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밴 플리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重章)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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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시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매튜 벙커 리지웨이

제임스 밴 플리트

맥스웰 테일러

제임스 앨워드 밴플리트
James Alward Van Fleet

출생

1892년 3월 19일

사망

1992년 9월 23일 (향년 100세)

복무

미합중국 육군

복무 기간

1915 ~ 1953

최종 계급

미국 육군 대장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1. 개요
2. 생애
2.1. 제2차 세계 대전까지의 행적
2.2. 그리스 내전
2.3. 6.25 전쟁의 활약
3. 아들의 일화
4. 퇴역 이후
5. 기타

1. 개요

미 육군군인으로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6.25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최종 계급은 미합중국 육군 대장.

6.25 전쟁 당시에 미 육군 제8군 사령관 직을 맡은 이후 대한민국과 깊은 인연을 맺고, 한국군의 현대화와 미국의 원조에 적극적으로 공헌하였다. 퇴역 이후에도 종종 방한했으며, 미국에서 '코리아 소사이어티(The Korea Society)'를 설립하고 평생 한미관계 발전에 헌신하였다.

2. 생애

2.1. 제2차 세계 대전까지의 행적

제임스 밴플리트는 1892년에 뉴저지 주 코이테스빌(Coytesville)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이름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네덜란드계이다. 5대조인 얀 아드리안선 판플리트(Jan Adriansen Van Vliet) 대에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서 미국 뉴욕으로 이민 온 집안의 후손이다. 밴 플리트(Van Fleet)는 후대에 네덜란드식 판플리트(Van Vliet)을 의미만 살려 영어식으로 바꾼 것이다.[1] 그러다가 점점 가세가 기울어 조부 대에는 오하이오의 빈농으로 전락했다. 부친 윌리엄 밴플리트(William Van Fleet, 1833~1919)는 이에 굴하지 않고 어릴 적에 단신으로 시카고로 출향한 뒤에 각종 막일을 하며 번 돈으로 사업을 벌여 자수성가했다. 그러나 1871년 시카고를 잿더미로 만든 시카고 대화재 때 큰 재산 손실을 보며 위기를 맞았다. 이후 아직 덜 개발되어 있던 플로리다로 건너가 철도 건설사업을 벌였으나 여기서도 큰 재미는 보지 못했다.# 제임스 밴플리트는 이렇게 사업 실패로 허덕이던 시절에 낳은 막둥이 아들[2]이었다. 제임스의 출생 직후 아버지 윌리엄은 재기의 꿈을 접고, 가족을 이끌고 철도 건설사업으로 친숙해진 플로리다로 이주하여 소소한 말년을 보냈다. 이 때문에 제임스 밴 플리트는 플로리다에서 줄곧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3]

제임스 밴플리트는 1911년에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 1915년에 졸업하였다. 재학 당시에는 미국육군사관학교 미식축구 팀에서 풀백으로 맹활약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 1915년 졸업 기수는 미국육군사관학교 역사상 가장 화려한 기수로, 원수 2명(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오마 브래들리), 대장 2명(밴 플리트, 조지프 맥나니)을 포함해 졸업생도 164명 중 59명이 장군이 되어 이른바 별들의 기수라고 불린다. 미 육군 보병 장교로 임관 후에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퍼싱 장군이 이끄는 미국 유럽원정군의 일원으로 해외 파병되어 보병대대(제17 기관총대대) 대대장을 역임하였다.[4]

이후 전간기[5]에는 미국 내 여러 대학의 학군단 단장을 맡았다. 캔자스 주립 농업대학, 사우스다코타 주립대학을 거쳐갔고, 플로리다 대학교 학군단을 이끌 당시인 1921~24년에는 플로리다 대학교 미식축구부 감독까지 맡기도 했다. 그 후에는 파나마 운하를 경비하는 제42 보병연대의 예하 대대장을 지낸 뒤, 조지아포트 베닝의 육군보병학교에서 교관으로 복무했다. 그 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메인 주 포트 윌리엄스의 제5 보병연대, 제29 보병연대의 대대장 등을 역임하며 순탄한 경력을 쌓아갔고, 1941년 2월에는 제8 보병연대 연대장에 임명되었다. 비록 이 평화 시기에 두드러진 활약은 없었지만 그는 자신이 부임했던 모든 부대에서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육군보병학교에서도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기관총 소대를 지휘한 경험 덕분에 최신 화기와 장비로 무장하고 이동할 수 있는 병력의 가능성을 예견하는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 전간기 육군보병학교 교관 시절에 그의 경력을 두고두고 꼬이게 하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이 무렵 육군에는 알코올 중독으로 골칫거리인 장교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장교 이름이 밴플리트와 비슷했다. 문제는 당시 육군보병학교 부사령관 중 한 명이던 조지 마셜이 밴플리트의 이름만 보고 바로 그 주정뱅이 장교로 오인하고 말았던 것.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마셜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중용되어 육군 전체의 인사권을 좌지우지하는 육군참모총장으로 승승장구했지만, 이때 뇌리에 박힌 밴 플리트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지 못하고 계속 갖고 가고 말았다.

이 문제는 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이후 미 육군이 대대적으로 확장되면서 큰 영향을 끼쳤다. 부대가 대거 창설되고 지휘관 수요가 폭증하자 그의 동기, 선후배들은 빠르게 진급하며 높은 보직을 맡기 시작했는데, 누구보다도 유능한 지휘관으로 꼽히던 그는 대령 계급, 제8 보병연대 연대장 직위에서 전혀 진급도, 보직 이동도 이뤄지지 않았다. 또한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이나 전쟁대학 같은 최고위 지휘관 양성과정 입교도 이뤄지지 못했다. 상급 지휘관들이 밴플리트를 추천해도 최종 단계에서 마셜이 계속 탈락시켰기 때문이었다. 굉장히 억울했지만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도 없었고 그저 안습일 따름이다.

결국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전개될 때까지도 3년 넘게 그는 대령 계급의 제8 보병연대 연대장이었고, 이때서야 실전에 투입되어 유타 해안에 상륙했다. 여기서도 그는 탁월한 지휘관의 자질을 발휘해 셰르부르 함락 당시 뛰어난 전공을 세웠는데도 여전히 진급은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를 두고 보다 못한 밴플리트의 육사 동기이자 유럽전선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마셜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왜 밴 플리트가 계속 진급에서 누락되는지를 물었고, 이어진 대화를 통해 마셜은 자신이 밴플리트를 다른 주정뱅이 장교와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사이에 동기였던 아이젠하워와 브래들리는 이미 1941년에 준장 계급을 달고 1944년에는 3성, 4성장군으로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당장 그의 제8 보병연대의 상급부대였던 제7군단의 군단장 로턴 콜린스 소장[6]은 2년 후배(1917년 졸업)였고, 같은 사단(제4 보병사단) 소속인 제12 보병연대 연대장 러셀 리더는 무려 9년 후배(1920년 입학, 1926년 졸업/임관)였다. 물론 사단장 레이먼드 바턴 소장은 5년 선배(1912년 졸업)였으니 꼭 터무니 없는 계급과 보직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간 밴 플리트가 보여준 능력과 주변의 높은 평가를 감안하면 억울한 이유로 인정을 못 받은 것도 분명하다.

본인의 실수로 유능한 지휘관의 앞길을 망친걸 깨달은 마셜은 그제서야 부랴부랴 기회가 될 때마다 밴플리트를 진급시켰다. 1944년 8월 1일에 드디어 준장으로 진급하여 제2보병사단의 부사단장을 맡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제90보병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한다. 이어 11월 15일에는 다시 소장으로 진급한다. 벌지 전투 후반부에 그는 후방 부대인 제23군단[7] 군단장으로 잠시 있었으며, 전쟁 말기인 1945년 3월 17일에는 다시 최전선으로 나와 제3군단 군단장에 부임하였다. 그는 레마겐 교두보에서 미 육군 제1군의 저돌적인 돌파작전을 이끌어 이른바 루르 포위전의 한 날개를 완성하고, 서부전선의 독일군의 전투력을 분쇄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이후 4월 17일부터는 군단을 이끌고 패튼 장군의 제3군 소속으로 독일 남부를 소탕하는 임무도 성공리에 완수하였다. 제90보병사단과 제3군단 사령관 당시의 활약은 저돌적인 패튼 장군에게도 큰 인상을 주어, 그는 밴플리트가 자신이 거느려본 부하 장군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며 극찬했다고 한다.


▲ 전선을 시찰하는 패튼을 수행하는 밴플리트. 이 영상은 제14 기갑사단이 독일 모스부르크의 연합군 포로수용소를 해방한 뒤, 패튼과 밴플리트가 1945년 5월 1일에 현장을 순시하는 장면이다. 영상 초반에 지도를 보며 설명하는 장군은 제14 기갑사단장 앨버트 C. 스미스 소장이고, 제3군단장 밴 플리트는 옆모습만 나온다. 영상 후반에 수용소를 걸을 때 패튼 바로 오른편 뒤에서 수행하는 소장 계급 장군이 밴플리트이다. (철모의 소장 계급장 위에 제3군단 마크가 있음)

유럽전선 종전 이후에는 태평양전선에서 일본 상륙 준비를 위해 제3군단 사령부를 이끌고 미국 루이지애나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원폭 투하로 일본도 이내 항복하자, 루이지애나에서 1946년 2월까지 군단장으로 대기하다가, 이후 미국 국내에서 전후 정리 작업(전시 편성된 부대의 해체, 재배치 등)을 수행하였다.

2.2. 그리스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간의 이념 대립 즉 냉전이 시작되고 유럽 각지에서 공산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자,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에 따라 많은 유럽 우방국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였다. 밴플리트는 1947년 12월 프랑크푸르트의 독일 주둔 미군 사령부에 나와있다가, 국무부 장관으로 영전한 마셜의 추천으로 1948년 2월에 중장 승진과 함께 그리스의 미국 군사고문단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원래 그는 참모를 역임한 경험도 없고 정치 경험이 전무했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리스 왕실과 국무부 장관 마셜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자신의 경험을 모두 쏟아부어 효과적으로 그리스 내전을 종식시키면서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다만 당시 그리스군의 상태가 막장이어서 초반에 고생을 좀 했다. 게다가 여러 가지 변수로 실패한 작전에 관해 그가 그리스군의 무능함을 탓한 경우가 종종 있어서 나중에 안 좋은 평을 듣기도 하였다.

미국 군사고문단장 재직 당시 그는 그리스군 총사령관이었던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 원수와 상당히 돈독한 사이였는데, 신기하게도 파파고스 원수는 영어를 할 줄 몰랐고, 밴플리트 장군은 그리스어를 할 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눈빛과 몸짓, 짧은 단어만으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리스 사람들은 밴플리트 장군이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으로 오해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그리스의 공산화를 막고 자유주의진영에 남도록 한 것은 사실상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의 전적인 공로로 봐도 무방하다.

2.3. 6.25 전쟁의 활약

이후 1950년 8월에 메릴랜드에 주둔 중이던 제2군 사령관을 역임하다가, 1951년 4월 매튜 B. 리지웨이 장군의 후임으로 제8군을 지휘하게 되면서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8] 그가 부임한 직후 대한민국 국군 최악의 흑역사 현리 전투가 발생했고 국군 제3군단은 밴 플리트 장군의 손에 해체당했다.

한국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밴플리트 장군은 나름의 골칫거리를 안고 있었는데, 바로 공산군에게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 있었다는 점이다. 유엔군은 확전을 피하기 위해서 중국과 소련의 영토는 공격하지 않았는데, 정작 공산군의 모든 전투력은 여기서 나오고 있었으므로 유엔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는 그리스 군사고문단 시절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당시에는 그리스군만 이 문제로 머리를 쥐어뜯었을 뿐, 그리스 내전만 종식시키는 것이 임무였던 밴 플리트 장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한편, 그는 중국 인민지원군의 무지막지한 물량공세에 맞서기 위해 밴플리트 탄약량(Van Fleet Day of Fire)이라는 전술을 창안하기도 했다. 이것은 밴플리트 포격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둘 다 종군기자들이 이 전술을 목격하고 붙인 명칭이었다.

1951년 5월에 벌어진 중국 인민지원군의 5차 공세 때 전선사수 명령과 함께 그가 택한 방식은 화력제압이었다. 바로 포병의 탄약통제보급율을 5배로 늘려 이른바 무제한 사격이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105mm 포는 300발, 155mm 포는 250발, 8인치 포는 200발, 175mm 포는 250발을 쏘며 중공군의 침공에 저항했는데, 이 강력한 화력으로 인하여 중공군의 5차 공세는 빠른 시일 내에 좌절되었고 중공군이 자랑하는 '보병을 이용한 산악 기동전' 역시 격퇴당했다. 이 '밴플리트 탄약량'에 힘입어 미군은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모든 지역을 선점해 초토화했는데, 미군 조종사들이 공중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면서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서는 "더 이상 어떤 생물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라고들 할 정도였다.

그런데 밴플리트가 미군이 작전 시 규정한 탄약의 사용 한도를 5배나 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국 의회의 일부 의원이 그의 전적을 칭찬하기는커녕 그를 조사해서 의회에 출석시켜 질의를 받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밴플리트가 탄약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해서 미국 납세자들의 세금을 낭비했다는 이유였는데, 밴플리트는 이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의원들 보고 여기 와서 적군 시체랑 포로들 좀 보라고 해. 오지 않을 거라면 '밴플리트 탄약량' 같은 말은 꺼내지도 말라고 해!"'라고 일갈했다. 물론 그가 의회에 출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9] 언뜻 군사 부문에 무지한 정치인들이 일 잘하는 장군에게 쓸데없이 태클을 거는것처럼 보이지만, 탄약 소모량이 미군의 병참선에 상당한 부담이 되는 상황이었고 저 탄약량 사용 제한도 미군이 자체적으로 정한것이었으니 의원들의 입장에서는 저 탄약 소모가 적절한것인지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다. 포탄을 생산, 보급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전부 국민의 세금에서 나오는거고 그 세금이 잘 활용되는지 확인하는건 의원들이 당연히 해야하는 일이다. 물론 포탄의 따위의 가격이야 물자를 소모해서 살릴 수 있는 아군의 인명과 죽일 수 있는 적군의 가치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장군이 화를 내었던 것이다.

아무튼 중공군의 5차 공세 이후 중공군이 자랑하는 보병을 이용한 기동전은 '밴플리트 탄약량' 앞에서 그 빛을 잃어버렸으며, 한국전쟁 후반부에 치열하게 벌어졌던 고지전의 양상 자체가 쌍방이 서로를 향해 엄청난 포격을 가하는 대규모 포격전으로 바뀐 것도 이때 밴 플리트 장군이 펼친 화력공세의 효과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밴플리트 장군은 한국군 증강에도 매우 깊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한국군의 문제점을 "우수한 장교 인력 및 사단급 이상의 대규모 군사훈련의 부족"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1951년 10월 경상남도 진해육군사관학교 건물을 신축하여 한국군의 정예화를 꾀했다. 또한 맹조의 발톱 작전으로 전선을 평양-원산~금강산으로 북진시키려 하였으나 전쟁의 장기화 확대를 꺼려한 미군 지휘부에서 취소시켰다.

이후 밴플리트 장군은 1953년 1월 말 미국 육군 제8군 사령관의 직위를 맥스웰 테일러 중장[10]에게 이임하고[11] 미국 본토로 돌아왔으며 2달 후인 3월에 38년간의 군생활을 끝으로 전역했다.


▲ 1953년 2월 21일 전역을 위해 귀국길에 오른 밴플리트 대장의 모습. 영상 초반은 여의도공항에서 후임 제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 장군의 환송을 받으며 비행기에 오르는 모습, 후반은 중간 기착지인 하네다공항에서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의 환영을 받는 모습이다. (British Pathé)

3. 아들의 일화

James Alward “Jimmy” Van Fleet, Jr(1925 ~ 1952)

한편 밴 플리트는 한국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안타까움을 겪기도 하였다. 밴플리트 장군의 외동아들인 제임스 A. 밴 플리트 주니어는 신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돕기 위해 미 공군 대위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가 1952년 4월에 전사했다.[12] 밴 플리트 주니어는 B-26기를 조종하여 북한군의 야간 철도 보급을 공격하는 위험한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 추락하여 유해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사건 발생 며칠 후 아군의 피해의 우려 때문에 밴플리트 장군은 수색 작전을 중지 시켰다. 밴플리트 주니어는 군산의 옥구 공군 비행장에서 출발했다가 실종 되었는데, 이후 가끔 밴플리트 사령관은 옥구 비행장을 방문 했다. 옥구 비행장에서는 기지 사령관의 배려로 공군 조종사 막사내 밴플리트 주니어 침실에 그의 유품을 그대로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이 사례는 전선의 최고사령관인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편애하지 않고 전선에 내보내는 솔선수범의 사례로 자주 언급되곤 한다.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사례. 그런데 당시 공산군의 총수라고 할 수 있는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도 당시 신혼의 몸으로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기 때문에 양군 사이에 공통점이 생긴 셈이다.[13]

2016년 6월 24일 KBS1에서 방영한 KBS 스페셜 제547회 〈장군과 아들: 한국전쟁의 기억〉에서 이들 부자의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4. 퇴역 이후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3월 31일에 군에서 퇴역했다.[14] 당초 퇴역 직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에게 주한미국대사를 맡기려 하였다. 당시 아이젠하워6.25 전쟁을 끝내고자 정전협정을 밀어 붙이고 있었는데, 분단 고착화를 이유로 이를 완강히 거부하는 이승만을 설득하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밴플리트는 아이젠하워와는 육사 동기이고, 이승만과도 의기투합한 사이로 양국 대통령 모두와 긴밀한 관계였기에 적임자로 꼽혔던 것이다. 그러나 밴 플리트는 본인도 정전에 반대하는지라 소신과 다른 행동을 할 수 없다며 이를 고사하였다. 또한 굵직한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전쟁 영웅이었기에 지역 사회에서 플로리다 주지사 출마 제안도 여러 차례 받았으나, 본인은 정치에 뜻이 없다며 이 역시 고사하였다. 플로리다에선 목장을 운영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퇴역 이후에도 한국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여러 차례 내한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과의 개인적 친분도 깊어 생일 축하연에도 여러 번 참석했고 나중에 박정희 정부가 들어설 때도 자주 내한하여 한국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후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뒤에도 민간 사절로 한국을 꾸준히 방문하였다. 또한 1965년 7월 19일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사망하자, 그의 유해를 미 의장대 특별기 편으로 옮길 수 있게 주선하고, 고국의 땅에 묻힐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마지막으로 내한한 때가 1975년으로, 이 때 국군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내한하여 김종필 총리 등 각 정부 요인들과 만찬을 가졌다.


▲ 1965년 7월 23일 이승만 박사의 유해가 김포공항을 통해 환국하는 모습이다. 수송기에서 관을 내리는 운구 행렬 뒷편과 이어지는 추모식 석상(1분46초)에서 밴 플리트를 확인할 수 있다.(대한뉴스 제529호)

밴플리트는 1957년에 미국 최초의 한국 관련 비영리단체인 코리아 소사이어티(The Korea Society)를 설립하였으며, 일생에 걸쳐 미국과 한국 사이의 우호 증진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플로리다 고향 목장의 집무실 이름을 '한국의 방'이라고 짓기도 하고, 평소에도 한국을 '나의 고향'이라고 자주 이야기하며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에 대해 자랑스러워 했다고 전해진다. 1988 서울 올림픽에도 꼭 참석하고 싶어 했으나, 당시 96세의 고령으로 주치의가 장거리 여행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만류하여 뜻을 접었다고 한다.[15]

밴 플리트는 1992년 플로리다 주 포크 시티에서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유해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창설자 밴 플리트 장군을 기리는 의미에서 코리아 소사이어티는 1995년부터 한미관계의 우호 증진에 기여한 사람에게 제임스 A. 밴 플리트 상을 수여하고 있다.

5. 기타

  • 명망 높은 전쟁 영웅이지만 육군사관학교 시절 성적은 중간보다 조금 낮았다고 한다. 동기생인 아이젠하워는 중간 정도였다고.
  • 퇴역 후 인터뷰에서 이승만을 존경한다고 말했으며, 많은 지혜와 경험을 가진 대통령이었다고 치켜세웠다. 이승만 입장에서도 미군 수뇌부 중 북진을 주장하고 한국군 증강에도 매우 호의적이었던 밴 플리트는 매우 든든한 후원자였으니 둘의 사이가 꽤 좋았다.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국군의 증강을 호소하는 이승만을 보면서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고 훗날 회고했다.
  • 한국에 대한 애정도 많아서 퇴역 이후 그의 농장을 찾아 오는 한국인이 있으면 태극기를 게양하면서 반갑게 맞이해주었다고 한다. 본인도 한국이 제 2의 조국이라고 밝혔고 집무실의 이름도 한국의 방으로 했고 그곳에는 본인이 내한할 때 찍은 사진, 한국 골동품 등이 가득했다.
  • 반공포로 석방 사건 당시에는 이미 퇴역한 지라 한국에 없었지만 반공포로 석방에 찬성했으며 당연히 해야할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 한국에 있을 때 한식을 즐겼는데 퇴역하고 나서도 쌀밥이 있는 한국식 식단을 즐겨 먹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산 쌀밥이 한국에서 먹었던 쌀밥과는 맛이 좀 달라서 한식의 맛을 제대로 못 내는 것 같다며 다소 아쉬워했다.
  • 1952년 12월, 아이젠하워가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 때 밴 플리트는 고착화된 전선을 북상시킬 목적으로[16] 아이젠하워에게 미군의 증강 없이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으며, 이에 따른 세부적인 작전 계획도 발표했다. 당시에 대화 분위기가 좋아 본인도 곧 북진이 승인될 것으로 믿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본인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안타깝다고 회고했다. 계획이 승인되지 않은 이유로 밴 플리트는 당시 합참의장이었던 오마 브래들리가 반대 의견을 피력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했다.
  • 압록강으로 재진격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이 많았는지 퇴역한지 30년이 지난 후에도 "당시 연합군은 충분히 북진통일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었는데 워싱턴 정부가 압록강 진격을 허락하지 않아 북한이 존속하여 지금까지 불리한 결과를 낳았고 이는 크나큰 실책이었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 중공군이 참전했을 때 만주에 전술 핵무기를 쓰자는 맥아더의 계획에 처음에는 찬성했다고 밝혔다. 적정한 장소에 핵무기를 투입하면 조기에 전쟁을 끝내 수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17] 그러나 이 경우 소련이 맞대응으로 핵무기를 사용하지 말란 법이 없었고 3차 세계 대전의 가능성이 있었기에 나중에는 생각이 바뀌었으며 트루먼 대통령의 결정도 결과적으로 옳았다고 밝혔다.
  • 부정적으로는 현재 한국 군대에서 구시대적 악습이라는 비판을 받는 직각식사를 한국에 도입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밴플리트 장군의 주도로 1952년 진해에 4년제 정식 육군사관학교를 개교하게 되었는데 당시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의 제복부터 시작해서 거의 모든 사관학교 문화를 일단 그대로 이식했다. 이 와중에 직각식사까지 도입한 것. 물론 고체 위주의 미국 식사와 달리 밥과 국물로 이루어진 한국 음식의 특징 덕분에 국물이 흐르고 난리도 아니었다는 증언이 남아있다.[18]
  •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인 존 아이젠하워 소령은 미군 제3 보병사단에서 대대장으로 근무하다가,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포로가 될 위험 때문에 사단 정보참모로 보직 이동되었다.[19] 제8군 사령관을 지내다 사고로 사망한 월튼 워커 장군의 아들 샘 워커는 제24 보병사단 중대장으로 부자가 모두 6.25 전쟁 일선에 참전했다. 그 외에 조지 S. 패튼 장군의 아들 조지 S. 패튼 4세도 1953년에 제40 보병사단 소속 전차중대장으로 참전했다. 이처럼 6.25 전쟁에는 많은 기라성 같은 미군 장성의 아들들이 죄다 최전선에서 장교로 복무했다. (반면에 당시 한국군 장성들은 너무 젊어 미군 장성들의 아들 뻘이었다.)
  • 6.25 전쟁에서 활약한 여러 미군 장성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전공을 세웠고, 전후에도 한국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는 등 한국 입장에서는 분명 은인으로 존경받을 자격이 있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그에 대한 인지도는 맥아더, 워커, 리지웨이 등에 가려진 편이다. 그나마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쟁 당시 한국군의 장교 양성, 교육훈련 강화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그의 동상을 제작, 지금도 화랑대 교정 한 켠에 서 있다.


  1. [1] Van은 독일어 von과 같은 의미의 귀족 성씨에 붙이는 것이고, 플리트(Vliet)은 개천, 수로라는 뜻으로 영어의 플리트(fleet)에 해당된다. 영어의 플리트(fleet)는 주로 함대라는 뜻으로 쓰이나, 영국에서는 네덜란드처럼 수로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2. [2] 그의 아버지(1833년생)가 59세, 어머니(1855년생)가 37세에 본 아들이다.
  3. [3] 이 때문에 그는 평생 플로리다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퇴역 후 여생도 플로리다에서 보냈다.
  4. [4] 전시 진급으로 1918년에 임시 중령까지 진급한다. 미 육군은 정규군(Regular Army) 계급이 있고, 전시에 확장되는 임시군(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National Army) 계급이 별도로 있다.
  5. [5] 戰間期. 제1차 세계대전 종결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의 기간을 이르는 말.
  6. [6] 이후 1949~53년에 미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
  7. [7] 당시 영국에 주둔했던 군단급 지원부대로 전투부대가 아닌 다수의 전투지원(대공포,훈련부대)과 병참부대가 편제되었다. 최전선의 환경에 익숙했던 밴플리트 장군은 잠시 동안의 이 생활에서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군단의 많은 기간장병들이 전상으로 인해 최전선 복무의 불가능함(?)을 이해한다.
  8. [8] 진급이 늦은편이라 전임자이자 이제 UN군 사령관으로 된 리지웨이 장군이 밴플리트의 웨스트포인트 2기수 후배이다. 동기인 아이젠하워는 이미 1944년에 유럽전선 총사령관이었고.
  9. [9] 출처는 왕수쩡의 <한국전쟁>.
  10. [10]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나오는 제101공수사단의 사단장으로 1953년 시점에선 중장 계급이었고,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 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군 합참의장을 지냈다.
  11. [11] 자서전의 내용으로는 근속정년이 완료됨에 따라 본래 1953년 1월에 전역할 것으로 예정돼서 1952년 후반기에 이임할 것이라 예고되었지만 마무리 준비를 위해 2개월 연기된 것이라 했다. 하지만 현재와 과거의 여러가지 사례로 볼 때 미군/한국군의 중장급 이상 장성들은 복합적인 이유로 군인 인사관련법에 규정된 정년복무에 크게 제한받지는 않으며, 조건이 맞으면 40년 이상도 근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단적인 예로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 육군 제6군을 지휘했던 월터 크루거 대장은 독일계 이민자 출신 사병출신 장성으로 미서전쟁 때인 1898년을 시작으로 1900년대에 장교로 임관했고 1차대전과 2차대전을 모두 해외파병으로 겪었으며 2차대전 종전 후인 1946년 초에 전역했다(48년 근속).
  12. [12] 사후 명예훈장이 추서되었다.
  13. [13] 다만 마오안잉의 경우 최전선에 투입된 것은 아니다. 당시 펑더화이가 이끄는 중국 인민지원군 지휘부도 최전선에 내보냈다가는 일국의 지도자 아들이 포로가 되는 위험천만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기에 후방에 위치한 지원군 총사령부에서 근무하게 했다. 문제는 제공권을 장악한 미 공군이 후방까지 거침없이 폭격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고, 마오안잉은 대유동에 위치한 사령부 건물에 있다가 기습적인 네이팜탄 세례를 받고 폭사하고 만다.
  14. [14] 불과 4개월 된 7월에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
  15. [15] 이때 밴플리트는 "군인으로서 어떻게 명령을 어기겠는가"라며 너스레를 떨었다고 한다.#
  16. [16] 당시 미국 정부는 3차 세계 대전을 우려하여 북한 지역으로의 진격을 제한하고 있었다.
  17. [17] 트루먼 대통령이 해당 계획을 승인하지 않아 핵무기는 결국 투입되지 않았다.
  18. [18] 출처 : 천금성, '황강에서 북악까지'.
  19. [19] 초기에 자신의 아들을 후방으로 옮겨 달라는 제의에 밴 플리트는 탐탁치 않아 했으나 아이젠하워가 "내 아들이 전사한다면 슬픈 일이 되겠지만 난 그것을 가문의 영예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아들이 포로가 된다면 적군은 분명히 미국 대통령의 아들을 가지고 흥정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나는 국민들이 대통령의 아들을 구하라며 정부에 적군의 요구를 들어주라는 압력을 가하는 사태를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자, 밴 플리트가 수긍하며 즉시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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