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게 앤 아스카

차게 앤 아스카
CHAGE and ASKA

VERY BEST NOTHING BUT C&A 커버 [1]

그룹명의 표기

チャゲ&飛鳥 (1979년-1988년),

CHAGE&ASUKA (1989년),

CHAGE&ASKA (1990년-2000년),

CHAGE and ASKA (2001년-)

별명

チャゲアス(차게아스)

약칭

C&A

결성

후쿠오카, 일본

레이블

워너 파이오니어 (1979년-1985년),

포니 캐년 (1985년-1997년),

도시바EMI (1997년-2000년),

야마하뮤직커뮤니케이션 (2000년),

유니버설시그마 (2001년-2009년)

사무소

록담 아티스츠

장르

, 록 음악, 포크, 엔카

웹사이트

SNS

1. 개요
2. 역사
2.1. 데뷔 전 (1978년~1979년)
2.2. 데뷔 및 엔카포크 시대 (1979년~1985년)
2.3. 포니캐년 시대 전기 (1986년~1990년)
2.4. 메가 히트 시대 (포니캐년 시대 후기, 1990년~1996년)
2.5. 도시바EMI 시대 (1997년~2000년)
2.6. 내한 콘서트 (2000년)
2.7. 쇠퇴기 (2001년~2009년)
3. 디스코그래피
3.1. 싱글
3.2. 앨범
4. 멤버
4.1. Chage
4.1.1. 출생부터 데뷔까지
4.1.2. 데뷔 이후
4.1.3. 음악
4.1.4. 인물
4.1.5. 가정사와 스캔들
4.1.6. 디스코그래피
4.1.6.1. Chage 싱글
4.1.6.2. Chage 앨범
4.1.6.3. MULTIMAX 싱글
4.1.6.4. MULTIMAX 앨범
4.2. ASKA
4.2.1. 출생부터 데뷔까지
4.2.2. 데뷔 이후
4.2.2.1. 마약 스캔들
4.2.2.2. 이후 행적 (2016~)
4.2.3. 음악
4.2.4. 인물
4.2.5. 가정사
4.2.6. 디스코그래피
4.2.6.1. 싱글
4.2.6.2. 앨범
5. 트리비아

1. 개요

[2][3]

일본의 Chage와 ASKA로 구성된 싱어송라이터 듀오.

후쿠오카현 출신의 고등학교 동기동창 사이로 1978년 チャゲ&飛鳥 라는 이름으로 듀오를 결성, 'ひとり咲き'(혼자 피기)로 데뷔. 이후 1981년에 '万里の河' (만리의 강)이 히트하며 1986년에는 'モーニングムーン'(모닝문)이 히트하고 다른 아티스트에의 작사/작곡의 폭을 넓히면서 정상급 아티스트로 자리잡게 된다.

CHAGE&ASUKA (1989년), CHAGE&ASKA (1990년) 로 팀 이름을 변경하며 기존의 포크에서 으로, 다시 점차 록 음악의 색채를 더하는 등 노선을 점차 변경하던 그들은 1991년, 101번째 프로포즈의 주제가인 'SAY YES'가 오리콘 13주 연속 1위를 기록하며 더블밀리언의 메가히트를 기록하며 사회적인 붐을 일으키는 국민가수로 자리잡게 된다. 1992년 두번째 베스트 앨범인 'SUPER BEST II'가 오리콘 연간 앨범 챠트 1위를 기록하였고 1993년에는 'YAH YAH YAH'가 또다시 더블밀리언을 기록하는 대히트, 두 곡의 더블밀리언 히트를 가진 사상 최초의 가수가 된다.

이후로도 'if', 'On Your Mark', 'めぐり逢い'(해후) 역시 밀리언 히트를 기록하였고 이후로는 주로 라이브 투어에 집중, 2000년에는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콘서트를 개최한 최초의 가수가 되었다.

2009년, 데뷔 30주년을 맞아 솔로 활동에 충실하기 위해 해산을 발표, 무기한 활동 중지에 들어갔다. 2013년에는 부활을 선언하고 부활 라이브를 준비하던 도중 멤버인 ASKA가 일과성 뇌허혈증의 진단을 받으며 라이브는 일단 연기가 되었다. 그러던중 2014년에 그룹의 존망이 걸린 대 사건이 터지게 되는데...

2. 역사

2.1. 데뷔 전 (1978년~1979년)

1978년, 같은 고등학교의 동기동창 출신이던 시바타 슈지(柴田秀之)와 미야자키 시게아키(宮﨑 重明), 두 사람은 제일경제대학(第一経済大学, 현재의 日本経済大学(일본경제대학)) 재학중 각각 출전한 '제15회 야마하포퓰러송 콘테스트'(약칭으로 팝콘) 후쿠오카 대회에 참가하여 당시 チャゲ(차게)라는 이름으로 참가한 시바타가 대상, 미야자키는 최우수가창상을 받는다. 지역대회 그랑프리의 자격으로 큐슈대회에 진출하게 되었을 때 당시 후쿠오카 대회의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가하고 있던 야마하의 디렉터 아키요시(秋吉)에게 권유받아 최초로 듀오를 결성, 듀엣명 '차게'로 참가한 큐슈대회에서는 '우수곡상'을 수상하는 것에 그친다[4]. 그 해 가을의 '제16회 팝콘'에는 7인조 밴드인 챠게와 아스카(チャゲと飛鳥)를 결성하여 참가, 대회 직전에 밴드명을 챠게&아스카(チャゲ&飛鳥)로 바꾸어 출전하여 시즈오카현의 야마하리조트 츠마고이(つま恋)에서 벌어지는 전국본선대회인 'つま恋本選会'의 출전권을 획득하였고, 본대회에서는 '流恋情歌(유연정가)'를 불러 '입상'을 수상한다.

1979년에는 '제17회 팝콘'에는 칼을 갈고 대상을 목표로 출전하여 'ひとり咲き(혼자 피기)'로 다시 'つま恋本選会'에 출전하였지만 후렴부분에서 아스카가 가사를 틀리는 결정적인 실수를 하며 대상에는 실패하고 다시 '입상'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야마하의 디렉터 야마사토 쯔요시(山里剛)의 추천으로 정식 데뷔 절차가 진행되었는데 7인조 밴드가 아니라 보컬이었던 차게와 아스카의 두 사람만을 듀오로 데뷔시킨다는 것이었다. 수차례 둘은 거절했지만 결국은 남은 5명의 멤버로부터 이해를 얻어 데뷔를 수락하게 되었고 대신 7인편성의 밴드의 마지막 연주를 '팝콘'에서 하고 싶다고 요청, '제18회 팝콘' 큐슈대회에서 게스트로 출연하여 7인조 밴드로는 마지막 무대를 갖는다.

2.2. 데뷔 및 엔카포크 시대 (1979년~1985년)

1979년 8월 25일 워너 파이오니어에서 'ひとり咲き'(혼자 피기)로 데뷔한다.

데뷔 당시의 캐치카피는 '큐슈로부터 대형 태풍 상륙! 뜨거운 목소리로 부르짖는다! (九州から大型台風上陸!熱い喉が衝き叫ぶ!)'.

틀림없이 어쿠스틱 기타로 부르는 포크음악임에도 곡조와 두 보컬의 목소리와 창법 등에서 엔카의 향기가 느껴지기도 하는 독특한 곡 분위기로 '엔카포크'라는 평을 들었다.

1980년 4월 25일 데뷔 앨범 '風舞(풍무)'를 발표, 오리콘 앨범 챠트 11위, 100위 이내 33주 동안 머무르는 등 롱히트를 기록한다.

9월 25일 싱글 '万里の河(만리의 강)'을 발표한다. 10월 17일부터 총 16공연의 '全国学園祭コンサートツアー(전국 학원제 콘서트 투어)'를 성황리에 개최하며 천천히 반응이 오기 시작하더니

11월 27일에는 TBS 테레비의 '더 베스트텐'에도 첫 출연을 달성하게 되었다. 12월부터 오리콘챠트 10위 내에 진입하게 되고 이후 3개월간 10위 내를 유지하며 최초의 히트 싱글이 된다.

1981년 앨범 '熱風(열풍)'이 오리콘 앨범챠트 1위에 오른다. 처음에는 무모하다는 평을 받던 총 59회의 콘서트 투어 '열풍'도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등 제1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8월에는 야외 콘서트인 'The 夏祭り'81'(국풍여름축제 '81)도 성황리에 개최하는 등 인기 포크듀오의 자리에 오르지만...

10월 25일 싱글 '男と女(남과 여)'를 발표한다. 전작 '만리의 강'에서부터 시작된 '뭔가 중국스러운' 이미지를 아예 특화시켜 다분히 중국을 연상케 하는 멜로디라인에 남녀간의 애절한 이별을 노래한 나름 야심작이었지만 싱글 챠트 28위에 머무는 등 사실 이후 발표한 싱글의 반응은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다[5]. 1980년 들면서 포크라는 장르 자체가 쇠퇴하고 있었고 아무리 담백하게 불러도 엔카풍이 될 수 밖에 없는 둘의 하모니는 한계에 부딪혔음을 절감하여 이때부터 건반컴퓨터를 이용하여 작곡을 시작하게 된다.

1983년 4월 23일 발표한 싱글 'マリオネット(마리오네트)'부터는 포크의 색깔이 크게 옅어지고 점차 일렉트로닉 팝의 성향을 띄게 되는데 이것이 오히려 이전의 차게아스의 포크음악을 사랑하던 기존 팬들의 반발을 불러 판매량이 점점 더 떨어지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9월 30일 사상 최초로 국립요요기 경기장(国立代々木競技場)에서 콘서트를 여는 가수가 된다. 부도칸 공연 경력이 없는 가수로서 그보다도 큰 아리나급의 공연을 열어 13000명의 매진을 기록하며 성공시킨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상당히 기뻤는지 당시 차게는 '国から許可をとってきたぞ(나라에서 허가 받고 온거라고!)'라는 지금까지도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명언을, 아스카는 'ねえ 声を聞かせて(이봐 목소리를 들려줘!)'라고 하자 관객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러 대답하는 명장면을 남겼다.[6]

1984년 2월 22일 싱글 'MOON LIGHT BLUES'를 발표한다. 이전 포크적인 색깔과 새로운 일렉트로닉 팝과의 사이에서 절충적으로 내세운 것이 블루스 장르이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반응이 좋지 못했고 이에 소속 레코드 회사이던 워너 파이오니어와의 사이도 벌어지게 된다[7]. 하지만 4월 21일 차게의 이시카와 유코와의 듀엣곡 'ふたりの愛ランド(둘만의 사랑랜드)'가 히트한 덕분에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고 8월에는 뭔가 순서가 바뀐 듯하지만 부도칸 콘서트를 개최한다.

1985년 2월 결국 두 장의 싱글 '誘惑のベルが鳴る(유혹의 벨이 울린다)'와 'オンリー・ロンリー(온리 론리)'를 동시에 발매한 후 할당량을 다 채우고 워너 파이오니어를 떠난다. '유혹의 벨이 울린다'는 '둘만의 사랑랜드'가 히트하면서 작곡/작사가로서의 주가를 올리고 있던 최초의 차게 작사/작곡/메인보컬의 싱글이고 '온리 론리'는 원래 발매 예정이던 몽환적인 분위기의 아스카의 작사/작곡/메인보컬의 싱글이다. 소속회사가 없는 상태에서 콘서트 투어와 후쿠오카오사카에서 'THE 夏祭り'85'을 비교적 성황리에 개최하며 만만치 않은 기획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자랑하기도 하였다. 수개월 간을 소속사가 없던 상태로 지내던 그들은 드디어 10월에 캐년 레코드(현재의 포니 캐년)[8]와 계약하여 이적하게 된다. 이해 12월 5일 베스트 앨범인 'Standing Ovation'을 릴리즈하며 워너와의 인연은 완전히 종료.

2.3. 포니캐년 시대 전기 (1986년~1990년)

1986년 1월 2일 일본 부도칸 콘서트 중에 아스카가 '올해는 반드시 베스트텐에 3곡을 진입시키겠다.' 고 선언하였다. 새 소속사로 이적한 후의 첫 싱글이기도 했고 그간 싱글 판매가 상당히 저조해 지는 중이었기도 하였다. 또 이 당시만 해도 '레코드 회사를 옮긴 가수가 성공한 적이 없다.'라는 것이 업계의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반드시 히트해야만 한다'라는 절박함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당한 압박감 속에서 2월 5일 싱글 'モーニングムーン(모닝 문)'을 발표한다. 차게아스로서는 상당히 심혈을 기울인 역작으로 그동안 익혀 온 일렉트로닉 팝에 새로이 록의 색채를 섞으며 동양적인 정서를 가미한 그들만의 독특한 색채를 내는 데에 성공하였고 또한 당시 유행하고 있던 단순명료한 멜로디 라인, 귀에 잘 들어오는 후렴구를 사용한 음악들에 비해 적극적인 반음과 멜로디 라인의 고저를 활용하였으며 30초 이상의 간주가 두번이나 들어가는 것에 신디사이저를 대폭 활용하여 근미래적인 느낌을 내는 것에 성공, 엔카, 촌스러움, 이도저도 아닌 포크 나츠나츠나츠나츠 코코나츠 등으로 대표되던 그들의 이미지를 선구적인 팝 아티스트로 끌어올리는 것에 성공하였다.

당장 싱글 자켓만 보아도 이런 근미래적인 느낌을 내는 것에 주력했음을 알 수 있다. 쌍팔년도 감성이라고 해도 이 해가 1986년이니까 어떻게 보면 근미래 맞지

이 시기부터 차게는 선글라스가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싱글 전면의 C&A 마크도 이 싱글부터 사용되었다. 앞서 선언했던 오리콘 베스트텐은 최고 11위로 아쉽게 성공하지 못했으나 17주간 차트에 머무르며 대히트를 치게 된다. 그야말로 버블기의 차게아스의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수작으로 이후 아리요시 히로이키의 사루간세키(猿岩石)가 커버하기도 하였다. 이후 싱글 '黄昏を待たずに(황혼을 기다리지 않고)', 'Count Down', '指環が泣いた(반지가 울었다)' 등 이 해에만 총 네 장의 싱글을 내는 등 활발히 활동을 이어간다.

12월 31일에는 후지 테레비가 야심차게 추진한 버블기니까 가능했던 돈으로 쳐바른 약 빤 기획 '세계홍백'에 출연하여 런던의 특설무대에서 위성중계로 공연을 펼친다. 원래는 12월 31일에는 일을 안한다라는 야마하 소속시절부터의 폴리시가 있었지만 워낙 무대가 무대인지라... 같이 출연한 해외 아티스트가 무려 로드 스튜어트, 빌리 오션, A-ha. '指環が泣いた'를 같은 무대에서 공연하기도 하였으며 A-ha로부터는 작곡방법이나 전주의 의미 등에 대해 질문을 받기도 하였다. 이때 만났던 스탭들이 이후 아스카의 영국에서의 음악활동에의 기반이 되었다.

1987년 베스트 앨범인 'SUPER BEST'를 발매한다. 무려 3년간 오리콘 차트에 랭크인 되며 롱히트를 기록하였다. 10월 5일에는 싱글 'ロマンシングヤード(로맨싱 야드)'를 발표한다. 차게 작곡답게 강한 8비트의 록사운드가 특징인 곡으로 이 싱글을 전후하여 더더욱 록의 색채가 강해지게 된다. 싱어송 라이터 듀오로서는 드물게 다른 작사가의 작사인 싱글이기도 하다.

1988년 싱글 '恋人はワイン色(연인은 와인색)'을 발표한다. 최초로 드라마 타이업[9]된 곡이기도 하다. 올드 팬들에게는 잘 알려진 '전설의 와인 사건'이 있었던 싱글이다. 타모리가 진행하는 '뮤직 스테이션'에 출연했을 당시 싸구려 자켓을 협찬받은 엄청난 고가의 흰 자켓이라고 속여 차게에게 입힌 후 무대 후 인사를 하는 척하며 아스카가 와인을 쏟는 일종의 몰래카메라 기획이었는데... 정작 아스카는 노래 부르기 전부터 말도 한마디 못하고 어디에 쏟아야 하나를 두리번거리면서 안절부절 못하는 장면이 백미(...) 아아 제발 아스카에게 연기를 시키지 말아줘

히카루GENJI, 쿙쿙 등에게 멤버 각각 작곡, 작사를 활발히 하기 시작한 것도 이 맘때 쯤부터. 특히 히카루GENJI에게 작사, 작곡해준 'パラダイス銀河(파라다이스 은하)'는 1988년 내내 사회 전체를 뒤흔든 '히카루GENJI 붐'에 힘입어 12월 31일 일본 레코드 대상을 수상하며 차게아스의 작사/작곡가로서의 입지를 분명히 하게 되었다.

1989년 데뷔 10주년을 맞는다. 3월 8일에는 싱글 'WALK'를 발표한다. 이 싱글을 전후해서 '단순히 유행하는 음악이 아닌, 히트를 노리는 것이 아닌 자산들만의 음악을 추구하는' 쪽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이후 ASKA의 에세이집에서도 '그런 의미에서 WALK는 반드시 필요한 곡이었다.'라고 했을 정도.

4월 19일 조간신문의 TV 음악방송 출연란에 '차게 앤 아스카 중대발표!'라고 쓰여 있던 것으로 인해 해산 소동이 있었다. 실제 방송에서는 이후 '자신들만의 음악'을 찾기 위한 휴식을 갖기 위해 아스카는 영국을 건너가 런던에서 작사/작곡에 전념하고 CHAGE는 그룹 'MULTIMAX'를 결성, 독자적인 음악활동을 이어가게 될 것을 발표하였고 분명히 해산은 부정하였음에도 해산설은 그 이후로도 내내 그칠 줄 몰랐다(...).

4월 30일부터는 데뷔 10주년을 맞아 전국을 돌며 행해진 59회의 기념 콘서트인 'CONCERT TOUR '89 ~10 years after~'투어가 시작되었다.

6월 21일 싱글 'LOVE SONG'을 발매한다. JAL오키나와 캠페인 송으로 발표되었는데 마치 우리나라 30대 후반 이후 분들이 '대한항공 CF'하면 'Anita Kerr Singers'의 'Welcome to my world'를 떠올리는 것처럼 'JAL CF'하면 떠올리는 곡들 중 하나가 되며 길게 히트한다. 이 즈음은 버블이 붕괴하면서 아이돌의 시대가 끝나고 밴드 음악의 커다란 붐이 일었던, 록 음악의 대유행이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싱글을 기점으로 다른 록에 비해 차별화된 차게아스만의 '따뜻한 음악을 만들고 싶다'라는 의도가 강해지게 되었다. 'LOVE SONG'은 이러한 의도 하에 작곡된 곡으로 심장의 박동을 연상케 하는 전주에서 건반으로 이어지는 주 멜로디와 차게아스만이 가능한 하모니를 살린 수작. 우리나라에서 2002년 조장혁이 리메이크하여 명랑소녀 성공기의 OST로 쓰인 곡으로 유명하다. 참고로 위의 동영상은 1989년 버젼. 1992년 재발매한 버젼과 비교해보면 곡은 그대로인데 차게의 올백 머리가 모자로 바뀐 것만 다르다.

정확히 데뷔 10년이 되는 8월 25일을 기해 팀 명을 'CHAGE&ASUKA'로 바꾸고 앨범 'PRIDE'를 발매한다. 2CD 사양으로 CD1은 오리지널 앨범을, CD2는 이전 발표한 노래들을 재수록한 앨범이다. 이 앨범으로 첫 앨범인 '熱風' 이후 두번째 오리콘 앨범차트 1위를 하게 된다.

9월 15일 오키나와를 끝으로 10주년 기념 콘서트 투어가 종료, 그리고 이 이후 차게아스는 반 년 이상의 휴지기에 들어간다. 사실 그 사이에도 해산설은 전혀 가라앉을 줄 몰랐기 때문에 10주년 기념 콘서트 매 공연마다 MC에서 '이것이 차게아스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생각하신 모든 분들, 정말로 죄송합니다. 저희는 해산하지 않습니다~'라며 해산설을 부인해야만 했다. 코지마 하루나

2.4. 메가 히트 시대 (포니캐년 시대 후기, 1990년~1996년)

1990년 그룹명의 정식표기를 CHAGE&ASKA로 변경하였다. 바뀐 이유에 대해서는 ASKA 항목 참조. 6월 27일 1년만의 싱글 'DO YA DO'를 발표한다. 1년만에 발표한 싱글로 최초로 영국에서 녹음된 싱글이기도 하다. 이전에 비해 확연히 강해진 록 비트를 기반으로 현란할 정도로 많은 멜로디를 ASKA 특유의 주선율과 CHAGE의 하모니와 훌륭히 조화시키는 세련된 연출로 인해 이후 메가히트 시대의 차게아스의 음악의 기초가 되었다고 할만큼 중요한 싱글. 여담으로 'DO YA DO'는 친구 사이에 쓰는 일종의 속어로 '너 뭐하려고?'의 뜻이라고 한다. 원래는 의미하고 쓴게 아니라 가이드송 단계에서 의미없는 단어를 스캣으로 넣은 것인데 듣고 있던 영국인 스탭들이 '어떻게 이 속어를 알고 있냐?'고 물어 그것이 그대로 후렴구의 가사와 제목이 되었다. 1980년 '만리의 강' 이후 10년만에 오리콘 싱글차트 톱10에 진입하는 등 히트하였고 이어 8월 19일부터는 근1년만의 전국 콘서트 투어를 이번에는 오키나와부터 시작한다. 6개월 이상의 공백기가 있었음에도 전공연이 매진된 것이 화제가 되기도. 8월 29일에는 앨범 'SEE YA'를 발표한다. 그리고 1991년을 맞는다.

1991년 : 차게아스가 국민 듀오의 반열에 오른 기념비적인 한 해.

1월 30일 앨범 'SEE YA'로부터 '太陽と埃の中で(태양과 티끌의 사이에서)'를 싱글컷, 발매한다. 이후 차게아스의 음악의 큰 줄기 중 하나가 되는 '큰 스케일의 발라드 넘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곡으로 가사를 잘 들어보면 틀림없이 실연에 대한 노래인데 극복을 위한 희망과 용기를 주는 내용이 반응을 얻어 길게 히트한다[10].

3월 6일 발표한 ASKA의 솔로 싱글 'はじまりはいつも雨'(시작은 언제나 비)'가 크게 히트하면서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더니 6월 5일 발매한 ASKA의 앨범 'SCENE II'역시 길게 히트하며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는 연이은 히트 행진을 이어간다. 그리고...

원더걸스에게 Tell Me, 소녀시대에게 Gee가 있다면 차게아스에게는 SAY YES가 있다.

7월 24일 후지 테레비 게츠쿠 '101번째 프로포즈'의 주제가로 만든 싱글 'SAY YES'가 데뷔 12년째에 첫 오리콘 싱글차트 1위를 획득하며 13주 연속 1위 자리를 고수[11], 총계 282.2만장의 더블밀리언을 기록하는 그야말로 메가히트를 기록하여 일약 국민 듀오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원래 101번째 프로포즈는 비극적인 결말을 지으려고 했으나 완성된 주제가 'SAY YES'를 들은 프로듀서와 작가가 드라마의 결말까지 해피엔딩으로 바꾸었던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 이 시기에 가라오케에서의 '차게아스'곡의 리퀘스트가 폭증하고, ASKA의 패션 스타일이나 헤어 스타일을 따라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는 등 '차게아스 붐'은 사회현상으로까지 번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대히트에도 불구하고 이 SAY YES라는 곡은 년간 1위를 차지하지 못했는데 당시 년간 1위를 차지한 싱글은 바로 그 유명한 도쿄 러브스토리의 주제가 '러브스토리는 갑자기'였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SAY YES의 대히트에 탄력받아 9월 28일부터 'CONCERT TOUR '91~'92 SAY YES'가 시작, 이듬해 5월 15일까지 총 58회의 전국순회 콘서트를 벌였는데 결과는 전공연 매진.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를 얻지 못해 추가 공연을 요구하는 전화가 빗발치자 이듬해 3월 13일부터 부도칸 공연을 포함한 'CONCERT TOUR 1992 "BIG TREE"'라는 제목으로 총 30회의 아레나 단위의 별도의 콘서트 투어를 열어, 두 종류의 콘서트 투어를 동시에 벌여, 동시에 전석 매진을 기록, 총 45만명을 동원하는 기록을 세우게 되기도 하였다.

10월 10일 앨범 'TREE' 역시 초동 판매[12] 99.2만장, 발매 2주차에 밀리언 셀러를 기록한다. 이는 당시 사상 최고의 앨범 판매기록이었다. 그래봐야 바로 1개월 후에 마츠토야 유미사마가 다시 경신하지만... 최종적으로는 더블 밀리언(235.1만장 판매)을 기록. 10월 21일자와 10월 28일자 오리콘 차트에서는 싱글과 앨범 모두 석권하기도 하였다.

11월 21일에는 'TREE'로부터 '僕はこの瞳で嘘をつく(나는 이 눈으로 거짓말을 한다)'를 싱글컷, 다시 한번 오리콘 싱글챠트 1위를 차지한다. 'SAY YES'가 서로 다른 두 선율을 마치 파트를 나누어 부르는 합창에서의 하모니를 만드는 것과 같은 구조로 피아노의 선율을 중시한 노래였다고 하면 이 곡은 전혀 정반대의 성향으로 록 성향의 스트레이트한 비트를 기본으로 한 드럼 중심의 노래 심지어 가사의 내용과 컨셉도 순수한 러브송인 'SAY YES'와는 달리 양다리(...)이다. 역대 차게아스의 싱글 중에서 가장 록 음악의 색깔이 강한 싱글로 차게아스의 또다른 면모를 보여준 것이 반응을 얻어, 일반적으로 히트한 앨범의 경우에는 이미 많은 소비자들이 그 곡을 구매한 상태이기 때문에 기존의 앨범에서 싱글 컷을 하는 경우는 히트하는 경우가 상당히 드문데도 불구하고 히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이 곡은 한국의 박상민이 2001년에 자신의 8집 앨범에서 '하지마'라는 수록곡으로 리메이크했다.[13]

1992년 3월에 벌어진 '제6회 일본 골드디스크 대상'에서 대상을 포함하여 총 6개부문에서 수상한다. 3월 25일에는 베스트 앨범인 'SUPER BEST II'를 발매, 총 270만장을 넘는 판매고를 올려 오리콘 연간 앨범챠트 1위를 차지하였다. 3월 25일 동시에 재발매된 싱글 'LOVE SONG'과 'WALK'역시 주간 오리콘차트 1위를 기록하며 히트('WALK'는 3위)하였고, 이어 7월 1일에 발매한 싱글 'if', 11월 7일에 발매된 앨범 'GUYS' 모두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여 단순히 일시적인 차게아스 붐이 아니라 국민적인 가수의 대열에 올랐음을 보여주었다.

1993년 3월 3일 오다 유지[14]가 악역이자 주인공을 맡은 후지 테레비 드라마 '振り返れば奴がいる(돌아보면 녀석이 있다)'의 주제가 'YAH YAH YAH/夢の番人(꿈의 파수꾼)'이 다시 더블 밀리언을 기록하는 대히트, 누적판매 241.9만장을 판매하여 오리콘 연간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하며 차게아스는 사상 최초 더블 밀리언 싱글을 두 곡 보유한 아티스트가 된다.[15] 'YAH YAH YAH' 작곡의 테마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이 당시 차게아스는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리면서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게 되어 일거수 일투족이 화제가 되고 비난의 대상이 되는 등 그야말로 스트레스가 다소 쌓일 수 밖에 없던 상황.

그 와중에 당시 후지 테레비에서 방영하던 음악정보 프로그램인 'MJ -MUSIC JOURNAL-'에서 '차게아스의 음악은 엔카다.'라는 내용의 특집을 하자 이에 분노한 ASKA가 제대로 맘먹고 만든 곡이라는 설이 팬클럽에서는 정설처럼 되어 있다. 강한 록비트에 '좌절과 고난이 있겠지만 그따위 것들 다 날려버리고 앞으로 나가자'라는 그 당시로서는 다소 과격하리만치 직설적인 가사[16]는 큰 공감을 얻었고 누구든 따라 '부르기'보다는 따라서 '울부짖으며' 스트레스를 발산할 수 있는 'YAH YAH YAH'의 후렴구는 특히 가라오케에서 크게 인기를 끌어 지금도 40~50대의 가라오케 선호곡 순위에 꼭 들어갈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다. 간단히 말해 일본의 '말 달리자'라고 보면 될 듯

'제7회 일본 골드디스크 대상'에서도 역시 대상을 수상, 2년 연속으로 대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둔다. 3월 30일부터는 'LIVE UFO '93 CHAGE&ASKA GUYS 〜夢の番人(꿈의 파수꾼)〜'을 개최하여 연일 매진행렬을 이어간다. 5월에는 모나코에서 열린 'The World Music Awards'[17]에 일본대표로 첫 출장하여 수상, 이후 1994년, 1995년에도 수상하며 서양권에서의 차게아스의 인지도를 크게 높이게 된다.

8월 20일 싱글 'Sons and Daughters ~それより僕が伝えたいのは(그것보다 우리가 전하고 싶은 것은)'을 발매한다. 2주연속 오리콘 싱글차트 주간 1위를 기록하며 히트. 여담으로 8월 27일 TV 아사히의 '뮤직 스테이션' 300회 기념 특집에 출연하였는데 CHAGE가 같이 출연한 아카펠라그룹 '14 karat soul'에게 말을 거는 장면은 순간시청률 38.7%로 2016년 현재까지도 뮤직스테이션의 최고 순간시청률 기록이다. 10월 10일에는 앨범 'RED HILL'을 발매, 다시 한번 밀리언 셀러가 되었고 앨범 발매일부터 총 70공연으로 이루어진 콘서트 투어 '史上最大の作戦(사상최대의 작전) THE LONGEST TOUR 1993-1994'를 다음해 4월 10일까지 계속한다.

11월 19일 앨범 'RED HILL'로부터 'You are free'와 'なぜに君は帰らない(왜 너는 돌아오지 않는가)'를 싱글 컷 발매한다. 이중 'なぜに君は帰らない'는 앞서 'YAH YAH YAH'가 주제가로 쓰였던 드라마 '振り返れば奴がいる(돌아보면 녀석이 있다)'의 후일담을 그린 스페셜(1993년 12월 29일 방송)의 엔딩테마로 사용되었다. 'YAH YAH YAH'의 연장선상에서 작곡된 곡이라고.

1994년 3월 '제8회 일본 골드디스크 대상'에서도 대상을 포함, 그랑프리 싱글상을 수상한다. 데뷔 15년을 맞아 4월 29일 홍콩을 시작으로 싱가폴대만으로 이어지는 첫 아시안 투어 'ASIAN TOUR 1994'를 시작한다. 최초에는 데뷔 15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일본 투어의 연장선상으로 생각하고 시작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이왕이면'이라는 생각에 음향장비를 대폭으로 업그레이드하고 나선 첫 공연에서 예상치도 못하게 총 6만명을 동원하며 현지의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등 크게 호응을 얻게 되자 해외 공연에 대한 의욕이 커지게 되었다. 이후 차게아스가 본격적으로 해외라이브 공연을 진행하는 계기가 된 것.

8월 3일 'HEART/NATURAL/On Your Mark'의 트리플 A면 싱글이 발매된다. 역시 밀리언 셀러를 기록. 이중 역시 잘 알려진 것은 On Your Mark로 2016년 현재 나무위키에 유일하게 단일 항목으로 존재하는 차게아스의 곡이기도 하다. 원래는 미일 문화교류를 위한 '아메리칸 페스티벌 '94'의 테마송으로 '미래를 향한 긍정적인 자세로 질주감이 있는 노래'를 의뢰받아 작곡된 곡이다. 자세한 정보는 항목 참조.

정확히 데뷔 15주년이 되는 8월 25일, 기념 베스트 앨범인 'Yin&Yang'을 발표한다. 음(陰)에 해당하는 'Yin'에는 발라드 넘버를 여성 DJ가, 양(陽)에 해당하는 'Yang'은 주로 업템포 넘버를 남성 DJ가 소개하는 가공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는 것 같은 구조의 리믹스 앨범.

11월 16일 후지 테레비 4분기 게츠쿠 '妹よ(여동생이여)'[18]의 주제가로 사용된 싱글 'めぐり逢い(해후)'가 드라마와 주제가 모두 대히트, 총 판매량 125.2만장으로 5번째 밀리언 싱글을 기록한다. 그리고 이 싱글이 차게아스의 마지막 오리콘 주간싱글차트 1위곡이자 마지막 밀리언 싱글이 된다.

12월 16일 4CD-Box 사양의 'SUPER BEST BOX SINGLE HISTORY 1979-1994 AND Snow Mail'을 발표한다. 이 CD-Box의 네번째 CD는 특히 'Snow Mail'이라는 제목으로 그동안 차게아스가 불렀던 겨울 노래들을 모은 앨범으로 이 중에서 이전 1992년 발표한 앨범 'GUYS'의 마지막 곡이었던 '世界にMerry X'mas (세계에 Merry X'mas)'를 오케스트라로 부른 버젼이 호평을 받으며1992년 버젼의 '세계에 Merry X'mas', 오리콘 앨범 챠트 1위를 차지한다.

12월 23일 희대의 괴작인데 정작 히트는 한 미국에서 첫 상영된 영화 'Street Fighter'의 엔딩테마로 영어가사 곡인 'Something There'이 사용되었다. (영화는 일본에서 이듬해 5월 6일 공개, 싱글은 5월 10일 발매) 영어가사로 된 노래임에도 오리콘 싱글챠트 2위를 기록한다.

1995년 전반부는 1월 1일 발매된 ASKA의 싱글 '晴天を誉めるなら夕暮れを待て(맑은 날을 칭찬하려면 해질녘을 기다려)'의 활동에 주력한다.

6월 28일 1년 8개월만의 오리지널 앨범인 'Code Name.1 Brother Sun'을 발표한다. 또한 7월 5일부터 이듬해 1월 30일까지 총 60회 공연의 'CONCERT TOUR '95~'96 SUPER BEST 3 MISSION IMPOSSIBLE'를 개최한다. On Your Mark 항목에도 나와 있는 지브리 인생극장은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일반인 대상의 발매는 그보다 더 뒤인 1997년 7월 25일의 일.

11월 11일부터는 두번째의 아시안 투어인 'ASIAN TOUR II - MISSION IMPOSSIBLE'을 대만, 싱가폴, 홍콩에서 펼친다. 이 시기는 흔히 '코무로 붐'이라고 하는 신디사이저를 이용한 테크노, 하우스, 유로비트 등의 장르를 융합한 TRF, 아무로 나미에, globe 등의 댄스코어가 주류가 되고 있던 상황이었고 이에 차게아스는 점차 싱글 활동보다 라이브 무대 활동에 주력하게 된 것. 그러다보니 싱글이 나오는 기간이 점점 길어지게 된다. 영원히 전성기를 누릴 수는 없는 법.

1996년 2월 19일 발라드넘버인 싱글 'river'를 발표한다. 이어 4월 22일 앨범 'CODE NAME.2 SISTER MOON'을 발표하지만 싱글과 앨범 모두 오리콘 챠트에서 2위에 그친다. 특히 앨범의 경우는 1991년 'TREE'에서부터 시작된 연속 앨범챠트 1위기록이 깨지며 더 이상 차게아스가 전성기가 아님을 실감하게 되었고 이에 더욱 더 국내외 콘서트활동에 몰두하는 계기가 되었다. 위에 있는 YAH YAH YAH와 관련된 영상은 이 무렵, 즉 1996년에 대만에 가서 콘서트를 했을 당시에 찍은 영상이다.

6월 19일 아시아권 가수로는 최초로 'MTV Unplugged'에 출연한다. 당시에는 일본에 MTV가 생기기도 전이었기 때문에 영국 현지방송국에서 출연요청이 들어왔던 것은 ASKA가 '기적이라고 생각했다.'고 했을 정도로 매우 드문 일. 총 12곡을 공연하며 10곡을 ASKA가, 2곡을 CHAGE가 불렀는데 정작 가장 박사갈채를 받은 곡은 싱글 'river'의 B면 수록곡인 CHAGE 작곡곡 'NとLの野球帽(N과 L의 야구모, 발음은 '베이스볼 캡'으로)'였다. 제목의 "'N"'과 '"L"'은 CHAGE의 고향인 후쿠오카를 근거지로 하던 니시테츠 라이온즈 (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를 의미한다. 곡의 배경은 CHAGE의 어린 시절인 1969년. 곧 미하라 오사무 감독 시절의 황금시대가 아닌 검은 안개 사건 이후 최하위를 전전하던 시절의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모자를 쓰고 '언젠가는 이 꼴지팀을 내가 우승시키겠다'라고 야구에의 꿈을 불태우던 소년 시절과 인트로의 공장의 소음으로 대표되는 고도성장기를 보내는 어른들의 모습을 비교한 내용의 숨겨진 명곡이다.

사실 그전까지 별 주목을 받지 못하던 이 곡은 예상치 못했던 'MTV unplugged'에서의 반응으로 특히 서양권에서 CHAGE의 대표곡이 되어 버렸고 이후 CHAGE는 본인이나 차게아스의 라이브 무대에서 꼭 이 곡을 부르게 되었다. 'MTV unplugged' 방송에 발맞추어 6월 22일에는 컬쳐 클럽의 보이 조지, 챠카 칸 등이 참가한 헌정 앨범 'one voice THE SONGS OF CHAGE&ASKA'의 제작이 발표되었고 영국에서는 7월 8일, 일본에서는 7월 31일 포니캐년이 아닌 EMI 레이블로 발매하였다. 전 곡이 영어로 된 커버곡이었기 때문에[19]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 8월에 발매되었다.

그리고 이후 차게아스로서의 활동을 일단 중지, 이후 솔로활동에 주력하게 된다. 싱글 디스코그래피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 시기로부터 무려 3년간 차게아스의 싱글 발표가 전혀 없다. 데뷔 이래로 매해 계속해 오던 콘서트 투어도 이 해부터 중단된다. 당연한 수순으로 해산설, 포니캐년과의 불화설[20]이 돌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별 대응 없이 지나갔다(...).

10월 7일에는 'MTV unplugged'의 라이브 공연 실황 앨범이 출시된다. 오리콘 앨범 차트 1위. 11월 7일 CHAGE의 MULTIMAX가 활동을 재개하며 싱글 'どうだい'를 발표한다. 이어 12월 4일에는 앨범 'Oki doki!'를 발매. 기타의 케이스케상하고의 분위기가 뭔가 묘해보이기 시작한건 이맘때쯤 부터이다

2.5. 도시바EMI 시대 (1997년~2000년)

1997년은 솔로활동에 치중한 1년이라고 할 수 있겠다.

1월 22일 'Right Here Waiting'으로 잘 알려진 가수 '리처드 막스'의 새 싱글 'Every Day Of Your Life'가 ASKA와의 듀엣 곡을 포함하여 발매되었다. 2월 5일 ASKA의 싱글 'ID'가 발표되었고 이어 2월 8일 항간에 무성하던 포니캐년과의 불화설이 마치 사실이었던 것처럼 도시바EMI로 레이블을 이적하게 됨이 밝혀졌다. 이어서 3월 12일에는 ASKA의 싱글앨범 'ONE'을 발매. 이어 3월 30일부터 ASKA 솔로로서는 첫 전국 콘서트 투어인 'ASKA CONCERT TOUR ID'를 총 22공연 개최한다. 11월 15일에는 ASKA가 '제6회 상하이 인터내셔널 뮤직 페스티벌'에 출연했다. 이때 CHAGE가 서프라이즈로 등장하여 'YAH YAH YAH'를 불러 화제가 되었다.

1998년 최초에는 차게아스의 멤버도 팬들도 1년 정도만 솔로 활동에 충실할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오히려 두 멤버 모두 솔로 활동에 더 열중하게 된다. 3월 11일에는 ASKA가 싱글 'Girl'을, 3월 25일에는 앨범 'kicks'(자극)를 발표한다. 이전의 ASKA와는 사뭇 다른 록의 색깔이 짙은 '자극'적인 앨범으로 기존의 차게아스 팬들에게는 호불호가 다소 갈리는 앨범 중 하나이다.

CHAGE는 첫 개인 콘서트 투어를 일본이 아닌 상하이에서, 또 일본에서의 솔로 첫 콘서트가 부도칸 (6월 22일)이라는 다소 파격적인 형태로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5월 15일 첫 오리지널 싱글인 'トウキョータワー(도쿄 타워)'를, 6월 10일에는 첫 솔로앨범인 'PROLOGUE'를 발표하였는데 데뷔 앨범이 베스트앨범이라는 기묘한 설정이 주목을 받았다. 이후 10월 21일에는 첫 오리지널 솔로 앨범인 '2nd'를 발표하는 등 정력적인 솔로 활동을 이어간다. 이 해의 유일한 차게아스로서의 활동이라면 서로가 서로의 콘서트에 게스트로 출연해준 것. 이 해의 후반기에는 ASKA의 성대 부종으로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1999년 데뷔 20주년을 맞는다.

3월 7일 방송된 TBS 테레비의 '정열대륙' 'CHAGE&ASKA 再始動! スペシャルドキュメント 〜IS BACK〜 (재시동! 스페셜 도큐먼트 ~IS BACK~)'편에 출연하면서 차게아스로서의 복귀를 알리고 3월 10일 도시바EMI이적후 첫 싱글인 'この愛のために(이 사랑을 위하여)/VISION' 발매와 함께 차게아스로서의 활동을 재개한다.

8월 25일 데뷔기념일에 맞춰서 CHAGE와 ASKA 둘만의 힘으로 만든 첫 셀프 프로듀스 앨범인 'NO DOUBT'를 발매, 오리콘 앨범 챠트1위를 차지한다. 9월부터는 마치 그동안 밀린 차게아스 콘서트를 몰아서 하듯이 쉴새 없는 국내/외에서 콘서트 활동을 이어간다.

12월 31일에는 날이 날이니만치 12월 31일에 일을 안하는 원칙을 깨고 차게아스 최초의 카운트다운 라이브 '千年夜一夜ライブ 〜福岡ドーム 僕らがホーム〜(천년야일야 라이브 ~후쿠오카돔 우리들이 홈~)' 을 고향 후쿠오카에서 개최, 새 밀레니엄을 팬들과 함께 맞았다. 이 라이브는 direct TV를 통해 62개국에 위성 생중계 되었다.

2000년 5월 야마하 뮤직 커뮤니케이션으로 이적하게 됨이 발표된다. 이전까지 소속 레코드 회사를 갖고 있지 않았던 야마하가 새로 레코드 레이블을 설립 하면서 당시 차게아스의 소속사인 '리얼캐스트'에 지분을 갖고 있던 인연으로 이적하게 된 것. 그러나 이는 나중에 엉뚱한 쪽으로 불꽃이 튀게 되는데...

2.6. 내한 콘서트 (2000년)

차게 앤 아스카 그룹의 1차 흑역사

2000년 6월 27일 한국에서는 제3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있었다. 또한 다가 올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 맞춰 한일간의 교류와 우호를 증진하기 위한 이벤트성 행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한국정부는 일본 출신의 거물급 아티스트의 첫 대규모 내한 공연을 거행하기로 결정, 수년전부터 이를 추진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던 일본 아티스트는 단연 넘사벽 X JAPAN이었지만 2000년 당시는 이미 그룹이 공중분해되어 있던 상황. 이에 여러 아티스트들에게 오퍼를 넣었던 중에 그나마 '하겠다'고 나선 아티스트가 바로 재단법인 한국여성기금(현 한국여성재단)의 추천을 받은 차게아스였다. 이후 ASKA가 밝힌 바로는 1999년 12월 31일 후쿠오카의 '千年夜一夜ライブ 〜福岡ドーム 僕らがホーム〜(천년야일야 라이브 ~후쿠오카돔 우리들이 홈~)' 밀레니엄 카운트다운 라이브 공연 후 대기실에서 최초로 오퍼를 받았다고 한다. 오퍼를 받았을 때 성공할 리가 전혀 없지만 성공해야만 하는 심경이었다고.차게아스판 미션 임파서블 그도 그런 것이 당시 차게아스의 음반, 공연은 이미 중화권과 서양권에서는 그나마 꽤 알려진 정도였지만 공식적으로 음반이 판매된 적도, 텔레비전, 라디오 어디에서도 음악이 방송된 적이 없는 나라인 한국에서 가뜩이나 국민감정이 안좋은 생판 모르는 일본인이 콘서트를 연다고 하면 누가 과연 알고 찾아 올 것인가? 게다가 이때는 유튜브같은 사이트도 아예 없었으니 이전에 차게아스가 SAY YES나 YAH YAH YAH등으로 일본에서 엄청나게 히트를 쳤다 한들 다른 나라에서는 그런 일들이 전혀 알려지지 못했으며 심지어 제시된 공연일자도 최초에는 6월말 3차 대중문화 개방에 맞춘 일정이었으니 준비기간조차도 6개월이 안된다(...). 뭐 어쩌라는건지.

그 직후 당시 대통령 영부인 이희호여사와의 면담 후에 최종적으로 재가. '이건 우리가 해야 한다.'라는 쪽으로 생각이 굳혀 진건 그 면담 후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차게아스는 거의 반년 이상을 이 콘서트 준비에만 매달리게 된다. 차게는 기존 예정된 콘서트 투어를 모두 취소하였으며 아스카는 원래 솔로 앨범 예정이던 것을 전격 취소하고 준비중이던 곡 한곡만 싱글로 발표한다. 내한 콘서트 이전 이 해 그들의 유일한 활동인 7월 12일 발표한 'good time'이 그 싱글.

4월 28일에는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홍보대사'로 전격 임명되어 이때 일본에서는 임명 소식과 더불어 콘서트 개최가 조인식까지 열어서 그럴 듯하게 발표되었다[21]. 개최일은 콘서트 준비의 문제로 정작 최초 기획된 것보다 늦은 8월 26일, 27일이 최종적으로 콘서트일로 결정. 하지만 정작 개최지인 한국에서는 콘서트 발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아니 심지어 콘서트 직전까지도 음반 발매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면 최소한 홍보라도 빵빵하게 해야 하지만 정작 콘서트 개최 발표조차 6월 27일 제3차 대중문화 개방이 되고 나서였으니 이건 뭐... 7월 말 SBS에서 처음 TV 광고를 했을 당시 'TV에서 왜X 노래가 나온다'며 대대적으로 항의가 들어와 TV광고도 중단되는 일도 있었다. 그렇다고 국내에 아주 소수나마 있었던 차게아스 팬들의 호응이 제법 있었느냐 그것도 아닌것이 당시 PC통신 등에서 소수 존재하던 차게아스의 팬들조차 이건 '100% 실패다', '사람 불러 놓고 바보 만드는 짓이다'라고 울분을 토했기 때문. 게다가 이 해는 의약 분업 문제로 의사들의 대규모 파업 사태가 벌어져 사회가 들썩이고 있던 때였으니 관심도는 더더욱 떨어질 수 밖엔 없었다.

차게아스도 이런 내용을 다 알고 있었고 실패했을 경우의 데미지 콘트롤이 쉽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후 ASKA가 블로그에서 회고한 글에는 '용기와 각오, 정열과 경의로 임했다.'고 한다. '한국의 새로운 스탭과 커뮤니케이션을 취하면서 인간관계를 하나씩 쌓아올리면서', '무엇보다 직접 발로 뛰어야만 했다.'고.

8월 26일, 27일 이틀에 걸쳐 서울 잠실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대규모 라이브 공연을 개최한다. 내한 당시 공수해 온 20t 이상의 음향장비가 기사로 나오기도 하였다. 입장 수익 전액은 한국 여성 기금의 결손 가정 지원을 위해 전액 기부되기로 결정되었으며 일본 관객 6000명이 차게아스 공연 관람을 포함한 서울 관광 투어 상품을 통해 한국을 찾은 것이 화제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이마저 없었으면 공연 자체가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첫 공연날은 폭우가 쏟아졌다.(...) 실제 든 관객은 8천~1만명이 아이돌 콘서트 때에는 2만명 수용되는 체조경기장을 감안할때 무대 양 옆을 제외하고는 그래도 그럭저럭 채운 수준으로 수정 전의 본 항목에는 '관객들 절대 대다수가 일본 내의 차게 앤 아스카 팬들이 한국까지 와서 내한공연을 보러 온 것이었다'라고 되어 있지만 절대로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사실 '약쟁이로 몰락한 퇴물 듀엣'의 나무위키 항목이 이렇게 갑자기 양이 늘어나게 된 것은 바로 그 구절 덕분이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아직 남아 있는 공연 후기 등을 보더라도 전국에 숨어있던 차게아스 팬들이 꽤 많이 모여 주어서 언뜻 보기에는 첫 공연은 최소 40% 조금 안되는 정도가 한국인, 두번째 날은 30% 정도가 한국인이었던 느낌. 당시 나우누리 일본 음악 연구회에 올라온 글을 보면 '어디서 이렇게들 스물스물 나타났는지'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였다 콘서트 중 "오늘 덥지 않아요?"라는 ASKA의 한국말로 된 질문에 '아니요~'라고 역시 한국말로 대답이 나왔던 것을 보면 그 이상이었으면 이상이었지 결코 그것보다 적지는 않았다. ASKA는 블로그에서 2500명이 일본인이었고 7500명의 한국인 관객분들이 찾아 주셨다라고 했지만 그건 솔직히 아니고...

공연에 있어서는 인사 뿐만 아니라 중간중간의 MC, 공연 중의 아주 사소한 추임새도 모두 한국말로 하는 등 정말 준비를 많이 했구나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 차게아스가 당시 공연에 쏟은 정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당장 세트 리스트만 해도 이전 ASKA가 '일본에서와 같은 세트, 음향을 써서 같은 퀄리티의 무대를 하지 않는 해외 라이브는 무의미'라고 했던 말을 뒤집는 그야말로 히트 송 퍼레이드였던 것에 역으로 배신감을 느꼈던 일본 팬들도 있었을 정도였으니...

당시 공연 영상이 담긴 블로그

둘째 날 공연 중 ASKA는 MC에서 "저희는 몇 년간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노래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 한국에서는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억울하기 보다는 외롭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역사상 있었던 일들은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이 사실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고 과거사를 같이 슬퍼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저희들은 이렇게 가까운 나라입니다. (그만큼 우호적으로 지낼 수 있도록) 저희들은 저희들의 시대를 함께 만들어 나갑시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라고 한국말로 멘트한다. 그리고 이어진 곡은 국내에 그나마 가장 잘 알려진 On Your Mark 였지만.. 정작 감정이 북받친 ASKA는 우느라 노래를 거의 못불렀다. 이후 밝혀진 바로는 당시 CHAGE는 너무 울어서 노래를 전혀 못부르는 ASKA를 보고 너무 당황스러워서 본인이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지만 정작 자기 파트 밖에는 몰라서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고(...) 본 멜로디 없이 화음만 열심히 넣고 있는 CHAGE(...) ASKA가 노래 중간에 이렇게 우는 모습은 데뷔 이래로 처음이었기 때문에 일본 관객들은 이 부분에서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 멘트 이후에 'On Your Mark'를 구성한 것은 ASKA의 이 멘트가 한/일 교류의 출발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달리기에서 '제자리에' 에 해당하는 의미로 배치했다고 한다. 그리고 CHAGE 팬들은 앵콜에서 일본에서는 한번도 벗지 않았던 선글라스를 벗는 CHAGE에 배신감을 느꼈다고(...)

공연 후 무대 위에서 '오늘 저희를 초청해주신 한국여성기금과 시민연대 여러분[22], 대통령 영부인께 이런 멋진 만남을 갖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라는 감사 인사로 공연을 마쳤다. 한국 관객들이 공연 후 퇴장하고 있음에도 남아서 쓰레기를 모두 치우는 일본인 관객들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본 항목의 수정 전에는 '당시 한국은 X JAPAN이 이 밴드보다 넘사벽으로 인기를 끌고 있었을 때라 내한 공연 당시에도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묻혀버렸다(;;)'라고 되어 있었다. 결과만 말하자면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묻힌 것은 맞다. 하지만 묻힌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에는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고 주목을 끌 시대적 상황이 결코 아니었다. 일단 일본 문화에 대한 편견과 거부감도 상당히 컸고 뭔가 '이벤트를 벌여서 초대 해 놓고는 정작 성공시키려고 애쓴 건 초대 받아온 손님'의 느낌이 강했을 정도로 정책적으로도 제도적으로도 전혀 갖춰져 있지 못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공연 후 일본 언론에서 (특히 주간지 'Flash'의 경우는 매우 공격적으로 '차게아스가 양국 국민을 우롱했다.'라는 표현까지 썼다.) 관객이 공연당 1만명도 채 안들었다라든지 일본 관객을 데려와서 반 이상을 채웠기 때문에 실패다라는 지적을 하지만 애초에 본 공연이 이벤트성으로 기획된 '자선 콘서트'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관객 수와 관객의 국적으로 성공/실패를 논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차게아스가 공연 직전 8월 25일 했던 인터뷰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양국 문화 교류의 상징적인 물꼬를 텄다는 것만 놓고 봐도 충분히 의미있는 콘서트였다.

한국 콘서트는 현재 공연실황이 DVD등으로 판매되고 있지 않다. 역사적인 라이브를 비즈니스로 하고 싶지 않았다고. 당시 후지 테레비위성방송인 CS후지에서 두 시간짜리 완전편집본으로 방송했었는데 지금 넷 상으로 남아 있는 영상들은 그 방송을 개인적으로 녹화한 것들이다.

하지만 콘서트 후 일본으로 돌아온 차게아스에게는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앞서의 주간 'Flash'등의 막말에 가까운 비난 외에도 주간 신초(週刊新潮) 등의 우익 언론들은 콘서트 직전 한국여성기금과의 인터뷰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ASKA가 했던 과거에 대한 반성의 내용을 담은 인터뷰 내용과,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 하등의 문제가 없는 앞서의 콘서트 중 한국어 멘트 등을 걸고 넘어지며 '일본인으로서의 자존심과 역사까지 팔아 넘겼는데 콘서트는 대실패'라는 식으로 연일 비난 기사를 쏟아냈다. 한국 언론에서도 이름값 있는 가수가 큰 돈을 들여 한국시장에 도전했지만 대실패, 더 나아가서 꼴좋다, 그것봐라 한국 시장 만만치 않다. 대한민국 가요 만만세 다시는 한국을 무시하지 마라같은 기레기 수준 기사까지 나오는 등 반응이 차가웠다. 공연 중간의 한일 역사에 대한 멘트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반성 없이 두리뭉실 넘어가는 멘트'라고도 욕을 먹었으니 그야말로 사면초가.이건 한일 양국 언론들이 애초부터 서로 짜고 차게아스 죽이기로 작정한거 같다

그러던 중에 소속사였던 '리얼캐스트'가 해산했다. 2000년 5월 야마하에서 새로이 레코드 회사를 설립하면서 '새 레코드 레이블의 얼굴이 되어 달라'라는 이유로 당시 리얼캐스트의 지분을 갖고 있던 야마하에서 수차례 친분을 앞세워 요청해왔지만 도시바EMI로 이적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상황이었던지라 최초에는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데뷔 이래로 야마하에서 담당 스탭을 했던 당시 리얼캐스트 사장 '와타베'가 새 레코드 회사의 임원이 되면서 '거절할 수 없게 되어' 결국은 야마하로 이적하게 된다. 하지만 레코드 회사의 경영의 경험이 없던 야마하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웠던 ASKA는 내한 콘서트 준비로 취소되었던 앨범의 곡 중 미리 만들어둔 곡을 우선 싱글 컷 하기로 한다. 이렇게 발매된 곡이 7월 12일 발표한 'good time' 이었던 것. 팬들로부터의 최초의 반응도 좋았고 니혼 TV의 인기버라이어티였던 '知ってるつもり?!'의 엔딩테마로 쓰였음에도 유통망이 제대로 갖추지 않은 야마하의 유통 미스가 원인이 되며 초판으로 찍은 2만5천장 외에는 음반을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불운의 명곡'이 되어 버렸다. 이에 야마하를 다시 떠나기로 하고 야마하가 대주주로 있던 리얼캐스트를 해체하기로 결정. 그리고 CHAGE와 ASKA가 둘 만의 지분으로 세웠던 리얼캐스트 산하, 일종의 자회사였던 록담 아티스츠로 소속사를 변경했던 것인데...

이때를 놓칠세라 앞서의 'Flash'에서 내한공연의 대실패로 적자를 견디지 못해 회사가 '도산'했다고 기사를 내버린다. 이어 다른 주간지 등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일제히 기사가 나면서 이미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간다. 후일 ASKA가 블로그에서 밝힌 바로는 애시당초에 자선공연이었던 데다가 NEC, JAL이라는 스폰서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금전적으로는 오히려 대성공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새 싱글 'good time'도 속사정이야 어쨌든 결국 최종 판매량은 달랑 2만 5천장이었으니... 이후 '한국 콘서트를 대실패해서 소속사도 망하더니 야마하에서도 쫓겨났다.', '차게아스도 이젠 퇴물이다.'라는 이미지가 붙어버리게 된다.본인들은 무슨 죄냐

그러다가 2019년 8월 25일[23], 공연 19년만에 공식 DVD 발매가 이뤄지면서 모든 공연 실황을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공식 사이트의 소개에서는 양일간 2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것으로 정리되어 있다.

2.7. 쇠퇴기 (2001년~2009년)

2001년 유니버설 뮤직 재팬으로 이적한다. 그룹 명의 표기도 'CHAGE and ASKA'로 변경. 심기일전을 노렸지만 이미 이즈음 세간에서의 차게아스의 이미지는 단 1년만에 '세계적인 반짝가수였지만 퇴물이 된 듀엣' 정도까지 떨어진 상태가 되었다. 당시의 음악계도 우타다 히카루, 하마사키 아유미 등의 세련된 사운드를 바탕으로 한 여성가수의 전성시대였기도 하고 모닝구 무스메, SMAP 등이 연이은 히트곡을 내며 제2의 아이돌 시대를 열고 있던 중이었으니 이미 그들의 음악이 주류에서 활약하기에는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전국콘서트 투어의 규모도 10년만에 홀 단위로 떨어지게 된다. (10월 26일부터 'CHAGE and ASKA CONCERT TOUR 01>>02 NOT AT ALL', 총74공연) 하지만 이 홀 단위의 전국 투어 콘서트에 표를 구하지 못해 항의가 속출, 결국 추가 공연을 아리나 급인 부도칸요코하마 아리나 등에서 급하게 열기도 했고 응? 뭔가 순서가?, 12월 27일 앨범 발매를 수차례 연기해가면서 야심차게 내놓은 앨범 'NOT AT ALL'은 오리콘 챠트 10위에 그쳤지만 이듬해 11월 20일 내놓은 셀프 커버 앨범 'STAMP'는 오리콘 앨범 챠트 1위를 기록하며 아직은, 아직은 건재함을 알리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주로 꾸준히 국내/외의 콘서트를 이어가며 음악활동을 계속한다.

2004년 데뷔 25주년. 8월 25일 싱글 '36度線 -1995夏-(36도선 -1995여름-)'을 발표한다. 원래는 1995년 TV 아사히 '뉴스 스테이션'의 오프닝 테마로 만들었던 멜로디를 9년에 걸쳐 다듬어 만든 곡으로 팝적인 멜로디에 모든 것이 너무나도 빠르게 바뀌어만 가는 현대 일본을 풍자하는 가사를 노래한 차게아스의 후기를 대표하는 수작이다. 여담으로 36도는 도쿄의 위도를 의미한다.

이해 12월 4일 싱글 '僕はMusic(나는 Music)'을 발매, 이후로 다시 한동안 솔로로 활동할 것을 발표한다.

2006년 12월 23일 환경 콘서트 'Point Green Live 2006'에서 다시 차게아스로서의 활동을 재개한다. 이때 라이브장에 당시 수상이었고 이후에 또 수상이 되는 그 X이 와 있던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YAH YAH YAH'때 손을 열심히 흔들었다 카더라

2007년 1월 10일 싱글 'Man and Woman'과 'Here&There'을 동시에 3만장 한정으로 발매하여 각각 오리콘 싱글챠트 2위와 3위를 차지한다[24].

11월 17일 중국 상하이의 上海大舞台에서의 공연을 시작으로 어쿠스틱 라이브 콘서트 투어 'CHAGE and ASKA Concert 2007 alive in live' (총 11회 공연) 를 치른다[25].

2008년 각자의 솔로 활동으로 한 해를 보내던 그들은 결국...

2009년 1월 30일 데뷔 30주년을 맞아 '솔로 활동에 충실하기 위해' CHAGE and ASKA 로서의 활동을 무기한 중지할 것을 발표하였다.

충격과 공포의 2013년 이후부터는 아래 별도의 단락에서(...)

3. 디스코그래피

3.1. 싱글

싱글

발매일

제목

수록앨범

최고순위

판매량

1st

79.08.25

ひとり咲き(혼자 피기)[26]

風舞

24위

178,710장

2nd

80.02.25

流恋情歌(유연정가)

風舞

56위

22,940장

3rd

80.09.25

万里の河(만리의 강)[27]

熱風

6위

537,420장

4th

81.05.25

放浪人(TABIBITO)(방랑인)

黄昏の騎士

30위

54,050장

5th

81.10.25

男と女(남과 여)

黄昏の騎士

28위

90,310장

6th

82.04.25

熱い想い(뜨거운 마음)

熱い想い

51위

38,280장

7th

82.10.25

北風物語(북풍 이야기)

熱い想い

27위

70,870장

8th

83.04.23

マリオネット(마리오네트)[28]

IV

38위

66,280장

9th

83.09.28

華やかに傷ついて(화려하게 상처받고)

INSIDE

46위

22,500장

10th

84.02.22

MOON LIGHT BLUES

INSIDE

52위

29,700장

11th

84.10.25

標的 (ターゲット)(표적(타겟))

Z=One

38위

32,310장

12th

85.02.25

誘惑のベルが鳴る(유혹의 벨이 울린다)[29]

Z=One

44위

13,800장

13th

85.02.25

オンリー・ロンリー(온리 론리)

Z=One

42위

17,990장

14th

86.02.05

モーニングムーン(모닝 문)[30]

TURNING POINT

11위

161,230장

15th

86.05.21

黄昏を待たずに(황혼을 기다리지 않고)

MIX BLOOD

17위

45,070장

16th

86.08.21

Count Down[31]

SUPER BEST

20위

37,470장

17th

86.11.21

指環が泣いた(반지가 울었다)

Mr. ASIA

18위

27,970장

18th

87.04.21

SAILOR MAN[32]

Mr. ASIA

13위

66,510장

19th

87.10.05

ロマンシングヤード(로맨싱 야드)[33]

Mr. ASIA

23위

18,450장

20th

88.02.05

恋人はワイン色(연인은 와인색)

RHAPSODY

16위

61,540장

21st

88.05.21

ラプソディ(랩소디)

RHAPSODY[34]

22위

30,110장

22nd

88.10.25

Trip

ENERGY

14위

25,770장

23rd

89.03.08

WALK[35]

PRIDE

20위

21,540장

24th

89.06.21

LOVE SONG

PRIDE

20위

31,780장

25th

90.06.27

DO YA DO[36]

SEE YA

10위

67,210장

26th

91.01.30

太陽と埃の中で(태양과 티끌의 사이에서)

SEE YA

3위

502,720장

27th

91.07.24

SAY YES[37]

TREE

1위

2,822,450장

28th

91.11.21

僕はこの瞳で嘘をつく(나는 이 눈으로 거짓말을 한다)

TREE

1위

810,670장

-

92.03.25

WALK(재발매)

-

1위

369,040장

-

92.03.25

LOVE SONG(재발매)

-

3위

499,250장

29th

92.07.01

if

GUYS

1위

1,083,190장

30th

92.10.10

no no darlin'

GUYS

2위

675,140장

31st

93.03.03

YAH YAH YAH/夢の番人(꿈의 파수꾼)

RED HILL

1위

2,418,740장

32nd

93.08.20

Sons and Daughters ~それより僕が伝えたいのは[38] [39]

RED HILL

1위

798,810장

33rd

93.11.19

You are free

RED HILL

5위

388,680장

34th

93.11.19

なぜに君は帰らない(왜 너는 돌아오지 않는가)

RED HILL

4위

427,040장

35th

94.08.03

HEART/NATURAL/On Your Mark[40]

Code Name.1 Brother Sun

1위

1,142,700장

36th

94.11.16

めぐり逢い(해후)

Code Name.1 Brother Sun

1위

1,252,280장

37th

95.05.10

Something There[41]

Code Name.1 Brother Sun

2위

569,230장

38th

96.02.19

river

CODE NAME.2 SISTER MOON

2위

389,430장

39th

99.03.10

この愛のために(이 사랑을 위하여)/VISION

NO DOUBT

3위

121,490장

40th

99.06.09

群れ(무리)

NO DOUBT

7위

69,950장

41st

01.04.25

ロケットの樹の下で(로켓 나무의 아래에서)[42]

NOT AT ALL

8위

78,620장

42nd

01.08.08

パラシュートの部屋で(낙하산의 방에서)

NOT AT ALL

6위

62,380장

43rd

01.09.19

C-46[43]

NOT AT ALL

6위

57,200장

44th

01.11.28

夢の飛礫(꿈 덩이)[44]

NOT AT ALL

9위

42,720장

-

03.09.10

デェラ・シエラ・ム(데라 시에라 무)[45]

-

3위

52,248장

-

04.04.07

SEAMLESS SINGLES[46]

-

13위

18,691장

45th

04.08.25

36度線 -1995夏-(36도선 -1995여름-)

DOUBLE

6위

42,578장

46th

04.12.08

僕はMusic(나는 Music)

DOUBLE

7위

34,948장

47th

07.01.10

Man and Woman[47]

DOUBLE

2위

22,940장

48th

07.01.10

Here & There[48]

DOUBLE

3위

21,473장

3.2. 앨범

* 라이브 앨범은 제외하였음.

앨범

발매일

제목

최고순위

비고

1st

1980년4월25일

風舞(풍무)

11위

[49]

2nd

1981년2월25일

熱風(열풍)

1위

[50]

3rd

1982년2월14일

黄昏の騎士(황혼의 기사)

5위

[51]

-

1982년5월25일

熱い想い(뜨거운 마음)

14위

[52]

(Best)

1982년12월21일

1979-1982 BEST

60위

[53]

4th

1983년6월29일

CHAGE&ASUKA IV -21世紀-(21세기)

5위

[54]

5th

1984년3월25일

INSIDE

14위

-

6th

1985년1월25일

Z=One

9위

-

Best 1st

1985년12월5일

Standing Ovation

23위

-

7th

1986년4월21일

TURNING POINT

4위

포니캐년 이적 후 첫 앨범

8th

1986년9월21일

MIX BLOOD

3위

[55]

-

1986년12월5일

Snow Mail

18위

[56]

Best 2nd

1987년3월5일

SUPER BEST

11위

-

9th

1987년5월21일

Mr. ASIA

4위

-

10th

1988년3월5일

RHAPSODY

4위

[57]

11th

1988년11월21일

ENERGY

6위

-

12th

1989년8월25일

PRIDE

1위

[58]

Best 3rd

1990년2월7일

THE STORY of BALLAD

2위

[59]

13th

1990년8월29일

SEE YA

4위

최초의 전곡 영국 녹음 앨범

14th

1991년10월10일

TREE

1위

더블 밀리언

Best 4th

1992년3월25일

SUPER BEST II

1위

[60]

15th

1992년11월7일

GUYS

1위

밀리언

16th

1993년10월10일

RED HILL

1위

밀리언

Best 5th

1994년8월25일

Yin&Yang

1위

[61]

Best 6th

1994년12월16일

SUPER BEST BOX SINGLE HISTORY 1979-1994 AND Snow Mail

1위

[62]

17th

1995년6월28일

Code Name.1 Brother Sun

1위

-

18th

1996년4월22일

CODE NAME.2 SISTER MOON

2위

-

19th

1999년8월25일

NO DOUBT

1위

최초의 셀프 프로듀스 앨범

Best 7th

1999년12월16일

CHAGE&ASKA VERY BEST ROLL OVER 20TH

2위

-

20th

2001년12월27일

NOT AT ALL

10위

유니버설 이적 후 첫 앨범

-

2002년11월20일

STAMP

1위

최초의 셀프 커버 앨범

Best 8th

2004년11월3일

THE STORY of BALLAD II

22위

[63]

21st

2007년1월24일

DOUBLE

4위

[64]

Best 9th

2009년2월4일

CHAGE and ASKA VERY BEST NOTHING BUT C&A

2위

[65]

4. 멤버

4.1. Chage

본명은 시바타 슈지(柴田秀之). 공식적인 이름은 チャゲ (1979년-1989년), CHAGE (1989년-2008년), Chage (2009년 1월 30일 차게아스 해체 발표 후-현재)로 바뀌고 있다. 대문자의 CHAGE는 CHAGE&ASKA로 활동할 때만 사용한다고는 하는데 간혹 음악 방송에 출연할 때보면 그냥 그건 컨셉이고 이것저것 다 섞어 쓰고 있는 듯 하다.어차피 읽는건 다 '차게'니까...

4.1.1. 출생부터 데뷔까지

1958년 1월 6일, 일본 후쿠오카현 코쿠라시 (현재는 키타큐슈시)에서 일본요리집 2남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71년 후쿠오카시로 전학. 고등학교 때부터 음악을 시작, 친구와 더불어 아마츄어 밴드를 만들어 실력을 키우게 된다. 고등학교 3학년때 홋카이도에서 전학와 다른 사람들과 밴드를 만들었던 ASKA와는 라이벌 관계였다고 한다. 점심 시간에 교실에서 튤립의 노래를 연습하고 있던 차에 그 전까지 전학생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던 ASKA가 갑자기 들어와 '그 곡 네가 만들었냐? 대단한걸.'이라고 해 챠게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다'고 답했다고 한다. ASKA는 당시 '이...이녀석 천잰데?'라고 생각했었다고.[66]

1978년 대학 재학중 이미 출장 경험이 있던 ASKA에게 참가를 권유받고 '제15회 야마하포퓰러송 콘테스트' 후쿠오카 대회에 참가하여 대상을 획득한다[67]. 그때 사용했던 이름이 바로 チャゲ(차게).

일반적으로 본명에서 따와서 예명을 만드는 것과는 달리 본명 '시바타 슈지' 어디에서도 이 괴랄한 예명의 유래를 찾기가 어려운데 어? Linux 커맨드 아니었어??

1. 고교시절 사귀던 여자친구가 '절대 시바타로는 안된다'며 지어주었고 차게는 '가수로 데뷔하게 되면 그 이름을 계속 쓰겠다'고 약속해서 지금까지 사용해 왔다는 방송[68]

2. 중학교 시절 축구부였던 차게는 헤딩한 부분의 머리가 탈모가 와서 별명이 ハゲ(하게, 대머리)였는데 학창시절 학교축제에서 공연전 배부한 팜플렛에 본명의 뒤에 「(HAGE)」라고 쓰여 있었지만 그만 뒷쪽의 괄호가 인쇄가 잘못되며 「(HAGE」가 되었다고 설명하는 방송도 있다[69].

3. 그냥 중학교 시절부터 탈모가 있어 별명이 그냥 '대머리'였는데 그냥 HAGE 하면 민망하니까 C를 붙였을 수도...이후 30대부터도 모자를 어디서든 쓰기 시작한 걸 보면...

4.1.2. 데뷔 이후

유닛으로 데뷔한 이후에 ASKA의 엄청난 목창력가창력에 밀려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던 그가 갑자기 주목받게 된 것은 1984년 이시카와 유코와의 듀엣곡 'ふたりの愛ランド'(둘만의 사랑랜드[70])가 대히트를 치면서부터.

원래 JAL오키나와 캠페인 송으로 발표되었는데 지금까지도 여름하면 떠오르는 노래의 순위 안에 들어갈 정도로 성공하면서부터 차게에게 노무라 카츠야'음(陰)의 실력자'의 이미지가 붙게 된다. 여담으로 가장 유명한 소절이 '나츠나츠나츠나츠 코코나츠(ココ夏, 여긴 여름)'인데 이는 코코넛과의 발음의 유사성을 노린 부분이지만 정작 오키나와에는 코코넛은 없다는게 함정. 그래서 원래 가사는 코코넛이었다가 지금의 '여긴 여름'으로 바뀌었다[71].

이에 힘입어 데뷔 10주년을 맞아 '자신만의 음악을 보여주고 싶다.'라는 생각에 チャゲ&飛鳥 에서의 차게와는 다른 음악적 색깔을 보여주는 밴드 MULTIMAX를 무라카미 케이스케, 아사이 히로미와 함께 1989년 결성한다. 밴드명은 원래 차게는 자신의 소지품에 동그라미를 치고 본인의 예명인 차게의 앞글자인 치(ち)를 써두는 버릇이 있어 그것을 보고 처음에는 마루(일본어로 동그라미) + 치 = 마루치 (multi의 일본어식 발음)이었다가 ASKA의 권유로 뒤에 MAX를 붙이게 된 것이 그 유래. '음악으로 놀자'라는 원칙을 세우고 기존의 차게아스에서와는 다른 파격적인 음악적 실험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1991년까지는 CHAGE'S SUPER BAND MULTIMAX, 이후로는 CHAGE PRESENTS MULTIMAX가 정식명칭이 되었다.

1997년부터 차게아스로서의 활동을 쉬고 솔로활동에 집중하게 되면서 1998년에는 첫 오리지널 싱글인 'トウキョータワー(도쿄 타워)'와 첫 솔로앨범인 '2nd'를 발표하였고 이후로도 차게아스 듀오로의 활동 외에도 개인 라이브 공연 및 음반을 꾸준히 계속해서 2008년에는 두번째 앨범 'アイシテル', 2010년에는 앨범 '&C'를 발표하였다. 2014년의 '그 사건' 이후로도 꾸준히 솔로 활동 중이며 2015년 9월 16일에는 미니앨범 'hurray!'를 발표하였다.

4.1.3. 음악

차게아스의 듀오로 활동할 때에는 ASKA가 워낙에 드라마틱한 창법에 넓은 음역대를 커버하고 있기 때문에 주로 고음부의 화음을 넣는 일이 많아 차게아스의 곡만 듣고 있을 때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싱글이나 MULTIMAX의 곡에서는 특유의 카랑카랑하면서 맑은 고음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1984년 이시카와 유코와의 '둘만의 사랑랜드'를 만들기 위해 자택에서 작곡 중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이웃에서 '저 집에서 여성의 비명소리가 들린다'라는(...) 신고가 들어와서 경찰이 출동한 바 있다는 도시전설도 전해지고 있을 정도. 게다가 나이가 들수록 음역대가 더 넓어지고 있다(...) 뭐긴 뭐야 그동안은 ASKA가 하드캐리했으니 아직 목이 싱싱한게지 2010년부터는 차게아스 때의 특유의 뽕필고음에서의 꺾기를 최대한 자제하고 담백하게, 중저음에서의 톤과 바이브레이션에 집중하면서 보컬리스트로 나이 50에한단계 더 발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작사/작곡에 있어서는 ASKA가 MULTIMAX의 데뷔곡인 'SOMEDAY'를 듣고는 '질투하고 있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갑자기 영감이 떠오르면 막힘없이 스슥 써내려가는 타입이라고 한다.

의외의 인물들에게 작곡을 해준 경우가 많은데 톤네루즈, 아카시야 산마 등의 게닌이나 사카이 노리코, 히카루GENJI 등의 아이돌까지 폭넓게 곡을 제공하고 있다. 넓은 차게의 인맥을 엿볼 수 있는 부분.

단독 콘서트 등에서도 최대한 차게아스의 곡을 '곡에 대한 이미지가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부르지 않는 ASKA에 비해 차게아스의 곡을 셀프커버하는 일이 많은 것도 또한 둘의 대조적인 특징.

4.1.4. 인물

  • 선글라스와 모자(혹은 반다나), 그리고 콧수염과 턱수염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 우리나라의 가수 박상민이 비슷한 컨셉을 갖고 있다. 박상민 항목을 보면 CHAGE와 박상민 본인의 프로필이 누가누구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로 몹시 흡사하다. 차게 본인도 이를 잘 알고 있어 도쿄의 한 초밥집에서 우연히 둘이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일하던 아주머니가 놀라서 술을 쏟을 뻔 했다고 하는 일화를 자백한 바 있다. 선글라스를 벗으면 더 비슷하다고 한다(...) 박상민의 노래 중에서는 '해바라기'를 좋아한다고. 박상민의 경우도 LOVE SONG, DO YA DO 등 차게 앤 아스카의 몇몇 곡들을 리메이크했던 적이 있다. 양쪽 모두 서로 매우 닮았다는 점을 잘 의식하고 있는 듯. 선글라스를 최초로 착용한 것은 1984년 10월 싱글 '標的(ターゲット)' (표적(타겟))으로 TBS 테레비의 '더 베스트텐'에 출연할 때였고 이후 본격적으로 착용하기 시작한 것은 1985년 포니캐년으로 이적하면서부터이다. 당시에는 머리를 주로 올백으로 넘기거나 하는 헤어스타일이 많았지만 1990년, 32세 때부터 모자나 반다나로 머리카락을 가리기 시작한다. 왜? cHAGE(...) 왠지 급 짠해진다. 최근에는 반다나보다는 베레모중절모 등의 모자를 거의 대부분 쓰고 있다. 이후 공식적인 자리에서 모자나 반다나 없이 머리를 보이는 일은 전혀 없었...지만.....

이름과 설명없이 커뮤니티에 올리면 우리나라에선 거의 8~90%는 박상민이라고 답을 할 정도의 높은 싱크로율 아니 그런데 대다수의 우리나라 국민들이 차게의 존재를 알기는 할까

  • 비틀스의 엄청난 팬이다. 그래서 그의 라이브에 동행하는 어쿠스틱 밴드의 이름을 '차게틀즈'로 지었을 정도.
  • 상당한 달변가이다. 1985년 아카시야 산마의 산마노만마(さんまのまんま)에 출연했을때는 그 말 잘하는 산마조차 '너 정말 잘도 엄청 말하는구나~', (차게쪽을 손가락으로 기리키며)'이쪽만 보면 마치 우레테루(잘 나가는) 게닌이야'라고 할 정도로 끊임없이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화술이 좋다. 상대적으로 ASKA가 해도해도 너무할 정도로 말을 못하다보니 차게만 죽어라고 말을 하게 된 것도 있다(...) 이 입담을 살려 1989년부터 메인으로 라디오를 진행하였고 1998년에는 공중파TV에서도 칸무리 토크프로그램을 후지 테레비에서 진행하기도 하였다. 마츠우라 아야와 WOWOW에서 음악 관련 토크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도 있다. 2016년 현재에도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중하고는 있지만 이제 이분도 나이가 있으셔서선지 정말 많이 점잖아지셨다..
  • 가벼운 밝은 캐릭터와 친근한 캐릭터에 라디오 진행 중에는 적절한 하지만 의외로 생각보다 많은 시모네타까지 불사하는 유들유들하고 외향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ASKA에 의하면 '상당히 낯가림이 심하고 숫기가 없지만 아마도 세상에서 자신에게 어떤 모습을 원하는지를 알고 그에 맞춰 자신의 캐릭터를 만드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라고 한다.
  • 라이브 곡 사이의 MC에서도 말이 너무 많아 토크 중 ASKA가 퇴장한 적도 있다(...) 나중에 차게가 ASKA의 그러한 행동에 대해 화를 냈다는 얘기를 ASKA가 듣고는 '이 자식 토크에 진심으로 걸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감탄했다.'라고 했을 정도다.
  • 이젠 팬들의 주연령대도 많이 높아지다보니 이전에는 주로 엔카 가수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디너쇼를 2014년 12월 21일 개최한다. 여기서야 말이 길어진다고 중간에 퇴장할 그룹멤버도 없으니 mc가 길어지며 예정된 디너 1시간, 쇼 1시간의 예정시간을 훌쩍 넘겨버리게 되었지만 상당히 재미있어서 불만은 나오지 않았다고. 호평에 힘입어 12월 28일 원래는 계획에 없던 송년디너쇼를 급조했는데 역시 전석 매진에 크게 호평을 받았다. 이후 2015년에도 티켓을 발매하자마자 완매하는등 크게 호평을 받았다. 당분간은 계속 하게 될 듯 하다.
  • 매해 정규적으로 테마를 정해 개최하는 라이브 'Chageの茶会'[72] 외에도 중소도시 및 콘서트가 잘 열리지 않는 곳에 '찾아가는 라이브'를 지향하는 'Chageの細道' 투어를 하기도 한다.
  • 환경문제에 관심이 있어 2010년에는 '숲에 은혜를 갚는 콘서트'를 열기도 하고 '지구 사랑 박람회'에 출품하기도 하는 등 환경에 관련된 이벤트에 자주 참석하는 편.
  • 사진과 영화에도 재능을 보여 사진집과 포토북을 한권씩 출판한 바 있으며 2005년 나고야 엑스포에서는 SHORT FILM FESTIVAL에 단편영화 'missing pages'를 출품하였으며[73] 이후에도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하기도 하였다.

4.1.5. 가정사와 스캔들

  • 1986년 소꿉친구였던 일반인 여성과 결혼하지만 2000년에 이혼하였다. 둘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 2001년 재혼 소식이 들렸는데 상대를 공개안하는 바람에 이전에 듀엣을 했던 죄(?)로 이시카와 유코라는 소문이 한때 돌기도 했다.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부인은 101번째 프로포즈에도 출연했었으며 당시 ASKA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Chage가 진행하던 코너의 어시스트를 맡고 있던 콘도 미에코(近藤美江子)로 알려졌다[74]. 결혼식은 극비로 진행되었고 아마미 유키 등의 몇몇 지인들만을 초대했었다고.
  • 2008년 11월 28일 라이브 콘서트 중에 장남을 무사히 출산하였음을 발표하였다. 애칭은 'コチャゲ'(코차게 = '코'(子, 아이) + '차게'). 그야말로 아들바보인데 늦게 얻은 아들이어서인지 아들을 상당히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고 하며 트위터나 블로그 등에서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모습을 자주 확인할 수 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뭐 그럴 수도 있다 수준이었는데....

  • 스즈카와 아야코(鈴川絇子)는 1991년 3월 25일 출생한 치바현 출신, 도쿄 NSC 16기생으로 동기인 이즈타 나츠미와 'F2'라는 콤비를 이뤄 활동했던 여성 게닌이다. 2014년 당시 임신 5개월이었음에도 '너무 귀여운 여자 게닌 결정전'에서 1위를 치지할 정도로 큰 키에 미모를 자랑하는 나름 지명도가 있던 게닌이었는데... 2013년 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뜬금없이 '실은 아버지가 뮤지션으로 지금도 (본인은) 숨겨둔 아이(隠し子)로 지내고 있다.'라는 발언을 한다. 그리고 2013년 6월 19일 본인 블로그에 올린 글이...

(전략) 뭐 농담이긴 하지만요

자주 듣는 '이 이야기는 픽션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등은 실재하는 것과는 일절 관계 없습니다.'라고 하는 거에요.

농담이라는 전제 하에 읽어주세요!

저, 친부에게 숨겨둔 아이같은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私、実の父親に隠し子的な扱いをされております。)

이것 자체는 TV에서도 몇번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 부친은 뮤지션인, 모 ㅊ○게& (その父親というのはミュージシャンの、某チ○ゲ&)

출처 : 나를 숨겨둔 아이 취급하는 아버지의 이야기

  • 최초에는 유료블로그로 운영되었던 글인지라 유료회원을 늘리기 위한 낚시성 화제몰이가 아닌가하는 의견이 더 많았지만 그러기에는 (물론 글 머리에 농담이라는 표현을 붙이기는 했어도) 내용이 내용이고 게다가 누가봐도 차게라는 생각이 들도록 올린 글이라 당연히 한바탕 소동이 났다. 게다가 정작 글을 올린 본인은 2016년 현재까지도 아직 그 원본 글을 지우지 않고 있다(!!!). 차게 쪽에서는 전혀, 아무 대응이 없어 스즈카와 아야코가 차게의 숨겨둔 딸이 아니겠는가 하는 소문만 무성한 상태....였다가 곧 더 충격적인 '그 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그대로 묻혀가는 중[75]

4.1.6. 디스코그래피

ChageMULTIMAX의 디스코그래피만 다룹니다.

4.1.6.1. Chage 싱글

발매일

제목

수록 앨범

비고

1984.4.21

ふたりの愛ランド/渚の誓い(둘만의 사랑랜드/해변의 다짐)

-

이시카와 유코와 듀엣곡, 오리콘 주간 3위

1998.9.30

トウキョータワー(도쿄 타워)/UNDO

2nd

첫 오리지널 싱글

2008.9.10

waltz/BOYS LIFE/花暦

アイシテル

[76]

2010.10.6

まわせ大きな地球儀(돌려라 커다란 지구의)/
無敵の海へ The Fishes (무적의 바다에)

&C

'2010 지구사랑 박람회' 헌정곡

2011.11.2

TOKYO MOON/遠くへ行きたい(멀리 가고 싶어)

-

-

2012.4.21

GO! GO! GO!

-

최초의 디지털 다운로드 전용 음원

2014.4.10

永い一日(긴 하루)

-

온/오프라인 동시 발매

2015.7.15

天使がくれたハンマー(천사가 준 해머)

hurray!

-

2017.5.3

たった一度の人生ならば/愛すべきばかちんたちへ

-

4.1.6.2. Chage 앨범

발매일

제목

비고

1998.6.10

PROLOGUE

[77]

1998.10.21

2nd

2001년 4월 18일에 재발매

2008.10.8

アイシテル(사랑하고 있어)

[78]

2009.3.25

Many Happy Returns

[79]

2010.11.3

&C

-

2015.9.16

hurray!

-

2016.8.10

Another love song

-

2019.8.7

feedback

-

4.1.6.3. MULTIMAX 싱글

발매일

제목

수록 앨범

비고

1989.10.21

SOME DAY

HEAVEN

MULTIMAX의 데뷔 싱글

1991.4.12

WINDY ROAD

STILL

-

1991.11.6

LOVE

Human

-

1992.5.1

遠い街から(먼 거리에서)

Human

-

1993.4.7

勇気の言葉(용기란 단어)

RE-BIRTH

-

1994.10.5

愛の空で(사랑하는 하늘에서)

Well, Well, Well

-

1996.11.7

どうだい(어때)

Oki Doki!

-

4.1.6.4. MULTIMAX 앨범

발매일

제목

비고

1989.11.29

HEAVEN

-

1991.4.12

STILL

2nd 싱글 WINDY ROAD와 동시발매되어서인지 표지가 싱글과 똑같다.

1992.5.20

Human

-

1993.6.9

RE-BIRTH

[80]

1994.11.6

Well, Well, Well

-

1996.12.4

Oki doki!

[81]

  • 여담으로 모든 MULTIMAX의 음반에는 'MOFU'라는 곡이 넘버링만 바뀌며 들어가 있다. MULTIMAX 팬들에게는 일종의 국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남바 국가가 '청춘의 랩타임'인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라이브 공연의 시작도 대부분 'MOFU'를 투어 버젼으로 편곡한 곡으로 시작한다.

4.2. ASKA

한때는 50대 일본 여성들의 왕자님이었는데...

본명은 미야자키 시게아키(宮﨑 重明). 공식적인 이름은 가수로 활동할때는 1990년까지 아스카 료(飛鳥 涼), 이후 ASKA[82], 작곡/작사가로 활동할 때는 2001년까지 아스카 료, 이후 ASKA[83]. Chage와는 다르게 이쪽은 혼용되거나 이것저것 쓰이는 일은 거의 없다. 음악방송 등에서 작사작곡가로 이름이 올라올 때도 잘 지켜지는 편. 참고로 차게&아스카의 팬들 중 80%이상이 ASKA의 팬이라고 한다. 차게 지못미

참고로 이분 역시 본명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예명을 쓰고 있다. 본인이 후지 테레비 인기음악방송인 '밤의 힛트스타지오'에서 밝힌 바로는 대학시절 짝사랑하던 여성이 팬이었던 후쿠오카의 라디오 DJ인 아스카(あすか)에서 따온 것이라고. 당시 전혀 그 여성의 마음을 얻지 못해 고민하던 중 친구가 '너도 이름을 아스카라고 해서 그 DJ에 대항해보면 어떠냐'고 제안받아 예명을 본인도 '아스카(飛鳥)'로 했다고 한다. ?? 그럼 료는?? [84] 최초에는 아스카 료(飛鳥 良)였는데 글자가 더 멋져 보인다는 이유로 여자사람친구의 권유로 료(涼)로 바꾸었다고 아 그러니까 료는 어디서 왔냐고

4.2.1. 출생부터 데뷔까지

1958년 2월 24일, 일본 후쿠오카현, 치쿠시군(현재는 오오노죠(大野城)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자위대 군관이었기 때문에 어렸을때부터 익히게 된 검도는 3단 가격증을 갖고 있다. 중학교 1학년때 아버지의 근무지 변경으로 홋카이도 치토세로 이사하게 된다.

중학교 졸업 당시 키가 148cm의 단신이었지만 키는 고등학교 들어오자마자 부쩍 커져 홋카이도 대표로 검도 인터하이까지 출전한 바 있다.

이후 다시 아버지를 따라 후쿠오카로 이사오게 되고 검도부의 고문선생님과 사이가 나빠져 검도부를 퇴부하게 되는데 시간이 남아 돌자 좋아하던 음악을 파고 들게 되었다고 한다.

1976년 대학교 1학년에 '葡蘭湖'(부랑코)라는 7인조 밴드를 결성하여 '제12회 야마하포퓰러송 콘테스트'(약칭으로 팝콘)에 참가했고 이듬해 13회에는 본명으로 솔로 참가하였으나 두번 모두 낙선.

1978년에 동창생인 시바타 슈지를 꼬셔서 15회 콘테스트 후쿠오카 대회에는 각각 참가했는데 꼬드김을 당한 시바타는 '차게'라는 이름으로 대상을 탔고 정작 꼬신 ASKA는 최우수가창상을 받는다.

4.2.2. 데뷔 이후

1983년 이전 오오토모 유코(大友裕子)가 불렀던 곡을 작사를 새로 하여 가츠라기 유키(葛城ユキ)가 다시 부른 'ボヘミアン'(보헤미안)이 히트하면서 본격적으로 다른 아티스트에게 작사/작곡을 해주기 시작한다.

1987년 포니캐년으로 이적하면서부터는 작곡/작사의 폭을 더 넓히며 음악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된다.

이때의 작사/작곡가로서의 가장 큰 히트곡이라면 역시 히카루GENJI의 데뷔곡인 'STAR LIGHT'[85], 두번째 싱글 'ガラスの十代'(유리의 십대), 그리고 그들의 가장 큰 히트곡이면서 일본레코드대상을 안겨준 'パラダイス銀河'(파라다이스 은하) 의 연속된 세 싱글이라고 할 수 있다.

2004년 차게아스 데뷔 25주년 기념 'チャゲ&飛鳥 熱風コンサート'에서 'パラダイス銀河'를 처음으로 커버한 모습.(1:32초부터)

ASKA가 光GENJI에게 작사/작곡해 주었던 전곡 모음

1987년 첫 솔로 싱글 'MY Mr.LONELY HEART'를 발표하고 1988에는 첫 앨범 'SCENE'을 발표한다.

1989년에는 영국 런던에 집을 마련하여 이듬해 6월까지 런던에서 거주하며 음악활동을 주로 런던에서 하게 되며 2001년까지 작사/작곡 및 녹음은 주로 런던에서 하게 된다. 당시 영국 거주를 시작하면서 '飛鳥'를 ASUKA라고 적었는데 주변 영국인 친구들이 '아슈카'라고 읽는것을 보고는 'ASKA'로 예명을 고치고 이에 따라 차게아스의 유닛명 역시 'CHAGE&ASUKA'에서 'CHAGE&ASKA'로 바뀌게 되었다.

1991년 3월 6일 싱글 'はじまりはいつも雨'(시작은 언제나 비)를 발매한다. 원래의 싱글 예정곡은 나카모리 아키나에게 제공되었던 '予感'(예감)이라는 곡의 셀프커버가 될 계획이었는데 파나소닉의 CM송을 위해 부른 앨범버젼인 이 곡이 본디 싱글 컷의 예정이 없었지만 CM 방송 직후 곡의 문의가 엄청나게 밀려들며 부랴부랴 계획을 변경, 싱글 컷을 한 것이 그야말로 롱히트를 치며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게 된다[86]. 이 인기에 힘입어 싱글 발표 후에 도호의 영화 'おいしい結婚(맛있는 결혼)'의 주제가로 삽입되기도 하였고, 이후 여명, 소년대히가시야마 노리유키 등이 커버하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솔로가수 ASKA를 대표하는 곡. 이와 함께 발표된 베스트 앨범 'SCENE II'역시 밀리언셀러를 찍으며 그야말로 전성기를 구가한다.

1995년 도시바EMI로 레코드 레벨을 옮기고 싱글 '晴天を誉めるなら夕暮れを待て'(맑은 날을 칭찬하려면 해질녘을 기다려)와 앨범 'NEVER END' 모두 오리콘 차트 1위를 기록한다.

1996년 코단샤에서 발행하는 잡지 'Views'와의 분쟁이 있었다. 당시 두번째의 아시아 투어도 성공하고 해외 아티스트들이 ASKA의 노래를 커버한 헌정 앨범 'one voice THE SONGS OF CHAGE&ASKA'가 발매되는 등 해외활동의 폭을 넓혀가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Views 와의 인터뷰 후 기사제목이 'ASKA 고백, 일본에서는 모든것을 다 이뤘다. 목표는 아시아, 그리고 세계다.'(飛鳥涼激白、日本ではすべてやり尽くした。めざすはアジア、そして世界だ)로, 실제 인터뷰 내용과 기사 내용이 다른 것에 대해 ASKA 측은 이례적으로 전국판 아사히 신문에 '경고문'을 싣게 된다. 그러자 Views 측도 ASKA의 경고문을 '망언'으로 규정하는 내용을 긴급게재하는 등 사태는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결국은 ASKA, Views 양측 다 이후 큰 문제제기 없이 사태는 그냥저냥 해결되는 모양새를 취했고 ASKA와 언론 간의 관계는 이때부터 크게 악화되게 된다.[87]

이후로도 차게아스 듀오로의 활동 외에도 개인 라이브 공연 및 아시아 투어 활동, 음반 활동도 꾸준히 계속해서 1997년 앨범 'ONE'을, 1988년에는 앨범 'kicks'를 발표하였고 이후 라이브 무대 위주의 활동을 진행하게 된다.

2005년 7년만의 정규앨범인 'SCENEIII'를 발표하였고 2009년 각자의 솔로활동을 위해 차게아스를 해산한 이후로도 왕성한 라이브 활동을 계속한다.

2011년 도호쿠 대지진의 피해자돕기 모금을 위한 흘러간 명곡을 다시 커버한 'いま歌う'(지금 부르다) 시리즈가 iTunes Store를 통해 한정발매되기도 하였다.

2012년 다시 7년만의 정규앨범 'SCRAMBLE'을 발표하였다.

4.2.2.1. 마약 스캔들

2009년 해체 후 각자간의 솔로활동에 집중하던 차게아스는 2013년 새해 첫날 차게아스의 부활을 선언하고 8월에 부활 기념 콘서트를 개최할 것을 발표하였다.

차게아스의 팬들은 당연히 일제히 축제 분위기. 그리고 다시 부활하게 된 이유로는 ASKA의 딸 카오루가 마쓰다의 CM송을 부르기도 하는 등 연예계 활동을 시작하자 도움을 주기 위해 결심한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측하기도 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차게아스의 행보는 순풍에 돛을 달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즈음부터(더 정확히는 2011년 말부터) '주간 문춘[88] ', '주간 신초'등의 주간지 위주로 '거물 아티스트 A가 마약을 하고 있다'라는 찌라시성 기사가 돌기 시작했다. 연예계에 대해 조금의 상식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다들 알겠지만 워낙에 이런 류의 허황된 기사를 많이 써제끼던 동네라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겨왔었지만 2013년 경부터는 한층 더 자세해져서, 앞서의 반복된 두루뭉술한 기사 대신에 '국민적 히트곡을 낸 인기 그룹 출신의 거물 아티스트 A'라는 식으로 점점 더 노골적으로 기사가 나기 시작한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연예 소속사에서 강력한 대응이 나오는 것이 일반적인데, ASKA측은 전혀 대응을 하지 않았다.

동년 5월 11일 ASKA가 NHK의 'SONGS'에 출연하였다[89].

동년 6월 11일 ASKA가 의사로부터 일과성 뇌허혈증을 진단받았음을 발표하고 부활 기념 콘서트의 연기를 발표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상당히 우호적이었던 댓글들을 지금도 발견할 수 있다.

2013년 6월 15일 본인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부활 기념 콘서트의 연기를 발표하는 CHAGE.

이때까지만 해도 이 사건은 차게아스 본인들 입장에서 그냥 아무렇지않게 흘러가는듯한 분위기였으나...

2013년 7월 24일 '도쿄 스포츠' 제1면에 거물급 가수 X가 약물중독이라는 특종이 실린다.

기사에 따르면 X는 초거물로

  • 전국구의 지명도를 갖고 열광적인 팬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 이름이 밝혀지면 연예계뿐만 아니라 일본 전체가 충격에 빠질 정도
  • 초인기 유닛에서 활약, 밀리온 히트 연발, 드라마 주제가 등 다수의 히트곡
  • 작사, 작곡도 하고 있으며 솔로로도 활동
  • 유닛 내에서 의견충돌은 있었지만 정말로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다.
  • 다른 미디어 들도 이 '대형 스캔들'의 취재에 열을 올리고 있다.
  • 약물 사용의 증거 영상도 있어 반사회세력[90]으로부터 협박을 받고 있다.
  • 체포는 초읽기

라는 내용과 더불어 실루엣까지 나왔다(...). 초기에는 일본 네티즌들 사이에서 호테이 토모야스같은 가수들이 용의선상에 거론되었지만 나중에 네티즌수사대에서는 이런 류의 기사에 항상 나오던 '홍백에도 출전한'이라는 구절이 빠져 있음을 근거로 ASKA라고 확신하고 있었다[91]. 어? 그럼 B'z미스터 칠드런은?? 실루엣 때문에 그냥 넘어간듯

이런 좋은 떡밥을 절대 놓칠리가 없는 것이 바로 일본의 주간지들. 8월 6일, 7일에 걸쳐 'Flash'와 '주간 문춘' 등의 주간지들이 일제히 실명으로 된 기사를 싣기 시작한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역시

기사 제목을 아예 'シャブ[92]&飛鳥'(일본어 발음으로 샤부 앤 아스카)라고 뽑은 주간문춘. 약을 흡입하는 영상 뿐 아니라 약에 취해 검열삭제를 하는 동영상까지 있다고 폭로하였고 이것을 빌미로 한 야쿠자, 그 중에서도 일본 내에 최대의 폭력조직인 야마구치구미가 관련된 협박에 대해 ASKA는 '신고 하려면 해라. 그 정도는 해야 이 약을 끊을 수 있다.'라고 했다고 기사를 실어 버렸다. 이건 단순히 배째라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마약 흡입을 시인한 거 아닌가? 이런 상황에 거의 쐐기를 박는 기사가 나오게 된 것.[93]

이러자 이런 류의 특종이라면 절대 질 수 없는 스포츠신문들이 이번에는 8월 9일,지난 6월 라이브가 연기된 것이 ASKA의 약물중독을 놓고 CHAGE와 주먹다짐까지 벌이며 일대난투를 벌였었던 것이 원인이었음을 밝힌다.

8월로 예정된 라이브공연을 위한 연습에서 ASKA가 확실히 정상인 모습이 아닌 모습을 보이자 CHAGE가 라이브 연기를 제안했고 ASKA는 강행할 것을 주장. CHAGE는 ASKA가 계속해서 정신이 반쯤 나간 듯한 모습을 보이자 '적당히 해라, 이상한 짓 그만좀 해!'라고 화를 냈고 이에 격분한 ASKA가 홧김에 먼저 주먹을 날려 일대 난투가 벌어졌다고. 본격 55세의 열혈 활극 주변 사람들이 모두 붙어서야 뜯어 말릴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싸우고 나서 CHAGE가 '저런 상태로는 저 자식과는 도저히 같이 할 수 없다', '내가 언론에 깡그리 불어도 좋은거냐!' 라고 까지 해서 완전히 두 사람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지자 라이브의 연기가 불가피해졌다...라는 것이 기사의 내용. 그냥 보기에는 '에이 그걸 누가 믿어' 수준의 막장소설 같은 내용이지만 문제는 이 내용이 거의 같은 내용으로 복수의 주간지와 신문에 동시에 게재가 되면서 기정사실화되어 버렸다[94][95][96].

이렇게 급격하게 사태는 악화일로를 걸었고 여론은 이미 'ASKA = 약쟁이' 라는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버렸다. 참고로 이때까지도 ASKA와 소속사는 아무런 대응이나 공식적인 입장 발표등을 하지 않고 있던 상태였지만 오로지 스포츠신문과 주간지의 찌라시성 언론 보도만으로도 여론이 어떻게 움직여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듯. 언론과 ASKA의 그다지 좋지 않던 관계도 물론 한몫 단단히 했다.

거의 침묵을 지키던 ASKA가 언론에 최초로 대응한 것은 10월이 되어서였다.

10월 8일 '주간 문춘'과의 인터뷰에서는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각성제 복용 사실은 부인하고 대신 의료기관에서 안식향산 나트륨 카페인을 처방받은 적이 있다고 답하면서 그 입수 경로 응? 처방 받았다면서? 앞뒤가 안맞네? 와 '음악관계자를 사칭했던 야쿠자와의 트러블'에 대해 일부 인정하는 인터뷰를 한다. 문제는 이 인터뷰가 소속사와의 상의가 없이 무단으로 이뤄진 것이어서 결국은 10월 10일 '세간에 물의를 일으킨 점과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을 통감한다'는 이유로 소속사는 ASKA의 활동을 자숙하기로 발표한다.

이 인터뷰는 또한 본의 아닌 곳으로 불똥이 튀는데...

바로 그 인터뷰중

"약을 했다고 소문이 난 것에 대해 마음에 짚이는 곳이라면, '문춘'에서도 약물의혹 기사가 난 적이 있는 에이벡스의 사장 마츠우라군[97]. 그가 주최한 파티 등에 불려간 적이 있다보니 동료라고 생각되었는지 모르겠다. 마츠우라와 약물에 대해 얘기한 적은 없지만 그런 소문이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문제는 ASKA 본인의 아들과 딸이 모두 당시 에이벡스 소속 연예인이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에이벡스 측에서는 맹렬히 반발, 항의하였고 아들과 딸 모두 에이벡스에서 계약해지(해고) 통보를 받게 된다. 뒤늦게 ASKA의 소속사측에서 저 발언에 대한 사과문을 올렸지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였다. 자녀를 발탁해준 은인을 그야말로 제대로 뒷통수를 후려쳤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98]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딸까지 자폭시켜버리는 ASKA의 위엄

일이 얼마나 커졌던지 일본 밖인 한국 언론에서도 이런 기사가 뜰 정도였다. 보면 알겠지만 저 기사가 쓰여진 시기는 2013년 10월경이고 기사의 내용도 아스카의 혐의를 기정사실화하는 것으로 보아 이 때부터 사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한국 내에서는 차게아스의 인지도는 거의 없는 수준인지라 그냥 묻혔다. 만약 차게아스가 일반적인 유명 팝스타들마냥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있었다면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을 것이다.소녀시대의 윤아나 빅뱅의 지드래곤이 ASKA와 같은 짓거리를 했다고 생각해 보자 근데 이 사람나오면 어떨까???

12월 12일에는 결국 연기되어 있던 부활라이브 공연을 완전히 중지하게 됨을 발표하였다.

2014년 4월 29일 활동을 자숙하던 중에 개인적으로 관람하던 타마키 코지의 콘서트에서 뜬금없이 불려 올라가 'SAY YES'를 원코러스로 듀엣하였다. 전혀 본인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이로 인해 이후 타마키 코지도 넷상에서 마약법 위반에 대한 의심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5월 17일 드디어 '각성제취제법위반(소지)'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혐의는 4월 6일, 4월 12일(!!!) 미나토구의 맨션에서 각성제를 소지하고 있었던 것. 요는 이전의 약물 사용이 체포사유가 된 것이 아니라 활동 자숙 중에 그새를 못참고 또 약을 한 것이 체포사유가 된 것. 일본 현지에서는 이로 인해 '이젠 돌이킬 수 없이 약물에 찌들었다.'라고 받아들여진 듯. 체포 당시 ASKA는 '폭력단 일원에게 받았으며 합법적 약물일 줄 알았다.'라며 혐의를 부인했지만 이후 경시청에서의 소변 검사에서 각성제 양성반응이 나왔고 이후 자택 수색에서도 MDMA가 발견되며 빼박 약쟁이 확정(...)

당시 뉴스에는 CHAGE&ASKA의 명곡들이 흘러 나왔는데, 이것의 영향으로 SAY YES와 YAH YAH YAH같은 옛날 히트곡들이 아이튠즈에서 상위권에 올랐지만, 이것이 사건이 터진 시점에서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사기 혐의로 앨범 판매 자체가 금지되고 개발살난 코무로 테츠야보단 나았다

그리고 5월 19일 ASKA 및 CHAGE & ASKA의 음악, 영상, 관련상품이 모두 판매중지 및 회수, 디지털 및 영상 자료의 온라인 배송이 정지되었다. 5월 20일에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집에서도 On Your Mark가 제외되었음이 발표되었다.

5월 23일 모발검사에서도 양성반응이 확정되자 그제서야 혐의를 인정하게 된다. 5월 25일에는 다시 자택과 소속사 사무실이 가택수색을 받았다. 그 이유가...

5월 27일 재체포되었다(...) 이번에는 5월 초반에 MDMA를 사용한 곳에 대한 혐의였던 것. 아주 일말의 희망을 갖고 있던 ASKA 팬들의 멘붕은 이미 한계치에 도달한 상황.

앞서 5월 19일은 마침 Chage의 팬미팅이 후쿠오카에서 있었던 날로 이날 모여든 기자들 앞에서 '멤버로써 깊이 사과드리고 싶다. 대단히 죄송했습니다. 아직 제 자신도 정리가 되고 있지 않습니다. 일의 중대성이 아직 파악이 안됩니다. 대단히 폐를 끼쳤습니다.'라고 트레이드 마크인 모자를 25년만에 공식석상에서 벗으며 사죄하였다. ASKA에 대해서도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기 바란다.'라고 코멘트. 그리고 본의 아니게 hage가 인증되어 Chage의 팬들은 세월의 무상함에 가슴을 쳤다

6월 17일에 또 다시 체포되었다. 아아 이젠 다 끝났어 꿈도 희망도 없어 이번 혐의는 5월 17일 체포 당일 오전에 마약을 소지하고 있던 혐의이다. 혐의가 좁혀지고 체포 절차가 진행되고 있던 그 순간 조차 약물을 사용한 그야말로 중증의 약물중독임이 밝혀지며 이제는 '적당히 하고 치료 좀 시켜줘라'라는 동정여론까지 등장하기 시작했다(...)

6월 27일 ASKA 개인에 대해 소속사 '록담아티스츠'로부터도 해고통보되었다. 공식 팬클럽인 'TUG OF C&A'도 일시 활동 중지.

7월 3일 보석되었다. 90도 인사로 사죄하며 마이크로도 잘 안들릴 정도로 아주 작은 소리로 '죄송했습니다.'라고 하고 다시 한번 가볍게 머리를 조아린 이 장면은 몇몇 게닌들에 의해 패러디되기도 하였을 정도로 이젠 완전히 조롱거리로 전락한 처지가 되었다. 이후 차에 타 미리 타고 있던 가족에게 사죄하였다고 한다. 이후 약물 의존증에 대한 치료를 위해 치바의 치료 병동에 입원하게 된다. 당시 보석금은 700만엔. 이는 보석금의 액수를 대상자의 자산 정도에 따라 부과하는 일본의 형법을 감안할 때 그동안의 다른 마약 혐의의 연예인들에 비해서는 현저히 적은 금액[99]인데 이 이유가 그동안 약물의 구입을 위해, 그동안 벌어두었던 그 많은 재산을 탕진해서였던 것이 밝혀지며 이젠 아예 금지어 취급을 받기에 이르른다. 그리고 부인인 요우코는 졸지에 보살 등극[100]

8월 28일 첫 공판이 열렸고 8월 31일 공식 팬클럽 'TUG OF C&A'가 활동 중지되며 그룹은 사실상의 해산의 길을 걷게 된다.

9월 17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구형받는다. 이후 폭력단과의 연계, 같이 흡입한 여성들과의 관계 등 수차례의 공판이 이루어지며 이미지는 그야말로 바닥을 치고 말았다. 치료 시설에서 12월 퇴원하였지만 야쿠자들의 보복이 두려워 도피생활을 하는 등 한때 대중의 주목을 받던 스타였던 것이 무색해질 정도의 비참한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4.2.2.2. 이후 행적 (2016~)

ASKA가 대중들에게 거의 잊혀질 무렵이던 2015년 12월 22일 잡지 '여성자신'의 취재에 최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엄청나게 체중이 불었고 이전 '50대의 왕자님'으로 불리울 정도로 말쑥했던 외모는 온데간데 없고 환갑을 훌쩍 넘겼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백발이 성성한 동네 아저씨가 되어 나타났다. 체중이 65킬로그램에서 80킬로그램까지 불었고 스트레스로 원형탈모증까지 생겼다고. 이 사진을 보고서야 아주아주 뒤에라도 진심으로 참회하고 충실히 재활을 받으면 혹시라도 차게아스가 재결성될 수 있진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있던 팬들은 그 꿈을 포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건 이후 CHAGE가 일절 ASKA에 대해 언급이 없는 것만 봐도 이미 틀린 것 아닌가[101] 한국의 황수정만 봐도 몸이 망가지지 않았다 한들 연예계로 돌아올 가능성이... 그나마 부인의 헌신적인 내조 덕분에 조금씩 정상적인 삶을 찾고 있다는 아주 절망적이지만은 않은 기사였는데...

2016년 1월 9일 체포 이후 최초로 사건의 경위와 지금까지의 음악인생에 대한 회고록이 블로그에 갑자기 올라왔다[102]. 2만자의 장문으로 이루어진 이 글은 1. 서장 2. 런던 3. kicks 4. 위기와 기회 5. 대한민국 라이브 6. 리얼캐스트 해산 7. GHB 8. 착각 9. 이이지마 아이 10. 도청 도촬 11. 각성제 12. 음악관계자 13. 공갈 14. 주간문춘 15. 엑스터시 16. 체포 17. 재판 18. 메일 19. 후기 20. 추기 의 총 2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글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 처음으로 마약을 접했던 것은 1996년 'MTV unplugged'를 촬영할 당시 스탭을 통해서 였다.
  • 당시에는 호기심에 한번 해 본 정도였지만 이후 각성제를 사용하면 작업에 몰두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빠져들게 되었다.
  • 그러던 중 우연히 만난 것처럼 가장한 '사이토 카즈오'라는 야쿠자의 권유로 다른 마약류를 접하게 되었고 이후 각성제 외에도 점점 더 큰 자극을 위해 여러가지 약물에 손을 대게 되었다. 마약 중독자들의 전형적인 패턴이지
  • 2011년 주간 문춘에서 불륜이었다는 기사가 났던 '이이지마 아이(飯島愛)[103]와는 같은 야행성으로 이것저것 상담할 수 있었던 친구였을 뿐으로 '도청당하고 있다'고 하여 상담에 응해준 적이 있다.
  • 그 즈음부터 ASKA 본인도 도청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신경쇠약이 올 정도로 피해의식이 사로잡혀 생활 패턴까지 바꿔야 했을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 그 와중에 친하게 지내던 음악관계자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자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어 정기적으로 마약을 투약하게 되었다.
  • '일과성 뇌허혈증'으로 쓰러졌던 것은 사실이며 마약의 후유증에 의해 라이브가 연기된 것은 아니다.
  • 뇌허혈증에 의해 입원했을 때부터 야쿠자들이 공갈 협박을 해 오기 시작했다.
지난 날의 자신의 행동에 대해 미안하다고 하는 구절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 외에도 '주간문춘'과의 트러블, 체포와 재판 당시의 심경, 체포 당시에 같이 체포되었던 불륜관계의 '카스미(香澄美)'는 마약과는 관계없이 이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것, 또 그로 인해 마약사범으로 만들어 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 변하지 않았던 '카스미'에의 마음 등을 각 챕터별로 시 구절을 써가며 써 놓았는데 위의 주된 내용들을 보면 알겠지만 아무리 좋게 봐줘도 반성보다는 변명에 가까운 내용들 투성이라 관계자에 의해 2~3회 삭제되었지만 바득바득 또 이걸 계속 블로그 회사까지 바꿔가며 다시 올려버리고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일본 네티즌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퍼져버렸다.

체포 당시 경찰차에 연행되는 ASKA와 토치나이 카스미.

이에 대한 반응은 '이 사람 아직도 정신 덜 차린것 아닌가' 딱 그 수준(...). 뜬금없이 각성제를 복용하니 100km도 달릴 수 있을 것 같이 힘이 났다느니 도청이 의심된다고 스트레스로 마약을 했던 것을 합리화하지 않나 같이 체포된 '토치나이 카스미(栩内香澄美)'라는 여자의 본명까지 언급하며 카스미가 모발 검사에서 양성이 나온 것은 본인과의 검열삭제중에 땀이 옮겨가며 생긴 것이라고 하며 아직도 사랑한다고 하지 않나 아직도 절절한 마음을 담은 문자내용을 공개하지 않나자기 아내가 이걸 볼 거라는 생각은 아예 들지도 않았나 보다 게다가 자신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가족이나 멤버인 CHAGE에 대한 미안함이나 반성 등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기 때문. 심지어 위의 '여성자신'의 최근 사진은 뽀샵된거라고 우기는 구절까지 있다(...) 그런 말을 하실거면 셀카찍어서 인증샷도 올려주셔야죠 그러다보니 이 글이 반성문이나 참회록으로 보이기보다는 불륜 상대인 '카스미'의 혐의를 벗겨주기 위한 호소문 정도로 밖엔 안보이니 반응이 냉담한 것도 어쩌면 당연하겠다. 헌신적으로 내조해 온 부인이 차곡차곡 벌어준 점수를 한방으로 날려버린 셈. 참고로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ASKA와 불륜 상대인 토치나이 카스미라는 여성은 체포 당시 37세로 ASKA와 20세 가까이 나이차가 나는 모기업의 비서이며 밤이면 밤마다 ASKA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 짐승과도 같은 소리(?)를 냈다고 주변 이웃이 디스했다(..)

2016년 2월엔 역시 각성제 소지 혐의로 체포되며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기요하라 가즈히로의 운전수가 ASKA의 차를 운전하던 운전수와 동일 인물이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이에 기요하라의 사무소에서 운전수 겸 매니저를 모집하는 광고가 났던 구직사이트 DODA (듀다)에는 '그 운전수의 이름이 누구냐'라는 문의가 쇄도하는 등 소란을 겪었다.

2016년 현재도 지하실에서 칩거하며 악곡 제작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한다. 가끔 부인과 함께 외식하는 것이 바깥 출입의 전부라고. 지금 쌓인 곡만 앨범 5장을 내도 될 분량이라고는 하는데 그러나 이대로라면 이 곡들이 세상에 빛을 볼 날이 과연 올 지는 모르겠다. 일본의 연예계를 보면 알겠지만 ASKA 정도의 큰 잘못을 저지른 연예인이 정상적으로 연예계에 복귀한 사례가 흔치 않다보니 ASKA가 재기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었던 것으로 여겨졌었다.[104] [105] 물론 이후의 행적을 통해 알게 되겠지만 어찌어찌 복귀는 한 상황.

마약 투약사건 이후 ASKA의 연예인 생활은 끝이 나는듯 했으나, 2016년 10월 9일 후쿠오카 현 내의 라이브하우스에서 공연 활동을 재개했다. 이전 본인의 밴드 멤버의 라이브 무대에 깜짝 출연한 듯. 신곡 'FUKUOKA'[106] 와 'はじまりはいつも雨'를 불렀다고 한다. 관객은 달랑 50명이었다고. 체포 직전 타마키 코지의 무대에서의 공연 이후 2년반 만의 무대이다. 슬슬 복귀하고 싶어하는 것은 같지만 대중의 반응은 그야말로 차갑기 그지없다.

또한 새 앨범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총 13곡의 곡을 수록할 예정이라면서 2016년 말 발매를 앞두고 편곡을 대부분 완성하였지만... 정작 디지털 마스터링을 맡으려는 회사가 없어 결국 2016년 내의 발매가 무산되었다(...) 본인은 '있을 수 없는 트러블을 당했다'며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하고는 있는데...

그런데 2016년 11월 28일, 또다시 각성제 투약으로 적발되었다. 스스로 '도촬당하고 있다.' '도청당하고 있다.' 등의 말을 중얼거리며 경찰을 불렀고, 각성제를 의심한 경찰에 의해 임의동행조치되어 소변검사를 받은 결과 양성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본인은 블로그에 '언론의 오보다.' '양성반응은 100% 없다.' 등의 말을 썼지만 현지에서는 약물중독자의 피해망상 정도로 취급하는 분위기. 집행유예기간 중 또다시 같은 혐의가 적발되었다는 점에서 재기는 거의 불가능해진 것으로 보인다.이제 재기는 개뿔 교도소행을 준비해야 하게 생겼다

이후 알려진 사실인데, ASKA의 부인은 몇 달 전에 자기 집 외에 하나밖에 없는 아파트 맨션을 5500만엔에 매각했다고 한다.[107]

그런데 2016년 12월 19일에 ASKA는 증거 불충분으로 일본 검찰에게 무혐의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2017년 2월 중순부터 ASKA는 본격적으로 연예계로의 복귀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 같다. 새 앨범도 발매 준비가 끝났다고 한다. 앨범명은 Too Many People로 2017년 2월 22일에 발매되었다. 모처럼 TV출연도 했던 것으로 보아 복귀를 시작한 모양. 이런저런 스캔들로 재기가 불가능해보였던 ASKA도 Too Many People의 발매로 다시 발돋움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게 되었는데, 오리콘 주간차트에서는 최고순위 7위를 기록하였고, 빌보드 디지털 J-Pop 차트에서는 주간순위 6위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블로그를 파 거의 매일 업데이트를 하며 근황을 전하고 있다.

그렇게 근황을 블로그에 적으면서 일본 내에서 밝혀진 사실인데, ASKA는 자신의 부인과 2017년 6월부터 서로 좋게 합의하면서 이혼을 했다고 한다.그리고 ASKA와 불륜 상대인 카스미와의 재혼설까지 퍼지고 있다는건 함정

동년 8월 16일에는 도쿄의 한 스튜디오에서 300여명의 관객들 앞에서 공연을 하고 10월에 새로 발표할 신곡을 소개하는 등 본격적으로 재기를 하려고 하고 있다. 다만 차게아스의 재결성에 대해서는 전혀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멤버인 CHAGE와 연락도 거의 하지 않는다고.

2018년 말에는 클래식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통한 라이브를 개최, 2019년 2월에는 실황 DVD가 발매되었다. 의외로 공연 자체에 대한 평은 나쁘지 않았는데, 공백기동안 성대의 혹사 없이 체계적인 관리를 해오다보니 보컬 상태가 전성기 수준 비스무리하게 돌아와, 무리없이 기존 음역대를 소화할 수 있게 된 게 큰 이유로 뽑힌듯 하다. 목관리를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자기 관리는 꽝이었던 것이 아이러니긴 하지만

2019년 대만 설 명절 프로그램 초급거성 홍백예능대상[108]에 ASKA가 출연했다. ASKA 대만 홍백 출연 영상

2019년 6월에는 홍콩과 대만에서 아시아 투어를 개최할 예정이다. 연초 대만의 메이저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을 볼 수 있듯이, 지상파 방송에도 무리없이 출연할 명성은 아직 있는 중화권에서 활로를 찾아보겠다는 심산인 듯 하다.

한편 2019년에는 아스카가 탈퇴 표명을 블로그에 밝히면서, 솔로 활동에 매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해체 표명만 하지 않았을 뿐, 사실상 해체 수순에 들어갔다고 보아도 무방해 보인다. 그러나 여러 상황을 종합해보았을 때에는 ASKA 본인이 복귀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상황에 가까운 듯. 한편 최근 들어서는 과거 발매되었던 앨범의 리마스터링 발매나 베스트앨범 발매, DVD 발매가 이뤄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팬들은 재결성이 불가능한 현재 상황과는 달리 발매만 되는 음반/DVD에 희망고문(...)만 당하는 중.

4.2.3. 음악

상당히 끈적끈적(ねっとり, 넷토리)한, 뱃속 저 깊이에서 올라오는 듯한 소리가 일본 가수들 특유의 콧소리와 맞물려 독특한 목소리를 낸다. 넓은 음역대에 굵은 목에서 받쳐주는성량도 상당히 크고 내구력도 좋아 수일간의 연속 라이브 공연에도 삑사리 등의 불상사가 거의 없을 정도. 탁음을 콧소리로 '뭉개면서' 멜로디에 흘리는 경향이 강해 ASKA 외의 가수가 차게아스의 곡을 부르면 특유의 분위기가 잘 살지 않는 가장 큰 원인이 되기도 한다.그리고 뽕필의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하지 코무로 테츠야는 ASKA의 목소리에 대해 말도 안되는 오버톤으로, 분명 솔로곡으로 어쿠스틱 라이브였음에도 코드가 들릴 정도의 국보급 목소리라고까지 한 바 있다.

ASKA가 작사한 차게아스의 곡을 처음 접하는 경우 가장 멘붕이 오는 것 중 하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가사. 대표곡이라고 할 수 있는 곡들조차 'SAY YES'의 '硝子ケ-ス'(유리 케이스)나 'On Your Mark'의 '流行の風邪に やられた'(유행성 감기에 걸렸다)', '太陽と埃の中で'의 '風邪をひいたままさ'(감기에 걸린 채로), 'Sons and Daughters'의 '一緒に風邪をひくように'(같이 감기에 걸리기 위하여)처럼 여기서 이게 뜬금없이 대체 뭔 말인지 이해도 잘 안되고 그야말로 어렵기 그지없다. 'LOVE SONG'의 '安い玩具みたいで'(싼 장난감 같아서)나 'YAH YAH YAH'의 '傷つけられたら牙をむけ '(상처입었으면 어금니를 드러내)는 그냥 보통인 수준. 다른 아티스트에게 준 곡은 또 괜찮냐하면 光GENJI의 'Paradise銀河'에서 사과 껍질 벗기는 구절은 왜 나오는 건지 다른 일본의 싱어송라이터나 작곡, 작사가들 입장에서도 '저런 표현을 굳이 쓸 필요가 있나'싶을 정도. 이걸 굳이 같은 일본 가요계의 경우에 비교해보자면 '원조 교제'(涙売りの少女), '교사와 학생간의 연애'(Dear my teacher)등 일반적인 일본의 가요에서도 잘 보기 힘든 직설적인 가사를 주로 쓰는 AKB48의 노래 가사(정확히는 AKB48의 창립자인 아키모토 야스시의 가사)와 완전히 상극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AKB같은 아이돌들 노래는 대체로 전부 직설적인 가사의 곡이 절대 다수아닌가 그렇다고 층쿠처럼 뜻보다는 노래 부르기에 좋은 운율감이 있는 가사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니 더 환장할 노릇. 사실 일본어를 평생 써오고 일본어를 연구해온 일본의 국문학자(일본 입장에서,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일문학자)들조차 ASKA의 가사를 연구대상으로 삼을 정도이다. 와세다대학의 교수이자 근대 일본문학 연구의 1인자인 이시하라 치아키(石原千秋) 교수조차 'ASKA의 가사는 수수께끼가 얽혀있어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어 재미있다.', '일반적인 가요의 가사와는 한차원 다른 깊이가 있다.'고까지 할 정도. 여담으로 ASKA는 1984년에 정식으로 시집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작곡에 있아서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귀에 잘 들어오는 멜로디. 다소 고저의 차이가 큰 드라마틱한 선율을 사용하는 일이 많다. ASKA에 비해 비트감이나 약동감을 선호하는 CHAGE와는 데뷔 후 초기의 포크음악 시절부터 작곡 경향에 있어 차이를 보인다. 그나마 그 당시에는 기타를 이용해서 작곡을 했었지만 1984년 경부터는 피아노로 작곡을 하기 시작, 이 무렵부터 코드 진행이나 전조의 변화가 점점 더 많아져 최근에는 1곡중에 사용된 코드가 50개를 넘는 악곡도 있을 정도(...) 한마디로 최근 ASKA의 작곡은 가사, 곡 모두 본인에게 특화된, 본인의 feeling에 가장 맞는 곡을 만들고 있다고 보면 될 듯.

4.2.4. 인물

  • 성룡을 닮았다. 실제로 앨범 'ONE'의 자켓 촬영을 위해 베트남에 방문했을때 현지인들이 성룡으로 착각하기도 했다고. 짙은 쌍커풀이 있는 눈 때문에 인상이 비슷해보이는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둘이 일본 방송에서 만난 적도 있었던지라 더욱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 목이 굵은 편이다. 그래서 주로 복장이 라운드넥 티셔츠에 자켓, 혹은 타이를 하지 않은 채로 목 단추를 풀어둔 와이셔츠에 자켓 식의 복장이 많다. 1991년 차게아스의 전성기 때에는 이 복장이 크게 유행하기도 하였다.
  • 같은 후쿠오카 출신 선배이기도 한 다케다 테츠야[109]의 증언에 의하면 초등학생때 라이브하우스에 단신으로 숨어들었다가 쫓겨난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 다케다는 치쿠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났던 것으로 두 멤버 모두 알고 있었지만 실은 같은 해에 같은 소년야구팀에 있었다는 사실을 데뷔 이후에서야 인터뷰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 라이브 공연을 보면 느낄 수 있지만 정말 전신에 힘을 주고 그야말로 '배배 꼬면서' 부른다. 그래서 ASKA를 흉내내는 게닌들이 자주 네타로 쓰기도 한다. 곡이 극적인 구성일 수록 특히 'TREE' 앨범의 'BIG TREE'같은 스케일이 큰 넘버에서는 절정에 달한다. 심지어 라이브 도중 물을 마실때조차 온갖 폼은 다 잡으면서 마신다
  • 외모로만 보면 상당히 쿨해보이거나 과묵해보이지만 실제 성격은 전혀 반대. 낯가림도 전혀 없고 그야말로 누구에게나 먼저 말을 걸고 친근한 타입이라고 한다. 감정표현에도 무척 솔직한 편으로 후배들에게 상당히 존경을 받다. 물론 이건 그 말 못할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이야기.
  • 사적으로는 말도 많고 참 재미있는 사람이라는데 이상하게 TV 카메라만 비추면 말을 잘 못 한다. 특히 버라이어티에서, 그 중에서도 CHAGE가 옆에 없을때에는 더더욱. 그래서 야후! 재팬의 지식꾸러미에서도 'ASKA는 왜 폼만 잡고 있나요?'라는 질문이 올라와 있을 정도(...) 사실 초기부터도 다소 인터뷰 시에 경직되고 딱딱해 보인다라는 지적이 있다가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방송이 많아지고 자신의 라디오 진행방송이 있으면서 그나마 늘었던 것이 국내/외의 라이브 위주의 활동을 하게 되며 토크의 진행에서부터 멀어지면서부터 다시 원상복귀한 것으로 보는게 맞을 듯 하다. 도쿄 러브스토리의 여주인공인 스즈키 호나미가 TV 라이브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올라왔을때는 마이크를 들고 누가봐도 긴장상태로 어색한 침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첫 질문이랍시고 한 것이 '저 이러고 있으니 사회자 같지 않나요?' 라고 했다. 그것도 게스트가 아니라 관객석을 향해(...) 그에 비해 라이브 무대에서의 mc는 그런 일 없다.자기 직업인데 당연한거 아닌가
  • 뭔가 발음으로든 뜻으로든 글자를 잘못 읽거나 더듬거나 어버버하는 일이 많다. 당장 라디오 DJ의 경우에도 사연 하나를 매끄럽게 읽는 일이 드물 정도(...) CHAGE와 라디오 진행을 하던 때도 사연 하나를 매끄럽게 읽는 데 성공하면 뭔가 라디오 너머 청취자들에게까지 뿌듯함이 전달되는 것 같은 분위기가 되어 버릴 정도니... 오사카 지방의 라디오 방송에서 '카즈씨를 좋아해요' 라는 무려 고백 사연을 '카바씨를 좋아해요'라고 잘못 읽어버린 대형 사고를 치자 방송국에서는 급기야 다음 방송부터 여성 아나운서를 붙여 공동 진행을 시키도록 하였다. 그 아나운서가 바로 이후 부인이 되는 야시마 요코(八島洋子) 였던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 의외로 '욱'하는 성격이 있어 앞서의 'Views'와의 경고문 사건을 일으키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본인의 음악에 대한 고집과 자부심이 대단하여 매 앨범마다 관계자들과 트러블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ASKA와 일반적인 일본 언론과의 사이가 나빠지게 만든 주요 원인 중 하나.
  • 전형적인 주침야활형 인간이라고 한다.
  • 라이브 때에는 보컬에 집중하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상당한 기타 연주 실력의 소유자. 보컬을 하면서는 주로 코드 스트로크나 알페지오, 쓰리 핑거 등의 핑거 픽킹만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CHAGE의 보컬 곡에서는 리드 기타를 연주하거나 아니면 기타 프레이즈의 솔로 파트를 연주하는 일도 있다.
  • 묘하게 자동차운전과는 흑역사가 있다. 1987년에는 첫 차였던 토요타 소어러가 연속방화범에 의해 홀라당 불탄 적이 있다. 1999년에는 배달중이던 메밀국수집 아저씨를 치어 경찰차 신세를 진 일도 있었고[110], 2005년에는 운전면허 갱신 위반으로 2시간의 위반자교습을 받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하였다. CHAGE의 새 차를 몰아보겠다고 나갔다가 30초만에 신호위반으로 잡힌 적도 있다고 하며 새 차를 구입한 기념으로 스텝들을 태우고 시운전을 할때 소속사인 록담 엔터테인먼트의 화단에 돌진한 적도 있다고 하는걸 보면 운전은 절대 맞지 않은 듯 하다(...)ASKA는 기계치
  • 연기에 두 번 도전한 바 있다. 1984년 니혼 TV의 '友よ'(친구여)와 1987년 TV 아사히의 시대극 스페셜 '新選組'(신센구미). 특히 '친구여'에서의 연기는 방영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1회에서의 공장 모서리에서 자고 있는 모습이 최고의 연기였다'고 불리울 정도로 이른바 'クソ演技'(발연기)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한다.도대체 얼마나 연기를 못했길래... 박진영도 영화 주연배우에 도전했다가 발연기라고 욕 오지게 먹었잖아
  • 본인의 첫 싱글인 'MY Mr.LONELY HEART'가 타이업된 두번째 출연작인 '新選組'에서 그가 맡은 배역은 하필 이토 히로부미.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배역일 뿐으로 실제로는 오랜 아시안 투어의 덕분인지 아시아 여러 나라에 일본이 역사상 벌였던 수많은 과오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고 실제로 타이완한국에서의 콘서트에서는 사과멘트를 하기도 하였다. 2000년 내한 서울 공연 당시 ASKA가 서툰 한국어로 일본이 한국에 범한 잘못을 사과하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당시 인터뷰에서 예정에 없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자 제지하려는 스텝을 말린 후 진심으로 사과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그리고는 여지없이 우익 언론들이 '내한 콘서트 대실패'라는 기사를 연이어 쏟아내기 시작했다.
  • 복귀 이후 개설한 블로그에서 한일관계와 관련한 글을 올렸는데 , 본인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한국과의 관계 악화를 안타까워하는 요지로 쓴 글이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전혀 공감할 수 없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어 논란이 좀 있었다. 특히 과거 한국공연 당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사과하는 등의 행보와는 대비되는 처사였던지라, 소수의 팬들을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이후에는 정치적인 이야기는 없는 상태. 가만히 있었으면 중간은 갔을텐데 원문 링크해석 링크

4.2.5. 가정사

1987년 6월 7일 나고야의 지방 민영 방송국인 CBC의 아나운서였던 야시마 요코(八島洋子)와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와 게스트로 만나 결혼. 결혼 발표는 그보다 앞선 4월 21일 싱글 'SAILOR MAN'의 발매일에 맞춰 이루어졌다.

그해 12월 17일 장남인 미야자키 소우(宮崎奏)가 탄생, 그리고 1989년에 태어난 장녀 미야자키 카오루(宮崎薫)의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인 소우의 경우 2010년 록 밴드 'Little Blue boX'를 결성하여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던 중, 2011년에는 에이벡스를 통해 메이져 데뷔를 달성했다. 롯폰기에서 회원제의 바를 경영하고 있기도 하다.

딸인 카오루의 경우 2009년부터 라이브하우스를 통해 보컬로 활동하며 작사/작곡을 시작, 여러 회사에 데모테이프를 보내던 중 2011년 지역 이벤트에 참가하며 부른 곡을 계기로 음악프로듀서에게 발탁되어 그의 소개로 에이벡스와 계약한다. 2012년 마쓰다 데미오의 CM송을 부르며 인지도를 넓히며 2013년에는 첫 앨범을 내는 등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입지를 넓히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두 자녀 모두 ASKA의 이름을 빌리기보다 바닥부터 올라가 나중에서야 ASKA의 자녀임이 밝혀져서 호감도가 상승하는 등 점차 순조롭게 연예계에 정착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실언으로 에이벡스의 분노를 사 짤리고 말았다.

4.2.6. 디스코그래피

ASKA만의 디스코그래피 만을 다룹니다.

4.2.6.1. 싱글

발매일

제목

수록 앨범

비고

1987.9.21

MY Mr.LONELY HEART

SCENE

첫 오리지널 싱글

1998.9.30

MIDNIGHT 2 CALL

SCENE

[111]

1991.3.6

はじまりはいつも雨(시작은 언제나 비)

SCENE II

솔로로는 첫 밀리언 달성

1995.1.1

晴天を誉めるなら夕暮れを待て(맑은 날을 칭찬하려면 해질녘을 기다려)

NEVER END

[112]

1997.2.5

ID

ONE

[113]

1997.4.28

ONE

ONE

[114]

1998.3.11

Girl

kicks

-

2000.7.12

good time

SCENE III

야마하 이적 후 유일한 싱글

2003.12.17

心に花の咲く方へ(마음에 꽃이 피는 분께)

SCENE III

유니버설 이적 후 첫 싱글

2008.10.1

UNI-VERSE

SCRAMBLE

-

2009.2.25

あなたが泣くことはない(네가 울 일은 아냐)

SCRAMBLE

-

2011.4.22~

いま歌う(지금 부르다) 시리즈

「僕にできること」いま歌うシリーズ

[115]

2012.1.21

歌の中には不自由がない(노래 속에는 부자유가 없다)

SCRAMBLE

[116]

2019.11.20

歌になりたい/Breath of Bless ~すべてのアスリートたちへ

-

4.2.6.2. 앨범

발매일

제목

비고

1988.8.21

SCENE

[117][118]

1991.6.5

SCENE II

[119]

1995.2.27

NEVER END

[120]

1997.3.12

ONE

-

1998.3.25

kicks

-

2005.11.23

SCENE III

-

2009.11.25

STANDARD

솔로로는 첫 크리스마스 앨범

2010.2.10

12

데뷔 30주년 기념 셀프커버 앨범

2010.11.3

君の知らない君の歌(당신이 모르는 당신의 노래)

[121]

2011.12.7

BOOKEND

[122]

2012.10.17

SCRAMBLE

7년만의 오리지널 앨범

2012.12.22

「僕にできること」いま歌うシリーズ(「내가 할 수 있는 일」지금 부르다 시리즈)

앞서의 '지금 부르다'시리즈를 모은 커버앨범

2017.02.22

Too many people

-

2017.10.25

Black&White

-

2020.03.20

Breath of Bless

-

5. 트리비아

  • 사진이나 공연 영상 등을 보면 보는 사람 입장에서 CHAGE는 항상 왼쪽, ASKA는 항상 오른쪽에 있다. 다만 싱글 자켓의 경우는 예외가 좀 있다. 대표적인게 이들의 최고 히트곡 SAY YES의 자켓은 ASKA가 왼쪽, CHAGE가 오른쪽에 있다.
  • 일본판 스펀지(KBS)라고 할 수 있는 후지 테레비 트리비아의 샘 2006년 5월 30일 방송에서 밝혀진 바로는 라이브 등의 무대에서 두 멤버가 노래할 때의 둘 사이의 간격은 정확히 2m10cm 을 고수한다고 한다. 데뷔 이래로부터 단 한번도 1cm도 어긋난 적이 없다고. 차게아스의 25주년 애니버서리 DVD 크레딧에도 올라와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가장 멋있게 보이는 단순한 겉보기 뿐 아니라 캐릭터까지 고려해서 손을 뻗어도 상대에게 부딛히지 않고 몇 걸음만 걸으면 서로 어깨를 만질 수 있는 최고의 거리감을 보여줄 수 있는 간격이어서 이 간격을 고집한다고. 방송에서는 지금까지의 방송 무대, 라이브 무대 등의 140여회 이상의 무대를 일일히 CHAGE의 선글라스 폭과 두 사람의 신장을 이용하여 삼각 측량, 둘의 거리가 2m 10cm임을 검증했다. 결과는 '54헤에(へぇ)'. 물론 무대에서 활동적으로 움직이면서 이런 거리감을 기계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비슷한 거리감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것 또한 대단한 일이다.
  • 2001년 앨범 'NO DOUBT'를 제작하면서 두 멤버가 영국 런던에서 공동생활을 해보았는데 식성, 취침 시간 등을 포함한 생활 스타일이 달라도 너무 달라서 2주만에 포기하고 결국 따로 집을 얻어 나갈 수 밖엔 없었다고 한다.[123]

  • 수많은 곡들을 작사/작곡해 온 차게아스의 곡들 중에 가라오케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곡은 단연 최대 히트곡인 SAY YES와 YAH YAH YAH, 그리고 신인 시절에 크게 히트를 친 '万里の河'(만리의 강)이며 그 다음으로 인기가 많은 곡이 바로 '終章(エピローグ)(종장(에필로그))'. 이 곡은 차게 작사/작곡의 곡으로 첫번째 앨범 '風舞'의 제일 마지막 곡으로 차게와 아스카 두 당사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다. 싱글컷된 적도 없고 커플링으로 발매된 적도 없는 곡이지만 지금도 차게아스 곡의 인기순위를 뽑으면 항상 상위에 들어가는 곡으로[124] 이후 앨범 'PRIDE'와 'STAMP'에서도 재수록되었는데 초기/중기/후기의 차게아스의 음악의 변화를 한 곡으로 비교해 볼 수 있는 재미가 있다. 실제로 이 곡은 데뷔 1년전에 솔로 팝콘 출전을 위해 만들어졌던 곡이었지만 듀엣이 된 이후 출장곡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첫 앨범의 캐치프레이즈인 '10년후, 이 앨범은 전설이 된다.'는 이 곡을 듣고 프로듀서인 야마사토가 붙여준 것. 수많은 아티스트들에 의해 커버되기도 하였다. 가사중 '이것이 정말로 이미 끝인가요 두번 다시 만날 수 없나요', '평범한 헤어짐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같은 구절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차게아스 팬들의 실낱같은 기적을 바라는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ASKA가 몰락해버리고 사실상 Chage와 같은 무대에 설 수 없게 된 지금은 단순 엔딩곡에서 처절하게 슬픈 노래가 되어버렸다
  • 일본에서는 한시대를 풍미했을 정도로 매우 유명한 밴드이지만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매우 낮은편. 2000년 내한 공연은 나름 성공적이었지만 한국 대중의 인지도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일본음악 마니아 정도가 아니면 이름을 들어본적도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SAY YES'라고 2000년대 초반에 국내 차게 앤 아스카와 팬페이지가 있긴 했으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90년대 초반에 한국에서 101번째 프로포즈가 알려지면서 이 드라마의 주제가이지 차게 앤 아스카의 최대 히트곡이던 'SAY YES'가 잠시 국내에 소개되기도 했으나 정작 'SAY YES'를 누가 불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조장혁, 박상민 같은 가수들이 차게 앤 아스카의 곡을 몇 개 리메이크해서 부르기는 했으나 그때도 국민들은 그것이 일본곡이 원곡이라는것만 알지 그 원곡이 차게 앤 아스카의 곡이라는 것은 대부분 모른다. 서양권에서는 이들이 On Your Mark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불른걸로 좀 알려져 있긴 하지만 한국에서는 저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부른게 누군지도 알려져있지 않을 정도니 그야말로 안습. 한국에서 그나마 이들 듀오가 잘 알려진 계기는 ASKA가 마약 관련된 문제로 구속되어 인터넷 기사에 실렸을 때 정도. 물론 그때마저도 한국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고 바로 잊혀졌다.
  • 저지른 사건이 사건인지라 1980년대~2000년대에 걸쳐 국민듀오라는 명성에 걸맞는 활약을 펼쳤음에도 일본내 차게아스에 대한 (특히 ASKA) 정보가 담긴 팬페이지 및 블로그 까지도 매우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당장 차게아스의 공식 홈페이지의 경우 곡 별로 곡을 작성했던 당시의 심경이나 작곡,작사의 배경이 일일히 써 있었던 충실한 정보량을 자랑했던 홈페이지였지만 '그 사건' 이후로 ASKA의 인터뷰들이 깡그리 삭제되며 모조리 다 없어진 빈 집이 되어 버렸다. 또한 ASKA와 관련된 모든 음원, 영상들은 일본 방송에서 전부 금지된 자료들이 되어버렸으며 과거에 역대급 히트를 친 노래를 소개하는 방송에서도 다른 히트곡들과는 달리 ASKA의 작품인 SAY YES, YAH YAH YAH는 전주만 아주 잠깐 들려주고 곧바로 스킵해버리고 있다(...). 더불어 팬클럽의 신규 가입 또한 2013년 말 사건 발생 직후부터 중지되었으며, 팬들의 커뮤니티 활동이나 관련 인프라가 급속히 냉각되었다.
  •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히 2016년 말엽부터 유튜브 내에 있던 차게아스의 역대 MV들과 라이브 영상들이 매우 빠른 속도로 사라져버리고 있다. ASKA가 저지른 마약 복용 사건 이후에도 이런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많은 차게아스의 팬들은 의문을 표했는데 이는 작년인 2015년 말에 한국에 유튜브 레드가 런칭되면서 많은 일본곡들이 해외에서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심각한 일이 아닌, 음원관리차원에서 차단된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유튜브 레드 항목에 가면 알 수 있다.


  1. [1]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발매된 그들의 마지막 앨범이다.
  2. [2] 왼쪽의 모자와 썬글라스를 쓴 사람이 박상민CHAGE, 오른쪽에 머리를 염색한 사람이 ASKA
  3. [3] 2013년 초 해산 후 3년만에 차게아스 부활 발표를 한 뒤 석간 후지에서 인터뷰중 찍은 사진. 이 사진이 둘이 함께 찍은 2019년 현재로는 마지막 사진이다. 과연 둘이 저렇게 다시 만날 수 있을 날이 올 것인지...
  4. [4] 여담으로 그 대회의 그랑프리는 무려 '巡恋歌'를 부른 나가부치 쯔요시였다(...)
  5. [5] 하지만 이 '남과 여' 곡 자체는 중국에서 빅히트를 기록한다. 이후 대만 가수 주화건(周華健)이 '讓我歡喜讓我憂'라는 제목의 북경어 버전으로, 엽천문(葉蒨文)이 '情人知己'라는 제목의 광동어 버젼으로 각각 크게 히트한다. 이후 1994년 챠게아스가 최초로 중국 본토에 방문했을 당시 한 음악방송에서 '남과 여'를 부르자 '중국인의 90%가 그 노래를 다 안다.' '옛날부터 중국에서 전해져 온 노래인데 너희들이 만들었다는건 말도 안된다.'라고 진행자가 역으로 화를 냈던 일화는 유명하다.간단히 말해 중국판 사치코라고 보면 될듯
  6. [6] 특히 아스카의 'ねえ 声を聞かせて(이봐 목소리를 들려줘!)'는 한동안 차게아스의 라이브에서 빼놓지 않는 하나의 전초행사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아스카는 같은 제목으로 라이브 한정의 곡을 작곡, 라이브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곡으로 쓰기도 했다.
  7. [7] 당시 아스카의 솔로 싱글 데뷔를 놓고 워너 관계자와의 의견 차이로 인한 트러블이 원인이었다는 설도 존재한다.
  8. [8] 후지 테레비 계열의 영상, 소프트 제작 회사이다. 일본에서 최초로 뮤직 비디오 테이프를 발매한 회사로도 유명하며 현재도 미국이나 유럽 자본의 레코드 회사가 아닌 독립 레코드 회사로서는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이 회사에서 제작된 CD를 보면 크고 아름다운 후지 테레비의 눈알마크를 확인할 수 있다. 이후 1987년경부터 후지 테레비 계열의 매주 월요일 저녁 9시 드라마, 이른바 게츠쿠가 크게 붐을 일으키면서 드라마 타이업을 노릴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보면 신의 한수. 당장 게츠쿠 101번째 프로포즈에 타이업된 그들의 최대 히트곡 'SAY YES'만 놓고 보아도 이 선택이 얼마나 탁월한 선택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9. [9] TV 아사히의 'あぶない雑居カップル(위험한 잡거 커플)'
  10. [10] 이는 80년대 극후반부터 90년대 초반 당시 버블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젊은 층이 겪고 있던 좌절, 세기말이 다가오는 것에 대한 불안감 등에 대한 반작용으로 용기를 주는 내용의 노래가 많이 나왔던 음악계의 분위기와도 관련지을 수 있을 것이다. PRINCESS PRINCESS의 'Diamonds', KAN의 '愛は勝つ(사랑은 이긴다)', 나가부치 쯔요시의 'とんぼ(잠자리)', 마키하라 노리유키의 'どんなときも(언제라도)', 米米club의 '浪漫飛行(낭만비행)' 등이 이 시절에 밀리언셀러 이상을 달성했던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11. [11] 101번째 프로포즈는 9월16일에 종영하였지만 방송 종료 후에도 6주 이상을 오리콘 싱글 챠트 1위를 지켰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리콘 챠트 13주 연속 1위는 역대 5위의 기록, 누계매상 282.2만장은 역대 6위기록.
  12. [12] 발매일로부터 1주간의 판매량 혹은 발매한 날로부터 최초의 오리콘차트결과가 발표되는 월요일까지의 매상
  13. [13] 원곡과는 달리 단독으로 발표된 적이 없기 때문에 국내 노래방에서 찾아 부를 수가 없는 곡이다. 곡을 들으려면 박상민의 앨범을 직접 사거나 벅스뮤직같은 사이트에서 돈주고 음원을 다운받는 수밖에는 없다. 참고로 박상민의 저 8집 앨범은 차게아스의 LOVE SONG을 그대로 리메이크한 LOVE SONG등 수록곡 대다수가 일본 음악을 리메이크한 앨범이다.
  14. [14] 한국에서 2000년대 초반에 춤추는 대수사선의 주인공으로 잠시나마 인기를 끈 그 오다 유지 맞다. 참고로 오다 유지는 이 드라마 이후 영화나 드라마에서 악역은 일체 맡지 않았다.
  15. [15] 이후 미스터 칠드런이 1996년에 더블 밀리언 싱글을 두 곡 보유한 아티스트가 된다.
  16. [16] 여담으로 가사 중에 '一緖に毆りに行こうか(같이 패러 가볼까)' 라든지 'そいつを毆りに行こうか(그 자식을 갈겨주려 가볼까)' 등의 '폭력을 권장하는 불건전한 가사가 학생교육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YWCA PTA로부터 방송 금지 청원이 올라가기도 한 것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17. [17] 국제음반산업협회 (IFPI)의 주도로 1989년부터 시행된 상으로 전세계 160여국에서 방영될 정도의 음반업계에선 가장 큰 상 중 하나이다. 국내에서는 다소 인지도가 낮은 것이 이 상은 한국 음반 산업협회는 2014년 7월 1일에야 가입했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그야말로 아무리 큰 상이라도 남의 집 잔치였을 뿐. 한국이 IFPI 가입이 이렇게 늦은 이유는 다른 나라에 비해 디지털 음원의 전환이 빨라서 가입할 필요가 없었다고 하는 의견도 있으나 IFPI는 음반 뿐 아니라 디지털 음원에 대한 저작권에까지 영향을 주기 때문에 디지털 음원의 전환 시기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당장 애초에 한국이 부랴부랴 IFPI에 가입하게 된 이유 자체가 2010년 4월 1일 이 단체의 한국 대표부 이름으로 국내 음원서비스 제공업체에 스마트폰(아이폰 포함)을 통한 음원의 해외 서비스 제공을 제한해 달라는 공문이 발송되어 국내 음원업체들이 해외 서비스를 접게 되었기 때문이라서(...) 그것보다는 IFPI에 가입하게 되면 판매된 음반과 다운로드 수가 전세계적으로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하는데 그러면 이래저래 세금, 홍보, 음반 판매 수익의 배분 등에서 불이익을 받게 되는 '음원업계의 사정' 때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18. [18] 조연급이던 와쿠이 에미를 일약 스타로 만든 '와쿠이 에미 게츠쿠 3부작'의 첫번쩨 작품. 카라사와 토시아키백마탄 왕자 남자 주인공을 맡았다. 드라마의 내용은... 그냥 다 필요없고 이 드라마의 영문 제목은 'Tokyo Cinderella Story'이다(...)
  19. [19] 2000년 초만해도 당시는 일본어 가사로 된 노래는 누가 부르건 판매 및 방송 금지, 일본인 가수가 '부른' 비일본어 노래, 일본인이 작사/작곡한 '노래'는 원칙적 금지, 심의 후 선별적 예외 가능이었던 시기였지만 (예: 연주로만 이루어진 곡이므로 예외 <- 이런 식으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의 3차 단계를 맞아 일본인이 작사/작곡한 곡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범케이스로 발매될 수 있었다. 일본어로 된 노래의 발매는 이후 2004년 1월 1일 '4차 대중문화 개방'에서부터야 허용되었다.
  20. [20] 특히 앞서의 헌정앨범 'One voice'가 EMI에서 출시된 것을 놓고 차게아스 듀오로서 계약되어 있던 포니캐년과의 불화가 심해졌다는 설이 팬들 사이에서 돌기도 했다. 참고로 이미 ASKA는 1995년 도시바EMI로 레이블을 옮긴 상태였다.
  21. [21] 그런데 한국에서는 '2001년 한국방문의 해 홍보대사'로 임명되었다는 기사도 존재한다.
  22. [22] 공연 준비 과정에서 당시 참여연대 사무처장이었던 박원순 변호사가 법적인 자문 역할을 맡았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차게아스 멤버와 같이 찍은 사진도 아직 남아 있다.
  23. [23] 공교롭게도 차게 앤 아스카의 한국공연을 결심하게 한 이희호 여사가 타계한 지 2개월 정도 지난 시점이다.
  24. [24] 여담으로 이때의 1위곡은 클래식 아티스트로서 최초의 오리콘 1위를 차지한 秋川雅史(아키카와 마사후미)의 '千の風になって(천의 바람이 되어)'로 이 곡은 이후 이후 임형주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헌정곡으로 불러 국내에서도 크게 히트하였다.
  25. [25] 이 투어의 12월 24일 마지막 국립요요기경기장에서의 콘서트가 2020년 현재까지의 차게아스로서의 마지막 콘서트이다.
  26. [26] 데뷔 싱글
  27. [27] 첫 오리콘 싱글차트 10위권 진입
  28. [28] 원래의 LP판 앨범 'CHAGE&ASUKA IV -21世紀-'에는 실려있지 않았으나 이후 CD화되며 보너스 트랙으로서 수록됨.
  29. [29] 동시 발매 싱글 포함으로 차게 작곡인 곡이 A면 싱글이 된 최초의 싱글
  30. [30] 포니캐년으로 이적 후 첫 싱글
  31. [31] 오리지널 앨범에는 수록되지 않음
  32. [32] JAL '87 오키나와 캠페인 송
  33. [33] 동시 발매되지 않은 싱글에서 차게 작곡이 A면 싱글이 된 최초의 싱글
  34. [34] B면 곡인 ripple ring은 다음 앨범인 'ENERGY'에 수록
  35. [35] 유닛명이 'CHAGE&ASUKA C and A'로 바뀐 최초의 싱글
  36. [36] 유닛명이 'CHAGE&ASKA'로 바뀐 최초의 싱글
  37. [37] 첫 오리콘 싱글차트 1위, 첫 더블밀리언
  38. [38] 그것보다 우리가 전하고 싶은 것은
  39. [39] 앨범에는 아카펠라 버젼이 수록, 싱글 버젼은 앨범 미수록
  40. [40] On Your Mark는 앨범 'CODE NAME.2 SISTER MOON'에 수록
  41. [41] 최초의 영문 가사곡
  42. [42] 유니버설 뮤직 재팬 이적 후 첫 싱글, 유닛명이 'CHAGE and ASKA'로 바뀐 첫 싱글
  43. [43] 제목의 C-46은 46분짜리 카세트 테이프를 의미
  44. [44] 동시발매가 아닌 싱글에서 CHAGE의 곡이 A면 싱글곡이 된 두번째의 싱글
  45. [45] Stardust Revue 와의 콜라보레이션 싱글, 차게아스의 앨범에는 미수록
  46. [46] 데뷔 25주년 기념으로 발매된 밀리언셀러 싱글들의 리마스터링 싱글
  47. [47] 3만장생산한정
  48. [48] 3만장생산한정, 2016년 현재까지 차게아스로서 발매된 최후의 오리지널 싱글
  49. [49] 데뷔 첫 앨범, 발매 당시 앨범의 캐치 프레이즈는 '10年後、このアルバムは伝説になる。(10년후, 이 앨범은 전설이 된다.)
  50. [50] 최초의 오리콘 앨범차트 1위 앨범
  51. [51] 앨범 콘셉트는 돈키호테
  52. [52] 토에이증기 기관차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真紅な動輪(붉은 바퀴)'의 사운드 트랙으로 제작된 앨범. 차게아스로서는 첫 타이업
  53. [53] 정식 LP판으로의 베스트 앨범이 아니라 카세트 테이프로만 발매된 베스트앨범으로 공식 홈페이지에는 실려 있지 않다.
  54. [54] 앨범의 콘셉트는 '다가올 21세기를 향한 사랑과 평화'
  55. [55] 앨범의 콘셉트는 '絆'(인연), 수록곡 중 'TEKU TEKU'와 'シングル・ベッド(싱글 베드)'는 원래 아카시야 산마에게 제공된 곡을 셀프커버한 것.
  56. [56] 한정판으로 발매된 크리스마스 미니 앨범으로 CD로는 1994년 12월 16일 'SUPER BEST BOX SINGLE HISTORY 1979-1994 AND Snow Mail'의 네번째 CD 'Snow Mail'에 리마스터링되어 재발매된다.
  57. [57] 원래는 영국에서 제작하려던 앨범이었지만 영국 엔지니어들의 스케줄 문제로 영국 스텝들을 일본으로 불러 녹음하였다. 후속 앨범 'ENERGY'와 같은 시기에 녹음되었다.
  58. [58] 2CD사양의 앨범으로 CD1은 오리지널 앨범으로 CD2는 이전 발표된 곡을 편곡해서 수록하였다.
  59. [59] 앨범 'Z=ONE'에서 'PRIDE'까지의 발라드 넘버를 모은 베스트 앨범, 최초 발매시에만 해도 유닛명이 'CHAGE&ASUKA'였지만 발매후 유닛명이 'CHAGE&ASKA'로 바뀌면서 커버를 다시 제작해서 판매하였다.
  60. [60] 트리플 밀리언, 2인조 그룹의 앨범 판매량으로 당시 역대 1위를 기록했다. 이 기록은 이후 2006년 코부쿠로의 'ALL SINGLES BEST'에 의해 경신된다.
  61. [61] 데뷔 15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베스트 리믹스 앨범
  62. [62] 4CD 사양으로 CD3까지는 역대 발매된 싱글 + 이전 발표된 'Snow Mail'을 포함한 겨울 노래들을 추가하여 만든 'Snow Mail' CD를 합본한 30만장 한정 판매 앨범
  63. [63] 앨범 'TREE'에서 'STAMP'까지의 발라드 넘버를 모은 베스트 앨범
  64. [64] 2016년 현재까지 발매된 최후의 차게아스 오리지널 앨범
  65. [65] 2016년 현재까지 발매된 차게아스 최후의 앨범
  66. [66] 당시 전학생이 검도를 한다는 것만 알고 있던 차게는 이후 옆 교실에서 연습하는 ASKA를 보고는 '죽도만 들고 있는게 아니었어?' 라고 역으로 놀랐다고.
  67. [67] 별도로 참가한 ASKA는 당시 최우수 가창상을 받는데 그쳤다.
  68. [68] 일본 위키페디아에서는 1988년 TBS테레비 우타방에서 직접 본인이 얘기했다고 한다.
  69. [69] 2004년 8월 30일 후지 테레비 HEY! HEY! HEY! MUSIC CHAMP
  70. [70] 일본어 발음으로는 아이란도, 곧 섬을 의미하는 island를 중의적으로 의미하기도 한다.
  71. [71] SMAP×SMAP 2009년 8월 10일 방송에서
  72. [72] 茶会의 일본어 발음이 '챠카이'기 때문에 동음이의어로 '차게의 차냐?'라고 해석될 수도 있게 만든 일종의 언어유희
  73. [73] 본인이 감독, 카메라맨, 음향감독을 맡았다.
  74. [74] 여담으로 한자는 다르지만 읽는 법이 같은 콘도 미에코(近藤美恵子)의 경우는 1936년생의 영화배우도 한분 계시고 유골도난 사건으로 떠들썩했던 콘도 마사히코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래서 검색창에 차게 콘도를 치면 콘도 미에코(美江子) 뿐만 아니라 미에코(美恵子)도 같이 뜬다(...)
  75. [75] 스즈카와 아야코는 이후 철덕후임을 밝히면서 2015년에는 핀게닌(콤비나 팀 없이 혼자 활동하는 게닌)이 되어 현재도 활동중이다. 그 이후로는 자신의 아버지라든지 이런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언급은 없는 상태.
  76. [76] '花暦'의 경우는 동경문화회관에서 있었던 '大友直人(오오토모 나오토) produce Popular Week Chage Concert' 에서, 앨범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77. [77] 이전 MULTIMAX와 차게아스에서 불렀던 노래를 Chage만의 녹음으로 다시 만든 베스트앨범
  78. [78] 타이틀 곡인 'アイシテル'는 앨범 수록곡 중에 8비트의 노래가 없다는 평을 듣고 그 자리에서 코드 진행만으로 완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표지에서는 26년만에 선글라스를 벗은 차게의 얼굴을 볼 수 있다.
  79. [79] 공식 이름이 'Chage'가 되고 나서의 첫 앨범으로 타 아티스트의 커버곡 위주로 꾸며져 있다. 무려 나카모리 아키나의 '飾りじゃないのよ、涙は'를 들을 수 있다(...)
  80. [80] 윤회전생을 테마로 앨범 전체가 하나의 조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데즈카 오사무의 '불새'를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81. [81] 앨범명의 어원은 사카에를 거점으로 한 모 그룹모 싱글과 같다.
  82. [82] 차게아스의 공식적 그룹명이 CHAGE&ASUKA에서 CHAGE&ASKA로 바뀐 시기와 일치한다.
  83. [83] 차게아스의 공식적 그룹명이 CHAGE&ASKA에서 CHAGE and ASKA로 바뀐 시기와 일치한다.
  84. [84] 한때는 나가이 고 원작의 데빌맨의 등장인물인 아스카 료에서 따온 것이라는 설이 돌았으나 본인은 부정했다.
  85. [85] 작곡은 CHAGE와 공동 작곡
  86. [86] 예정없이 부랴부랴 싱글 컷을 한 곡이다보니 커플링 곡인 '君が愛を語れ(네가 사랑을 말해라)'는 평소 준비기간이 긴 ASKA의 싱글답지 않게 급조해서 만들어야만 했다. 특히 MV의 경우는 동시기의 차게아스의 다른 MV들과 비교해 봐도 정말로 급하게 만든 티가 역력하다주소 참조. 본인도 이후 인터뷰에서 '너무 서둘러 만들었다.'고 인정했을 정도. 당시의 천안문 사태, 걸프 전쟁, 소련 등 동유럽권 공산주의 국가들의 붕괴 등으로 불안했던 세계정세에 대한 불안감이 가사에 드러나 있다.
  87. [87] 2012년 무크지에서 이 사실을 후회하는 글을 싣기도 했지만 이미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뒤인 데다가 언론과의 사이는 크게 벌어져 있어서 별 도움이 안됐다.
  88. [88] 문예춘추의 자매지인 주간지로 본래의 발음은 '분슌'이지만 워낙에 '문춘'이라는 이름이 유명해져버린 잡지인지라 본문에는 문춘으로 표기하였다.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더 선 급의 ~카더라 류의 찌라시 모음집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워낙에 자극적인 기사로 낚시를 잘해 악명이 높다(...).특히 AKB48팬들의 원수
  89. [89] 이 출연이 2016년 현재까지의 ASKA의 마지막 공중파 출연이다.
  90. [90] 여기서는 야쿠자를 의미
  91. [91] 차게아스는 이전 야마하소속일때부터 소속사의 정책상 12월 31일은 무조건 쉰다라는 원칙 하에 홍백출전을 하지 않고 있었으며 이후 야마하를 떠나서도 이 원칙에 따라 홍백에는 출전하지 않고 있었다.
  92. [92] 각성제를 뜻하는 속어
  93. [93] 이 와중에 FLASH는 3년간 ASKA에게 마약을 팔았었다는 업자의 인터뷰를 싣고 ASKA는 이미 하루에 3.5g 이상을 흡입해야 하는 중증의 중독자라는 인터뷰를 실었지만 이후 FLASH에서 게재했던 그 약은 치사량이 하루 1g임이 밝혀지며 빈축을 사기도 했다.
  94. [94] 복수의 언론기관에 동시에 뿌려졌다는 점에서 ASKA와 같이 일했던 음악관계자의 동시다발적 폭로라고 보고 있는 듯하다. 사실 라이브 연습 중 일어난 사건에 대해 음악관계자가 아니면 알기 어려웠을 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ASKA가 음악작업 때마다 관계자들과 심하게 트러블이 있는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업계에는 ASKA에 대해 악감정을 갖고 있는 스탭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95. [95] 이 와중에 라디오 방송에서 CHAGE가 라이브의 연기를 발표하면서 '하루라도 빨리 ASKA가 건강히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몸이 회복될 때까지, 물론 저는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어른의 대응'을 한 것이 유일한 좋은 의미에서의 화제가 되기도.
  96. [96] ASKA가 체포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나고 나서 한참 후에 ASKA가 블로그에 CHAGE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절대 자신과 싸움을 할 성격이 아니라며 CHAGE와 자신이 주먹싸움을 했던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지만 이미 그때는 때가 너무 늦어 있었다.
  97. [97] 마츠우라 마사토(松浦勝人), 에이벡스의 난 문서에도 나와있는 現 에이벡스 총사장 맥스 마츠우라
  98. [98] 2016년 현재 아들 소우는 2013년부터 THE N.E.E.T라는 밴드에서 보컬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밴드의 이름을 The roots로 바꾸고 지금도 밴드 활동을 계속하고 있지만 운영하던 바는 폐점할 수 밖엔 없었다고. 카오루는 2년간 음악활동 뿐 아니라 한동안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2016년 초부터 조금씩 라이브하우스 무대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다. 둘 다 자기 아버지때문에 연예계 생활이 완전히 꼬여버린 셈.
  99. [99] 같은 혐의를 받았던 사카이 노리코가 500만엔, 코무로 테츠야가 3000만엔이었으며 전 라이브도어 CEO였던 '호리에몽' 호리에 타카후미의 경우는 무려 3억엔이었다.
  100. [100] 나중에 ASKA와 부인이 사건 이후에도 파혼을 안한 이유를 알고 보니까 ASKA가 사건 이후 부인에게 '가수로서 반드시 재기하겠다'고 맹세하면서 붙들어 매서였다고...
  101. [101] CHAGE가 사건이 터지고 나서 1년이 흐른 2015년 9월 27일에 솔로 투어를 선언하면서 사실상 금지곡이 되버린 차게아스의 곡들을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고 싶다는 식으로 언급을 한 적이 있긴 했다. 다만 가끔씩 기자들이 자신에게 ASKA의 근황에 대한 질문을 할 때는 항상 노코멘트로 일관했다고 한다.
  102. [102] 현재도 지금은 지워진 블로그의 캐쉬에 저장된 페이지를 통해 원문을 볼 수 있다.
  103. [103] 1992년 AV 배우로 데뷔했으며, 2000년 폭행, AV 출연, 낙태, 성형 등을 고백한 자서전 '플라토닉 섹스'가 베스트 셀러가 됐으며, 영화나 드라마로도 만들어지며 일약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이후로도 거침없는 말빨로 한동안 TV 패널로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다. 런던하츠의 '가치매기는 여자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패널이기도 했다. 2007년 건강 문제를 이유로 연예계에서 은퇴하였다가 2008년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으나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2002년 FIFA 월드컵 당시 한 토크쇼에서 '대한민국 축구는 반칙으로 승리한 것'이라고 발언해 욕을 바가지로 퍼먹은 그 본인 맞다.
  104. [104] 그나마 미국의 경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처럼 ASKA급으로 마약에 중독되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어도 재활하고 몇 년이 지나서 매우 성공적으로 재기한 사례가 몇 있기 때문에 이쪽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보다는 상당히 관대한 편이다. 물론 이것은 미국이 한국과 일본보다 유명 연예인은 물론 일반인까지 마약에 접근하기가 몇 배로 쉽다는 점이 적잖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105. [105] 사실 ASKA 말고도 아이돌 출신 가수ᆞ작곡가인 오카무라 야스유키가 2004년을 시작으로 2007년까지 3차례에 걸친 각성제 소지ᆞ투약 혐의로 징역을 살다 나와 7년동안 방황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오카무라의 경우에는 투약 시점이 쇠퇴기였고, 복귀 후에는 관련 질문이 나올 때 마다 사죄,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비난여론이 많이 수그러들었다.
  106. [106] 원곡은 여기서 들을 수 있다.
  107. [107] ASKA가 2014년에 함께 체포된 카스미와 자기 부인 몰래 밀회했던 공간이다.
  108. [108] 한국 연예인으론 세정(구구단)이 해당 프로그램에 출연
  109. [109] '3년B반 긴파치선생', '101번째 프로포즈'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배우
  110. [110] 라디오에서 밝히기로는 '팬들에게 보이면 안되니까' 경찰이 직접 경찰차에 태워서 경찰서로 이동, 그곳에서 감점 5점을 받았으며 며칠 후 아저씨에게 사과하러 갔더니 정작 아저씨는 기억을 못했더라는 후일담을 얘기한 바 있다.
  111. [111] 이전 쟈니스 소속의 아이돌 'シブがき隊(시부가키타이)'에게 제공했던 곡을 셀프커버
  112. [112] 이 길고 난해한 제목은 일본어 속담인 '晴天を誉めるには日没を待て'='모든 일은 끝날 때까지는 끝난게 아니니 방심하지 마라'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113. [113] 여담으로 PV 촬영은 베트남에서 이루어졌는데 정작 PV 촬영 당시 곡 자체가 완성이 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가사는 전혀 쓰여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보니 정작 PV내내 베트남의 거리를 걷는 장면만 나오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그당시 PV 답지 않게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114. [114] 타이틀 곡이 두번째 곡이다. 커플링 곡인 'こんなふうに(이런 식으로)'는 앨범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은 미수록곡
  115. [115] 도호쿠 대지진 지원 기금의 마련을 위해 이전 쇼와 시대의 명곡들을 커버한 곡들을 순차적으로 발매한다. 2011년4월22일 廃墟の鳩(폐허의 비둘기, 원작자: 더 타이가즈), 2011년4월26일 上を向いて歩こう(위를 보고 걷자, 원작자: 사카모토 큐), 2011년7월30일 巴里にひとり(마을에 혼자, 원작자: 사와다 켄지), 2011년10월8일 旅人よ(여행자여, 원작자: 카야마 유조), 2012년3월16일 木綿のハンカチーフ(목면의 손수건, 원작자: 오오타 히로미). 참고로 이 곡들 중에 '위를 보고 걷자'라는 곡은 1963년에 아시아 가수 최초로 미국에 SUKIYAKI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빌보드 차트 1위를 달성한 그 전설적인 노래 맞다.
  116. [116] '가사 내용이 지금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는 표면적인 모습과는 달리 속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얽혀 끌려가고 있는 자신이 있다.'라는 가사 때문에 후에 일어날 '그 일'이 있고 나서야 가사의 의미가 재조명을 받기도 하였다.
  117. [117] 최초의 오리지널 앨범. 원래 솔로 앨범은 4~5년전부터 구상하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차게아스로서의 활동을 우선하고 있던 상황이어서 스탭의 만류로 실현되지 못했다. 이 맘때쯤부터 차게아스로서의 음악적 색깔이 포크 음악에서 팝으로 옮겨가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에 '아직 내 안에는 이런 음악이 남아 있다.'라는 것을 초기때부터의 팬들에게 보이고 싶어 솔로 앨범을 기획했다고 한다. 그때문에 주로 포크 색이 짙은 발라드 위주의 구성으로 되어 있고 다른 아티스트에게 제공된 곡들의 셀프 커버 및 '蘇州夜曲' 같이 즐겨 부르던 노래의 커버곡도 포함되어 있다.
  118. [118] 특히 이 앨범에 수록된 '蘇州夜曲'의 작곡자인 服部良一(핫토리 료이치)는 전후 재즈 풍을 가미한 일본 팝 가요에 수많은 명곡을 남긴 일본 대중음악사에서도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데 2007년 일본 레코드 대상 시상식에서 '핫토리 료이치 탄생 100주년 기념 무대'에서 ASKA가 예고 없이 등장, 바로 이 '蘇州夜曲'을 서프라이즈로 불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119. [119] 첫 밀리언 앨범, 이 당시 인터뷰를 보면 데이비드 포스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총 10곡중에 5곡이 다른 가수에게 제공되었던 곡들의 셀프 커버이다.
  120. [120] 마지막 12번째 곡인 '月が近づけば少しはましだろう(달이 가까워지면 조금은 낫겠지)'는 2012년 ASKA 팬클럽에서 뽑은 '가장 좋아하는 ASKA의 노래'로 뽑힌 바 있다.
  121. [121] 30주년 기념 셀프커버 앨범 2탄으로 주로 차게아스의 곡중에서 커플링 곡이나 주목 받지 못했던 앨범 곡을 다시 부른 곡이 많다. 앨범 전체가 한 편의 연애소설을 보는 것 처럼 보이도록 구성되었다.
  122. [122] 셀프커버앨범인 STANDARD의 뒤를 잇는 풀커버앨범으로 2년10개월만의 신곡인 '思い出すなら(떠올린다면)'이 포함되어 있다.
  123. [123] 2001년 8월 27일 후지테레비 'HEY! HEY! HEY! MUSIC CHAMP'에서 언급되었다.
  124. [124] 라이브 공연 장면을 보면 CHAGE는 발을 모으고 똑바로 서서 양 손을 허리 춤에 걸친 특유의 자세로 이 곡을 시작한다. 무대에서 불이 꺼지며 CHAGE가 이 자세를 취하는 순간 '아, 다음은 에필로그구나.'하고 알 수 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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