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대학

구제국대학

일본국내

도쿄대학

교토대학

도호쿠대학

규슈대학

홋카이도대학

오사카대학

나고야대학

해외

경성제국대학

국립타이완대학

경성대학으로 개칭 후 서울대학교로 재구성.
다이호쿠제국대학의 후신.

일본 본토에 위치한 구 제국대학의 휘장.

1. 개요
2. 역사
2.1. 연혁
3. 평가 및 전망
4. 상호 관계
4.1. 동창회
4.2. 정기전
5. 조선인 관련
6. 식민지의 제국대학
6.1. 광복 후
7. 기타

1. 개요

제국대학은 국가의 수요에 응한 학술 기예를 가르치고 또한 그 학문의 깊은 경지를 연구하는 데 목적한다.

- 제국대학령(帝國大學令) 제 1조

제국대학령에 의거하여 일본 제국이 설립한 9곳의 대학. 일본제국 시절의 유일한 종합 관립대학[1]들이다.

2차대전에서 패전한 이후 교육제도가 개편되면서 제도적으로 제국대학은 사라졌지만, 현재 일본에서는 후신으로 남은 본토의 7개 국립대학들을 구 제국대학(旧帝国大学)으로 지칭한다.[2] 이들은 구 제국대학 당시에는 당시의 최고 엘리트만이 가는 학교였고, 제국대학이 아니게 된 현재에도 역시 마찬가지 위상을 자랑하고 있다.

2. 역사

일본 제국은 제국대학령에 의해 1886년부터 1939년에 걸쳐 본토에 7곳, 식민지(한반도, 타이완 섬)에 2곳, 총 9곳의 제국대학을 설립하였다.

제국대학의 모체는 1877년 세워진 구 도쿄대학[3]으로, 1886년 반포된 제국대학령에 따라 도쿄대학을 제국대학으로 개칭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지역별 제국대학들이 추가로 설립되며[4], 1897년에 제국대학은 도쿄제국대학이 되었다. 일본 본토에 있는 7곳의 제국대학은 1947년 제국대학령의 폐지로 인해, 제국대학이라는 이름이 빠져 현재의 대학명이 되었다.

한반도에 위치한 경성제국대학의 경우, 8.15 광복 뒤에는 미 군정청에 의하여 폐교된 뒤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5]에 따라 서울대학교로 이관되었고, 현재 서울대학교의 법과대학,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 사범대학, 자연과학대학, 공과대학, 의과대학, 간호대학의 모체가 되었다.

타이완섬에 위치한 다이호쿠제국대학은 1945년에 국립대만대학으로 개칭하였다.

2.1. 연혁

3. 평가 및 전망

동 세대 1.6%만이 구제국대학에 진학

일본제국 시절 당시의 최고 엘리트만이 가는 종합대학이었고, 지금 역시 마찬가지 위상을 자랑하고 있다. 현재 일본의 국립•공립대학은 200여 개 가까이 되지만, 제국대학은 그중에서도 최정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600~700여 개가 넘는 웬만한 4년제 사립대학들은 비교조차 안되는 수준. 실제로 3대 대학 랭킹이라고 불리는 ARWU, THE 세계 대학 랭킹, QS 세계 대학 랭킹을 보면 일본 순위의 1위부터 8위까지는 항상 구제국대학이 차지한다.

구제국대학까지 논하지 않더라도, 특히 이공계의 경우엔 국립대학사립대학 간 차이는 넘사벽이다. 학생 한명당 할당된 1년간의 예산만 봐도 국립대(약 2020만원)와 사립대(약 160만원)는 13배 차이가 나는데[15], 이공계열의 경우엔 사립대학 수업료가 국립대의 3배에 달하는 것을 감안하면 국립대와 사립대의 이공계 학부 가성비의 차이는 약 40배이다(...)

이공계에서 특히 선호도의 차이가 현저한 이유는, 이공계 특성상 엄청난 재정이 들어가야 하는데 일본 국립대학의 이공계 분야는 일본 정부 지원금을 엄청 받기 때문이며, 반대로 사립대는 돈이 많이드는 이공계를 기피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국립대학은 일본의 연구거점기관이기도 하기 때문에, 정부주도의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사립대는 연구원 수로 보아도 뒤쳐질 수밖에 없다. 또한, 사립대는 일반적으로 수험 과목 수가 국립대보다 훨씬 적고, 일부 전형을 제외하면 센터시험을 보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사립대학은 편차치가 특히 심하게 높게 나오기 때문에, 와세다대학-게이오대학이 도쿄대학 다음인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16] 실제 수준으로는 7곳의 제국대학과 도쿄공업대학 등의 주요 국립대학들을 돌고 난 다음 순서로 취급받는다. 이 차이는 의학과로 가면 더 벌어져, 의과의 경우에는 국립대가 거의 모든 사립 의대를 압도하는게 현실이다.[17]그 이유는 일본의 국립대학 의학과는 한국과 비교해도 등록금이 아주 저렴할 정도이지만(500만원 정도), 사립대는 연간 수천만원이 넘을 정도로 등록금이 높으며[18], 일본의 의료 체계가 국립대를 중심으로 네트워크가 된 형태이기 때문에 일본의 의료소비자들도 국립대병원을 선호하는 경향이 짙기 때문도 있다.

이렇게 구제국대학은 이공계를 필두로 일본에서 대학의 정점을 차지하고 있으나, 일본의 수도권 집중현상과 지속되는 출산율 저조현상으로 인해 취업을 의식한 상위권 문과 수험생들에게 점점 외면받아 지방에 위치한 구제국대학들은 일명 지저(지방에 있는 제국대학)로 불리며 수도권에 위치하는 몇몇 최상위권 대학에 비해 문과 학부 선호도가 떨어지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지방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도쿄에 있는 기업에 취업하는것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존재하는데, 이 때문에 대학이 위치한 도시권의 규모가 취업의 질에 비례하는 경우가 생긴다. 점점 지방의 도시들이 쇠퇴하고 기업들이 도쿄에 본사를 옮겨감에 따라서, 지방에서 할 수 있는 취직 활동은 도쿄에 비해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버린 것.[19] 게다가 도쿄권에 있는 수도권 사립대학들이 정부로부터 정원 제한 요구를 받아들여 점점 정원을 줄이고 있고, 일본의 수도권 인구 과잉 현상 때문에 지원자수도 늘어가고 있다. 때문에 최상위권 사립대학도 점점 들어가기 힘들어질 거라고 예상된다.[20] 이 때문에, 여태까지 제국대학이 사립대학보다 우수한 학생들이 모이는 곳 또는 진정한 의미의 학문탐구를 위한 상아탑 이라는 사회적 인식과 제국대학의 수험생들이 보험으로 수도권의 사립대학을 거의 당연하게 합격했음에도 구제국대학에 진학하는 일본 수험계의 상식이 유지될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다만, 일본 정부는 일본의 저출산 고령화와 국채발급과 이자지급에 쓰이는 예산이 계속하여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줄일 수 있는 연구비를 줄이고 있다.[21] 그래서 결국에 제대로 된 학문의 연구•공부를 하려는 사람은 최고 연구거점대학인 구제국대학에 몰릴 수 밖에 없는 고로, 구제국대학의 위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도, 일본은 최근 21세기에 들어서 2019년까지 노벨 과학상을 19개를 배출하여 대략 1년에 한개씩 수상하였으나[22], 그 수상자들의 최종학력은 대부분 구제국대학이었다.

여담으로 2008년 노벨상 수상자 중에서 나고야대학 출신이 있는 걸 한국의 기자가 '지방 명문'이라 칭하면서 어익후 지잡에서 용났네란 뉘앙스로 기사를 작성했는데 이건 그냥 기자의 무식함을 자랑한 케이스.[23] 한국은 유명 대학들은 대부분 수도권 집중이지만 일본은 각 지역별로 제국대학이 분포되어 있는 구도이다.수도에 없으니 지방대인 건 맞지 MIT, 하버드도 다 지방대고 뭐 우리로 치면 지방거점국립대가 각각 서울대급으로 쎈 거자너

4. 상호 관계

예전에는 구 제국대학 재학생들은 프라이드가 강해서 자기네 학교 아니면 다 깔보지면서도, 위에 나온 7+2에 속하면 한 수 높게 봐주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서로 간에는 당연히 친한 척을 하지만 다 라이벌 관계(...) 특히 도쿄대학교토대학 간의 라이벌 관계는 옛날부터 꽤 유명하다. 교토대는 자유롭게 사고하고 토론하는 것을 중시하는 학풍을 자랑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도쿄대를 '암기 위주에 교양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녀석들'이라고 까기도 하였다. 도쿄대는 교토대를 빨갱이에다가 전통 좋아하고 자빠지는 비현실적인 놈들... 정도로 생각해 주었다고. 물론 이건 옛날 쌍팔년도 시절이나 학회에서의 얘기고 요즘와서 이렇게 생각하는 학생은 당연히 없으며, 오히려 거리가 거리임에도 대학 간의 친목교류도 활발하다.

일본 본토의 제국대학들은 지금도 결속력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이 7개의 구제국대학이 모여 매년 전국7대학종합체육대회라는 대학교 정기전을 하며, 2019년 기준 58회를 맞이했다. 약 30~40종목의 경기를 치러 점수를 합산하여 순위가 매겨지며, 매년 돌아가면서 대회를 주관하게 된다. 또한, 구제국대학의 종합적인 동창회 모임인 학사회가 존재한다.

구제전 수학부문(旧帝戦数学部門)이라는 것도 있다. 각 구제국대학들의 캠퍼스에 3문의 수학 문제가 게시되어 있는 상자를 설치하고 그것을 가장 빨리 푸는 대학이 승리하는 싸움. 문제를 다 풀면 상자 안에 있는 전리품을 참가상으로서 얻을 수 있고, 우승자에게는 수학제전[24]에 참가 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

또한, 일본의 학회나 연구, 학술회 등 역시 이들 구제국대학 출신들이 휘어잡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자기네끼리도 파벌이 복잡해서 암투와 냉전을 벌이지만, 문제는 사립대학 출신들은 아예 낄 틈도 안 준다는 점.[25] 재미있는 점은, 국제학회 등에서 일본사립대 학자들은 왕따시키면서도 서울대학교 출신이나 국립대만대학 출신은 같은 제국대학 출신이라고 은근히 우대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국제학회 등에서 한일 학자들이 모이면 토다이, 쿄다이 출신의 나이 많은 할아버지급 일본 교수들은 사립대는 무시해도, 서울대는 조다이(城大) 드립과 함께 은근히 제국대학이라고 쳐주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런 과거 드립을 치면 서울대에서는 부정도 긍정도 못 하고 아 예;;; 허허(...) 하고 급어색(...). 그러나 서울대가 제국대학이 아니게 된지 한참 지나서 현재 한국, 일본의 젊은 교수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고 한다.

4.1. 동창회

学士会がくしかい
학사회
Gakusikai

설립

1886년 7월

분류

일반사단법인

대표 위치

도쿄도 치요다구 칸다니시키초

홈페이지

학사회 링크
학사회관 링크

구제국대학 출신자들의 종합적인 동창회 모임인 학사회(学士会)가 존재한다. 이름이 학사회인 이유는 당시, 학위를 부여할 수 있는 교육기관은 원칙적으로 제국대학들에만 한정되었기 때문이다.[26] 지금도 여전히 학사회 규정에는 경성제국대학다이호쿠제국대학 출신자도 회원 자격이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학사회가 상주하는 학사회관(学士会館) 건물은 1928년에 건설되었으며, 현재 유형문화재에 지정되어 있다. 내부에는 숙박시설, 레스토랑, 회의실, 연회장, 미용실, 사진관, 결혼식장 등의 시설이 있으며, 일반인들도 이용이 가능하다.

1887년부터 매달 발간하고 있는 학사회회보(學士會会報)를 비롯하여, 선학방문, NU7, 메일 매거진 등을 발행하고 있다. 2005년부터는 전국7대학종합체육대회에도 협찬하고 있으며, 매년 7천만원 이상의 협찬금을 지출하며 우승 대학에는 학사회 트로피를 증정하고 있다.

4.2. 정기전

개회식의 모습[27]

칠대전 글라이더 경기

홈페이지 링크

일본 본토 7개의 제국대학이 모여 매년 전국7대학종합체육대회(全国七大学総合体育大会)라는 대학교 정기전을 실시한다. 줄여서 칠대전(七大戦)으로 부르기도 하며, 2019년 기준 58회를 맞이했다.

대회는 약 30~40종목의 경기를 치러 점수를 합산하여 순위가 매겨지며, 7개 대학이 매년 돌아가면서 대회를 주관하게 된다.[28] 종목은 일정하진 않지만, 주로 아래와 같은 항목을 두고 겨룬다.

5. 조선인 관련

모든 제국대학은 구제고등학교[30] 졸업장, 혹은 그 제국대학에 부속되어 있는 예과를 진학해야 입학이 가능했다. 이 당시의 고등학교(구제)는 당연히 일본인이 다니는 인문계 고등학교로, 독일계 학교인 김나지움 혹은 영국계 학교의 식스폼 과정에 해당하는 가까운 엘리트 양성 기관이었다.[31]

그런데 한반도에는 실업학교나 고등보통학교[32], 혹은 구제고등여학교구제중학교[33]까지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반도에 예과를 갖추고 있는 경성제국대학 이외의 제국대학에 바로 진학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조선 학생들은 구제전문학교를 졸업한 다음 제국대학으로 입학하는 과정을 밟거나[34], 일본 본토의 구제고등학교를 통해서 제국대학으로 진학하였다고 한다. 대다수가 조선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조선인에게 입학허가를 비교적 후하게 내주었던 마츠에(松江, 송강)고등학교(現, 돗토리대학 문리학부)로 진학한 다음 제국대학으로 진학하였다고 한다.

구제고등학교와 제국대학 테크를 밟은 사람들의 예시로는 다음과 같다. 제 6대 서울대학교 총장을 맡은 윤일선은 제 6고등학교와 교토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했다. 제 9대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낸 유기천은 히메지고등학교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일본제국 관료였던 윤종화는 사가고등학교와 규슈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했다. 우리나라 물리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권녕대는 세이죠고등학교와 홋카이도제국대학 이학부를 졸업했다. 대한민국 농림부장관을 지낸 인태식은 마츠야마고등학교와 도호쿠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했다. 그 외의 출신자는 구제고등학교 항목 참조.

한편, 당시 조선인 출신으로 교수까지 한 케이스도 있었다. 교토제국대학의 이학부 화학과의 이태규와, 공학부 화학공학과의 리승기가 그들로, 둘 다 교토제국대학 조교수를 지냈다. 이태규는 교토제국대학 교수 경력 때문에 해방 이후 국대안 파동 당시 좌익 계열 학생들에게 친일부역자로 낙인찍혀 숱한 테러를 받기도 했다. 리승기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제2대 학장을 지내다가, 6.25월북하여 자신이 1939년에 만든 비날론을 공업화했다.

이 당시 대학생의 대부분은 남학생이었으나, 이 코스를 밟은 여학생도 있었다. 이회창자유선진당 대표위원의 막내이모인 김삼순이 그러하였다. 김삼순은 구제전문학교 과정인 도쿄고등여자사범학교(現 오차노미즈여자대학. 고등사범학교구제전문학교 중에서도 우월한 지위였다.)를 졸업한 다음 홋카이도제국대학에서 이학부를 졸업하였다.

민족시인으로 유명한 윤동주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다음 제국대학으로 진학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릿쿄대학에 입학하였다고 한다.[35] 특히 동갑내기 사촌이었던 송몽규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하여 친척들의 비교대상이 되어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36]

6. 식민지의 제국대학

일본은 1924년에 식민지인 조선에 경성제국대학을, 1928년에는 대만 섬다이호쿠제국대학(대북제국대학)을 설립했다.

식민지의 제국대학 설립은 조선에서 벌어진 3.1 운동의 영향을 받아 식민지가 급속도로 반일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비교적 온건했던 1920년대의 시대상황과 날로 증가하고 있던 식민지의 대학 진학 수요를 반영한 것이다. 식민지의 유산 계급이 반체제 지식인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포섭의 과정이 필요했고, 더불어서 식민지에 이주한 일본인들의 고등교육기관 진학을 보장하기 위한 대학도 필요했다.[37] 동시에 식민지 지역에 대한 일본의 우월성 과시와 일본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학문적 연구는 부차적인 목적에 해당한다.

그래서 일본 정부조선총독부는 식민지 통치전략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한 1919년에, 바로 조선의 내지화를 위해 일본과 조선의 학제 차별을 폐지하기로 결정하였고, 1920년 12월 임시교육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1922년 2월 제2차 조선교육령을 반포하였다. 이에 따라 1923년 경성제국대학 예과 개교, 25년 본과 개교가 명문화되었다.[38] 개교 시기가 조금 늦춰진 1924년 경성제국대학이 개교하고, 이어 대만에도 영향을 끼쳐 1928년 다이호쿠제국대학이 개교하게 된다. 원래 대만에서는 제국대학을 개교하지 않고 고등학교만을 세울 작정이었지만, 대만 총독과 대만 민정장관이 도쿄까지 올라와서 시위까지 한 끝에 결국 제국대학이 개교되었다.[39]

6.1. 광복 후

서울대학교에서는 1946년을 개교년도로 삼고, 자신들의 전신이 경성제국대학임을 쉬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대한 국민 여론도 나쁜데다 명색이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인데, 남의 나라(그것도 국민 감정이 영 좋지 않은 나라[40])의 대학인 제국대학의 후신임을 인정한다는 것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실제로 살펴보아도, 1945년-1946년의 경성제국대학-경성대학-서울대학교 변천과정을 검토해보면 경성제대와 서울대학교의 인적(人的) 관계는 뚜렷하지 않다. 광복 후, 일본인 교수들은 전부 교체되었으므로[41] 경성제국대학의 일본인 교수들의 학풍은 일거에 단절된 것이다.

다만 서울대학교가 대학 캠퍼스, 캠퍼스 건물, 도서, 여러 기자재 등을 비롯한 물적 자산을 온전히 계승한 것은 사실이다. 1974년에 서울대학교가 기존 경성제국대학 자리에서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후에도 경성제국대학과의 물적 연속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가령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의 방대한 구간서고 역시 제국대학 시절의 장서가 그대로 이관된 것이고, 서울대학교 연건캠퍼스는 옛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위치하고 있던 종로구 연건동 대학로에 아직까지도 자리잡고 있다.

어찌하였든 역사적으로 보면 경성제국대학이 서울대학교의 전신 중에 하나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한편으로 세간에서 경성제국대학을 서울대학교의 전신으로 보는 인식도 상당히 높으며, 경성제대 출신 동문들도 서울대를 모교로 생각하고 있다. 다만, 원래 경성제대 출신자들은 서울대학교를 모교로 인식하는데 굉장히 부정적이었다. 경성제국대학이 조선 유일의 최고 학부였던 데 비해, 국대안으로 통합된 서울대학교에는 당시에 격이 떨어진다고 보던 중학교(구제)[42]전문학교(구제)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43] 하지만 통합 후 서울대학교가 신생 대한민국에서 최고 학부 자리를 차지하면서 경성제대 출신들도 모교로 받아들이게 된 면이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는 경성제국대학 대신 다른 기원을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그쪽을 내세우는 실정(...). 가령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경우 연세대학교와 충돌하는 제중원에서 기원을 찾는 다소 무리한 모습을 보인다.[44] 1924년에 세워진 경성제국대학에 관해서는 지금도 어물쩡 넘어가고 있지만, 일부 단과대는 역사가 100년이 넘는다고 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경성제국대학의 역사를 건너뛰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국립대만대학은 자신들의 전신은 일본제국이 설립한 다이호쿠제국대학임을 순순히(?) 인정하고 있다. 이는 한국과는 달리 일본의 식민지 지배기간이 훨씬 더 길었고,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어 상대적으로 부드러워진 식민 정책의 경험이 있는 탓에 식민 지배에 대해 전면 부정만 하지는 않게 된 대만의 일본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7. 기타

  • 일본제국 시절때는 만주국의 최고학부인 건국대학을 제국대학과 (어디까지나)비슷한 수준으로 보았다고 한다.[45] 당연히 네임밸류는 제국대학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학비 무료에 관료 임용까지 보장한다는 떡밥 때문에 일본과 그 식민지 지역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진학을 희망할 정도였다.[46] 하지만, 건국대학이 취급이 좋지 않기로 유명한 만주국, 즉 괴뢰국의 최고학부다보니(...) 일본제국 본토에선 그저 깨갱해야했다. 입학도 제국대학과 달리 중등학교 졸업 후 바로 입학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나마 식민지 지역에서는 위세를 부릴 수 있었으나, 광복 이후에는 경성제국대학 출신 파벌에 밀려 지내야 했다.
  • 일본제국 시절, 제국대학 출신은 같은 일을 해도 봉급을 더 받는 등의 우선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제국대학의)문학부 졸업자에게는 무시험검정에 의해 소학교에서 대학까지 어느 곳에서든 교원이 될 수 있는 자격증을 줬다. 민간기업에서도 제국대학 출신자에게는 동일한 노동을 하는 사립대학 출신자보다 봉급을 더 주는 것이 관례였다. 국가는 제국대학 출신자에게 각종 특혜를 주고, 제국대학 출신자는 국가의 충직한 신민이 되는 완벽한 공생관계였다.> >- 신동아, 2005년 12월호
  • 요런 영상도 있다. 일본 국내의 7개 구제대를 나름 멋지게 표현하고 있으며, 이 대학들을 노리는 일본의 수험생들의 심정도(...) 나타내고 있다.


  1. [1] 즉, 제국대학도 분류상으로 관립대학(국립대학)에 포함되며, 대학령으로 설립된 그 당시 모든 대학은 구제대학으로 통칭된다.
  2. [2] 일본 본토 제국대학의 약칭은 구제대(旧帝大), 혹은 칠제대(七帝大).
  3. [3] 최초의 관립대학. 참고로 이 구제 도쿄대학(1877~1886)은 현재의 신제 도쿄대학과는 다름.
  4. [4] 대부분의 제국대학들은 전신교(前身校)에서부터 승격한 것이다. 당시 제국대학보다는 일반 구제대학이, 구제대학보단 구제전문학교의 격이 낮다고 보았다.
  5. [5] 당시 9개의 전문학교들도 학부의 일부분으로 통합되어 격상되었다.
  6. [6] 약칭 토다이(東大、とうだい).
  7. [7] 약칭 쿄다이(京大、きょうだい).
  8. [8] 약칭 호쿠다이(北大、ほくだい). 다만 이것은 당대의 약칭으로, 후에는 이 약칭을 홋카이도대학이 가져가서 현재는 약칭이 따로 없이 토호쿠다이(東北大、とうほくだい)라고 불리고 있다.
  9. [9] 약칭 큐다이(九大、きゅうだい).
  10. [10] 약칭 카이다이(海大、かいだい). 다만 현재는 관용적으로 호쿠다이(北大、ほくだい)라고 불리고 있다.
  11. [11] 약칭 죠다이(城大、じょうだい). 교토제국대학의 약칭으로 경대(京大)가 이미 있었기 때문에 성대(城大)로 불렸다. 해방되자마자 경성대학, 약칭 경대(京大)로 이름이 바뀌었다. 물론 성대라는 약칭과 한동안 혼용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경성대학의 명칭 변경을 다룬 논문도 있다. 한편, 경성(京城、けいじょう)은 게이조(케이죠)로 읽힌다.
  12. [12] 약칭 타이다이(臺大、たいだい).
  13. [13] 약칭 한다이(阪大、はんだい).
  14. [14] 약칭 메이다이(名大、めいだい).
  15. [15] 국립대학의 경우 1년간 학생 한명당 공재정지출은 202만엔, 사립대학은 16만엔. 출처 참조.
  16. [16] 다만 사립대학은 일반적으로 학생 수가 매우 많아 졸업생을 많이 배출하기 때문에 학연, 지연이 중요시 되는 과나, 문과 계열에서 힘이 밀리지는 않는다.
  17. [17] 물론 게이오기주쿠대학 의대, 준텐도대학 의대, 도쿄지케이카이의과대학 등 명성이 높은 사립대학 의대도 존재한다.
  18. [18] 때문에 사립대 의대는 공부가 아주 뛰어나지는 않은 자식에게 의사가 자신의 병원을 물려주기 위해 진학시키는 경우가 많다.
  19. [19]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구 제국대학중 하나인 규슈대학은 캠퍼스를 비교적 도심권에서 산골로 옮기는 등 지원자수를 떨어뜨릴 짓을 하고있다.
  20. [20] 저출산 고령화를 이유로, 실제로 일본 정부에서는 지방거점국립대학의 문과 학부를 전면 폐지를 논의한 적도 있었다.
  21. [21] 국립대학 연구비 삭감 2017년 대학별 연구비 순위 교차검증자료
  22. [22] 전세계적으로 보면 미국에 이어 두번째.
  23. [23] 그리고 2014년에 또 다시 반복되었다.# 다만 기사에 나온 도쿠시마대학은 제국대학이 아닌 점에 유의.
  24. [24] 2회차 기준 수학제전 MATH POWER 2018 참가 티켓이 주어졌다.
  25. [25] 그래서인지 역설적으로 사립대 출신 학자 중 출중한 사람들은 해외로 진출해서 성공하는 경우가 많이 보이는 데 반해서, 구 제국대 출신들은 일본 내에서만 지지고 볶는 경향이 있다.
  26. [26] 다만 홋카이도대학의 전신인 삿포로농학교(일본 최초의 학위 부여 기관) 만은 예외로 두었는데, 이 삿포로농학교는 후일 제국대학으로 승격하게 된다.
  27. [27] 총장들이 모여서 카가미비라키(鏡開き)를 시연하고 있다. 행사가 탈 없이 진행되기를 기원하는 일본의 전통 풍습 중 하나.
  28. [28] 홋카이도 - 규슈 - 오사카 - 교토 - 도호쿠 - 도쿄 - 나고야 순서.
  29. [29] 전국7대학체육대회에서 하는 유도는 오늘날의 강도관 유도와는 규칙이 좀 다른 구석이 있는데, 스스로 누우며 그라운드 공방에 진입하는 행위에 대한 벌칙이 없으며, 스탠딩 선언을 받기가 가능하기는 하지만 강도관 유도보다는 어려운 편이다. 강도관이 이런 저런 수정을 가하기 전의 초창기 유도의 형태와 가장 흡사하며, 오히려 브라질리언 주짓수와 더 비슷하다.
  30. [30] 이것은 현재의 대학내 교양과정과 같은 개념으로서 당시 고등학교졸업자는 대학에서 예과가 면제되고 바로 본과로 진입했다. 당시 일부 사립대학에서는 예과를 별도로 운영을 하면서 고등학교를 나오지 않은 학생들을 받아서 가르쳐 본과로 진입시키곤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조선인 유학생들은 제국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립대학을 다녔다. 당시의 중학교는 5년제로서 현재의 중고등학교와 같은 레벨의 학교임에 주의해야한다.
  31. [31] 구제고등학교의 전설적인 엘리트주의에 관해서는 일본에 많은 문학, 예술작품이 있다. 도쿄 소재의 제1고등학교는 그 당시 도쿄제국대학 자체보다 더 유명했다고 한다.
  32. [32] 예컨대 마산여고는 마산여자상업학교, 광주일고는 광주고등보통학교, 경복고등학교는 경성제2고등보통학교(경성제2고보, 경복중학교를 거쳐 경복 중, 고로 분리되었다.) 고등보통학교구제중학교(5년제)로 인정된 것은 1938년부터.
  33. [33] 일본인이 다니던 중등학교이다. 5년제이기 때문에 현재의 중고등학교에 모두 해당한다.
  34. [34] 구제고등학교예과 출신과는 달리, 학력 평가를 포함한 별도 심사를 거쳐야만 했다.
  35. [35] 후에 도시샤대학으로 편입.
  36. [36] 영화 동주에서도 이런 상황이 묘사된다. 함께 교토제국대학 입학시험을 치렀는데 송몽규만 합격하자, 윤동주가 태연한 척 하려고 애쓰며 송몽규를 축하해주고 송몽규도 난처해 한다. 그리고 그 소식을 편지로 접한 윤동주의 아버지도 실망한다.
  37. [37] 마침 일본 본토에서도 1918년 대학령의 반포로 제국대학 이외의 사립대학의 설립이 자유로워졌고, 1920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총독부령으로 조선인의 유학제한도 완화되었다.
  38. [38] 당시 1920년대 조선 내에서 일고 있었던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막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는 것이 과거의 통설이며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 이렇게 서술되어 있지만, 이는 부분적으로만 옳은 서술이다. 당장 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가 출범한 1922년 11월은 제2차 조선교육령 반포 이후에 해당한다. 민립대학을 설립하려는 것을 방해하려고 조선교육령이 나온 것이 아니라, 조선교육령에 반발해 민립대학 추진이 본격화된 것이다. 일부 논자는 이를 1920년 6월 설립된 조선교육회의 민립대학 설립 결의의 후신으로 간주하여 시간적 인과관계를 뒤집으려 하지만, 이미 무단통치기에도 민립대학 설립에 대한 요구는 꾸준히 나왔다는 점은 간과하고 있다. 일제가 조선인의 민립대학의 설립을 방해한 것은 맞지만,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자극을 받아 즉흥적으로 제국대학의 설립을 결의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식민지 통치전략의 한 단계였던 것이다.
  39. [39]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는데, 예과생 항목의 구제 고등학교 부분 참고.
  40. [40] 대표적인 예로, 1946년 경성제국대학을 국립서울대학교로 개편하면서 일문과를 폐지하고, 90년대 중반까지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인정하지도 않았다. 최근 인문대학에서 아시아언어문명학부를 개설하고 이 학부에서 담당하는 것 중 하나로 일본학이 있다. 중어중문학과는 원래 있었으니까 중어중문 이외의 여러 아시아권을 묶어 놓은 거라고 보면 될 듯 하다.
  41. [41] 경성제국대학의 모든 일본인 교수는 해방 후 사실상 업무를 중단했고 그해 10월 내지 11월까지 공식적으로 미군정에 의하여 퇴출되었다. 한편 조선인 교수들이 9월부터 채워지기 시작했다. 의학부의 경우 윤일선(훗날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냄.)의 경우 와 같이 경성제국대학과 그 부속병원의 조선인 조수들이 교수직을 물려받은 경향이 짙었으나, 법문학부나 이공학부는 일본 본토의 제국대학, 일본의 주요 사립대학, 구미(歐米) 대학 등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자리를 메웠다. 법문학부나 이공학부의 경우 이렇게 메워진 교수들 중에 무시할 수 없는 숫자가 좌익이었다. 그리고 경성대학 내의 이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의 좌익 교수들은 국대안파동 과정에서 대거 사직을 하면서 학교를 떠났다는 사실이다.
  42. [42] 경성사범학교 및 경성여자사범학교, 일제 강점기의 학제에서 초등교원을 양성하는 사범학교는 중등학교 급이었다.
  43. [43] 실제로 경성제대 법문학부 출신들이 주류였던 문리과대학에서는 서울대학교 초창기 경성사범학교에서 비롯된 사범대학을 폐지하려고 시도한 적도 있다.
  44. [44] 제국대 설립당시 포함되려다 놔둔 경성의학전문학교도 해방이후 다른 단과대와 같이 서울대에 포함된 점만 보더라도 스페인 독감을 당한지 몇 년 안 되는 상황에서 의료체계 확충을 위한 규모 불리기. 즉, 통합도 없었다는 점에서 출신자 중에서도 제국대학 권위에 연연하지 않는 이들은 오히려 그러한 역사를 부정할 가능성이 높다.
  45. [45] 만주 건국대학 출신인 강영훈은 당시 경성제국대학 예과와 건국대학에 동시에 합격했으나 만주 건대에 진학했다고 증언한 바가 있다.
  46. [46] 건국대학이 설립된 1930년대 말의 동아시아 지역의 엄혹한 경제 상황을 보면 건국대학의 인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군수전시총동원 체제로 개박살난 민생 상황에서 네임밸류를 얻고자 하는 것은 당시 용어로 유한계급이 아닌 이상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실제로 당시 대학 학비는 월간 수입이 40원 이상인 가정(신입 은행원 월급이 25~30원하던 시절)에서나 어느 정도 부담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상황에서 학비도 입학만하면 무료에 졸업하면 취직이 보장된 대학이니 인기가 상당했던 것이다.
  47. [47] 참고로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은 1816년을 개교연도로 잡고 있는데, 이는 제정 러시아의 괴뢰국인 폴란드 입헌왕국의 왕립대학으로서의 창건 년도다. 폴란드가 완전히 러시아 제국 직할지가 되면서 제국대학으로 승격(?)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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