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대한민국의 주요선거

종류

대통령 선거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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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지방선거
(지선)

재 · 보궐 선거
(재보선)

국민투표

최근 선거

19대
2017년 5월 9일

20대
2016년 4월 13일

7회
2018년 6월 13일

2018년
2018년 6월 13일

1987년
1987년 10월 27일

차기 선거

20대
2022년 3월 9일

21대
2020년 4월 15일

8회
2022년 6월 1일

2019년
2019년 4월 3일

(현재 시행 불가능)

✝ 2014년 7월 24일 헌법재판소가 국민투표법 제14조 제1항 내용 중 일부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나,
국회에서 추가적인 법률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2016년 1월 1일자로 효력을 상실하여 시행 불가.

대한민국 지방선거

1991년 3월 26일/6월 20일

1995년 6월 27일

1998년 6월 4일

1991년 지방선거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출구조사 발표 영상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광역자치단체장 선거 결과

민주자유당

민주당

자유민주연합

무소속

5석

4석

4석

2석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기초자치단체장 선거 결과

민주당

민주자유당

자유민주연합

무소속

84석

69석

24석

53석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광역자치단체의원 선거 결과

민주당

민주자유당

자유민주연합

무소속

353석

284석

86석

152석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기초자치단체의원 선거

4,541석[1]

1. 개요
2. 상세
3. 결과
3.1. 광역자치단체장
3.2. 기초자치단체장
4. 선거 이후
5. 출구조사의 등장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결과

민주당 민주자유당 자유민주연합 무소속

1. 개요

1995년 6월 27일 치러진 한국전국동시지방선거며 투표율은 68.4%를 기록했다. 원래 지방자치단체장 및 의원들의 임기는 4년이었으나, 국회의원 선거와 격년마다 교차해서 치르기 위해 첫 선거에 한해서는 임기를 3년으로 하여 1996년 총선 2년 후인 1998년에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치르기로 하고, 이때부터는 임기를 4년으로 하기로 했다.#

2. 상세

국내 첫 동시지방선거다. 4년 전 1991년 지방선거는 1960년 이후 31년 만에 부활했지만, 기초의원과 광역의원을 선출한 날이 달랐고, 지방자치단체장은 선출하지 않았다.[2] 더군다나 부활 이전의 지방선거도 같은 해에 여러 선거를 치르기는 했지만, 모든 선거 단위를 동시에 치르지 않았다.

광역자치단체장은 15개 특별시광역시에서 뽑았다. 1997년 7월 광역시로 승격된 울산은 광역시가 되면 새로 시장을 뽑는 법에 따라 선거를 해야 했지만, 다음 지방선거가 일정이 너무 촉박하여(...) 제1회 선거에서 뽑은 울산시장(기초자치단체장)이 광역시 설치법 부칙에 따라 초대 울산광역시장이 되고, 재선거는 없었다.

3. 결과

선거 결과는 여당인 민주자유당의 참패, 민주당의 선전, 자유민주연합의 돌풍으로 요약된다. 광역단체장 선거 결과는 민자 5, 민주 4, 자민련 4, 무소속 2로 여당인 민자당이 가장 많이 승리하긴 했지만 여야로 따지자면 5:10의 완패. 뿐만 아니라 기초단체장에서도 민자 69, 민주 84를 기록했으며 광역의원 또한 민자 284, 민주 353으로 열세였는데 민자당이 원내 과반수 정당임을 고려하면 완패 수준을 넘어 참패라고 보는게 정확하다. 취임 이래 절대적인 지지를 바탕으로[3] 각종 정책을 밀어붙이던 김영삼 대통령으로서는 뼈아픈 패배였는데, 취임 2년 반만에 맞은 예상을 뛰어넘는 치명적인 중간평가로 한동안 정권이 휘청거리게 된다.

광역단체장을 놓고 보면 민자당은 경기, 인천, 부산, 경남[4], 경북에서 이겼고 민주당은 전남, 전북, 광주에다가 서울을 손에 넣었으며 자민련은 충남, 충북, 대전, 그리고 강원에서 승리했다. 나머지 지역인 대구제주는 무소속이 승리.

특히 서울의 결과가 엄청난 화젯거리였는데, 서울특별시장으로 유력했던 박찬종 무소속 후보가 선거 막판 민주당 조순에게 밀렸고 국무총리 출신의 민자당 정원식3위로 낙선하면서 망신살이 뻗친 것. 서울 전체는 물론, 민자당의 텃밭으로 거듭나는 중이었던 강남3구에서조차 조순 후보가 앞섰는데, 정계복귀 전이었던 DJ가 암묵적으로 밀었던 후보로서 저명한 경제학자 출신인데다 중도 성향을 갖고 있기에 상당한 확장성을 갖춘 인물이었다. 당시 인기있던 대만 드라마인 판관 포청천에서 따온 포청천 시장이라는 콘셉트로 홍보 전략을 세운 것도 승리의 큰 요인. 게다가 민자당 타격에 나선 자민련까지 무공천을 선언하며 조순을 직접 지지하는 바람에 기존 민주당 지지층 및 호남 출신들의 표는 물론, 충청 표와 중도 보수 표까지 끌어모을 수 있었다. 민자당에서도 1991년 당시 (정권의 표현에 의하면) 좌익 용공 대학생들에게 한국외대에서 밀가루 테러를 당한 당사자[5]라며 보수 표 결집에 나섰으나 선거 전 여론조사에서부터 아예 3등이었다. (...) 그런 결과 서울 전역에서 조순 후보가 고르게 높은 표를 얻었으며 부재자투표에서는 박찬종 후보가 압도적으로 앞섰다.[6]

게다가 서울 구청장은 서초구강남구 두 곳만 민자당이 차지했을뿐 나머지 23곳을 민주당이 장악했으며 이때부터 예고된 강남3구 서울시의회는 아예 122:11로 민주당이 싹쓸어버렸다. 애초 서울이 호남 출신 유권자들이 상대적으로 많아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세가 높은 지역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도[7] 격차가 너무 컸기에 사실상 YS정권에 대한 민심 이반이 심상치 않음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보수 계열 정당이 서울에서 압도적으로 참패한 선거 중 하나.[8][9]

민자당의 수모는 다른 지역에서도 이어졌는데, 나름대로 텃밭인 대구시장조차 구 여권 출신 무소속들에게 밀려나며 4위로 밀려나면서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의 자민련 "녹색 바람"을 예고하였다. 이는 PK출신인 YS가 TK를 홀대한다는 정서와 함께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가 일어나 민심이반이 벌어진 탓으로 보이며, 실제로 경북에서도 민자당은 무소속 후보에게 고작 3.6%차로 신승했다. 이른바 TK지역에서 反민자 非민주 정서가 현실화된 것이다.[10]

애초에 김대중의 절대 우세지역인 호남 지역과 김종필의 본거지였던 충남이야 그렇다 쳐도 전통적으로 여당 성향인 충북과 강원의 패배, 무엇보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집권 여당이 고작 20.7% 득표로 3위에 그친 것은 너무 처참한 결과였다.[11]

충북에서도 민주당(이용희, 24.5% 득표)에 밀려 3위(23.3%), 강원에선 아예 최각규(65.7% 득표)의 인물론에 밀려 1:1 대결[12]에서 더블스코어의 패배(이상룡 차관, 34.3% 득표)를 당했다. 대구와 대전도 안습이었다. 대구에서는 무소속 문희갑 후보가 36.8%로 당선되고 자민련의 이의익 후보가 22.1%를 득표해 선전할 때, 무소속 후보에게 밀려 조해녕 전 관선 시장이 고작 16.9%만을 득표했다(4위). 대전의 염홍철 시장 역시 고작 20.9%를 득표하면서 트리플 스코어(자민련 63.8%) 패배. 광주광역시에서는 1:1 대결에서 아예 10.2%라는 참담한 득표를 건졌다.

반대로 민주당은 무소속 박찬종 후보가 유력하던 서울시장 자리를 조순 후보가 대역전극 끝에 확보하고, 기초단체장과 광역의원에서도 민자당을 앞서는 등의 선전으로 당세를 크게 넓혔다. 특히 광역의원 선거에서 광역단체장 자리 획득에 실패한 경기도와 인천에서도 1당이 되는 선전을 보였던 것이 크게 주효했고, 기초단체장의 경우에는 서울 지역을 거의 휩쓴데다가 호남은 물론이고 수도권에서 상당수 기초단체장을 낸것이 주효했고, 거기에 더해서 대전과 경북에서도 기초단체장을 당선시키기까지 했다. 그러나 당 내부적으로 보면 묘한게 경기도 지사 자리를 확보하는데 실패하여 이기택 당대표의 입지가 위축되고, 정작 정계 밖에서 활동하던 김대중 당시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의 입지가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야기가 좀 복잡하지만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정계에 복귀는 하지 않았지만 선거유세엔 참여한 김대중 이사장은 서울 시장으로는 조순, 경기지사에는 이종찬을 밀었다. 그러나 이기택은 자신이 당대표라며 장경우를 밀었고, 이러한 경기지사 후보 선출 과정에서 폭력사태와 후보매수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결과는 민주자유당 피닉제이인제의 당선.[13] 하지만 이후로도 당내 갈등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고, 이런 갈등은 DJ의 정계복귀선언에 대한 찬반 논란까지 부르며 결국 김대중이 정계 복귀 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사실상의 당쪼개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다음 해인 1996년 총선에서 민주당계는 2개의 정당이 따로 놀게 되었다. 결과는?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항목 참고.

한편 이 선거에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산시장 후보에 출마하여 2위로 낙선하기도 했다. 노무현 후보는 선거전 초반 지역주의 타파와 인물론을 기치로 내세워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유지했으나, 정작 정계 밖에 있던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이 지역등권론[14]을 들고 나오자 부산 보수표가 결집하는 바람에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만다. 제대로 팀킬한 셈인데 이에 열받은 노 후보 캠프측에선 이런 지역등권론을 공개적으로 디스하기도 했다.[15][16] 전북에서는 거꾸로 민자당 강현욱 후보가 지역등권론에 발목을 잡히며 초반의 우세를 지키지 못하고 민주당 유종근 후보에게 참패했다.[17]

경북, 경남, 대구에서는 기초단체장 가운데 무소속 당선자가 제일 많았다. 특히 포항시에서 민주당 박기환 후보가 32.37%의 득표로 민자당 최수환 후보(24.42% 득표)을 수월하게 꺾고 당선되는 등의 파란이 빚어졌다.[18] 안동시, 상주시, 군위군, 칠곡군 등에서는 아예 민자당 후보가 나오지 못해 무소속 리그가 벌어졌으며, 구미시의 김관용 후보조차도 자민련과의 대결에서 35.1%대 33.9%의 신승을 해야했다. 경남에서도 창원시, 마산시 등에서 무소속 시장 후보가 당선되었으며, 남해군에서는 무소속 김두관 후보가 불과 37세의 나이로 당선되면서 민선 최연소 단체장의 기록을 세웠다.

철저한 지역 분할 구도가 완성됐다. 영남-민자, 충청-자민, 호남-민주. 1990년 3당 합당 이전의 정치구도로 되돌아간 셈이다.

3.1. 광역자치단체장

서울특별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정원식

1,001,446

3위

민주자유당

20.67%

낙선

2

조순

2,051,441

1위

민주당

42.35%

당선

3

박홍래

25,054

5위

친민당

2.54%

낙선

4

고순복

10,488

7위

한국당

0.21%

낙선

5

김명호

9,992

8위

무소속

0.20%

낙선

6

김옥선

17,728

6위

무소속

0.36%

낙선

7

박찬종

1,623,356

2위

무소속

33.51%

낙선

8

정기용

6,156

9위

무소속

0.12%

낙선

9

황산성

97,709

4위

무소속

2.01%

낙선

선거인 수

7,438,025

투표율
66.18%

투표 수

4,922,210

무효표 수

78,840

부산광역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문정수

885,433

1위

민주자유당

51.40%

당선

2

노무현

647,297

2위

민주당

37.58%

낙선

3

김현옥

169,652

3위

무소속

9.84%

낙선

4

배상한

20,008

4위

무소속

1.16%

낙선

선거인 수

2,658,224

투표율
66.22%

투표 수

1,760,404

무효표 수

38,014

대구광역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조해녕

175,749

4위

민주자유당

16.87%

낙선

2

이의익

230,668

2위

자유민주연합

22.14%

낙선

3

문희갑

383,272

1위

무소속

36.79%

당선

4

안유호

29,617

5위

무소속

2.84%

낙선

5

이해봉

222,409

3위

무소속

21.35%

낙선

선거인 수

1,663,614

투표율
63.97%

투표 수

1,064,253

무효표 수

22,538

인천광역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최기선

383,965

1위

민주자유당

40.81%

당선

2

신용석

298,544

2위

민주당

31.73%

낙선

3

강우혁

258,175

3위

자유민주연합

27.44%

낙선

선거인 수

1,551,925

투표율
62%

투표 수

962,552

무효표 수

21,868

광주광역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김동환

53,817

2위

민주자유당

10.28%

낙선

2

송언종

469,570

1위

민주당

89.71%

당선

선거인 수

822,880

투표율
64.82%

투표 수

533,393

무효표 수

10,006

대전광역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염홍철

112,607

2위

민주자유당

20.93%

낙선

2

변평섭

58,346

3위

민주당

10.84%

낙선

3

홍선기

342,959

1위

자유민주연합

63.76%

당선

4

이대형

23,953

4위

무소속

4.45%

낙선

선거인 수

819,604

투표율
66.9%

투표 수

548,529

무효표 수

10,664

경기도지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이인제

1,264,914

1위

민주자유당

40.56%

당선

2

장경우

923,069

2위

민주당

29.60%

낙선

3

김문원

316,637

4위

자유민주연합

10.15%

낙선

4

임사빈

613,624

3위

무소속

19.67%

낙선

선거인 수

5,043,054

투표율
63.23%

투표 수

3,188,871

무효표 수

70,627

강원도지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이상룡

260,004

2위

민주자유당

34.17%

낙선

2

최각규

500,894

1위

자유민주연합

65.82%

당선

선거인 수

1,048,490

투표율
74.77%

투표 수

783,999

무효표 수

23,101

충청북도지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김덕영

159,911

3위

민주자유당

23.29%

낙선

2

이용희

168,209

2위

민주당

24.50%

낙선

3

주병덕

250,105

1위

자유민주연합

36.43%

당선

4

양성연

25,603

6위

무소속

3.72%

낙선

5

윤석조

27,880

5위

무소속

4.06%

낙선

6

조남성

54,748

4위

무소속

7.97%

낙선

선거인 수

972,170

투표율
72.67%

투표 수

706,480

무효표 수

20,024

충청남도지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박중배

174,117

2위

민주자유당

19.18%

낙선

2

조중연

117,300

3위

민주당

12.92%

낙선

3

심대평

616,006

1위

자유민주연합

67.88%

당선

선거인 수

1,270,138

투표율
73.77%

투표 수

937,009

무효표 수

29,586

전라북도지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강현욱

319,452

2위

민주자유당

32.84%

낙선

2

유종근

653,295

1위

민주당

67.15%

당선

선거인 수

1,360,350

투표율
73.65%

투표 수

1,001,959

무효표 수

29,212

전라남도지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전석홍

277,386

2위

민주자유당

26.49%

낙선

2

허경만

769,538

1위

민주당

73.50%

당선

선거인 수

1,504,598

투표율
76.06%

투표 수

1,144,447

무효표 수

97,523

경상북도지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이의근

541,535

1위

민주자유당

37.94%

당선

2

박준홍

395,496

3위

자유민주연합

27.71%

낙선

3

이판석

489,999

2위

무소속

34.33%

낙선

선거인 수

1,926,274

투표율
76.75%

투표 수

1,478,373

무효표 수

51,343

경상남도지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김혁규

1,177,397

1위

민주자유당

63.84%

당선

2

김용균

666,756

2위

자유민주연합

36.15%

낙선

선거인 수

2,621,029

투표율
73.05%

투표 수

1,914,773

무효표 수

70,620

제주도지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우근민

89,000

2위

민주자유당

32.53%

낙선

2

강보성

66,406

3위

민주당

24.27%

낙선

3

신구범

111,205

1위

무소속

40.64%

당선

4

신두완

6,961

4위

무소속

2.54%

낙선

선거인 수

348,191

투표율
80.47%

투표 수

280,197

무효표 수

6,625

3.2. 기초자치단체장

해당 문서 참조.

4. 선거 이후

선거가 끝나기 무섭게 정계 재편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당장 15대 총선이 1년도 채 남지 않았기 때문. 크게 4가지로 압축되는데, '1)충청-경북 지역 출신 민자당 의원들의 동요 및 자민련과의 연대 가능성, 2)민주당 내 이기택-김대중의 불안한 동거, 3)김대중-김종필 양김의 내각제 연대 가능성, 4)정치권내 세대 교체론'이다.

치명타를 입은 YS 정권와신상담[19]에 나서 그 해 여름 8.15 광복 5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잔재인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한데 이어 겨울에는 5.18 민주화운동 특별법을 제정하고 대형 비리와 쿠데타 혐의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시키면서 국민적 지지도를 회복[20]하는데 성공했으며 당의 전반적인 쇄신을 위하여 예전 5, 6공 색을 지우기 위해 노태우와 함께 만든 민주자유당의 이름을 YS의 대표적인 캐치프레이즈인 '신한국'을 본딴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고치기에 이른다.[21] 그로 인해 신한국당은 다음해 치뤄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새정치국민회의로 갈라진 야권 분열의 효과를 톡톡히 누리며 대구의 참패 속에서도 나머지 영남지역과 강원, 제주, 특히 수도권의 승리로 1당 유지에 성공하는 등, "레임덕은 없다"라는 기조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결국 1996년 연말의 노동법 날치기와 이인제의 경선 불복, 최종보스 1997년 외환 위기라는 여러 최악의 사태를 겪으며 정권을 내주고 만다.

그리고 이 선거로 인해 3당 합당으로 소멸된 것 같았던 지역 구도는 완벽하게 부활했으며, 김대중은 정계 복귀와 대선 승리로 가는 큰 길을 열게 된다.

당선된 기초단체장 중 2018년 현재 현역 정치인으로 활동 중인 인물로는 오규석 부산 기장군수 (現 기장군수), 신창현 경기 의왕시장 (現 경기 의왕시-과천시 지역구 국회의원), 이시종 충북 충주시장 (現 충청북도도지사), 김두관 경남 남해군수 (現 경기 김포시갑 지역구 국회의원) 등이 있다.

5. 출구조사의 등장

MBC에서 국내 최초로 선거 예측조사 결과를 개표 시작 전에 발표하였다.[22] SBS에서도 선거 전날에 여론조사를 실시하여 오후 6시에 발표했으며 실제 결과 중 당선자는 정확하게 맞췄고, 득표율은 조금 틀렸다. 이런 사전예측조사는 그 이전까지 선거결과를 알려면 밤을 꼬박 지새며 보내야한다는 점 때문에[23] 불편함을 겪던 시민들에게 엄청난 화제거리가 되었다. 다만 이전까지 출구조사를 시행한 전례가 전혀 없었기에[24] 선거법 위반 논란이 생기기도 했으나, 결과가 정확하게 나온데다가 이미 미국과 프랑스, 영국, 일본에서 투표자들을 상대로 예측조사를 실시하고 있다는 점도 있었기 때문에 바로 합법화되었다. 하지만 다음해 총선부턴...본격적인 총선 사전예측조사 실패의 저주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1. [1]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
  2. [2] 본래 제13대 대통령 선거 공약과 제6공화국 헌법에 따라 1992년 6월에 단체장 선거를 치를 예정이었지만, 총선 참패로 후유증을 앓은 민주정의당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제2당의 지위를 누리던 평화민주당이 이에 동조하면서 노태우 정권의 "중간평가 선거" 공약과 함께 무산되었다. 하지만 정작 평민당은 3당 합당으로 엿을 먹게 된다.
  3. [3] 임기 초만 해도 지지율이 80%를 상회했다.
  4. [4] 울산의 경우 이 때는 경남의 기초자치단체였다.
  5. [5] 자세한 사건 내용은 정원식 항목 참조.
  6. [6] 아무래도 젊은 층(부재자투표 상당수가 군인, 경찰 등이었으니)의 표심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부산시장에 출마한 노무현 역시 젊은 층의 지지를 받았으나 지역 표심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졌다. 어쨌든 박찬종은 예전부터 활동하던 기성 정치인이었지만 여당 내에서의 정풍운동을 비롯하여 민주화운동, 양김 단일화 촉구 등을 벌였고 정치인치고는 무균질 정치인 콘셉트로 남양유업 우유 브랜드인 '다우'의 광고도 찍으며 신선한 이미지로 주목을 받아 젊은층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7. [7]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제14대 대통령 선거 모두 서울에서는 김대중(평민당)이 이겼다.
  8. [8] 반대로 보수 계열 정당이 서울에서 대승을 거둔 선거라면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있다. 정확히 리버스 버전인 셈.
  9. [9] 이외에도 20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이던 새누리당은 서울의 지역구 의석 중 대부분을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에 내주는 대참패를 당했다. 특히 강남 3구에서 3석이나 민주당에 내준 것이 뼈아픈 손실이었는데, 송파구의 2석은 그렇다 쳐도 보수정당이 거저먹던 강남구 을을 소홀히 하다가 민주당의 전현희에게 내준 것이 컸다.
  10. [10] 물론 3당 합당이후 민주계의 대표인 YS가 민정계와의 권력투쟁 끝에 민자당의 당권을 잡으면서 반 YS정서가 퍼진 것이라는게 정설. 1992년 14대 대선 때도 역대 TK의 보수정당 득표율 중 가장 적은 득표율을 얻었다.
  11. [11] 일반 시민 자원봉사자가 아이디어를 냈다는 "서울 포청천"이라는 별명과 당시 정계복귀를 노리던 김대중 전 총재의 적극적인 지원유세도 조순 후보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정작 2년 후엔 제대로 갈라서게 되는게 함정
  12. [12] 민주당 이봉모 후보가 후보등록 직전 사퇴했다. 이 후보의 사퇴는 일시적으로 민주당과 자민련간 야권연대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특히 인천, 경기 등 수도권에서 야권연대론으로 양 야당간 힘싸움이 두드려졌다. 그러나 결국엔 두 지역 모두 민주당과 자민련이 각자 후보를 냈고 그 결과는 자연스럽게 민자당의 당선.
  13. [13] 여담으로 이 이인제가 훗날 김대중 대통령 당선의 제1공신(...)이 되니 역시 역사는 알 수 없는 것이다.
  14. [14] '모든 지역이 동등한 권리를 나눠갖고 각자의 권리를 바탕으로 수평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하자는 것'이 요체인 발언이었으나, 사실상 속내는 영남에 맞서 호남+충청 연대를 하자는 것 아니냐며 꺼져가던 지역주의를 다시 활활 피웠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이에 화답하듯 민자당에서 막 쫓겨나듯 탈당한 JP는 충청도가 핫바지냐는 일명 충청도 핫바지론(...)을 들고 나오며 지역감정을 부채질했다.
  15. [15] 심지어 이부영, 김정길의 선거 유세장 발언 중엔 DJ와 JP는 권력욕에 눈이 멀었으며 정계에서 퇴진시켜야 한다는 극딜 수준의 발언도 있었다. 그만큼 DJ의 지역등권론이 불러온 후폭풍이 여러 의미로 대단했던 셈.
  16. [16] 이후 DJ에 대한 반감 등으로 이부영, 제정구 등은 조순 서울시장과 함께 1997년 한나라당 창당에 합류하게 된다. 다만 노무현, 김정길 등은 한나라당에 가지 않고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게 된다.
  17. [17]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호남에서 민자당(현 새누리당) 득표율은 (대선을 제외하면) 아주 낮진 않았다. 총선이나 지방선거에서는 20%~30%의 여당 고정표가 꼬박꼬박 나왔고, 전북에선 지역구에 따라서 당선권에 상당히 근접하기도 했다. 이후 강현욱은 1996년 총선에서 신한국당 간판을 내걸고 군산에서 당선되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당선되자 호남 유일의 한나라당 국회의원이었던 강현욱은 1999년 말 탈당해 이후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하였으며, 호남의 보수성향 인사들 대부분이 국민회의로 떠나버렸다. 여기에 당의 호남에 대한 전략적 무관심마저 겹치면서 한나라당 시기에는 두 자리수 득표율을 올리는 것도 버거울 정도로 전락했다.
  18. [18] 3년뒤 치뤄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경북 울진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였던 신정 후보가 한나라당 전광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뒤에는 4를 거치면서 민주당계 정당 소속으로 대구, 경북권의 기초자치단체장이 안나오다가 마침내 20년 뒤인 경북 구미시에서 더불어민주당장세용 후보가 자유한국당의 이양호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다.
  19. [19] 선거일 이틀 후에 서울에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터진다.
  20. [20] 갤럽 직무 수행 긍정 평가 기준, 3년차 2분기 28%에서 4년차 1,2분기 42%
  21. [21] 하지만 2년 뒤, IMF사태가 터지고 김영삼 본인이 사실상 팽당하며 이번에는 당명이 '한나라당'으로 또 바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당명을 고친 사람이 바로 민주당 후보로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던 조순. 민주당 소속이었다가 이회창이 있는 신한국당과 합당했다.
  22. [22] 사실 제13대 대통령 선거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자 조사를 시행했으나 선거법 위반사항이라 발표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13대 대선때는 발표를 하긴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해외언론을 통해서였고 국내언론은 전혀 보도하지 않았으며, 14대 대선때는 발표가 되기는 했으나 이미 개표가 중반일때 발표된거라 엄밀한 의미에서의 예측조사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었다.
  23. [23] 심지어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에는 다음날에도 개표방송을 봐야 했다. 물론 13대와 14대 대선은 사실상 개표 중반에 이미 결과가 대략 나오기는 했지만
  24. [24]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갤럽 등 여러 여론조사 기관에서 전화조사를 통해 선거결과를 예측하고 있었지만 국내 언론을 통해 전혀 발표되지 않았고, 14대 대선때는 발표되기는 했지만 개표 중반에 발표된것인지라 예측조사의 의미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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