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역대 미국 대통령

40대

41대

42대

로널드 레이건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

공식 초상화

풀네임

George Herbert Walker Bush

출신 정당

공화당

생몰년

1924년 6월 12일 ~ 현재

재임기간

1989년 1월 20일 ~ 1993년 1월 20일

서명

188cm

1990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미하일 고르바초프
1989

조지 부시
1990

테드 터너[1]
1991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3. 정치인 시절
2.4. 부통령 재직
3. 1988년 대통령 선거 당선
3.1. 밥 돌과 게리 하트를 낙마시킨 젊은 악동
3.2. 조지 부시는 죽은 오리 꼴입니다!
3.3. 역사적인 네거티브 시리즈 - "미국은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없습니다"
3.3.1. 죄수 주말 석방제도는 회전문이다? - 윌리 호튼 광고
3.3.2. 어설픈 안보 전략은 패배만 부른다 - 탱크 광고
3.4. 회광반조 - "당신은 케네디가 아니오!"
3.5. 대 역전극의 후일담
4. 행적과 평가
5. 트리비아
6. 같이 보기

"Read my lips. no more(/new) taxes."

제 입술을 잘 보십시오. 더 이상의 세금은 없습니다.[2]

"When Bill Clinton blows his taxophone, America will be singing the blues."

클린턴택소폰을 불면 미국은 우울해지죠.[3]

1. 개요

호부견자의 대표격 부자 중 아버지, 더불어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 아들을 둔 마지막 대통령

[4]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George Herbert Walker Bush). 보통 George H. W. Bush라고 표기한다. 이름은 외할아버지[5]의 성명에서 그대로 따왔다. 국내 언론에서는 흔히 '아버지 부시'라고 불리며[6], 이라크를 부수셨던 부시는 이에 대비되어 '아들 부시'로 불린다. 그리고 아들은 이라크에서 기자에게 신발투척당했지 허버트가 빠지면 조지 부시 시니어(George Bush Sr.)가 된다.[7] 1924년 6월 12일생. 지미 카터와 동갑인데 사실 카터보다 4개월 정도 생일이 빠르다. [8] 2017년 11월 25일 이후로 생존할 시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장수한 대통령 타이틀을 제럴드 포드에게서 가져오게 된다. 덤으로 현재까지 취임한 대통령중 재선에 실패한 마지막 대통령.[9]

2. 생애

2.1. 어린 시절

미국에서 손꼽히는 부자 동네이자 뉴욕의 위성도시인 코네티컷 그레니치에서 자랐으며 명문 보딩스쿨[10]로 꼽히는 필립스 앤도버 고등학교를 나왔다. 그의 아버지는 투자은행가로 코네티컷주을 대표하여 10여년동안 상원의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해군에 자원입대하여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2.2. 제2차 세계대전 참전

리즈시절의 조지 부시(1944년)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다. 미 해군에 입대해 장교로 임관한 그는 TBF(M) 어벤저기의 조종사로 참전했다.(당시 저 기체의 애명이 바바라였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오키나와 주변의 섬들을 제압하는 임무를 띄고 출격했다가 일본군 대공포에 격추당했다. 자칫 일본군의 포로 신세가 될 뻔했지만 다행히 가토급 잠수함 핀백(Finback)에게 구조된다.

한편, 그 때 추락한 다른 동료들은 일본군에 포로로 붙잡혔는데, 이후 일본군이 이들을 살해한 뒤 시체를 먹은 치치지마 식인 사건이 발생한다.[11] 조지 부시는 당시 격추 당한 부대원들 중 유일한 생존자였고, 구조되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다면 그 자신도 잡아먹힐 뻔했다. 만일 그랬다면 (전후에 태어난) 아들 부시도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미국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란 농담이 있다.

이 일로 사적으로는 일본을 굉장히 싫어했다. 히로히토 덴노의 부고를 들었을 때야 '이제야 일본을 용서할 마음이 조금은 생긴다'고 할 정도. 그러나 사적인 입장과는 별개로 대통령으로서는 대 소련 포위망 때문에 일본을 한국과 함께 비 NATO 주요 동맹국으로 지정할 정도로 일본과의 관계를 중요시했다.

2.3. 정치인 시절

1959년 공화당에 입당해 1966년 텍사스 7선거구 하원의원에 당선된다. 이 후 1970년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민주당 로이드 벤슨 상원의원에게 석패하며 잊혀지는 듯 했다.[12]그러나 하원의원 시절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데탕트 정책을 적극 지지한 덕택인지 UN 주재 미국 대사초대 중국 주재 연락사무소[13]을 지냈고 제럴드 포드 대통령 시절에는 CIA 국장을 지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국제 정세에 대한 현실적인 판단력을 쌓게 된 것이 후일 대통령 재직 시 걸프 전쟁, 독일 통일, 소련 붕괴 등의 격변기를 미국의 승리로 헤쳐나가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1980년에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지만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배하였다. 부시는 온건 보수주의자로 강경파였던 로널드 레이건의 공급 위주 정책 (supply side policy)를 부두교경제학(Voodoo Economics)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한마디로 사이비란 이야기

2.4. 부통령 재직

로널드 레이건 정부 부통령 시절의 조지 부시(오른쪽, 1981년)

미 합중국의 대통령으로서 굉장히 유명한데 미 합중국의 부통령(1981년~1989년)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다. 즉, 전임자가 사망하지 않고 바로 다음 대선에서 부통령->대통령 테크를 밟은 20세기 유일한 인물.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이였던 그 당시 레이건의 부통령이 바로 조지 부시 Sr.(시니어)였다. 하지만 이전의 리처드 닉슨과 훗날의 앨 고어가 그랬듯 그의 대통령 선거는 부통령 선거 때에 비해서 매우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 1988년 대통령 선거 당선

1988년 선거 초반 미국 민주당의 마이클 듀카키스에게 무려 17% 격차로 밀리고 있었으나 TV토론에서 사형제를 이슈로 하여 듀카키스에게 치명타를 입히고 승리하였다. 이하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네거티브 선전류 甲. 이는 EBS 다큐프라임 "킹 메이커"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3.1. 밥 돌과 게리 하트를 낙마시킨 젊은 악동

1988년 초, 조지 부시는 이란 콘트라 사건으로 그로기에 몰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으로는 밥 돌 상원의원(공화당 상원대표) 등 당내의 쟁쟁한 후보들에게 당내 경선조차 통과하기도 어려운 상황. 또 상대편 민주당에는 '존 F. 케네디의 부활'이라는 칭송을 듣는 외모와 젊음을 겸비한 게리 하트 상원의원이나 흑인 후보 재시 잭슨, 그 외 앨 고어, 조 바이든(...) 같은 쟁쟁한 후보들도 있었다. 다 죽게 생겼다 이놈들아.

하지만 이 모든 걸 리 애트워터라는 젊은 전략가가 뒤집어버렸다!

# "bad boy"라는 표지# 그의 별명을 딴 다큐 "부기맨(boogie man)" dvd 표지

당내 경선에서 애트워터는 밥 돌의 아내[14]를 모독하며 밥 돌을 도발했고, 결국 이것이 자존심 강한 밥 돌을 무너뜨리며 "패배자", "감정을 수습할 수 없는 인물"이란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런 와중에도 애트워터는 "돌은 큰소리를 칠 수 있지만, 누군가가 반격을 하면 칭얼거리기 시작하죠."라고 비야냥댔다.# 어그로 그렇게 부시는 예상을 뒤엎고 경선에서 승리한다.(밥 돌은 훗날 1996년 선거에 출마하지만 패배한다.)

공화당의 젊은 기대주 잭 캠프는 게이 의혹으로, 팻 로버트은 한국전쟁 참전 용사지만 후방에 있었다는 의혹으로 침몰했다.#

타블로이드지 <내셔널 인콰이어러>의 사진. 게리 하트가 입은 "멍키 비지니스 크루"라는 요트 티셔츠가 압권이다. [http://dcafe.tistory.com/826|#]

한편 밥 돌 처럼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압도적인 당선이 유력하던 게리 하트의 몰락은 더 가관이었다. 모델 도나 라이스와의 밀회 사진이 그대로 유포되어 한순간에 거의 확실한 차기 대통령에서 낙마해버린 것. # 관련 글 # 다른 글 # &quot;하트의 실패&quot; - 타임지 표지 국가안보보장회의 위원이었던 로저 모리스는 하트의 섹스 스캔들이 CIA의 정보 공작이었다고 주장했다.

20년 뒤 버락 후세인 오바마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당선되는 조 바이든은 듀카키스 다음으로 많은 후원금을 모은 후보였지만 표절시비를 비롯한 각종 거짓말로 인해서 물러났다. "연설문 중 몇몇 부분이 영국 노동당 당수인 닐 키녹의 것을 베꼈다는 것. 그러면서도 인용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고, 이것은 부도덕한 짓이라는 게 매스컴의 주장이었다. 과거엔 케네디의 연설을 무단 도용했다는 것이 밝혀졌고, 더불어 대학 시절 다른 사람의 논문을 5페이지 정도 베낀 것과, 학위가 하나밖에 없으면서 세 개라고 한 점과 장학금에 관한 사소한 거짓말이 탄로 났다." 이것은 듀카키스 쪽에서 벌인 공세(!)라는 이야기가 많다. #

3.2. 조지 부시는 죽은 오리 꼴입니다!

하지만 아이오와에서 3위를 차지한 그리스 이민 2세(그리스 정교 신자이기도 하다) 마이클 듀카키스 매사추세츠 주지사가 급부상, 경선에서 승리하면서 다시 상황은 듀카키스 지지율 53%대 부시 지지율 36%로 바뀐다. 케네디가의 테드 케네디는 "조지 부시는 죽은 오리 꼴입니다!(George Bush is dead duck!)"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을 정도.[15] 레임덕 위에 데드덕 있다 듀카키스는 승리를 확신했으니, 새 시대의 희망에 가득찬 그의 광고들이 이런 분위기를 잘 드러낸다.

"미국의 위대한 신경제 시대를 위해, 듀카키스를 대통령으로!" 듀카키스의 "신 시대(New era)" 광고.

"미국의 가장 좋은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The Best America is yet to come)!"[16]

하지만 듀카키스가 경선 수락 연설에서 말했던 "이 선거는 사상을 평가하는 선거가 아닙니다. 이 선거는 능력을 평가하는 선거입니다."란 말이 뒤집히기 시작했으니(...).

3.3. 역사적인 네거티브 시리즈 - "미국은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없습니다"

부시 캠프의 전방위적인 네거티브 전법이 시작 된 것. 당연히 리 애트워터(lee Atwater)의 작품이었다. 자세한 내용

부시 캠프 측은 듀카키스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매사추세츠 주에서 거부하였다고 광고를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 몇몇 교사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한 것에 대해 주의회에서 "거부하는 선생들을 잡아 가두자."라는 법을 만들자 듀카키스가 연방에 "이게 합법인가요?"라고 물어보고 연방 법원에서 "그건 위법이에요"라고 해 그 법률에 거부권을 행사하였던 것 뿐이다.

게다가 듀카키스의 아내가 성조기를 태웠다는 밑도끝도 없는 루머를 퍼트리는데, 여기에 듀카키스의 아내는 듀카키스와 다르게 나올 때마다 아니라고 격렬히 주장하였고 이것이 오히려 대중의 뇌리에 박혀버렸다.

3.3.1. 죄수 주말 석방제도는 회전문이다? - 윌리 호튼 광고

전설이 된 TV 토론

TV 대선 후보 토론에서 사회자는 듀카키스에게 "당신의 아내가 강간당하고 살해당했어도 그 범인의 사형을 반대하겠는가?"라고 질문을 던졌고 듀카키스는 이에 "사형제로 범죄의 발생이 감소한다는 증거는 없다. 그런 경우에도 사형제를 반대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부시는 저렇게 가족애도 없는 냉혹한 사람이 어찌 대통령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공격해 치명타를 가했다! 걸려들었다! [17][18]

가장 악랄한 사건은 바로 윌리 호튼 광고였다.

매사추세츠 주에서 살인죄로 복역 중이던 흑인 범죄인 윌리 호튼이 죄수 주말 석방제도를 통해 잠시 휴가를 나와 커플을 습격해 여자를 강간한 사건인데, 이걸로 부시는 듀카키스를 골로 보내버렸다. 광고는 아래에 있으니 참조. 듀카키스가 주지사로 있을 때는 오히려 범죄율도 떨어졌고 살인사건의 비율은 전국 최저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사건만 기억해 그의 이미지는 미친듯이 떨어졌고 결국 부시는 대선을 이기게 된다. 이 광고는 인종차별주의적으로 만든 것이어서 사람들에게 뻔한 반감을 살 수 있었으나 리 애트워터는 민간기업을 매수하여 그들로 하여금 방송하게 하였다.[19] 같은 컨셉으로, 죄수들이 감옥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다시 나오는(...) "회전문Revolving Door" 광고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뒤에 언급되는 탱크 광고와 같이 "미국은 그런 위험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America can't afford that risk)"라는 모토의 광고였다.

실제로 죄수 주말 휴가제도는 공화당에서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 가장 먼저 서명하여 만든 것이고. 그 당시 다른 주에서는 죄수가 주말 휴가제도를 이용해 임산부를 성폭행한 후 살해한 사건도 있었고 헬리콥터를 탈취한 후 추락한 사건도 있었다.

듀카키스는 네거티브는 할 수 없다며 자신이 잘한 점만을 꿋꿋이 내보냈다.듀카키스는 대중들이 곧 진심을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문제는 무당파 성향의 국민들이 "듀카키스가 반박을 안 하니 저것이 사실인가 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막판에는 듀카키스도 부시의 광고를 활용해서 반격을 하기도 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이런 반격 광고는 설명충 광고였는데다가, 주력 전략이 되지도 못했다. 네거티브의 반박은 요약하기도 쉽지 않고 이해시키기도 쉽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사례. (영상의 첫 광고]가 해당광고다.) 현실은 시궁창인 셈이다.

3.3.2. 어설픈 안보 전략은 패배만 부른다 - 탱크 광고

이 사진은 듀카키스의 무능한 선거전략을 상징하는 사진이 되었다. 한 언론사의 "세계사를 바꾼 100대 사진"에 선정되었을 정도.[20]

듀카키스 스스로도 자충수를 많이 두었다. 대표적인 실패는 탱크 광고였다. # 영상 듀카키스가 자신도 국방에 대한 이해가 못지않다는 이미지 메이킹으로[21] 탱크를 직접 탑승한 적이 있었는데, 이 사진의 어색함 때문에 의도와 달리 바보같은 이미지로 둔갑해버린 것. 그러게 왜 안 해도 되는 걸 했어. 애트워트는 탱크를 우왕좌왕 움직이며 뭔가 바보같이 웃고만 있는 듀카키스의 영상을 띄워놓고, 그가 모든 국방정책에 대해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당시 모든 군비정책의 나열에 불과했고, 듀카키스는 이에 반대하지 않았다.

정리하면, 부시 측의 교활하고 용의주도한 전략과 듀카키스 측의 지나치게 강직하고 원칙주의적인 태도가 결국 부시의 극적인 역전승을 거둘 수 있게 했던 것.[22] 하지만 네거티브의 여파로 투표율은 빌 클린턴의 재선 대선이었던 1996년의 49%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낮은 50.2%에 그쳤다.

3.4. 회광반조 - "당신은 케네디가 아니오!"

잠깐 회광반조를 보이던 순간도 있었다. 이후 듀카키스의 러닝메이트인 로이드 벤슨[23]이 공화당의 젊은 부통령 후보 댄 퀘일[24]과 후보 토론회에서 만났는데, 댄 퀘일이 잭 케네디를 운운하자 "당신이 현대판 잭 캐네디(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애칭)라고? 내가 잭 케네디를 보좌했고, 내가 잭 케네디를 잘 알아요. 내가 바로 그 잭 케네디의 친구였소. 퀘일 의원, 당신은 잭 케네디가 아니오!(Senator, You're No Jack Kennedy.)" # 2분 15초 부터라고 일갈했던 것. 그 말 직후 댄 퀘일이 머쓱해서 "상원의원님, 그런 말은 제가 원한 게 아닙니다. (That was really uncalled for, Senator.)"라고 말하자 "의원님, 당신이 그 비교를 시작했지요.(You're the one that was making the comparison, Senator.)"라고 완벽하게 박살을 내버렸다!

다만 이 장면은 벤슨이 (좀 심하게 말하면 그의 생애 전체에서) 유독 폭풍간지 존재감을 드러낸 장면이면서도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두 가지 이유였는데, 하나는 벤슨의 이런 압박이 선거전에서 의미가 없었거나, 심지어 선거에 부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다만 어느정도 지지율이 올랐던 것은 사실인 듯 하다는게 중론. 사실 결정적인건 이 부분인데, 벤슨이 당시 케네디의 친구였는지가 부정확하다는 점이었다(...). 벤슨은 케네디의 임기 당시 일시적으로 정계를 떠나 있던 상태였다. 벤슨은 케네디보다 네 살이 어렸는데, 하원의원으로 면식이 있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평생 허튼소리 안 하던 벤슨이 이렇게 자신있는 한방을 날린 것 역시 드문 일인데다, 흔한 반격조차 별로 없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보면 되겠다. 최소한 벤슨은 케네디와 동시대를 동년배로 살았던 인물이고, 퀘일이 적어도 자신을 공화당의 케네디라 부르는 건 어불성설이었으니.

3.5. 대 역전극의 후일담

야! 신난다!

선거의 최대 공신인 리 애트워터는 이 공으로 38세의 젊은 나이에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에까지 오른다. 하지만 권력의 단맛은 짧았으니, 애트워터는 부시 취임 1년만인 1990년 3월 갑자기 쓰러졌고 2년 후 뇌종양으로 죽으면서 자신의 모든 악행을 다 말하고 죽는다. 그리고 조지 부시는 재선 패배.

듀카키스는 이후 정계를 은퇴했으며, 여든살이 된 현재까지 UCLA의 경영학(리더십) 교수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 특히 2009년에 미국의 UCLA 대학에서 신입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에서 강의를 한 번 한 적이 있었다. 강의 시작 전에 신입생들의 박수갈채가 멈추자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여러분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만약 부시와의 선거전에서 그 토론회 때 대답을 잘 했더라면 부시가 대통령이 되지도 않았을테고, 또한 그의 아들 놈이 지금 이렇게 미국 경제를 막장으로 몰아넣지 못 했겠지요. 다시 한 번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신입생들은 환호하며 그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아들 부시와는 달리 아버지 부시는 평가가 나쁘지 않다

하지만 듀카키스는 중부(미주리 등)에서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지미 카터와 함께 미국 민주당의 아픈 기억으로 자리잡았다. # 개략적인 후일담 미국 민주당은 "앗, (북부의) 리버럴한 이념이 문제인 갑다!" 하면서 더욱 우향우를 가속화했고, 이것이 (남부 출신) 빌 클린턴 시대의 일견 보수적인 여러 정책의 배경이 되었다. 듀카키스가 특별히 좌파성향이 있어서 진게 아닌데도 말이다.(...)[25] 그러다보니 버락 오바마 역시 제2의 듀카키스와 제2의 지미 카터가 되는거 아니냐는 불안감 속에서 제대로 된 진보적 정책을 펴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야말로 역대급 트라우마가 되었다는 이야기.

분명 부시 항목인데 어째 듀카키스 얘기만 나온다(...)

4. 행적과 평가

네거티브로 집권했고 네거티브로 밀려났지만, 외교와 경제 정책만큼은 네거티브하지 않은 결과를 낸 대통령.

수나라수문제처럼 때문에 평가가 박하다

모두가 알다시피 조지 부시 대통령의 재임기간 4년동안 전 인류를 반으로 갈라서 공포에 떨게 했던 냉전이 종식되었으며, 베를린 장벽과 동유럽의 공산주의 블록이 무너졌고,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해체되는 그야말로 대격변이 도래했다. 구 소련과 공산권의 붕괴로 인한 힘의 공백을 파고든 이라크를 걸프전에서 다른 국가들과는 비교를 거부하는 첨단 무기와 효율적인 운용으로 제압하면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의 위상을 확고히 하였다. 그야말로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를 연 것이다. 그 때문에 지지율이 한때 90%까지 치솟았지만 결국 경제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1992년 빌 클린턴의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economy, stupid!)"에 말려서 재선에 실패했다.[26] 재선에 도전할 시기에 터져나온 사건들도 타이밍이 영 좋지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1992년에 테일후크 스캔들이 전미를 들썩였다. 이 사건은 걸프전 참전 군인, 그것도 하필 부시의 먼 후배들이라 할 수 있는 해군 항공장교들의 대규모 성폭력 스캔들이었던지라 해군 조종사 이력이 있는 부시에게까지 좋지 않은 이미지를 전염시켰다. 어쨌거나 당시 부시 이미지는 나쁘지 않아서 클린턴은 부시의 재선이 확실한데 내가 미쳤다고 92년도 대선에 나와야 하는가?라고 맨 처음에 망설일 정도였다. 물론 부시의 어그로에 열받아 출마하지만. 이것도 빌 클린턴 항목 참조.

그래도 퇴임 이후 전체적으로 대통령으로서의 평가는 괜찮은 편. 아들 부시가 워낙 문제를 많이 일으켜서 흔히 아들 부시와 비슷한 정책을 편 것으로 생각되곤 하지만, 실제로는 선거 캠페인 때문에 까일 뿐 대통령으로서는 자질 면에서나 실제 통치나 우수한 인물이었다. 걸프전만 해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된 '불가피한' 전쟁이었다. 미국은 이라크의 군사력에 의한 역내 세력균형 변경 시도를 저지하고 중동에서의 "사활적 국가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개입한 것이다. 이라크에 "미국적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한다는, 이상주의적이고 일종의 혁명적 목표를 갖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중동의 세력균형을 뿌리부터 뒤흔든 아들의 이라크 전쟁과는 목적에 있어서 완전히 정반대다. 목표가 극과 극이니 당연히 방법론도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부시는 공화당의 매파에서 제기한 "바그다드로 진격해서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렸어야 한다"는 주장을 신문 기고를 통해서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 미국이나 현지 국가들은 모두 이라크란 국가가 쪼개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우리는 페르시아 만 지역 한복판의 장기적 세력균형에 대해 우려했던 것이다.

사담 제거를 시도하려고 지상전을 이라크 점령으로 확대하면, 일을 진행하는 도중에 목표를 변경하지 않는다는 스스로의 정책지침을 어기고, 욕심을 부리다 수렁에 빠져들게 되어(mission creep), 예측 불가능한 인적 정치적 비용을 유발하게 될 것이었다.

그를 체포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파나마[27]에서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던 노리에가도 찾아낼 수 없었다. 우리는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실질적으로 이라크를 통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연합군은 즉시 붕괴되고, 분노한 아랍 국가들이 전열에서 이탈하며 다른 동맹국들 또한 철군하게 될 것이었다.

... 우리가 그러한 침공 코스를 밟는다면, 생각건대 미국은 아직도 극도로 적대적인 땅에서 점령세력으로 남아있을 것이며, 이는 극적으로 다른 -그리고 아마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심지어 이후 방송에서도 본인이 직접 이라크 침공을 하지 않은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기도 하였다.#

즉 아들 부시가 이라크전을 일으킨 것은 흔히 말하듯이 아버지 부시의 정책을 이어받은 게 아니라, 뒤집어 엎은 것이었다. 아버지 부시는 아들 부시가 일으킨 이라크전과 같은 전쟁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 이미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걸프전 당시에는 이라크를 점령해도 명분상으로는 문제가 없었으며 이라크에서 가장 거대한 권력을 가진 시아파가 준 우방이었고 미국에 대한 평판도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반면 이라크전 때는 이미 미국의 일방주의로 인해 평판이 바닥으로 추락한데다 시아파도 수니파와 같은 미국의 적이었으니 더욱 그렇다.

전쟁 이전의 외교적 노력 수행 단계에서도 두 행정부의 차이는 극명하다. 걸프전 당시 H. W. 부시 행정부는 군사력을 직접적으로 사용하기 전에 치밀하고 광범위한 외교전을 수행했다. 이때 미국의 외교적 역량이 어떠했느냐면, 당장 이라크의 위협에 직면한 역내 동맹국과 우방국은 물론이고 역외 동맹 및 우방, 심지어 적대국인 시리아까지 전쟁에 동의하고 참전하도록 만들 정도였다. 그야말로 다자적 접근의 모델. 정당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국제연합의 결의 아래에서 군사력을 사용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28] 반면 이라크전은 미국의 역내/역외 동맹과 우방을 가릴 것 없이 맹렬한 반대에 직면했으며, 국제연합의 승인조차 받지 못했다. 물론 미국은 동맹국과 우방국도, 국제연합도 알 바 아니며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적 역량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일방주의적 행동방식을 보였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외교안보정책에는 외교정책이 실종되어 있었다. 아들이 아버지의 명예에 제대로 먹칠을 했구만!

물론 딕 체니(국방장관 → 부통령)나 콜린 파월(합동참모의장 → 국무장관)과 같은 인사들은 아들 부시때까지 중임되긴 했지만, 파월은 아버지 부시 때건 아들 부시 때건 늘 전쟁을 내켜하지 않은 온건파에 가까웠고 H. W. 부시 행정부 당시 대외정책을 주도한 것은 대통령 본인과 스코우크로프트 안보보좌관이었다. 당장 UN 대사, 국무부 중국 연락사무소장으로 외교판에서 잔뼈가 굵다 못해 CIA 국장까지 지낸 대통령이 딕 체니에게 외교안보적 사안으로 자문을 구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미국 대통령 외교정책 성적표. 참고로 브레진스키는 지미 카터 행정부에서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지낸 민주당계 인사다. 물론 브레진스키 역시 반공정서가 강한 폴란드 계 출신으로 현실주의 외교관을 가진, 민주당내 진보파에서 "냉전 진영논리의 포로"라는 평가도 들었던 인물이므로, 완벽하게 미국 외교가들의 보편적 평가라고 보긴 어렵다. 어느 정도의 권위를 가진 온건 보수적 평가라고 보는 것이 맞다. 여하간 깨알같은 아들 부시 디스

1991년 우크라이나에서 행한 연설도 유명하다. 당시 소련은 호흡기만 겨우 달고 있는 상태였고 우크라이나에서는 독립의 열기가 점차 높아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시절에 우크라이나에 가서 "미국은 멀리 있는 폭군(소련)을 없애자고 현지(우크라이나)의 독재자를 내세우지도 않을 것이고 인종적 증오에 뒷받침된 자기파괴적인 민족주의를 지원하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 이 내용은 당시 높아져가는 우크라이나 독립열기에 찬물을 끼얹은 연설로 유명하다. 소련으로부터의 즉각적인 독립을 원하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이 연설에 매우 실망했고 소련에 반대하던 우크라이나에 심정적인 동조를 보내던 미국내 보수주의자도 이 연설을 크게 비판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치킨 키예프'라는 이름의 우크라이나 닭고기 요리가 널리 퍼진 때였고 미국의 보수 평론가는 치킨이라는 단어가 미국에서 겁쟁이를 상징한다는 사실에 착안해 이 연설을 '치킨 키예프 연설(Chicken Kiev speech)'로 부르게되고 곧이어 정식 네이밍으로 굳혀졌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소비에트 연방은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얻었다.

2004년 부시는 우크라이나 독립열기에 찬물을 끼얹은 이 연설에 대해 해명하기를, 만약 당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무모한 행동을 벌였다면 모스크바로부터 강력한 저항이 있었을테고 결국 대참사가 벌어졌을 거라 언급했다. 당시에는 긴가민가했으나 이후 미국과 서유럽의 지지를 믿은 조지아(그루지야)가 남오세티야 전쟁을 벌이다가 재앙을 불러왔고 2014년 유로마이단 반러시아 시위의 성공(?)에 취한 과도정부가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자를 정권에 참여시키고 러시아어를 제2외국어에서 폐지하는 등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의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러시아계가 밀집해 살고 있는 크림 반도가 독립하자고 나서고 러시아군이 개입하는 등 점점 위기가 증폭되는 모습이 보이자 1991년 당시 부시의 혜안이 타당했다는 평가가 점점 지지를 얻고 있다.

경제 문제도 사실 레이건 때의 설거지를 맡은 판이라[29] 공화당 대통령 치고는 그렇게 악평을 받지 않는다. 아들과는 달리 공부해서 명문대 갔고 전쟁에도 참여했으니 애시당초 능력치나 마음가짐이 다르니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포커 쳐서 CIA 국장 자리(76~77)를 따낸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대단한 것은, 부시 이전까지의 CIA는 한창 미국 내부의 정치인들과 여론에게 털리던 시기라서 CIA 국장으로 가는 것은 정치 경력의 마지막 줄을 쓰는 것과 다름 없었고, 털리기 전에도 CIA라는 부서의 특성상 양지에서 큰일을 맡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시는 사상 처음으로 CIA 출신으로 권력의 핵심에 올라섰고, 대통령이 되었다.[30][31] 또 부시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CIA가 정치계나 언론에 의해 털리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뭐 그 이전에 이미 그럴 여지도 없을 정도로 꽉 조이고 있었지만.

5. 트리비아

일본에 갔다가 식중독에 걸려서 일본 총리 미야자와 기이치에게 구토물 세례를 준 적도 있다. 만찬에서 일어난 일인데, 경호원들이 책상을 뛰어넘어 기도를 확보하느라 난리도 아니었다고. 뒤의 흰머리의 할머니가 바바라 부시 여사. 당시엔 아직 일본이 잘나가던 끝물이라 유약한 부시가 일본에 겁에 질려 토한건 아니냐고 쪽팔려했던 미국인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 영상은 현재도 찾아볼 수 있는데 경호원들이 응급처치를 하고나서 벌떡 일어나 어퍼컷 세레모니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참고로 식성이 매우 까다로웠다고 하며, 특히 채소 종류는 본인이 좋아하는 것만 먹었다고 한다. 백악관에 입주하자마자 요리사를 불러서 식단에 삶은 당근브로콜리컬리플라워를 몽땅 다 빼버리라고 했다고 한다. 참고로 브로콜리는 어지간히 싫어했는지,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짜증을 냈다고 한다. 삶은 당근은 실제로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채소이긴 하다.

또한 이제는 대부분 잊고 있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걸프 전쟁 이후 암살당할 뻔하기도 했다. 배후는 물론 당시 이라크의 지도자였던 사담 후세인. 이 영향 때문인지 그의 아들이였던 조지 워커 부시는 사담 후세인에 대해 적개심을 드러냈고[32] 결국 이 악연이 이라크 전쟁이라는 헬게이트를 연 대에 일조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효자인 것도 문제.

할리웃에서 만드는 영화들이 경찰을 너무 죽이고 문제되는 게 많다고 비난하다가 공화당 지지자인 아놀드 슈왈제네거까지 비난하라는 역반격에 처해 경솔했다고 꼬리를 내린 적도 있다. 자세한 건 터미네이터(영화) 참고할 것.

심슨에 찬조 출연해서 호머 심슨 옆집으로 이사를 오는 에피소드가 있다. 명대사는, 자서전 집필 도중 중얼거리며 한 말인 재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안 했다. 결국 호머와 바트 심슨의 등쌀에 시달려서 스프링필드를 떠나버린다. 마지막에 호머와 영혼의 맞다이(...)를 뜨면서 호머가 이기며 말하는 세금 네 멋대로 올린거 사과해!!!가 가히 압권.[33] 이 에피소드에서 바바라 부시 여사는 굉장히 온화한 할머니로 나온다. 바트가 조지 부시의 집안에서 사탕 찾는답시고 다 어지르자 바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노인들은 사탕을 잘 안 먹는다며 쿠키를 구워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조지 부시는 이걸 바라보면서 "나한테는 쿠키 안 구워줬는데"라고 중얼거린다.

92년 한국을 방한했으며 퇴임 후에도 두 차례(01, 05) 한국을 방문했고, 특히 2005년에는 아들보다 먼저 안동을 방문했다.

2009년 자신의 85번째 생일 기념으로(...) 스카이다이빙을 했다. 지상에 착지하고 나서 한 말이 "90살 생일날 또 할 거다"였다고.[34] 그리고 2014년 자신의 90번째 생일에 진짜로 또 했다. 낙하산에 90세와 자신이 미국 41대 대통령이란 것을 조합하여 "[email protected]"이라고 썼다고. 그런데 나이가 나이라서 이번에는 베테랑 다이버의 도움을 받긴 했다.

2012년에는 미담거리를 보여주기도 했다. 대통령 재직시절 경호원의 아들이 백혈병에 걸리자 치료비는 물론이고... 아예 자신의 머리도 삭발했다!용기를 주기 위해서라나. 조지 부시는 둘째딸 로빈이 4살 때 백혈병으로 사망한 적이 있다.

한국에 대해서는 "내가 죽기 전에 반드시 통일될 것"이라는 말을 한 적도 있다. 왠지 그만큼 오래 살 것 같은 예감이 든다.그렇게 되면 역대 미 대통령 중 최장수 기록?

이라크 내전 개입을 검토중인 미군이 걸프 지역으로 USS 조지 H. W. 부시 항공모함[35]을 배치한다고 발표하여 호사가들이 이라크를 능욕하는 거냐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레이건과 쎾쓰를 했다고 카더라#

아들과는 다르게 동성결혼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메인 주의 동성결혼식에 부인 바바라 부시와 함께 참석함으로서 사실상 확인. #

자녀는 바바라와의 사이에서 총 6명을 낳았다. 이중 두번째로 낳은 딸 로빈은 어렸을 때 죽었다. 둘째인 젭 부시플로리다 주지사를 지내고 2016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유력 후보로 등장하는 등 정계 거물로 성장했다. 넷째인 닐과 막내 도로시는 대기업 이사직을 지냈고 다섯째 마빈은 별다른 대외활동을 하지 않고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고 있다. 여기까지는 꽤 괜찮은대단한 자식 농사인데 장남인 조지 워커 부시가 그 막장짓을 해 놔서......

6. 같이 보기


  1. [1] CNN을 설립한 언론재벌.
  2. [2] 1988년 8월 부시가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한 말. # 당시 연설(음성) 이 때 부시는 야당(만년 하원 다수당인 민주당)이 세금을 올리면 자신이 막겠다면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가리키며 이 말을 했다고 한다. 세금 인상이 더 이상 없다는 말로 한 공약이었지만, 그는 걸프전으로 인한 재정적자로 이 말을 지키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상당한 증세를 하게 된다.(...) 클린턴과 앨 고어 캠프는 1992년 이걸 대놓고 대선 캠페인에 활용했다. "입술을 보지말고, 기록(record)를 보세요. 진짜 감세는 우리가 합니다."라고# 워렌 버핏의 증세 주장을 언급할 때 한 언론사는 제목을 "Read my lips, Raise my taxes"라 썼다.근데 클린턴도 증세를 했다(...) 흠좀무.
  3. [3] 42대 대선 후보 연설 중 한 말. tax(세금)와 색소폰의 발음이 비슷한 것과 우울해진다란 의미와 음악 블루스를 이용한 말장난.
  4. [4] 42대 클린턴 : 외동딸, 43대 부시 : 딸 2명, 44대 오바마 : 딸 2명.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면 이 기록이 깨지지만 힐러리가 당선된다면....
  5. [5] 그의 아버지인 프레스콧 부시의 장인이자 어머니인 도로시 워커 부시의 아버지인 조지 허버트 워커.
  6. [6] 미국에서도 father Bush라고 하면 통한다. 단 아들 부시는 son Bush라고 잘 하지 않고 junior Bush라고 하는 편.
  7. [7] 사실 아들 부시의 아버지니 이상하진 않다.
  8. [8] 미국은 9월생으로 학년을 끊으므로 아버지 부시는 1923년 9월 ~ 1924년 8월 생과 같은 학년, 카터는 1924년 9월 ~ 1925년 8월생과 같은 학년이 되므로 학년은 아버지 부시가 한 학년 위다.
  9. [9] 단, 2016년 대통령 선거 당선자가 2020년 재선 선거에서 실패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허버트 부시 이후론 모두 재선하는 징크스가 있는지라...
  10. [10] 부유층 자제들이 주로 다니는 기숙사형 사립학교.
  11. [11] 일본군의 식인 사례중 하나로 유명한 사건. 다치바나 요시오 부대장이 마시다가 안주에 고기가 없다는 이유로 포로를 죽여서 먹었다. 나중에 전범 재판에서 사형 선고.
  12. [12] 후술하겠지만, 이들은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와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다시 만나게 된다.
  13. [13] 미수교국들이 수교를 추진하는 상대 국가에 설치하는 외교공관. 공관장은 특명전권대사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14. [14] 원래 간호사 출신으로, 밥 돌에게는 두 번째 부인이다. 원래 밥 돌 상원의원은 손을 거의 쓸 수 없을 정도로 몸에 심한 장애를 갖고 있었다. 현모양처인 첫 부인이 정성으로 그를 돌보고 변호사 시험에서 이례적으로 주 정부에 장애인 남편을 위한 특별 시험을 신청해서 밥 돌이 변호사가 될 수 있었고 상원의원까지 된 것이다. 그런데 정기적으로 몸을 검사하기 위해 간 병원에서 간호사랑 바람이 나서 재혼을 하게 되었고 애트워터는 이러한 사실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15. [15] 실제로 88년 전후의 민주당 전당대회 시기에 공화당 후보를 앞서고 있었던 여덟 명의 민주당 후보 중 본선에서 공화당 후보에 패한 것은 듀카키스가 유일하다.(이는 앨 고어존 케리 등의 사례가 있으므로 좀더 정확한 확인 바람.)
  16. [16] "국가로서, 우리 미국이 212년이란 것은 매우 젊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세계시장에서 챔피언의 자리를 지키는 대신 2, 3위로 밀려났습니다. 교육에서는 6, 7위죠. 세계가 우리를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부러워합니다. 새로운 답이 아닌 낡은 답을, 옳은 것이 아닌 쉬운 것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앞으로 4년간 우리 젊은 미국이 뒷전에 쳐박혀있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미국의 가장 좋은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드 뉴스룸의 유명한 장면과 비슷한 대사다.
  17. [17] 여기서 정답은 "물론 나는 최선을 다해 범인을 죽이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이성적일 수 없는 피해자의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공형벌은 그러한 사형(私刑)의 도구가 되어선 안 됩니다."이다. 워낙 유명한 질문이어서 미드 웨스트 윙에서도 나온다. 바틀렛 대통령도 참모가 제시한 이 딜레마에 "내 딸을 죽인다면 가만 둘 수 없!!...아, 근데, 그러면 안 돼, 아 그러면 또 안 돼, 또 안 돼..." 하면서 혼동한다. 그런데 사실은 토비 지글러를 놀리기 위해 대통령 이하 모든 참모진이 짜고 만약 내가 이 질문에서 횡설수설하면 토비가 화낼까 아닐까?를 놓고 내기를 걸었던, 쉽게 말해 조작이었다. 열받은 토비가 위의 모범 답안을 외치면서 대통령 앞에서 미친 듯이 화 내자 바틀렛 대통령과 참모진들이 웃음을 터트리고, 내기에서 이긴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즉석에서 5달러 씩 받아드는 동안 토비가 짓는 황당한 표정은 일품. 지금 대통령이 긴장한 상태니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맞장구 쳐주라고 말해 미리 토비의 불안을 증폭시킨 비서실장 리오 멕개리가 대통령에게 칭찬받으며 능글능글하게 대통령이 떼어주는 5달러 받아드는 것은 덤. 대통령 재선의 향방을 가를 단 한 번의 후보간 토론회 참석을 앞두고 긴장을 풀기 위한 일이었다.
  18. [18] 조지 클루니 주연의 정치영화 킹 메이커에서도 비슷한 토론이 인용된다. 조지 클루니의 배역이자 유력 대권주자 마이크 모리스는 같은 질문에 "그 놈을 찾아서 죽여버리고 평생 감옥에서 썩을 것"이라고 답했고, "그거야말로 당신이 직접 사형제도를 행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국가가 그 사형을 대신 행하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라는 반론에 대해 "국가는 개인보다 합리적이고 냉철해야 한다."고 모범답안을 내놓는다.
  19. [19] 아직도 민간기업이 했다고 믿으며 "선동 ㄴㄴ"라는 말이 유튜브 본문과 댓글에 적혀있다는 것이 깨알 같다.
  20. [20] 당장 듀카키스의 구글 연관검색어 1위가 탱크, 탱크 광고다(...)
  21. [21] 그는 대학 졸업 후인 1955년 ~ 1957년 주한미군으로 문산에서 복무했다. 2011년, 54년만에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
  22. [22] 곁들여 듀카키스가 상대적으로 소수 그룹인 그리스계 이민 2세(+ 그리스 정교)였다는 점도 문제로 작용했다. 보스턴의 한 신문이 듀카키스 후보의 동생이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은 사실이 있음을 밝혀낸 이후, 듀카키스를 잡아내는 표정들은 더 우울하게 찍혔다. 앵글도 짙은 눈썹 등 그리스계의 특징을 드러내는 식으로 앵글이 바뀌었다.
  23. [23] 1921~2006. 텍사스 출신의 상원의원으로, 1970년 첫 선거 당시 조지 부시를 이긴 경력이 있었다. 당시 만 67세. 당시 55세였던 듀카키스와 케네디 - 존슨(43세-52세) 젊은 매사추세츠(북부) 출신 대통령 - 경륜 있는 텍사스(남부) 출신 부통령 조합을 되살릴 수 있는 카드로 여겨졌다. 93~94년 클린턴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냈다.
  24. [24] 이 사람은 미국 역대 부통령 중에서 머리 나쁘기로 손 꼽히는 인물이다. 학교 수업 참관에서 초등학생이 멀쩡하게 적어놓은 감자의 철자 potato를 potatoe로 고쳐 적어주는 것이 방송을 타서 천하의 머저리로 알려진 것이 대표적이다. 부시 대통령 재임 시기 우주개발 계획 당시에는 화성이 지구와 같은 궤도 있고, 그리고 화성에 물이 있다는 사진을 봐왔으니 화성에는 물도 있고 공기도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그의 공로를 높이 사서(?) 이그노벨상 1991년 교육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유는 어느 누구보다 과학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증명해냈다라는 이유였다. 이런 사람을 부시는 재선시기에 다시 러닝 메이트로 선정했고, 이건 클린턴의 부통령 후보가 하필이면 역대 부통령 중에서 가장 머리 좋은 인물일 수도 있다고 평가받는 앨 고어였다는 것과 맞물려 큰 악재로 작용했다. 미국에서는 지도층이었던 사람들 중에서 두고두고 까이는 인물로, 심지어 문명 5에서는 게임이 끝난 후 점수에 따라 역사상의 지도자에 견주어 플레이어의 순위를 보여주는데 댄 퀘일은 제일 끝자리에 있으며 필요 점수는 0점. 한마디로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정신줄 놓고 있다가 대충 야만인한테 멸망당하면 된다. 거의 우스개 취급.
  25. [25] 되려 듀카키스보다 진보적인 흑인 후보인 제시 잭슨을 지지했던 진보파에서는 당권파들이 지지한 듀카키스의 애매한 온건함과 보수성 때문에 싸움에 각을 세울 수 없었다는 식의 해석을 하고 있다. 양쪽에서 지랄
  26. [26] 아니, 정확히는 보수의 분열(제3후보 로스 페로 등장)도 한 몫 크게 했다. 클린턴 항목 참조.
  27. [27] 1989년파나마 전쟁을 말한다. 콜린 파월이 지휘봉을 잡은 첫 전쟁. 파나마의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Manuel Noriega)가 마약 밀수에도 관여하여, 미국이 체포하기 위해 병력 2만 4,000명을 파병하여 선거를 통해 새 대통령을 옹립했다. 노리에가가 자수한건 1990년 1월이었다.
  28. [28] 대신 이슬람의 성지가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미군을 주둔시키면서 먼 훗날 아들과 미국의 대외정책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테러리스트들의 대부를 분노하게 만들게 되지만. 물론 이건 부시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다. 미친놈이 알고보니 엄청난 능력이 있는 미친놈이였을 줄 누가 알았겠음.
  29. [29] 이 점은 오바마도 마찬가지. 현재 오바마를 공화당이 까는 건 공화당의 이념적인 성향이 티파티 등의 영향력으로 인해 부시 시절보다도 더 우향우, 자유의지주의로 간 게 크다.
  30. [30]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두번째로 현직 부통령의 저주를 깬 인물이다. 여러모로 나름 입지전적인 인물. 음모론이 돋기도 하고...(예컨데 리처드 닉슨은 현직 부통령으로서 출마했을 때는 패배했고, 이후에야 당선되었다. 앨 고어의 패배야 말할 것도 없고. FDR의 3기 부통령이었던 월리스도 대선 출마에서 참패를 당했다.) 참고로 첫번째는 앤드루 잭슨의 부통령이었던 (1833~1837) 마틴 밴 뷰런. 존 애덤스와 토머스 재퍼슨의 경우는 차점자가 부통령을 하던 시대라 제외.
  31. [31] 동시에 카터와 함께, 루즈벨트 이후 대통령 중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이기도 하다(캐네디는 암살당했으니 논외;;). 참고로 밴 뷰런도 재선에 실패했다.
  32. [32] 대놓고 사담에 대해 "한때 우리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던 자."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33. [33] 그리고 그 자리에 이사 오는 것은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 그는 호머와 매우 죽이 잘 맞아 순식간에 친구가 되며 끝난다.
  34. [34] 이때 아내인 바바라 여사가 "언제 철이 들려는지"라고 말했단다. 우리집은 애가 셋이에요. (사실 아버지 부시는 4남 2녀를 두었으므로 우리집은 애가 일곱이란 드립이 맞다.)
  35. [35] 니미츠급 항공모함의 최신형이자 마지막 항모다. 이후 항모 시리즈는 제럴드 R. 포드급 항공모함으로 계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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