설 회장, 지원장학회 이사장.
  • 이우영: 덕흥대원군 - 은언군 16세손, 시조 45세손. '愚'자 항렬. 그랜드힐튼 서울, 동원아이앤씨 명예회장, 누동궁 사손.
  • 이우정: 덕흥대원군 - 용성대군 16세손, 시조 45세손. '愚'자 항렬[B]. 전 국회의원, 여성운동가, 노동운동가.
  • 이우진: 덕흥대원군 - 은언군 16세손, 시조 45세손. '愚'자 항렬. 중앙대 명예교수.
  • 이우혁: 덕흥대원군 16세손, 시조 45세손. '愚'자 항렬. 축구 선수.
  • 이우현: 덕흥대원군 16세손, 시조 45세손. '愚'자 항렬[B]. 국회의원.
  • 의웅: 덕흥대원군 18세손, 시조 47세손. '義'자 항렬[B]. 형섭X의웅의 멤버.

4.6. 덕천군파

4.7. 그 외의 파계(派系)

4.8. 계보 불명


  1. [1] 이게 모화사상(慕華思想) 즉, 사대주의로 연결되는 중화를 사모하는 사상과 이어져 있다.
  2. [2] 실제로 경주이씨대종보를 보면, 시조 이알평에서 중시조인 소판공 이거명 사이의 실전 세계를 부록으로 수록하면서 중간에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그러나 알평은 신화로서 의미가 있는 인물이고, 실질적인 경주 이씨 시조는 이거명으로 보는게 타당하다. 신화로 있던 이알평과 실질적인 경주 이씨 시조 이거명 사이의 이름들이 조선 말기 갑자기 전부 발견됐다지만 신뢰성에 의문이 있다. 알평도 훗날 성을 붙인 것이고 신라는 진흥왕 대부터 성씨가 사용된 기록이 나오며 그것도 중국이 외교 문서에 자기들 관례에 따라 김진흥으로 기록하면서 성씨가 발견된다. 그런데 진흥왕보다도 600년 이전 인물인 이알평부터 그후 이거명 사이의 세대들이 성은 물론이고 항렬을 따져 돌림자까지 썼다는건 신뢰성을 부여받기 힘들다.
  3. [3] 예로 들면, 지봉유설의 저자인 이수광(경녕군의 5대손)은 김포 이씨 족보에, 수춘군(세종의 서13남)의 고손자인 이세호는 충주 이씨 족보에, 덕천군(정종의 10남)의 5대손인 시흥군(始興君) 이정은 경주 이씨 국당공파 12세손(중시조로부터 28세손)으로 나온다. 이들 경우에는 합본이라고 말할 수 없어도 전주 이씨 족보와 다른 이씨 족보를 대조해서 보면 직책이 서로 겹치는 경우가 나타난다.
  4. [4] 양녕대군의 다섯 번째 서자 장평도정(長平都正)의 4대손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완원군(完原君) 이진(李眞)과 안동김씨 성균관진사 김구수(金龜壽)의 딸인 정경부인 김씨의 다섯째 아들
  5. [5] 그래서 조선 시대 왕비 중에 이씨가 없고, 나아가 왕가에 시집간 이씨가 없다. 따라서 외척 세력 중에 이씨 자체가 없다. 유일한 예외라면 조선 건국 전 인물인 추존 대왕 목조의 부인 효공왕후 이씨 정도 뿐이다.
  6. [6] 야사이며 터무니없는 이야기도 많아 내용을 걸러서 읽어야 하는 책이다.
  7. [7] 물론 김해 김씨의 머리수에 비하면 상대가 전혀 안되지만(...)
  8. [8] 무슨 대군파, 무슨 군파 이렇게, (왕이 되지 못한)왕자를 기준으로 파를 정하기 때문에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9. [9] 하지만 일찍 분파한 만큼 왕통에서는 멀었기 때문에, 소속인원이 많다는 점이 조선시대 당시에는 상쇄되었지만, 오늘날엔 왕통과의 거리 그런 거 아무 의미 없으니 뭐.
  10. [10] 명문가의 척도는 고위직인 정승이 나왔는지, 정승보다 더 쳐주는 대제학이 나왔는지, 유학자로서 최고 영예인 국통(國統)을 상징하는 문묘 종사를 이뤘는지, 정치가로서 최고 영예인 왕통(王統)을 상징하는 종묘 배향을 이뤘는지, 국가가 어려울 때 앞장섰는지 등이다.
  11. [11] 하지만 왕실 재산을 모두 몰수하였고, 일본에서의 입국을 거부하였으며, 여권 발급까지 거부할 정도로 왕실을 박대했다.
  12. [12] 이에 대해 방계였던 이승만의 컴플렉스라는 설과, 만약 왕실이 귀국하고 국민 여론이 왕정으로의 회귀를 원하게 되면 대통령제가 폐지될까 염려하여 그랬다는 설 등이 있다.
  13. [13] 그런데 양녕대군파인 이승만이 효령대군파인 이기붕의 맏아들인 이강석을 양자로 들였다. 이는 법에도 금지되었던 일이며(장자는 다른집 양자로 갈수 없다), 집안 족보가 꼬이게 돼는 일이었다.
  14. [14] 그래서 이승만은 미국에 있을 때 '조선의 프린스'라고 구라치고 미국에서 주요인사들을 만나러 다녔다(...) 다만 맹목적으로 비난할 수도 없는 것이 이 정도 간판을 내세우지 않으면 만나는 것조차 불가능하니(...)
  15. [15] 아무튼 대통령이 된 후에 곽영주가 옥체 보전하시라는 둥, 왕에게 할 단어나 말투를 쓰니 좋아라 했다. 그래서 지금도 일부 역덕후들은 '태조 리승만 박사'라며 깐다(...)
  16. [16] 단, 북한에서는 성씨의 본관을 구 시대부터 존재한 일종의 계급으로 보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본관을 기록하거나 남들에게 물을 일은 없다고 한다.
  17. [17] 세손순, 동일 세손 가나다순, 기타 가나다순
  18. [18] 전부가 아닌 대부분인 이유는 일부 후손은 본관이 완산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분적한 것은 아니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개개인의 선호다.
  19. [19] 황제의 증손(曾孫), 즉 3세손(世孫)
  20. [20] 황제의 고손(高孫) 또는 현손(玄孫), 즉 4세손(世孫)
  21. [21] 이승만의 직계는 아니고 방계 10대조 조상이다.
  22. [22] 본명은 이승환이다.
  23. [B] 23.1 23.2 23.3 23.4 23.5 23.6 23.7 23.8 23.9 23.10 연령대에 비해 항렬이 상당히 낮은 편이다.
  24. [24] 이기붕의 아들인데 이승만의 양자로 들어갔으로, 양녕대군파의 17세손이라고 할수도 있지만 억지다(...)
  25. [25] 본명은 이혁재이다.
  26. [26] 호적엔 壽자를 쓰는데, 본인은 秀자를 쓴다고 소개한다.
  27. [27] 중종의 서자 덕흥대원군과 그 아랫대에서 갈라져 나온 모든 파. 따라서 선조, 인조 이후에 갈라진 파도 여기에 적는다. 이들을 함께 묶어놓는 이유는 덕흥대원군의 후손들은 후대 왕통에서 갈라진 파까지 포함해 서로서로 양자를 주고받고 하면서 긴밀히 교류하고 항렬자까지 통일해 다 같은 한 일가친척이란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28. [28] 문조, 철종, 흥선대원군과 같은 항렬이다.
  29. [29] 이희 생전에는 외자를 '火' 부수로 짓는 게 항렬명 규칙이었다.
  30. [30] 인조의 억지로 추존하기는 했는데, 서자를 대원군도 아니고(덕흥대원군도 그래서 대원군이지 왕 추존은 되지 못했다.) 왕에 추존한 것은 법도에 어긋나서(당대의 신료들도 반대가 많았는데 인조는 우격다짐으로 뚫었다.), 통상 그냥 정원군으로 통칭한다. 그래서 정식 항목명도 원종이 아니라 정원군. 참고로 위키백과는 좀 더 엄근진해서 좀 껄적지근하지만 어쨌든 추존왕호인 원종이 정식 항목명이다.
  31. [31] 그래도 이런 족보 따질 때는 추존왕도 엄연히 왕으로 간주한다.
  32. [32] 은전군의 양자 풍계군의 아들로 입양되었으나 정치적 혼란에 엮여 파양당했다. '군' 작호는 왕의 4대손까지만 주는데, 선조의 10대손, 정원군(원종 추존[30][31])의 9대손,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의 8대손. 그래서 파양당해서 본가로 돌아감과 동시에 군호는 무효화된다. 그래서 '전(前)'을 붙인 것.
  33. [33] 헌종, 고종과 같은 항렬이다.
  34. [34] 이시인 생전에는 '時'가 항렬자였다.
  35. [35] 순종, 의민태자와 같은 항렬이다.
  36. [36] 이하전 생전에는 '銓'이 항렬자였다.
  37. [37]산업통상자원부
  38. [38] 족보 이름은 '이정용(李正鎔)'이다.
  39. [39] 이구와 같은 항렬이다. 이 항렬대까지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정식 봉호를 받은 왕족, 황족이 존재하고 이후로는 없다.
  40. [40]보건복지부
  41. [41] 귀순 용사가 아닌 동명이인.
  42. [42] 조선조 최연소 과거 급제자, 조선말기 암행어사의 아이콘.
  43. [43]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그 이억기 장군이 맞다.
  44. [44]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 이안사의 넷째 아우 이영습의 가계로, 선원선계에 속한다.
  45. [45] 자녀가 없었으나 월산대군의 손자이자 덕풍군의 아들 계림군을 양자로 삼아 핏줄을 이었다.
  46. [46] 2014년 12월 21일 연예가중계에서 인터뷰 중에 삼촌의 이름이 처음 공개가 되었다. 덧붙여 아이유는 아버지는 우리 집안의 영원한 '진국'이고 삼촌은 영원한 '진상'이라고 드립을 쳤다(…).
  47. [47] 가운데 '진' 자 항렬은 대표적으로 효령대군 27세손(시조 50세손)을 비롯하여, 함녕대군 19세손(시조 43세손), 완원대군파 28세손(시조 49세손), 임성군파 23세손(시조 47세손), 도평군파 17세손(시조 41세손), 진남군파 26세손(시조 50세손)이 있다. 물론 가장 높은 가능성은 항렬자를 무시하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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