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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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천정배(千正培)

출생일

1954년 12월 12일

출생지

전라남도 신안군

본관

영양 천씨

최종 학력

서울대학교 법학과 석사

소속 정당

국민의당

의원 선수

6

선거구

광주 서구 을

종교

개신교

가족 관계

2남 3녀 중 장남

배우자

서의숙

자녀

2녀

약력

(현)제20대 국회의원

(현)국민의당 공동대표

(전)제15~19대 국회의원

(전)법무부 장관

외부 링크

블로그

1. 개요
2. 정계 입문 전
3. 변호사 활동
4. 정치 활동
4.1. 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 시절
4.2. 열린우리당 시절
4.3. 대통합민주신당~민주통합당 시절
4.4. 호남정치의 복원작업
4.5. 국민의당 대표
5. 가족관계
6. 선거이력

1. 개요

대한민국의 법조인이자 정치인. 주요 경력으로는 법무부 장관, 제15~20대 6선 국회의원이 있다.

서슬 퍼런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법관 임용을 단호하게 거부했고, 정치에 입문한 이후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노무현의 진가를 가장 먼저 발견하였으며, 그를 대통령으로 당선 시키는 데 1등 공신이 되었다. 노무현 당선 이후에는 동교동계의 구태에 맞서 '정풍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정치사에 길이 남을 국민경선제와 상향식 공천제의 도입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2007년 이후로는 원칙 없는 갈짓자 행보를 계속하여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2. 정계 입문 전

1954년 12월 12일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목포시 공무원이었기에 초등학교 시절까지는 전남 신안의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목포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목포시에서 부모와 살게 됐다. 목포중학교 재학 중에 전라남도 학술 경시 대회에서 1등을 하는 등 일찍부터 공부에 소질을 보였다.[1] 중학교 졸업 후 명문 목포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그리고 목포고를 수석 졸업하면서 그 해 대학예비고사에서 인문계 전국 수석을 차지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하는 등 이때부터 '목포 3대 천재' 라는 타이틀을 얻었다.[2]

서울법대 재학중인 1976년 제18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그 뒤 사법연수원을 3등으로 수료하였으며, 군복무는 공군 군법무관으로 대위로 전역하였다. 통상적으로는 판검사를 받을 수 있는 성적이었지만, 군복무 중 5.18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듣고 전두환 정권 하에서 법관 임용을 거부하고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3. 변호사 활동

대표적인 인권변호사 중 1인으로 활동하였다. 1993년 법무법인 해마루를 설립했고, 거기에 노무현전해철 등을 참여시켰다. 그 후 법조계에서 인권문제와 노동문제 등에 관해 두각을 나타냈다.

4. 정치 활동

4.1. 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 시절

김대중의 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본격적인 정계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경기도 안산시 을 지역구로 당선되었고 이래 같은 지역구(안산시 을, 안산시 단원구 갑)로 4선을 기록하였다. 정동영, 신기남과 더불어 새천년민주당 정풍운동을 주도, 정권 실세였던 권노갑의 2선 후퇴를 주장하는 등, 당내 소장파 의원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국민의 정부와 핵심 지지층이 갖고 있던 고민 중 하나가 마땅한 후계자가 없다는 것이었고,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호남 출신 대권 주자가 부재하다는 것이었는데,[3] 정동영, 신기남 등과 더불어 지금 당장의 중량감은 떨어지더라도 잘 성장하면 호남권 대권 주자, 즉 뉴 DJ가 될 수 있으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정치 개혁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젊은 지지층에 천정배가 갖고 있던 스마트하면서도 강력한 개혁적 성향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온 면이 있다.

2001년 7월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한 해 앞둔 시점에서 노무현에 대한 깜짝 지지 의사를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민주당 내에서 노무현을 지지하는 현역 국회의원은 천정배 의원 외에 아무도 없었는데, 얼마 안 가서 노무현이 급격히 세를 불려가며 민주당 대선후보로 지명되고, 대선 승리까지 이루어내자, 그의 혜안을 많은 사람들이 다시 보게 되었다. 2002년 중반에는 노무현이 민주당 내에서 사실상 지도력을 상실하고 후단협에 의해 흔들리는 등 위기를 겪었지만, 그때에도 조금의 흔들림조차 없이 노무현을 계속 도와줘서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에 크게 기여하였다.

2003년 새천년민주당 분당 국면에서는 기존의 지역구도를 타파하고 전국 정당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열린우리당 창당에 앞장섰다.[4] 민주당 내에서 지역구도에 기생하며 점차 보수화, 기득권화하고 있는 동교동계에 맞서서 새로운 세력을 중심으로 깨끗한 진보정치를 실현하겠다는 그의 구상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

4.2. 열린우리당 시절

2004년 열린우리당의 창당 작업이 마무리 된 후, 열린우리당 의장으로 취임했다. 그 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탄핵열풍을 타고 국회에서 단독 과반을 차지하자, 천정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그러나 제17대 국회 시작하자마자 국가보안법 폐지, 사학법 개정, 과거사청산법 제정, 언론개혁법 제정을 밀어붙인 것이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 당시 한나라당은 4대 개혁입법을 가리켜 ‘4대 국론 분열법’으로 규정하고 격렬하게 저항했으며, 이러한 저항이 보수언론의 선동때문인지 뜻밖에도 여론의 호응을 얻었다. 당시 열린우리당 내에서도 군 출신, 관료 출신의 보수성향 인사들이 4대 개혁입법에 협조를 해주지 않는 등 자중지란 콩가루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4대 개혁 입법은 여야간에 적당히 타협되어 ‘누더기 법’으로 전락했다. 예를 들어 시장 지배적 사업자에 대한 공정거래법상 규제를 도입하는 것을 뼈대로 한 신문법은 1개 일간지의 시장점유율이 30% 이상이거나 3개 일간지의 점유율이 60%를 초과할시 규제를 가한다는 규정이 삭제되고, 신문지면에서 광고 비율이 50%를 넘지 않도록 규제한다는 규정이 삭제된 채 통과되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언론개혁은 좌절된 것이나 마찬가지.

그나마 국가보안법은 독소조항만 제거하는 식으로 적당히 타협하는 게 좋았을텐데, 강성 의원들이 "완전 폐지가 안 될 바엔 차라리 그냥 두는 게 낫다"고 주장하여 그대로 존치해버리고 말았다. 거기에 과거사청산법의 통과도 무산되었다. 열린우리당 일각에서는 이런 소모적인 이념논쟁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일단은 민생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주력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천정배 의장이 당내 강성 의원들에게 밀려 4대 개혁입법에 올인하는 바람에 묻히고 말았다.

결국 4대 개혁입법 제정에 실패하고, 당내 리더십도 상실하자, 2005년 1월 1일 원내대표 직에서 사퇴하였다. 열린우리당이 보수층에서 공격을 받는 것 이외에 진보층과 중도층에서도 지지를 상실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이때쯤부터였다.

2005년 6월에는 법무부 장관에 취임했다. 그런데 2005년 10월에 동국대학교 강정구 교수의 한국 전쟁 관련 발언에 관하여 검찰에 불구속 수사를 할 것을 요지로 하는 수사 지휘를 내렸다. 이는 김종빈 검찰총장의 사퇴를 불러왔고, 보수층을 중심으로 민심이 급격하게 이반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과거 검찰의 독립을 위해 법무부 장관의 검찰에 대한 지휘권을 삭제하는 내용의 검찰청법 개정안을 제안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정작 자기가 법무부 장관이 되자 소신이 바뀌었다는 비판을 들었다.

그 후 참여정부에 대한 염증이 가속화되고, 열린우리당 역시 집권 동력이 상실되며 호남에서조차 비토되는 상황에 이르자, 2007년 1월 열린우리당 탈당을 선언하였다. 탈당 후 김근태와 더불어 한미 FTA 반대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5]

4.3. 대통합민주신당~민주통합당 시절

이후 대통합민주신당이 출범한 뒤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으나 컷오프에서 탈락하였다. 대선 과정에서는 문국현과의 정책 연대를 구상하는 등, 반한나라당 통합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2008년 총선에서 4선 국회의원이 되었고, 주로 이명박 정부의 언론 정책에 반대하는 활동을 펼쳤다.

2009년 미디어법이 한나라당에 의해 날치기로 강행 처리되자, 국회의원을 전격 사퇴하고 원외 활동에 앞장 섰다. 이 기간에 쌓인 1억 2천만 원의 세비 수령을 미련 없이 거절하여,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 후 2010년 민주당 전당대회 지도부 경선에서 5위를 차지, 최고위원이 되었다.

2011년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찬반 주민투표의 결과로 사퇴, 서울시장이 공석이 되자 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그러나 박영선 의원에게 패하며 후보가 되진 못했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송파구 을에 출마해서 단 3% 차이로 낙선했다.[6]

4.4. 호남정치의 복원작업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했다. 이후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광주 서구 을에 출마하여 새정치민주연합 조영택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탈당 후 천정배가 내세우는 것을 요약한다면 야권 내 '영남패권주의' 타파를 통한 '호남정치의 복원'인데, 이 '호남정치'의 파괴 원인으로 지목 받는 게 천정배가 주도한 바 있는 열린우리당 창당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부분이 있다. 또한 이를 두고 호남 지역주의로 비판하는 시각이 있기도 한 상태.[7] 현실론적 시각에서 이전에 비해 호남권의 인구가 충청권보다 적어진 현실에서 호남으로 영남을 견제한다는 논리가 성립 가능한가 하는 비판도 있다.

이후 국민회의를 창당했고, 국민의당과 합당하며 손을 잡았다. 국민의당 창당대회에서 안철수와 함께 공동대표에 취임했다.

4.5. 국민의당 대표

2016년 2월 1일 국민의당 공동대표로 선임되었다. 3월 더불어민주당김종인 대표가 야권 표 분산으로 새누리당이 어부지리를 얻어 4.13 총선에서 압승하는 일이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 '야권 통합론'을 제시하자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안철수 상임대표가 야권 통합에 완강한 반대 의사를 보이자 잠시 안 대표의 뜻에 따라가는 듯한 모습을 보이다가 다시 현 야권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했다. 3월 10일에는 야권 연대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는다면 '중대 결심'을 내리겠다며 국민의당 탈당을 불사할 뜻도 있다는 생각을 드러내 배수진을 쳤다.

그렇게 한동안 당무를 거부하기까지 하면서 안철수 상임대표와 줄다리기를 하다가 결국에는 뜻을 접고 안철수와 손을 잡았다. 이에 천정배 의원이 창당했었던 국민회의의 탄생에 적극 일조했었던 천 의원의 외곽 조직인 '새로운 길'은 천정배 의원과 결별하겠다고 선언했다.#

4월 13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양향자의 강력한 도전을 뿌리치고 광주 서구 을에서 무난히 당선되었다.

6월 28일 안철수 대표와 함께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김수민·박선숙 의원과 왕주현 사무부총장 등이 연루된 4·13 총선 홍보비 리베이트 수수 의혹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다. 그의 대표직 사퇴는 사실 대단히 큰 결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철수에 비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해 안습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관련 기사 참조.

5. 가족관계

슬하에 딸 둘을 두었는데, 첫째 딸 천지성(1978년생: 아래 사진 왼쪽) 씨는 대원외고 -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2003년 제 45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현재 서울중앙지법에 근무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 딸 천미성(1980년생: 아래 사진 오른쪽) 씨는 서울 과학고등학교 -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현재 주 이란 한국 대사관에서 근무 중이다. 공부 실력 하나는 타고난 집안인 듯.

6.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산시 을)

새정치국민회의

36,902 (38.8%)

당선 (1위)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산시 을)

새천년민주당

37,523 (49.5%)

당선 (1위)

2003년 열린우리당으로 당적변경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산시 단원구 갑)

열린우리당

32,094 (58.2%)

당선 (1위)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산시 단원구 갑)

통합민주당

23,044 (49.1%)

당선 (1위)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송파구 을)

민주통합당

46,010 (46.0%)

낙선 (2위)

2015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광주 서구 을)[8]

무소속

26,256 (52.4%)

당선 (1위)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광주 서구 을)

국민의당

42,599 (54.5%)

당선 (1위)


  1. [1] 다만 공부를 잘 한 것에 비해 리더십은 별로 없는 편이어서 학창시절 12년 동안 반장은 한번도 못했다고 한다.
  2. [2] 그런데 김어준으로부터' 그러면 나머지 두 천재는 누구냐'라는 질문을 받고서는 자기도 '목포 3대 천재'가 대체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대답한 바 있다(...).#
  3. [3] 입지가 굳건했던 이인제는 당시 시점에서는 지역색이 짙지 않은 경기-충청권 인사였고, 결국 대통령이 된 노무현은 PK 인사에, 나머지는 대권 주자로는 좀 아쉽거나 고만고만한 수준이라는 게 세간의 인식이었다.
  4. [4] 사실 이 분당 국면도 구도로 본다면 호남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는 구 주류와 호남에서 안주하지 말고 PK 등과도 연합해야 한다는 탈당파 간 대결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후 총선에서 탈당파가 창당한 열린우리당이 호남 지역구까지 상당 부분 잠식한 것은 제법 많은 유권자들이 천신정을 믿고 따라간 결과가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5. [5] 천정배의 경우 법무장관 시절에는 FTA 비준 합동담화문에 서명한 적이 있어, 이후 2011년 FTA 정국에서 한나라당에 비판 받기도 했다.
  6. [6] 송파구 을은 부유한 동네가 많기 때문에 새누리당이 강세인 지역이다. 게다가 박근혜 후보에게 70%를 준 문정2동도 이 지역구다. 다만 천정배가 생각보다 선전한 이유는 박계동국민생각 후보로 출마해서 여권 표가 어느 정도 분산되었기 때문이다.
  7. [7] 주로 지역주의 정치에 심리적으로 거리감이 있거나 비판적인 젊은 층에서.
  8. [8] 전임자 오병윤 통합진보당 해산으로 의원직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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