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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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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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무제기(武帝紀)」

2권 「문제기(文帝紀)」

3권 「명제기(明帝紀)」

조조

조비

조예

4권 「삼소제기(三少帝紀)」

5권 「후비전(后妃傳)」

6권 「동이원유전(董二袁劉傳)」

조방

조모

조환

무선황후

문소황후

문덕황후

명도황후

명원황후

동탁

원소

원술

유표

7권 「여포장홍전(呂布臧洪傳)」

8권 「이공손도사장전(二公孫陶四張傳)」

여포

장홍

공손찬

도겸

장양

공손도

장연

장수

장로

9권 「제하후조전(諸夏侯曹傳)」

10권 「순욱순유가후전(荀彧荀攸賈詡傳)」

하후돈

하후연

조인

조홍

조휴

조진

하후상

순욱

순유

가후

11권 「원장양국전왕병관전(袁張凉國田王邴管傳)」

원환

장범

양무

국연

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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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관녕

12권 「최모서하형포사마전(崔毛徐何邢鮑司馬傳)」

최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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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혁

하기

형옹

포훈

사마지

13권 「종요화흠왕랑전(鍾繇華歆王朗傳)」

14권 「정곽동류장류전(程郭董劉蔣劉傳)」

종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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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랑

정욱

곽가

동소

유엽

장제

유방

15권 「유사마량장온가전(劉司馬梁張溫賈傳)」

16권 「임소두정창전(任蘇杜鄭倉傳)」

유복

사마랑

양습

장기

온회

가규

임준

소칙

두기

정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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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권 「장악우장서전(張樂于張徐傳)」

장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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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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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권 「이이장문여허전이방염전(二李藏文呂許典二龐閻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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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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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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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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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권 「임성진소왕전(任城陳蕭王傳)」

조창

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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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권 「무문세왕공전(武文世王公傳)」

조앙

조삭

조충

조거

조우

조림

조곤

조현

조간

조표

조정

조림

21권 「왕위이유부전(王衛二劉傳)」

22권 「환이진서위노전(桓二陳徐衛盧傳)」

왕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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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

유소

부하

환계

진군

진교

서선

위진

노육

23권 「화상양두조배전(和常楊杜趙裴傳)」

24권 「한최고손왕전(韓崔高孫王傳)」

화흡

상림

양준

두습

조엄

배잠

한기

최림

고유

손례

왕관

25권 「신비양부고당륭전(辛毗楊阜高堂隆傳)」

26권 「만전견곽전(滿田牽郭傳)」

27권 「서호이왕전(徐胡二王傳)」

신비

양부

고당륭

만총

전예

견초

곽회

서막

호질

왕창

왕기

28권 「왕관구제갈등종전(王毌丘諸葛鄧鍾傳)」

29권 「방기전(方技傳)」

왕릉

관구검

제갈탄

등애

종회

화타

두기

주건평

주선

관로

30권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오환족

선비족

부여

고구려

읍루

예맥

동옥저

마한

진한

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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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없음

시호

소릉여공(邵陵厲公)

작위

제왕(齊王), 소릉공(邵陵公)

연호

정시(正始, 240년 ~ 249년 4월)
가평(嘉平, 249년 4월 ~ 254년 10월)

조(曹)

방(芳)

난경(蘭卿)

생몰 기간

232년 ~ 274년

재위 기간

239년 ~ 254년

1. 개요
2. 생애
2.1. 즉위 이전
2.2. 즉위 이후
2.3. 폐위
2.4. 폐위 이후
3. 가족 관계
4. 미디어 믹스

1. 개요

삼국시대 조위(曹魏)의 제3대 황제. 자는 난경(蘭卿)이다. 시호는 소릉여공(邵陵厲公)[1]이다. 다른 칭호로는 제왕(齊王), 소제(少帝)[2], 애제(哀帝), 폐제(廢帝)로 불리기도 한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위명제 조예가 어디선가 데려온 양자로 형제로는 조순이 있었다. 어릴 때 조방은 황태자가 되었으며 조순은 진왕(秦王)에 봉해졌다. 이에 대해 정사 삼국지에는 애초에 황실의 비밀이라 근본을 알 수 없다고만 했고 <위씨춘추>나 <세설신어>에서는 임성왕 조해(曹楷)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근거는 없다.

비록 조방이 조예의 친자가 아니라도 출신이 명확한 양자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정말로 조해의 아들이라면, 조해는 조창의 아들이며 조예에게는 사촌이기에, 오촌 조카인 조방을 입양하는 것이 된다. 어차피 아들 없는 사람이 친척의 아들을 입양하는 게 흔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조방의 경우에는 아무리 황제인 조예의 양자가 되었다 해도 결국에는 누구 아들인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정통성에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2.2. 즉위 이후

조예가 239년, 재위 14년 만에 36살의 나이로 죽자 9살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나이가 어렸으므로 조예의 황후이자 조방의 양모인 명원황후(明元皇后) 곽씨가 대신 수렴청정을 하였고 조예의 탁고대신인 조상사마의가 어린 황제를 곁에서 보필했다.

여기까진 괜찮았다.

하지만 이후 일이 대차게 꼬이게 되어 조상은 차차 사마의를 권력에서 배제시켜 자신과 동생들이 권력을 독점했다. 더구나 조상은 황제 조방을 무시한 채 전횡을 일삼았다.

여기서 만족했으면 좋겠지만 사마의가 절치부심한 끝에 사병을 동원해 두 아들 사마사, 사마소와 함께 조상을 제거하는 고평릉 사변이 일어났고 조상은 방심하고 있다가 그대로 당해 결국 척살된다. 조위의 실권은 사마씨에게 넘어가게 되고 이때부터 조위에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사실 사마의가 권력을 잡았을 때에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사마의가 권력을 독점했다지만 최소한 역성 혁명까지는 일으키지 않았으니, 조위의 사직은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마의가 죽은 후가 문제였기 때문이었으니....

흔히들 조방이 어린 나이에 황제로 올라서 사마의가 손쓸 새도 없이 조방을 꼭두각시로 만들었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조방은 9살에 즉위하여 재위 10년인 249년에 고평릉 사변이 일어나서 실각했으므로 이 당시 나이는 19살 정도로 그 당시 평균 연령을 고려하면 결코 어린 나이는 아니다.[3]

2.3. 폐위

사마의의 뒤를 이은 사마사가 권력을 잡자 조방은 외척인 장집, 중서령 이풍, 황문감 소삭, 영녕서령 악돈, 항종복야 유현, 태상 하후현 등과 함께 사마사와 그 일당들을 주살하고 하후현을 대장군으로 대신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발각되어 실패했고 이풍, 하후현 등은 처형되었다. 그 이후 황후인 폐후 장씨도 사마사에 의해 폐출되는 등 조방의 측근이 모두 정리되었다.

몇 달 뒤 수세에 몰린 조방은 사마사를 없애려 하였으나 계획만 세우고 실행치 않았다. 정확하게는 강유가 농우로 침범하자 허창에 주둔하고 있던 안동장군 사마소를 강유를 공격하라고 수도로 부른 다음 그를 죽이고 그 군대를 탈취, 사마사도 몰아낸다는 계획이었는데 막상 사마소가 들어오자 조방은 이를 두려워하며 실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마소를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들어왔고 사마사는 이 계획을 알고 황제의 계획을 황태후에게 말하며 황제를 폐위시킬 작정을 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사마사는 황태후인 명원황후를 통해 조방을 폐위시켰다.

가을 9월 대장군 사마사는 황제의 계획을 황태후에게 말했다. 19일, 황태후가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황제 조방은 이미 성년이 되었지만, 국가의 정무를 직접 처리하지 않고, 부인에게 탐닉하고 여색에 빠져 매일 배우들을 불러들여 추악한 유희를 즐기고 있고, 후궁 여자들을 맞아 내전에 머물게 하여 인륜의 질서를 파괴하고 남녀의 정절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소. 공손함과 효도하는 마음은 날마다 줄어들고, 도리에 역행하는 오만함만이 점점 심해져 하늘이 명한 대업을 잊고 종묘를 받들 수 없게 되었소. 겸태위(兼太尉) 고유에게 간책(簡策)을 받들어 종묘에 제사지내어 보고하고 조방을 제나라로 돌려보내 옛날대로 번왕을 담당하도록 하여 황제의 자리에서 떠나도록 하시오."

이 날 황제는 다른 궁전으로 옮겨 머물렀으며, 이때 그는 스물셋이었다. 사자가 부절을 갖고 호송하였다. 하내군(河內郡) 중문(重門)에 제왕의 궁궐을 만들었고, 제도는 모두 번국의 예식과 같았다.

《위서 제왕기》

이로써 조방은 사마사에 의해 폐위되었다. 조방은 제왕(齊王)이라는 작위를 받고 하내군(河內郡) 중문(重門)으로 쫒겨났다.

참고로 삼국지집해에선 조방의 비행부분에 대해 그거 거짓이라는 학자들의 의견이 줄줄이 달린다. 앞에선 선행을 잔뜩 써놓고 마지막엔 그에 상반되는 기록을 남겨 위화감을 느끼게 만드는 진수의 기법이라고 보이는데 실제로도 많은 학자들이 의구심을 가지고 반박했다.

삼국지연의》에선 사마사 토벌 밀모 장면이 과거 후한 헌제의 명을 받은 동승유비, 마등, 유표 등을 끌어들여 조조를 주살하려다 실패한 것과 비슷하게 묘사된다.

2.4. 폐위 이후

폐위 후 일생은 알려진 게 없는데 정사 삼국지에서는 폐위된 후 곧바로 조모를 옹립하는 걸로 끝난다. 《진서》에서는 약간의 기록이 더 있는데, 265년 서진이 세워진 후 사마씨 황족이 아니었던 그는 제왕에서 소릉(邵陵公)으로 격하되었다.

274년 43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시호는 여공(厲公)으로 추증되었다. 문제는 시법에서 죄없는 사람들을 살육한 경우를 여라고 한다고 한 만큼 이 글자가 얼마나 좋지 않은지를 감안하면 고인드립인 셈이다. 참고로 우금도 이 시호를 받았다. 안습.

3. 가족 관계

황후로는 회황후[4]가 있었으나, 251년 세상을 떠나자 장집의 딸인 폐후 장씨를 맞아들였으나, 사마사 주살 시도 때문에 폐비되었고 폐후 왕씨를 맞이했다. 자손은 없었는지 전혀 기록된 것이 없다.

4. 미디어 믹스

삼국지 9, 10, 11

삼국지 12, 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그래도 황제인 만큼 꾸준히 나오지만 능력치가 안습. 황제일 경우는 옥새를 들고 있으니 매력이라도 100이지만 황제가 아닐 때라면... 삼국지 3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무력 6/지력 29/정치력 55. 혼란을 가지고 있지만 지력이 저래서야....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3/무력 8/지력 24/정치력 58/매력 71에 특기라고 있는 게 주호... 그나마 조상들 아이템을 물려받고 나온다면 전론, 의천검, 옥새 등을 물려받기 때문에 통솔력 3/무력 13/지력 30/정치력 58/매력 100이 된다.

삼국지 12에서는 짤렸다가 PS3판에서 새로 등장했다. 일러스트는 쓸데없이 성깔이 있어 보인다. 왕좌에 앉은 채 무섭게 노려보는 장면이 압권이다. 능력치 총합은 102.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무지정 순으로 20/14/27/48. 특기는 문화 1, 견수 1. 전수특기는 문화이고 전법은 고무.

삼국지 공명전에서는 위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된 인물로 곧 조상이 실각되고 사마의에게 전권을 장악당해 황제답게 살지도 못했다. 마지막 전투인 낙양 전투를 클리어하면 낙양 황궁에서 자결한 시체로 발견되는데 유서에 죄는 모두 선조들과 나에게 있으니 장수나 관리들에게 죄를 묻지 말라는 말을 남긴다. 이를 본 제갈량은 "명군의 자질이 있었을지도 모르겠군"이라고 평가한다.


  1. [1] 서진에서 준 작위 '소릉공'에 시호 '여'를 합친 것이다.
  2. [2] 중국어,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가칭 소제라고 서술하였으나 이는 잘못된 것으로 조방은 소제의 정의와는 맞지 않는다. 재위 기간이 15년으로 짧은 것도 아니고 향년 43세에 죽어 어린 나이에 죽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조모를 소제라고 부르는게 더 적합하다.
  3. [3] 엄밀히 말해서 '일반적으로' 어린 나이인 건 맞는데, '세습 황제' 기준으로는 어린 나이가 아닌 것. 여담으로 전근대 성인의 기준은 15세에서 16세였다.
  4. [4] 진엄의 손녀로 고모 할머니가 문소황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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