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

폼페이 (이탈리아)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름

한글

[1]

영어

[2]

프랑스어

[3]

국가·위치

이탈리아 나폴리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97년

등재기준

(iii)[4], (iv)[5], (v)[6]

지정번호

829

1. 개요
2. 역사
3. 폼페이 최후의 날
4. 발굴
5. 관광
6. 기타

1. 개요

Pompeii

이탈리아 캄파니아 나폴리에 위치한 도시이자, 역사적으로 유명한 고대 로마의 도시. '멸망한 도시들' 가운데 손꼽히는 도시로[7], 본래 농업상업이 활발했으며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로 매우 번성했던 도시였다. 그러나 서기 79년 8월 24일[8]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인해 단 18시간 만에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오랫동안 역사에서 소멸한 한 도시 중 하나로 1592년 폼페이 위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건물과 회화작품들이 발굴되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이탈리아에서 관광업계 관련이 아닌 이상 그냥 '폼페이'라고 부르면 지금 사람들이 살고 있는 폼페이 신 시가지를 가리킨다. 유적 쪽 폼페이는 Scavi di Pompei (스카비 디 폼페이)라고 부르며, 직역하면 '폼페이 발굴지'라는 뜻이다. 캄파니아 지역 사철인 치르쿰베수비아나로 방문 시에도 반드시 폼페이역이 아닌 스카비디폼페이역에서 내려야 쉽게 찾을 수 있으니 유의.

2. 역사

본디 폼페이는 로마보다 앞선 역사를 가졌다고 알려진 도시국가였다. 최소한 BC 8~7세기경 폼페이는 그리스인들의 세력하에 있었는데, 이는 로마의 건국 시기와 비슷하다. 에트루리아를 BC 6세기에 몰아냈다는 역사적 증거가 있다. 폼페이·헤르쿨라네움·스타비아이가 속했던 동맹을 누케리아(현재의 노체) 시가 주도했다. 이 시기 그리스 식민지 출신들이 다 그랬지만 로마보다 문명도가 높았던 상업도시로 여겨지고 있다.

폼페이가 역사 기록상에 처음 언급된 것은, BC 310년 제2차 삼니움 전쟁 때 로마의 함대가 사르누스 항에 상륙하여 누케리아를 공격하려다 실패한 일이었다. 삼니움 전쟁이 끝날 무렵 캄파니아는 로마 동맹의 일부가 되었고, 그곳의 도시들은 로마의 동맹시(同盟市)가 되었다. 그러나 이 도시들이 완전히 종속되어 로마화된 것은 동맹시 전쟁을 치른 후이다. 결국 술라에게 BC 89년에 정복되었다.

하늘에서 바라봤을 때 물고기 모양의 도시로 설계 된 계획도시로, 원형경기장을 물고기의 눈으로 보고 왼쪽 위의 "미스테리 빌라"를 꼬리 지느러미로 보면 된다. 현재의 관광이나 당시의 도시 입성, 퇴성도 모두 입으로 들어와서 꼬리로 나오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원수정 시대에 들어서는 포도주가룸[9] 생산으로 번창했으며, 검투사 경기가 상설적으로 열리고 이집트의 이시스 여신을 모시는 신전과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될 정도로 작지만 번화한 도시였다.[10]

도시 행정은 본국 로마 정부 시스템을 모방하여 자치 원로원, 시민 집회에서 선출되는 2명의 자치 집정관[11], 일반행정을 담당하는 자치 조영관 등을 두었으며, 자치 집정관과 조영관 선거가 있을 때는 치열한 선거운동이 있었음이 유적에 남은 선거운동 벽보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3. 폼페이 최후의 날

폼페이로 쏟아진 베수비오의 영향권 추측 지도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된 폼페이 최후의 날(멜버른 박물관 제작)

통념과는 달리 로마인들도 화산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는데, 당시 로마령이던 시칠리아 섬에 당시도 활화산이었던 에트나 화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베수비오 화산이 당시에 수백년 간 폭발하지 않은 상태여서, 로마인들이 겉보기에 화산같지 않아보이는 화산이 잠에서 깨어 분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몰랐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게다가 폼페이는 이탈리아 최대의 화산인 베수비오 화산과 대략 10km 거리에 만들어진 도시였고, 이는 사실상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껴안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폼페이는 화산폭발이 일어나기 17년 전인 서기 62년에 대규모 지진이 발생해 포룸, 유피테르 신전, 목욕탕 등 공공건물을 포함한 대부분의 건물이 지진 피해를 입었으며 화산폭발 당시에도 그 피해가 다 복구되지 않은 상태였다. 지진 직후 네로가 이 곳을 시찰하면서 '와, 여기 노답이네, 이 도시는 포기하면 안 될까?'라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인지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한 날, 서기 79년 8월 24일은 불의 신 불카누스[12]을 기념하는 축제일이어서 도시 내에서 축제가 진행 중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상한 구름이 밀려오자 시민들이 동요했으며, 이에 플리니우스 등이 해변으로 가서 조사를 하던 중 화산이 폭발했다. 분화로 화산재가 하늘을 덮은 뒤 18시간 동안 무려 수백억 톤에 달하는 뜨거운 화산쇄설류가 도시로 쏟아져 내려왔고 폼페이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도시는 3m가량의 화산재로 뒤덮였고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렸다.

이것으로 폼페이 주민들이 모조리 몰살당했다고 알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오해다.[13] 실제로는 당시 폼페이 주민은 6,000명에서 20,000명으로 추정되는데, 사망자는 대략 2,000명 정도로만 추산된다고 한다. 즉 나머지 최대 18,000명가량은 어떻게든 도시를 빠져나와 피신했다는 뜻이다. 그래도 최소 10%의 인구가 사망할 정도였으니 부상자는 더 많았을 것이고, 괴멸적인 피해라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어쨌든 몰살은 오해다. 사실 인명피해는 폼페이 옆 도시인 헤르쿨라네움 쪽이 더 컸으나, 이쪽은 분화 직후 화산재 구름 방향에 빗겨갔으나 나중에 화성쇄설류와 화산재에 묻혀버려서 덜 유명하다.[14] 이 두 도시와 더불어 인근에 있던 오플론티스와 스타비아이도 함께 화산폭발로 인한 피해를 입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화산 분출물이 남동쪽으로 집중되어서, 나폴리를 비롯한 북서쪽 지역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물론 로마에서도 이 폭발에 대해 연구했던 사람은 있어서, 백과사전격인 '박물지'를 남긴 문인이었던 가이우스 플리니우스[15] 제독이 이 폭발을 보고 기록한 것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大플리니우스는 당시 폼페이 인근 미세눔에 주둔하던 해군 함대 사령관이었는데, 폭발을 기록한 후 휘하 함대를 이끌고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주민들을 구조하다가 화산 가스에 중독되어 향년 56세로 현장에서 순직했다.[16] 그 외에 나폴리 만 건너편에서 화산 분화를 지켜보던 18세의 조카 小플리니우스[17]가 이 모든 일을 기록에 남겨 현재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그는 베수비우스 산 화산폭발에 대한 글을 타키투스의 〈역사〉에 기고했다.

시기적으로는 10년간 로마를 안정화 시켰던 베스파시아누스가 죽고 티투스가 황제가 된 지 2달 만에 벌어진 참사였다. 티투스 황제는 짧은 2년의 재위 동안 베수비오 화산 폭발, 로마 화재 등의 여러 재앙 속에도 콜로세움을 완성시키는 등 재건에 힘쓰다가 세상을 떠났고, 그 뒤로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즉위했다. 그리고 그가 살해당한 후 오현제 시대가 열린다.

현대의 베수비오 화산의 모습

그후로도 베수비오 화산은 종종 분출하다가 1944년의 분출[18] 이후로는 조용하지만 언제든지 다시 폭발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탈리아 정부는 베수비오 화산 연구센터를 만들어 마그마 굄의 축적상황 등을 수시로 관측하고 있다.

4. 발굴

화산 폭발로 한 번 망한 이후, 장장 15세기까지 폼페이의 존재는 사람들에게서 잊혔다. 그러다가 서기 1594년 이탈리아에서 수로 건설을 목적으로 땅을 파다가 폼페이의 유적이 발견되면서, 무려 14세기만에 폼페이가 다시 세상에 드러났다.

이후 18세기인 1748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여러가지 유적이 발굴되었으며, 한창 전성기였을 때 갑자기 멸망해버려 전성기 로마의 유물과 유적들이 잔뜩 남아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엄청난 가치가 있어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발굴되고 있다고 한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3분의 2 정도밖에 발굴되지 않았다 할 정도.

좋지 않은 이야기도 있는데 빙켈만이 발굴 현장으로 갔다가 인부들이 제멋대로 파헤치는 것도 모자라 장신구가 나오면 몰래 빼돌리거나 왕에게 진상을 하는 바람에 간언했다가 쫓겨나 인부를 매수해 기록했다고.

(당시 사망한 로마인들의 화석)

보다시피 이 화석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형태의 화석이 아니다. 기존의 화석은 압력에 의해 신체의 단단한 부분[19]이 그대로 돌과 같은 성분으로 변성해 만들어진 것으로, 화석 자체가 생물체의 잔재이다. 반면 폼페이 화석은 화산재에 묻힌 시체가 부패 등 풍화과정을 거쳐 사라진 후, 마치 거푸집처럼 남은 화산재 속 빈 공간에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석고를 부어 만든 형태의 일종의 석고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저 사진의 사람 형체의 물질은 진짜 사람의 잔재는 아니고 단지 그 형태를 본을 따서 만든 것.[20] 물론 뼈 같은 부분은 남아 있으니 연구하기에 문제될 건 없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때때로 사람이 아닌 동물의 화석도 발견된다고 한다. 그 외에 나무, 문, 가구, 수레 등 무생물을 되살릴 때에도 응용되고 있다.

이 석고를 만들게 된 과정도 극적인데, 폼페이 발굴 당시 오랫동안 묻혀 있어서 건물이나 도로, 물건 등의 보존 상태는 매우 좋았는데 사람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것을 이상하게 여기던 중, 1860년 이탈리아 국왕이 발굴 책임자로 임명한, 고고학자인 주세페 피오렐리가 흙더미 사이사이에서, 주로 건물마다 발견되는 빈 공간에 의문을 가지고 거기에 석고를 부어보자 사람의 형상이 드러났다고. 최근에는 석고 대신 유리 섬유를 부어넣어서, 형태를 고스란히 보존하면서도 내부의 유골이나 공반유물도 같이 확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물론 내부가 투명하게 비치는 크리스탈 조각상 같은 모습을 생각하면 오산. 작업공정상 그렇게 깔끔하게 나오진 않는다.

이런 석고들 외에도 탄화되어 표면에 빵집도장까지 생생히 찍혀 있는, 벽돌 오븐에서 발견된 빵과 탄화된 호두, 탄화된 무화가 열매가 그릇째로 담긴 채로 발견되기도 했으며, 달걀이나 화려한 보석류도 발굴되었다. 특히 보석류는 유난히 같은 모양이 많아서 당시 인기있는 형태는 대량생산되어 팔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이 발굴지역은 관광지로 보존되어 있는데, 천년 넘게 화산재에 뒤덮혀 차단되어 있었던 관계로 보존상태가 아주 좋다. 당시 죽은 사람의 모습 또한 남겨져 있는데,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망한 사람의 몸 위에 화산재가 덮어져 굳어진 다음 시신이 썩으면서 생긴 빈 공간에 석고를 부어 흔적이 남은 것이다. 사망 당시의 자세를 비롯해 옷주름과 표정까지 고스란히 남겨져 있어 비극성을 더한다. 당시 화산재에 말 그대로 순식간에 뒤덮여서 그때의 그 표정 하나까지 전부 남게 된 것.

유적이 애초에 땅을 파서 발견되었고, 당연히 땅 속에 나무가 있었을 리도 없고, 이곳에 나무를 심는다거나 하는 한가한 짓을 할 리가 없으니, 유적지 내엔 나무가 전혀 없어서 여름에 매우 매우 덥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무분별한 관광객 유치와 관리 소홀로 2010년에 들어 유적 중 '검투사의 집'이 무너지는 등 여러가지 악재를 겪고 있다. 현재 이탈리아유럽연합과 '폼페이 복원 프로젝트'를 공동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전문 복원 기술은 독일이, 고고학과 역사적 고증은 이탈리아가 그리고 지리와 환경 자문은 영국 옥스퍼드 대학 팀이 책임지기로 하였다.

술집이 매우 많다. 직접 가보면 술집처럼 보이는 게 그다지 없는데, 집 내부에 세숫대야 같은 바(Bar)가 있는 집이 전부 술집이다. 굉장히 외설적인 벽화가 그려진 매음굴도 많은 편이니 어린 아이와 관광올 땐 주의. 2015년 상반기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었던 폼페이전에서도 성행위를 묘사한 벽화 몇 점을 가져와 전시했는데, 초등학생도 입장이 가능한 전시회인 만큼, 이 홍등가 관련 벽화들은 어린이들의 관람을 방지하기 위해 커튼을 친 별도의 공간에 몰아서 전시했다.

2018년 5월에 화석이 아닌 유골이 발굴되었다. # 10월에는 신전까지 발굴되었다.# 12월에 말 유골이 나왔다.#

5. 관광

주로 나폴리에서 가는 편. 사실 폼페이가 워낙 유명하다보니 폼페이를 방문하는 김에 나폴리를 들렀다 오는 경우가 많다.

나폴리역에서 사철인 치르쿰베수비나를 타고 가면 되는데, 노선을 잘 보고 타야한다. 타는 열차가 Pompeii Scavi로 가는 열차가 맞는지 꼭 확인하자. 열차가 굉장히 오래되어 상태가 좋지 않은 점은 감수해야 한다.

역에서 내리고 조금 걸어가면 입구가 나온다. 관광 가이드 투어가 있으나 꽤 비싸다.

6. 기타

영국의 소설가 에드워드 불워 리턴이 1934년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소설을 쓴 바가 있다. 이후 같은 제목을 달고 무려 6편의 영화가 나온 바가 있는데, 가장 최근 작은 2014년에 나온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영화로서, 대략적인 내용은 검투사와 높으신 분 따님과의 로맨스 겸 재난 이야기. 하지만 로마 시대 검투사는 이젠 진부한 소재인데다, 제대로 된 재난 영화도 로맨스 영화도 되지 못해서 반응은 좋지 않다. 18시간 만에 묻혔는데 이야기가 재밌을 리가...

영국의 소설가 로버트 해리스가 '폼페이'라는 소설을 썼다. 작가가 작가인 만큼 역사적 고증에도 신경썼으며, 남자 주인공이 상수도 전문가이고, 화산폭발의 조짐을 수돗물의 변화로 미리 알아내는 등 상당히 특색있는 작품이다.

만화가 양여진이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순정만화를 그린 바가 있다. 지금은 절판되어 구할 순 없지만, 교보문고에서 ebook으로 판매하고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들은 찾아보라.

닥터후에서는 원래 일어날 예정이 없는 사건이였지만, 10대 닥터도나 노블파이로바일들을 막기 위해 베수비오 화산을 폭발시켰다고 나온다. 화산 폭발이 임박해오자, 닥터는 "역사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며 모두 버리고 떠나려 하지만, 도나의 애원으로[21] 카이킬리우스라는 사람의 가족을 살려준다. 닥터후 설정상으로는 volcano(화산)라는 단어도 이때 카이킬리우스가 만들어낸 듯. 즉 카이킬리우스 가족을 살리는 것이 원래 일어났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이 에피에서 조연 "카이킬리우스"으로 출연한 피터 카팔디후일... 같이 출연한 카렌 길런.투닥 투컴패 그리고 이때 카이킬리우스를 구한 일을 마음 깊히 새기기 위해, 즉 "나는 닥터다, 나는 사람을 구한다."라는 메세지를 자신에게 남기기 위해 12대로 재생성할 때의 얼굴로 카이킬리우스의 얼굴을 정했다는 설정까지 덧붙혀졌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3편에서는 길을 잘못 든 제레다야와 옥타비아누스가 폼페이 미니어쳐에 떨어지는데 대리석 흉상이 위험을 알렸지만 못알아듣고 다른 인형들은 전부 도망갔다. 결국 용암에 갇혀 죽을 뻔 했지만 원숭이가 오줌을 싼 덕에 둘은 위기를 모면했다.

유벤투스 FC의 울트라스가 나폴리와의 경기에서 원정온 나폴리 팬들을 상대로 베수비오 화산 걸개로 팬들을 도발하다가 조치를 받은 적이 있다.

다크스트 오브 데이즈의 마지막 캠페인 배경으로, 로마 제국 시민들과 병사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뒷전이고 후손들이 한 사람을 두고 치고 박고 싸우느라 화산쇄설류에 죽기 전에 총격전이나 폭발에 희생양이 생긴다. 지속적인 지진으로 조준이 힘들 때가 많다.


  1. [1] 폼페이·헤르쿨라네움·토레 아눈치아타 고고 지구
  2. [2] Archaeological Areas of Pompei, Herculaneum and Torre Annunziata
  3. [3] Zones archéologiques de Pompéi, Herculanum et Torre Annunziata
  4. [4]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5. [5]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6. [6]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
  7. [7] 다만 고대 폼페이가 멸망했을 뿐이지, 도시 자체는 유적 옆에 재건되어서 사람들이 잘 살고 있다. 현대 폼페이 시를 화산 폭발 당시의 황무지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8. [8] 2018년 10월 보도자료에 따르면, 10월 중순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
  9. [9] 생선을 발효한 발효식품으로, 로마인의 식사에 필수품이었다
  10. [10] 여기서 생산된 가룸 항아리 중 코셔 푸드라고 쓰인 항아리가 출토되었고, 번화가의 낙서 중에 "이곳은 소돔, 고모라와 같다" 라고 쓰인 낙서가 발견되었다.
  11. [11] 본국 로마의 집정관이 '콘술'인 것과 구별하기 위해 '두움비르'라는 칭호를 썼지만 로마 집정관처럼 권표(파스케스)를 든 호위병(릭토르)까지 두었다.
  12. [12] 그리스 신화헤파이스토스에 해당한다. 화산을 뜻하는 영어 단어 volcano(볼케이노)의 어원이 된다. 좀 더 정밀하게 따져보면, 불칸 신의 이름에서 화산을 뜻하는 라틴어 단어 vulcanus가 만들어졌고, 이게 이탈리아어 vulcano로 이어졌다가, 다시 이게 프랑스어를 거쳐 영어로 차용되어 volcano가 됐다고 한다.#
  13. [13] 80년대 초중고 국내 과학 및 지리 관련 교과서에서 화산 폭발 관련으로 언급될 당시, "폼페이에서 약 16,000명이 거의 몰살되었다"고 나오던 적도 있다. 7차 교육과정 당시 두산동아 중학 영어 교과서에서는 20,000명으로까지 나왔다.
  14. [14] 폼페이 유적이 화산재가 2~3m정도 쌓인 반면 헤르쿨라네움은 20m두께의 화산 쇄설물에 파묻혔다. 또 폼페이가 시내의 시민들이 발굴된 반면 헤르쿨라네움은 1980년대에 바닷가에 서 있던 아치 밑에서 수백 구의 해골이 발견되어서 주민들이 피난했다가 밀려온 화산재와 가스로 한꺼번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15. [15] 흔히 大플리니우스로 불림.
  16. [16] 후에 조카 小플리니우스가 쓴 편지를 보면 그의 시신은 수습한 듯 하다. 大플리니우스가 특별한 외상이 아닌 가스 중독으로 사망했다 보니 '너무 평온해서 주무시는 것 같았다'고 적었다.
  17. [17] 트라야누스 황제의 신임받는 신하로 유명하며 비티니아 총독 재직시 트라야누스 황제와 주고받은 편지가 지금까지 많이 남아 있다.
  18. [18] 당시에 미군 항공대가 이탈리아 항복후에 근처에 주둔하다가, 화산재를 뒤집어 쓰고 전투불능 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19. [19] 예시로, 공룡 뼈나 삼엽충.
  20. [20] 화산재가 시체를 덮어서 높은 온도로 시체를 녹여 없애고 그 대신 화산재가 시체 겉에 딱딱한 껍질 형태로 경화되어 화산재 덩어리가 시체 형태로 형성되었다는 카더라도 퍼져 있지만, 전혀 근거 없는 낭설이다. 즉, 석고상이 아닌 화산재 덩어리 형태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21. [21] 울면서까지 "단 한 가족만이라도 살리자"고 애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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