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 칸국

크림 국
قريم يورتى

Qırım Yurtu[1]

국기

국장

1430년~1783년

위치

크림 반도 북부

수도

바으차사라이[2]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주요 군주

하츠 1세 기레이
(1441~1466)

언어

크림 타타르어
오스만 터키어

종족

크림 타타르인
터키인 등

종교

이슬람

성립 이전

킵차크 칸국
테오도로 공국

멸망 이후

러시아 제국

1. 개요
2. 역사
3. 군사 및 사회상

언어별 명칭

크림 타타르어

قريم يورتى / Qırım Yurtu
قرم خانلغى / Qırım Hanlığı

오스만 터키어

قریم (Kırım)

우크라이나어

Кримське ханство
/ Крим (Krym)

러시아어

Крым (Krym)

1. 개요

Crimean Khanate/Къырым Ханлыгъы. 1430년, 킵차크 칸국의 후손인 하츠 게라이(Hacı Geray, خاجى كراى)가 세운 국가. 1771년,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가 보낸 러시아 군대가 정복할 때까지 하지 기레이의 가문이 통치했다. 크림 칸국은 지금의 우크라이나 영토 남부와 크림 반도 인근을 지배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남부의 소수 민족인 크림 타타르족이 바로 크림 칸국의 후예이다. 몽골 침략 전부터 흘러들어온 투르크계 유목민의 후예이기도 하다.

2. 역사

원래 크림 반도는 고대에는 그리스인들의 식민도시가 있고 스키타이계, 카프카스계 민족들이 살고 있었으나 중세에는 타타르인들이나 하자르나 폴로베츠인등 투르크계 유목민들이 흘러들어와 살고 있었다. 이들은 몽골인들이 모스크바 공국을 침략하기 오래 전부터 우크라이나 초원지대로 진출을 노리며 키예프 공국과 대립하던 사이였다. 그래서 킵차크 칸국이 건국되기 전에도 이 유목민족들은 타타르인이라고 뭉뚱그려져 불리웠다. 13세기 중반 몽골 제국이 침략하여 킵차크 칸국이 건국된 후에는 이 일대로 이주한 몽골인들 역시 타타르에 동화되어 킵차크 칸국의 백성으로 살게 되었으나 킵차크 칸국이 쇠퇴하게 되자 크림 반도 일대를 다스리던 몽골인의 후손 하츠 게라이(Hacı Geray)[3]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지원을 얻어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독립, 크림 칸국을 세우게 된다.[4] 이후 크림 칸국의 타타르인들은 크림 타타르인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 모스크바 대공국,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위험한 독립을 유지하던 크림 칸국은 1466년 하츠 게라이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이 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다투었다. 그중 장남인 누르 데블레트(Nur Devlet, نور دولت)가 킵차크 칸국의 지원을 얻어 칸의 자리에 오르자 대다수 귀족들의 지지를 얻고 있던 하츠 게라이의 육남 멩리 게라이(Meñli Geray, ۱منكلى كراى‎‎)가 반란을 일으켜 잠시 칸의 자리에 올랐으나 곧바로 형한테 패해 크림 반도 남쪽의 제노바 식민지였던 카파로 쫓겨났다. 쫓겨난 멩리는 카파의 제노바인들과 손을 잡은 후 1469년 다시 수도로 진격해 형을 제노바의 감옥에 가둔 후 다시 칸의 자리에 올랐다.

멩리 게라이는 당시 세력을 급속도로 확장하던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제노바와 테오도로 공국와 손을 잡았는데 이것이 메흐메트 2세의 심기를 건드렸고 1475년 대규모의 오스만 함대가 대대적으로 크림 반도를 침공해 테오도로 공국을 멸망시키고 카파를 정복했다. 당시 멩리 게라이는 귀족들의 반란으로 칸 자리를 다른 형인 하이데르(Hayder, حيدر)에게 막 뺴앗긴 참이었는데 칸 자리를 되찾기 위해 꼭 필요한 동맹인 제노바가 위협받는 걸 보고 오스만과의 전쟁에 참전했다가 깨지고 오스만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오스만은 내친 김에 크림 칸국까지 공격해 하이데르를 몰아내고 누르 데블레트를 칸 자리에 앉혀 크림 칸국을 속국으로 삼았다. 하지마 얼마 지나지 않은 1477년 킵차크의 칸 아흐메드 칸의 사촌 야니베그가 침공해 크림 칸국은 일시적으로 킵차크 칸국의 지배 하에 들게 된다.

한편 코스탄티니예로 끌려간 멩리는 칸 자리를 되찾게만 해준다면 오스만에 복속하여 앞으로 영원히 술탄의 봉신으로 살 것을 맹세했고 때마침 킵차크에 멸망한 크림 칸국의 귀족들이 오스만에게 킵차크를 몰아내고 멩리를 복위시켜달라고 요청하면서 1478년 멩리는 포로 신세에서 풀려나 킵차크를 몰아내기 위해 출정한 오스만군와 함께 크림 반도에 돌아왔다. 그리고 멩리는 오스만군의 도움으로 킵차크군과 누르 데블레트를 같이 몰아내고 칸 자리를 되찾으면서 이로서 크림 칸국은 오스만의 속국이 되었다.[5]

그러나 크림 칸국이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된 사실은 오히려 멩리와 그의 후계자들의 위치를 더욱 강화시켜 주었다. 그 이유는 크림 칸국의 타타르족들이 강력한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게 됨으로써 러시아인들과 폴란드인들이 그들을 상대할 때 더욱 조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오스만 제국에게 의존한 결과, 크림 칸국은 다른 몽골계 국가들인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이 1552년과 1556년, 각각 러시아에게 멸망당할 때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6] 크림 칸국의 위상이 오스만 제국 내에서 얼마나 높았는지, 도널드 쿼터트의 <오스만 제국사>와 Simon Montefiore 의 Prince of Princes: The Life of Potemkin. London, 2000 에 따르면 오스만의 왕통이 단절될 경우 제국의 술탄위를 게라이의 가문이 이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물론 실제로는 그럴 일이 없었지만, 그만큼 크림 칸국의 위상이 높았다고 보면 되겠다.

1571년, 크림 칸국은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를 대대적으로 기습하여 크렘린 요새를 제외한 도시의 모든 건물을 불태우고 약 10만 명의 모스크바 시민들을 포로로 잡아가기도 했다. 당시 크림 칸국의 약탈은 러시아 뿐만이 아니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영토의 동부에서도(현재의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무척 심각했는데, 이들의 노예 사냥이 하도 기승을 부려서 지주들까지(...) 전부 노예로 끌려다가시피 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한동안 드네프르 강 일대가 사람이 살지 않는 공백지가 되다시피 했다. 코사크들은 이 공백지를 접수한 후에 러시아와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온 도망 농노들을 받아들인 후 세력을 키우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 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농노제가 대단히 악랄했음에도 불구하고 농노들의 반란이나 소요가 적었던 이유가 노예로 납치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농노로 사는게 나을 거 같아서....였으니 할 말 다했다. 주로 상품 가치가 높은 처녀들이 납치의 주 타겟이 되었고, 어린아이들은 어차피 끌고 가봤자 병들어 죽기 쉽다는 이유로 납치하지 않고 바로 밟아죽였다고 한다.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만 해도 1474년부터 1694년까지 매년 평균 2만명 가까이가 크림 타타르 전사들에게 납치되거나 살해당했다니 당시 차라리 농노로 살기를 택했던 사람들의 공포감이 이해가 될 정도이다. 또한 국가적인 차원에서 인구가 지속적으로 유출되는 모양새이다보니 러시아 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제국 입장에서는 국력성장을 막는 주요 요인이기도 했다.

크림 칸국과 오스만 제국의 관계를 깨뜨린 건 러시아였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 즉 부동항을 찾아 헤매던 러시아는 처음에는 발트 해에 관심을 보였지만 이내 흑해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흑해 북쪽 해안지대를 차지하고 있던 크림 칸국을 정복하기로 했던 것. 이에 신하국의 멸망을 좌시할 수 없었던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공격에 맞서게 되는데, 이것이 러시아-튀르크 전쟁(줄여서 러-투전쟁)의 시작이다. 하지만 1768년에서 1774년까지 계속된 1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은 패배, 1774년 러시아와 퀴취크카이나르자 조약을 체결하여 카파를 할양하고 크림 칸국의 독립을 인정했다.[7]

하지만 1783년, 러시아는 크림 칸국을 무력으로 정복한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조약 위반이라며 러시아에 항의했지만,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의 항의에 총칼로 답변. 이에 1787년부터 1792년까지 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벌어지나 역시 오스만 제국이 패배했고, 1792년 러시아와 이아시 조약을 체결해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크림 칸국 병합을 인정하고 추가로 예디산[8] 지역을 러시아에 할양했다.

덧붙여 마지막 칸으로 서유럽식 군제 개혁을 시행하는 등 나름대로 개혁에 힘썼던 샤힌 게라이의 최후도 비극적이었다. 1783년 러시아군에 의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져 1787년까지 감금당했다가 이후 감금에서 풀려나 태어났던 에디르네로 돌아오지만 이내 러시아 군을 끌여들였다는 죄목으로 오스만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코스탄티니예로 끌려가 같은해 로도스에서 참수되고 만다.

그런데 러시아로서는 나름대로 이게 생존이 걸린 문제였던 것이, 부동항이고 뭐고 떠나서 크림 칸국의 주요 약탈지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였기 때문이다. 특히 약탈 목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노예였는데, 오스만 제국과 이탈리아를 비롯한 지중해 각지에 공급되는 백인 노예의 상당수는 크림 칸국이 강제로 잡아온 러시아나 폴란드-리투아니아 출신 노예였다. 노예 납치 산업이 얼마나 흥했는지 카파의 부유한 타타르 유력자들은 가난한 크림 타타르족에게 말과 무기를 빌려주고, 납치한 노예를 이자로 납부하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인간적인 사업까지 번성했다.[9] 이들의 등쌀 때문에 러시아인들 및 폴란드-리투아니아인들은 방비를 위해 방책을 세우는 등 엄청난 고생[10]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럼에도 불구하고 3세기 동안 수백만 명이 노예로 잡혀 갔고, 한 번은 무방비 상태의 모스크바가 공격당해 10만 명이 잡혀가기도 했다. 러시아인이나 우크라이나인들 입장에서 보면 이가 갈릴 만도 하다만... 사실상 오늘날의 크림 타타르인들은 납치된 러시아, 우크라이나인 여성들과 타타르족 남성들의 자손이므로, 우크라이나인들은 현대 크림 타타르인에게 악감정을 갖지는 않고 있다. 정작 토크타미쉬와 함께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들어온 립카 타타르인들은 근대까지도 현지인들과 별로 혼혈이 되지 않았다...

이후 크림 반도의 타타르족들은 러시아 제국 정부와 중간관리자로 파견한 타타르스탄 카잔의 타타르 관리들 사이에서 이중으로 시달리며 19세기에 들어 몇차례 대대적으로 고향에서 시베리아나 캅카스, 오스만 제국령으로 강제 추방 당하다가 20세기 들어와 러시아 혁명도 지나고 이오시프 스탈린시절에 위험 민족으로 낙인 찍혀 아예 민족 전체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하며, 이 와중에서 1/4 정도가 굶거나 얼어 죽는 큰 비극을 겪었다. 소련이 망한 이후에야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타향살이[11] 하던 크림 반도의 타타르인들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유로마이단돈바스 전쟁을 겪으며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꿀꺽하면서 다시 위태로운 상황이다. 당장 가시적인 폭력을 동반한 박해를 다시 시작했다는 확증은 없지만, 일단 우크라이다 중앙 라다(의회)에서 크림 타타르인들을 대표하며 쿠릴타이 의장이었던 무스타파 체밀레프는 터키에 출장 가 있는 사이 러시아가 집어먹은 크림 공화국 정부에 의해 귀국 금지가 떨어지며 졸지에 망명객이 되어버렸다. 카잔아스트라한에 살던 타타르인들은 이반 뇌제가 잔인하게 정복하긴 했지만 차차 러시아 제국 내에서 대우도 좋아지고 어느 정도 자치권도 인정 받았으며, 이는 현대 러시아에서도 존중되고 있다.

3. 군사 및 사회상

▲ 크림 칸국의 수도였던 바흐치사라이(현재 크림 공화국)에 남아있는 칸의 궁전. 바흐치사라이는 크림 타타르인 비중이 가장 높은 지역이다.

크림 칸국의 주민들인 타타르족들은 평상시에는 유목 생활을 하다가 군역의 의무를 이행해야 할 때가 오면, 급히 소집되었다. 그들은 옛날 몽골의 군사들처럼 십진법에 따라 조직되었다. 모든 병사들은 각자 코스(kos)라고 불리는 열 명의 분대에 속했고, 각각의 코스에 타타르인들은 소집이 되면 자신의 말과 호루라기, 해시계, 송곳, 부싯돌, 바늘을 포함한 장비들을 스스로 장만해서 갖추고 나타나야 했다.

이 코스들은 모여서 백 명, 천 명, 혹은 만 명까지의 부대가 되었다. 종군할 때, 타타르 병사들은 오로지 기장이나 분말 상태가 된 고기와 마늘 등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들은 또한 행군하다가 심하게 다치거나 죽은 말의 고기를 작게 잘라서 자신이 타는 안장 밑에 넣어두었다가, 따뜻해지면 날로 먹기도 했다.[12] 자신들의 조상처럼 그들도 굶주림과 추위를 견뎌내는 강인한 전사들이었다.

크림 칸국의 칸들은 천 명이 넘는 수행원을 거느렸고, 궁정의 대신들과 하급 귀족들은 그보다 적은 수의 수행원들을 보유했다. 이 수행원들은 직업적인 군인과 비슷한 것으로, 출정을 위해 전 백성들에게 징집된 국민을 보강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타타르인들은 칸에게 직접 충성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부족을 통치하는 부족장이나 귀족에게 충성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도 먼저 귀족과 부족장들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일반적으로 칸이 이끌 때의 병력은 8만이나 그 이상에 달했다.칼가들은 5만 명을 거느리고, 칼가의 부장인 누르 알 딘은 4만 명을 지휘했다. 그러나 크림 타타르족의 공격은 영토를 얻기 위한 정복이 아니라, 대부분 약탈을 위한 것으로서 그들의 병력은 그보다 더 적었다.[13]

대부분의 타타르 군대는 활과 칼로 무장한 경무장 기병이지만 화승총을 가진 병사들도 있었다. 칸은 6백 명의 총병을 20개 중대로 나누었고, 출정한 경우에는 그만큼을 다시 모집했다. 총병은 두 발로 걸어다니며 싸웠지만, 이동 시에는 대부분 말에 타서 기동성을 높였다.

타타르인은 출정할 때, 개인당 최소한 말 세 필은 가져와야 했다. 프랑스인 여행가인 기욤 보플랑은 그가 직접 크림 칸국을 방문하여 목격한 1630년대, 자신의 책에 크림 타타르인들의 말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 그들(타타르족)이 바크마테스라고 부르는 말은 몸체가 길고 추하게 생겼으며, 야윈 데다 갈기는 무성하고 꼬리는 길게 땅까지 늘어졌다. 그 대신, 속도가 빠르고 이동 중에는 지치지 않아서 자신을 태우고 있는 기수를 온종일 속도를 늦추지 않고 나를 수 있었다. 또, 겨울에 눈으로 덮인 땅에서도 나뭇가지나 식물의 싹, 짚 등 먹을 수 있는 먹이들을 발굽으로 눈을 헤쳐 찾아내 먹을 수 있었다.

물론 모든 타타르인들이 작고 야윈 바크마테스만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보플랑에 따르면 부유한 타타르인 족장들은 투르크와 아라비아에서 들여 온 좋은 말들과 경주용 말까지 따로 가지고 있다고 했었다.

일반적으로 타타르인들은 별다른 갑옷이나 투구를 걸치지 않았지만, 부유한 타타르인들은 투구를 쓰고 사슬 갑옷을 입었다. 라멜라 아머나 브리건딘(사슬 갑옷) 같은 갑옷 대신에 사슬 갑옷을 사용한 것은 서구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타타르인들의 주요 무기는 합성궁이었고, 보플랑에 따르면 각자의 타타르 병사들은 18개에서 20개까지의 화살이 들어간 화살통을 휴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13세기의 몽골인들이 최소한 40개에서 60개의 화살이 들어간 화살통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으로 볼 때, 그보다는 더 많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합성궁 이외에도 타타르인들은 굽은 기병도와 허리에 찬 단도, 또는 굽은 단도와 창과 방패를 휴대했다. 드물었지만 권총이나 화승총 같은 화약 무기도 소지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타타르인들은 화약을 그다지 많이 사용하지 않았으며, 대부분 생산된 화약들은 오스만 제국에 수출했다. 그들은 총기의 느린 장전과 연사 속도 때문에 총보다는 활을 더 선호했다.

귀족들은 자기 말의 발굽을 보호하기 위해서 가죽으로 만든 긴 양말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보통 크림 칸국의 말들은 발굽에 편자를 박지 않았다. 그래서 타타르족은 눈으로 말발굽을 보호할 수 있는 겨울에 원정을 떠나기 좋아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눈이 없는 건조한 겨울에는 원정을 하지 않았다. 타타르족은 강의 폭이 아무리 넓어도 강을 건널 수 있었는데, 병사들은 갈대로 뗏목을 만들어 그 위에 장비들을 놓고, 말꼬리에 묶어서 말들을 주인들의 인도하에 강 건너편으로 헤엄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칸과 귀족들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타타르족은 전원이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고 느린 병참로가 없어서 진격 속도가 굉장히 빨랐는데, 1689년 카플란 기레이가 거느린 타타르 군대는 늪이 많은 지형에서 엿새 동안 190킬로미터를 진군했다. 타타르의 말들은 훈련이 잘 되어 있어서 기수가 말에서 내리기 전까지는 소변을 보지 않았다. 군대의 정지 신호와 행군 신호는 모두 호루라기로 내렸다. 타타르 병사들은 밤새 엄밀하게 망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기습하기란 대단히 어려웠고, 장소가 좁은 곳이나 강어귀의 수로가 아니라면 그들을 패배시키기란 쉽지 않았다.

약탈이 끝나면 타타르 병사들은 약탈한 물건을 수레나 말에 싣고 다시 본국으로 귀환했다.


  1. [1] 타타르어로 '크름'이라고 읽는다.
  2. [2] 크림 타타르어로 바으차사라이(Bağçasaray). 우크라이나어로는 바흐치사라이(Бахчисарáй).
  3. [3] 케레이트족의 후손이다.
  4. [4] 하지만 쇠퇴기에 처한 킵차크 칸국이 몰락하고 크림 칸국이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리투아니아는 영토의 많은 부분을 크림 칸국에게 약탈당하고 의도와는 다르게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국력이 쇠퇴하는 계기가 된다.
  5. [5] 봉신국으로 복속한 것에 대한 오스만의 대우는 상당히 좋았던 편으로 동전을 주조하고 고유의 문장과 법을 사용하는 등 독립이나 다름없는 자치를 누렸으며 칸은 제국의 재상 위이자 술탄 다음으로 2인자 취급을 받았다. 후에 칸의 반란으로 위치가 강등되기는 하였으나 재상과 동급이 된 것 뿐이었다. 이는 오스만 제국의 신하국들 가운데 이슬람 국가가 크림 뿐이었다는 데에서 기인하는데, 실제로 오늘날 루마니아 및 몰도바에 해당하는 왈라키아나 몰다비아, 헝가리 등은 모두 기독교 국가였다. 이 외에 바르바리 해적들도 있기는 했지만, 이쪽은 '신하' 는 틀림없었지만 '신하국' 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의 조직을 이루지는 못했다.
  6. [6] 물론 그 대가로 오스만 제국이 전쟁을 벌일 때 군대를 보내주어야 했는데, 크림 칸국이 보낸 타타르 기병대는 오스만 제국이 전쟁을 벌일 때마다 큰 도움이 되었다. 다만 오스만을 군사적으로 돕는 것은 유별난 것이라기보다 왈라키아, 몰다비아 등 오스만의 다른 신하국들에게도 의무화된 것이었다. 특이한 부분은 다른 신하국들보다 군사를 더 보낼 의무가 있었지만 연공은 바치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만큼 크림의 기병대가 오스만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볼 수 있겠다.
  7. [7] 다만 당시 오스만 제국의 황제는 칼리프를 겸했고 크림 칸국은 이슬람 국가였기에, 종교적인 영향력은 남았다.
  8. [8] 드네스트르 강과 남부그 강 사이에 위치한 현 우크라이나 남부 흑해 연안 지역.
  9. [9] 정작 이슬람 율법에서는 이자를 간통보다도 훨씬 더 나쁜 죄악으로 분류함에도 이런 사업이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노예 납치가 크림 칸국의 경제의 중요한 근간이었다는 것의 의미할지도...
  10. [10] 16세기 초를 예로 들면 흑해도 아니고 발트 해 연안의 빌뉴스에서 성벽을 지속적으로 보강해야 했을 정도였다.
  11. [11] 공교롭게도 고려인들과도 강제 이주 당한 지역이 비슷했다.
  12. [12] 이것이 타르타르 스테이크의 원조이다고 한다.
  13. [13] 주요 약탈 대상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그들에게 복속된 카자크 족이었다. 단 카자크 족은 크림 칸국에 대한 약탈원정을 여러번 벌이기도 했다. 솔직히 사회경제적인 실질적 생활상의 역사적 발전으로선 타타르와 카자크는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영향을 주며 서로를 만들어 준 관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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