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 헤이에르달

Thor Heyerdahl

노르웨이의 모험가, 인류학자

국적

노르웨이

출생

1914년 10월 6일
노르웨이 라브비크

사망

2002년 4월 18일(87세)
이탈리아 콜라 미케리

출신 대학

오슬로 대학교

1. 소개
1.1. 콘티키 호
1.2. 라 호
1.3. 티그리스 호
2. 비판점
3. 의의
4. 기타

1. 소개

노르웨이모험가이자 인류학자, 역사학자, 지리학자.

자신의 학설을 증명하기 위해 실제로 여러 모험을 감행했다. 이후에도 이주자들이 배를 타고 문명과 문화를 전달했다고 믿고는 이를 증명하겠다고 세계 각지의 유적을 탐사하고 유물을 연구하며 지내다가 2002년 사망했다.

노르웨이 해군의 프리드요프 난센급 이지스 구축함 중 한 척이 헤이에르달을 기려 '토르 헤이에르달'로 명명되었다.

1.1. 콘티키 호

폴리네시아 섬에 어떻게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는지는 미스테리였는데, 헤이에르달도 이 미스테리를 해명하는 연구에 뛰어들었다. 그러던중 헤이에르달은 남미 페루에서 폴리네시아 섬과 비슷한 석상을 발견했고, 식물을 부르는 이름이 비슷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폴리네시아 사람들의 기원은 남미에 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학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원시적 배로는 남미에서 태평양의 섬까지 가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헤이에르달은 '내가 직접 배를 타고 남미에서 태평양까지 가보자.'는 생각으로 남미에서 자생하는 발사나무 등 재료로 잉카 시대 배를 재현하여 콘 티키라는 이름을 붙인 뒤 페루에서 이스터 섬까지 가는 대장정을 시작했다.

1947년 4월 28일, 동료 5명과 함께 페루의 카야오에서 출발하여 예인선으로 훔볼트 해류를 넘은 다음 이스터섬을 향해 움직였다. 훔볼트 해류를 넘은 것 이외에는 기계동력을 일절 쓰지 않고 오로지 해류와 바람만으로 배를 움직여 정처 없이 나갔기 때문에 항해라기보다는 표류에 가까웠다. 식량과 식수 문제는 내리는 비와 낚시로 해결했다. 어자원이 풍부한 곳을 통과했기 때문에 작은 물고기를 미끼로 낚시를 하는 것만으로도 항해기간 동안 식생활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물론 생선만 먹은 게 아니라 육지에서 챙겨간 식량도 꽤 있었다. 미 해군에서 이런 물자를 꽤 대주었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메뉴가 있다고 히히덕거리는 에피소드도 있다.

항해 102일 만에 콘티키호는 예정한 목적지는 아니었지만 타히티에서 동쪽으로 800 km 정도 떨어진 라로이아 산호초에 도착해 남미에서 태평양의 섬들까지 잉카식의 배로 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였다. 콘티키호 모험이 성공하여 헤이에르달은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고, 콘티키호의 모험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콘티키>는 1951년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헤이에르달은 이때만 해도 박사 학위가 없었던 탓에, 학계는 박사도 아닌 젊은이가 학계의 정설을 흔들려 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헤이에르달은 남미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폴리네시아의 원주민들의 조상이 되었다는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훗날 DNA조사를 해본 결과 폴리네시아인들의 조상은 대만 섬, 말레이 반도에 살던 사람들이라고 밝혀졌다.

1.2. 라 호

헤이에르달은 아즈텍 문명이집트 문명의 유사성에 관심을 옮겨, 이집트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아즈텍을 세우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고대 이집트의 갈대배를 재현한 '라'를 타고 1969년 모로코의 사피를 출발해 서인도 제도로 항해를 시작했다. 그런데 서인도 제도 근처에 도달하긴 했지만 폭풍으로 결국 배가 가라앉고 말았다. 헤이에르달은 이듬해 다시 '라2'라고 이름을 붙인 갈대배를 타고 재도전해 서인도 제도의 바베이도스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1.3. 티그리스 호

태평양대서양을 횡단하는데 성공한 뒤 헤이에르달은 이번에는 인도양에 도전해서 메소포타미아에서 인도까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고대 갈대배를 재현한 '티그리스'를 타고 1977년 항해에 도전했다. 그러나 홍해에서 국제분쟁이 일어난 탓에 항해는 홍해 입구에서 멈춰야만 했다.

2. 비판점

모험가로서는 열정적인 사람이 분명하지만, 학자로서는 문제가 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우선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콘티키호 탐험을 두고 남미에서 태평양의 섬까지 고대의 배로 여행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지만, 콘티키호가 아니라 예인선의 힘으로 훔볼트 해류를 넘었기 때문에 과연 고대인들이 옛 시절에 훔볼트 해류를 건너 항해할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실제로 헤이에르달 이후 같은 항해를 고대 선박만으로 시도하던 사람들은 모두 훨씬 북쪽으로 떠밀려갔는데, 오히려 그런 지역에서는 헤이에르달이 남미의 영향이라고 주장한 것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또 다른 문제는 사실 헤이에르달이 만든 콘티키호는 '고대'의 배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헤이에르달의 배는 원주민들이 유럽인과 접촉한 후 유럽 선박들을 본따 개량한 형태를 본딴 것이고, 방향 조절을 위해서는 아예 원래 뗏목에는 없던 타륜을 사용했다. 즉 콘티키호의 항해가 성공했다고 해서 고대 남미인들의 배로 같은 일을 할 수 있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헤이에르달의 콘티키호 모험이 과연 실험항해로서 가치가 있는지는 당시부터 말이 많았다.

헤이에르달 본인은 예인선을 사용한 것이 1500년 전 페루인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는 항만교통사고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뗏목은 원래 조종이 불안정하므로 자칫 항구를 벗어나면서 다른 배와 부딪힐까 염려했다고. 실제로도 4300마일 여정 중 예인선이 끌고간 것은 50마일뿐이었다. 또한 키에 대해서도 원래 페루 원주민은 당연히 폴리네시아의 존재를 모른 채로 무작정 먼곳으로 항해를 떠났는데 우연히 폴리네시아에 도착한 반면에, 헤이에르달은 명백히 폴리네시아를 목적지로 하고 떠났으므로 항로를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명으로도 문제는 여전히 남았다. 폴리네시아가 무슨 거대한 대륙이 아니고 망망대해 남태평양에 작은 섬이 드문드문 흩어진 정도에 불과한데, 페루 원주민들이 폴리네시아의 존재도 모르고 정확한 항로를 잡을 수 있는 기술도 없이 무작정 대양으로 항해를 떠나서 수천 마일 항해 끝에 운좋게 폴리네시아 섬에 언어 걸렸다고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 폴리네시아의 식민지 개척 과정을 봐도 3일 이내 거리에 있는 섬들을 따라 순차적으로 식민지가 확대되었지, 밑도 끝도 없이 대양을 수천 마일이나 휙 건너간 경우는 없다.

콜럼버스의 탐험만 해도 인도의 존재를 알았고,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면 큰 부를 얻을 수 있었으며,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경쟁 구도 때문에 비교적 쉽게 후원을 얻을 수 있었고,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도 알았으며, 장거리 원양 항해가 가능한 선박과 항해기술을 갖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 얼마나 항해해야 육지가 나오는지 알 수 없었기에 망망대해 대서양으로 항해하기는 미친 짓 취급을 받았고 그래서 죄수들로 선원을 충당해야 했다.

하지만 실제 인류 역사상 이런 말도 안되는 자살행위에 가까운 항해는 의외로 꽤나 많이 있었다. 최초로 빈란드아메리카를 발견한 바이킹들도 그렇고, 오늘날 하와이 원주민들은 DNA 검사 결과 폴리네시아인인 타히티 원주민들이 기원임이 밝혀졌다. 하와이는 타히티에서 북쪽으로 무려 4300 km 이상 떨어져 있고 그 사이는 망망대해 태평양이다. 그럼에도 타히티 원주민들은 이런 무모한 항해를 시도했고, 실제로 이주에 성공했다. 페루인들이라고 이런 항해를 하지 말란 법이 있는가? 이미 인류역사상 이런 일이 여러 번 있었으니 페루인들도 이런 항해를 시도했으리라 가정하기가 무리한 일은 아니다. 결론은 틀렸지만 가정 자체가 말도 안된다는 것은 옳지 않다.

또한 키 문제는 고대 문헌을 보고 발사나무 뗏목을 만들었지만 문헌에 표현된 키를 어떻게 조작해야 할지 몰라 결국 일반적인 키를 달았다. 이 전통 키가 어떤 거냐면 뗏목 통나무 틈 사이에 판자를 끼어 방향을 조작한다는데 상식적으로 좌우 꼼짝도 할 수 없는 통나무 틈에 낀 판자가 어떻게 방향을 조정한다는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항해 중 우연히 뗏목 틈 사이로 판자를 떨어뜨렸다 주워 올렸는데 방향이 조정되는 걸 보고 파악했다. 하지만 뗏목 조종에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대원들 모두 기존의 키 사용에 익숙해져서 그냥 일반 키를 썼다고.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서 DNA 조사 결과가 나온 지금의 인류학, 고고학, 역사학, 유전학 등 연구에서는 헤이에르달의 이론을 완전히 부정한다. 태평양 섬에 사람들이 이주한 과정은 (남미가 아니라) 동남아시아에서 멜라네시아로, 멜라네시아에서 다시 폴리네시아로 이어졌다고 보는 설이 일반적이다. 또한 폴리네시아인들은 카누를 이용했고, 바람을 이용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남미에서 폴리네시아로 이주했다는 헤이에르달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정설로 굳었다. 헤이에르달은 폴리네시아인들의 조상이 동쪽에서 왔다는 전설을 근거로 들었지만, 조사해보니 오히려 전설에는 서쪽에서 왔다는 암시만 있었고, 헤이에르달이 주장한 언어적 공통점 등도 연구 결과 모두 부정되었다.

상세한 연구가 있기 전에도 대부분 학자들은 헤이에르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미 문화의 공통적인 요소들이 폴리네시아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남미에서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사용한 도기 종류도 (도기를 만들 재료는 풍부했음에도 불구하고)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았고,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 역시 남미 쪽과는 완전히 계통이 다른 데다가 남미 쪽보다 형태가 비효율적이었다. 결국 폴리네시아인들이 남미에서 왔다는 근거는 고사하고 고대에 교류가 있었다는 유력한 근거가 될 만한 것조차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헤임에르달의 첫 가정부터 억지였던 것이다.

또한 이집트 문명과 아즈텍 문명의 유사점에 대해서는 양자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 너무 크기 때문에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게 일반적 시각이다. 헤이에르달은 카나리아 제도 테네리페섬에 있는 귀마르의 피라미드를 죽기 전까지 연구하여 이집트에서 멕시코로 문명이 전수되었을 가능성을 열심히 파헤쳤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던 것 같다. 사실 이집트의 피라이드와 남미의 피라미드는 단지 피라미드형 석조 구조물이란 점 이외에는 구조나 용도 면에서 사실상 전혀 공통점이 없다.

3. 의의

어쨌든 열정적인 모험가로서, 그리고 자신의 학설을 증명하기 위해 실제로 모험을 감행한 그의 열의에 대해서 만큼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시각도 많다. 저 위에 언급한 다큐멘터리나, 모험계획과 과정을 정리해서 책으로 만든 동명의 실화소설 콘티키 등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목숨이 위험했던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신이 믿는 바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토르 헤이에르달의 노력이 아주 성과가 없지는 않았는데, 비판점 부분에서 보듯이 폴리네시아남아메리카 전통 양식의 배를 이용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폴리네시아에서 아메리카까지 유럽인 도래 이전의 기술력으로도 충분히 항해할 수는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서기 11세기 폴리네시아 유적에서 고구마가 발견되었는데, 그 전래과정은 분명하지 않지만 폴리네시아 원주민들이 남아메리카까지 도달했던 증거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단, 토르 헤이에르달의 주장처럼 남아메리카 원주민이 폴리네시아에 도착한 것으로 보는 학자는 거의 없고 폴리네시아인들 쪽에서 남아메리카에 도착했다가 돌아왔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바다 바로 옆에서 먹고 자면서 해양 환경을 관찰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이득이다. 당시에 연구가 미진했던 고래상어를 가까이 관찰하고 각종 어류를 다양하게 채집하기도 했다.

그 외에 에리히 폰 데니켄 같은 유사역사학자가 헤이에르달의 학설을 취사선택해 초고대문명설썰을 푼 적이 있었지만 이건 헤이에르달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헤이에르달은 비록 학자로서는 아마추어였고 그의 학설들도 부정되었지만, 그는 나름대로 학자들과 교류하며 진지하게 학문적인 연구를 하려고 했지 유사역자학자들처럼 의도적으로 정보를 왜곡하지는 않았다.

4. 기타

2014년 10월 6일 구글은 로고로 헤이에르달의 탄생 100주년을 기렸다.

노르웨이 해군의 이지스 호위함인 프리드요프 난센급 5번함은 이 사람의 이름을 따 토르 헤이에르달함이라 명명되었다.

콘티키 탐사대원 중 헤이에르달과 크누트 호클란트, 톨슈타인 라비는 2차대전에 참전했었는데 그중 크누트는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 저지 작전에, 톨슈타인은 티르피츠 전함의 격침에 참전한 경력이 있다.용자가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크누트는 독일이 노르웨이 공장에서 핵분열 통제에 필수적인 중수를 확보하는 것을 저지하는 작전에 참여했고[1], 톨슈타인은 티르피츠 전함 근처에 잠복하여, 동정을 실시간으로 무전 보고하였다.

이 탐사대원 중 항해경력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중에 성공했을 때 항해 경험 때문에 성공한 거라는 말을 듣기 싫어서라고. 대신 해로 파악은 해야 했기에 그 정도 지식은 가진 사람을 뽑았다.

출발 전 지원받을 때 영국 해군에게서 상어 퇴치용 가루약을 받았는데 진짜 효과 있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이 '사실은 댁들이 시험해줬으면 함'이었다(...). 이후 항해 중 에피소드를 보면 딱히 효과는 없었던 듯.


  1. [1] 후일 영화 ‘텔레마크 요새’로 영화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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