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사의 굴욕

이탈리아어

l'umiliazione di Canossa

독일어

Gang nach Canossa

영어

Walk to canossa

하인리히 4세(가운데 인물)가 클뤼니 수도원장 후고(St. Hugh the Great. 1024-1109)(왼쪽 인물)와 마틸데 여백작(오른쪽 인물)에게 간청하는 장면을 묘사한 12세기의 유명한 삽화이다. 하단에 라틴어로 "Rex rogat abbatem / Mathildim supplicat atque"(국왕이 아빠쓰에게 부탁하다. 또한 마틸데에게 탄원하다)라고 적혀 있다.

1. 개요
2. 사건의 시작
3. 파문의 의미
4. 파문 선포, 하인리히의 선택
5. 또 한번의 파문, 하지만...
6. 하인리히의 복수
7. 그 후
8. 의의
9. 여담
10.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1077년 1월경 신성 로마 제국황제 하인리히 4세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7세 앞에서 파문을 취소해 달라고 관용을 구한 사건. 흔히 중세 시절 강성했던 교황권의 상징과 같은 사건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는 중세 황제권의 붕괴가 시작되고, 교황권이 강화되어 양측이 "서로 역전되는" 첫 걸음으로 보는 것이 맞는다. 실제 교황권의 정점은 십자군 전쟁 시대가 한창이었던 100년 뒤인 12세기 중반이었다.

이와 연관해 약 230여 년 뒤 일어나는 아비뇽 유수를 이 사건의 연장선상인 복수극으로 이해하는 것도 무리한 시각이라는 말이 있다. 복수와 용서는 이미 당대에 끝났기 때문.[1] 국내 역사교육 과정에선 둘을 엮어서 카노사의 굴욕을 교황권이 '정점'에 달한 상징적인 사건이고, 아비뇽 유수를 기독교의 위세가 무너지면서 왕권이 다시 올라간 시기로 서술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하지만 후술할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이는 사실관계와 거리가 있는 지나친 단순화다.

2. 사건의 시작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본디 황제에게 있었던 성직자 임명권(특히 주교 서임권)을 교황이 행사한다고 주장했는데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이를 거부하자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를 파문시켜 버린다.

주교 서임권을 황제가 가지게 된 것은 신성 로마 제국을 건국한 오토 1세(대제) 이래 실시된 제국교회 정책과 관련이 있다. 사실 서임권은 오토 대제 이전 프랑크 왕국 시절부터 왕이 보유하고 있었는데, 오토 1세의 아버지인 하인리히 1세는 비(非) 카롤링거 왕족 출신이자 비(非) 프랑크족 출신으로 국왕으로 선출되었다는 취약점을 만회하기 위해 자신의 행사할 수 있는 서임권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그의 아들로 황제가 된 오토 1세는 성직자들에게 봉토를 하사하여 자신에게 충성하고 봉건영주들과 맞설 성직제후들을 여럿 만들었는데, 이렇게 할 경우 기독교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얻을 수 있는 데다 주교 개개인의 충성도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대대로 세습되는 봉건 영주들의 봉토와 다르게, 성직제후가 죽으면 황제에게로 다시 봉토가 돌아오기 때문에[2] 황권 강화에도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1073년 교황이 된 그레고리오 7세는 클뤼니 수도원 출신으로 원칙주의와 교회의 개혁을 주장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하인리히 4세가 작센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내전을 겪고 있는 상황을 이용해 성직자 서임권은 황제가 아닌 교황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내전 중에 있던 황제는 한동안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1075년 내전이 종식되자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이런 주장에 개의치 않고 밀라노 주교 선출을 자신의 의도대로 좌지우지했다.

그러자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이에 반발하며 1076년 황제를 파문에 처했다.

3. 파문의 의미

교황이 내린 결정은 단순히 파문을 내린 왕을 기독교도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 이외에도 "저자는 이제 (교황이 인정했던) 기독교 왕국의 왕이 아니다!" 라는 선언과도 같았기 때문에 파문은 왕의 정치적 생명을 끝장내버릴 수도 있는 교황만의 강력한 권한이기도 했다. 단, 그걸 하고도 보복당하지 않을 정도로 실질적인 힘이 있을 때에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3]

사실 그레고리오 7세 이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교황의 관계는 황제가 절대적인 우위에 있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권은 그렇게 약한 것이 아니어서 교황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실제로 하인리히 4세의 부왕인 하인리히 3세는 경건왕 혹은 흑왕이라고 불리면서도 그의 치세 때 3명의 교황을 자신의 마음대로 갈아치웠고 아라곤산초 대왕이 히스파니아(스페인) 제국의 황제를 자처하자 교황으로 하여금 외교 문서를 보내 닦달하는 등 중세 황제권의 최절정을 맞이하고 있었다. 교황은 사실상 황제의 신하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고 황제는 교회를 등에 업고 반발 세력들을 죄다 평정하여 폴란드보헤미아, 헝가리도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하인리히 3세 때부터 교회 세력은 황제로부터 독립을 시작한다. 이는 하인리히 3세가 서임한 주교들이 제후들의 공격을 받으면서 약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그러면서도 교회 개혁 운동인 클뤼니 수도회 개혁 운동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당시 교회는 워낙에 세속에 물들어서 타락한(종속) 상태였기 때문에 이를 개혁하고자 했던 것인데, 황제의 주교 서임이 수도원의 독립성을 침해한다고 생각한 수도회의 반발이 컸다. 이는 하인리히 3세 재위 말년부터 슬슬 조짐이 보였고 어린 아들을 남겨놓고 세상을 떠난 데다 클뤼니 수도원 출신 교황인 그레고리오 7세가 등장하면서 표면화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황이 파문권을 휘둘러 왕과 황제를 마음대로 주물러댈 수 있었다고 보긴 힘들다. 자신의 권력이 공고한 왕, 황제들은 파문에 개의치 않고 활동하다가 필요할 때에나 겨우 머리를 숙여 취소받곤 했고 심지어 로마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경우에는 교황을 협박하거나 차기 교황 선출을 마음대로 주물러 일을 처리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헨리 8세처럼 자기 영토 내 교회를 자기 입맛에 맞게 재조직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교황도 자신의 힘을 행사할 때에는 '파문권'이라는 실질적인 힘을 구비하고 정치력을 총동원해 이를 현실화하고자 노력했던 편이다.

4. 파문 선포, 하인리히의 선택

사실 황제의 파문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기에 반응이 어떻게 나올지 처음에는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상황은 황제에게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하인리히 4세는 1075년 작센 반란을 평정한 후 매우 강력한 황권을 추구하고 있었다. 황제는 강력한 황권을 바탕으로 서민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귀족들의 권리를 약화시키고 하급기사와 평민들의 권익을 증진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었고 이에 백성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이에 항상 강력한 황권을 견제해왔던 독일 제후들은 이제 하인리히 4세를 견제하기 위해 교황편을 들기 시작했다. 독일 어디서도 파문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없었고 황제가 서임한(그리고 당연히 교황을 까기에 바빴던) 주교들마저 후다닥 교황과의 화해를 시도했다. 제국 각지에서는 교황의 파문을 구실로 황제에 반하는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인리히 4세는 부황 하인리히 3세처럼 군사를 로마로 몰고 가서 교황을 몰아내고 대립교황을 세우는 방법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당시 교황청은 남부 이탈리아시칠리아를 정복한 노르만족과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하인리히 4세는 군사적 대응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했다. 제국에서 반란이 크게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황제는 우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교황과 일시적으로 화해하기로 결심했다. 교황과 화해하여 파문이 취소된다면 반란의 명분도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하인리히는 독일 남부의 아우스부르크에서 교황과 만나기를 요청했으나 교황은 이를 군사적 위협으로 생각해 거부했다. 그러자 하인리히 4세는 친히 이탈리아로 내려갔다.

1076년 말 겨울, 하인리히 4세이탈리아로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가 자신을 몰아내려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교황의 가장 강력한 후원 세력이었던 마틸데 디 카노사 여백작은 교황에게 자신의 카노사 성으로 피신하여 황제군을 방어하자고 제의했고, 이에 교황은 카노사 성에 피신했다.

쥐라 산맥을 넘은 황제 하인리히 4세는 1077년 1월 25일 카노사 성에 도달했다. 그런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놀랍게도 누추한 옷으로 갈아입고 맨발로 카노사 성문 앞에 섰다. 그러나 교황은 황제를 만나기를 거부했고 황제는 계속 성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주위 성직자들과 토스카나백작 마틸데가 교황을 설득해서 결국 3일 후 성문을 열고 하인리히를 받아들이고 그의 파문을 취소한다.[4]

이때 교황이 하인리히 4세를 3일 동안 만나지 않은 것은 하인리히를 괴롭히며 교황의 권위를 보이려 했던 의도는 아니고, 황제의 에기치 못한 행동에 당황하며 황제와 완전한 적으로 돌아설 것인지 아니면 타협할 것인지에 대해 정치적 판단이 늦어졌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5. 또 한번의 파문, 하지만...

하인리히는 이 일이 마무리되자 급히 제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제국은 이미 분열 상태에 빠졌고, 교황파 제후들(주로 성직 제후들)은 1077년 슈바벤 공작 루돌프를 대립 국왕[5]으로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작센 대반란이라 한다.

그레고리오는 파문 직후에는 하인리히의 적을 키우기 위해 루돌프를 장려했으나 파문 취소 이후에는 하인리히의 편을 들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가 내전에서 우세해지자 그레고리오는 1080년 다시 루돌프를 지원하고 하인리히 4세를 파문에 처했다. 하지만 교황의 조치는 다른 제후들은 물론이고 중립을 지키고 있던 제후들마저 교황의 횡포에 분개하게 만들어 황제 하인리히 4세를 지지하게 만들었다. 1081년 바이스 엘스터 강 전투에서 반왕 루돌프가 참패하여 죽고 구심점을 잃은 작센 제후들이 분열하자 내전에서 하인리히 4세가 최종 승리하였다.

6. 하인리히의 복수

1081년 내란을 평정하고 황제로서의 실권을 완전히 회복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편을 들었던 인사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측근들을 육성했다.

1081년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족의 수장 로베르 기스카르동로마 제국을 침략하자 동로마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외교전의 일환으로 하인리히 4세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치며 군사 협정을 요청했다. 노르만족이 로마 제국과의 전쟁으로 바빠지면 자연스레 그들을 군사적 배경으로 삼았던 교황은 군사력이 약해질 터이므로 하인리히 4세는 기쁜 마음으로 승낙했다.

노르만인들의 주력이 발칸 반도로 빠지자 하인리히는 곧장 브릭센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그레고리오 7세의 폐위를 선언하고 해임된 라벤나의 대주교 귀베르토를 새로운 교황 클레멘스 3세로 선포하고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4년여에 걸친 전쟁 끝에 로마가 함락되고 그레고리오 7세는 카스텔 산탄젤로(산탄젤로 성)에 유폐되었으며 하인리히 4세는 클레멘스 3세가 집전하는 대관식을 통해 정식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올랐다. 이후 알렉시우스 1세와의 협상을 준수하기 위해 하인리히 4세는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 영토를 공격하였으나, 그에 대한 보고와 교황의 다급한 지원 요청을 받은 노르만 공작 로베르 기스카르가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급하게 복귀하였기 때문에 하인리히 4세는 로마에서 철수하였고 그레고리오 7세는 구출되었다.

7. 그 후

그러나 구출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안전을 명목으로 로베르 기스카르가 자신의 근거지인 살레르노로 강제로 거처를 옮겼으며 결국 1년 뒤 죽었다. 그는 유언으로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그래서 이렇게 추방당해 죽게 되었다. (Ho amato la giustizia e ho odiato l'iniquità. perciò muoio in esilio.)"라는 말을 남겼다. 로베르 기스카르는 1085년 제국과의 전장으로 복귀했다가 전염병으로 죽었다.

황제로서 실권을 회복한 하인리히 4세는 반란으로 황폐화된 제국을 재건하는 한편 귀족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시민과 하급 기사들의 권리 신장을 위해 노력하여 하급 기사들과 백성들로부터 지지와 존경을 받는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카노사의 굴욕을 조연이었던 토스카나 여백작 마틸데와 교황 우르반 2세는 은밀히 하인리히 4세의 반대파를 규합한 후 롬바르디아를 다스리고 있던 하인리히 4세의 장남 콘라트를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성격이 급하고 변덕스러운 아버지가 자신에게 제위를 물려줄지 확신을 못하고 있었던 콘라트는 마틸데와 교황의 유혹에 넘어가 1097년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콘라트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 하인리히 4세는 1098년 콘라트를 차기 황제인 독일왕에서 폐하고, 차남 하인리히 5세를 새로 독일왕위에 올렸으나, 1104년 하인리히 5세가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감금하고 폐위시켰다.

하인리히 4세는 곧 탈출하여 여론의 지지를 바탕으로 휘하의 귀족들과 백성들을 결집시켜 다시 세력을 회복했다. 하인리히 4세는 기세를 몰아 제위 탈환을 목전에 두었으나 1106년 병으로 몸져 눕게 되었고 몇 주 후 사망하고 말았다. 폐위될 뻔 했던 하인리히 5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제위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백성들의 신망을 잃은 하인리히 5세가 행사하는 황권은 취약할 수 밖에 없었고, 그레고리오 7세의 후임 황제들은 다시 교황권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결국 하인리히 5세는 1122년 교황 갈리스토 2세가 내민 보름스 협약에 서명하면서 1075년 시작된 서임권 투쟁에서 사실상 패배를 선언하고 말았다.

훗날 종교개혁이 일어난 시기에 하인리히 4세프로테스탄트 측으로부터 "독일의 수호자이자 난폭하고 억압적인 가톨릭에 맞서 싸운 위대한 황제"로 칭송받았다. 독일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다시 살아나 독일을 구원할 거라는 전설의 주인공이 될 정도로 말이다. 그 후에도 독일 및 북유럽에서는 '굴복하지 않고 맞서 나간다' 는 의지를 표명하거나 '하기 싫어도 억지로 굴복, 복종함' 따위를 말할 때면 이 사건을 언급하게 되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도 "우리의 영혼과 몸, 둘 다 카노사에 가지 않을 것이다" 라 하였고, 아돌프 히틀러도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 이 표현을 쓰기도 했다.

다만 알렉시오스 1세는 다른 셋과 달리 이후 다 망한 동로마 제국을 다시 재건하고, 콤니노스 왕조를 본격적으로 개창함으로서 로마 제국의 사실상 중시조가 된다. 알렉시오스는 1118년까지 오래오래 살면서 제국을 재건했으며, 아들 요안니스 2세도 그 업적을 이어갔다. 결국 손자 마누일 대제 때에 가서는 마르지 않는 자금력과 강력한 군사력으로 신성 로마 제국과 유럽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강대국 자리에 완전히 복귀하게 된다. 결국 동로마만 이득을 봤다

8. 의의

비록 그레고리오 7세가 쫓겨나기는 했지만 이 사건은 교황과 황제의 권력 투쟁에서 중요한 계기가 된다. 그레고리오 7세 이전까지 사실상 황제의 수하나 다름없었던 교황이 황제의 권력을 뒤흔들고 심지어는 황제를 무릎 꿇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는 교황이 유럽 세계의 중요한 정치적 주체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으며 황제의 권위는 반대로 실추되는 계기가 되었다. 더군다나 그레고리오 7세의 정책적 방향(성직자 임명권은 교황이 가진다)은 이후 교황들에게 지속되었고 결국 보름스 협약을 통해 그 결실을 거두게 된다. 이후 교황권이 급성장해 세속 군주를 압도하기까지 하게 되는 계기가 바로 이 사건이다.

그러나 정작 이렇게 황제권을 앞지른 교황권은 그 직후 그레고리오 8세에 의해 시작된 100년이 넘는 기간의 십자군 전쟁으로 이어지며, 200년 뒤의 아비뇽 유수[6]를 계기로 중세와 더불어 내리막길로 접어들었고, 16세기 종교개혁을 막지 못한 데다 급기야 사코 디 로마라는 결정타를 맞고 뻗어 결국 다시 황제권 밑에 짓밟히고 만다.

9. 여담

  • 참고로 하인리히 4세의 아버지 하인리히 3세는 카노사의 마틸다 대백작의 아버지와 원수지간이었다. 그래사 마틸다의 가족들 중 아버지는 암살당하고, 유일한 상속자인 남동생마저 황제의 포로로 끌려가 죽었다. 이때 마틸다와 과부가 된 그녀의 어머니에게 새로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탐내며 우선 첫 표적으로 이탈리아 왕 자리를 노리던 하로렌의 고드프리 3세[7]가 접근하게 된다. 고드프리는 로렌 지방의 거대한 영지를 다스리고 있어 하인리히 3세와는 앙숙지간이었다. 그는 겁대가리를 상실하고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영지에서 추방되기를 밥 먹듯이 했고[8] 과부가 된 마틸다의 어머니에게 접근해 마틸다 가문의 엄청난 영지와 자신의 영지를 합치고 황제에게 대항하고자 했으나, 불행히도 찌질한 황제가 아니었던 하인리히 3세는 폭풍처럼 군대를 휘몰아쳤다. 결국 고드프리는 결혼한 마누라와 양녀를 팽개치고 도주하였다.

하인리히 3세는 적이 많았고 이러한 것을 해소하여야 했지만 하인리히 3세가 죽고 어린 아들을 대신해 섭정한 그의 황후 아그네스 덕분에 황제가 적잖이 넓혀놓은 직할령이 공작들의 환심을 사고자 뿌려지면서 황제권이 약화되고 제후들이 황제를 업신여기게 되었다. 더욱이 하인리히 3세의 깽판짓으로 이미 불구지천의 대원수가 된 하로렌의 고드프리와 카노사의 마틸다는 이를 갈다 못해 칼을 갈았고 하인리히 4세는 그의 몰락마저도 카노사의 여백작과 함께하게 된다. 마틸다 백작은 자신의 가족들을 거의 몰살시킨 황제 가문을 용서할 수 없었고 자신의 자금과 군대를 동원해 아펜니노 산맥에서 황제군과 대치하면서 뒷공작을 이용해 황제의 장남에게 이탈리아 왕 자리를 준다고 유혹해서 자기 아버지에게 대항하였다. 그녀의 이야기
  • 인터넷상에서 한동안 인기를 끌었던 "XX의 굴욕시리즈"의 단어적 어원이 사실상 이 항목이라고 봐야 한다.
  • 루리웹에 따르면 사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과 3일간의 붕탁끝에 파문이 취소되었다고한다(...)
  • 일본에서는 세계사에 등장하는 것 중 가장 멋있는 단어로 이 카노사의 굴욕이 뽑히기도 했다(…). 왠지 한번 들으면 이상하게 잊혀지지 않는 임팩트 때문이라고. 참고로 2위는 근소한 차이로 장미전쟁, 3위는 보스턴 차 사건.
  • 후지TV에서는 1990년에서 1991년까지 이 이름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 예능프로그램을 방송하기도 했다. 현대 일본의 소비문화사를 20세기 이전의 역사에 비유하여 설명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인기에 힘입어 방송 종료 후에도 2008년에도 일시 특집이 방송되었다.
  • 1997년 IMF 사태를 당시 이탈리아 신문에서는 이것으로 비유했다.

10.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 루이지 피란델로의 희곡 엔리코 4세[9]는 하인리히 4세의 시점에서 카노사의 굴욕을 다룬 작품이다. 해당 희곡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이탈리아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 판타지 소설이지만 중세 고증이 뛰어난 작품인 늑대와 향신료에서도 짤막하게 언급 된다. 10권 25P에서 크래프트 로렌스가 '교회의 총본산에 앉아 있는 교황이 속세의 황제와 대립하고 있던 시절에는 황제를 눈이 펑펑 내리는 들판에 사흘간 내버려 두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상대가 상인이라면 그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라는 독백을 한다.


  1. [1] 후술하겠지만, 카노사의 굴욕도 복수보다는 용서에 방점을 두고 있다.
  2. [2] 성직자에게는 공식적인 자손이 없으므로
  3. [3] 간단한 예로 후대에 비오 7세나폴레옹을 파문했을 때 어떻게 되었는지 보면 된다(...).
  4. [4] 이때 하인리히는 그레고리우스 앞에 십자가 모양으로 누워 복종의 의미를 표현했다.
  5. [5]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후계자는 우선 로마인들의 왕(독일 왕)의 직위에 오른 후 교황으로부터 대관식을 받아야 황제로 즉위할 수 있다.
  6. [6] 시차는 크지만 카노사의 굴욕의 대립항으로 자주 거명되는 사건이다.
  7. [7] https://en.wikipedia.org/wiki/Godfrey_III,_Duke_of_Lower_Lorraine
  8. [8] 그의 형제가 교황 스테파노 9세 https://ko.wikipedia.org/wiki/%EA%B5%90%ED%99%A9_%EC%8A%A4%ED%85%8C%ED%8C%8C%EB%85%B8_9%EC%84%B8
  9. [9] 당연히 하인리히 4세의 이탈리아 국왕으로서의 칭호에서 따온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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