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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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4. 중국의 역대 왕조
5. 오해: 일본의 작위?
6. 번역에 관하여
6.1. 영어로 번역할 때
6.2. 영어를 번역할 때
7. 같이보기

1. 개요

親王 (Prince of the blood)

황제와 가까운 황족에게 주어지는 작위.[1]

동양, 특히 중국에서는 황제의 아들이나 직계 자손에게 왕(王)의 작위를 주었는데, 특히 가까운 왕족을 다른 왕(王)과 구분하여 친왕이라 하였다. 친왕이라는 표현은 당나라에서 만든 것이다. 또한 이들은 오늘날 남아있는 공친왕부, 순친왕부, 옹친왕부라든지 보통 왕부(王府)라고 불리우는 거대한 저택에서 생활하였다. 참고 블로그1,블로그2 부인은 일반적으로 친왕비였으며 청나라에서는 만주족 전통에 따라 적복진이라고 불렸다.

청나라에서는 황제와 가까우며 많은 권력을 가진 세습친왕가(親王家)가 몇 개 있었다. 이들은 특별한 공훈을 세워서 여타의 왕작과는 달리 대대손손 왕작을 세습할 수 있다. 이를 철모자왕이라고 부른다.

한국에서는 중국 청나라와 비슷한 친왕제도를 썼다.

일본에서는 천황의 직계 자손[2]에게 친왕이라는 봉작을 내리고 있다. 남성은 친왕, 여성은 공주가 아니라 독특하게 내친왕(內親王, 신자체 : 内親王)이라 한다.

2. 대한제국

대한제국은 청나라와 비슷한 친왕 제도를 도입하였다.[4] 대한제국에서 친왕/왕으로 봉하거나 추존한 인물로는 의친왕[5], 영친왕[6], 흥선헌의대원왕[7], 완친왕[8], 흥친왕[9] 등이 있다.

원래는 세자가 아닌 왕자나 왕녀에게 '저하'나 '마마'를 절대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조선의 왕실 예법이었다. 차기 군주인 세자와 다른 왕자공주들은 엄연히 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황제국이 선포되기 2년 전부터 왕자과 기타 왕족에게도 일본이나 청나라처럼 전하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독립신문의 기록을 보면 고종대한제국을 선포하기 이전인데도 불구하고 의화군(의친왕)과 흥선대원군을 가리켜 전하라고 한 기록들이 존재한다.[10][11]

청나라와 비슷한 제도를 도입하였으나 대한제국이 13년만에 멸망했기에 아쉽게도 세습친왕가는 없었다. 군주의 직계 5대손까지만 왕족으로 인정하거나 대군의 아들에게 군 작위를 준 조선의 사례를 볼 때 세습제도를 운영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12]

3. 일본

현대의 일본 황실은 국호 대신 궁호를 쓰며 궁호와 작호 사이에 이름을 직접 써서 '○○노미야(宮) ●● 친왕'[13]이라고 한다. 군왕(郡王)이 따로 존재하진 않는다. 중국이나 대한제국의 방식과 달리 황태자·황태손 등도 친왕으로 부른다는 것이 특기할 점(이땐 '황태자·황태손 ●● 친왕'이라고 한다).

그리고 황녀나 황손녀는 내친왕(內親王)[14]이 되는데, 평민과 결혼하면 칭호가 사라지고 평민이 된다. 현재 일본의 귀족제는 폐지되었기 때문에, 같은 천황가의 남자와 결혼하지 않는 한 결혼 시 무조건 황적의 신분을 잃는다.

4. 중국의 역대 왕조

중국에서는 '친왕'이라는 용어는 일찍부터 등장했으나 작위로써의 왕의 칭호의 일부로 포함되어 쓰인 경우는 청나라가 유일하다. 무슨 말이냐면,

  • 명나라 때까지의 친왕의 봉호(封號)는 국호[15]를 따서 '○왕'(어쩌다가 '○국왕')이라고 쓰고, 사후에 시호를 받으면 국호 뒤에 붙여 '○●왕'이라 불렀다. 예를 들어 주원장의 차남 주상(朱樉)은 왕(秦王)에 책봉됐고, 사후에 시호로 '민(愍)'을 받아 '진민왕(秦愍王)'이라고 했다. 추존왕일 경우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남송의 장수인 악비 역시 사후 악왕으로 추존되었고 충무라는 시호를 받아 최종적으론 악충무왕이라는 명칭으로 추존되었다. 보다시피 칭호 자체에 '친왕'이라는 용어가 들어가지 않고 그냥 '왕'자를 붙였다. 주원장의 4남 주체 역시 연왕(燕王)으로 불렸다.
  • 청나라의 친왕은 '○친왕' 식의 칭호를 쓰는데, 이전과 달리 봉지와 무관한 추상적인 의미를 담는 글자가 쓰인다. 사후에 시호가 붙으면 '○●친왕'이라 불리는 건 같다. 예를 들어 청태종의 장남인 후거(豪格)는 숙친왕(肅親王)에 책봉됐고, 사후에 '무(武)'라는 시호를 받아 '숙무친왕(肅武親王)'이라고 한다. 도르곤과 혁흔은 각각 예친왕과 공친왕이었고, 시호로 '충'이 붙어 예충친왕·공충친왕으로 불렸다.

아무튼 칭호가 그냥 '왕'으로 끝나든, '친왕'으로 끝나든 앞에 오는 이름(위에서 ○로 표시한 것)은 한 글자로 썼다. 중국에서 1자왕은 2자왕[16]보다 격이 높았기 때문.

중국에서 친왕은 대개 황족이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가끔 황족이 아닌 친왕을 책봉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시대에 따라, 또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후대에 친왕의 아들(친왕세자 제외)들은 군왕(郡王)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 경우가 아닌 사람들도 간혹 군왕에 책봉될 수 있다.

중국에서 제후들은 처음에 세습이 많았지만[17] 점차 중앙 집권이 강화되면서 청 대에 이르러서는 아예 세습 작위의 수가 제한됐다. 세습이 가능한 친왕 또는 군왕의 경우, 다음 대에 즉위할 아들(주로 적장자)을 각각 세자(世子)와 장자(長子)로 세우게 된다.[18] 이들의 부인은 각각 세자비[19], 장자 부인이다.

황태자·황태손 등은 친왕으로 불리지 않는다. 또, 마찬가지로 왕세자도 친왕이나 군왕으로 불리지 않는다. 이것은 대한제국도 마찬가지.

참고로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조공을 받는 제후국의 군주들은 친왕급보다 한단계 낮은 군왕급이지만[20], 유일하게 고려와 조선의 군주들만은 일자왕, 그러니까 친왕급으로 대우했다.

4.1. 청나라

청나라 때에는 최고 등급의 작위를 화석친왕(和碩親王, 만주어: hošo-i cin wang 호쇼이 친왕)이라고 했고, 그 다음의 작위를 다라군왕(多羅郡王, 만주어: doroi giyūn wang 도로이 기윤왕)이라고 했고, 각 작위는 화석○친왕, 다라○○군왕 식으로 표기했는데, 화석과 다라는 생략하기도 했다. 청나라의 친왕과 군왕은 종전 중국의 전통이었던 땅이름이 아닌, 뭔가 추상적인 글자들을 왕작에 붙였다는 점이 다르지만, 친왕은 한 글자, 군왕은 두 글자를 썼다는 점은 종전 중국의 전통과 같다. 예외로 친왕에 두 글자를 쓴 경우가 있긴 하다.[21]

당시 작위는 일반적으로 해당 작위를 받은 사람의 후계자는 이전 대보다 한 등급 낮은 작위를 받게 하는 게 원칙이었다. 하지만 일부 친왕과 군왕 작위는 대수(代數) 제한도 없고 강등도 없게 하여 세습하도록 하는 특권이 부여됐는데, 이것을 세습망체(世襲罔替)[22]라고 한다. 세습망체의 혜택을 받은 친왕과 군왕들을 속칭 철모자왕(鐵帽子王)[23]이라고 했다.

역사상 유명한 친왕의 예는 다음과 같다. ☆ 표시가 있는 작위는 세습망체이다.

군공(태조~순치때 개국을 도운 황족)

  • 순승군왕☆
시조는 누르하치의 2남인 다이샨의 3남 살합린의 차남 러커더훈. 살합린은 다이샨의 장남인 악탁과 함께 홍타이지를 칸으로 세운 공이 있어 친왕으로 봉작되었는데 일찍 죽었다. 살합린의 장자인 아다리가 군왕위를 물려받았는데 순치제가 즉위하는 과정에서 역모죄로 죽었고, 가문은 살합린의 차남이었던 러커더훈이 잇게 되었다. 다른 가문과 달리 군왕위를 물려 받았다.
  • 극군군왕☆
시조는 누르하치의 2남인 다이샨의 장남 악탁. 순승군왕가처럼 다른 가문과 달리 군왕위를 물려 받았다.
  • 예열친왕☆
시조는 누르하치의 2남인 다이샨. 작위는 그의 7남이 물려 받았지만 도르곤파여서 사후 박탈당하고 이후 9남의 자손이 물려받는다.
  • 승택유친왕(장친왕으로 고침)☆
시조는 홍타이지의 5남 석새.
  • 숙무친왕☆
시조는 홍타이지의 장남인 호오거.
  • 정헌친왕☆
시조는 누르하치의 유일한 동복동생 슈르하치의 6남이자 순치제 시절 섭정인 지르갈랑.
  • 예통친왕☆
시조는 누르하치의 15남이자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의 동생인 도도.
  • 예충친왕☆
시조는 누르하치의 14남이자 순치제 시절 섭정인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다만 도르곤은 슬하에 아들이 없어 동생인 도도의 아들이 양자로서 가문을 계승해오다가 건륭제 때 복권되어 친왕이 된다.

공봉(순치제 이후 즉위를 돕거나 공을 세우거나 또는 황제의 생부에게 줌.)

시조는 강희제의13남 윤상. 옹정제의 즉위를 도움.
  • 공충친왕☆
시조는 혁흔(奕訢). 함풍제의 이복 동생. 함풍제보다 훨씬 더 총명하여 황위를 물려 받을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함풍제의 눈물 작전으로 밀려나 공친왕이 되었다. 동치제 즉위 직후 서태후와 손을 잡고 정변을 일으켜 숙순, 단화 등 보정대신(함풍제로부터 어린 황제의 통치를 보좌해줄 것을 부탁받은 고명대신)을 제거했다. 이후 종친을 대표하여 증국번, 이홍장 등 한족 관료들과 함께 개혁을 통한 동치중흥을 이끌었다.
시조는 건륭제의 17남 애신각라 영린의 손자인 아이신기오로 이쾅아이신기오로 짜이전.

5. 오해: 일본의 작위?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기록에서 '친왕'이라는 표현을 찾을 수 있다.[24] 한국에서 공식적인 제도로 친왕작이 생긴 것은 대한제국 때로, 몇몇 황족이 친왕으로 임명되었다.

현재 친왕 칭호를 쓰고 있는 나라가 일본밖에 없다보니 친왕 칭호를 일본식 표현이라고 생각해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가령 영친왕[25]을 영왕이라 부르고 의친왕을 의왕이라 부르는 등. 조선왕조실록 중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에도 '영친왕'이나 '의친왕'이란 표현이 있다. 예를 들자면, 영왕 은을 황태자로 책봉하다 기사에서 영왕 은을 고종은 '영왕'으로 신하는 '영친왕'으로 부르기도 한다. 의친왕 이강을 육군 부장에 임명한 후, 육군 부장 의왕 이강에게 일본에 가서 열병식에 참가하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경우는 단순히 고종이 '영친왕'과 '의친왕'을 줄여 말한 것에 불과하다. 중국에서도 'X친왕'이란 칭호를 줄여서 'X왕'이라고 쓰는 사례가 있다. 또한 영친왕의 경우에는 영친왕 책봉 금책에서도 '영친왕'이란 칭호를 사용하고, 공적으로 사용하는 도장에서 '영친왕'이라고 쓰고, 본인도 '영친왕'이라고 서명하고 '영친왕'이라고 씐 도장을 찍었으므로 어느 쪽이 정식 호칭인지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흥친왕 책봉 금책에서도 흥친왕(興親王)이라고 적혀 있다.

6. 번역에 관하여

6.1. 영어로 번역할 때

실제로 통치를 하는 '왕' 의 경우 king으로 번역하지만,[26] 황족이라든가 기타 공신들에게 부여하는 왕작의 경우 prince로 번역하는 게 일반적인데[27][28], 유럽에서는 king의 칭호를 황족에게 부여하는 일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29]

6.2. 영어를 번역할 때[30]

독일어 Prinz나 Fürst[31]중국어로 번역할 때 일괄적으로 친왕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이나 일본의 경우 prince가 정확히 무슨 뜻으로 쓰였느냐에 따라서 왕자나 대공, 공작, 후작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하는데, 중국에서는 그렇게 따지는 게 번거롭다고 여겼는지 모조리 친왕이라고 옮기는 경우가 많다. 이에 따라 유럽 군주국의 왕족들을 중국어로 표기한 것을 보면 조금 황당한 경우도 있는데, 아버지의 칭호도 왕(국왕),[32] 아들의 칭호도 왕(친왕)인 셈. 영어로는 king과 prince가 형태상 확실히 구분되는데, 중국어로는 부자(父子)가 모두 '왕' 인 것이다.

단, 영어 principality[33]는 '친왕국' 이라고 부르면 어색해서 잘 안 쓰고 공국(公國)이나 후국(侯國)이라고 쓰되, 군주의 칭호를 '친왕' 이라고 번역한다. 그래서 모나코 공국(Principality of Monaco)는 摩納哥公國이나 摩納哥侯國이라고 번역하고, 모나코 공(Prince of Monaco)은 摩納哥親王이라고 하는 식이다.

7. 같이보기


  1. [1] 상황에 따라서는 황족이 아닌 사람에게 주어질 수도 있다.
  2. [2] 1947년 다이쇼 덴노 직계를 제외한 모든 황족들이 신적강하로 평민으로 강등된 이후로는 증손자까지가 아니라 천황의 손자까지. 그보다 먼 자손의 봉작은 왕(王)이다.
  3. [3] 태자 책봉 후에는 친왕위는 폐한다. 다만 생전에 시호를 받지 않았고 의민(懿愍)이라는 시호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사적(사시)으로 올린 것이다.
  4. [4] 만주어인 '화석'이니 '다라'니 하는 말은 추가하지 않았다.
  5. [5] 조선왕조실록 고종 40권, 37년(1900년 경자/대한 광무(光武) 4년) 8월 17일(양력) 1번째 기사 중화전에 나아가 황자를 책봉하다
  6. [6] 조선왕조실록 고종 40권, 37년(1900년 경자/대한 광무(光武) 4년) 8월 17일(양력) 1번째 기사 중화전에 나아가 황자를 책봉하다
  7. [7] 조선왕조실록 순종 1권, 즉위년(1907년 정미/대한 융희(隆熙) 1년) 10월 1일(양력) 1번째 기사 흥선대원군을 대원왕으로 추후하여 봉하다
  8. [8] 조선왕조실록 순종 1권, 즉위년(1907년 정미/대한 융희(隆熙) 1년) 10월 1일(양력) 2번째 기사 완화군 이선을 완왕으로 추후하여 봉하다
  9. [9] 조선왕조실록 순종 4권, 3년(1910년 경술/대한 융희(隆熙) 4년) 8월 15일(양력) 1번째 기사 이재면을 흥왕으로 책봉하다
  10. [10] 네이버 지식백과 독립신문 1897년 1월 9일 토요일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26172&cid=51385&categoryId=51385
  11. [11] 네이버 지식백과 1897년 7월 31일 토요일 독립신문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26265&cid=51385&categoryId=51385
  12. [12] 하지만 만약 대한제국이 현재까지 이어졌다면 20세기 이후 일부일처제가 완전히 정착되어 서자에 의한 계승도 막히기 때문에, 여성의 계승을 인정하지 않는 한 황위계승에 대한 보험으로 세습친왕가가 탄생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 안 그러면 옆나라 황실에서 지금 겪고 있는 문제가 그대로 나타날수도 있다. 실제로 조선왕조 시대 여러 대원군의 후손들도 왕의 4대손까지 왕족으로 인정되고 이후로는 일반 양반 취급이었으나, 순조 시기부터 왕손들의 씨가 마를 위기에 처해지자 왕실의 뿌리가 된다는 이유로 대원군가 사손(嗣孫)들에 한해 대대로 왕족 지위를 세습하였다.
  13. [13] 단, 궁호는 친왕과 그 (직계) 자손이 공유하며, 가주(家主)가 아니면 궁호는 원래 붙이지 않는 게 맞다. 토모히토 문서 참조.
  14. [14] 천황의 딸과 손녀까지는 '내친왕', 증손녀부터는 '여왕(女王)'이라고 부른다. 단 현행 황실전범이 제정되기 전인 1947년 이전에는, 4대손(현손녀)까지를 내친왕이라 하고 5대손(내손녀)부터 여왕이라 불렀다고 한다. 남자의 경우 친왕·왕.
  15. [15] 주로 춘추 전국 시대에 있었던 나라의 이름을 쓴다
  16. [16] 이것을 군왕(郡王)이라고 한다. 보통 1자왕의 이름에는 나라의 이름이, 2자왕의 이름에는 고을의 이름이 들어가는 걸 생각해보자.
  17. [17] 원래 제후 제도 자체가 중앙 집권이 불가능한 주나라에서 지역별로 작은 군주를 두는 시스템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18. [18] 이들의 호칭은 친왕세자 전하가 되었다. 저하는 고려와 조선의 고유 존칭인지라 해당 존칭이 없던 중국에선 그냥 똑같이 전하라고 불렸다.
  19. [19] 세자빈이 아니다. 중국에서는 세자빈이라는 칭호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자빈 참고.
  20. [20]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순화왕의 지위에 올랐으며 이는 이자왕(二字王)급이다. 정확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순화왕'에 봉해진 건 아니고 '일본국왕'에 봉해졌다 한다.
  21. [21] 승택친왕(承澤親王)이 그 예인데, 이후 한 글자인 장친왕(莊親王)으로 고쳐졌다.
  22. [22] 총12명이며 문자 그대로 대대로(世) 이어 받으며(襲) (작위의) 교체(替)도 없다(罔)는 뜻이다.
  23. [23] 농담이 아니고 정말 철밥통로 된 모자를 쓰는 왕이라는 뜻이다.
  24. [24] 고려시대 '이정 묘지명'에서 문종의 왕족을 친왕이라 불렀으며 고려순종은 자신의 유조에서 동생 선종을 친왕이라 칭했다.
  25. [25] 다만 영친왕이라는 호칭은 다른 이유로 문제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영친왕'이라는 칭호는 황태자가 되기 전에 쓴 것이었기 때문. '의민태자'라는 호칭은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 조선이 멸망한 뒤 바쳐진 사적인 시호이기 때문에 또 문제가 될 수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황태자가 된 후에는 그냥 '태자 전하'로 불렸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때 부여받은 호칭을 제외한다면 공적으로 받은 마지막 호칭은 영친왕이 된다. 사시를 인정할 것인지 아니면 마지막 공적인 호칭을 사용할 것인지가 문제된다.
  26. [26] 황제라는 칭호가 생기기 이전에 천자의 칭호로 간주됐던 '왕' 이든, 황제가 책봉해준 제후로서의 왕이든 모두 해당된다.
  27. [27] 단, 양자의 구분이 명확하진 않다. 한편 prince는 왕자라는 뜻도 있지만 제후라든가 공국의 공작 등 king보다 등급이 낮은 군주의 칭호로 쓰이기도 한다. 따라서 제후왕을 prince로 번역해도 오역은 아니며, 보다 상세한 내용은 프린스 문서 참고.
  28. [28] 다만 조조손권, 유비의 사례와 같이 제후왕이긴 하나 사실상의 독립국인 경우 King으로 번역한다.
  29. [29] 예외적인 케이스가 조금 있긴 한데, 나폴레옹 1세 시절의 프랑스는 '로마왕(Roi de Rome)'을 황태자의 칭호로 썼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황태자도 로마왕으로 불렸다. 중화사상이 지배하는 동아시아에서는 왕이라는 칭호가 일개 제후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다는 점에서 서로 크게 다르며, 따라서 조선 말기에 청나라와의 군신 관계를 완벽하게 청산하기 위해 기존의 국왕 대신 대군주라는 새로운 칭호를 고안해 내서 서양의 king에 필적하는 권위를 부여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때문에 당시 서양에서는 조선이 대군주라는 표현을 만들었을 때, 왕과 대군주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웃픈 상황도 발생했었다.
  30. [30] 먼저 이 문단을 읽기 전에, prince라는 단어의 뜻이 여럿이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31. [31] 남성 왕족 또는 황족의 통칭으로 쓰이는 prince를 독일어에서는 Prinz(프린츠)라고 하며, 제후와 군주의 칭호로서 쓰이는 prince는 Fürst(퓌르스트)라고 한다.
  32. [32] 단, 중국어에서 국왕과 관련된 다른 용어들은 황제를 뜻하는 皇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국왕의 칭호는 국왕이라고 쓰지만 그가 속한 왕실은 황가(皇家)라고 표기하는 게 그 예이다. 이것은 서양의 king이 중국인들이 왕(제후로 여겨짐)보다는 황제에 더 가깝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런 표기상의 비일관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게다가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홍콩에서는 아예 영국 국왕/여왕을 국황(國皇)/여황(女皇)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홍콩의 실질적인 표준어인 광동어로는 어차피 王과 皇의 발음이 같은데, 이 점도 皇을 애용하는 경향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한편 중국이 국왕을 황제로 변역하는 경향은 역사에서 찾아야 하는데, 중국은 2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황제가 지배하다 보니 왕은 그저 황제의 부하 내지 가족이라는 관념이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을 알수 있는 사례가 있는데, 중국에서 대장금을 방영할 때 조선 왕을 조선 황제라 번역하였다.
  33. [33] Prince(의미상 독일어 Fürst에 해당)가 다스리는 나라 또는 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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