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종교 개혁(宗敎改革) The Reformation,Protestant Reformation

1. 개요
2. 용어에 대해
3. 기원
4. 전개
4.2. 신성로마제국의 혼란
4.3. 스위스의 개혁가들
4.4. 분열 된 신성로마제국
5. 종교개혁이 남긴 것들
6. 한계

1. 개요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기독교의 개혁운동. 기독교의 역사뿐만 아니라 유럽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중세를 끝장내고 근대 유럽을 형성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2. 용어에 대해

흔히 "종교개혁"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처음에는 유럽사에서 워낙에 큰 사건이라 the Reformation처럼 고유명사로 쓰였고,[1] 다른 종교의 개혁에 대해서는 정관사 the가 빠지고 소문자로 reformation으로 쓰였는데 현대에 와서 기독교, 유럽 중심적이란 비판 때문에 Protestant Reformation이라는 중립적 용어가 생겨났다. 그렇다고 기존용어가 완전히 폐기 된 것은 아니다. 워낙 오래 관습적으로 쓰였기 때문에 병용하고 있다. 우리 식으로 굳이 번역하면 '기독교 개혁'[2] 혹은 '프로테스탄트 개혁'정도로 번역해야 겠지만, 그러면 또 번역상의 난제가 생기는 탓에[3] 굳어진 종교 개혁으로 사용하고 있다.

천주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종교 개혁이란 표현을 그대로 써주는 편인데(!), 그 갈라진 양상을 강조할 때는 교회 분열 또는 종교 분열이라고도 한다. 즉 소위 "종교개혁"이라고 일컫고 상세한 내용은 분열이라고 언급하는 것이다. 이는 하도 교회 역사상 종교 개혁 말고도 각종 분열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대표적으로 정교회와의 동서 분열(The Grand Schism이라고 한다)이 있고, 그 다음에야 서구대이교(아비뇽 유수), 그리고 종교 개혁이 있다.

또한 종교개혁에서 프로테스탄트의 태동만을 주목하는 것은 그림의 한쪽 면만을 보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에 대응하여 대대적인 가톨릭의 쇄신 움직임도 일어났다. 예전에는 독일 역사학자 레오폴트 폰 랑케가 처음 반종교개혁으로 명명한데에서 유래 학술적으로 이 개혁을 반동 종교개혁, Counter-Reformation이라고 불렀으나, 현재에 와서는 이 용어가 지나치게 한쪽에 치우친 용어임이 지적되어 '가톨릭 종교개혁(The Catholic Reformation)'이라고 부른다.

3. 기원

흔히 종교개혁의 시작을 마르틴 루터가 1517년에 면죄부 [4] 판매에 반대해서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을때로 보는게 일반인들의 시각이지만 역사나 교회사에서 학자들은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개혁, 그에 맞선 가톨릭 교회의 반종교 개혁 모두 시대적 산물이고 내적인 변혁이라는데 견해가 거의 일치하고 있다. 무슨 소리냐면 뜬금없이 마르틴 루터라는 인물 하나가 튀어나와서 종교개혁을 일으킨것이 아니고 그가 없었더라도 그 시기에 터질 사건 이라는것. 19세기 토머스 칼라일마르틴 루터가 없었더라면 하는 if 떡밥으로 루터가 없었으면 프로테스탄트도 없고 독일의 분열도 없고 프랑스 혁명도 없고 미국의 독립도 없었다는 이런식의 책을 써서 유명해지긴 했지만 근대 사학의 입장에서 이러한 영웅주의 사관은 거의 인정받지 못하는 추세였다. 이러한 경향은 19세기부터 두드러 졌는데 종교개혁 다룬책에 루터나 츠빙글리 같은 인물에 대한 연구 자체가 빠져버리고 대략적인 서술만이 남은 경우도 남아서 1970년대부터는 인물사 경시에 대한 반성이 이뤄져서 시대적 사건과 함께 균형적으로 연구하는 추세이다.

종교개혁 시기 수백년 전 중세 가톨릭 교회 자체는 물론이고 유럽 각지에서 개혁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루터도 이전의 개혁적 분위기나 사상가들에게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종교개혁을 일으킬수 있었다는 것. 그러나 루터와 칼뱅이 그 이전까지 번번히 실패로 끝났고 몇몇은 가톨릭에게 이단으로 찍혀 음지에 숨어있어야기까지 했었던 개혁운동을 양지로 끌어내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공로가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5] 종교개혁가들에 대한 연구 또한 이뤄지는게 사실이다.

사실 언제부터 종교개혁의 시작으로 봐야되는지는 논란이 있긴 하다. 중세 초기 가톨릭 교회 교부시대때 이후로는 권력과 타협하면서 계속 부패했던 것은 사실이고[6] , 성직매매, 수도원(수녀원)의 타락, 교회의 세속권력, 가톨릭교회가 사회 현실과 타협한 여러 풍습등의 문제는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온 문제점이기 때문에 15~16세기의 개혁가들이 처음으로 주장한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런 부패상을 다들 손놓고 바라본건 아니기 때문. 중세이전부터 가톨릭 교회가 부패와 매너리즘에 빠질때마다 그런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수도원 운동이 개혁의 모습으로 볼수 있다. 가톨릭 교회가 성장하면서 조직화 되고 경직화 되어가자 이런 모습을 타파하기 위해 참신한 수도원 운동이 나타난 것.

그러나 중세 후기로 가게 되면 개혁을 위해 나타난 수도원들도 조직화되어 가면서 부패의 늪으로 빠져들고 만다. 거기에 가톨릭 교회의 중심이라고 할수 있는 교황과 교황청도 100여년간 아비뇽 시절과 분열시기를 겪으며 교황의 권위가 추락하면서 점점 힘을 잃어갔다.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로 분열시기는 마감하였지만 교황청은 잃었던 세속권력을 회복하고 교황령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세속적 영토다툼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주교나 대주교는 대체로 왕족이나 귀족들이 독점했고, 추기경들은 대체로 이탈리아 명문가에서 선발되었고 교황선출도 그리했는데 오랜 세월 동안 교회체계가 경직 되면서 교회 조직이 관료화되면서 경직성이 더해져 갔다.

이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것이 크게 3가지 흐름인데, 첫번째는 신비주의 운동이라고 볼수 있다. 중세 3대 신비주의자로 불리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요한 타울러 등은 영성을 갖춘 신비주의자들로 이들은 당시 가톨릭 교회의 부패상을 직접적으로 비난한것은 아니었지만 개혁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다.

두번째는 데보티오 모데르나라 불리는 일종의 신도 경건운동으로 수도원적인 경건을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퍼뜨렸다. 이는 마르틴 루터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세번째는 존 위클리프, 얀 후스, 사보나롤라, 발도파 등의 사상적/윤리적 개혁가,개혁 공동체들이었다.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는 과감하게 성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가톨릭 교회의 부패상을 비판했다. 사보나롤라의 경우는 피렌체에서 활동하면서 메디치 가문을 쳐바르고(...) 피렌체의 개혁을 이끌다가 화형당한바 있다. 발도파는 청빈을 강조하여 당시 비대해진 가톨릭 교회의 사치와 부의 축적을 비판했다.[7]

또 한편으로, 가톨릭 교회 내를 개혁하자는 목소리의 일환에서 나왔던 것이 바로 "공의회 주의"였다. 아비뇽 유수 이후 교황보다 공의회의 권위를 더 우위에 두자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었고 이에 따라 열린 공의회들은 난립하던 교황권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는 공을 세우긴 했다. 하지만 대립교황 문제가 해결되면서 공의회주의는 밟히고 말았는데, 교황의 입장에선 당연히 공의회를 더 우위에 두게 되면 교황권에 제약을 받기 때문이었다. 어찌보면 공의회주의가 득세해서 교황권을 제어하고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주도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8]

4. 전개

4.1. 루터와 95개조 반박문

이런 상황 속에서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바로 마르틴 루터였다.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소속이었던 루터는 스승인 요한 스타우피츠의 권유를 받아들여 중세 가톨릭의 스콜라 철학 최신 분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성서 자체로 돌아가 연구를 시작하기에 이른다. 이때 루터는 사도 바오로의 발언으로부터 이신칭의, 즉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의롭게 된다는 사상의 실마리를 발견하고 정립하기 시작한다.

이미 루터가 이런 결론에 도달한지 오래된 가운데 1517년, 한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 중 하나인 마그데부르크 대주교겸 할버슈타인 주교인 알브레히트가 면벌부를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알브레히트가 면죄부 판매에 나선 이유는 마인츠 대주교직에 오르려고 빚을 내서 샀기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알브레히트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동생[9]인데 교회법을 위반하여 20세 이전에 주교 서품을 받았고, 이후 겸직을 금지하는 교회법을 어기고 할버슈타트와 마그데부르크 대주교구를 돈으로 패키지로 사모았는데 마침 신성로마제국 최선임 선제후 직위인 마인츠 대주교 자리가 매물(?)로 나오자 다소 무리를 하여 빚을 내서 선도 구매 해버렸다. 이 과정에서 교황청에서 파견한 도미니코회 수도자인 요한 테첼[10]을 브로커로 고용하여 당시 독일서 가장 큰 사채업자(?) 푸거 가문의 야코프 푸거에게 2만1천 두카트의 빚을 졌고[11]8년간 면벌부 판매수입을 보장받았으며 판매수입의 절반과 초입세[12] 를 교황 레오 10세에게 바치기로 합의했다.

여기에 당시 교황청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느라 재정이 궁해서라곤 하는데 성직 매매는 16세기초에만 있는게 아니었고 그냥 이전부터 자주 있던일이라 왜 긁어서 부스럼이냐는 반응이 나올정도로 교황청에선 초기에는 적극적인 반응이 나오진 않았다. 그러나 독일에서 그간 교회의 경제적 수탈로 인하여 반로마 감정이 폭발하자 전유럽에 순식간에 파급력이 미치게 된다.

독일 작센지방의 마르틴 루터는 이신칭의의 결론에 도달하여 면벌부는 아무 의미가 없어보였고, 이에 루터는 면벌부에 대한 학문적 토론의 차원에서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성 교회 대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다. 별로 중요한 내용은 아니지만 당시 종교개혁의 파급력을 최개한 작게 해석하는 입장의 가톨릭 교회사가들은 루터가 비텐베르크성 교회 대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인게 아니라 교구 주교들에게 면죄부에 대한 토론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루터가 직접 쓴건 사실이고 이전부터 동료 신학교수나 학생들에게 공개적으로 비판하였으며.[13] 브란덴부르크와 마그데부르크 주교 등에게 항의편지를 보내고도 답변이 없자 직접 내건 걸로 본다.

사실 루터는 이 시점에서 가톨릭 교회와 완전히 등지려는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대사제도의 남용과 면죄부의 효력에 대해서 "교회가 그럴 권한이 있는가?"라는 본질적은 의문제기였다. 당시엔 수도자가 공개적으로 의견을 표명하는 자체가 당시엔 매우 드문 일이었고 이전문서대로 '교황권 자체에 반대하는 내용'은 없었다.는 잘못된 지식으로 95개조 반박문을 읽어보면 당시 교회입장에선 교황권을 부정정도가 아니라 모독에 가까운 내용이다. 루터는 로마 교황청이 면벌부의 원리로 내세운 수많은 성인들의 공덕이 쌓여서 그것으로 죄인들의 죄를 사면해줄 수 있고, 그 공덕의 관리는 교황이 담당하며 이 공덕을 면벌부로 판매한다는 이론을 반박했던 것이다. 그리고 중세 대학 등 학문세계의 토론문화에서 이 정도의 도전은 정당하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이들의 돈줄이 걸린 문제를 건드린 이상 이와 관련된 논의는 순수 학문적으로 진행되기는 틀린 운명이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면벌부를 둘러싼 신학적 논쟁이 가열되었고, 내부자로서 교회의 비리와 부패를 비판하던 루터는 점점 교황청과 대립을 하게 된다. 당시 교계에서는 루터의 주장을 억누르려는 입장이었고, 루터는 자신의 소신을 굽힐 마음이 없었다. 교황청에서는 처음에는 루터의 사상을 신학적인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반박하고자 1518년에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모임에서 그의 사상을 공개적으로 발언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도리어 이는 루터의 사상을 널리 퍼트리는 데에 일조하였고, 교황청은 이제 루터를 막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에 되었다.

4.2. 신성로마제국의 혼란

결국 1521년에 루터는 교회로부터 파문당했다. 이와 더불어 신성로마제국 의회는 루터를 불러 신앙 검증을 요구한다. 그 곳에서도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의회는 루터를 제국 밖으로 쫓아내도록 결의한다. 이는 당시의 황제였던 카를 5세가 가톨릭을 수호하는 입장에 있었던 것과 관련이 깊다. 비록 카를 5세의 시대에는 제국의 황제의 권위가 교황의 권위를 초월한 지 오래였지만, 가톨릭의 수호자라는 명목상의 정통성은 당시의 시점에서도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14] 이후 루터는 몰래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에게 몰래 몸을 의탁하고,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이는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교를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성로마제국에서 황제 바로 다음 가는 권력을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선제후가 루터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제국의 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문제는 당시의 카를 5세는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빴다는 것(...) 이 무렵 스페인에서 반란이 일어났고[15] 카를 5세는 이를 진압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하필이면 이 무렵부터 이탈리아를 둘러싸고 프랑스와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524년에 제국 전역에서 중세 봉건 질서에 반발하는 농민 반란이 일어난다. 이는 후에 '농민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규모가 거대하여 독일 중, 남부 전역을 휩쓸었다.

단, 루터는 여기에서 민중이 아닌 황제를 지지하였고, 이는 후에 루터가 농민들에게 영원히 까이는 계기 중 하나가 된다.[16] 이후 루터는 1522년에 비텐베르크에 귀환하여 이러한 민중 운동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기존 가톨릭 질서에 반발하는 의미로 루터교를 수용했던 농민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17] 결국 지금까지 거의 루터 본인의 힘만으로 진행되던 개혁은 이 시점부터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얽히기 시작한다.

결국 이 무렵에 들어 종교개혁은 루터의 손을 떠나고, 이 바톤은 스위스로 넘어가게 된다.

4.3. 스위스의 개혁가들

루터가 열심히 활동하던 무렵, 스위스는 당대 최고의 병사들인 스위스 용병들의 나라였다.[18] 이들은 여러 곳에서 용병으로 근무하면서 수입을 냈고, 이는 스위스 지역의 경제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한편, 당시의 스위스는 아직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한 채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사이의 주도권 다툼에 계속 희생되고 있었고, 스위스의 자주적인 독립을 원하는 목소리는 갈수록 커져만 갔다.[19]

이러한 시대에 취리히에는 울리히 츠빙글리라는 또 다른 개혁가가 있었다. 그도 동시대의 루터처럼 면벌부와 가톨릭의 부패를 비판하였으며, 성경에 종교의 근본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단, 루터와 그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는 실제로 그가 머물던 취리히를 본인의 손으로 개혁시키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취리히는 그의 손에 의해 성공적으로 탈바꿈하였다. 이후, 츠빙글리는 이러한 개혁을 스위스의 다른 곳에도 전파시키려 노력했으나, 가톨릭 도시들, 그리고 신학적인 해석에 차이를 보이던 루터교를 믿는 도시들과 반목하게 된다. 이러한 대립은 결국 내전으로 확산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스위스에서의 영향력을 잃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카를 5세는 스위스의 가톨릭파를 도와 진압군을 보내고, 이 과정에서 츠빙글리는 전사한다. 자세한 전개 과정은 울리히 츠빙글리 항목을 참조할 것. 그리고 이러한 내전은 스위스 용병이 몰락하는 데에 일조하게 된다.

한편, 제네바에는 종교적 탄압을 피해 프랑스에서 망명 온 루터와 츠빙글리보다 한 세대 아래의 법학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종교개혁의 2번째 불씨를 당긴 장 칼뱅이다. 그의 사상[20]은 신학 외적인 부분에서는 철저히 보수적이던 루터교보다도 진보적이었고, 그 덕에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들이 주로 채택한 루터교[21]와 달리 일반 민중들이나 상공업자들에게 그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된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루터보다 능력있는 개혁가여서 츠빙글리처럼 제네바를 자신의 손으로 탈바꿈시켰으며[22], 법학과 고전 문학을 전공한 그의 경력을 바탕으로 '기독교 강요'라는 자신의 사상을 정리한 책을 펴냈으며,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도 능력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칼뱅의 교리는 안 퍼지려야 안 퍼질 수가 없었고, 1530년대에 이르면 칼뱅의 교리를 신봉하는 세력도 상당히 커지게 되어 단순한 탄압만으로는 이들을 누를 수 없게 되었으며, 루터교와는 달리 독일을 넘어서 프랑스와 영국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프랑스의 위그노와 영국의 청교도의 출발점이 바로 칼뱅이며, 1534년에는 영국의 헨리 8세성공회를 만들어 아예 가톨릭 교회에서 떨어져나가기까지 한다.[23] 그리고 결국 칼뱅파는 1550년대 무렵에 스위스 전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4.4. 분열 된 신성로마제국

사태가 이쯤 되자 카를 5세는 대립을 중재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황제 본인도 교회 개혁파 아드리안 신부(훗날 하드리아노 6세)가 가정교사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가 이대론 안된다는 생각으로 교황청에 공의회를 강요 했으나 교황청에선 황제 위주의 공의회를 미적거렸고 로마대약탈로 참교육(?)을 받고서야 시작했는데도 20몇년간 교회 개혁문제엔 거의 비협조적으로 진행하여 본인 생전에 끝을 못 봤다. 당시 신성로마제국내에선 아직은 루터파 제후는 몇 없고 작센선제후와 헤센방백 정도를 빼면 거의 듣보잡들인데다가 세력도 미약했는데 [1526년] 당시 합스부르크 영지 오스트리아는 오스만투르크의 위협을 직접 쳐맞고 있었기 때문에 루터와 그 추종자들 추방령을 당분간 유임하고 간을 보다 1529년 다시 제국추방령을 때리자 루터파 제후들은 약속 번복과 제국법위반을 들어 1531년이 되면 신교도 제후들이 아예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하여 황제에 대항한다.. 아마 이 무렵의 카를 5세는 스페인 반란 진압, 프랑스 견제, 오스만 견제만 해도 정신없는데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나는 도시들 때려잡으랴, 제후들 때려잡는건 동생이자 후임 황제로 선출된 로마왕 페르디난트 1세에게 위임했는데 페르디난트는 독일 사정에 대해서 형보다 비관적으로보고 신교도들과 타협하려는 모양이었다.

결국 1547년 프랑스의 프랑수와 1세 영국의 헨리 8세 마르틴루터가 연달아 사망하고, 오스만 투르크와 잠시 평화협정이 맺어지자 황제 카를 5세는 생에 최대 유감 독일내 종교 일원화를 추진한다. 공의회는 20년 넘게 배가 산으로 갈지경으로 거의 노답상태였고[25] 기다리다 지친 카를 5세는 스스로 공의회 노릇을 하며 독일 전체에 루터파 의견을 약간 받아들인 자신이 직접 수정한 교리를 강요하고 반대자는 제국추방령을 때리고 신교도 제후들은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때리면서 내전이 발생한다.(자세한건 카를 5세, 마르틴 루터 참조) 결국 황제의 구상은 실패했고 반란군에 쫓기던 황제는 스페인으로 도망...가며 황제자리도 반납한다.

후임 황제 페르디난트 1세는 파사우 합의(1552),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를 통해[26]루터파는 공식적으로 공인받았고, 루터교를 믿는 지역은 가톨릭교회를 용인하는 조건으로 종교의 자유를 누렸다.[27]

하지만 이 화의에는 2가지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하나는 신앙을 결정하는 주체가 일반 민중이 아닌 그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라는 것("Cuius regio, eius religio") 이었다.[28] 따라서 제후의 신앙과 다른 견해를 가진자는 재산을 팔고 이전해야했다. (알다시피 이시대는 문맹율이 90%라 농부들을 종교개혁이 뭔소린지 신학적인 이해가 불가능했기에 별상관 없지만...) 그리고 부르주아들이 시민자치 정치를 벌이는 제국도시들[29]는 이조치에서 예외라 개신교 우세지역의 가톨릭 신자나 반대의 경우는 도시에서 자신의 신앙대로 예배를 했다간 위협을 받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 화의가 루터파와 가톨릭만의 화의였으므로 이미 상당한 세력을 이루고 성장하고 있던 칼뱅 파에 대한 논의가 아예 없었다는 것. 합의 이후 팔츠 선제후령은 가톨릭에서 루터파, 루터파에서 다시 칼뱅파로 개종했는데 이 조치가 유효한것인지.. 또한 합의전에는 개신교세가 미약하였다가 16세기 후반 바이에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이 개신교로 넘어간 상황에서 쾰른이나 뮌스터 주교구등 지역주민 다수가 가톨릭 에서 개신교로 전향한 지역의 처리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극심한 반발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 무렵 교황청에서도 드디어 반격을 하기 시작한다. '반종교개혁'이라고도 불리는 예수회의 등장과 트리엔트 공의회의 가르침에 의한 가톨릭 내부 일대 쇄신 운동이 그것. 개신교계에서는 결과적으로 당시의 사회상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고, 내부의 부패를 완전히 뿌리뽑지도 못했고, 단지 일부 제후들을 다시 가톨릭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을 뿐이라며 폄하하지만, 과연 그들의 주장대로 가톨릭 종교개혁이 사회적 영향력이 적었는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가톨릭교회의 주요 교리와 윤리를 간단하고 명료하게 담고 있는 교리문답서가 발간되었고, 성직자와 수도자가 사용할 새로운 성무일도서가 개정되었으며, 세계 모든 라틴 가톨릭교회가 로마 전례로 통일하여 사용하게 될 개정판 미사경본이 간행되어 트리엔트 미사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불가타 라틴어 성경의 개정판이 발간되었으며, 지역교회의 주교들은 임지에 상주하는 의무를 다하면서 주일과 축일에는 강론을 하고 본당을 방문하는 사목활동에 충실하였다. 그들은 사제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세우고 중세기에는 일정한 기간 개인 교육을 받은 다음에 사제가 될 수 있었지만 이제 주교들은 신학교에서 신학교육과 영성지도를 받은 사제 지망자를 엄격하게 심사하여 사제로 서품하였다. 또한 가톨릭 종교개혁의 일환으로 도입된 새로운 영성운동은 바로크 예술과 결합되어 가톨릭 교회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가톨릭 종교개혁은 그저 단순한 반격 수준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에서 중세 내내 꾸준히 되풀이되던 쇄신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더 이상 신성로마제국은 하나의 제국으로 묶일 수 없게 되었으며, 황제의 권위는 추락하기 시작하고 제후 각각의 힘이 점차 강해지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강해진 제후들은 신나게 자기들끼리 계속 치고받게 되었고, 이는 결국 1618년에 30년 전쟁으로 대폭발하게 된다.

30년 전쟁이 끝난 뒤에야 유럽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전쟁을 마무리짓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서 비로소 개인의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었고, 칼뱅파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썼던 시기에서 100년이 더 지난 뒤였다.

5. 종교개혁이 남긴 것들

종교개혁이라는 큰 폭풍이 지나간 100년 사이에 유럽은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개혁이 시작되었던 신성로마제국은 폭풍이 지나간 뒤 후대의 볼테르의 말마따나 더 이상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고, 제국도 아니게 되었다. 황제와 교황의 힘이 세트로 약해지면서 교황이 주는 권위라는 것 자체가 무색하게 되었고, 제국을 구성하던 제후들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종교의 자치권을 얻은 것을 시작으로 점차 거의 완전한 자치권을 얻어 더 이상 하나의 제국이 아닌 일종의 연방과 비슷한 형태가 되었다. 여기에 30년 전쟁의 폭풍이 지나가면서 독일 인구의 상당수가 죽었고, 결국 독일은 이후 프로이센이 부상할 때까지 유럽의 무대에 등장하지 못하게 되고, 제국을 다스리던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가 되어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프로이센이 등장할 수 있던 배경이 신성로마제국의 몰락에 있었다는 것.

종교개혁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것은 독일 지역이었지만, 다른 나라에도 종교개혁은 큰 영향을 미쳤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영국은 루터교의 교리를 일부 빌려 성공회를 만들어 독립하였고[30], 프랑스도 위그노가 중요한 사회 세력으로 떠올라 위그노 전쟁이라는 홍역을 앓게 되고, 결과적으로 발루아 왕조가 몰락하고 부르봉 왕조가 등장하게 되는 기원이 되었다. 다만 영국과 프랑스는 직접적으로는 큰 30년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기에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치세에서 중흥을 맞았고, 프랑스는 한 세대 일찍 국내의 갈등을 봉합한 뒤, 30년 전쟁을 정치적으로 잘 이용한 루이 13세리슐리외를 통해 절대왕정을 완성하고 한동안 유럽의 최강국으로 자리매김한다.

또한 종교개혁을 통해 비로소 유럽 역사에서 종교와 정치가 완전히 분리되게 된다. 위 글을 읽어봐도 알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교황청, 교회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들이 점차 쩌리(...)가 되기 때문이다. 비록 종교개혁 이전에도 교회의 권위는 추락하고 있었고 사코 디 로마와 같은 막장사태까지 일어나는 상황이었지만, 그 사건을 직접 일으킨 카를 5세조차도 권위를 위해 교황이 내려준 신성로마제국의 제위가 필요했다. 하지만 종교개혁을 통해 등장한 프로테스탄트는 이러한 권위에서 자유로웠고, 제국의 제후들은 이를 잘 이용하였다.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의 폭풍이 지나간 뒤에는 더 이상 교회의 권위를 필요로 하는 군주는 아무도 없었고, 교황의 정치적 권위 자체도 제로에 수렴하게 된다. 다만 권위를 뺏기지 않고자 시작되었던 예수회로부터 시작된 가톨릭 내부의 자정 노력은 아이러니하게도 교회가 정치에서 멀어진 덕에 오히려 가속되어 이후 그럭저럭 성과를 거두게 된다.

마지막으로, 종교개혁은 근대 독일어를 만들었다시피 할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에는 마르틴 루터의 공헌이 컸는데, 루터 본인이 번역한 성경은[31] 독일 전역에 퍼지면서 그 자체로 근대 독일어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와 달리 르네상스 시대에 처음 등장한 인쇄술에 힘입어 막대한 파급력을 갖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루터라는 한 사람에 의해 근대 독일어가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6. 한계

마르틴 루터 신학은 사도 바울아우구스티누스의 재발견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근대적이라기 보단 중세적이고 중세적이라기 보단 고대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어디까지나 로마교회를 박차고 나가서 새로운 교회를 설립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진정한 초기교회를 회복한다는 모토 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새시대를 이끌 사회변혁의 수단이 되지 못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루터의 개혁 운동은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를 제외하면 별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독일적인 현상 이었다. 이후 츠빙글리를 이은 칼뱅의 신학 역시 루터와 차별된 독자적인 시도했고 세계주의적인 시도를 했지만 역시 북유럽 네덜란드 영국 스위스 정도에 머물렀다. 16세기 중후반 한때 가톨릭 교회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정도였지만 가톨릭 교회에서도 새로운 반격에 나섰고, 17세기 종교전쟁을 겪으면서 강제력이 따르긴 했지만 유럽의 개신교도는 전체 인구의 20%선에 그치게 된다. 이후 유럽에서의 종교적 갈등은 마무리되고 유럽외의 선교는 예수회를 비롯한 가톨릭 교회에서 주도하게 된다. [32]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의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는데 16세기부터의 마녀사냥은 기존의 경제적(?) 방식에서 종교적 탄압의 수단으로 변질 된다. 종교재판[33]과 결합하여 당시 권력과 기득권을 보유한 교회에서 반대파를 탄압하는 도구로 쓰인다. 다만 개신교에서 마녀사냥에 열광했다는 근거 불충분한 서술은 근거가 없다. 15세기 말 가톨릭 도미니코회에서 주도한 독일 내 마녀 사냥은 16세기 중반 예수회 주도로 폴란드와 남독일 베네룩스에서 크게 번성했기 때문이다. 주 타겟은 진짜 마녀가 아니라 루터파와 칼뱅파 재세례파같은 이단으로 한마을의 여자들이 모조리 마녀가 되는등으로 변질되었다. [34] 상대적으로 가톨릭 교회 권력이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것이지 개신교지역에서도 가톨릭 교도들을 탄압했다. 즉 불리할때만 공존과 관용을 외치고 유리할때는 가차없이 탄압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칼뱅파와 루터파는 서로를 같은 일원으로 보지 않았고, 재세례파 탄압은 루터파 칼뱅파 가톨릭이 합세했다.


  1. [1] 이는 다른 유럽 언어들도 마찬가지이며 심지어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의 영향력이 단 0.1mg조차 미치지 않았던 스페인마저 오랫동안 la Reforma로 써왔었다
  2. [2] '개신교'에서 '개신(改新)'이란 말 자체가 이미 Reformation, Reformed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의역하자면 이렇게 하는 것이 매끄럽긴 하겠다.
  3. [3] 예를 들어 '개신교 개혁'이라고 하면 한자어 특성상 역전 앞같은 오류로 받아들여질수 있다
  4. [4] 면벌부라고도 한다.
  5. [5] 그 이전까지 발도파는 알프스 산속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밑 각주에서 반복하지만 후스와 위클리프의 말로는 별로 좋지 않았다
  6. [6] 존 줄리어스 의 교황연대기를 보면 르네상스 시절 막장 교황들보다 11~12세기 시절이 더 타락했다 평가한다. 10세기의 창부 정치시대는 여인천하 왕좌의 게임 실사판이었고 요한 12세처럼 벼라별 엽색 행각과 전쟁으로 반대파의 코와 손가락을 자르는 막장인도 있었다.
  7. [7] 다만 이들이 번역이 금지되었던 라틴어 성경을 번역했다는 오해가 있는데, 번역한 것은 사실이지만 라틴어 성경의 번역은 그 이전에도 행해지던 일이며 금지된 것도 아니다. 단지 인쇄술의 발달로 후대에 갈수록 번역이 활발해진 것 뿐이다.
  8. [8] 하지만 한편으로는 공의회주의도 그다지 큰 도움은 안되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긴 하다. 얀 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에 출석해서 자신의 입장을 밝히라는 요청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신변보장까지 받아내서 공의회에 출석했음에도 종교재판에 회부되어서 화형을 당했다!
  9. [9] 1525년 같은 호엔촐레른 가문의 프로이센에서 튜튼기사단장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이 개종해서 같이 개종했다는 잘못된 썰이 있긴한데, 프로이센과 브란덴부르크 같은 호엔촐레른 가문인건 맞는데 이시기엔 아직 프로이센공국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친척일뿐 동군연합이 아니었다. 1618년 프로이센 공작가가 대가 끊어지자 친척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물려받은것.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가 개종한것은 알브레히트의 형 선제후 요아힘 네스토르가 사망하고 다음대 선제후인 요아힘 헥토르 시절이고.. 물려받을때 유언으로 개종하지 말것을 남겼지만 쌩까고 개종해버렸다. 한편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1518년에 추기경에 오르고 1540년대 자신의 영지 할레가 개신교 지역으로 넘어가자 야코프 푸거에게 빚진 돈을 개종한 교회에다 넘겨버리기까지 한다.
  10. [10] 무늬만 수도자로 인스부르크에서 간음등 수치스러운 범죄로 막시밀리안 1세에게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교회빽으로 석방된 전적도 있었다.
  11. [11] 4만8천이라는 설도 있다.
  12. [12] 십자군 시기 전쟁비용을 대기위해 성직제후들에게 부과된 세금으로 교구내 첫해 수입을 몽땅 바쳐야한다. 후에 십자군전쟁이 없어져도 관습적으로 세금으로 고착화된다.
  13. [13] 1960년대 가톨릭 교회사가가 주장한것인데 1540년대 필리프 멜란히톤의 루터파 신학자의 서술에 의문을 제기했을뿐이지 개신교나 일반역사가들은 그냥 뭐 어쩌라는 반응이고(날짜는 별 중요치 않다), 어쨌든 95개조 반박문은 루터의 작품이며 공론화 되었을때 마르틴 루터가 자신의 저작임을 부인하지도 않았고, 루터의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고, 이 주장이 가톨릭 내부적으로 대단한 센세이션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14. [14] 단 황제는 루터의 신변만은 약속대로 보장해 주었다. 실제로 루터는 목숨을 걸고 의회에 출두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 당당함이 오히려 루터교의 세력을 불리는 데 일조했다는 것....
  15. [15] 카를 5세는 스페인의 초대 국왕이기도 하다. 그 곳에서의 이름은 카를로스 1세.
  16. [16] 루터에 대한 근대 역사가들의 평가는 대체로 호의적이다 민족주의자들은 말할것도 없고, 좌파성향의 마르크스와 엥겔스, 무신론자였던 포이어바흐나 니체 조차 공적을 인정하고 있고, 동독시절 사회주의자 그룹도 토마스뮌처를 가장 높이 치지만 그가 나올 수 있던 원동력은 루터가 필수적이었다고 본다..
  17. [17] 루터는 항상 본인을 신학자로 생각했으며, 신학 외의 사회적 문제들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마르틴 루터 항목을 참고할 것.
  18. [18] 다만 절정기는 아니었다. 이 무렵부터 총기가 본격적으로 전쟁에 등장하여 전쟁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중이었기 때문. 실제로 이들은 당시 시점에서 얼마 못 가 몰락하고 최강의 병사라는 타이틀은 스페인의 테르시오가 이어받게 된다.
  19. [19] 결국 스위스는 종교개혁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는 30년 전쟁이 끝난 뒤 독립을 이루게 된다.
  20. [20] 자세한 내용은 장 칼뱅을 참조할 것.
  21. [21] 이는 신학적으로 가톨릭에서 벗어나 황제의 권위와 멀어지는 대신, 민중 반란과 같은 사회적 문제에서는 보수적이여야 하는 그들의 입장과 루터교가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22. [22] 다만 극도로 금욕적인 칼뱅의 교리 때문에 이는 반발도 심했으며, 실제로 칼뱅은 이 과정에서 제네바에서 잠시 추방당하기도 했다.
  23. [23] 이게 영국 입장에서는 어떤 의미에서의 신의 한 수가 되었는데, 가톨릭도 프로테스탄트도 아닌 본인들만의 종교로 독립한 덕에 영국은 한동안 이후의 종교 전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물론 성공회 자체는 프로테스탄트 계열로 분류된다.) 하지만 결국 나중에는 청교도들이 큰 사고를 치고야 만다. 그리고 개혁교회이면서 동시에 보편교회를 지향하는 모호한 정체성 때문에 18세기까지도 혼란이 제법 있었다.
  24. [1526년] 24.1 기준 당시엔 5개제후 14개 제국도시들이 루터의 주장에 지지했다.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교회령만 1/3~1/4정도에 합스부르크 가문 세력 하나만으로도 신교도들 쳐바르기엔 충분했다.
  25. [25] 앞서 황제위주의 공의회 추진에 로마 교회 내부에서도 반발이 컷고 프랑스에서는 로마교황청에 자금을 끊어버렸다.. 어쨌던 로마 약탈로 교황이 거의 포로로 잡히자 열리긴 했는데 교황청의 체면을 고려하여 교황령도 아니고 합스부르크가 영지가 아닌 트렌트에서 열렸으나, 그곳은 거의 오스트리아 앞마당이었고 이런 공의회는 신교도들은 거부했고 교황청에서는 돌림병 핑계대면서 거의 비협조적이었다.(카를 5세가 루터파 주장을 받아들여서 사제독신 제도 폐지, 평신도 양형영성체를 요구했기 때문에 충공깽이었다.)카를 5세가 죽고나자 활기를(?) 띄고 처음 의제였던 교회 개혁은 번복되고 기존교리 재확인으로 끝난다.
  26. [26] 이 당시는 독일왕이며 로마왕 자격 으로 체결한것이다. 1547년 황제가 스페인으로 도망가서... 카를 5세는 이를 승인하고 1556년 퇴위한다.
  27. [27] 이는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때 루터파 기존 제안이었다.
  28. [28] 1547년 종교 전쟁시 대부분의 제후가 신교도였다는건 사실무근이다. 작센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헤센방백 필리프1세는 나란히 황제군에 체포되어 제국추방령을 맞았고 나머지 소제후 10여개 제국도시들도 굴복한다. 훗날 대표적인 신교도 제후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은 1560년대에 종교개혁에 나섰고, 제후들도 개인적 신앙은 신교도에 호의적인 사람도 있었지만 황제 카를 5세와 교황청이 무서워서 신교도 세력은 크지 않았다.
  29. [29] 뉘른베르크 레겐스부르크 슈트라스부르크등 제국도시는 명목은 황제직할지였으나... 실질은 재산과 학식등 소양을 갖춘 시참사회가 통치했다.
  30. [30] 다만 이 과정에서 여전히 청교도들은 탄압받았고, 그러다 일부 청교도들이 1620년대에 신대륙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들이 미국의 기원이 된다!
  31. [31] 이 과정에서 루터는 상당수의 단어를 자신이 직접 만들어야 했다.
  32. [32] 개신교회에서는 19세기 이전까진 해외 선교에 부정적이었는데 영미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 문화권 국가의 기독교 전래는 한국을 제외하면 그다지 성공적인 편은 아니다.다만 현재 개신교의 성장은 서구가 아니라 신자수로만 보면 아프리카와 남미가 주도하고 있다.
  33. [33] 12세기 발도파 사냥, 알비 십자군 스페인 종교재판이 유명하다.
  34. [34] 폴 존슨의 《기독교의 역사》에 따르면 가톨릭 지역에서 가장 번성하고 칼뱅파는 덜 했으며 영국국교회와 루터파 지역이 종교적으로 가장관대했다고 평가한다.(편향성 우려하여 밝히자면, 폴 존슨은 가톨릭교도이며, 일반 역사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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