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대학

구제국대학

일본국내

도쿄대학

교토대학

도호쿠대학

규슈대학

홋카이도대학

오사카대학

나고야대학

해외

경성제국대학

국립타이완대학

경성대학으로 개칭 후 서울대학교로 재구성.
다이호쿠제국대학의 후신.

• 제국대학령(帝國大學令) 제 1조

제국대학은 국가의 수요에 응한 학술 기예를 가르치고 또한 그 학문의 깊은 경지를 연구하는 데 목적한다.

1. 개요
2. 역사
2.1. 본토 위치
2.2. 식민지 위치
3. 평가
3.1. 전망
3.2. 상호 관계
4. 조선인 관련
5. 식민지의 제국대학
5.1. 광복 후
6. 기타

1. 개요

일본제국은 제국대학령에 의해 1886년부터 1939년에 걸쳐 본토에 7개, 식민지[1]에 2개의 제국대학을 설립하였다. 일본제국의 패망 후 제도적으로는 제국대학도 사라졌지만, 현재 일본에서는 본토의 7개 대학들을 구제국대학(旧帝国大学)으로 지칭한다.[2] 일본제국 시절의 유일한 종합 국립대학들로서, 당시의 최고 엘리트만이 가는 학교였고, 현재에도 역시 마찬가지 위상을 자랑하고 있다.

일본 본토의 제국대학들은 지금도 결속력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이 7개의 구제국대학이 모여 매년 전국7대학체육대회(全国七大学体育大会)라는 체육대회를 하며, 2017년 기준 56회를 맞이했다. 43종목의 경기를 치러 점수를 합산하여 순위가 매겨지며, 매년 돌아가면서 대회를 주관하게 된다. 또한, 구제국대학 출신자들의 종합적인 동창회 모임 학사회(学士会)[3]가 존재한다.

2. 역사

제국대학의 모체는 1877년 세워진 도쿄대학으로, 1886년 반포된 제국대학령에 따라 도쿄대학을 제국대학으로 개칭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지역별 제국대학들이 추가로 설립되며, 구 제국대학은 도쿄제국대학이 되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하기까지 총 9곳의 제국대학을 세웠다. 그중 7곳은 일본 본토, 2곳은 식민지 위치에 설립하였다.

2.1. 본토 위치

  • 도쿄제국대학: 1886년 설립, 약칭 도다이(東大). 현 도쿄대학(東京大学).
  • 교토제국대학: 1897년 설립, 약칭 교다이(京大). 현 교토대학(京都大学).
  • 도호쿠제국대학: 1907년 설립, 현재는 약칭 없음. 현 도호쿠대학(東北大学).
  • 규슈제국대학: 1911년 설립, 약칭 규다이(九大). 현 규슈대학(九州大学).
  • 홋카이도제국대학: 1918년 설립, 약칭 호쿠다이(北大). 현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学).
  • 오사카제국대학: 1931년 설립, 약칭 한다이(阪大). 현 오사카대학(大阪大学).
  • 나고야제국대학: 1939년 설립, 약칭 메이다이(名大). 현 나고야대학(名古屋大学).

위 7교를 합쳐 '칠제대(七帝大)'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 제국대학은 1947년 제국대학령의 폐지로 인해, 제국대학이라는 이름이 빠져 현재의 대학명이 되었다.

2.2. 식민지 위치

  • 경성제국대학[4]: 1924년 설립, 약칭 조다이(城大).[5] 1946년 해체 후 현 서울대학교로 재구성.
  • 다이호쿠제국대학[6]: 1928년 설립, 약칭 다이다이(臺大). 현 국립대만대학(國立臺灣大學).

경성제국대학의 경우 경성대학으로 개칭되어 1946년 미군정의 국립종합대학안으로 해체하고 다른 8개 전문학교와 합쳐져 서울대학교로 재구성되었다. 다이호쿠제국대학은 1945년 국립대만대학으로 개칭하였다.

3. 평가

일본제국 시절 당시의 최고 엘리트만이 가는 학교였고, 지금 역시 마찬가지 위상을 자랑하고 있다. 현재 일본의 국•공립대학은 200여 개 가까이 되지만, 제국대학은 그중에서도 최정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600~700여 개가 넘는 4년제 사립대학들은 비교조차 안되는 수준.

특히 이공계국립대학사립대학 간 차이는 넘사벽이다. 일본인 노벨상 수상자 대부분이 제국대학 출신이다. 그 이유는 일본 국립대학의 이공계 분야는 일본 정부 지원금을 엄청 받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도호쿠대학 공학연구과의 재료공학 쪽은 미국의 MIT칼텍 못지않은 지원을 받는다. 일본의 국립대학은 일본의 연구거점기관이기도 하기 때문에, 정부주도의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사립대는 연구원 수로 보아도 뒤쳐질 수밖에 없다. 또한, 사립대는 일반적으로 수험 과목 수가 국립대보다 훨씬 적고, 센터시험을 보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사립대학은 편차치가 특히 심하게 높게 나오기 때문에, 와세다대학-게이오대학이 도쿄대학 다음인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7] 실제 수준으로는 7곳의 제국대학과 도쿄공업대학 등의 주요 국립대학들을 돌고 난 다음 순서로 취급받는다.[8]

여담으로 2008년 노벨상 수상자 중에서 나고야대학 출신이 있는 걸 한국의 기자가 '지방 명문'이라 칭하면서 어익후 지잡에서 용났네란 뉘앙스로 기사를 작성했는데 이건 기자의 무식함을 자랑한 케이스. 한국은 유명 대학들은 대부분 수도권 집중이지만 일본은 각 지역별로 제국대학이 분포되어 있는 구도이다. 서울대학교에도 없는 노벨상 수상자가 있다는 시점에서 '지방 명문' 운운하는 건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그리고 2014년에 또 다시 반복되었다.# 수도에 없으니까 지방대인 건 맞다. MIT, 하버드도 다 지방대고 뭐 우리로 치면 지방거점국립대가 각각 서울대급으로 쎈 거자너

3.1. 전망

여전히 구제국대학은 이공계를 필두로 일본에서 대학의 정점을 차지하고 있으나, 일본의 수도권 집중현상과 지속되는 출산율 저조현상으로 인해 취업을 의식한 상위권 문과 수험생들에게 점점 외면받아 지방에 위치한 구제국대학들은 일명 지저[9]로 불리며 수도권에 위치하는 몇몇 최상위권 대학에 비해 문과 학부 선호도가 떨어지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10] 게다가 도쿄권에 있는 수도권 사립대학들이 정부로부터 정원 제한 요구를 받아들여 점점 정원을 줄이고 있고, 일본의 수도권 인구 과잉 현상 때문에 지원자수도 늘어가고 있다. 때문에 최상위권 사립대학도 점점 들어가기 힘들어질 거라고 예상된다.[11]이 때문에, 여태까지 제국대학이 사립대학보다 우수한 학생들이 모이는 곳 또는 진정한 의미의 학문탐구를 위한 상아탑 이라는 사회적 인식과 제국대학의 수험생들이 보험으로 수도권의 사립대학을 거의 당연하게 합격했음에도 구제국대학에 진학하는 일본 수험계의 상식이 유지될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한편, 일본 정부는 일본의 저출산 고령화와 국채발급과 이자지급에 쓰이는 예산이 계속하여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줄일 수 있는 연구비를 줄이고 있다.[12] 그래서 결국에 제대로 된 학문의 연구•공부를 하려는 사람은 최고 연구거점대학인 구제국대학에 몰릴 수 밖에 없는 고로, 구제국대학의 위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도, 일본은 최근 2000년대에 들어서 2018년까지 노벨 과학상을 18개를 배출하여 대략 1년에 한개씩 수상하였으나[13], 그 수상자들의 최종학력은 대부분 구제국대학이었다.

3.2. 상호 관계

구 제국대학 재학생들은 자기네 학교 아니면 다 깔보지만, 위에 나온 7+2에 속하면 한 수 높게 봐주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물론 서로 간에는 당연히 친한 척을 하지만 다 라이벌 관계(...) 특히 교토대학도쿄대학 간의 라이벌 관계는 꽤 유명하다. 교토대는 도쿄대를 '전통이 없는 잡놈들이'[14], '권력에 빌붙어서'[15], '공부도 못한다'[16]...등의 이유로 깔본다고 한다. 그 밖에도 자유롭게 사고하고 토론하는 것을 중시하는 학풍을 자랑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도쿄대를 '암기 위주에 교양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녀석들'이라고 까기도 한다.[17] 도쿄대는 교토대를 빨갱이에다가 전통 좋아하고 자빠지는 비현실적인 놈들... 정도로 생각해 주었다고..물론 이건 쇼와시절 이나 학회에서의 얘기고 요즘와서 이렇게 생각하는 학생은 없으며, 오히려 거리가 거리임에도 토다이-쿄다이간의 친목교류도 활발하다.

한편, 일본의 학회나 연구, 학술회 등은 이들 구제국대학 출신들이 휘어잡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자기네끼리도 파벌이 복잡해서 암투와 냉전을 벌이지만, 문제는 사립대학 출신들은 아예 낄 틈도 안 준다는 점.[18] 재미있는 점은, 국제학회 등에서 일본사립대 학자들은 왕따시키면서도 서울대학교 출신이나 국립대만대학 출신은 같은 제국대학 출신이라고 은근히 우대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19]

4. 조선인 관련

모든 제국대학은 구제고등학교[20][21] 졸업장, 혹은 그 제국대학에 부속되어 있는 예과를 진학해야 입학이 가능했다.[22] 그런데, 한반도에 존재하던 다수의 학교들은 '실업학교'나 '고등보통학교'[23], 혹은 구제중학교[24]이어서, 한반도에 예과를 갖주고 있는 경성제국대학 이외의 제국대학에 바로 진학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었다.[25] 그래서, 대부분 조선 학생들은 구제전문학교를 졸업한 다음 제국대학으로 진학하는 과정을 밟거나, 일본 본토의 구제고등학교를 통해서 제국대학으로 진학하였다고 한다.[26]

사실 윤동주 시인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다음 제국대학으로 진학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릿쿄대학에 입학하였다고 한다.[27] 특히 동갑내기 사촌이었던 송몽규교토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하여 친척들의 비교대상이 되어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한편, 이 당시 대학생의 대부분은 남학생이었으나, 이 코스를 밟은 여학생도 있었다. 자유선진당 대표위원을 역임한 이회창의 막내이모인 김삼순 여사가 그러하였다. 김삼순 여사는 구제전문학교[28] 과정인 도쿄고등여자사범학교(현 오차노미즈여자대학)를 졸업한 다음 홋카이도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하였다.

구제고등학교와 제국대학 테크를 밟은 사람들의 예는 다음과 같다. <청춘예찬>이라는 수필로 유명한 이양하(1905~1963)와 그의 동년배인 권중휘(1905~2003)는 교토의 제3고등학교에 진학한 다음 도쿄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낸 법학자 유기천고베의 히메지고등학교와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삼양사를 설립한 김연수는 교토의 제3고등학교와 교토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한편, 교토대학에는 당시 조선인 출신으로 심지어 교수까지 한 케이스도 있었다. 이학부 화학과의 이태규 박사와, 공학부 화학공학과의 리승기 박사가 그들로, 둘 다 교토대학 조교수를 지냈다. 이태규 박사는 교토대학 교수 경력 때문에 훗날 해방 이후 국대안 파동 당시 좌익계열 학생들에게 친일부역자로 낙인찍혀 숱한 테러를 받기도 했다. 리승기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제2대 학장을 지내다가, 6.25월북하여 자신이 1939년에 만든 비날론을 공업화했다.

5. 식민지의 제국대학

일본은 1924년에 식민지인 조선에 경성제국대학을, 1928년에는 대만 섬다이호쿠제국대학(대북제국대학)을 설립했다.

식민지의 제국대학 설립은 조선에서 벌어진 3.1 운동의 영향을 받아 식민지가 급속도로 반일본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비교적 온건했던 1920년대의 시대상황과 날로 증가하고 있던 식민지의 대학 진학 수요를 반영한 것이다. 식민지의 유산 계급이 반체제 지식인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포섭의 과정이 필요했고, 더불어서 식민지에 이주한 일본인들의 고등교육기관 진학을 보장하기 위한 대학도 필요했다.[29] 동시에 식민지 지역에 대한 일본의 우월성 과시와 일본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학문적 연구는 부차적인 목적에 해당한다.

그래서 일본 정부조선총독부는 식민지 통치전략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한 1919년에, 바로 조선의 내지화를 위해 일본과 조선의 학제 차별을 폐지하기로 결정하였고, 1920년 12월 임시교육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1922년 2월 제2차 조선교육령을 반포하였다. 이에 따라 1923년 경성제국대학 예과 개교, 25년 본과 개교가 명문화되었다.[30] 개교 시기가 조금 늦춰진 1924년 경성제국대학이 개교하고, 이어 대만에도 영향을 끼쳐 1928년 다이호쿠제국대학이 개교하게 된다. 원래 대만에서는 제국대학을 개교하지 않고 고등학교만을 세울 작정이었지만, 대만 총독과 대만 민정장관이 도쿄까지 올라와서 시위까지 한 끝에 결국 제국대학이 개교되었다.[31]

5.1. 광복 후

서울대학교에서는 1946년을 개교년도로 삼고, 자신들의 전신이 경성제국대학임을 부정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대한 국민 여론도 나쁜데다 명색이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인데, 남의 나라(그것도 국민 감정이 영 좋지 않은 나라)의 대학인 제국대학의 후신임을 인정한다는 것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32] 하지만 서울대학교의 입장이 어떻든 간에, 역사적으로 서울대의 전신 중 하나가 경성제대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세간에서도 서울대의 전신이 경성제대라는 인식은 확고하며, 경성제대 출신 학생들도 서울대를 모교로 생각하고 있다. 다만, 원래 경성제대 출신자들은 서울대학교를 모교로 인식하는데 굉장히 부정적이었다. 경성제국대학이 조선 유일의 최고 학부였던 데 비해, 국대안으로 통합된 서울대학교에는 전문학교구제중학교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33] 통합 후 서울대학교가 신생 대한민국에서 최고 학부 자리를 차지하면서 경성제대 출신들도 모교로 받아들이게 된 면이 있다.

하여튼 경성제대 대신 다른 기원을 찾을 수 있다면 그쪽을 내세우는 모습. 가령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경우 연세대학교와 충돌하는 제중원에서 기원을 찾는 다소 무리한 모습을 보인다.[34]서울대학교 법과대학대한제국 법관양성소를 기원으로 삼는다.

한편 1974년에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후에도 경성제국대학과의 연속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가령 서울대 중앙도서관의 방대한 구간서고 역시 제국대학 시절의 장서가 그대로 이관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국립대만대학은 자신들의 전신은 일본제국이 설립한 다이호쿠제국대학임을 인정하고 있다. 이는 한국과는 달리 일본의 식민지 지배기간이 훨씬 더 길었고,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어 상대적으로 부드러워진 식민 정책의 경험이 있는 탓에 식민 지배에 대해 전면 부정만 하지는 않게 된 대만의 일본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6. 기타

  • 일본제국 시절때는 만주국의 최고학부인 건국대학을 제국대학과 (어디까지나)비슷한 수준으로 보았다고 한다.[35] 대략 네임밸류는 제국대학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관료 임용 보장이라는 떡밥 때문에 상당히 선호되어 일본과 그 식민지 지역(조선, 대만)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진학을 희망할 정도였다.[36] 하지만, 건국대학이 취급이 좋지 않기로 유명한 만주국의 최고학부다보니(...) 일본 제국 본토에선 그저 적장자 앞의 서출처럼 깨갱해야했다. 입학도 본토의 제국대학과 달리 중등학교 졸업 후 바로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나마 식민지에 있었던 경성제국대학이나 타이호쿠제국대학 앞에서는 위세를 부렸으나,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 정착한 건국대학 출신들은 자기들보다 아래라고 여겼던 경성제국대학 출신 파벌에 밀려 지내야 했다.
  • 제국대학 출신은 같은 일을 해도 봉급을 더 받는 등의 우선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제국대학의)문학부 졸업자에게는 무시험검정에 의해 소학교에서 대학까지 어느 곳에서든 교원이 될 수 있는 자격증을 줬다. 민간기업에서도 제국대학 출신자에게는 동일한 노동을 하는 사립대학 출신자보다 봉급을 더 주는 것이 관례였다. 국가는 제국대학 출신자에게 각종 특혜를 주고, 제국대학 출신자는 국가의 충직한 신민이 되는 완벽한 공생관계였다.> >- 신동아, 2005년 12월호
  • 전국7대학체육대회에서 하는 유도는 오늘날의 강도관 유도와는 규칙이 좀 다른 구석이 있는데, 스스로 누우며 그라운드 공방에 진입하는 행위에 대한 벌칙이 없으며, 스탠딩 선언을 받기가 가능하기는 하지만 강도관 유도보다는 어려운 편이다. 강도관이 이런 저런 수정을 가하기 전의 초창기 유도의 형태와 가장 흡사하며, 오히려 브라질리언 주짓수와 더 비슷하다.


  1. [1] 각각 조선반도와 타이완섬
  2. [2] 약칭은 구제대(旧帝大)
  3. [3] 지금도 여전히 학사회 규정에는 경성제국대, 다이호쿠제국대 출신자도 회원 자격이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4. [4] 京城帝國大學. 경성(京城)은 게이조(케이죠)로 읽힌다.
  5. [5] 교토제국대학의 약칭으로 경대(京大)가 이미 있었기 때문에 약칭이 성대(城大)가 되었다. 해방되자마자 경성대학, 약칭 경대(京大)로 이름이 바뀌었다. 물론 성대라는 약칭과 한동안 혼용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경성대학의 명칭 변경을 다룬 논문도 있다.
  6. [6] 臺北帝國大學. 대북(臺北)은 다이호쿠(타이호쿠) 혹은 타이베이(타이페이)로 읽힌다.
  7. [7] 다만 사립대학은 일반적으로 학생 수가 매우 많아 졸업생을 많이 배출하기 때문에 학연, 지연이 중요시 되는 과나, 문과 계열에서 힘이 밀리지는 않는다.
  8. [8] 슈퍼글로벌대학, 학술연구간담회, 연구대학강화촉진사업, 지정국립대학법인 등의 대학 지원 사업이나 모임을 봐도 구제국대학이 주된 구성이 된다. 그야말로 일본의 학회나 연구, 학술회 등은 이들이 휘어잡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9. [9] 지방에 있는 제국대학
  10. [10] 지방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도쿄에 있는 기업에 취업하는것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존재하는데, 이 때문에 대학이 위치한 도시권의 규모가 취업의 질에 비례하는 경우가 생긴다. 점점 지방의 도시들이 쇠퇴하고 기업들이 도쿄에 본사를 옮겨감에 따라서, 지방에서 할 수 있는 취직 활동은 도쿄에 비해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버린 것.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구 제국대학중 하나인 규슈대학은 캠퍼스를 비교적 도심권에서 산골로 옮기는 등 지원자수를 떨어뜨릴 짓을 하고있다.
  11. [11] 저출산 고령화를 이유로, 실제로 일본 정부에서는 지방거점국립대학의 문과 학부를 전면 폐지를 논의한 적도 있었다.
  12. [12] 국립대학 연구비 삭감 2017년 대학별 연구비 순위 교차검증자료
  13. [13] 전세계적으로 보면 미국에 이어 두번째.
  14. [14] 교토대학의 역사는 143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 [15] 졸업자 중 대다수가 법조계, 정계, 관계로 진출. 보통 정부의 고위 엘리트 관료하면 딱 '도쿄대 출신' 이라는 이미지.
  16. [16] 노벨상 수상자 수는 2018년 기준 11:11으로 동률. 하지만 도쿄대는 2명이 문학상이며 한 명은 평화상이다. 교토대는 전부 과학부문.
  17. [17] 암기에만 몰두하고 사고력이 부족하다는 측면에 대해서는 도쿄대 불문과 출신의 다치바나 다카시도 그의 저서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에서 인정한 바 있다.
  18. [18] 그래서인지 역설적으로 사립대 출신 학자 중 출중한 사람들은 해외로 진출해서 성공하는 경우가 많이 보이는 데 반해서, 구 제국대 출신들은 일본 내에서만 지지고 볶는 경향이 있다.
  19. [19] 예전에만 해도 국제학회 등에서 한일 학자들이 모이면 토다이, 쿄다이 출신의 나이 많은 할아버지급 일본 교수들은 사립대는 무시해도, 서울대는 조다이(城大) 드립과 함께 은근히 제국대학이라고 쳐주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런 과거 드립을 치면 서울대에서는 부정도 긍정도 못 하고 아 예;;; 허허(...) 하고 급어색(...).. 하지만, 학계의 주력이 된 한국, 일본의 젊은 교수들은 애시당초 그딴 거에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에 완전히 죽은 떡밥에 가깝다고 봐도 무방하다.
  20. [20] 이것은 현재의 대학교양과정과 같은 개념으로서 당시 고등학교졸업자는 대학에서 예과가 면제되고 바로 본과로 진입했다. 당시 일부 사립대학에서는 예과를 별도로 운영을 하면서 고등학교를 나오지 않은 학생들을 받아서 가르쳐 본과로 진입시키곤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조선인 유학생들은 제국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립대학을 다녔다. 당시의 중학교는 5년제로서 현재의 중고등학교와 같은 레벨의 학교임에 주의해야한다.
  21. [21] 이 고등학교의 전설적인 엘리트주의에 관하여 일본에 많은 문학, 예술작품이 있다. 당시 도쿄 소재 제1고등학교는 도쿄대학 자체보다 더 유명했다고 한다
  22. [22] 지금의 상식과 달리 이 당시의 고등학교(구제)는 당연히 일본인이 다니는 인문계 고등학교로, 구 프로이센김나지움에 가까운 엘리트 양성 기관이었던 것.
  23. [23] 고등보통학교가 구제중학교(5년제)로 인정된 것은 1930년대 후반부터
  24. [24] 일본인이 다니던 중등학교이다. 5년제이기 때문에 현재의 중고등학교에 모두 해당한다.
  25. [25] 예컨대 마산여고는 마산여자상업학교, 광주일고는 광주고등보통학교, 경복고등학교는 경성제2고등보통학교(경성제2고보, 경복중학교를 거쳐 경복 중,고로 분리되었다.)
  26. [26] 대다수가 조선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조선인에게 입학허가를 비교적 후하게 내주었던 마츠에(송강)고등학교로 진학한 다음 제국대학으로 진학하였다고 한다.
  27. [27] 후에 도시샤대학으로 편입.
  28. [28] 하지만 고등사범학교는 그 중에서도 우월한 지위였다
  29. [29] 마침 일본 본토에서도 1918년 대학령의 반포로 제국대학 이외의 사립대학의 설립이 자유로워졌고, 1920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총독부령으로 조선인의 유학제한도 완화되었다.
  30. [30] 당시 1920년대 조선 내에서 일고 있었던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막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는 것이 과거의 통설이며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 이렇게 서술되어 있지만, 이는 부분적으로만 옳은 서술이다. 당장 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가 출범한 1922년 11월은 제2차 조선교육령 반포 이후에 해당한다. 민립대학을 설립하려는 것을 방해하려고 조선교육령이 나온 것이 아니라, 조선교육령에 반발해 민립대학 추진이 본격화된 것이다. 일부 논자는 이를 1920년 6월 설립된 조선교육회의 민립대학 설립 결의의 후신으로 간주하여 시간적 인과관계를 뒤집으려 하지만, 이미 무단통치기에도 민립대학 설립에 대한 요구는 꾸준히 나왔다는 점은 간과하고 있다. 일제가 조선인의 민립대학의 설립을 방해한 것은 맞지만,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자극을 받아 즉흥적으로 제국대학의 설립을 결의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식민지 통치전략의 한 단계였던 것이다.
  31. [31]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는데, 예과생 항목의 구제 고등학교 부분 참고.
  32. [32] 대표적인 예로, 1946년 경성제국대학을 국립서울대학교로 개편하면서 일문과를 폐지하고, 90년대 중반까지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인정하지도 않았다. 최근 인문대학에서 아시아언어문명학부를 개설하고 이 학부에서 담당하는 것 중 하나로 일본학이 있다. 중어중문학과는 원래 있었으니까 중어중문 이외의 여러 아시아권을 묶어 놓은 거라고 보면 될 듯 하다.
  33. [33] 실제로 경성제대 법문학부 출신들이 주류였던 문리과대학에서는 서울대학교 초창기 경성사범학교에서 비롯된 사범대학을 폐지하려고 시도한 적도 있다.
  34. [34] 제국대 설립당시 포함되려다 놔둔 경성의학전문학교도 해방이후 다른 단과대와 같이 서울대에 포함된 점만 보더라도 스페인 독감을 당한지 몇 년 안 되는 상황에서 의료체계 확충을 위한 규모 불리기. 즉, 통합도 없었다는 점에서 출신자 중에서도 제국대학 권위에 연연하지 않는 이들은 오히려 그러한 역사를 부정할 가능성이 높다.
  35. [35] 만주 건국대학 출신인 강영훈은 당시 경성제국대학 예과와 건국대학에 동시에 합격했으나 만주 건대에 진학했다고 증언한 바가 있다.
  36. [36] 건국대학이 설립된 1930년대 말의 동아시아 지역의 엄혹한 경제 상황을 보면 건국대학의 인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군수전시총동원 체제로 개박살난 민생 상황에서 네임밸류를 얻고자 하는 것은 당시 용어로 유한계급이 아닌 이상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실제로 당시 대학 학비는 월간 수입이 40원 이상인 가정(신입 은행원 월급이 25~30원하던 시절)에서나 어느 정도 부담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상황에서 학비도 입학만하면 무료에 졸업하면 취직이 보장된 대학이니 인기가 상당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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